특수성과 그에 대한 사회적 시선 때문인듯... 일단 그려지는 모습 자체가 너무 현실적이라고 생각한게 당장 주 등장인물들의 성별만 바뀌어도 난 이런 전개는 아니었을거라 생각함. 에바가 남자였다면 그는 그 당시 수많은 "평범"한 아빠 중 하나로 별로 조명도 안됐을거임. 에바는 사랑은 없어도 책임감은 있는 사람이니 당연히 케빈을 먹여살리기 위해 돈을 벌고 가끔 의무감에 외식을 권하고 미니골프를 가자고 청하기도 했을거고 그것만으로도 그저 무뚝뚝한 아버지로 불리고 말았을거임. 물론 케빈은 아버지에게서 정서적 공감을 전혀 못받은 아이로 자랐겠지만 그건 흔한 일이니까. 케빈도 그런 에바에게 아쉬움은 느껴도 원망하진 않았을거임. 왜냐면 그건 흔한 아버지의 모습이니까.

케빈이 여자였어도 마찬가지였을거임. 영화 속에서는 프랭클린이 케빈이 막 에바 방에 페인트건으로 낙서하고 아무데나 장남감 화살 날리고 다니는 등 사고를 쳐도 제지를 안함. "보편적"이고 "보수적"인 가족관과 성별관을 가진 프랭클린 입장에서 그건 걍 그 나이 남자애가 가볍게 사고치는 거니까. 근데 여자애였으면 똑같이 행동했을까? 여자아이는 얌전히 놀아야지 하면서 에바 편을 들며 케빈을 더 제지했을거라고 생각함. 그로 인해 케빈의 문제 행동은 억눌러졌을 가능성이 높음. 똑같이 싸패적인 성향을 가졌어도 그게 바깥으로 분출될때까지는 시간이 걸렸을거고 아마 케빈의 싸패적인 성향이 반사회적 행동으로 이어졌을 때에는 이미 성인이 되어 에바가 지켜줘야할 대상에서 제외됐을거임. 즉 에바는 영화에서처럼 케빈이 저지른 행동에 대한 죄책감이나 책임에서 훨씬 벗어날 수 있었다는 거지.

근데 하필 에바가 엄마고 케빈이 아들이기 때문에 영화 속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함. 아이가 부모의 사랑을 갈구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보통 아이는 주양육자의 사랑을 더 강하게 갈구하기 마련이고 사회적으로 주양육자는 엄마로 규정되는 경우가 많음. 그렇기에 케빈은 같은 사랑이라도 에바의 사랑이 더 간절할 수 밖에 없음. 프랭클린이 암만 케빈에게 잘해줘도 케빈에게 있어 프랭클린은 가끔 만나는 사람임.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긴 하지만 케빈에게 있어서 가족이 아닌거임. 가끔 만나는 사람이니까 그에게서 열정적으로 애정을 갈구할 생각이 안 들고 갈구할 필요성도 못 느낌.

만일 프랭클린이 에바가 힘들어하니 자기가 육아하겠다고 육아 휴직을 1년만이라도 내고 에바 대신 전담 케어했으면 완전히 달랐을 거임. 아마 처음에는 반항이 심했겠지만 서서히 케빈의 관심사는 프랭클린으로 옮겨갔을 가능성이 높음. 이제 자기와 함께할 주양육자는 프랭클린이고 그에게서 애정을 받으면 되니까. 하지만 프랭클린이 케빈을 가끔 봤기 때문에 원만해보였던 관계는 프랭클린이 주양육자가 되어보면 또 달라질수 있음. 하지만 적어도 케빈이 애정을 일방적으로 에바에게만 갈구하진 않았을 거고, 엄마와 아빠 모두 케빈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적절한 치료를 받게 하거나 가족 상담을 했을 수도 있었음. 이랬으면 전문가를 통한 꾸준한 사회화 교육 + 케빈과 거리를 두면서 심리적 안정감을 얻은 에바와 케빈과 가까이하면서 문제를 파악한 프랭클린의 협조로 케빈은 어쩌면 그냥 좀 괴팍하고 예민한 아이로 자랐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음.

히지만 에바는 전혀 양육의 준비가 안되어있는 상태에서 그저 사회와 프랭클린에 떠밀려 주양육자를 맡은 상황이고 그가 양육해야할 아이는 그런 불성실한 주양육자의 태도에 민감하게 대응할 수 밖에 없는 아이임. 정서적 결핍을 더 심하게 느끼고 거기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아이라는 거임. 게다가 하필이면 케빈이 느끼는 결핍은 내리사랑에 대한 결핍임.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다고 하고 낳은 정보다 기른 정이 더 큰 게 사람이라고 하지만 최초의 혈연이 주는 안정감과 그가 주는 사랑에 대한 욕구는 어떤것으로도 사실 충족되기 어려움. 특히 에바가 눈앞에 있는데도 그에게 사랑을 못 받는다는 건 케빈에게 있어 엄청난 좌절감으로 다가왔을 거라고 생각함.

타고난 성향에다, 남자아이들의 폭력성에는 비교적 온화하게 수용하는 가정과 사회의 분위기는 결국 케빈이 아주 끔찍하고 반사회적인 범죄로 분노를 터트리도록 만들었음. 난 보면서 조금 안타까웠던 점은 케빈이 좀 감정적으로 결여된 아이이긴 하지만 적절한 교정이 있었다면 적어도 대량 살인마는 안됐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음. 왜냐하면 개인적으로 나는 케빈이 살인이 즐기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음. 난 처음부터 끝까지 케빈이 아아아주 잘못된 방식으로 애정을 갈구 하고 있다고 봤음. 근데 그 모습이 반사회적 성향을 가진 백인 남자아이였기에 대량 학살이라는 방법으로 표출한 것이지, 만일 케빈이 "사회적으로 규정된 압박 속에 자란" 유색인종의 여자아이였다면 같은 행동을 보였을거라고 생각하지 않음. 어쩌면 케빈이 다쳤을때마다 어쩔줄 몰라하는 에바 모습을 보고 계속 아픈 척을 하고 자해를 하는 모습으로도 관심을 갈구할수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함.

마지막에 왜 그랬는지 알려달라는 에바의 말에 케빈이 그땐 안다고 생각했는데 잘 모르겠다고 하잖아. 나는 그걸 보고 케빈이 살인에 죄책감이나 미안함은 안 느껴도 적어도 살인이라는 행위에 회의감은 느꼈다고 생각함. 관심을 받기 위해 그리고 소유할 수 없는 엄마 에바를 영원히 묶어두기 위해 선택한 살인, 처음에는 희열감에 가득 찼을거임. 하지만 그동안 TV에서 웃으면서 자신있게 인터뷰하던 모습과 달리 성인 교도소로 가기전 에바와의 마지막 만남에서 케빈은 눈동자가 흔들리면서 나도 내가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말함. 난 2년간의 면회에도 꾸준히 불성실한 태도를 보인 케빈이 그날에서야 진심을 전한건 그제야 케빈도 깨달아서 그런 것 같았음.

소년원과는 다른 더 험난한 성인 교도소로 간다는 걸 알면서도 떨리느냐고 노력했으니 어차피 거기서도 2년이면 나을 거라며 분노도 걱정도 없이 담담하게 말하는 에바를 보며, 엄마를 영원히 묶어두려고 괴롭게 하려고 나락으로 떨어뜨리려고 그런 짓까지 벌이고 감옥에 왔는데 여전히 엄마는 내가 잡을 수 없구나를 깨달았지 않았을까? 잠깐 엄마 마음에 파동을 일으켰을뿐 엄마는 여전히 묶어둘 수 없는 강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제 성인이 되면 정말 엄마를 더 이상 못볼수도 있는거고 에바도 엄마라는 무게에서 벗어나게 되는 거니까. 그래서 왜 그랬냐는 말에 그땐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땐 그걸로 엄마를 옭아맬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다 (=그게 결국 옭아맨게 나인지 엄마인지 모르겠다)로 나는 개인적으로 해석했음.

하지만 한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거는 그런 케빈을 만든 건 케빈을 사랑하지 못한 에바가 아니라는 거임. 에바는 정말이지 많이 노력함. 슬픈건 "엄마"라는 건 직업이 아니라서 노력하고 업무를 수행하는 것만으로 엄마가 될 수 없다는 것임. 누구보다 노력한 사람에게 능력상 불가능한 일을 못해냈다고 비난할 수 없음. 하지만 한편으로 에바가 노력은 했지만 그 방향이 잘못됐다는 생각도 안 할 수가 없음.

내가 보면서 너무 안타까웠던 것은 왜 케빈과 에바는 더 많은 전문가의 상담이나 도움을 받지 못했을까였음. 그래서 난 여기서 더더욱 프랭클린의 무심함이 싫어지더라고. 프랭클린이 애초부터 에바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깔고 바라보니까 에바는 그 고립감에 더더욱 케빈을 악마화시킬수 밖에 없음. 그게 악순환처럼 돼서 프랭클린은 에바를 무시하고 에바는 그 반향으로 케빈을 더 싫어하고, 그렇게 일방적으로 싫어하는 게 점점 눈에 띠게 보이니까 더더욱 프랭클린은 에바의 판단에 의문을 가지고... 그런 와중에 에바는 케빈의 문제 행동을 잘못된 방식으로 제지하다가 케빈을 다치게 함으로써 케빈이 밉고 케빈의 행동이 잘못된 걸 알아도 지적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 이 상황에서 에바는 미쳐갈 수 밖에 없음.

케빈을 문제삼지 못한다면 어쨌든 자기 자신도 힘드니까 혼자서라도 상담을 받았어야 한데 프랭클린의 시선은 그마저도 불가능하게 함. 사실 프랭클린의 시선이지만 이건 동시에 사회의 시선이기도 했을거임. 분명 에바는 정신적은 스트레스를 굉장히 크게 받고 있고 그로 인해 정서적 방임까지 하고 있는 상태지만 이걸 인정하고 병원에 가서 상담을 받는 순간 에바는 에바 개인의 성향이나 상황, 케빈의 예민함과 문제행동의 정도 등 그 모든 복잡한 이유들은 잊혀진 채 그저 "나쁜 엄마"로 낙인이 찍혀버리게 됨. 에바는 자신과 전혀 안맞으면서도 결국 일을 그만두고 케빈을 돌볼만큼 사회적 책임감이 아주 강한 사람인데, 자신이 사회적으로 나쁜 엄마라고 찍히는 건 감당할 수 없었을 거임. 특히 나쁜 여자도 아니고 나쁜 "엄마"로는. 그 심리에는 내가 저런 애(케빈)을 참고 키우는데 내가 나쁜 엄마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 반발심도 있었을 거임. 난 둘째 실리아를 낳게 되는 비극도 거기서 출발한 것이지 아닐까 가끔 생각함.. 나는 나쁜 엄마가 아니고 자식인 케빈이 나쁠 뿐이라는 걸 둘째를 제대로 양육함으로써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는..

결국 에바가 케빈과의 완만한 관계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건 스스로의 감정을 죽이는 밖에 없음. 케빈에게 당장 쏟아질 감정은 답답함과 원망인데, 그 감정을 담아 케빈을 혼냈을때 케빈의 팔이 부러지는 결과가 나왔기 때문에 에바는 항상 한발 물러서서 감정을 다 비워내고 형식적으로 대할 수 밖에 없음. 하지만 케빈은 그 거짓된 모습이 더 싫었기 때문에 에바의 진실된 감정을 꺼낼 방법으로 에바가 최초로 감정을 드러냈던 그때처럼 문제행동만 반복하게 되는 악순환이 생겨버림. 사실 에바는 부족한 사람이지 모진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케빈이 계속 약한 척을 하면서 사랑해달라고 솔직하게 표현했다면 에바는 쭈뼛거리면서 케빈을 진작 안아줄수도 있었음. 하지만 케빈은 그런 솔직한 아이도 아닐 뿐더러 착한 아이도 아님. 둘다 결국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잘못된 방식으로 표출했기에 관계가 무너질 수 밖에 없었고 이 과정에서 둘을 바로잡아줄 3자의 존재는 부재했음.

난 그래서 둘보다도 주변 사회의 책임이 더 크다고 생각한 게 모성애에 대한 사회적인 도덕 코르셋이 엄청나고 시선도 무거운 것에 비해 실제 모자의 모습을 살펴보고 조언해줄 사회적 안전망은 부족해보였음. 케빈이 에바의 편향된 시각에는 엄청 교활하고 치밀한 조종자로 보이지만 사실 케빈이 입고 다니는 옷차림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케빈을 쫌만 주의깊게 봤어도 딱 봐도 얘는 문제가 있다는 게 드러날 수밖에 없는 아이라고 생각함. 그리고 딱히 케빈이 그걸 엄청 잘 숨긴 것 같지도 않고 분명 학교 상담이나 그런걸로도 드러났을 텐데 학교는 그런걸 집에 전혀 통보를 안했나?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보통 엄마가 애를 데리고 다니는데 날씨에도 전혀 안맞는 옷을 입히고 다니는 거 보면 이상하게 생각할 이웃이 지적하거나 사회복지사가 집에 찾아오는 일도 있었을 법하다고 생각하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별 이상 없어 보이는 백인 중산층 가정이니 어련히 잘 하겠지' 하고 안일하게 넘긴 건 아닐까 생각이 들더라고.

사회가 좀더 일찍 둘을 분리할 수 있었더라면 에바의 인생도 그렇게 망가지지 않았고 케빈도 대량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는 되지 않지 않았을까 생각하면 씁쓸해지는 것 같음... 그래서 나는 이게 원제가 기가 막히다고 생각하는게 "We need to talk about Kevin" 이잖음. 여기서 We 라는 건 결국 우리 사회를 말하는 게 아닐까 싶더라고. 단순히 누구의 탓이 더 큰가를 따지기 전에 이 사회가 Kevin들을 만들어내고 있진 않은가...
2024.05.18 23:0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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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가 둘째 낳고 키운 이유가 자신은 좋은 엄마이고 케빈이 나쁘다는 걸 증명해보이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되었다는 해석 생각 못해본 관점인데 에바 입장에선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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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8 23:1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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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어캐 이렇게 길고 자세하게 표현하냐 난 걍 막연하게 가족이라는 환상 이라고만 느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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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9 02:2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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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맞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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