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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1 00:52
2024. 04. 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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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대학 부속 건물의 복도에서 잭은 프레디를 벽에 밀치며 추궁했다.


"허니에게 말할 생각인 거야?"

"너도 규칙을 알잖아. 직접 말할 순 없어.  오직 그녀 스스로 깨달아야만..."


철제 캐비넷에 부딪힌 프레디는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누군가 오지 않을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물론 지금 이 시간대에는 그들 두 사람밖에 없었다. 허니 비가 나타난다는 것은 더군다나 불가능하지만, 프레데릭의 머리속에는 허니가 이런 모습을 보면 안 될텐데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그래서 허니 사물함에 그 프린트물을 넣어뒀어?"

"잭, 제발... 벌써 10년째야. 난 더 이상 못하겠어."

"그저 얼굴 한번 보겠다는 거야. 일년에 단 한 번."

"이건 미친 짓이야. 이런 짓은 이제 그만 두자고. 해가 갈수록 난 우리가 미쳤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

"그럼 넌 빠져. 프레드. 난 그녀를 보러 갈 테니까. 허니한테, 허니와 우리, 아니 허니와 나는 못한 얘기가 아주 많으니까."

"미쳤어, 정말 미쳤어. 다 허무한 짓이야. 그저 못나고 비참한 미련일 뿐이라고."

"멋대로 생각해. 뭐 너도 남말할 처지는 아니잖아?"

"이봐, 친구. 제발 다시 생각해봐. 그녀는 진짜가 아니야. 현실의 허니 비는 이미..."

"알아, 한 줌의 재라는 거."


잭은 프레디를 바닥으로 넘어뜨리며 쓴 미소를 지었다.


"한 줌의 재라... 근데 그건 너와 나도 마찬가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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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디는 잭이 그에게서 빼앗은 프린트물을 들고 복도 저 편으로 멀어져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허니.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난 이제 이 문을 닫으려고 해.'


햇볕이 들지 않아 어두컴컴한 복도에서 헝클어진 금발의 남자가 바닥에 어지러이 흩어진 서류와 책들을 정리해 캐비넷에 넣고 자물쇠를 채웠다.





2014. 04. 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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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지옥같았다. 나는 그중에서도 제일이라는 내 자신이 만든 지옥에 빠져 있었다.


4년 전 문학부에 입학했을 때 그들은 동기사랑은 영원히 라고 외쳤다. 허니 비는 그 '영원'이 적어도 2년은 갈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현실은 오래 끓인 홍차보다 더 쓰디쓴 맛이었다. 문학부 휴게실에 오는 인원은 그 해 오월제 이후 절반이 줄었고,
가을 연극발표회 이후에는 다섯 사람도 채 남지 않았다. 그중에 허니 비, 프레드릭 폭스, 잭 로우든이 있었다.



허니 비는 늘 그렇듯이 중앙 도서관의 문학 서가에서 오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낡은 책상의 구석 자리에서 그녀는 책 몇 권을 늘어놓고 오래되어 가장자리가 변색된 프린트물을 들여다보았다.
지금 그녀의 정신은 책이나 종이가 아니라 온전히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아무도 없는 서가 사이를 쳐다보다가
오후 햇살이 쏟아지는 창문을 바라보다가
낡은 종이 더미를 들춰보다가 이내 그것도 한쪽으로 밀어버리고 책상에 볼을 대고 엎드려
찬기를 느끼면서 공조기가 웅웅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프레디는 왜 갑자기 이 프린트물을 가져와달라고 한 거지? 영문학 역사 수업은 예전에 끝났고 졸업 논문도 다 썼을텐데.
그리고 지금은 복수 전공에 집중하느라 바쁠 때가 아닌가?'


프린트물은 유명한 문학 작품에서 발췌한 구절, 작가들의 명언을 모아둔 것으로 신입생 시절에 받은 것이었다.

허니는 프레디의 부탁을 받고 아침 일찍 아무도 없는 학부 휴게실에 들러 각종 책과 서류가 가득한 책장에서 그 파일을 꺼내왔다.
그녀는 인덱스가 붙은 페이지를 펼쳤다. 한 문장에 연필로 밑줄이 쳐져 있었다. 프레디가 표시한 게 분명했다.



'빠져나가는 최선의 방법은 그곳을 거쳐 지나가는 것이다. -로버트 프로스트-'



한참 그 문장을 들여다보던 허니는 파일을 덮었다. 어쩌면 이 우울의 콘크리트 탑을 빠져나갈 방법은 의외로 간단할지도 모른다.


허니는 예전처럼 잭과 프레디 두 사람이 서가 사이를 여기저기 살피며 책 더미에 파묻혀있는 그녀를 찾으러 오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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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해 전, 잭이 공군에, 프레데릭이 육군에 입대해서 그녀와 떨어져 있는 동안
그녀는 어땠던가

매일같이 허니가 했던 생각은 이 무정하고 덧없는 시간을 붙잡아 두고 싶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폭우로 불어난 강물처럼 속절없이 흐르면서
그녀의 마음에 외로움이라는 크나큰 협곡을 만들고야 말았다. 폭우가 잦아든 뒤에서 밀려오는 토사 더미처럼 우울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아 옴짝달싹 못 하게 했고
제 갈길 가기도 바쁜 친구들은 벼락맞은 나무처럼 생기를 잃어버린 허니에게서 점점 멀어졌다.

잭과 프레디가 돌아왔을 때 즈음 허니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투명한 커튼 뒤에서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예전처럼 스스럼없이 잭과 프레디의 어깨에 매달리지 않았다.

다른 동기들은 말했다 그들 세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변한 게 없냐고
하지만 그 말은 빈 나뭇가지에 부는 바람처럼 그곳에 아무것도 없음만 강조할 뿐이었다.


졸업학년이 되고 프레디도 잭도 학부 휴게실에 오지 않게 되었다. 이름 모를 선후배들 사이에서 빌려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던 허니도 그곳을 떠났다.


....


허니는 유령처럼 일어서서 조용히 책과 파일들을 챙겼다. 두 사람과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난 두 해 동안의 늪지대 밑바닥 생활은 없었던 것처럼
두 사람이 기억하는 그때 그 사람인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면서 만나야 한다


도서관을 나와 캠퍼스 메인 길을 가로질러 정문으로 가는 길,
대운동장에서는 올해도 열리는 오월제를 준비하는 각 동아리들의 함성 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이 석양이 지면 어둠에 지지 않을 만큼 강렬한 조명이 켜지고
운동장 바닥을 울리는 공 튕기는 소리, 발자국 소리, 응원 소리가 요란하겠지.


...

사년 전 오월제의 밤 그들은 한껏 취해서 운동장 스탠드에 앉아 있었다.

"우리 삶이 소설이라면 어떤 이야기라고 생각해?" 허니가 물었다.

"뭐야, 그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교수님도 안할 질문은?"

잭이 기겁하는 척 하며 장난스레 말했었고

"글쎄, 간단하지 않나? 세 사람이 사랑하는 이야기지." 라고 즐거운 듯이 말했던 사람은 프레디였다.

...


허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생각했다. 처음 만났을 때와 함께 했던 추억들과 제일 마지막에는 무슨 얘길 했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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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잭에게 얼마나 의지하고 있었는지
그의 듬직한 뒷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였는지
항상 든든한 존재였던 잭, 어떤 장난을 쳐도 같이 잘 받았주었지.
돌이켜보면 그는 가끔 진중한 눈으로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뭔가를 말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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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디와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친근하고 편안했다.
그에게는 무슨 이야기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함께라면 어떤 일이든 겪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생각해보니 그와 있는 시간을 너무 당연하게 여겨서 말하지 못한 게 있었던 것 같은데...



허니는 갑작스레 날카로운 것으로 찌르는 것 같은 두통을 느끼고 길 한가운데 멈춰섰다.

고즈넉한 정원을 지나 화려한 정문 건물로 향해 갈수록 캠퍼스의 청춘들이 만들어내는 것과 다른
불순하고 비정한, 예측할 수 없는 대도시 번화가의 소란스러움이 느껴졌다.


'저 어수선한 곳에서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어.'


시야가 한 순간 하얘졌다가 괜찮아지길 반복했다.
머릿속에서 꿈인지 상상인지 알 수 없는 장면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xx대학, 번화가, 지하철역, 테러, 시민들, 무차별적인, 파편, 비명, 무고한 희생이....'



허니는 눈을 꼭 감고 고개를 흔들어 불운한 생각들을 떨쳐 내려 애썼다.
뒤를 돌아보니
도서관, 인문대 건물, 문학부실 등은 존재하지 않는 다른 세상인 양 멀리 떨어져 있었고 
온통 녹색 정원의 나무들 뿐이었다.


발걸음을 빠르게 해서 걸어가자 정문 근처 조각상 앞에 서 있는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빠져나가는 최선의 방법은....'


아까 전에 본 프로스트의 말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오늘, 지금이라면 두사람에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 너무 오래 살아있는 것 같아.
사반세기도 살지 않았는데 벌써 삶에 질린 것 같아 라고 얘기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나는 최선을 다할 수가 없어 라고 한다면?


'잭, 프레디, 미안해. 내가...'

'뭐야, 뭐야. 우리 사이에 그런 말 하지 마.'

라고 하면서 프레디는 내 양 볼을 붙잡고 이마에 뽀뽀 세례를 부을 거고, 잭은 큰 팔로 우리 둘을 끌어안겠지.



두 사람이 허니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허니도 손을 흔들며 그들에게로 달려갔다.
지하철역으로 이어진 큰 길을 따라 내려가는 세 사람은 곧 번화가를 가득 채운 인파에 묻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프레디여우너붕붕
프레디폭스너붕붕
로우든너붕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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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의 사고로 자신들을 떠난 허니가 그리워서 허니가 죽던 날마다 과거로 돌아가는 두 사람을 보고 싶었다 ㅠㅠ
허니는 그 하루의 끝에 자신이 죽는다는 걸 모르는...
서로가 가장 필요했던 순간에 그러지 못했던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세 사람이 보고싶음 ㅠㅠ
 
2024.05.05 06:20
ㅇㅇ
모바일
존잼탱 ㅠㅠㅠ
[Code: f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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