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hygall.com/598519787
view 474
2024.06.29 01:16
재생다운로드American Sniper (118).gif
재생다운로드reece44.gif


사냥꾼의 눈으로 리스는 길게 숨을 참았다. 물에 잠겨 있는 것 마냥 잠수라도 하는 듯 멈춘 호흡이 길었다. 목표물이 예상한 것보다 과하게 날뛰어 영점 조절이 힘든 탓이었다. 한껏 엑셀을 밟는 자동차의 운전석도 쉽게 꿰뚫은 세월은 셈하기도 버거운 과거가 됐다. 리스는 한숨을 쉬고 살짝 다리를 벌려 자세를 낮춘다. 부대에서 레전드라고 칭송받던 최고의 저격수가 고수하곤 했던 자세였다. 가슴이 살짝 조여왔다. 방랑했던 세월이 너무 오래 늘어진 탓일까? 본래도 훌륭한 건강 상태는 아니었으니 병이라도 도진 걸까. 리스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뭐든간에 지금은 안된다. 지금이어선 안됐다. 집중이 느슨해지고 순간 힘이 들어간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긴다. 총소리가 낮게 허공을 꿰뚫는다. 리스가 노리던 '인간'은 고함조차 지르지 못하고 절명했다. 뒤통수가 한껏 망가져 있었다. 탄환이 두개골을 깨끗하게 헤집어놓은 게 안에 내용물이 훤히 비친다.

살아있는 상태로 먹이고 싶었는데!

생각하기가 무섭게 불쑥 뒤로 나타난 카일이 무거운 목소리로 낮게 쏘아붙인다. 애먼 사람을 죽이는데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아닙니다. 알아. 그럼 비명 때문에 다른 것들이 몰릴 것 아니야. 그냥 내 바람이었어. 지금 그게 문제입니까? 제가 그런 걱정으로 화를 낸다고 생각하십니까?

정신 사납다는 듯 손을 휘젓는 리스 때문에 카일은 더 열이 올랐다. 양 다리를 어깨에 짊어지고 시체를 나르는 리스의 모습에 카일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손만 잼잼거리며 눈치를 보듯 곁을 맴도는 모습이 리스는 어쩐지 웃겼다. 웃음이 나오진 않았다. 웃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아직은 배고프지 않습니다."

몇 번을 망설이다 한다는 말이 고작 이거다. 이 한마디면 리스를 멈출 수 있겠지 생각하는 아둔한 희망도 웃겼다. 리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코너를 돌아 재갈을 물려둔 카일의 앞에 시체를 내려놓았다. 그으으 으으으. 낮은 신음이 아까 들었던 목소리와 겹쳐진다. 엄청 허기져 보이는데. 리스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오늘의 식사에 딸린 손가락을 하나 뜯어 카일의 코 아래 부볐다. 피 냄새를 기억하게 만들어야 했다. 으으으. 소리가 커진다. 리스는 카일의 아귀를 단단히 막아둔 재갈을 풀어내곤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카일은 잠시간 멈춰 서 있다가 곧바로 시체에 달려든다. 얼굴에 사방팔방 살점과 핏물을 묻히며 허겁지겁 배를 채우는 모습에 리스가 조용히 말한다. 천천히 먹어. 루시한테 해주곤 했던 말이었다. 오랜만에 말을 하니 목에서 쉰 소리가 난다. 팔자에도 없는 인생 두 번째 육아를 하게 된 소령은 카일이 올라오지 못할 컨테이너 위로 훌쩍 올라가 비스킷을 뜯었다. 일주일간 먹은 게 전투식량만 못한 쌀비스킷 7개가 전부였다. 세상이 뒤집힌 후 몸은 가벼워졌지만 근력은 절반으로 줄었다. 카일이 보면 기겁을 할 모양새였다.

"하나 더 먹을까?"

리스가 옆을 돌아본다. 아까 전의 리스를 한참 타박하던, 구릿빛 살결과 선명한 파란색 눈동자, 리스를 압박하던 부피, 단단했던 몸을 가진 카일은 더 이상 없다. 가만 허공을 바라본 리스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어. 먹을게. 곰질곰질 남은 식량을 부스럭거리고 입에다 쑤셔 넣으며 리스는 제 팔에 얼굴을 묻었다. 눈앞을 바라보니 카일이 있었다. 저녁이 만족스러웠던 모양이다. 그으윽. 입가로 핏물이 질질 흘렀다. 아, 닦아주고 싶다. 하지만 카일과 접촉하려면 사방이 어두워야 했다. 감염자는 빛이 없어야지 움직임을 멈췄다. 낮에 날뛰는 걸 보면 아직은 시력이 버텨주고 있다는 소리니 환영할 만한 부분이다. 무엇을 보는지 모를 흐리멍덩한 눈동자는 초점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 그 아래 회색빛 피부로 얇게 덮인 몸은 의외로 그렇게 얄팍하진 않다. 이 세상에서(는) 가장 극성일 보호자가 마련해서는 안될 식사를 성실히 공급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


언제부터 사람을 죽이기 시작했더라.

종양을 떼어낸 뇌에 빈 공간이 큰지 이젠 과거를 떠올리기가 버겁다. 그럼 현재부터 거슬러 올라가 볼까. 리스는 카일의 뒤통수를 보며 실 없는 생각을 했다. 비틀거리며 나아가는 카일의 앞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고기는 어제 리스가 사냥했던 남자의 살점이었다. 카일은 잘게 흔들리는 살덩이를 따라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남자는 리스가 처음으로 죽인, 강도단이나 약탈단이 아닌, 먼저 위협과 공격을 가해오지 않은, 제발 살려달라고 두 손 빌어 엎드린, 가족이 있다고 애원한, 일반인이었다.

"후회됩니까?"

리스의 옆에서 성큼 큰 보폭으로 튀어나오며 카일이 말했다. 리스는 옆을 보지 않고 천천히 규칙적으로 발을 내딛는 앞선 카일의 뒷통수만을 응시하며 입을 연다. 그럴 리가. 후회가 될 리가 없었다. 지금껏 카일을 위해 죽인 사람으로 저 공터를 한 바퀴 돌아 채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만큼의 살육을 하는 동안 리스는 정말이지, 분초에 속하지도 못할 단 한 순간도 후회를 해본 적이 없었다. 후회를 하지 않으려 했다. 한 번 미련이 시작되면 제임스 리스는 제 인생 모든 장면의 매 순간을 전부 다 후회해야만 했다. 그런 고통은 이제 지겨웠다. 되돌릴 수도 없는 일에 대해 뼈를 깎는 일은...

예컨데 너를 사랑하기로 결심한 순간이라던가. 루시와 로렌을 잃고, 리스트의 인간들을 찢어발기고 (솔직히 리스는 이 때의 기억을 살인의 카운트에 넣지 않았다. 짐승을 죽인 것과 다름 없지 않나?) 카일을 만난 기억은. 흐릿했다. 두통이 도진다. 곁에 머물고 싶습니다. 그러면 안 됩니까? 무던하지만 강단 있던 카일에 비해 그때의 리스는 거의 겁에 질린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더 이상 내 삶에서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싶지 않아. 떠나지 않겠습니다. 지루한 공방전이었다.

제발 내가 삶에 기대하도록 만들지 마. 책임질 수 없는 말은 하지도 마. 리스가 그때 울었던가. 카일은 우는 리스를 안아주었던가. 어른거리는 잔상들 속에서 도무지 카일이 그때 어떤 대답을 했었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무심코 그 몸을 마주 안았을 때 온기만이 선명했다.

살인을 복기한다고 했던 일이 잠시 딴 길로 샜다. 리스는 대각선으로 길을 벗어나는 카일을 보고는 줄을 당겨서 경로를 수정했다. 그으으. 짧게 신음을 흘리더니 카일이 다시 앞으로 걸어간다. 끄응. 멀끔한 카일의 골 아픈 신음성도 함께 들린다. 루시와 로렌의 환각과는 달리 카일의 허상은 꽤나 직접적으로 현재의 리스에게 말을 걸고 대화를 시도했다. 리스를 과거로 이끄는 원래 가족들과는 차이점이 있었다.

후회됩니까. 그 질문에 리스는 어깨를 으쓱거리곤 침묵을 지켰다. 너를 위해 사람을 죽인 것은 후회하지 않지만, 널 사랑했던 일은. 글쎄, 리스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카일을 사랑했는지조차 이제는 희미했다. 사랑은 고사하고 너부터 살려야 했다. 윤리니 도덕이니 사람 같은 삶은 누군가를 지켜야 하는 이에게 너무 과분했다. 그딴 걸 고수하며 동시에 카일을 지킬 능력 따위 제임스 리스에겐 없었다.

그리고 그건 카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네가 나한테 뭐라고 할 자격은 없어. 리스는 불퉁한 표정으로 뇌까렸다. 보기 좋게 약속을 걷어찬 건 카일도 다르지 않았다. 크리스 카일은 분명히 떠나지 않겠다고 말했었다. 이지경이 된 세상 속에서도 카일은 끝까지 살아서 일이 잠잠해질 때쯤 조용한 곳에 터전을 잡자고 했었다. 두 사람 다 해군에 몸담았었으니 바다가 괜찮을 것 같았다. 온 시민이 감시자가 되어버린 조국보다는 해외가 나을 듯싶었다. 카일은 언제나 날씨가 좋은 곳으로 가고 싶어 했다. 리스가 비 오는 날을 싫어했으니까. 대피소를 향한 경로를 파악하라고 준 지도를 가지고 카일은 그런 미래를 가늠했다. 당신과 내가 함께 평온할 수 있는 곳, 원한다면 바로 요트를 타고 해양을 누빌 수 있는 지역이면 좋겠다. 우리 함께 그런 곳에 정착하자고, 이젠 같이 머물자고...


*


카일은 감염자에게 한쪽 팔을 물리자 마자 제 손을 스스로 잘라냈다.

그리곤 곧바로 피가 여즉 떨어지는 도끼를 들어 리스를 위협했다. 떨어지십시오. 웃기지도 않은 협박이었다. 리스는 그 이후로 일주일간을 카일과 함께 지냈다. 사흘 밤낮을 자살하려 발버둥 치던 카일은 자신의 나이프에 저를 말리려는 리스의 어깻죽지가 깊게 베였을 때에 가서야 얌전해졌다.

당신이 죽여주겠다고 약속해주십시오. 그럼 더는 스스로 죽으려 들지 않겠습니다. 카일은 말했고, 리스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카일이 변이할 때 쯤 리스에게 권총을 건네줬고, 리스는 총을 뒤로 던져버리고는 완전히 감염된 카일이 제게 달려들자 2시간의 사투 끝에 그에게 재갈을 물리는 걸 성공했다. 이걸로 약속을 어긴 건 자네나 나나 피차 마찬가지군.

사실 리스는 그에게 정말, 정말로 물리고 싶었다. 먹힐 수 있다면 더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미약한 희망은 분명한 불행보다 선명하게 리스에게 다가왔다. 하얀 가운이 피투성이로 더러워진 인간들은 분명 치료제가 개발 중에 있다고 했다. 높으신 분의 자제가 감염되는 바람에 백신보다 치료제가 앞서 개발되었다고, 그런 궁금하지도 않은 얘기들까지 들은 건 덤이다. 그놈들은 제압된 개체의 부패기록이 필요했기에 카일을 가져가려 들었고 지금은, 음. 저세상에서 가장 튼튼한 좀비의 허벅다리 근육이 됐을 것이다.

이 세상에 위험한 건 좀비 뿐만이 아니었다. 살아있는 인간이 더 위험했다. 지켜야 할 것이 있는 인간이라면 더더욱. 오늘 리스는 제 중사의 저녁 식사를 사냥하는데 실패했다. 괴물에게 밥을 주기 위해 살인을 한다는 사이코의 악명이 꽤 널리 퍼졌던 모양인지 방비가 과하게 좋은 것이 문제였다. 덩치 좋은 시체를 보호하면서 싸우려다 보니 제 몸을 지키기가 힘들었다. 리스는 어깨를 관통한 총상을 불에 달군 나이프로 지혈했다. 말 그대로 생살을 지지는 고통이었다. 카일은 옆에 무릎을 꿇고 안절부절못하며 이유 모를 손짓을 파닥여 리스의 주위를 사납게 만들었다. 주사를 맞히는 어린아이의 정신을 빼놓는 것 같아서 리스는 작열하는 고통 속에도 웃음이 났다. 너무 오랜만에 웃어서 지금 표정이 웃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이상하게 일그러진 얼굴인 건 싫은데. 역시 이상한 얼굴이었는지 제가 다치기라도 한 듯 식은땀을 흠뻑 흘리던 카일이 이내 고개를 떨궜다. 고통에 신음하는 제 사람에게 어깨 하나 빌려주지 못하는 처지가 한스러웠다. 창백한 볼을 매만져주고 싶었다. 그럴 수 있는 몸뚱이는 저기 구석에 모자란 꼴로 처박혀 있을 뿐이지만. 비에 닿으면 부패가 가속되기에 동굴 안쪽에 묶어둔 한심한 몸이 배가 고픈 듯 으르렁거리길래 닥치라고 소리나 한 번 질러줬다. 듣지도 못하겠지만.

"왜 뭐라고 해... 굶어서 기분도 안 좋을 텐데."
"당신은 미쳤어요."

카일이 붉어진 눈시울을 감추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리스는 격통에 흐려진 시야로 희미하게 웃었다. 토라진 곰 같다고 말하면 더더욱 미쳤다고 하려나?


*


리스는 먹이 뿐만 아니라 감염된 개체를 청소하려 드는 군인들까지 죽였다. 그들에게 리스는 2번의 도망칠 기회를 줬다. 물론 그 기회를 감사히 여기는 인간은 한 명도 없었지만. 다 죽었다는 말이다. 군인들의 목표가 점점 카일에서 리스로 바뀌어갔다. 치료제를 가지러 가기 위해 연구소로 향하는 둘에게는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도시 안쪽으로 (그것도 옛날 명칭이지만) 들어갈 수록 경비가 삼엄해졌다. 카일보다 리스에게서 나는 피 냄새가 더 짙어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에는 카일이 리스에게 달려들었다. 먹이를 주지 못한 지 이틀이 되는 날이었다. 제 몸을 내리 누르는 무식한 몸짓은 지금의 리스의 상태에서도 무리 없이 제압할 수 있는 단순한 움직임이었다. 그러니까, 리스가 카일의 눈알을 엄지손가락으로 후벼파낸 후 발로 그의 복부를 걷어차 아무 내장이나 조금 터트릴 수 있다면 가능한 일이었다.

리스가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최대한 몸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접촉을 최소화하며 제압하다 보니 아껴뒀던 체력까지 모조리 끄집어 내야만 했다. 흥분한 짐승을 진정시키는 것보다 힘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카일에게 로데오를 배워둘 걸 그랬나. 딴 생각을 하다가 카일이 거칠게 반항하며 팔꿈치를 마구잡이로 휘젓는 것에 명치를 제대로 후려 맞았다. 어마어마한 통증과 함께 잠시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가슴팍을 얕게 갈랐던 창상이 다시 터지니 피내음이 더 강해진다. 외로운 싸움이었다. 이길 수도 없고 져줄 수도 없는 무식한 대련을 견디며 리스는 카일을 떠올렸다. 어쩔 때는 간지러울 정도로 다정한 손짓은 나를 단 한 번도 상처 입힌 적이 없었는데.

카일이 보고 싶다. 빌어먹을 환각은 이럴 땐 찾아오지도 않았다.

다행히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시체를 찾아 밥을 먹일 수 있었다. 끄으응. 신음으로 투덜거릴 수 있는지는 몰랐는데. 선도가 확 떨어진 것을 불만스러워하는 눈치였다. 나한테 미안하면 그냥 먹어. 리스는 입가에 피를 닦아내며 투덜거렸다. 카일을 묶어둔 후 밥을 먹는 대신 식량을 아끼려 잠을 잤다. 꿈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다. 카일이 나왔다는 것만이 생각났다. 사방이 아주 어둡고 주변도 흐렸는데 그 안개 속에서 크리스 카일만 선명하게 기억났다. 선명한 얼굴이니까 당연한 일인가?

당신을 살리고 싶었습니다. 카일은 리스를 품에 안고 울면서 말했다. 리스는 그 포근함 안에서 대답 없이 눈을 감았다. 난 이제 죽어도 좋은 사람이 아니라 죽어야만 하는 인간이 됐는데, 너는 그걸 알고 있는지. 입을 열어 물어본 것이 아니니 당연히 돌아오는 답은 없다. 카일은 제가 저승길로 걸어 들어간다면 그 길을 모조리 무너트리고. 그래도 막을 수 없다면, 훅. 깊은 숨 한 번 내쉬고, 모자 한 번 고쳐 쓰고는 그 길에 당연한 듯 동행할 인간이었다.

그건 안될 일이지, 안될 일이야......


*


리스가 죽인 셀 수 없는 생명들이 그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 산목숨이라고 다르진 않았다. 군인 측은 이제 리스보다 카일을 저격하는 듯했다. 그를 보호하려 망설임 없이 몸을 던지는 리스를 파악한 모양이다. 남은 그리 함부로 해쳤으면서 제 사람은 목숨 걸어 지키는 게 역겨워. 이런 얘기가 들리는 듯했다. 카일은 리스에게 무릎 꿇고 빌었다. 치료제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을 허상이라고, 그런 불확실한 희망에 당신 목숨을 걸지 말라고, 제발 여기서라도 멈추라고. 리스가 깨질듯한 두통에 머리를 부여잡는다. 카일의 말은 방해가 됐다. 리스를 두렵게 만들었다. 그 사이에 어깨에 탄환이 스친다. 부러진 늑골의 끔찍한 통증은 이제 겨우 익숙해졌다. 여정의 끝에 다다를 때까지 폐를 찌르지만 않길 바랄 뿐이다. 한쪽 발목은 절뚝거리게 된 지 오래다.

카일? 카일은... 이가 하나 빠졌다. 그것 말고 잃은 신체는 없다. 카일의 치아를 손안에서 굴리며 리스는 이제 군인을 먹이로 주는 건 자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천천히 상하는 몸이 질긴 근육을 씹질 못하고 떨어져 나온 것을 보며 리스는 어쩐지 조급한 몸짓으로 몸을 일으켰다. 서둘러야 했다.

속도를 높이니 부상이 늘었다. 연구소 내부로 진입할수록 왜인지 시체는 늘어나서 카일에게 공격받을 일은 없었다. 질릴 만큼 먹이면 되니까. 그 사이 리스는 허벅지 살이 깊게 패였다. 출혈이 큰 부위라 이건 좀 위험했다. 연구소 직원의 미간에 뜨거운 총구를 부비면서 리스가 살벌하게 으르렁 거렸다. 으헉으헉 거친 소리로 울부짖는 직원은 다 알려줄 테니 살려만 달라고 했다. 행여나 군의 작전이나 공갈일까 봐 리스는 연구원의 동공과 얼굴근육, 떨림 등을 세밀하게 살폈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리스는 카일의 목줄을 잡고는 한 층을 더 올라갔다. 잠시 허리를 깊게 숙이고 기침을 하니 바닥에 새빨갛다.

"좋은 데이터로 쓰일 테니 죽이지 말라고 하더군요."

카일은 그 꼴을 물끄러미 보더니 입을 열었다. 거친 기침을 추스른 리스가 멍하니 카일을, 그러니까 뒤에서 입을 헤벌레 벌리고 창밖을 구경하는 카일이 아닌 제 앞에서 총명한 눈을 빛내는 카일을 바라보았다. 전 죽지 않을 테니 신경 쓰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말을 이해 못하는 건지 안 하려는 건지 멍한 눈을 거두지 않는 리스에 결국 카일이 소리를 내지른다.

"난 지금 당신 몸이나 챙기라고 말하는 거야 제임스 리스."

알아 들어? 격정으로 가득 찬 목소리 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리스가 난간에 기대어 허리를 굽힌 리스가 천천히 주저앉았다. 고지가 눈앞이었지만 조금은 쉬어야 할 것 같았다. 내장 안쪽이 너무 쑤셨다. 출혈이 이는 모양이다.

"난 지옥에 떨어질 거야."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죽어도 그렇지 않을 거라곤 하지 못하는 그 고지식함이 좋다. 리스가 가볍게 웃었다.

"그러니까 볼 수 있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야."

네가 거길 올 리가 없으니까.


설사 카일이 꾸역꾸역 사람들을 죽여 지옥행을 명 받는다고 해도 꽤나 순번이 밀린 번호표를 받아야 할 것이다. 지옥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리스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줄을 섰을 테니.


*


마지막으로 리스는 카일의 입에 물린 재갈을 풀어줬다. 끝으로 밥을 먹었던 게 1시간 전이니 달려들지 않을 것 같았다. 뭐, 이젠 물어 뜯어도 큰 상관은 없지만. 카일이 정신을 차렸을 때 그런 꼴을 보는 건 원치 않으니까 되도록이면 그러지 않길 바랬다. 어찌나 단단하게 박힌 건지 재갈에 잇자국이 파인 것 처럼 선명했다.

카일에게 치료제를 주사하고 재갈을 풀어 내리는 동안 리스는 발목과 등, 옆구리에 더해 하복부까지 각각 한 발씩 저격을 당했다. 머리를 쏘지 않는 건 밀착한 카일이 오저격으로 죽지 않도록 하는 배려일까?

발 밑이 순식간에 핏물로 흠뻑 젖어 든다. 리스는 천천히 벽으로 몸을 기댔다. 중심이 쏟아진 몸이 천천히 넘어간다. 힘 빠진 손에서 주사기가 빠져나간다. 기척으로만 따졌을 때 부대 두 개 정도는 이 주변을 둘러싸고 작전을 수행하는 중인 듯했다. 결국 마지막까지 이 정부에 놀아난 셈이군. 카일을 귀한 샘플로 여겼던 연구원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리스의 손에 명을 달리 했던 인간들이다. 너를 실험체로 떠넘긴 꼴이 됐을 까봐 무서운 건 맞아.

하지만 네가 그랬잖아. 어떻게든 좋으니 살아만 있으라고...

나도 마찬가지야. 리스가 웃었다. 카일을 살렸다는 고양감에 죄책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 수치스럽다. 그마저도 카일의 규칙적인 숨소리에 흐려지지만...

카일의 피부색이 빠르게 혈색을 되찾는다. 혹여 치료제가 형체 없는 단순 미끼인 상황을 대비해 품에 지녔던 폭탄을 터트릴 일은 없어 다행이다. 리스가 피에 흠뻑 젖은 손으로 카일의 볼을 매만졌다. 따뜻했다. 예상과는 다르게 눈물은 나지 않았다. 이미 이것저것으로 엉망인 얼굴에 물기를 더하지 않아서 다행이긴 하지만.

눈 앞이 천천히 흐려진다. 정신을 차린 크리스는 나를 용서하지 않겠지. 그 고지식한 성정을 생각하면 온갖 정이 다 떨어져서 나를 혐오하게 될 수도. 크리스는 좋은 사람이니까. 이것보다 더 바라는 시나리오는 없다. 아니면 지상 최악의 인간이 될 각오를 하고 나를 사랑했으려나. 모르겠다. 만약 내가 감염이 되었다면... 그것도 모르겠다. 일어나지 않아야 할 일이고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갑자기 왜 이리 잡생각이 드나 했더니 주마등이었구나, 주마등.

제 생을 온전히 채운 남자를 바라보며 리스는 생의 마지막 힘을 짜내어 카일의 손을 잡았다. 피가 제대로 돌기 시작했는지 손마저도 따뜻했다. 짙은 눈썹과 투박한 수염에 어울리지 않는 예쁜 속눈썹 그 안에 선한 눈동자. 결국 보지 못하는 것 역시 아쉽긴 하다만..

항상 그랬듯이 넌 천하의 고집불통에다
불현듯 사랑스러워.


*


크리스 카일은 천천히 눈을 떴다. 모자이크라도 된 듯 희미해진 시야에 물속에서 들리는 듯한 먹먹한 소리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냥, 간만에 깊은 잠을 자다가 깨어난 것 같은데... 느슨해진 오감에도 사방에 인기척이 있음이 느껴졌다. 그보다 더 거세게 다가오는 건 적의였다. 아직 뭉근하게 식은 오감에는 그닥 날카롭게 느껴지지는 못했지만. 그보다 손 안에 분명히 느껴지는 온기가 더 중요했다. 카일은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초점을 맞췄다. 아주, 아주 깊은 잠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거라면, 카일은 삐걱이는 고개를 돌리다가 웃었다. 제 옆에 있어야 할 사람이 마땅한 자리에 존재했다.

카일은 손아귀에 힘을 줘 몸을 끌어 당겨 땅에 누워있는 리스를 감싸 안았다. 기껏 뜬 눈을 다시 감았다. 묵직하게 내려앉은 공기가 느껴진다. 아직 완전히 돌아오지 못한 청각에 잡히는 기척이 사납고 소란스러웠다. 사살 완료니 개체 확보니 알아 들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카일은 청각을 완전히 차단하고 사랑에게 집중했다. 몸에 들어오는 온기가 미적지근하다. 카일이 더 힘있게 품 안의 사랑을 끌어안았다. 무엇인가 몸 앞판에 울컥이며 넘쳤지만 크게 신경 쓰이는 일은 아니었다.

당신은 사는 것 자체가 지옥이라고 했죠, 숨을 쉬는 게 괴로워 미칠 지경이라고.

카일은 그런 리스를 알았다. 제 앞에서 아무리 편히 웃어 보여도 결국엔 잠에 드는 순간을 가장 기꺼이 여기던 제 사랑을 알았다. 생 자체가 형벌이 되어버린 가여운 사람임을 알았다. 알면서도 당신이 내 품에서 살아 숨쉬기를 원했다. 나의 징그러운 이기심으로 당신이 살기를 바랐다.

그러니 잠드는 순간 만큼은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짧은 죽음을 온전히 누릴 수 있도록......

깨워드리겠습니다 제임스. 카일이 조용히 속삭였다. 그 말을 들으니 힘을 주고 있었던 모양인지 가슴팍에 기대었던 얼굴이 바닥으로 미끄러진다. 카일은 그런 리스를 제 어깨에 기댈 수 있도록 고쳐 끌어안았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카일이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제 막 회복되어 밝은 빛에 혹사당하는 안구 때문인지 품속에서 자꾸만 흩어지는 몸 탓인지는 잘 모르겠다.






ㅌㅆ 올린 적 있음
뿌꾸프랫
카일리스
2024.06.29 02:47
ㅇㅇ
모바일
흐어어어엉 ㅠㅠㅠㅠ 같이 살아야지이이 ㅠㅠㅠ
[Code: 54c5]
2024.06.29 03:32
ㅇㅇ
모바일
아니 센세............... .....아니..... ㅠㅠㅠㅠㅠㅠㅠㅠ하........아 나 진짜 운다...ㅠㅠㅠㅠㅠㅠ
[Code: 7193]
댓글 작성 권한이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