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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6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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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그러고 보니 사랑보다 무서운 것이 정이라던가, 자기도 모르게 가슴속에 불을 지피는 것은. 사랑은 이미 완성된 감정이라 두려울 것이 없지만, 급 그 방아쇠를 타앙— 하고 당겨 버리는 것은 언제나 격렬한 정이라고. 기억하라던 누군가의 목소리가 순간 머릿속에서 충실히도 재생되고 있었다.




  “머리도 감도 좋은 아이니까, 아마 최대한 저항하려고 들겠지만, 충동은…… 그런데도 후카츠군의 마음은 무엇에 동하게 되는 걸까. 후후후… 세상에 널린 그렇고 그런 이야기에 흥미는 없어. 하지만, 네 이야기에는 조금 기대가 되네.”




그리고 나를 보는 눈은 조금 전까지 탐구욕으로 반짝이던 그의 눈빛과 같았다.




아니, 그러니까 전 평범하게 좋아하는 사람과 평범하게 살고 싶다니까요오… 오순도순, 알콩달콩, 말랑말랑, 저기 저 평범한 커플들처럼 그렇고 그렇게……. 




속으로 적이 변론해 보아도, ‘흐응, 가능하려나… '네'가?’ 깊어지는 미소와 함께 지금 내 모습을 본다면 분명 박장대소를 하면서, 그때보다는 쓸데없이… 조금 더 넓어진 내 등판을 팡팡 뚜드릴 모습까지 예상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아하하핫, 이 귀여운 녀석. 그러길래 그건 요주의랬잖니.' 라고…….




그러게나 말입니다… 만, 그때는 그렇게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는 기이한 선택을 해 버리고 말았다. 평소와는 달리, 그 순간에는 다른 우선 사항들은 놓아 두고서라도 일단은 먼저 손안에 쥐어 놓아야 했다.




부러 어렵고 힘든 길을 찾아다니는 편도 아니었는데. 사서 한다는 고생 따위는 모르겠고 될 수 있으면 최소한의 힘으로 최대한 출력 내기의 대명사, 내지는 에너지 극 절약형이던 내가 어쩌다 순탄한 길을 눈앞에 두고……, 이렇게 수고스러울 것이 분명한 부비트랩이 잔뜩 깔린 비포장도로를 택하게 됐을꼬.




가슴속에 불은 당겨 졌어도, 보통 때라면 차가운 머리로 몸이 힘들면 마음이라도 편한 길을 택해 온 나로서는 그날의 결정은 실로 요지경, 기적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          *          *




  “아니, 그건 아직…….”



  “나는 아니다뿅.”



  “!”




아아, 취향이란 것은 정말이지……, 변하지 않아서 취향이던가. 내가 여기서 그를 보며 느낀 것은 마치 쿠로가네군을 처음 보았던 때와 같았다. 그래서 그때의 마음이 떠오른 것이다. 온갖 정성을 다하여 열과 성으로 쿠로가네군을 돌보던 때의 지극한 기분이 되살아 나서, 그 뒤부터는 자연스럽게 눈이 가고 손이 가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의식은 그렇게 그에게로 향했나 보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도 티가 났다니. 그렇다고 원래보다 과한 친절을 베푼 것도 아니었는데, 그에게는 오히려 지나가면서 무심하게도 내뱉던 직설들이 더욱 사심에 가까웠다. ‘미츠이, 죽고 싶나뿅. 그럼 영원히 할 수 있다뿅. 너의 사랑해 마지않는 바스켓볼—뿅.’ 이라든가, ‘오만뿅. 지금 너 없더라도 경기 하나 안 망해뿅.’ 이라든가.




남들이 지나가다 들으면 공기가 얼어붙겠다 싶어 할지 모를 찬바람이 슬슬 부는 말투로… 도저히 봐줄 수 없는 오버워크라거나, 작은 부상이라고 굳이 필요 이상의 투혼을 발휘하려는 것을 볼 때면 입에서 한마디 안 나올 수가 없던 따끔한 말들만 생각나는데. 흠. 투지는 좋지만, 난 내 탄환 — 슈터 — 이 상하는 것은 두고 볼 수가 없단 말이다.




그리고 나는 마조는 아니니까. 그렇게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도 끔찍하고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는 것은 당연히 싫지만, 그 독배를 마시도록 설계해 놓은 괘씸한 자를 찾아가 멱살이라도 쥐고 흔들어서 이야기를 다시 쓰게 할 의향은 있었다. 그것은 그 또한 마찬가지일 터.




  “……첫사랑은 조류였어도, 내 최초이자 최후의 연인은 네가 될 거다. 그걸로 만족뿅”



  “만족… 이라니, 너 그런 얘기 한 번도…….”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꺼낸 적 없거니와 꺼낼 일도 없었긴 했지만, 전날 그에게 약속한 업계 포상으로 풀어놓은 자신의 이야기에 조금은 혼란스러운 눈치였다. 항상 이렇다니까. 내가 네 첫사랑이니 뭐니 생각지도 못하게 내 심장을 건드니까. 내 입도 조용히 있으려고 하지를 않잖아. 자꾸만 들려주고 싶게.




  “그리고… 쿠로군은 안고 있으면 참 부드럽고 따뜻했다뿅. 남들이 만지려고 하면 그렇게 괴팍하게 굴던 녀석이, 내 품에 안겨 있을 때는 그렇게 얌전할 수가 없어서……, 지금도 생각이 난다베시… 아니 뿅.”




지금쯤이면 따뜻한 태양 볕 아래에서 달콤한 낮잠에라도 빠져 있으려나, 그 녀석. 나를 떠올리며……, 말하다 보니 더 보고 싶네.




쿠로군의 이야기만 가볍게 할 생각이었는데 뜻밖에 늘어난 이야기에 내심 자기도 의아해하고 있다가, 곧 눈앞에 그늘이 지면서 목 뒤를 감싸오는 온기에 눈이 약간 커지고 말았다. 머릿속을 잔잔하게 표류하고 있던 사고도 일순 멈춰 섰다.




  “이렇게, 말이냐.”



  “……뿅.”



  “너 '그럴' 때 눈은 정말 못 봐주겠다고. 근데도 왜 말하지 않았냐. 난 네가 그렇게 줄곧 나를 생각하고 있는 줄은. 처음부터……”



  “말할 수 있을 리가뿅. 만약 그날 진짜로, 네 이별 현장을 보지 않았다면 평생 입에서 터놓을 일도 없었고…… 어차피 또 미츠이는 거절 못 하고 새로운 사람 줄줄이 생겼을 테니까.”



  “아니, 그럴 생각은…….”




없었겠지. 없어야지. 물론, 나도 그러길 바라지만.




사실은 그날, 내 고백에 대한 그의 대답 역시 꼭 예스가 아닌 노가 됐더라도 그리 큰 관계는 없었다. 그런다고 그 길로 하늘이 무너진다거나 세상이 망할 것도 아니었으니. 그저 막도 열리지 않은 자신의 연애사에 실연 기록만 하나 더 늘어나는 셈일 뿐. 유감스럽긴 해도 나로서는 별반 대수로울 것은 없었다.




비극으로 채 다 써지기 전에, 혼자서 불이 붙은 불꽃은 그렇게 홀로 놓아두면 언젠가 그 발화원을 잃어서 점차 사그라들 일방적인 마음의 심지에 불과했다. 문자 그대로 원사이디드 러브라고들 흔히 말하는 상대를 향한 일방향적인 감정의 말로는……. 나의 경우, 그래야만 했다.




그러나 손안에 든 우산 손잡이를 꼭 쥐어가며 꺼내 놓은 나의 아슬한 고백에 차가운 봄비 속에서의 그의 흔쾌한 수락은 아직 쌀쌀한 기운이 남아 축축하고 습한 날씨에도, 위태로운 불씨를 살려내다 못해 아예 기름을 송두리째 들이붓는 것이었다.




이후에도 그와의 사이에 이렇다 할 커다란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고, 정체 모를 불씨에 언제 이름이 붙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은 어느덧 자신의 가슴 안에서 내가 깨어 있는 동안에는, 숨을 쉬는 동안에는, 언제 꺼질지 몰라 영영 타들어 갈 연정이라는 이름의 등불이 되어 있었다. 바로, 지옥이라도 찾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의 동인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이렇게, 뜨겁다.




  “그러니까 충동뿅. 미츠이는 언제나, 나의…….”



  “…….”




그리고는 장렬히 충돌——.



그와의 만남은 그렇게 나에게는 순전히 사고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측이란 불허했다. 자신 있는 쿨하고 냉철한 이성은 그로 말미암아 어떻게든 배제되어 자꾸만 돌아보고, 주저하고, 망설이고, 끝내는 내 안에서 요동을 만들어 낸다.




이건, 거의 붕괴 수준도 아니고…… 남의 근간은 죄다 흔들어 놓기는. 하여간, 내가 해야 할 것은 다 못하게 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전부 하게 만든다고. 너.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어떤 식으로든 탈이 나게 돼 있다는데, 이보다 더 한 것이 있을까도 싶었다. 그러게 얌전히— 입만 열지 않았다면 일이 이렇게 크게 될 일은 없었거늘. 오히려 그러는 쪽이 내 운명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깨끗이 인정해야 했다. 감정이 얼마만큼 교란이 되었든…… 그의 탓이라고, 계절의 탓이라고, 더이상 남에게 책임을 전가할 만한 까닭이 없었다. 모든 것은 결국 그 길을 가고자 한 자신에게 있음을.




도리어 편한 길을 가지 않게 하여 또 한 번 안도하게 하는, 언제나 기이한 너를.




  “미츠이.”



  “어?”'



  “언젠가… 네가 날 떠나고 싶으면, 혹시 그러고 싶어지면, 언제든 그래도 된다뿅.”



  “아아, 뭐라? 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냐. 방금 전까지 그렇게 열렬히도 진심을 털어 놓더니, 봄도 다 간 마당에… 마지막은 너로 하면 좋다고 장담할 때는 언제고, 잘난 천리안 어디 고장이라도 났어?”



  “……그런 건 아니고, 미래의 일은…… 언제 무엇이 어떻게 일어나도, 전혀 이상할 게 없으니까.”



  “흐응, 혹시나 그 변순지 뭔지 하는 얘기? 하, 잘났다. 그렇게 똑똑한 놈이 어쩌다 차인 거래. 실패라곤 모를 것 같은 생겨서는.”



  “그…건……, 그렇다고 꼭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던 건 아니다뿅.”




똑똑하기는, 매 순간 이렇게 별다른 공격 의지 없이 푹 찔러오는 무딘 칼날에 자신의 무지를 인정해야만 하는 순간이 찾아오고야 말지. 이상이 높은 사람들의 안 좋은 습성이라고 그 사람은 그랬지만……, 달리 뾰족한 수가 있나. 너에 관해서는 내가 알고 있는 상식선이 자꾸만 무너져 내리는 것을.




  “그렇지, 그렇지. 그리고 나는 네 제안을 받아들이는 아~주 현명한 선택을 한 거고. 안 그러냐.”



  “……뿅.”



  “대답은 잘하네,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렇게 나약하게 나오실까. 어이, 내가 그렇게 너한테 신용이 없었냐, 네가 그렇게 못 미더워 할 만큼.”



  “아니, 신뢰 하면 미츠이뿅. 그건 당연히뿅.”



  “그…! 흠흠, 잘 아네- 그러니까 말이다. 암튼 당장 하늘이 무너져도 그럴 일 없으니, 그렇게 알라고.”




혹여 반박이라도 할 줄 알았는지 그의 눈앞으로 엄지손가락까지 척 올려 보여 주니 겸연쩍어하면서도 목소리 하나하나에 진심이 묻어 나오니까……. 내 심장이 이리도 하릴없이 술렁이잖아.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뿅.”



  “어허, 자꾸 똑같은 말 하게 하지마라—.”



  “그래도…….”



  “에잇, 떽-!”




과연, 이 이상 하면 역효과만 날 것 같아……, 거기까지만 하기로 하고 나도 곧 한 품에 다 들어오는 그의 허리에 손을 감고서 그의 심장이 위치한 쪽으로 귀를 가져가 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느 계절을 불문하고 늘 규칙적으로 반복될 것이 분명한 박동을 듣고 있으니 잠시 머릿속을 뿌옇게 맴돌던 안개가 조금씩 걷히기 시작했다.




작게 쿵쿵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가만히 눈을 감고서 그의 옷 위로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코끝에서는 곧 익숙한 체취와 함께 그가 즐겨 마시는 부드러운 커피 향이 풍겨 오는 듯했다. 그와 그 눈동자 색을 닮은 그윽한 향을 더 깊숙이 느끼고 싶어져 그대로 그의 허리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실은 그렇게, 조금 과장해서 대답을 얻어내지 않더라도, 그가 나를 떠나지 않으리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럴 수도 없고. 그래 봤자 넌…… 내 손길을 벗어날 수가 없어. 쿠로군처럼 한번 내 온기를 고스란히 다 받고 나면, 넌 이제 다른 사람 손 따윈 탈 수 없게 돼. 그건— 네가 더 잘 알고 있잖아.



그러니…… 내게도 네 사랑을 줘. 상처 주지 마. 더는 날, 혼자 두지도 마라. 이래 봬도 꽤 섬세한 심장으로 되어 있다구.




언젠가— 이런 나도, 잘 알아 주면 좋을 거다.




그럼에도 떠나도 된다느니, 어림없는 관용을 빙자한 강요로 굳이 확인받고 싶었던 것은 사랑에 빠진 자가 부려보고픈 억지였다고나 할까. 이제 막 몽정을 시작한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 이런 알기 쉬운 유치 내색한 적도 없는데.



그때의 난……, 그저 손안에 든 동그란 구체와 그것이 들어가야 할 그물이 달린 기다란 물체밖에는,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아마, 너도 그랬겠지.



방안 한쪽 구석에서 먼지가 쌓여 조금은 빛이 바랜 잡지 안 사진 속, 타케이시중 미츠이 히사시의 얼굴은 분명 그러했다.





명헌대만 후카미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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