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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3 20:50
[해롤드]
폰 화면에 뜬 이름을 조심스레 쓸어만졌다. 전에는 이름 옆에 꽉 찬 하트가 새겨져 있었는데, 미안한 마음에 끙끙 되며 하트를 지웠던 기억이 났다. 고작 그 텍스트 하나가 뭐라고 쉽사리 지우는 것조차 어려웠는지. 지금 생각해도 씁쓸한 미소가 그려졌다.
'곁에 보호자가 없는 상황이라면 출산 예정일 전에 입원하시는 게 좋아요. 진통이 예정일 보다 빨리 느껴질 수도 있거든요.'
조심스레 말하는 의사에게 무슨 표정을 지었더라.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보호자, 남편, 애인- 그런 특정 누군가가 생각나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반사적으로 미소를 지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9개월 정도가 지난 지금은 거의 반사작용이 됐다.
큰 보스턴 가방에 옷과 여러 가지를 쑤셔 넣으며 눈물을 꾹꾹 삼켰다. 뽀킹, 그냥 캐리어에 넣을 걸 그랬다. 나는 보스턴 가방 따위 산 적도 없는데. 끌고 다니기 좋을 캐리어를 선택했어야지. 어떻게든 그의 흔적을 기억하고 싶은 나의 무의식이 원망스러웠다. 그래도 그 보스턴 가방을 포기하지 않았다. 어깨에 묵직하게 느껴지는 무게가 그를 생각나게 했다. 그저, 그 큰 보스턴 가방이라고 붙잡아야 숨이 트일 거 같았다.
해리, 해쟈, 해롤드, 베이비 케이크-
해리는 유명한 가수다. 아, 저번에는 연기도 했다. 유명한 시트콤 드라마의 카메오로 깜짝 출현한 것을 챙겨봤다. 처음 하는 연기 치고는 로맨스 연기를 기가 막히게 소화했다. 어쩌다 보니 애절하고 절절한 주인공의 전 애인 역할을 맡았는데, 그 감정이 내게 전해져 가슴이 시릴 정도였다. 바보같이.
포근포근 곱슬머리의 해리는 귀여움과 더불어 유머러스함도 있었다. 저번 토크쇼 방송에 나온 걸 챙겨봤는데, 나까지 덩달아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처음으로 뱃속 아기가 배를 콕 찔렀다. 뭐지, 왜 하필 해리를 보고 있을 때... 기분이 이상했다. 그 미묘함 속에서 토크쇼 주제는 재빠르게 첫사랑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뽀킹, 그놈의 첫사랑.
'해리의 첫사랑은 누구인가요?'
"뽀킹, 리모컨 어디 있어."
'엄... 제... 첫사랑은...'
"아까 여기 있었는데!!"
'제ㄴ-'
TV가 꺼지자, 배를 꾹꾹 누르던 아기도 귀신같이 조용해졌다. 이렇게 눈치 빠른 건 누굴 닮은 거지. 내 이름에도 J가 들어갔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아가, 미워하지 말아 줘. 혹시나 아기가 다음에도 출렁이는 내 심장을 느낄까 봐, 그때부터 해리가 나오는 토크쇼 종류는 보지 않았다. 토크쇼랑 기사, 특히 연애 기사는 더욱.
[해리 스타일스, 3살 연상 모델 올리비아와 열애설]
"산모님, 오늘 하루 괜찮으셨어요?"
멍하니 핸드폰을 바라보는데,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둘러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네, 정말로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올리비아는 성격이 좋기로 유명한 모델이었다. 털털하고 밝아 보이는 게 그 매력이다. 특히 웃을 때, 해리처럼 활짝 웃었다. 마치 해바라기처럼. 해리와 정말 잘 어울렸다. 해리는 그런 멋진 사람을 만날 자격이 충분했다. 아니, 이미 충분을 넘어 흘러넘칠 것이었다.
[해리 스타일스, 올리비아와 열애설 부정...'그저 친구 사이']
기분이 좋은 내가 미울 지경이었다. 해리의 행복이라면 뭐든 축하해 줄 입장에도 모자랄 판에, 고작 '부정'이란 단어 하나에 감정이 이리도 뒤바뀐다.
기사가 뜬 인터넷 창을 지우고 습관처럼 핸드폰 배경화면을 바라봤다. 해리와 함께 찍은 사진이 보였다. 사진 속 나의 아무 걱정도 없어 보이는 저 밝은 웃음이 이제는 부러웠다.
해리와는 어릴 때부터 인연이 있었다. 옆집 곱슬머리 꼬맹이와 그렇게 길고 긴 관계를 맺게 될 줄은 몰랐지만,
'루, 루이, 루이스-'
'응, 해리, 해쟈, 해롤드-'
해리의 가수 생활을 누구보다 응원했던 건 나였다. 어린 시절부터 숟가락을 들고 뚱땅뚱땅 노래를 불렀을 때부터 심상치 않다는 것은 알았다. 그래서 주변에서 해리의 큰 꿈을 짓밟을 때마다 그의 귀를 막아주는 건 내 몫이었다. 그 때문인지, 해리가 부모님의 베이커리를 도와 티끌 같은 돈으로 비싼 축구공을 사준 것보다 나를 위해 직접 작사 작곡한 노래가 더 좋았고, 장미 99송이 이벤트보다 잠들기 전 품 안에서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더 좋았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돌아보니 돈도 명예도 없던 그 시절이 가장 사랑과 낭만이 묻어났다. 그리고 그 애틋한 감정은 아직도 내 발목을 붙잡는다.
'루이 씨, 부탁드려요.'
사실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도. 내 존재가 해리에게 어떤 영향력을 미치고 있을지는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막대한 돈을 벌어야 하는 회사 입장에서는 매우 곤란했을 것이다.
'의심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어요. 본격적인 파파라치라도 붙는다면 해리도 루이 씨도 좋지 않을 거예요.'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등장한 신입 보이 밴드. 첫 앨범부터 성공한 그룹. 그중에서 인기 비중이 높은 편인 해리 스타일스.
그런 해리 스타일스가 항상 끼고 다니는 남자. 루이 톰린슨.
처음에는 매니저-라는 거짓말로 해리의 곁에 있을 수 있었다. 사실 거짓말이라 할 수는 없었다. 한 평생을 해리의 곁에서 함께했다. 그를 챙겨주는 건 나에게는 일상이었다. 특히 해리는 내가 없으면 손톱을 박살 내며 불안 증세를 보였다. 그래서 회사도 처음에는 내 존재를 눈감아줬다.
문제는 우연히 해리와 내가 무의식적으로 껴안는 장면이 사진 찍혀 팬들 사이에서 돌고 말았던 것이었다.
ㄴ 이거 합성 아니고 진짜 해리야?
ㄴㄴ ㅇㅇ 찐
ㄴ 해리랑 껴안고 있는 남자 누군데?
ㄴㄴ 루이 톰린슨이라고 매니저임
ㄴㄴㄴ 매니저랑 허그? 매니저 맞음?
ㄴㄴㄴ 매니저가 뭐 저래?
ㄴ 껴안을 수도 있지 왜 그래
ㄴ 저 매니저 해리만 챙겨주던데, 걍 해리 전용 매니저 아냐?
ㄴㄴ 신인이 뭔 전용 매니저가 있음?
ㄴㄴ 근데 ㄹㅇ 해리만 챙겨줌
ㄴ 애들 덕질하러 왔는데 매니저를 왜 봐야하냐
ㄴ 자기가 연예인인줄 아나
ㄴ 근데 저 매니저 잘생김
ㄴㄴ 얜 뭐냐
해리는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정식으로 날 소개하고 싶어 했다. 물론 내가 미쳤냐며 말리긴 했지만, 해리는 진심이었다. 어디서 용기가 생겼는지, 회사 사람들 앞에서는 우물쭈물 눈치만 보던 해리가 대표실 문까지 두드렸다고 들었다. 물론 몇 시간 뒤에 눈이 팅팅 부은 채 눈물을 훌쩍이며 방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초조하게 기다리는 내 품에 안겨 축축해질 정도로 눈물을 쏟아냈다. 중간에는 숨까지 헐떡이길래, 애가 잘못되는 건 아닌가 걱정할 정도였다. 다행히도 해리는 펑펑 울다가 쓰러지듯 잠에 들었다.
'루이 씨, 저희도 많이 버틴 거 아시죠?'
총괄 매니저, 허니가 하는 말에 얌전히 고개만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사실 내 존재를 묵인해준 것만으로도 많이 봐준 것을 알고 있었다. 어떤 신입이 데뷔 첫날부터 팬들 몰래 애인을 끼고 돌아다닐까. 연차가 쌓였다면 몰라도, 해리는 데뷔한지 세 달 밖에 되지 않았다. 그만큼 연예계 생활에 미숙했고 서툴렀다. 사랑을 담아 덕질하는 팬들 입장에서는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해리 스타일스의 '애인'이라 소개되는 내 존재가 달갑지 않을 것이다. 물론 어떤 사람은 우리의 사랑을 응원하겠지만, 나는 해리를 향한 작은 비난이라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해리는 앞으로 가수로써 더 빛나야 할 존재였다. 그리고 이미 팬들의 사랑을 맛본 그는 더 이상 평범한 소년으로서 살아갈 수 없었다. 억지로 사랑이라는 족쇄를 채워 곁에 붙잡아두더라도 저 멀리 날아갈 것이 분명했다.
해리에게서 멀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했을 때, 나는 잠든 그의 곁에서 눈물을 죽였다. '헤어지자' 한 마디로는 통하지 않을 것을 알았다. 함께한 세월이 오래된 만큼, 해리는 날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매정하게 상처를 줘야 했다. 가장 최악의 방식으로 이별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 충격이 나의 거짓말을 숨겨주길 바랐다.
'형, 형... 그거 진심 아니잖아.'
'진심이야. 나 너무 힘들어. 너 오디션 합격하고 나서부터 나 한 번도 행복했던 적이 없어.'
'그게 무슨 소리야... 형, 형 내가 노래하는 게 좋다고 했잖아.'
'응, 좋아. 근데 내가 못 버티겠어. 내가 엄마도 아닌데, 언제까지 너 챙겨줘야 돼? 이제는 나도 좀 성숙한 사람을 만나고 싶어. 어린애는 지겨워. 남자로 보여야 연애를 하지 해리. 너랑은 연애가 아니라 소꿉놀이를 하는 거 같다고.'
잔인했다. 첫 키스도 첫 관계도 온통 내가 다 가져갔으면서, 이제는 지겹다며 밀어냈다. 이렇게 무책임하고 최악인 연인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미안해 해리.
너의 하나뿐인 첫사랑을 비참하게 망가트려서 미안해.
해리는 내 말을 듣고 울먹거리며 뛰쳐나갔다. 그 모습에 나까지 덩달아 울음이 터질까 봐, 급하게 도망쳤다. 달리는 차에서 핸드폰 알람이 울렸을 때, 그리고 허니의 "고마워요 루이 씨." 문자를 마주했을 때, 비로소 억눌린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래도 마음 한 편으로는 안심되었다. 적어도 해리의 곁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았으니, 그의 상처가 금방 아물지 않을까 싶었다.
아직도 울고 있지는 않겠지. 우리 해쟈, 많이 울면 눈과 볼이 빵빵하게 부풀어 오르는데. 내일 앨범 인터뷰 있다면서.
많이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를 향한 너의 마음이 속상함이 아닌 분노로 불타올랐으면 좋겠다. 그래서 더 높게 올라갔으면 좋겠다. 내가 널 다시는 바라보지도 못하게. 욕심내지 못하게.
그날이 있고 며칠 안 가서, 해리에게서 편지가 왔다. 해리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이사를 끝내고 집을 마지막으로 둘러보고 있을 때, 우체국 직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집 앞에 있었다. '톰린슨 씨 맞으시죠?'라는 말에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더니 편지 하나를 건넸다.
'루이에게, 해리가.'
억지로라도 그를 미워할 수 없어서, 그래서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로 끝난 길고 긴 편지는 읽는 내내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다. 난 심장이 뜯겨나갈 정도의 독설을 뱉었는데, 어떻게 내게 침 하나 뱉지 않을 수 있어? 어떻게 너는 마지막까지 내게 다정할 수가 있어?
이런 점을 보면, 나에게 너는 너무 버거운 존재였을 지도 모른다. 나에 비해 아니, 그 누구보다 멋지고 빛났다. 그래서 마음을 더욱 내려놓을 수 있었다. 나와는 너무 다른 세상에 사는 것이 느껴져서, 비난을 하는 그들을 무시하고 미안하다며 너에게 달려갈 수 없었다. 눈물에 욕심을 가득 흘려보내고 괜찮을 줄 알았다. 너의 앨범을 사고 노래를 부르고, 그 정도의 먼 거리라면 만족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정말, 갑작스럽게 등장한 아이의 존재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변수였다.
아이의 존재는 해리와 이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알아챘다. 속이 더부룩하고 음식이 안 넘어가는 게 이별의 후유증이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생명의 잉태였다. 못된 나에게도 신은 기회를 주는 건가 싶었다. 해리를 멀리서 밖에 바라볼 수 없으니, 그의 핏줄인 아이라도 주는 신의 자비가 아닐까.
"산모님, 날씨도 좋은데 산책 한 번 갔다 오시겠어요? 너무 병실에만 계신 거 같아서요. 산책은 아기한테도 좋아요."
햇살이 예쁘게 창문을 비추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바라본 것이 얼마나 되는지. 그때 해리가 내게 보내준 편지를 병실 서랍에 조용히 넣었다. 소중한 나의 보물이니까, 고이 간직해야 했다. 하루에 수십 번이나 읽은 탓에 종이 끝부분이 살짝 닳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 편지를 읽을 때마다 아기가 크게 반응해서 좋았다. 처음에는 슬펐지만, 나중에는 애틋해지는 감정만 고스란히 남은 편지였다. 크게 부푼 배를 붙잡고 조심스레 병실을 나섰다. 배가 많이 무거워져서 오래 걷지는 못할 거 같았다. 그러나 아이에게도 예쁜 하늘을 보여주고 싶었다.
해리도 푸른 하늘을 좋아했다. 내 눈동자 색깔을 닮았다며, 매일 같이 하늘 사진을 내게 보냈다. 그리고 그 사진을 하나하나 저장했다. 아, 아직도 내 핸드폰 갤러리에 그 사진들이 가득 쌓여 있다. 해리의 흔적은 단 한 개도 지우지 않았다. 이사할 때, 함께 처분하려 했지만 도저히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중에는 포기하고 해리 물건으로 방을 가득 채웠다. 채취가 날아가 버렸으면, 해리가 애용했던 섬유 유연제나 향수를 사용할 지경이었다.
난 아직도 그때 그 시절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떠나고 싶지 않았다.
"baby, you light up my world like nobody else~..."
해리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천천히 움직였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가 못 참고 계단을 선택했다. 병원 중앙에 위치한 큰 계단에 난간을 잡아서 간다면, 어렵지 않게 내려갈 수 있다. 병원에 인원이 많아 살짝 불안하기도 했지만, 어차피 몇 안 되는 계단이었다.
"미안해요 루이 씨."
쿵
손끝보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핸드폰 화면이 빛났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선명하게 해리와 함께 찍은 사진이 보였다.
해숙루이 래리
영해숙영루이라 해숙이도 어리지만 루이도 많이 어린 편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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