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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2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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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크 소리에 문을 여니 드레스화이트 정복을 차려입은 행맨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조금 놀라긴 했지만 의외의 인물은 아니었다. 물론 행맨이 나의 관사를 따로 찾아올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으나 언젠가 한번은 이런 일이 있으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지금이 미션 최종인원 발표 12시간 전이라는 점은 예상 밖이었다.




잠시 같이 걷자며 불러내놓고 행맨은 한참을 말이 없었다. 오른쪽에는 파도가 철썩거리는 소리, 왼쪽으로는 식당과 술집에서 들려오는 시끌벅적한 소리, 그 사이 우리 둘만 고요 속을 걷고 있었다. 덤덤하게 보폭을 맞춰 걸으면서도 아까부터 신경쓰이는것 한 가지는 행맨이 계속 힐끔힐끔 내쪽을 훔쳐본다는 것이었다. 볼거면 마주 세워놓고 당당하게 보던가 신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해변을 걸으며 몰래 곁눈질만 하는건 또 무엇인가. 급하게 나오느라 거울을 못 봤는데 내 얼굴에 뭐가 묻기라도 했나.


"...나를 왜 불러냈어?"


결국 침묵을 먼저 깬건 나였다. 행맨은 당황하지 않고 그대로 내쪽으로 몸을 완전히 돌렸다. 나도 멈춰서서 그를 마주했다. 지긋한 눈빛이 한층 더 깊어졌다.


"너 코끝이..."


코끝이 뭐? 역시 여기에 뭐가 묻은걸까. 손을 올려 닦아내려던 참이었다. 


"참 동그랗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지금 저걸 얘기하자고 이 밤에 관사까지 찾아온걸까. 맥이 빠진 나는 대답 대신 다시 휘적휘적 걷기 시작했다. 괜시리 신경이 쓰여서 간질거리는 코끝을 애써 무시하는데 내 뒤를 바짝 쫓아온 행맨의 목소리가 이어서 들렸다.


"코끝이 참 동그랗고, 반짝거리네."
"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데 네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어서 좋다. 동그랗고 반짝이는 코끝도 알게 되고..."


오늘 밤은 예상치못한 전개의 연속이다. 사실 행맨이 나에게만 무른 것은 알고 있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누군가를 대할 때 일단 조용히 관찰하는 버릇이 있다. 상대의 행동, 표정, 말투, 단어, 발화법 등 많은 데이터를 수집하여 어느정도 파악이 된 후에 다가가는게 편했다. 그리고 행맨은 꽤나 읽기 쉬운 남자였다. 오만한 행동을 해도, 나에게는 직접 말을 걸지 않아도, 묘하게 따라붙는 시선이나 사소한 챙김에서 그가 나에게만 특별하게 품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미션이 끝난 뒤 그로부터 데이트 신청 정도는 있지 않을까 짐작하던 차였다. 조금 부끄럽지만 그런 고백의 순간을 예상해서 거절의 멘트까지 생각해두었다. 앞으로 계속 마주칠 수 있는 동료니까 최대한 그의 자존심을 건들지 않고 좋게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행맨.. 나를 귀여워하네.'

조금 놀랐다. 그의 감정이 이런 순수한 호감일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차갑고 맑은 공기와 깊은 어둠을 품은 밤하늘, 그 사이사이 선연한 빛무리를 만들며 총총대는 별을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행맨의 시선은 여전히 나에게로 꽂혀있었다. 기분 탓일까. 아니면 가로등의 주황불빛이 그의 얼굴에만 기가 막힌 각도로 드리웠던걸까. 나를 바라보는 행맨의 얼굴이 유독 예쁘게 물든 것처럼 보였다. 나는 홀린듯 그의 얼굴을 감상하다 문득 거슬리는 한 단어를 떠올렸다. 


"자신만만한줄 알았더니 너도 미션이 걱정되긴 한가봐. 마지막이라는 말을 입에 담는걸 보니."
"나말고 네가."
"뭐?"


아, 역시 행맨은 행맨이었다. 귀여워한다는건 결국 어리고 경험이 부족한 나를 무시한다는 말이겠지. 그 언젠가 나의 콜사인에 유치한 별명을 붙인것처럼. 굳이 미션인원 발표를 하루 앞두고 나뿐만 아니라 내 목숨줄을 쥐고 있는 파트너까지 욕보이기 위해 이 수고로운 발걸음을 했다니 그의 부지런함에 실소가 터졌다. 그러나 실컷 쏘아주려고 쳐다본 그의 얼굴엔 예의 거만한 눈빛이나 얄미운 보조개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약간 울듯한 표정을 짓던 그의 입에서 나직이 한 단어가 흘러나왔다.


"...버드 스트라이크."


나는 말문이 막혔다. 나조차도 이미 잊어버린 일인데 얘는 그걸 여태 마음에 담아뒀나보다. 그러고보니 내가 행맨의 마음을 처음 눈치챈 것도 사고 후 병실을 찾아온 그의 모습을 봤을때였는데, 아 이런..



'행맨 진짜로 나를 좋아하나봐.'

행맨을 읽기 쉬운 사람이라고 자부했던게 부끄러울 정도로 새삼 깨닫는 그의 진지한 감정에 나는 몸둘 바를 몰랐다. 생각보다 훨씬 행맨은 나를 좋아하고 있었다. 아니 그뿐인가. 나를 귀여워하고 사랑스러워하고 심지어 걱정하고 있다. 그리고 가장 당혹스러운건 이런 그에게 내가 준비해온 거절의 멘트를 차마 꺼낼 수도 없다는 점이었다. 아니 꺼내기 싫다는 쪽에 더 가까웠다.



내 둥글고 반짝이는 코 끝과 두뼘 남짓한 거리에 그의 곧고 매끈한 코가 다가왔다. 나는 하마터면 이 로맨틱한 공간과 생사를 건 미션을 하루 앞둔 시간의 특수성을 빌려 그에게 휘말릴뻔했다. 그러나 끝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대로 입을 맞추면 정말 마지막일것만 같잖아.


"뭐, 일단 내일 최종인원 발표를 듣고 이런 걱정을 해도 충분하지 않겠어? 감히 내가 잘난 행맨의 윙맨으로 날 수 있을지 어떨지도 아직 모르는데.."

 
애써 가볍게 주위를 돌리려는 나를 보며 행맨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괜히 플래그 세우지 말고 우리 꼭 다음에 얘기하자. 알겠지?"


그는 꼭 나의 마음을 읽은 듯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 다시 한참을 나란히 걸었다. 아까보다 부쩍 가깝게 걷는 탓에 서로의 손끝이 계속해서 스쳤다가 떨어졌다. 안그래도 틀린 데이터를 수정하고 새로운 결과값을 도출하느라 머릿속이 복잡한데 온통 신경이 손끝으로 향하느라 더 엉망이었다. 그때 내 손가락 사이로 행맨의 따뜻한 손이 감겨들어왔다. 이번에는 나도 피하지 않았다. 항상 마지막을 두려워하지 않던 남자가 나와의 다음을 간절히 기약하고 싶어한다. 사실 그때 이미 나의 대답은 정해졌는지도 모르겠다. 그에게는 다음에 말해주겠지만.



















행맨의 마음을 눈치채고 미리 거절할 생각을 하던 밥이 행맨이 진심을 담아서 고백하려는 순간에 감겨버리는게 보고싶었는데... 둘이 저렇게 아련하고 비장하게 헤어져놓고 다음날 행맨만 미션 떨어져서 머쓱했을듯


행맨밥 파월풀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