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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6 14:51
탄에게 디를 주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디셉의 대의를 위해 열심히 일했으니 업계포상 줘야할거 아니야
MTMTE ㅅㅍㅈㅇ
코믹스와 트포원 세계관 취사선택해 섞음 주의
"D-16, 관리자가 너 찾는다."
D-16은 동료를 도와 불필요한 암석 조각들을 부수던 작업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는 뺨에 묻은 그을음을 닦아내며 물었다. "나를? 어느 관리자가?"
"그… 엄청나게 커다란 놈." 다른 채굴팀의 광부는 드물게도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메가트로너스 프라임의 가면을 쓰고 있는 관리자 말이야."
"아, 그 메크."
D-16은 그가 누구를 지칭하고 있는지 깨닫고는 들고 있던 기계를 손에서 놓았다. 그 관리자라면 광산 내에서 으뜸 가도록 유명했다. 처음에는 메가트로너스 프라임의 광적인 추종자라는 인상을 주는 가면 차림으로 유명해졌고, 그 후에는 온갖 음습하고 험한 뒷소문으로 유명해졌으니까. 광부들 사이에서 평가가 좋지 않은 관리자야 많고 많았지만 광부와 감독관, 관리자 모두의 입방아에 좋지 않은 방식으로 오르내리는 관리자는 흔치 않았다. D-16은 왜 하필 그가 자신을 불렀는지 의아해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피가 잡히는 일이라면… 어느 정도는 있었다. 아마도.
"이봐, 조심해."
이름을 모르는 광부는 D-16을 툭 치며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뭔 일인지는 몰라도 좋은 이유로 부르는 건 아닌 것 같더라. 그놈 평판이… 너도 알잖냐." 그는 누가 엿들을새라 주변을 휘휘 둘러보고는 덧붙였다. "그놈 주먹에 맞다가 골로 간 놈들이 한둘이 아니라 들었다고. 다 코그 있는 메크들이었다는데. 그러니까 그 자식이 손을 치켜들려는 낌새가 보이거든 죽을 힘을 다해 도망쳐야 해. 알겠어?"
D-16은 불안해보이는 광부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낯은 벌써 끔찍스러운 참사가 날 것을 예견한 것처럼 잔뜩 굳어 있었다. 굳이 개인 쿼터에 불러 체벌을 가하는 관리자들은 많지 않지만―대개의 경우 현장에서 즉각적인 응징을 가하는 편이다―그렇다고 아예 그런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경우에는 체벌의 내용이 다른 의미로 지독했다.
D-16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게도 동료의 불안한 마음이 전염되지는 않았다. "…알겠어."
D-16은 광산을 가로질러 관리자 구역을 향해 걸었다. 지저분하고 왜소한 코그리스가 왜 이곳을 걷는지 흘겨보던 관리자들도 그의 얼굴을 보면 시선에 담은 감정을 바꿨다. 그가 어디로 향하는지 목적지가 분명해진 다음에는 심지어 연민의 눈초리로 지켜보는 이들도 있었다. D-16은 주목받는다는 거북함에 휩싸여 계속 발을 옮겼다. 그는 악명 높은 새 관리자가 부임한 이래로 그와 엮이는 일이 이상할 정도로 많았다. 이미 개인 쿼터까지 호출당한 적이 여럿 있었으니 다들 그같은 코그리스 광부가 여기까지 와서 돌아다니는 이유를 알 만하고도 남았다.
어딘가에서 숨 죽인 큭큭거림이 들려왔다. 어느 관리자가 동료의 오디오리셉터에 대고 속삭이는 소리였다. D-16은 스치듯이 그의 손짓을 눈에 담았다. 동그랗게 만든 디짓에 다른 디짓을 들락거리는 동작이었다. 불쌍한 놈. 오늘 누구 하나 씰 따이겠네.
D-16은 문 앞에 서서 딱 두 번 노크했다. 뒷짐을 진 채로 기다리고 있자 주변에 포진해 있던 흥미와 연민 어린 눈길들이 약속이라도 한듯 싹 사라진다. D-16은 대답이 없는 문을 뚫어져라 올려다보았다. 문 너머에서는 복도까지 퍼지는 유려한 음악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광산에 부임한지 얼마 안 된 새 관리자의 악명을 더욱 증폭시키는 요소 중 하나였다. 하루에 여럿 꼴로 목숨과 신경줄이 깎여나가는 지하 광산에서는 누구나 락이나 헤비메탈 같은 요란스러운 음악을 좋아하지, 듣는 것만으로도 절로 리차징에 들어야 할 것 같은 고아한 클래식을 선호하는 경우는 없었다. 제정신 박힌 놈이라면 아무도 그런 것은 듣고 싶어하지 않았다.
"누구지?"
문 너머의 관리자가 물었다. D-16은 보이스박스를 재정비하고 대답했다. "D-16입니다. 저를 호출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들어오게'라는 말이 들릴 것을 예상했지만 아니었다. 문이 스스로 달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여러 번 본 광경이었지만, 눈앞으로 메가트로너스 프라임'처럼' 생긴 얼굴(가면을 썼으니까, 당연했다)이 닥쳐드는 것은 항상 동요하지 않기가 더 어려운 일이었다. 시야를 꽉 채우는 육중한 거구에서 오는 중압감도 한몫했다. D-16은 넥케이블에 힘이 들어간 채로 관리자와 마주했다. 은은하게 들리던 음악소리가 더 커졌다.
"안으로 들어오지."
D-16이 방으로 들어서자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관리자의 사무실은 몹시 삭막했다. 메가트로너스 프라임의 열렬한 팬인 것처럼 보이는 외관과 다르게 사무를 보는 책상과 주변의 수납장 위에는 추종심의 증거물들이 전무했다(만일 D-16이 이 사무실의 주인이었다면 그는 벽면 가득히 메가트로너스의 포스터를 붙여놓았을 것이었다). 보고가 담겨 있거나 결재를 기다리는 데이터패드들이 책상에 놓여 있고, 음악을 틀어놓기 위한 스피커가 하나 있으며, 방 한켠에 보급을 위한 에너존 큐브가 가지런히 쌓여 있는 것이 구비되어있는 기물의 전부였다. 갓 부임했기에 꾸미지 않았다기보다는 언제라도 이곳을 떠날 채비를 마쳐놓은 듯한 풍경이었다.
D-16은 책상 앞에 다시 뒷짐을 지고 선 채로 사무실 내부를 오가는 관리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큐브도 아니고 컵에다가 에너존을 담은 채 책상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빨대까지 꽂아서… 심지어 쨍한 분홍색이다. 난 스파클링이 아닌데 말이지.
"앉으시지요."
관리자는 D-16의 맞은편에 앉으면서 손짓했다. 그는 말없이 옵틱을 굴리고 있는 D-16을 바라보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앉혀드리는 것을 선호하십니까?"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내가 강제로 앉게 해주랴?'처럼 사뭇 험악스러운 발언처럼 들렸다. D-16은 허둥지둥 자리에 앉았다. "아니, 아닙니다! 제가 앉,"
그는 관리자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말실수를 자각했다. 그는 고쳐 말했다. "…내가 앉을게. 괜찮아."
이게 가장 괴이한 점이었다. 이 관리자는 첫 만남의 순간부터 D-16에게 저를 하대할 것을 '요청했다'. 게다가 그는 D-16에게 자연스럽게 존대어로 대답하며 상급자처럼 우대함으로써 끊임없이 그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마치 한낱 광부에 불과한 D-16이 자신의 적법한 주인이라고 여기기라도 하는 듯한 태도였다. 누굴 거느려본 경험이 없기로서니와 그런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던 코그리스에게 있어서는 당황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결국 다른 이들의 시선이 있는 곳에서는 뒷말이 나오니 여타의 평범한 관리자처럼 말해달라고 거의 애원을 하고 나서야 그는 그나마 요청대로 행동해주었다. 그러나 그들밖에 없는 사무실에서는 D-16 역시 이 취향 이상한 관리자의 요청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어색하게 컵을 쥐며 말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저, 아니 나를 부른 거야?"
"탄."
D-16이 영문을 모르고 그를 바라보자 관리자는 우아한 동작으로 스피커를 꺼트리며 말했다. "이름으로 불러주십시오. '탄'이라고."
"아, 그래… 탄."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지명을 그대로 이름 삼다니, 독특한 일이다. 자기 고향이라거나 그런 것이겠지. D-16은 예의상 에너존을 죽 빨며 남모를 생각을 굴렸다. 관리자들이 먹는 것이라 뒷맛 하나 남지 않고 깔끔했다. 친구의 몫으로 좀 챙겨갈 수 있는지 물어보는 것은 지나치게 선을 넘는 일일까 싶다.
"오라이온 팩스가 A 섹터의 관리자에게 반항심을 보였다더군요."
방금 생각하고 있었던 친구의 이름이 그대로 관리자의 입에서 나오자 D-16은 빨대에서 립 플레이트를 떼어내고 컥컥거렸다. 방금 들이켠 에너존이 목구멍으로 역류하는 기분이었다. 그는 가까스로 입가를 닦으며 보이스박스를 작동시켰다.
"…그 녀석이 또?! 대체 무슨 일로?"
"관리자가 일일 할당량 미달의 사유로 채굴팀 전원의 에너존 배급을 깎는 것을 보고 부당하다는 의견을 표했다고 합니다." 탄은 책상에 놓인 데이터패드를 읽으며 말했다. "파이라마그나의 팀입니다. 팀원 중에 메디베이로 이송된 자가 있어 목표 수치를 달성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프라이머스여 맙소사, 대체 팩스 그 자식이 무슨 관계가 있다고 거기까지 가서 끼어든 거야?"
사실 상황이야 짐작하고도 남았다. 관리자가 온 섹터가 울리도록 호통을 치는 소리를 듣고 가봤다가 말도 안 되는 장면이 펼쳐지는 걸 보고 달려든 거겠지. 타인의 입에서 친구가 벌인 사건을 전해 듣는 것은 이 암석투성이의 지하 광산에서 난데없이 벼락을 처맞은 느낌이 들게 한다. D-16은 이마를 싸매며 물었다. "제발 거기서 끝났다고 해줘. 다른 사고는 더 안 쳤다고 말이야."
"관리자가 본보기로 파이라마그나의 팀원을 걷어차 쓰러뜨리자 그자의 동체를 온몸으로 들이받았습니다. 다른 섹터의 관리자가 달려와서 그를 강제로 떼어놔야 했다더군요."
"제기랄."
D-16은 이마를 붙잡은 손을 턱으로 미끄러뜨렸다. 상급자에게 대드는 것도 죄질이 나쁘지만 상급자에게 감히 폭력을 가하는 것은 중징계감이기까지 하다. 등급표에서 배지가 최소 네 개는 떨어져나갈 건이었다. 그런데 그 녀석에게 더 떨어져 나갈 배지가 있기라도 하던가? D-16은 발로 바닥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초조함 때문에 나온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A 섹터의 관리자는 제가 오라이온 팩스가 소속된 팀의 담당자라는 것을 알고 제게 체벌권을 이양했습니다. 징계를 강력히 희망한다는 고견과 함께요."
"……그래서? 그걸 내게 알려주려고 부른 거야?" D-16은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튀어나갈 것처럼 허리를 숙였다. "넌 어떻게 할 셈인데?"
탄은 침묵했다. 종잡을 수 없는 성격과 험악한 인상, 그리고 괴악한 취향으로 소문이 무성한 관리자의 얼굴은 가면에 가려져 도무지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추측할 도리가 없다. 하지만 만약 저 립 플레이트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자신이 예상하는 문장이라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는 명백했다. 그 자식이 손을 치켜들려는 낌새가 보이거든 죽을 힘을 다해 도망쳐야 해. 알겠어? 물론 그런 상황이 온다 하더라도 도망칠 생각은 추호도 없다. D-16은 자신을 말없이 바라보는 붉은 옵틱을 사납게 마주 응시했다. 이윽고 거구의 관리자가 말했다.
"선처를 원하십니까?"
"어?"
"오라이온 팩스의 선처를 원하시는지 여쭤본 겁니다."
D-16은 옵틱을 깜빡였다. 그는 한참 후에야 탄이 결정을 통보한 것이 아니라 그의 손에 선택권이라는 이름의 권력을 쥐여주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건… 가동을 시작한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D-16은 혼란스러워하며 눈썹 사이를 좁혔다.
"그걸… 내가 결정하라는 소리야?"
"당신이 결정하시면 저는 따를 겁니다."
음성 모듈에 오류가 일어난 것처럼 말문이 턱 막혔다. D-16은 입만 벙긋거리다가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러니까, 이게 '맞는' 상황인 건가? 코그가 있는 관리자가 코그 없는 일개 하급 광부의 말에 따르겠다는 것이? 그는 순간 이것이 어떤 종류의 시험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해보았으나 탄에게서 풍겨나오는 분위기는 엄숙할 정도였다. 그는 진심으로 D-16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것에 따르겠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만일 그 발언의 의도를 의심하거나 신실성을 폄하해버린다면 그는 모욕감을 느낄 것이다. 본능적으로 그러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정상적인 사고방식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가 없다. 도대체 이 관리자는 제게 무엇을 원하기에 이토록 유별나게 행동하는 것일까?
D-16은 손가락으로 무릎 파츠를 두들기다가 말했다. "조건이 뭔데?"
"조건 말입니까?"
"그래, 조건." D-16은 목구멍의 케이블로 껄끄러운 신음을 삼키며 말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면 그만한 대가가 있을 것 아니야. 그게 뭔지 알고 싶어."
D-16의 브레인모듈로 그간의 경험을 통해 축적된 데이터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간혹 광부들 중에서는 더 나은 근무 환경이나 더 많은 에너존 배급을 두고 관리자들과 모종의 계약을 맺는 경우가 있었다. 물론 계약이란 무늬만 그럴싸할 이름일 뿐 코그리스에게 더 유리하게 맺어지는 것은 없었다. 대부분은 광부 쪽에서 추문이나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조건이 많았고, 다시 말해 그들은 반드시 정신적인 소모나 신체적인 대가를 상납해야만 약속한 것을 받을 수 있는 입장인 셈이었다. 전용 샌드백이 되기로 약속해 실컷 얻어맞고는 팀원 분량의 에너존을 받아오는 정도는 경악할 만한 일도 아니었다. 어떤 광부는 관리자의 개인 쿼터로 불려간 다음이면 어김없이 메디베이로 이송되었는데 그를 두고 주변 동료들은 빌어먹을 관리자가 그를 신체적으로 혹사시켰기 때문이라고 수군거렸다. 그들은 그 행위를 인터페이스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다음 순간 탄은 의외로 감정을 짐작하기 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착각일 게 분명했지만, D-16의 눈에는 그의 머리 위에 거대한 물음표가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한결 가벼워진 어투로 말했다.
"조건은 없습니다. 그런 것이 필요하십니까?"
"그럴 리가!" D-16은 엉겁결에 외치듯이 말했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저를 보는 상대에게 변명하듯 내뱉었다. "하지만 말도 안 되잖아? 아무런 조건 없이 그냥 내 말을 들어주겠다니! 뭐 자선사업가라도 되는 거야? 내게 원하는 게 있으니까 바라는 대로 해주겠다는 거 아니야?"
아무것도 할 필요 없이 받기만 하라니, 세상에 그런 이상적인 개념이 존재하기라도 했던가. D-16은 불이익을 감수하며 코그리스의 편을 들어주겠다는 그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대가 없는 특혜는 기만의 다른 이름이었다. 편의를 봐주는 것에는 언제나 숨은 의도가 들어있었다. 코그가 있는 자들은 언제나 그들에게서 무언가를 착취하려 들었다. 힘을 가진 자라면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고 자연스러웠다. 자신조차 권력을 가졌더라면 그렇게 행동하고도 남았을 텐데 이 관리자는 대체 왜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나서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제 결정이 이상하게 느껴지십니까, D-16?"
D-16은 그의 말에서 반복되는 어조를 깨달았다. 그는 거듭 질문의 형태로 대화를 이어가려 하고 있었다. 그 자신의 것보다 D-16의 의사가 중요하다는 듯이. 그들간의 대화에서 항상 위화감을 불러일으키던 원흉도 바로 그 지점에 있었다. 그들은 몇 번 대화를 나누며 안면을 튼 사이였지만 아무리 잘 쳐 줘야 그것이 고작인 관계였다. 감독관보다도 상위직인 관리자가 하급 광부에게 일일이 사견을 물어가며 중대사를 결정지으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의 위치에서 하급자를 거머쥐고 멋대로 휘두르기 위함도 아니라고 한다. D-16의 브레인모듈에서 논리회로가 과부하를 일으키기 일보직전까지 치달았다. 그렇다면 대체 왜? 대체 왜 나에게만 이런 식으로 특별 취급을 하려는 건가. 내가 뭘 어쨌다고? 난 그저 아무런 관심도 받지 않고 내 역할을 다하고 싶을 뿐인데, 이런 식의 '특혜'가 반복되고 나면 주변의 인식도 달라지지 않을까? 그런 것은…
싫었다. "그래, 이상해."
아무리 편하게 대하라 했지만 선을 넘은 발언이었다. 말이 립 플레이트 바깥으로 튀어나가자마자 아차 싶었지만 다시 주워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넌… 좀 이상해."
의자가 거친 소음을 내며 밀려나갔다. D-16은 책상을 짚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선 관리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책상을 돌아 걸음 하나하나에 온 힘을 실어담듯이 D-16에게로 다가왔다. 그가 두 손으로 의자 팔걸이를 잡자 D-16은 완전히 옴짝달싹 못하고 제자리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등을 의자에 밀착시켰다. 관리자의 붉은 옵틱이 코앞에서 번뜩거렸다.
"제가 '이상합니까'? 그게 무슨 뜻이지요?" 탄이 으르렁거리듯 내뱉었다. "제게 결함이 있다는 소리입니까?"
D-16은 할 말을 잃었다. 그는 갑작스럽게 전방위로 의미 모를 살의를 흩뿌리기 시작한 관리자를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바라보았다. 그의 시야를 새까맣게 뒤덮는 검고 거대한 동체에는 빠져나갈 틈이 없었다. 너른 밤처럼 그를 가두고 있는 관리자에게는 코그 없는 자들이 한눈에 읽어낼 수 있는 저력이 있었다. 체스트플레이트 밑에 자신만의 코그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 그 코그에서 비롯된 압도적인 체격과 힘이 모든 이로 하여금 그를 쉬쉬하고 회피하게 하면서도 경외시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그 순간 D-16은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생각을 떠올렸다. 나도 이렇게 될 수 있다면.
"결함이 있는 건 나지." D-16은 천천히 입술을 떨어뜨렸다. "코그가 없는 건 나잖아. 넌 아니지만."
공기를 칼처럼 쑤석이던 거친 배기음이 다소 가라앉았다. 탄은 팔걸이를 으스러뜨릴 듯이 쥐면서 말했다.
"당신은 그 불완전함까지 포함해서 완벽합니다."
"허?"
D-16은 미간을 격하게 좁힌 채로 다시 관리자를 올려다보았다. 뭔 소리야? 방금 내가 뭘 들은 거지?
[잘 가거라, 글리치. 이 고별 인사를 네 머릿속에 새기며 죽길 바란다.]
처음 광휘의 도시에서 몸을 일으켰을 때 그는 이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임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많은 사이버트로니안 중에서 그가, 다름 아닌 그런 죽음으로 스파크의 불길이 꺼졌던 그가, 이 시기의 이 도시에서 다시 눈을 뜰 리 없었다.
전란에 휩싸이기 전의 도시는 메모리에 남아있는 만큼이나 광활하고 화려했으며, 역겨웠다. 진정한 평화가 무엇인지 모르고 단지 침묵하고 있을 뿐인 도시는 그에게 혐오스러운 위화감을 선사할 뿐이었다. 이 도시는, 행성은, 우주는 아직 폭정을 통한 평화가 무슨 의미인지를 모른다. 아아. 그 사상을 어찌 모를 수가 있단 말인가? 그것에 깃든 아름다움을, 숭고함을 어찌 아직도 모르고 있을 수가 있나. 그 깨우침이 선사하는 기쁨을, 명징함을, 영혼을 깊이 울리는 심대한 안식을? 탄은 이 행성에 바글거리는 우매하고 무지한 생명체들을 조용한 눈으로 내려다 보았다.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로 도심을 가로지르며 안온한 타성에 젖어 있었다.
그들에게 깨달음을 선사할 이는 단 한 명뿐이었다.
[네가 한 모든 것들은 의미 없는 일이었다.]
새롭게 눈을 뜬 세계에서 탄이 가장 먼저 진정한 대화다운 '대화'를 나눈 것은 아이아콘 지하 광산에서 관리직을 맡고 있는 어느 메크였다. 그는 엔젝스에 취해 비틀거리며 뒷골목을 걸어가던 그의 팔다리를 뜯어내고 가슴에서 관리자의 증표를 강탈했다. 관리자 자격을 인계한다는 서류를 마련하는 것은 쉬웠다. 페이스플레이트에서 적출한 안구와 기억장치가 담긴 브레인모듈만 있으면 뒷골목의 암거래상들은 순순히 위조된 서류를 완성해주었다. 그들은 에너존이 말라붙어있는 동체 조각을 보고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 현명함을 보여주었다. 위조 서류를 넘기던 한 명만이 킬킬거리며 한 마디 소감을 남길 뿐이었다.
"형씨, 그 얼굴로 저 아래를 어슬렁거리고 다니면 유명해지는 건 시간문제겠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의 얼굴을 뒤덮은 흉터는 지나치게 가시적이었으니까. 그의 전생이 그러했던대로 두 번째 얼굴이나 다름없는 가면을 걸치자, 광산의 무지몽매한 종자들은 너나할 것 없이 그를 보며 프라임의 추종자라는 얼빠진 소리들을 던져댔다. 아, 프라임의 추종자라니. 그로서는 냉소도 나오지 않을 농담이었다. 그러나 무지함을 바로잡을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이 미개한 도시의 기만이 수명을 다하고 그가 기억하는 새 시대가 도래한다면.
탄은 멈추지 않고 걸었다. 그의 신변을 캐물으러 다가오는 다른 관리자들과, 의문이 담긴 시선들을 향하는 광부들 사이를 절반으로 가르면서. 푸른색 옵틱들이 당황과 두려움으로 물드는 것을 뒤로 하고 그는 목적지를 향해 걸음을 지속했다. 그는 피처럼 푸른색 사이에 숨어 있을 황금을 찾고 있었다.
"D-16?"
이윽고 한 광부 앞에 멈춰서서 이름을 부르자 그의 키 절반만한 동체의 광부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나는 디셉티콘의 창시자다. 내가 디셉티콘을 만들었고, 이제는 끝내고자 이 자리에 섰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제 당혹스러움에 물든 얼굴로 탄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의 주군이자 신념이 될 자의 아직 어린 모습이었다. 태생적으로 부여받은 코그를 갈취당한 채로, 규율이라는 이름의 프레임에 맞추어 내재된 잠재성을 억지로 잘라내고 있던 시절. 처음 이 얼굴을 마주했을 때 얼마나 그를 붙잡고 싶었던가? 그를 붙잡고 흔들면서 어째서 디셉티콘을 버리셨냐고, 어째서 당신이 창조한 아름다움을 부정하였느냐고, 당신을 일어서게 만든 최초의 기만, 오욕과 수모가 팽배하던 이 시절을 잊어버리고 그토록 나약하고 멍청한 선택을, 끔찍하고 구토가 오를 정도로 혐오스러운… 배신을! 하였느냐고! 그의 목을 조르고 비명이 흘러나오는 것을 들으면서. 그래, 그렇게 하고 싶었다!
[나를 따르던 이들에게 전하겠다. 내게 지침이나 지혜, 대답을 기대하지 말라. 내겐 그런 것들이 없다. 있었던 적이 없다 해야 옳을 것이다.]
그때 그가 가까스로, 그 자신조차 놀랄 정도의 자제력으로 뻗어진 손을 멈춘 것은 진정 올바른 일이었다. 아직 떠오른 적 없는 태양을 녹의 바다에 처박는 일이야말로 이 우주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가장 어리석은 짓거리였다. 그는 살의로 떨리는 손을 내려 작은 광부의 뺨을 쓸어내렸다. 그때도 그는 불안과 불쾌가 섞인 눈으로 자신을 올려보았다. 지금처럼.
[저 바깥에 있을 디셉티콘들에게 마지막 명령을 내리겠다. 투항하라. 무기를 버리고, 휘장을 떼어내라: 투항하라. 디셉티콘은 끝났다. 전쟁은 끝났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모습을 내게서 보았다. 나는 여전히 그것을 믿는다. 증오와 함께 믿는다. 그는 메가트론을, D-16을, 아직 만개하지 않았을 시절의 그를 처음 보는 순간부터 증오하는 동시에 신뢰할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메가트론은 그의 스파크를 꺼트렸을지언정 그의 생각은 살해하지 못했다. 변하지 않은 그가 아직 여기에 있다. 이번에는 변하도록 두지 않을 것이다. 운명은 그에게 그럴 수 있는 기회를 안배했다. 어쩌면 메가트론이 그의 목을 쥐고 숨통을 꺼트리려했던 그 순간부터 이것은 예정된 일이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메가트론은 나약하게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을 후회했던 것이다. 그래, 그렇기에 그를 과거로 보내 자신을 바로잡게 만들려는 것이다. 분명했다. 이것은 천명이었다.
[결함 있는 사상의 족쇄에서 벗어나라. 자유롭게 나아가라.]
"당신이 얼마나 완벽한 개체인지 정녕 모르십니까?"
D-16의 안색에서 당혹스러운 빛깔이 한층 짙어졌다. 그는 코그가 없이 가동을 시작한 개체이기에 비로소 완벽했다. 자신의 가슴에서 장기를 적출하고 지하 깊은 곳으로 처박은 자가 있다는 진실, 그것을 깨닫는 미래의 어느 순간에 그는 새로운 시대를 이끌 선지자로 각성하게 된다. 언젠가 저 높은 곳에서 거짓된 프라임을 반으로 가르고 기만의 주인이 되기를 선언하기 위해서, 이 시기에 그의 스파크를 지배하는 상실감과 모멸감은 필수불가결한 것들이었다…. 가슴 아픈 일일지라도 사실이 그러했다. 그는 이 불결하고 열악한 지하 광산에서 폭력만이 얻을 수 있는 평화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아가는 중이었다. 그 깨달음을, 개화를 위한 씨앗을 그가 감히 앗아갈 수는 없었다. 그러니 어찌 완벽하지 않을 수 있겠나? 이 불완전함마저도 완전함이 되어가는 일부인 것을. 어떤 사이버트로니안도 부족함이나 미성숙함으로 표방되는 불완전함을 완전함처럼 느끼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모르겠는데? 네가 갑자기 그 말을 왜 꺼내는지도 전혀 모르겠고."
D-16의 옵틱이 탄의 페이스플레이트를 정처없이 방황했다. 그는 순결하게도 탄이 말하고자 하는 저의가 아니라 문장의 의미 자체에 집중하고 있었다. 단지 의문만이 가득할 뿐인 무구한 응시에 스파크의 불길이 울렁거렸다. 그가 집중한다. 자신에게. 메가트론의 탄에게. 타락한 그가 자신의 목을 쥐고 엄숙한 목소리로 고별사를 남길 적처럼. 그러나 그의 시작에는 아직 오토봇의 휘장으로 더럽혀지기 이전의 순수한 근원이 남아있었다. 파츠를 덧대고 광학 장치가 붉게 변할지라도 변하지 않을 혼의 일관성. 그는 미지의 위압감 속에서도 반문할 뿐 결코 두려워할 줄 모른다. 그가 숭배했던 절대성이 그의 품 안에 있다.
탄은 토해내듯이 고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이유라면 어떻습니까."
D-16의 립 플레이트가 완전히 벌어졌다. 어린 그는 가엾게도 입을 떡 벌린 채로 얼어붙어버렸다. 탄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죽어 되살아난 후에야 그의 선지자로부터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참이었다. 디셉티콘의 대의는 메가트론 없이도 존속할 수 있지만 대의의 시작은 메가트론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가 진정으로 스파크를 바쳤던, 그리고 바칠 대상은 메가트론 개인에게 있다. 그에게 정체성을 부정당하고 나서도, 한낱 도구로 쓰였음을 확인받고 나서도, 심지어는 그의 손에 살해당하고 나서도… 그럼에도 탄의 맹목성에는 아직 숨결이 남아있었다. 그렇다. 이것은 한 번 자각하고 나면 자조가 나올 정도로 명료해지는 감정이었다. 사랑이었다. 사랑이 아닐 수가 없다! 그가 스승에게 향하는 모든 집착과 추구와 비호와 충성과 분노를 한 단어에 묶어 얄팍하게 압축시켜버리는 감정. 그러나 그보다 더 명징하게 심장이 적어내리는 낱말은 찾을 수가 없으므로. 그는 구걸하듯이 팔걸이를 거세게 움켜쥐었다. 금속 프레임이 우그러지며 처절하게 괴성을 내질렀다.
"당신이 당신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D-16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자신이 얼마나 위대한 분인지 모르시는 겁니까? 당신이 얼마나 중요하고, 유일하며, 가치 있는 분이신지를? 당신이 하는 모든 말과 모든 행위는 제게 이 우주의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무게를 가집니다. 당신의 금색 옵틱이 절 바라볼 때마다 저는 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를 드리고 싶어진단 말입니다. 제가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드려야 비로소 믿어주시겠습니까? "
"그, 그만해."
"당신은 알고 계셔야 합니다. 몰라서는 안 됩니다. 당신의 음성장치에서 나오는 말 하나하나가 우리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제 생과 사를 결정지을 정도로 막중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당신만이 모르고 계십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께서! 당신께서 제 스파크의 불꽃을 타오르게 만들고 꺼트리십니다. 당신이 제 시작이자 끝이십니다. 제 영혼에 주어지는 단 하나의 안식이자 가장 잔인한 폭력입니다. D-16, 당신께서 훗날-"
"그만하라니까!"
가면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D-16은 숫제 기겁한 표정이었다. 어떻게든 말을 막아야겠다는 것이 관리자의 얼굴을 냅다 주먹으로 후려갈기는 결과물로 나왔다는 사실에 그 자신도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탄은 제 얼굴을 쓸어보았다. 가면이 벗겨진 맨 얼굴에는 누구나 피학을 연상할 만한 거대한 흉터가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성전의 역사에서 얻은 수많은 부상 중 하나에 불과할 뿐이었다. 가면은 그의 흉터를 두고 요설을 늘어놓기를 좋아하는 얼간이들을 막기 위한 장치일 뿐 흉터 자체를 가리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주인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더욱 불필요했다.
"망할! 미안, 네가 계속 이상한 말을 떠들어대니까…!"
D-16은 허둥지둥 변명했다. 탄은 그가 황급히 가면을 주우려 허리를 굽히려는 것을 막아세웠다. 그는 D-16의 어깨를 붙잡고 다시 의자 등받이에 기대게 만들었다. D-16의 벌어진 광학장치에는 처음으로 두려움의 감정이 짙게 깃들어있었다. 보복을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 강등될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가 아직 핍박받는 약자의 입장에 서 있기에 불가피하게 품게 되는 감정이었다. 그가 아직 D-16의 이름을 가진 광부이기 때문에. 그러나 메가트론은, 기만의 주인이 될 디셉티콘의 창시자는 그런 두려움을 품어서는 안 된다.
"…조건이 생겼습니다."
탄은 양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는 무릎을 꿇고 D-16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간청하는 것처럼. 그는 가까스로 당혹을 수습하는 D-16을 보면서 처음과 다름없는 말투로 자애롭게 말했다.
"앞으로 시프트가 끝나면 이곳으로 오십시오. 일정한 시각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당신이 매일 제 집무실로 찾아오는 것이 제가 요청드리는 유일한 조건입니다."
"…고작 그뿐이라고?"
"네, 고작 그뿐입니다."
D-16은 그때까지 벌어져 있던 입을 겨우 다물고 맹렬하게 사고했다. 조건이라 함은 팩스가 저지른 사고와 방금 전의 무례를 선처해주는 대신일 테다. 그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잊을만 하면 한 번씩 상급자에게 대드는 팩스도 아니고 감히 관리자의 얼굴에 손을 대는 희대의 얼간이짓을 저질러버렸으니, 강등당하지 않으려면 그의 제안대로 행동하는 수밖에 없었다. 괜히 관리자의 심기를 거슬렀다가 광부들 사이를 떠도는 소문처럼 지하 광산 아래의 까마득한 밑바닥 층에 배속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D-16은 반박을 얌전히 목 아래에 묻어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당신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D-16."
탄은 그렇게 말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D-16은 잠시 주저하다가 그의 손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완전히 몸을 일으켜 발바닥이 땅에 닿을 때까지 탄은 무릎 꿇은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의 눈높이는 거의 비슷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되가는 일이지? D-16은 뒤늦게 생각했다. 그는 방금 딱히 친분이랄 것이 없는 상급자에게서 열렬한 고백을… 들은 참이었고(왜 하필 자신이 그에게서 고백을 듣게 된 것인지는 차치해야 한다. 전혀 짐작가는 바가 없었으니까), 얼결에 내일부터 매일 만나러 오겠다는 약속을 해버린 셈이었다. 팩스에게는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하지? 동료 광부들에게는 어떤 식으로 둘러대고? 분명한 것은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눈앞이 아뜩해지는 고백에 관해서는 완전히 입을 다물고 있어야겠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방금 들은 관리자의 발언이 다른 이들의 오디오리셉터에 들어갔다가 어떤 사달이 나게 될지 전혀 알고 싶지 않았다. 상상하는 것마저 공포스러웠다.
탄이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D-16의 눈에는 생경한 맨 얼굴로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당신은 제게 오늘 실적에 대한 노고를 치하받으러 오신 겁니다."
"어? 으, 으응."
"의심을 피하시도록 에너존을 드리겠습니다. 혹여 더 많은 양이 필요하시거든 언제든 제 개인 회선으로 연락을 주십시오. 어디로 연락하면 되는지 알려드리겠습니다."
"그건…" D-16은 반사적으로 거절을 표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탄에게서는 거절을 표해도 제멋대로 회선을 연결할 기백이 만만했다. 어찌나 거부를 거부하려는 기색이 확연한지 그 의지력이 검은 아우라처럼 눈에 잡힐 지경이었다. D-16은 이번에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어. 그렇게 하자고."
그러나 탄이 그의 팔 안에 한가득 들어오고도 키를 넘어갈 지경으로 에너존을 쌓아주자 그도 결국은 질린 목소리로 거부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많은 양은 다 가져갈 수도 없다고." 그러자 탄은 광부 숙소까지 에너존을 함께 가져다드리겠다는 발언을 함으로써 D-16이 인생에서 최고 속도로 고개를 내저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광산에서 가장 악명 높은 관리자와 함께 숙소까지 단란하게 에너존을 나르며 걸어가다니? 탄의 존재 자체는 끔찍하지 않았지만 그 상황만큼은 끔찍했다. 그는 탄이 자신을 향해 정말로 다가오려고 하자 아무 말이나 대충 인사로 던지고는 황급히 관리자 사무실을 빠져나와버렸다.
불행 중 다행으로, 눈앞에 탑처럼 쌓인 에너존 덕분에 그는 자신을 향해 일제히 집중되는 이목을 전혀 의식하지 않을 수 있었다. 뭐야, 사지멀쩡하네. 어느 관리자가 눈에 띄게 불평하는 목소리는 D-16의 오디오리셉터를 스치지도 못했다. 그는 행여나 그 이상할 정도로 관대하고, 말투가 무시무시하게 낯간지럽고, 어째선지 자신에게 흠뻑 빠져있는 것 같은 관리자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도록 있는 힘을 다해 자리에서 도망쳐 나올 뿐이었다.
품에 안긴 에너존을 놓치지 않고 사력을 다해 달리는 동안 D-16의 머릿속에 반복적으로 떠오른 것은 한 문장이었다. 완전히 미친 자식이야, 틀림없어.
트포 탄메가
디셉의 대의를 위해 열심히 일했으니 업계포상 줘야할거 아니야
MTMTE ㅅㅍㅈㅇ
코믹스와 트포원 세계관 취사선택해 섞음 주의
"D-16, 관리자가 너 찾는다."
D-16은 동료를 도와 불필요한 암석 조각들을 부수던 작업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는 뺨에 묻은 그을음을 닦아내며 물었다. "나를? 어느 관리자가?"
"그… 엄청나게 커다란 놈." 다른 채굴팀의 광부는 드물게도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메가트로너스 프라임의 가면을 쓰고 있는 관리자 말이야."
"아, 그 메크."
D-16은 그가 누구를 지칭하고 있는지 깨닫고는 들고 있던 기계를 손에서 놓았다. 그 관리자라면 광산 내에서 으뜸 가도록 유명했다. 처음에는 메가트로너스 프라임의 광적인 추종자라는 인상을 주는 가면 차림으로 유명해졌고, 그 후에는 온갖 음습하고 험한 뒷소문으로 유명해졌으니까. 광부들 사이에서 평가가 좋지 않은 관리자야 많고 많았지만 광부와 감독관, 관리자 모두의 입방아에 좋지 않은 방식으로 오르내리는 관리자는 흔치 않았다. D-16은 왜 하필 그가 자신을 불렀는지 의아해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피가 잡히는 일이라면… 어느 정도는 있었다. 아마도.
"이봐, 조심해."
이름을 모르는 광부는 D-16을 툭 치며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뭔 일인지는 몰라도 좋은 이유로 부르는 건 아닌 것 같더라. 그놈 평판이… 너도 알잖냐." 그는 누가 엿들을새라 주변을 휘휘 둘러보고는 덧붙였다. "그놈 주먹에 맞다가 골로 간 놈들이 한둘이 아니라 들었다고. 다 코그 있는 메크들이었다는데. 그러니까 그 자식이 손을 치켜들려는 낌새가 보이거든 죽을 힘을 다해 도망쳐야 해. 알겠어?"
D-16은 불안해보이는 광부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낯은 벌써 끔찍스러운 참사가 날 것을 예견한 것처럼 잔뜩 굳어 있었다. 굳이 개인 쿼터에 불러 체벌을 가하는 관리자들은 많지 않지만―대개의 경우 현장에서 즉각적인 응징을 가하는 편이다―그렇다고 아예 그런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경우에는 체벌의 내용이 다른 의미로 지독했다.
D-16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게도 동료의 불안한 마음이 전염되지는 않았다. "…알겠어."
D-16은 광산을 가로질러 관리자 구역을 향해 걸었다. 지저분하고 왜소한 코그리스가 왜 이곳을 걷는지 흘겨보던 관리자들도 그의 얼굴을 보면 시선에 담은 감정을 바꿨다. 그가 어디로 향하는지 목적지가 분명해진 다음에는 심지어 연민의 눈초리로 지켜보는 이들도 있었다. D-16은 주목받는다는 거북함에 휩싸여 계속 발을 옮겼다. 그는 악명 높은 새 관리자가 부임한 이래로 그와 엮이는 일이 이상할 정도로 많았다. 이미 개인 쿼터까지 호출당한 적이 여럿 있었으니 다들 그같은 코그리스 광부가 여기까지 와서 돌아다니는 이유를 알 만하고도 남았다.
어딘가에서 숨 죽인 큭큭거림이 들려왔다. 어느 관리자가 동료의 오디오리셉터에 대고 속삭이는 소리였다. D-16은 스치듯이 그의 손짓을 눈에 담았다. 동그랗게 만든 디짓에 다른 디짓을 들락거리는 동작이었다. 불쌍한 놈. 오늘 누구 하나 씰 따이겠네.
D-16은 문 앞에 서서 딱 두 번 노크했다. 뒷짐을 진 채로 기다리고 있자 주변에 포진해 있던 흥미와 연민 어린 눈길들이 약속이라도 한듯 싹 사라진다. D-16은 대답이 없는 문을 뚫어져라 올려다보았다. 문 너머에서는 복도까지 퍼지는 유려한 음악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광산에 부임한지 얼마 안 된 새 관리자의 악명을 더욱 증폭시키는 요소 중 하나였다. 하루에 여럿 꼴로 목숨과 신경줄이 깎여나가는 지하 광산에서는 누구나 락이나 헤비메탈 같은 요란스러운 음악을 좋아하지, 듣는 것만으로도 절로 리차징에 들어야 할 것 같은 고아한 클래식을 선호하는 경우는 없었다. 제정신 박힌 놈이라면 아무도 그런 것은 듣고 싶어하지 않았다.
"누구지?"
문 너머의 관리자가 물었다. D-16은 보이스박스를 재정비하고 대답했다. "D-16입니다. 저를 호출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들어오게'라는 말이 들릴 것을 예상했지만 아니었다. 문이 스스로 달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여러 번 본 광경이었지만, 눈앞으로 메가트로너스 프라임'처럼' 생긴 얼굴(가면을 썼으니까, 당연했다)이 닥쳐드는 것은 항상 동요하지 않기가 더 어려운 일이었다. 시야를 꽉 채우는 육중한 거구에서 오는 중압감도 한몫했다. D-16은 넥케이블에 힘이 들어간 채로 관리자와 마주했다. 은은하게 들리던 음악소리가 더 커졌다.
"안으로 들어오지."
D-16이 방으로 들어서자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관리자의 사무실은 몹시 삭막했다. 메가트로너스 프라임의 열렬한 팬인 것처럼 보이는 외관과 다르게 사무를 보는 책상과 주변의 수납장 위에는 추종심의 증거물들이 전무했다(만일 D-16이 이 사무실의 주인이었다면 그는 벽면 가득히 메가트로너스의 포스터를 붙여놓았을 것이었다). 보고가 담겨 있거나 결재를 기다리는 데이터패드들이 책상에 놓여 있고, 음악을 틀어놓기 위한 스피커가 하나 있으며, 방 한켠에 보급을 위한 에너존 큐브가 가지런히 쌓여 있는 것이 구비되어있는 기물의 전부였다. 갓 부임했기에 꾸미지 않았다기보다는 언제라도 이곳을 떠날 채비를 마쳐놓은 듯한 풍경이었다.
D-16은 책상 앞에 다시 뒷짐을 지고 선 채로 사무실 내부를 오가는 관리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큐브도 아니고 컵에다가 에너존을 담은 채 책상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빨대까지 꽂아서… 심지어 쨍한 분홍색이다. 난 스파클링이 아닌데 말이지.
"앉으시지요."
관리자는 D-16의 맞은편에 앉으면서 손짓했다. 그는 말없이 옵틱을 굴리고 있는 D-16을 바라보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앉혀드리는 것을 선호하십니까?"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내가 강제로 앉게 해주랴?'처럼 사뭇 험악스러운 발언처럼 들렸다. D-16은 허둥지둥 자리에 앉았다. "아니, 아닙니다! 제가 앉,"
그는 관리자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말실수를 자각했다. 그는 고쳐 말했다. "…내가 앉을게. 괜찮아."
이게 가장 괴이한 점이었다. 이 관리자는 첫 만남의 순간부터 D-16에게 저를 하대할 것을 '요청했다'. 게다가 그는 D-16에게 자연스럽게 존대어로 대답하며 상급자처럼 우대함으로써 끊임없이 그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마치 한낱 광부에 불과한 D-16이 자신의 적법한 주인이라고 여기기라도 하는 듯한 태도였다. 누굴 거느려본 경험이 없기로서니와 그런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던 코그리스에게 있어서는 당황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결국 다른 이들의 시선이 있는 곳에서는 뒷말이 나오니 여타의 평범한 관리자처럼 말해달라고 거의 애원을 하고 나서야 그는 그나마 요청대로 행동해주었다. 그러나 그들밖에 없는 사무실에서는 D-16 역시 이 취향 이상한 관리자의 요청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어색하게 컵을 쥐며 말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저, 아니 나를 부른 거야?"
"탄."
D-16이 영문을 모르고 그를 바라보자 관리자는 우아한 동작으로 스피커를 꺼트리며 말했다. "이름으로 불러주십시오. '탄'이라고."
"아, 그래… 탄."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지명을 그대로 이름 삼다니, 독특한 일이다. 자기 고향이라거나 그런 것이겠지. D-16은 예의상 에너존을 죽 빨며 남모를 생각을 굴렸다. 관리자들이 먹는 것이라 뒷맛 하나 남지 않고 깔끔했다. 친구의 몫으로 좀 챙겨갈 수 있는지 물어보는 것은 지나치게 선을 넘는 일일까 싶다.
"오라이온 팩스가 A 섹터의 관리자에게 반항심을 보였다더군요."
방금 생각하고 있었던 친구의 이름이 그대로 관리자의 입에서 나오자 D-16은 빨대에서 립 플레이트를 떼어내고 컥컥거렸다. 방금 들이켠 에너존이 목구멍으로 역류하는 기분이었다. 그는 가까스로 입가를 닦으며 보이스박스를 작동시켰다.
"…그 녀석이 또?! 대체 무슨 일로?"
"관리자가 일일 할당량 미달의 사유로 채굴팀 전원의 에너존 배급을 깎는 것을 보고 부당하다는 의견을 표했다고 합니다." 탄은 책상에 놓인 데이터패드를 읽으며 말했다. "파이라마그나의 팀입니다. 팀원 중에 메디베이로 이송된 자가 있어 목표 수치를 달성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프라이머스여 맙소사, 대체 팩스 그 자식이 무슨 관계가 있다고 거기까지 가서 끼어든 거야?"
사실 상황이야 짐작하고도 남았다. 관리자가 온 섹터가 울리도록 호통을 치는 소리를 듣고 가봤다가 말도 안 되는 장면이 펼쳐지는 걸 보고 달려든 거겠지. 타인의 입에서 친구가 벌인 사건을 전해 듣는 것은 이 암석투성이의 지하 광산에서 난데없이 벼락을 처맞은 느낌이 들게 한다. D-16은 이마를 싸매며 물었다. "제발 거기서 끝났다고 해줘. 다른 사고는 더 안 쳤다고 말이야."
"관리자가 본보기로 파이라마그나의 팀원을 걷어차 쓰러뜨리자 그자의 동체를 온몸으로 들이받았습니다. 다른 섹터의 관리자가 달려와서 그를 강제로 떼어놔야 했다더군요."
"제기랄."
D-16은 이마를 붙잡은 손을 턱으로 미끄러뜨렸다. 상급자에게 대드는 것도 죄질이 나쁘지만 상급자에게 감히 폭력을 가하는 것은 중징계감이기까지 하다. 등급표에서 배지가 최소 네 개는 떨어져나갈 건이었다. 그런데 그 녀석에게 더 떨어져 나갈 배지가 있기라도 하던가? D-16은 발로 바닥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초조함 때문에 나온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A 섹터의 관리자는 제가 오라이온 팩스가 소속된 팀의 담당자라는 것을 알고 제게 체벌권을 이양했습니다. 징계를 강력히 희망한다는 고견과 함께요."
"……그래서? 그걸 내게 알려주려고 부른 거야?" D-16은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튀어나갈 것처럼 허리를 숙였다. "넌 어떻게 할 셈인데?"
탄은 침묵했다. 종잡을 수 없는 성격과 험악한 인상, 그리고 괴악한 취향으로 소문이 무성한 관리자의 얼굴은 가면에 가려져 도무지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추측할 도리가 없다. 하지만 만약 저 립 플레이트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자신이 예상하는 문장이라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는 명백했다. 그 자식이 손을 치켜들려는 낌새가 보이거든 죽을 힘을 다해 도망쳐야 해. 알겠어? 물론 그런 상황이 온다 하더라도 도망칠 생각은 추호도 없다. D-16은 자신을 말없이 바라보는 붉은 옵틱을 사납게 마주 응시했다. 이윽고 거구의 관리자가 말했다.
"선처를 원하십니까?"
"어?"
"오라이온 팩스의 선처를 원하시는지 여쭤본 겁니다."
D-16은 옵틱을 깜빡였다. 그는 한참 후에야 탄이 결정을 통보한 것이 아니라 그의 손에 선택권이라는 이름의 권력을 쥐여주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건… 가동을 시작한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D-16은 혼란스러워하며 눈썹 사이를 좁혔다.
"그걸… 내가 결정하라는 소리야?"
"당신이 결정하시면 저는 따를 겁니다."
음성 모듈에 오류가 일어난 것처럼 말문이 턱 막혔다. D-16은 입만 벙긋거리다가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러니까, 이게 '맞는' 상황인 건가? 코그가 있는 관리자가 코그 없는 일개 하급 광부의 말에 따르겠다는 것이? 그는 순간 이것이 어떤 종류의 시험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해보았으나 탄에게서 풍겨나오는 분위기는 엄숙할 정도였다. 그는 진심으로 D-16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것에 따르겠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만일 그 발언의 의도를 의심하거나 신실성을 폄하해버린다면 그는 모욕감을 느낄 것이다. 본능적으로 그러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정상적인 사고방식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가 없다. 도대체 이 관리자는 제게 무엇을 원하기에 이토록 유별나게 행동하는 것일까?
D-16은 손가락으로 무릎 파츠를 두들기다가 말했다. "조건이 뭔데?"
"조건 말입니까?"
"그래, 조건." D-16은 목구멍의 케이블로 껄끄러운 신음을 삼키며 말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면 그만한 대가가 있을 것 아니야. 그게 뭔지 알고 싶어."
D-16의 브레인모듈로 그간의 경험을 통해 축적된 데이터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간혹 광부들 중에서는 더 나은 근무 환경이나 더 많은 에너존 배급을 두고 관리자들과 모종의 계약을 맺는 경우가 있었다. 물론 계약이란 무늬만 그럴싸할 이름일 뿐 코그리스에게 더 유리하게 맺어지는 것은 없었다. 대부분은 광부 쪽에서 추문이나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조건이 많았고, 다시 말해 그들은 반드시 정신적인 소모나 신체적인 대가를 상납해야만 약속한 것을 받을 수 있는 입장인 셈이었다. 전용 샌드백이 되기로 약속해 실컷 얻어맞고는 팀원 분량의 에너존을 받아오는 정도는 경악할 만한 일도 아니었다. 어떤 광부는 관리자의 개인 쿼터로 불려간 다음이면 어김없이 메디베이로 이송되었는데 그를 두고 주변 동료들은 빌어먹을 관리자가 그를 신체적으로 혹사시켰기 때문이라고 수군거렸다. 그들은 그 행위를 인터페이스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다음 순간 탄은 의외로 감정을 짐작하기 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착각일 게 분명했지만, D-16의 눈에는 그의 머리 위에 거대한 물음표가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한결 가벼워진 어투로 말했다.
"조건은 없습니다. 그런 것이 필요하십니까?"
"그럴 리가!" D-16은 엉겁결에 외치듯이 말했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저를 보는 상대에게 변명하듯 내뱉었다. "하지만 말도 안 되잖아? 아무런 조건 없이 그냥 내 말을 들어주겠다니! 뭐 자선사업가라도 되는 거야? 내게 원하는 게 있으니까 바라는 대로 해주겠다는 거 아니야?"
아무것도 할 필요 없이 받기만 하라니, 세상에 그런 이상적인 개념이 존재하기라도 했던가. D-16은 불이익을 감수하며 코그리스의 편을 들어주겠다는 그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대가 없는 특혜는 기만의 다른 이름이었다. 편의를 봐주는 것에는 언제나 숨은 의도가 들어있었다. 코그가 있는 자들은 언제나 그들에게서 무언가를 착취하려 들었다. 힘을 가진 자라면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고 자연스러웠다. 자신조차 권력을 가졌더라면 그렇게 행동하고도 남았을 텐데 이 관리자는 대체 왜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나서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제 결정이 이상하게 느껴지십니까, D-16?"
D-16은 그의 말에서 반복되는 어조를 깨달았다. 그는 거듭 질문의 형태로 대화를 이어가려 하고 있었다. 그 자신의 것보다 D-16의 의사가 중요하다는 듯이. 그들간의 대화에서 항상 위화감을 불러일으키던 원흉도 바로 그 지점에 있었다. 그들은 몇 번 대화를 나누며 안면을 튼 사이였지만 아무리 잘 쳐 줘야 그것이 고작인 관계였다. 감독관보다도 상위직인 관리자가 하급 광부에게 일일이 사견을 물어가며 중대사를 결정지으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의 위치에서 하급자를 거머쥐고 멋대로 휘두르기 위함도 아니라고 한다. D-16의 브레인모듈에서 논리회로가 과부하를 일으키기 일보직전까지 치달았다. 그렇다면 대체 왜? 대체 왜 나에게만 이런 식으로 특별 취급을 하려는 건가. 내가 뭘 어쨌다고? 난 그저 아무런 관심도 받지 않고 내 역할을 다하고 싶을 뿐인데, 이런 식의 '특혜'가 반복되고 나면 주변의 인식도 달라지지 않을까? 그런 것은…
싫었다. "그래, 이상해."
아무리 편하게 대하라 했지만 선을 넘은 발언이었다. 말이 립 플레이트 바깥으로 튀어나가자마자 아차 싶었지만 다시 주워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넌… 좀 이상해."
의자가 거친 소음을 내며 밀려나갔다. D-16은 책상을 짚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선 관리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책상을 돌아 걸음 하나하나에 온 힘을 실어담듯이 D-16에게로 다가왔다. 그가 두 손으로 의자 팔걸이를 잡자 D-16은 완전히 옴짝달싹 못하고 제자리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등을 의자에 밀착시켰다. 관리자의 붉은 옵틱이 코앞에서 번뜩거렸다.
"제가 '이상합니까'? 그게 무슨 뜻이지요?" 탄이 으르렁거리듯 내뱉었다. "제게 결함이 있다는 소리입니까?"
D-16은 할 말을 잃었다. 그는 갑작스럽게 전방위로 의미 모를 살의를 흩뿌리기 시작한 관리자를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바라보았다. 그의 시야를 새까맣게 뒤덮는 검고 거대한 동체에는 빠져나갈 틈이 없었다. 너른 밤처럼 그를 가두고 있는 관리자에게는 코그 없는 자들이 한눈에 읽어낼 수 있는 저력이 있었다. 체스트플레이트 밑에 자신만의 코그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 그 코그에서 비롯된 압도적인 체격과 힘이 모든 이로 하여금 그를 쉬쉬하고 회피하게 하면서도 경외시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그 순간 D-16은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생각을 떠올렸다. 나도 이렇게 될 수 있다면.
"결함이 있는 건 나지." D-16은 천천히 입술을 떨어뜨렸다. "코그가 없는 건 나잖아. 넌 아니지만."
공기를 칼처럼 쑤석이던 거친 배기음이 다소 가라앉았다. 탄은 팔걸이를 으스러뜨릴 듯이 쥐면서 말했다.
"당신은 그 불완전함까지 포함해서 완벽합니다."
"허?"
D-16은 미간을 격하게 좁힌 채로 다시 관리자를 올려다보았다. 뭔 소리야? 방금 내가 뭘 들은 거지?
[잘 가거라, 글리치. 이 고별 인사를 네 머릿속에 새기며 죽길 바란다.]
처음 광휘의 도시에서 몸을 일으켰을 때 그는 이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임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많은 사이버트로니안 중에서 그가, 다름 아닌 그런 죽음으로 스파크의 불길이 꺼졌던 그가, 이 시기의 이 도시에서 다시 눈을 뜰 리 없었다.
전란에 휩싸이기 전의 도시는 메모리에 남아있는 만큼이나 광활하고 화려했으며, 역겨웠다. 진정한 평화가 무엇인지 모르고 단지 침묵하고 있을 뿐인 도시는 그에게 혐오스러운 위화감을 선사할 뿐이었다. 이 도시는, 행성은, 우주는 아직 폭정을 통한 평화가 무슨 의미인지를 모른다. 아아. 그 사상을 어찌 모를 수가 있단 말인가? 그것에 깃든 아름다움을, 숭고함을 어찌 아직도 모르고 있을 수가 있나. 그 깨우침이 선사하는 기쁨을, 명징함을, 영혼을 깊이 울리는 심대한 안식을? 탄은 이 행성에 바글거리는 우매하고 무지한 생명체들을 조용한 눈으로 내려다 보았다.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로 도심을 가로지르며 안온한 타성에 젖어 있었다.
그들에게 깨달음을 선사할 이는 단 한 명뿐이었다.
[네가 한 모든 것들은 의미 없는 일이었다.]
새롭게 눈을 뜬 세계에서 탄이 가장 먼저 진정한 대화다운 '대화'를 나눈 것은 아이아콘 지하 광산에서 관리직을 맡고 있는 어느 메크였다. 그는 엔젝스에 취해 비틀거리며 뒷골목을 걸어가던 그의 팔다리를 뜯어내고 가슴에서 관리자의 증표를 강탈했다. 관리자 자격을 인계한다는 서류를 마련하는 것은 쉬웠다. 페이스플레이트에서 적출한 안구와 기억장치가 담긴 브레인모듈만 있으면 뒷골목의 암거래상들은 순순히 위조된 서류를 완성해주었다. 그들은 에너존이 말라붙어있는 동체 조각을 보고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 현명함을 보여주었다. 위조 서류를 넘기던 한 명만이 킬킬거리며 한 마디 소감을 남길 뿐이었다.
"형씨, 그 얼굴로 저 아래를 어슬렁거리고 다니면 유명해지는 건 시간문제겠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의 얼굴을 뒤덮은 흉터는 지나치게 가시적이었으니까. 그의 전생이 그러했던대로 두 번째 얼굴이나 다름없는 가면을 걸치자, 광산의 무지몽매한 종자들은 너나할 것 없이 그를 보며 프라임의 추종자라는 얼빠진 소리들을 던져댔다. 아, 프라임의 추종자라니. 그로서는 냉소도 나오지 않을 농담이었다. 그러나 무지함을 바로잡을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이 미개한 도시의 기만이 수명을 다하고 그가 기억하는 새 시대가 도래한다면.
탄은 멈추지 않고 걸었다. 그의 신변을 캐물으러 다가오는 다른 관리자들과, 의문이 담긴 시선들을 향하는 광부들 사이를 절반으로 가르면서. 푸른색 옵틱들이 당황과 두려움으로 물드는 것을 뒤로 하고 그는 목적지를 향해 걸음을 지속했다. 그는 피처럼 푸른색 사이에 숨어 있을 황금을 찾고 있었다.
"D-16?"
이윽고 한 광부 앞에 멈춰서서 이름을 부르자 그의 키 절반만한 동체의 광부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나는 디셉티콘의 창시자다. 내가 디셉티콘을 만들었고, 이제는 끝내고자 이 자리에 섰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제 당혹스러움에 물든 얼굴로 탄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의 주군이자 신념이 될 자의 아직 어린 모습이었다. 태생적으로 부여받은 코그를 갈취당한 채로, 규율이라는 이름의 프레임에 맞추어 내재된 잠재성을 억지로 잘라내고 있던 시절. 처음 이 얼굴을 마주했을 때 얼마나 그를 붙잡고 싶었던가? 그를 붙잡고 흔들면서 어째서 디셉티콘을 버리셨냐고, 어째서 당신이 창조한 아름다움을 부정하였느냐고, 당신을 일어서게 만든 최초의 기만, 오욕과 수모가 팽배하던 이 시절을 잊어버리고 그토록 나약하고 멍청한 선택을, 끔찍하고 구토가 오를 정도로 혐오스러운… 배신을! 하였느냐고! 그의 목을 조르고 비명이 흘러나오는 것을 들으면서. 그래, 그렇게 하고 싶었다!
[나를 따르던 이들에게 전하겠다. 내게 지침이나 지혜, 대답을 기대하지 말라. 내겐 그런 것들이 없다. 있었던 적이 없다 해야 옳을 것이다.]
그때 그가 가까스로, 그 자신조차 놀랄 정도의 자제력으로 뻗어진 손을 멈춘 것은 진정 올바른 일이었다. 아직 떠오른 적 없는 태양을 녹의 바다에 처박는 일이야말로 이 우주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가장 어리석은 짓거리였다. 그는 살의로 떨리는 손을 내려 작은 광부의 뺨을 쓸어내렸다. 그때도 그는 불안과 불쾌가 섞인 눈으로 자신을 올려보았다. 지금처럼.
[저 바깥에 있을 디셉티콘들에게 마지막 명령을 내리겠다. 투항하라. 무기를 버리고, 휘장을 떼어내라: 투항하라. 디셉티콘은 끝났다. 전쟁은 끝났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모습을 내게서 보았다. 나는 여전히 그것을 믿는다. 증오와 함께 믿는다. 그는 메가트론을, D-16을, 아직 만개하지 않았을 시절의 그를 처음 보는 순간부터 증오하는 동시에 신뢰할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메가트론은 그의 스파크를 꺼트렸을지언정 그의 생각은 살해하지 못했다. 변하지 않은 그가 아직 여기에 있다. 이번에는 변하도록 두지 않을 것이다. 운명은 그에게 그럴 수 있는 기회를 안배했다. 어쩌면 메가트론이 그의 목을 쥐고 숨통을 꺼트리려했던 그 순간부터 이것은 예정된 일이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메가트론은 나약하게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을 후회했던 것이다. 그래, 그렇기에 그를 과거로 보내 자신을 바로잡게 만들려는 것이다. 분명했다. 이것은 천명이었다.
[결함 있는 사상의 족쇄에서 벗어나라. 자유롭게 나아가라.]
"당신이 얼마나 완벽한 개체인지 정녕 모르십니까?"
D-16의 안색에서 당혹스러운 빛깔이 한층 짙어졌다. 그는 코그가 없이 가동을 시작한 개체이기에 비로소 완벽했다. 자신의 가슴에서 장기를 적출하고 지하 깊은 곳으로 처박은 자가 있다는 진실, 그것을 깨닫는 미래의 어느 순간에 그는 새로운 시대를 이끌 선지자로 각성하게 된다. 언젠가 저 높은 곳에서 거짓된 프라임을 반으로 가르고 기만의 주인이 되기를 선언하기 위해서, 이 시기에 그의 스파크를 지배하는 상실감과 모멸감은 필수불가결한 것들이었다…. 가슴 아픈 일일지라도 사실이 그러했다. 그는 이 불결하고 열악한 지하 광산에서 폭력만이 얻을 수 있는 평화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아가는 중이었다. 그 깨달음을, 개화를 위한 씨앗을 그가 감히 앗아갈 수는 없었다. 그러니 어찌 완벽하지 않을 수 있겠나? 이 불완전함마저도 완전함이 되어가는 일부인 것을. 어떤 사이버트로니안도 부족함이나 미성숙함으로 표방되는 불완전함을 완전함처럼 느끼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모르겠는데? 네가 갑자기 그 말을 왜 꺼내는지도 전혀 모르겠고."
D-16의 옵틱이 탄의 페이스플레이트를 정처없이 방황했다. 그는 순결하게도 탄이 말하고자 하는 저의가 아니라 문장의 의미 자체에 집중하고 있었다. 단지 의문만이 가득할 뿐인 무구한 응시에 스파크의 불길이 울렁거렸다. 그가 집중한다. 자신에게. 메가트론의 탄에게. 타락한 그가 자신의 목을 쥐고 엄숙한 목소리로 고별사를 남길 적처럼. 그러나 그의 시작에는 아직 오토봇의 휘장으로 더럽혀지기 이전의 순수한 근원이 남아있었다. 파츠를 덧대고 광학 장치가 붉게 변할지라도 변하지 않을 혼의 일관성. 그는 미지의 위압감 속에서도 반문할 뿐 결코 두려워할 줄 모른다. 그가 숭배했던 절대성이 그의 품 안에 있다.
탄은 토해내듯이 고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이유라면 어떻습니까."
D-16의 립 플레이트가 완전히 벌어졌다. 어린 그는 가엾게도 입을 떡 벌린 채로 얼어붙어버렸다. 탄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죽어 되살아난 후에야 그의 선지자로부터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참이었다. 디셉티콘의 대의는 메가트론 없이도 존속할 수 있지만 대의의 시작은 메가트론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가 진정으로 스파크를 바쳤던, 그리고 바칠 대상은 메가트론 개인에게 있다. 그에게 정체성을 부정당하고 나서도, 한낱 도구로 쓰였음을 확인받고 나서도, 심지어는 그의 손에 살해당하고 나서도… 그럼에도 탄의 맹목성에는 아직 숨결이 남아있었다. 그렇다. 이것은 한 번 자각하고 나면 자조가 나올 정도로 명료해지는 감정이었다. 사랑이었다. 사랑이 아닐 수가 없다! 그가 스승에게 향하는 모든 집착과 추구와 비호와 충성과 분노를 한 단어에 묶어 얄팍하게 압축시켜버리는 감정. 그러나 그보다 더 명징하게 심장이 적어내리는 낱말은 찾을 수가 없으므로. 그는 구걸하듯이 팔걸이를 거세게 움켜쥐었다. 금속 프레임이 우그러지며 처절하게 괴성을 내질렀다.
"당신이 당신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D-16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자신이 얼마나 위대한 분인지 모르시는 겁니까? 당신이 얼마나 중요하고, 유일하며, 가치 있는 분이신지를? 당신이 하는 모든 말과 모든 행위는 제게 이 우주의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무게를 가집니다. 당신의 금색 옵틱이 절 바라볼 때마다 저는 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를 드리고 싶어진단 말입니다. 제가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드려야 비로소 믿어주시겠습니까? "
"그, 그만해."
"당신은 알고 계셔야 합니다. 몰라서는 안 됩니다. 당신의 음성장치에서 나오는 말 하나하나가 우리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제 생과 사를 결정지을 정도로 막중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당신만이 모르고 계십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께서! 당신께서 제 스파크의 불꽃을 타오르게 만들고 꺼트리십니다. 당신이 제 시작이자 끝이십니다. 제 영혼에 주어지는 단 하나의 안식이자 가장 잔인한 폭력입니다. D-16, 당신께서 훗날-"
"그만하라니까!"
가면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D-16은 숫제 기겁한 표정이었다. 어떻게든 말을 막아야겠다는 것이 관리자의 얼굴을 냅다 주먹으로 후려갈기는 결과물로 나왔다는 사실에 그 자신도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탄은 제 얼굴을 쓸어보았다. 가면이 벗겨진 맨 얼굴에는 누구나 피학을 연상할 만한 거대한 흉터가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성전의 역사에서 얻은 수많은 부상 중 하나에 불과할 뿐이었다. 가면은 그의 흉터를 두고 요설을 늘어놓기를 좋아하는 얼간이들을 막기 위한 장치일 뿐 흉터 자체를 가리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주인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더욱 불필요했다.
"망할! 미안, 네가 계속 이상한 말을 떠들어대니까…!"
D-16은 허둥지둥 변명했다. 탄은 그가 황급히 가면을 주우려 허리를 굽히려는 것을 막아세웠다. 그는 D-16의 어깨를 붙잡고 다시 의자 등받이에 기대게 만들었다. D-16의 벌어진 광학장치에는 처음으로 두려움의 감정이 짙게 깃들어있었다. 보복을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 강등될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가 아직 핍박받는 약자의 입장에 서 있기에 불가피하게 품게 되는 감정이었다. 그가 아직 D-16의 이름을 가진 광부이기 때문에. 그러나 메가트론은, 기만의 주인이 될 디셉티콘의 창시자는 그런 두려움을 품어서는 안 된다.
"…조건이 생겼습니다."
탄은 양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는 무릎을 꿇고 D-16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간청하는 것처럼. 그는 가까스로 당혹을 수습하는 D-16을 보면서 처음과 다름없는 말투로 자애롭게 말했다.
"앞으로 시프트가 끝나면 이곳으로 오십시오. 일정한 시각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당신이 매일 제 집무실로 찾아오는 것이 제가 요청드리는 유일한 조건입니다."
"…고작 그뿐이라고?"
"네, 고작 그뿐입니다."
D-16은 그때까지 벌어져 있던 입을 겨우 다물고 맹렬하게 사고했다. 조건이라 함은 팩스가 저지른 사고와 방금 전의 무례를 선처해주는 대신일 테다. 그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잊을만 하면 한 번씩 상급자에게 대드는 팩스도 아니고 감히 관리자의 얼굴에 손을 대는 희대의 얼간이짓을 저질러버렸으니, 강등당하지 않으려면 그의 제안대로 행동하는 수밖에 없었다. 괜히 관리자의 심기를 거슬렀다가 광부들 사이를 떠도는 소문처럼 지하 광산 아래의 까마득한 밑바닥 층에 배속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D-16은 반박을 얌전히 목 아래에 묻어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당신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D-16."
탄은 그렇게 말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D-16은 잠시 주저하다가 그의 손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완전히 몸을 일으켜 발바닥이 땅에 닿을 때까지 탄은 무릎 꿇은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의 눈높이는 거의 비슷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되가는 일이지? D-16은 뒤늦게 생각했다. 그는 방금 딱히 친분이랄 것이 없는 상급자에게서 열렬한 고백을… 들은 참이었고(왜 하필 자신이 그에게서 고백을 듣게 된 것인지는 차치해야 한다. 전혀 짐작가는 바가 없었으니까), 얼결에 내일부터 매일 만나러 오겠다는 약속을 해버린 셈이었다. 팩스에게는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하지? 동료 광부들에게는 어떤 식으로 둘러대고? 분명한 것은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눈앞이 아뜩해지는 고백에 관해서는 완전히 입을 다물고 있어야겠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방금 들은 관리자의 발언이 다른 이들의 오디오리셉터에 들어갔다가 어떤 사달이 나게 될지 전혀 알고 싶지 않았다. 상상하는 것마저 공포스러웠다.
탄이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D-16의 눈에는 생경한 맨 얼굴로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당신은 제게 오늘 실적에 대한 노고를 치하받으러 오신 겁니다."
"어? 으, 으응."
"의심을 피하시도록 에너존을 드리겠습니다. 혹여 더 많은 양이 필요하시거든 언제든 제 개인 회선으로 연락을 주십시오. 어디로 연락하면 되는지 알려드리겠습니다."
"그건…" D-16은 반사적으로 거절을 표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탄에게서는 거절을 표해도 제멋대로 회선을 연결할 기백이 만만했다. 어찌나 거부를 거부하려는 기색이 확연한지 그 의지력이 검은 아우라처럼 눈에 잡힐 지경이었다. D-16은 이번에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어. 그렇게 하자고."
그러나 탄이 그의 팔 안에 한가득 들어오고도 키를 넘어갈 지경으로 에너존을 쌓아주자 그도 결국은 질린 목소리로 거부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많은 양은 다 가져갈 수도 없다고." 그러자 탄은 광부 숙소까지 에너존을 함께 가져다드리겠다는 발언을 함으로써 D-16이 인생에서 최고 속도로 고개를 내저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광산에서 가장 악명 높은 관리자와 함께 숙소까지 단란하게 에너존을 나르며 걸어가다니? 탄의 존재 자체는 끔찍하지 않았지만 그 상황만큼은 끔찍했다. 그는 탄이 자신을 향해 정말로 다가오려고 하자 아무 말이나 대충 인사로 던지고는 황급히 관리자 사무실을 빠져나와버렸다.
불행 중 다행으로, 눈앞에 탑처럼 쌓인 에너존 덕분에 그는 자신을 향해 일제히 집중되는 이목을 전혀 의식하지 않을 수 있었다. 뭐야, 사지멀쩡하네. 어느 관리자가 눈에 띄게 불평하는 목소리는 D-16의 오디오리셉터를 스치지도 못했다. 그는 행여나 그 이상할 정도로 관대하고, 말투가 무시무시하게 낯간지럽고, 어째선지 자신에게 흠뻑 빠져있는 것 같은 관리자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도록 있는 힘을 다해 자리에서 도망쳐 나올 뿐이었다.
품에 안긴 에너존을 놓치지 않고 사력을 다해 달리는 동안 D-16의 머릿속에 반복적으로 떠오른 것은 한 문장이었다. 완전히 미친 자식이야, 틀림없어.
트포 탄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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