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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9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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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의 일곱겹 벗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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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즈너붕붕











고된 현장에서 함께 구르고 뛰고 욕 처먹으면 자연스레 옆에 있는 사람과 전우애가 생긴다. 더럽고 치사하지만 그래도 여기가 내 일터라는 것을 인지한 자들은 비장한 눈빛을 나눈다. 무언의 결속력. 그것은 생각보다 단단하고 끈끈하다. 

그러므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소수의 파티를 여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왁자지껄한 소음 속에 앉아서 맥주병을 들고 있던 나는 타이밍을 봐 가며 적당하게 여기저기 끼어 들었다.

뭐? 말도 안 돼. 그런 부당한 요구가 어디 있어? 누가 지 노예인 줄 아나. 여기도 엄밀히 직업적 프라이드가 있다고. 세상은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이상해. 불공평하고 괴상한데 화창한 하늘 한 번 바라보면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되어버리고.

친구들과 주고 받는 대화가 으레 그렇듯, 처음 시작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풍경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철학에 대헤 논하고, 근래 재미있게 읽었던 책에 대해 이야기 하다가 알콜의 위험성에 대해 토론한다. 정말 제멋대로다. 그래서 즐거운 것 역시 사실이다.

모인 인원은 대략 스무 명 정도. 여러 팀이 섞여있었고 모두가 친하진 않지만 얼굴과 이름은 다 아는 정도였다.

익숙한듯 익숙하지 않은 얼굴들 사이에 앉아있으니 묘한 긴장감과 함께 몸이 노곤해졌다. 술이 들어간 탓도 있겠다. 



"헤이, 허니 비."



쇼파에 반쯤 드러누운채로 앉아있는데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 나 아는 얼굴인데. 같이 얘기한 적 꽤 되는데.

뇌가 너무 느리게 돌아간다. 30점짜리 퀴즈를 앞 둔 사람처럼 잠깐 비장한 얼굴을 하다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어음..."



생각하고 있는 중이라는 걸 티내지 말았어야 하는데. 내 태도에 눈에 띄게 눈꼬리가 처지는 걸 보고 벌떡 몸을 일으켜세웠다. 



"아니, 나 알아. 티모시. 티미 맞지?"



티미라는 호칭까지 생각난 건, 미술팀 내에서도 종종 그 귀여운 애 있잖아. 티미! 하면서 여기저기서 언급이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외모는 귀여우면서 매력있었고 은근히 사람의 시선을 끌었다. 냉하고 예민해보이다가도 한없이 다정하고 유약해 보이는 사람. 친절한 미소를 띄고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잘 대해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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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쪽이었던가. 몸을 비스듬히 숙여 렌즈 너머를 바라보는 모습이 제법 근사하다 생각했었지.

때 마침 각도좋게 떨어지는 조명과도 잘 어울려졌고. 그 장면을 또렷하게 기억하는 건 티모시에 대한 개인적 호감과는 그 모든 순간이 잘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나는 아름다운 것을 좇는 사람이니까.



"아는구나!"



확 밝아진 얼굴로 그가 내 옆에 다가왔다. 이렇다 할 액션 한 번 못 취하고 가까워진 거리에 "오."하고 입술을 뻐끔거렸다. 이렇게 퍼스널 스페이스를 침범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파티니까. 모두 술을 마셨고, 흥에 취해있고, 풀어지는 분위기에 몸을 맡긴 채니까.

엄밀히 따지자면 닿은 것도 아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 한 알씩 떼어 먹고 있던 청포도를 건넸다.



"이거 얼린 거라 맛있어. 거짓말 조금 보태서 샤베트 같아."
"정말? 먹어볼래."



그렇게 말하며 티모시가 해사하게 웃었다. 내 소유의 청포도도 아닌데 마음껏 먹어. 라고 하려던 난 그가 웃으며 입을 벌리는 걸 보고 또 한 번 "오."하고 굳었다.

먹여 달라는 건가? 순간 나는 티모시의 양 손을 스캔했다. 한 손에는 맥주병을 들고 있었지만 나머지 한 쪽은 자유였다. 아무리 한손잡이라고 한 들 안 쓰는 손으로 포도 한 알 집어먹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왜 굳이 나한테? 이런 걸 꼼꼼히 분석하고 파악할 이유는 없지만 약간 불편하긴 해서 과장되게 웃으며 청포도를 입에 넣어줬다. 그마저도 내 피부와 티모시의 입술이 스치지 않게 아주 빠르고 민첩한 손길이었다. 

티모시는 군말없이 청포도를 오물오물 먹었고 이거 엄청 달다고 또 웃었다.

실없이 잘 웃네. 마침 티모시에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고 나는 틈을 이용해 핸드폰을 꺼내 봤다.















오전의 트레일러에서 레이놀즈는 내게 오늘의 일정을 물었다.

매니저도 아니고 가족도 아닌데 그런 건 왜 캐묻냐고 투덜거리니 서로 집을 오갔으니 그 정도 사이는 되지 않냐고 뻔뻔하게 우겼다. 

비밀이라고 고집할 것도 없어 사실대로 말했다.
스탭들 중에 친한 사람끼리 파티 하기로 했다고. 그는 자기도 그 친한 사람 범위에 드는 거냐고 물었다. 



"나랑? 아니면 스탭들이랑?"
"당연히 허니지."



왜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그가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와의 친분과 내가 오늘 갈 파티랑 무슨 상관이라고? 질문이 흐름에 안 맞잖아요."
"왜 안 맞아? 봐봐. 사람에게는 각자 저마다의 영역이나 범위가 있잖아?"



다이어리 한 장을 죽 찢어낸 그가 큰 동그라미 하나를 그렸다. 그 안에는 사람으로 추정되는 선과 동그라미를 주욱주욱 긋는다. 나는 턱을 괴고 앉아 그가 하는 걸 바라보기만 했다. 



"이게 허니 비의 가장 크고 넓고 얕은 영역이야. 여기 들어가는 건 뭐, 대충. 이름만 아는 사람. 동네에서 몇 번 스쳐 지나가듯 본 사람. 그런 농도라고 쳐."



그리고는 처음 것보다 작은 원을 그렸다.



"이게 그 다음으로 넓고 좀 더 깊어진 영역. 여기는 서로 연락처는 알고 있는 정도라고 치자."
"어우 너무 세세해. 왜 그렇게 피곤하게 살아요?"
"나 원래 존나 피곤한 인간이야. 아무튼."



사람 모양의 최대한 가까이에 맞춰 그려 넣은 원에 점을 하나 찍어 넣은 그가 뻔뻔한 얼굴로 고개를 치켜 들었다.



"이게 나라면."
"......이 점이?"
"오늘 만나는 사람들은 어떤 원에 들어있냐 이거지."



애초에 자기가 이긴 승부라고 단정을 지어놓고 묻는 건 도대체 뭐지? 나로 추정되는 사람 모양의 것과 그로 추정되는 점이 너무 가까이 붙어있잖아.

저 사이에 원 같은 걸 그려 넣을 수나 있겠나. 기가 막혀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위 아래로 찬찬히 훑어보는 눈빛에 그는 그럴싸한 포즈를 취하기도 했다. 

사람이 진짜 어쩜 이럴까. 어쩜 이렇게, 볼 때마다 말문을 막히게 할까? 미지의 생명체를 따져 보듯 조금 더 고개를 숙이자 그가 답지 않게 한쪽 어깨를 움찔거렸다.



"맙소사."
"왜요?"



너무 가까운가? 그 정도 만큼은 아닌데. 큰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던 그가 살짝 미간을 구겼다. 



"또 시작이야."
"뭘 시작해. 아무것도 안 했는데."
"나 발라먹는 눈빛! 그거! 지금 그거!"



제대로 꼬집어 정정해주자면 발라먹는 게 아니라 이 인간 정체는 도대체 뭘까 하고 탐구하는 눈빛이었다.

내가 정정한다고 레이놀즈가 그걸 인정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부산스럽게 발을 구르다가 벽을 붙들고 연신 심호흡을 해댔다. 저 요란스러움을 어쩌면 좋을까. 의자 위에 한쪽 팔을 늘어뜨리고 라이언 레이놀즈의 원맨쇼를 지켜봤다. 생각보다 제법 흥미로웠다. 

저 남자는 왜 하필 내 눈빛에 반응하는 걸까? 

타인의 시선이야 지겹도록 받았을 텐데. 거기서 특별한 걸 가려낼 수 있는 자신만의 기준선이 있나. 레이놀즈와 보내는 시간이 즐겁다. 여전히 어설픈 불편함이 존재하지만 그건 관계에서 오는 긴장감 때문이지 그가 싫어서 일어나는 게 아니다.



"글쎄. 안 먹어요. 안 먹어."
"왜? 나 맛 없게 생겼어?"
"누가 사람보고 맛잇게 생겼다 맛없게 생겼다 판단을 해요. 뭔 마트에 널어놓은 식재료도 아니고."
"물론 그건 그렇지만."
"......"
"먹음직해보인다는 대답이 듣고 싶은 건, 역시 내가 이상한가?"
"네."



그 말에 그는 딱히 미소를 짓지도 가라앉은 얼굴을 하지도 않았다. 그냥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아래로 눈을 내리깔고 잠시 침묵했다. 



"허니!"
"어어?"
"무슨 생각해?"



부담이라곤 일절 느껴지지 않는, 산들바람같은 어투로 티모시가 내게 다시 말을 걸었다. 우리 무슨 대화 중이었지. 잠깐 정신을 놓으면 혼자만의 세상으로 빠져 버리니 이게 문제다. 대외적으로 별로 좋은 모양새는 아니니까. 일단 눈앞에 있는 것에 집중해야지. 내게 대화를 걸었으니 화답하는 게 기본 매너다. 티모시 쪽으로 몸을 돌려 앉는데 가운데로 무언가 쑤욱 들어왔다. 


말 그대로 그건 '침범'이었다.

영역을 가르고 들어오는 두툼한 팔 하나를 멍하니 보다가 이게 무슨 일인가 확인하기 위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세팅되지 않은 머리에 안경을 쓴 레이놀즈가 딱히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애매한 얼굴로 티모시와 내 앞에 나타났다.



"내가 또, 파티를 너무 너무 좋아해서 말이야."



촬영이 모두 끝나고 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는 사람이다. 오죽하면 별명이 촬영장의 유령일까. 라이언은? 갔을 걸? 안 보이잖아. 모두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는 늘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제 할 일을 끝냈다 싶으면 미련없이 가 버리는. 정말 여기 존재했던 게 맞나 의아할 정도로 뒤도 보지 않고 사라지는. 

할로윈도 아닌데 그 유령이 눈앞에 나타났다. 나와 눈을 맞추고 코를 찡긋거리며, 당연히 있어야 할 제 영역에 있을 뿐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약티모시너붕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