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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1 0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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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과 그 직후의 퍼레이드가 끝난 뒤에는 성대한 피로연이 열림. 황제가 결혼 기념이라는 명목으로 황도의 주민들에게도 고기와 술, 약간의 돈을 내려서 온 도시가 축제 분위기에 빠졌을 거.
피로연 내내 칼럼은 힐끔힐끔 황후를 훔쳐봤음. 사람들이 끊임없이 와서 말을 걸고 인사하고 축하선물을 건네서 황후의 얼굴을, 그래, 그 기적 같은 얼굴을 제대로 볼 시간이 없었거든. 피로연용 예복으로 갈아입은 황후의 얼굴은 베일을 쓰고 있을 때보다 더 환하게 빛났음.
참 이상하지. 혼례복과 베일에 달린 진주며 다이아몬드가 몇 갠데 그 보석들을 달고 있을 때보다도 지금 얼굴이 더 반짝거린다는 게. 그래서 칼럼은 이게 채신머리 없는 짓이란 걸 알면서도 관둘 수가 없었음.
사람들이라고 칼럼이 체통 팔아먹고 신부 얼굴을 몰래몰래 보고 있다는 걸 몰랐을까. 하지만 솔직히 하는 꼴이 너무 웃겨서 그냥 뒀음. 부부가 사이 좋으면 좋은 거지. 후사 걱정은 없겠구만. 사람들은 몰래 숨죽여 웃었음.
물론 대놓고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둘이나 있었음. 태후와, 칼럼의 사촌이며 신랑 들러리이기도 했던 랜츠 대공이었음.
랜츠 대공은 칼럼보다 고작 다섯 살 위여서, 칼럼과 친형제처럼 함께 자랐고 지금도 곧잘 어울려 노는 사이였음. 그 랜츠 대공이 신혼 부부에게 다가와 가볍게 허리를 숙여 절했음.
"혼례를 감축드리옵니다, 폐하."
허리를 펴고 씩 웃는 얼굴이 산뜻했지.
"고맙습니다, 대공."
황후도 수줍게 웃으면서 인사를 받아 주었어.
"황상께서 마침내 신이 정하신 배필을 만나셨으니 황실과 제국에 다시 없을 홍복이옵니다."
얼핏 듣기로는 정석적인 축하 인삿말 같았지만 사실은 칼럼을 놀리는 거였음. 그렇게 배우자 별 거 아니라고 뻗대더니 임자 만났구만ㅋ 꼴 좋다ㅋ
여기에 또 가만 있을 칼럼이 아님.
"고맙소, 대공. 가정을 꾸리는 기쁨을 짐만 누릴 수는 없지 않겠소? 대공도 어서 새 장가를 들어야 할텐데?"
랜츠 대공은 일찌감치 외국 공주와 결혼했다가, 공주가 1년도 안 되어 병으로 죽은 뒤로 내내 혼자 살고 있었음. 재취 자리에 멀쩡한 오메가 데려와 신세 망칠 일 있겠냐, 자기는 제국 군대를 자식 삼아 키우겠다, 등. 어서 새 장가 가라고 들들 볶는 황실 어른들에 대한 대공의 핑계는 언제나 다양했지.
대공은 여유롭게 웃으며 응수했음.
"송구하옵니다. 신은 폐하의 군대에 몸과 마음을 다 바쳤을 따름이옵니다."
그렇게 투닥거리는 사촌 형제를 황후는 눈 동그랗게 뜨고 보고 있었음. 그 때 시녀가 다가와 황후에게 뭐라고 속삭임. 황후가 고개를 끄덕였음.
"실례하겠습니다, 대공. 먼저 일어나야겠군요."
대공에게 양해를 구한 황후는 칼럼에게도 예의바르게 인사한 뒤 피로연장을 떠났음. 아마 초야를 준비하러 가는 거겠지. 황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대공은 황후가 연회장을 완전히 떠나기를 기다렸다가, 그 행렬이 사라지기 무섭게 껄렁하게 태도를 바꿨음.
"첫인상 완전히 조지셨습니다, 폐하?"
칼럼은 대공을 노려보았음. 대공이 낄낄 웃었지.
"아니거든? 만회할 거거든?"
"예에, 잘도 맘처럼 되시겠습니다."
그러게 신이 뭐랬습니까. 인사라도 하랬잖아요. 랜츠가 놀리듯 말했지만 칼럼은 흥 코웃음을 쳤음.
"홀애비한테 결혼 생활에 대한 충고는 듣고싶지 않아."
"아니 무슨 그런 말씀을. 일찍 상처했을 뿐 결혼 생활은 폐하보다 선배라고요."
랜츠는 통 한 마디도 져주는 법이 없었음. 얄미운 형이었지. 사촌형만 아니었으면 유배를 보내는 건데. 칼럼은 이를 갈았음. 대공이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시고는 진지하게 태도를 바꿔 충고했음.
"백작부인도 깨끗하게 정리하시고요."
"알아서 할 거야."
백작부인에 대한 건은 완전히 깜박 잊고 있어서 내심 뜨끔했지만, 칼럼은 다 생각이 있었던 척 발끈하며 말했음. 그러나 거기에 넘어갈 랜츠가 아님. 완전히 잊고 있었을 거라는 게 형 눈에는 빤함.
대공이 백작부인을 싫어하는 건 아님. 단지 황제의 정부로 두기에는 야심이 큰 오메가라는 게 마음에 걸릴 뿐이지. 옛날 프랑스 왕들의 정부처럼, 왕비조차 자기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을 정도로 큰 권력을 쥐고 궁정을 좌지우지하고 싶어하는 게 너무 뻔히 보였음.
어떤 시대에는 그런 꿈이 가능할 수도 있겠지. 그래서 대공이 백작부인에 대해 여태 감놔라 배놔라 하지 않은 거였음. 하지만 칼럼이 황후에게 홀딱 반했다면, 그건 백작부인의 야심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음. 야심을 제대로 꺾던가, 관계를 정리하던가, 안 되면 시골에 영지를 주어 쫓아내야 했지.
황제도 그걸 모를 리 없겠지만. 하지만 가끔 칼럼은 나이가 어린 만큼 세상 일이 다 제 맘대로 되겠거니 낙관하는 경향이 있었거든.
안 되면 태후가 나서겠지. 대공은 생각을 저만치 밀어두고 칼럼이 건네는 술잔을 받아들었음.
시종이 시간이 됐다고 알려왔지. 칼럼도 자리에서 일어나 신방으로 향했음. 괜히 어색해서 볼을 긁적이며 신방 문을 열었음. 황후는 천개가 달린 침대 위에, 하얀 모슬린으로 된 슈미즈를 입고 앉아 있었음. 투명하리만치 얇은 옷감 아래 뽀얀 피부가 언뜻언뜻 비쳐 보였지. 칼럼은 숨을 들이켰음.
도망가고 싶었음.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지. 이 감정의 파도에 몸을 내맡기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음. 얼마나 황홀할지 가늠도 되지 않을 정도여서, 그 열락에 정말 몸을 던져도 되는 걸까 두려울 정도였음.
문간에 우뚝 선 칼럼을 보고 황후가 의아하다는 시선을 던졌음.
"폐하?"
칼럼은 문고리를 움켜쥐었음. 도망치고 싶다.
처음 생각했던 대로 그저 결혼일 뿐이고 그저 정략일 뿐이었다면 이런 감정은 들지 않았을 텐데.
칼럼은 한 걸음 무겁게 내디뎠음. 정략 결혼이라서, 오늘 초야를 제대로 치르는 것조차 정치적인 의미를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황후 앞에 초야도 못 치르는 얼 빠진 새 신랑이 될 수는 없어서, 초야부터 소박 맞았다는 불명예를 감히 황후에게 안겨줄 수 없어서였음.
"제대로 인사드리는 것은 처음이군요, 황후."
칼럼은 얼른 고쳐 불렀음.
"아니, 오스틴."
오스틴. 칼럼은 오스틴에게 손을 내밀었음. 오스틴이 그 손 위에 제 손을 얹었고, 칼럼은 조심스럽게 그 손등에 입을 맞췄음. 전율이 입술에서부터 등골을 타고 흐르는 것 같았지. 칼럼은 한 무릎을 꿇고 앉아 오스틴을 올려다보았음.
진주 베일을 쓰고 있었던 결혼식장에서보다, 화려한 샹들리에 불빛 아래 있었을 때보다, 단순한 슈미즈 차림에 어둑한 조명 아래 앉아 있는 오스틴의 얼굴이 칼럼에게는 더 감동적으로 보였을 거임.
사랑이었겠지.
아니 떡은 언제 쳐..
칼럼오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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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과 그 직후의 퍼레이드가 끝난 뒤에는 성대한 피로연이 열림. 황제가 결혼 기념이라는 명목으로 황도의 주민들에게도 고기와 술, 약간의 돈을 내려서 온 도시가 축제 분위기에 빠졌을 거.
피로연 내내 칼럼은 힐끔힐끔 황후를 훔쳐봤음. 사람들이 끊임없이 와서 말을 걸고 인사하고 축하선물을 건네서 황후의 얼굴을, 그래, 그 기적 같은 얼굴을 제대로 볼 시간이 없었거든. 피로연용 예복으로 갈아입은 황후의 얼굴은 베일을 쓰고 있을 때보다 더 환하게 빛났음.
참 이상하지. 혼례복과 베일에 달린 진주며 다이아몬드가 몇 갠데 그 보석들을 달고 있을 때보다도 지금 얼굴이 더 반짝거린다는 게. 그래서 칼럼은 이게 채신머리 없는 짓이란 걸 알면서도 관둘 수가 없었음.
사람들이라고 칼럼이 체통 팔아먹고 신부 얼굴을 몰래몰래 보고 있다는 걸 몰랐을까. 하지만 솔직히 하는 꼴이 너무 웃겨서 그냥 뒀음. 부부가 사이 좋으면 좋은 거지. 후사 걱정은 없겠구만. 사람들은 몰래 숨죽여 웃었음.
물론 대놓고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둘이나 있었음. 태후와, 칼럼의 사촌이며 신랑 들러리이기도 했던 랜츠 대공이었음.
랜츠 대공은 칼럼보다 고작 다섯 살 위여서, 칼럼과 친형제처럼 함께 자랐고 지금도 곧잘 어울려 노는 사이였음. 그 랜츠 대공이 신혼 부부에게 다가와 가볍게 허리를 숙여 절했음.
"혼례를 감축드리옵니다, 폐하."
허리를 펴고 씩 웃는 얼굴이 산뜻했지.
"고맙습니다, 대공."
황후도 수줍게 웃으면서 인사를 받아 주었어.
"황상께서 마침내 신이 정하신 배필을 만나셨으니 황실과 제국에 다시 없을 홍복이옵니다."
얼핏 듣기로는 정석적인 축하 인삿말 같았지만 사실은 칼럼을 놀리는 거였음. 그렇게 배우자 별 거 아니라고 뻗대더니 임자 만났구만ㅋ 꼴 좋다ㅋ
여기에 또 가만 있을 칼럼이 아님.
"고맙소, 대공. 가정을 꾸리는 기쁨을 짐만 누릴 수는 없지 않겠소? 대공도 어서 새 장가를 들어야 할텐데?"
랜츠 대공은 일찌감치 외국 공주와 결혼했다가, 공주가 1년도 안 되어 병으로 죽은 뒤로 내내 혼자 살고 있었음. 재취 자리에 멀쩡한 오메가 데려와 신세 망칠 일 있겠냐, 자기는 제국 군대를 자식 삼아 키우겠다, 등. 어서 새 장가 가라고 들들 볶는 황실 어른들에 대한 대공의 핑계는 언제나 다양했지.
대공은 여유롭게 웃으며 응수했음.
"송구하옵니다. 신은 폐하의 군대에 몸과 마음을 다 바쳤을 따름이옵니다."
그렇게 투닥거리는 사촌 형제를 황후는 눈 동그랗게 뜨고 보고 있었음. 그 때 시녀가 다가와 황후에게 뭐라고 속삭임. 황후가 고개를 끄덕였음.
"실례하겠습니다, 대공. 먼저 일어나야겠군요."
대공에게 양해를 구한 황후는 칼럼에게도 예의바르게 인사한 뒤 피로연장을 떠났음. 아마 초야를 준비하러 가는 거겠지. 황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대공은 황후가 연회장을 완전히 떠나기를 기다렸다가, 그 행렬이 사라지기 무섭게 껄렁하게 태도를 바꿨음.
"첫인상 완전히 조지셨습니다, 폐하?"
칼럼은 대공을 노려보았음. 대공이 낄낄 웃었지.
"아니거든? 만회할 거거든?"
"예에, 잘도 맘처럼 되시겠습니다."
그러게 신이 뭐랬습니까. 인사라도 하랬잖아요. 랜츠가 놀리듯 말했지만 칼럼은 흥 코웃음을 쳤음.
"홀애비한테 결혼 생활에 대한 충고는 듣고싶지 않아."
"아니 무슨 그런 말씀을. 일찍 상처했을 뿐 결혼 생활은 폐하보다 선배라고요."
랜츠는 통 한 마디도 져주는 법이 없었음. 얄미운 형이었지. 사촌형만 아니었으면 유배를 보내는 건데. 칼럼은 이를 갈았음. 대공이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시고는 진지하게 태도를 바꿔 충고했음.
"백작부인도 깨끗하게 정리하시고요."
"알아서 할 거야."
백작부인에 대한 건은 완전히 깜박 잊고 있어서 내심 뜨끔했지만, 칼럼은 다 생각이 있었던 척 발끈하며 말했음. 그러나 거기에 넘어갈 랜츠가 아님. 완전히 잊고 있었을 거라는 게 형 눈에는 빤함.
대공이 백작부인을 싫어하는 건 아님. 단지 황제의 정부로 두기에는 야심이 큰 오메가라는 게 마음에 걸릴 뿐이지. 옛날 프랑스 왕들의 정부처럼, 왕비조차 자기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을 정도로 큰 권력을 쥐고 궁정을 좌지우지하고 싶어하는 게 너무 뻔히 보였음.
어떤 시대에는 그런 꿈이 가능할 수도 있겠지. 그래서 대공이 백작부인에 대해 여태 감놔라 배놔라 하지 않은 거였음. 하지만 칼럼이 황후에게 홀딱 반했다면, 그건 백작부인의 야심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음. 야심을 제대로 꺾던가, 관계를 정리하던가, 안 되면 시골에 영지를 주어 쫓아내야 했지.
황제도 그걸 모를 리 없겠지만. 하지만 가끔 칼럼은 나이가 어린 만큼 세상 일이 다 제 맘대로 되겠거니 낙관하는 경향이 있었거든.
안 되면 태후가 나서겠지. 대공은 생각을 저만치 밀어두고 칼럼이 건네는 술잔을 받아들었음.
시종이 시간이 됐다고 알려왔지. 칼럼도 자리에서 일어나 신방으로 향했음. 괜히 어색해서 볼을 긁적이며 신방 문을 열었음. 황후는 천개가 달린 침대 위에, 하얀 모슬린으로 된 슈미즈를 입고 앉아 있었음. 투명하리만치 얇은 옷감 아래 뽀얀 피부가 언뜻언뜻 비쳐 보였지. 칼럼은 숨을 들이켰음.
도망가고 싶었음.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지. 이 감정의 파도에 몸을 내맡기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음. 얼마나 황홀할지 가늠도 되지 않을 정도여서, 그 열락에 정말 몸을 던져도 되는 걸까 두려울 정도였음.
문간에 우뚝 선 칼럼을 보고 황후가 의아하다는 시선을 던졌음.
"폐하?"
칼럼은 문고리를 움켜쥐었음. 도망치고 싶다.
처음 생각했던 대로 그저 결혼일 뿐이고 그저 정략일 뿐이었다면 이런 감정은 들지 않았을 텐데.
칼럼은 한 걸음 무겁게 내디뎠음. 정략 결혼이라서, 오늘 초야를 제대로 치르는 것조차 정치적인 의미를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황후 앞에 초야도 못 치르는 얼 빠진 새 신랑이 될 수는 없어서, 초야부터 소박 맞았다는 불명예를 감히 황후에게 안겨줄 수 없어서였음.
"제대로 인사드리는 것은 처음이군요, 황후."
칼럼은 얼른 고쳐 불렀음.
"아니, 오스틴."
오스틴. 칼럼은 오스틴에게 손을 내밀었음. 오스틴이 그 손 위에 제 손을 얹었고, 칼럼은 조심스럽게 그 손등에 입을 맞췄음. 전율이 입술에서부터 등골을 타고 흐르는 것 같았지. 칼럼은 한 무릎을 꿇고 앉아 오스틴을 올려다보았음.
진주 베일을 쓰고 있었던 결혼식장에서보다, 화려한 샹들리에 불빛 아래 있었을 때보다, 단순한 슈미즈 차림에 어둑한 조명 아래 앉아 있는 오스틴의 얼굴이 칼럼에게는 더 감동적으로 보였을 거임.
사랑이었겠지.
아니 떡은 언제 쳐..
칼럼오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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