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hygall.com/607516926
view 971
2024.10.09 09:18
대충 서양궁정물로








제국은 다섯 민족이 연합해서 세워진 국가임. 그러다보니 이 연합을 유지하기 위해서 정략결혼이 필요했지. 황제는 한 가문에서 적장자 계승으로 이어져왔지만, 황후는 다른 네 민족에서 돌아가며 배출해왔음. 어떤 한 특정 집안이나 민족에서만 황후가 나온다면 금방이라도 균형이 깨지고, 다섯 민족의 통합은 무너지고, 제국은 바로 기울어질 테니까.

그러니 황제든 황태자든 결혼에 사적인 감정이 개입할 여지는 없었음. 결혼도 의무여야 하는 게 황제의 자리야. 칼럼도 태어나면서부터 그렇게 교육 받았어. 자신의 운명에 불만은 없었지. 그에게 시집 올 오메가도 이런 자신의 의무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겠지. 정 좋아지는 사람이 있거든 정부로 옆에 두면 되는 거라고, 칼럼은 그렇게 납득하고 있었음.

그래서 어느 날 부황이 갑자기 돌아가시고, 후다닥 대관식을 치른 뒤에, 태후가 된 어머니가 황후의 자리를 오래 비워둬서는 안 된다며 혼담을 들고 왔을 때도 아무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지. 징징대며 투정하는 정부에게, 황후가 새로 들어오든 말든 내 사랑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을 거라고 달래줄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있었음.

여태 영지에서만 자라 얼굴 한 번 못 본 혼약자가 혼례식을 준비학 위해 황도에 올라왔을 때도, 그래도 결혼식 전에 얼굴을 한 번 보아야 하지 않겠냐는 태후의 권유는 적당히 물리쳐 버렸지. 누가 황후가 되든 전혀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중요한 건 그 이의 가문, 혈통, 그리고 그 이가 낳아줄 자식, 그럼으로써 안정될 제국 뿐이야. 이 혈연의 사슬 안에서 칼럼 자신의 역할은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 이 연쇄를 계속해서 이어가는 것 뿐이었음.

칼럼은 황도에서 제일 인기 있다는 재단사와 보석상만 약혼자에게 보냈음. 그만하면 적당히 예의를 갖춘 셈이라고 여기며.





그래서 칼럼이 황후 될 이의 얼굴을 처음 본 건 결혼식장이 되고 말았어. 그것도 결혼식을 집전할 추기경 앞에서 마주 보고 선 뒤에야.


"이제 신랑은 신부에게 입 맞추십시오."


그런데 말이야,

칼럼은 진짜 상관 없었단 말임. 황후가 못생기든, 성격이 파탄이든, 적당히 받아들이고 살 작정이었고 그럴 자신도 있었다고. 그런데 황후가, 정략결혼의 상대가, 이렇게 이뻐도 되는 거임? 정말로?



디용- 디용- 울리는 종소리가 머릿속에서 들리는 건지 아니면 종치기가 온 몸으로 황제의 결혼을 축하하는 종을 울리고 있는지 도무지 분간이 안 될 지경이었음.

신부에게 형식적인 입맞춤을 한 뒤 후다닥 떨어져야 할 신랑이, 신부의 베일을 걷어올린 채 굳어서 신부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으니 당황이 점차 번지기 시작했지. 신부의 얼굴이 제일 먼저 붉어지고, 추기경의 눈이 불안하게 굴러가고, 하객들이 수군대기 시작했어. 추기경이 헛기침을 했는데도, 신랑은 계속 굳어만 있었지.

결국 신랑의 들러리인 황제의 사촌이 신랑의 옆구리를 쿡 찌른 뒤에야 칼럼은 정신을 차렸지. 신부의 통통한 입술에 수줍게 제 입술을 눌렀어. 그마저도 정해진 시간보다 길게, 길~~~게 입을 맞추고 있다가 민망해진 신부가 먼저 고개를 뒤로 당긴 뒤에야 겨우 떨어졌지.

추기경은 일이 대체 어떻게 되어가는 건가 싶은 표정으로 새 부부의 결합을 선언했어.

황제의 정부였던 백작부인은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는 걸 눈치챘지. 그리고 이 모든 것을 1열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태후는 여유만만하게 웃고 있었지 뭐야.








오스틴 입장에서 이건 좀 어이가 없는 이야기였음. 황후가 없는 젊은 황제와 정략 결혼이 결정된 데에는 별 불만이 없었음. 대충 각오했던 일이기도 하고. 이렇게 저렇게 헤아려보니 우리 민족에서 황후를 배출할 차례인데 그 중에 황제와 나이가 엇비슷한 오메가가 있는 건 우리 집 밖에 없네?

그럼 오스틴에게도 별 도리가 없었음. 가문의 안위만 걸린 문제가 아니라 국가 전체의 명운이 걸린 중대사라는데, 싫다고 말 할 용기도, 도망 갈 만용도 없었음.

아직 결혼도 안 한 약혼자의 애인에 대한 소문도 알고 있었음. 여기에까지 불만이 없다면 그건 거짓말이지만.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지. 누구나 그렇게 사는 걸. 자신만 예외일 거라고 기대하면 안 되겠지. 그래서 그것도 체념했음.

혼례식 준비를 위해 황도에 올라온 자신과 한 번 만나지도 않는 건 조금 황당했음. 어차피 결혼식 때 볼 건데 굳이 얼굴 봐서 뭐하냐 그런 태도였지. 재단사와 보석상만 보내고 땡인 것도 성의가 없었지. 적당히 물질적인 거로 만족하란 애긴가.

예비 황후에게 눈도장을 찍으러 온 사람들이 속닥대는 백작부인에 대한 소문을 못 들은 척 넘기면서, 오스틴은 짜증을 꾹꾹 씹어 삼켰음. 절정은 백작부인이 제가 뭐라도 되는 양 예비 황후를 보러 왔던 일이었지만.

정말 뭐 이런 게 다 있나 싶으면서도, 오스틴은 다 꾹 참았음.



그렇게 넌 별 거 아냐, 내 트루럽은 백작 부인 뿐- 이런 티를 풀풀 내던 황제가 갑자기 자신을 홀딱 반한 알파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대체 어쩌란 거임?








칼럼오틴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