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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1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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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첫인상으로 누군가에게 호감을 사는 것만큼 어려운 것은 없었다. 라이언은 누군가에게 호감을 얻기 위해서라면 때때로 거짓을 말했고 그 거짓이 제대로 먹혀들어갈 때면 속으로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이란, 사회 속 구성원의 대부분인 우리 인간들이란 진실한 척 스스로를 꾸미면서도 속내를 내비칠 때가 되면 본색을 드러내기 마련이었다. 설령 처음부터 무엇이 목적인지 몰랐을지언정 깨닫고 난 다음이면 누구든지 아주 교묘하게 “사실은…” 과 같은 말을 시작으로 제게 마음을 준 이들을 설득하거나 이용하거나 은근슬쩍 제 의견을 강요하곤 했다. 인간의 본성이란 그런 것이었다. 여기서 오래된 논쟁 주제인 인간의 ‘성악설’ ‘성선설’에 대해 이야기하자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는 여태껏 그렇게 믿고 있었을 뿐이었다.

무언가 어긋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는 제가 어렸을 때부터—겨우 7살 이후부터의 기억이지만—사람들의 속내를 훤히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물론 지금까지의 그의 인간관계가 그들 자신이 얻고자 하는 이익과 (결론적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대하는 데 이골이 나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머리가 클수록 그에게 닥친 경험들, 이를테면 아주 작은 사회인 학교에서의 동아리 활동이나 무작위적으로 일어난 짧은 연애, 이후 점점 더 심각하게 구분 지어지는 계산적 만남과 배신 등과 같은 일들의 결과로서 그는 무수히 많은 데이터를 쌓은 참이었다. 그러니 세상에 ‘진실한’ 사람은 없다는 것이 그에게는 어떤 하늘의 말씀, 계시처럼 여겨졌고 아이러니하게도 그건 곧 이 세계에서 그가 믿는 단 하나뿐인 진실과도 같았다.

그렇기에 그는, 어느새 제 눈에 걸리기 시작한 한 사내에게서 이 믿음을 반反할 무엇을 느끼게 되었을 때, 적에게 공격당하는 느낌을 받았다. 세상이 온통 거짓 투성이라면, 그가 믿는 단 한 가지 진실은 거짓일 수 없었으므로. 라이언은 굳건히 제 생각을 믿었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이건 그날 밤, 그의 인생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내달리기 시작한 바로 그 시점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다. 만일 당신이 라이언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혹은 그런 믿음이 마음속 한구석에라도 자리하고 있다면 곧 생각이 바뀔 것이다. 이 라이언 로드니 레이놀즈가, 아주 짧은 시간에 무참히 함락당한 것처럼.





 
2


그의 아버지가 한 대학에서 영문학 교수로 일임하고 있을 때였다. 미스터 레이놀즈는 하릴없이 집에 늘어져만 있는 라이언을 인맥을 이용해 가을학기 동안 조교로 일하게 했다. 무더웠던 여름이 지나 가을이 오는 때의 일이었고, 라이언은 그날의 날씨와 풍경을 기억했다. 캠퍼스는 잔잔했다. 하늘은 푸르렀고 커다란 구름조각들이 눈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졌다. 그는 천천히 걸으며 제가 한동안 머물러야 할 건물을 둘러보고 있었다. 한 학기 동안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면 좋을지—철부지들과 어울려야 한다는 건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고민했으나 그건 어떻게든 버텨내면 그만이었다.

레이놀즈 가는 그다지 높은 부와 명예, 그리고 유명세 또한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우성 알파 가문이라는 명목 하나로 사회에서 꽤 좋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사회는 차별적이었다. (이것 참 웃기지 않은가?)  머리가 아무리 좋아도, 평생을 뒷받침해 줄 부를 가지고 있어도 결국 형질에 따라 모든 게 결정되었다. 라이언은 이처럼 부당한 세계는 없으리라 생각하면서도 그가 오메가가 아니라는 사실에 한편으로는 안도했다. 그때, 새가 푸드덕 거리며 낮게 나는 것이 보였다. 라이언은 기다랗게 뻗어있는 산책로를 걷다 그 곁에 놓인 벤치에 앉았다. 너무나도 평화로웠다. 마치 세상은 안전하고 평온하며 누구든지 품을 수 있을 것처럼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무엇 같았다.

라이언은 눈앞에서 흐르는 정오의 시간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펼쳐진 넓은 잔디밭 위로 어떤 이는 그대로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어떤 이들은 동그랗게 모여 앉아 있었다. 서로를 마주 보며 웃고 떠들며 먹고… 그런 풍경을 눈에 담고 있으려니 괜스레 짜증이 났다. 그는 조금 신경질적으로 눈을 돌렸다. 라이언은 곧 산책로를 걷는 사람들을 지나쳐 가만히 서서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을 쳐다보았고 마침내 저쪽 끝으로 다소 시끄럽게 대화를 나누는 듯 보이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 그는 말 대신 기묘한 손짓이 빠르게 오가는 것을 빤히 바라보았다. 두 남성이 미소 짓고 있었으나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상대의 말을 진심으로 듣고 있다는 표정의 남성이었다.

진심으로 듣는 표정이라니. 그런 문장이 떠오르자 라이언은 저도 모르게 코웃음쳤다. 그는 건너편 벤치에서 서로를 향해 비스듬히 몸을 기울인 채 손짓으로 바쁘게 대화하는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을 끈 남성은 상대의 ‘말’—눈치챘을지도 모르겠으나 그들은 두 손을 이용해 대화했다—에 무척이나 동의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진중히 듣고 있었다. 무슨 대화가 오가는지 그는 절대 이해할 수 없었으나 그건 저 둘만의 세계일 것이라 짐작했다. 라이언은 관심 없다는 듯한 눈길로 그들을 흘겼지만 다음 순간 상대가 굉장히 웃기는 말은 했다는 듯 활짝 웃는 남성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건 진심을 다한, 거짓 없는 웃음처럼 보였다. 라이언은 그런 웃음이라곤 만난 적 없다는 듯 환히 웃는 남자를 한참 동안 눈에 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그의 쭉 뻗은 다리였으나 계속해서 시선을 끌어당기는 건 그의 웃음이었다. 무표정한 듯 딱딱했던 얼굴이 순식간에 풀어지며 호선을 그리는 두 눈썹과 찡긋 접히는 두 눈. 그리고 기쁘다는 듯 반원을 그리는 입꼬리까지. 라이언은 순간 그 얼굴이 무척이나 익숙하게 느껴졌고, 그와 동시에 기분 나쁜 상념이 다시금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저런 얼굴을 가진 사람도 결국엔 거짓을 말하지. 라이언은 홀린 듯 꽤나 오랜 시간 동안 남자를 바라보았지만 더이상 그럴 수는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고 저런 웃음도 마지막, 그 끝에 다다라서는 결국 거짓이 될 거라는 사실을 다시금 머릿속에 되새겼다. 그러니까, 절대.

다시는 속지 않으리.





 
3
 

진정한 사랑이라는 건 도대체 어떤 것일까? 그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마음이라는 것이, 좀체 가늠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보통의 사람들이 사랑에 빠져 다른 누군가를 제 목숨처럼 아끼고 사랑하고 싶다고 말할 때면 그는 어린애처럼 그 곁에 서서 묻고 싶었다. “사랑이 뭔가요?” 사랑이 뭐길래. 하지만 그에 대한 답은 어릴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린 그가 물었을 때, 그의 주변에 있던 어른들은 대부분 이렇게 대답했다. “네가 크면 이해하게 될 거야.”

네가 크면.

하지만 그가 이해하게 된 것은 그와 반대되는 것들이었다. 그의 진정 어린 호감과 믿음은 누군가에겐 연민, 동정의 시선이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더 넓은 세계, 즉 위로 올라갈 발판 혹은 수단에 불과했다. 그것을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라이언은 그런 식으로 삶을 이해하게 된 것이 씁쓸하게 느껴졌다. 조금 더, 왜 조금은 더 좋을 수 없던 걸까? 그는 어머니의 마지막을 기억했다. 그가 어렸을 적부터 연약했던 어머니는 오래도록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안타깝게도 그녀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했고 어머니 또한 그랬다. 어쩌면 사랑이라 일컬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사례가 있다면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일 것이다. 

언젠가 라이언은 그와 그녀가 알파와 오메가가 아니었어도 결혼할 수 있었을지 물었다. 그의 아버지가 대답했다. “그러지 못했을 수도 있지.”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정략결혼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계획적인 결혼, 사회적인 명목, 어쩔 수 없는 선택에 의해 그 또한 탄생했다는 뜻이었다. 그때 그의 아버지는 신문 위로 흘끗 그를 바라보더니 곧 그것을 곱게 접으며 말했다.

“그래도 사랑은 했을거다.”

사랑은 했을 거라니. 그건 또 무슨 뜻일까? 그런 의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그의 아버지가 덧붙였다. “그런 만남이 아니었다고 해도 나에겐 셀레나밖에 없을 거라는 얘기야.” 후에 그는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비록 어쩔 수 없는 만남으로 이루어진 관계였다 하더라도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진짜 사랑에 빠질 수 있었던 행운아였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그는 그런 ‘사랑’이라는 것은 오로지 아버지와 어머니 둘 사이의 사랑만이, 혹은 저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만이 가능할 거라 생각했고 지금까지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렇기에 셀레나의 마지막 순간에 어렸던 그가 묻고 싶던 것은 단연코 사랑이었다.

제가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제가 정말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사랑이 다가오면 어떻게 해야 하죠? 또 사랑이 온다는 건 어떻게 알 수 있죠? 질문은 무수히 떠올랐지만 그를 향해 온전히 진실한 사랑을 건네줄 사람이 사라지는 그 순간에는 야속하게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라이언은 그녀의 곁에 엎드려 흐느끼다 제 어깨에 닿는 손길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라이언.” 산소호흡기가 쉭쉭거리며 그녀의 목소리를 갈랐다. 셀레나는 그의 얼굴을 힘없는 손등으로 느리게 쓰다듬으며 턱을 두어 번 끄덕였다. “사랑을 하렴, 라이언.” 사랑을 해. 

그는 제가 아마 평생 동안 이해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 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으며 겪어보지도 않았으니 제게는 결코 존재할리 없는 마음이라고.



라이언은 깊은 상념에서 빠져 나오며 의자에 기대 누웠다. 밖에서 보았던 남성의 얼굴은 솔직히 말해 한눈에 시선이 꽂힐 만큼 아름답고 멋있었지만 그는 절로 호감을 사는, 그런 얼굴들이 때때로 역겹게 느껴졌다. 그런 가면을 쓰고 있는 작자들을 볼 때면 억지로라도 나서서 그들의 속내를 모든 이들에게 까발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기이한 욕구를 느끼며, 그는 이제 곧 익숙해질지도 모를 그의 아버지의 책상 위로 긴 다리를 뻗어 올렸다.

윌리엄 레이놀즈. 그의 아버지의 명패를 조용히 끌어다 보던 그는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 잘 정돈된 자리는 아버지의 성격만큼 빈틈없고 깔끔했지만 어딘가 외롭고 초조해 보였다. 어머니가 떠난 뒤, 12년. 아버지는 울지 않았지만 아직까지 깊은 슬픔에 잠겨있는 것이 분명했다. 가끔 신경이 딴 데 가있는 사람처럼 혼란스러워 보이는 눈동자가 위태해 보였으므로. 라이언은 한숨을 내쉬며 담배를 털었다. 끝을 톡톡 털자 빨갛게 부서진 재가루가 재떨이 안으로 떨어져내렸다. 이렇게 훌훌 털어내면 좋을 텐데. 모든 걸. 이렇게 훌훌.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 갑자기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라이언은 답지 않게 당황하며 담배를 재빠르게 비벼끄면서 허둥거렸다. 아버지는 연달아 강의가 있는 날이었으니 적어도 3시간 이내에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그는 저도 모르게 바짝 긴장 한 모습으로 멀뚱히 선 채 상대를 맞이했다. 그런데, 그 얼굴은. 

“……”

오. 이건 뭘까. 잠시 동안 정적이 흘렀고 라이언은 눈앞에 있는 얼굴이 아까의 그 남자라는 것에 침을 삼켰다. ‘가면을 벗겨 내주지.’ 그의 마음속 심판자가 다시금 불쑥 튀어나와 그에게 속삭였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이미 호감형인 저 남성에게 제가 끌리고 있다는 것을. 그러니 라이언은 다음 행동을 정해야 했다. 게임에 참여할 것인가, 하지 않을 것인가.





 
4


발을 들이던 남자는 생각지 못한 얼굴에 멈칫 멈춰 섰다. 그러나 곧 희미하게 걸리는 그 미소란. 라이언은 다시 한번 그의 멀끔한 생김새, 매력적인 웃음에 감탄하며 그를 따라 미소 지었다. 문이 닫혔다. 이제 안에는 온전히 그와 남자뿐이었다. 이어 남자는 제 용건을 이야기하려는 듯 입을 열었으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가 잠시 제 목 언저리를 만져보더니—옅은 크림색 스카프가 둘러져 있었다—검지를 치켜들며 눈짓을 보냈다. 라이언은 잠자코 기다렸다. 그는 입고 있던 얇은 카디건 주머니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 보였다. 남자의 손이 스프링 사이에 끼워진 펜을 빼어 종이 몇 장을 넘겼다. 그는 그 위에 무어라 적은 다음, 라이언을 향해 내밀었다.

‘미스터 레이놀즈 교수님께 제출할 과제가 있어서요.’

라이언은 눈썹을 위로 올리며 손을 뻗었다. 제게 주어도 괜찮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는 잠깐 그의 손을 내려다보더니 다시 적었다.

‘실례지만, 누구시죠?’

경계하는 눈빛은 아니었지만 조금은 알고 싶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라이언은 예의 있게 미소 지으며 그의 아들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남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아까의 웃음을 띠었는데, 그는 바보처럼 순간 눈만 깜박였다. 만나서 반갑다는 얼굴로 성큼 다가온 남자는 가까운 거리에서 악수를 청했다. 실로 예상치 못한 상황에 라이언은 조금 버벅대며 내밀어진 손을 잡았다. 생각보다 부드럽군. 그런 웃기지도 않는 감상을 떠올리며. 그는 남자의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확실히 어려 보이진 않았다. 얇은 피부 위로 가늘게 그어진 잔주름들이 그가 미소 지을 때마다 보조개처럼 살짝 패였고 그건 어쩐지 고양이의 수염처럼 보이기도 했다. 라이언은 잠시간 그의 두 눈을 진지하게 들여다보았다. 이 얼굴은 과연 진짜일까, 가짜일까?

“만나서 반가워요, 라이언 레이놀즈입니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바로 펜을 끄적였다. ‘미스테 레이놀즈 교수님께 제출할 과제’ 와 ‘실례지만,’ 과 ‘누구’ 라는 글자 옆으로 그의 이름이 적혔다. 라이언은 그의 겨드랑이 밑으로 끼워진 종이 뭉치를 가리켰다. “이제 제게 주시죠, 휴.” 장난스레 말하자 휴는 눈을 접으며 과제를 건넸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든다면, 그다음은, 그다음은 뭘까. 용무는 끝이다. 둘은 어색함이 감도는 와중 서로를 쳐다보았다. 라이언은 입꼬리를 억지로 올려 보였고 남자는 문 뒤로 사라지면 되었다. 하지만, 하지만. 휴는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보였지만 망설이는 것 같았고 그 또한 왜인지 어떤 말이든 건네야 할 것 같은 분위기에 초조하게 눈을 굴렸다. 그때 휴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다시 수첩을 들었다.

‘수업 관련해서 요청드릴 게 있는데……’ 손은 말보다 느렸고 라이언은 기다렸다. ‘수화 서비스 신청서를 작성하려고…’

라이언은 갑작스레 던져진 질문에 두 눈만 깜박였다. “어, 음, 그건 아직 잘 모르겠는데요. 제가 좀 알아보고 해도 될까요? 신청서를 작성해야 한다는 거죠?” 귀찮은 일은 딱 질색이었지만, 여기서 물러서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는 환히 웃으며 부탁해도 되냐고 물었고 라이언은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휴의 손끝이 그의 턱 끝에 닿았다 떨어졌다. 라이언은 직감적으로 그것이 그의 대답임을 깨달았다.

‘고마워요.’

그것을 마지막으로 휴는 수첩을 덮었다. 펜은 다시금 스프링 사이로 끼어들었고 그것은 곧 그와 잘 어울리는 옅은 회색빛 카디건 안으로 사라졌다. 언어를 품고 다니는 남자라니, 그건 휴를 더욱 신비스럽고 매력적이게 만드는 것 같았다. 라이언은 종이 뭉치를 책상에 내려두곤 마치 누군가가 제 집을 방문했다 떠나는 것처럼 손수 문을 열었다. 문밖까지 휴를 배웅하면서, 라이언은 어쩌면 제가 이미 발을 들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잘 가요, 휴.”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는 얼굴로 그에게 눈인사를 건넨 휴는 천천히 멀어졌다. 그리고 코끝을 스치는 어떤 향기. 게임에 참여할 것인가, 하지 않을 것인가. 아직 그 시작점에 서 있는 것이 분명했지만 라이언은 휴의 가면 뒤, 바로 그 뒤에 감춰진 ‘진짜’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지 무척이나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5


휴 마이클 잭맨. 이름도 참 그 다운 이름이었다. 라이언은 손쉽게 휴에 대한 기본 정보를 손에 넣을 수 있었는데, 그건 순전히 전혀 알파답지 않은—대대로 이어지는 우성 알파 가문이라면 다른 그 누구보다, 또 그 어느 것에든 우위에 설 수 있었으므로 직무적 책임감과 의무감은 대체로 요구되지 않았다—그의 아버지 덕분이었다. 형질은 때로 그 자체로도 권력이 되었지만 윌리엄은 오로지 단 하나만을 중요시했다. 바로 그의 사랑이었던, 셀레나. 하지만 이 세상에 그녀는 존재하지 않으니, 그는 가만히 있어도 굴러들어 오는 모든 것을 터부시했다.

그래서일까. 라이언은 그의 아버지가 각각의 학생들의 특징을 꼼꼼히 적어둔 노트를 잘 알고 있었고 몇 장 넘기지 않아 휴를 찾을 수 있었다. 휴 M. 잭맨. 열성 알파 가문. 나이 36세. <영문학의 이해> 수강. 휴는 올해 봄부터 첫 학기를 시작해 이제 가을 학기를 앞둔 아버지의 학생이었다. 그는 그의 아버지가 작게 메모해 놓은 글자도 읽었다. ‘문학을 좋아함’ ‘고전 텍스트 읽기 및 쓰기에 우수’ ‘수화 서비스 신청자’ ……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 ‘연락처 +xx xxx-xxxx-xxxx’

라이언은 수화 서비스 신청자라는 대목에서 잠시 멈칫했으나 제 아버지가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이라고 적었다는 것에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다 큰 남성에게 그런 표현을 갖다 붙이는 건 어딘가 조금 맞지 않는 느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조용히 휴대폰을 꺼내 들곤 휴의 번호를 옮겨 적었다. 그는 이건 제게 주어진 임무 때문이라고 (신청서를 제출해야 하니!)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되뇌었고 더이상의 정보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뒷장을 펄럭였다.

뒷장은 비어 있었지만 되돌아온 앞장, 바로 그 구석에, 그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아주 작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남성 오메가.” 열성 알파 가문에서 태어난 열성, 거기다 남성 오메가라니. 라이언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그의 형질을 확인하니 휴의 얼굴과 여유가 베여있는 몸짓, 아름다운 미소, 그 모든 게 더욱 묘하게 다가왔다. 남성 오메가는 이 세계에서 가장 천대받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그가 맞지 않는 곳에 맞지 않는 얼굴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그러니……

그는 노트를 제자리에 곱게 끼워 넣은 뒤 연구실을 나섰다. 라이언의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