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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1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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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그게 덱스의 집착때문인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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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니는 말 없이 와인을 천천히 음미하고, 덱스는 눈으로 그녀를 음미한다. 그는 얌전히 그녀의 반응을 기다리는 척 배부른 사자마냥 이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그녀가 침묵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녀를 정당하게 관찰할 수 있는 시간 또한 길어진다. 허니는 알까? 천천히 끓어오르는 물처럼, 그녀는 평생 이해 할 수 없을 만족감이 덱스를 서서히 달아오르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며칠 밤이고 이 상태로 얼마든지 그녀를 기다려 줄 수 있다. 덱스가 오히려 이 시간이 끝나지 않길 바라는 반면 허니는 아득한 곳에서 올라 오려는 후회를 차분히 누르고 있었다. 분명 깊은 고민 끝에 이 남자를 집에 들인 것이었지만, 백 번 생각해도 정신나간 미친 짓이었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는 안정을 찾아갈 것이고 자신은 절대적으로 불리해진다. 덱스가 벌써 수를 두었지만 자신은 그러질 못했기에 말리기 시작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럴수록 조급하게 굴 수는 없었다.

위성처럼 자신의 곁에 계속 맴도는 덱스를 알아차린 뒤부터, 허니 또한 그에 대한 생각을 하루도 안 해본 날이 없었다. 그는 항상 허니를 주시하면서 제멋대로 모습을 드러냈다가 숨기를 반복한다. 시선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그는 그녀를 놓친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오로지 정상의 범주를 한참 벗어난 이 위험한 남자를 어떻게 피해야 할 지 고민했다. 하지만 호랑이를 잡기 위해선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할 때도 있는 법. 그를 떨쳐내기 위해선 우선 그에 대해 알아야 했고, 그의 시선으로 세상을 들여다 봐야 할 것 같았다. 허니는 자기 자신을 미끼로 던지고 나서야 덱스가 자신보다 한참 앞서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코 앞까지 다가오다가도 다시 뒷걸음질 쳤지만 모순적이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둘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이러다 언젠가 그와의 접점이 생기는 순간이 오면, 최소한 둘 중 하나, 어쩌면 둘 다 파국을 맞을 것이 뻔했고 높은 확률로 손해보는 쪽은 잃을 것이 없는 덱스가 아닌, 허니 자신이었다. 이대로 앉아서 당할 수 만은 없었다.

꽃을 받은 이후로 허니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평소보다 그에 대한 생각을 더욱 더 많이 하고 있었다. 그는 보이지 않는 울타리라도 있는 것 같이 같은 거리를 유지하며 계속해서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다가, 어떤 시점부터는 그 뒤로 가지 않겠다는듯이 굴었고, 자신은 여전히 막무가내인 그를 밀어낼 방법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허니는 결국 그의 페이스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먼저 거리를 좁히는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패 중 하나를 드러내야만 했다. 그의 만행을 진작에 알고 있었음을 그녀의 방식대로 아주 과감하게 알렸고 그녀의 의도대로 덱스는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허니는 그렇게 자신이 주도권을 뺏어 온 줄 알았으나 금세 생각을 접었다. 그가 마트까지 따라 오는 것은 예상 범위 안의 행동이었다. 하지만 허니는 똑같은 식료품을 동일한 수량으로 산 덱스의 짐을 풀며, 자신의 행동을 그대로 모방하는 덱스의 행위에는 그의 어떠한 의도도 들어가 있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1인분씩 샀던 자신의 직감이 옳았다. 덱스의 시선으로 본 자신은 그저 일상 그 자체였다. 자아 대신 알고 싶지 않은 그의 욕망이 보인다. 어쩌면 그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할지도 모른다. 충분히 각오했다고 다짐해도 겪어본 적 없는 일에 대한 공포는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요리를 하는 동안 그가 등 뒤에서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에 내내 오싹했다. 어떻게 행동하고 반응해야할 지 답은 쉽사리 나지 않는다. 이 집요한 남자는 정말 예측 불가였다. 그는 허니를 배려하는 척 하지만 사실 그가 행하는 어떠한 행위에도 그녀에 대한 배려는 없었다. 그는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생각하고 행동했고 본디 그렇게 타고난 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까지 그녀를 괴롭히고 판을 치며 일방적으로 불리한 관계 속에서 자꾸 허니가 그를 적대적으로 대할 수 없게 만든다. 그가 너무 두렵기 때문일까? 판단을 흐리는 몽롱함과 두근거림. 통제불능인 그의 모든 생각과 행동의 중심에 자신이 있다는 사실이 처음엔 마냥 불쾌했으나, 계속 부딪힐수록 그녀가 세운 모난 가시들을 깎으며 무디게 만들고 있었다. 좋지 않은 징조였다. 허니가 가만히 덱스의 눈을 바라보면 덱스는 그녀의 시선을 절대 먼저 피하지 않는다. 이 위태로운 관계가 먹이 사슬이라면, 덱스는 자신보다 더 위에 있는 포식자인것처럼 굴고 있었다. 흔들림 없이 차분히 가라앉은 눈동자. 여러번 마주한 적 있는, 감정과 생각을 전혀 알 수 없는 저 무미건조한 눈빛. 자신의 집임에도 허니는 점점 불편하게 느껴졌다. 입을 벌린 천적 앞에 머리를 들이 대는 긴장감. 그에게 궁금한 것이 많은 만큼 모조리 그의 입을 통해 답을 듣고 싶었지만 당연히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다. 그녀는 자신에게 계속해서 주의시킨다. 지나친 정보는 판단을 흐리게 만들거나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으므로 피해야 했다. 허니는 티나지 않게 심호흡을 한 뒤 자세를 고쳐잡고 식탁에 좀 더 몸을 붙였다.



"오늘 저희가 나누는 대화는 전부 진실인가요?"



"최대한 솔직하게 답하겠습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대답. 그럼 그렇지. 어느정도 예상한 모호한 태도와 답변이었다. 솔직히 덱스에겐 진실만을 고할 의무가 없었다. 허니는 와인을 모조리 마시고 들고 있던 잔을 내려 놓았다. 대등하지 않은 상황일 순 있지만 이 자리가 살얼음판 같은 건 자신뿐만 아니라 이 남자도 똑같을 것이다. 허니는 대담한 여자답게 빠르게 자신의 페이스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에게 휘말리지 않으려면 그래야만 했다. 오래 고심한 끝에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본다. 우리는 적인가요? 왜 자신을 계속 염탐하고 호의적으로 구는지, 무엇을 위해 이런 일을 하는지 등 많은 의미를 함축시킨 질문이었다. 



"저번 임무같은 일만 아니라면, 적이 될 일은 없을겁니다.'



역시나 군더더기 없는 답이었지만 이번에도 덱스는 yes or no 로 딱 떨어지게 답하지 않는다. 덱스는 피스크에 대해 언급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말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 자신이 알아낸 그녀는 자신의 숙적인 윌슨 피스크를 위해 일할 인물도 아니었지만, 무엇보다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자신만의 북극성이다. 그녀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시간과 상황이 그녀를 그리 만들었지만 덱스에겐 상관없었다. 그는 그녀를 위해 많은 걸 해 줄 의향이 있었고 언제나 준비되어 있었지만, 전부 그녀를 향한 추악한 욕망에서 시작된다는 건 순순히 드러낼 순 없었다. 자신이 그녀를 두고 하는 모든 생각들은 지극히 타당하고 합리적이었으나 그녀가 반기지 않을 것이란 걸 알기에 알리지 않는 쪽을 택했을 뿐이었다. 덱스의 안에서 허니는 왜곡된 상태로 재창조 당했다. 자신은 평범해 보이지만 특별한 이 여자가 꼭 필요했고 놓치기 싫었다. 그녀도 자신을 그렇게 여기게끔 만들고 싶었고 덱스의 세상에서는 그렇게 되어야만 했다. 이유는 숨긴 채 악의는 없으며 그녀에게 우호적인 입장이라는 것을 밝힌 자신의 방금 전 답변이 덱스는 꽤나 마음에 들었다. 허니는 똑똑한 여자이니 충분히 알아 들었을 것이라 믿었고, 정말로 그랬다. 허니는 숨을 크게 들이 마셨다. 덱스가 자신에게 이러는 이유가 여전히 미스테리였지만 지금 이 남자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말할 의사가 없었다. 주거 침입, 살인, 스토킹 등. 절대 용납이 안되는 중범죄 수준의 행위들을 저질렀지만 정말 뻔뻔했다. 일반적인 보통의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겠지만, 그는 흔히들 말하는 싸이코패스였으니 지금 이 상황이 아주 이해가 안되는 것도 아니었다. 허니는 자신이 보통의 사람들보다 무던하고 호기로운 것에 처음으로 감사함을 느꼈다. 그렇지 않다면 진작에 통째로 삼켜지지 않았을까. 지금 상황에서는 그저 단순한 호감 수준으로 이런 일을 벌인게 아닌 것만 확신 할 수 있었다. 재밌게도 적으로 돌려서 좋을게 없는 자이기에 그의 답변이 내심 안심이 된다. 같이 일하는 자들도 당신과 같냐는 질문에 아마도 라고 답하던 덱스는 몇 사람을 떠올리며 웃는다.



"FBI와 비슷합니다. 잘 맞는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고."



믿을 놈 없다는 말이네요. 허니는 덱스의 말을 곧잘 알아들었다. 그도 그럴게 자신도 지금 헬스 키친에 와 있는 이유도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가 과거에 연루된 사건 일지를 읽어도 FBI가 그에게 마냥 긍정적인 집단은 아닐 것이다. 그는 자신과 잘 통하는 그녀의 모습에 기분이 좋아서 웃었고, 허니는 처음 본 그의 미소가 천진난만한 소년같다는 감상을 잠깐 했다. 덱스는 객관적으로 위험한 인물이었지만 허니는 가끔 그가 진짜 괜찮은 사람인 것 같이 느껴져서 곤란했다. 매력적인 외모때문이 아니었다. 철저히 훈련하고 본성을 숨겨 여기까지 온 사람이지만 드물게 드러나는 다듬어 지지 않은 모습들이 그라는 사람에 대한 이상한 기대를 갖게 만든다. 만약 그가 의도하고 일부러 그런 모습을 흘리는 것이라면, 효과를 제대로 보고 있다고 나서서 말해 줄 수 있을 정도였다. 허니는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나 원하는 것이 있냐고 덱스에게 물었다. 그의 태도를 보아하니 좀 더 직관적인 질문이 아니면 안될 것 같았다. 덱스는 습관적으로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하는 듯 하더니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완벽한 폭탄 발언이었다. 허니는 자신이 잘못 들은게 아닌지 그에게 재차 물었다. 이에 덱스는 진지한 표정으로 상체를 조금 숙여 그녀와의 물리적 거리를 좁혔다.



"이상하게 들릴 거란거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허니씨만 괜찮다면 친구가 되고 싶어요."



덱스는 마른 세수를 하며 자신은 대인 관계가 많이 서툴고 어렵다 고백했다. 그건 사실이었으나 그는 의도적으로 말과 행동으로 마치 그로 인해 많이 힘들었고 고뇌한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었다. 같은 뜻으로 일하는 자들이 있으나 동료라고 부르기엔 어려우며, 자신은 지금 외톨이라는 것을 강조하듯이 덧붙인다. 첫 만남에서 결단력있는 허니가 매력적으로 느껴졌고, 항상 주변에 사람이 많은 그녀를 닮아가면 자신도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졌다고 말하는 덱스였다. 이 모든 과정이 허니에게 불쾌할 수 밖에 없는 것도 이해하며, 그 점에 대해서 매우 미안하게 생각하나 자신은 알다시피 정상이 아니라 방법이 없었다는 변명도 빼먹지 않았다. 덱스는 조금 변형시킨 이 래퍼토리를 자신이 허니에게도 사용할 줄은 몰랐다. 그는 허니에게 계속 책임감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물론 그가 청산유수로 내뱉는 모든 말은 거짓이었다. 줄리처럼 허니의 동정심을 자극하려는 수작이었다. 자신의 북극성은 엄연히 친구와 다르다. 필요에 의해 맺고 끊을 수 있는 친구라는 관계와 다르게, 어렵게 찾아낸 북극성은 온전히 자신의 소유여야만 했다. 귀중한 물건을 아무에게도 뺏기고 싶어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사람의 심리 아닌가? 허니는 덱스에게 그런 존재였다. 그녀에게 딱히 미안하지도 않았다. 허니는 망가뜨려서라도 곁에 두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여자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에게 이렇게 큰 존재가 되기까지 허니가 자초한 부분도 있었다. 자신에게 친절을 베풀었고, 자신을 살려냈고 중독시킨 그녀의 잘못이었다. 허니는 자신을 이렇게 만든 책임을 져야만 했다.

허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 상상을 초월하는 미친 인간을 어떻게 해야할 지 몰랐다. 제대로 한 방 먹었고, 그 한 방은 너무나도 치명적이었다. 완전한 패배였다. 얻은 것은 하나 없이 잃기만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의 말이 진심인지 구분이 어려웠다. 덱스는 허니가 혼란스러워 하는 틈을 타 제안을 한다. 친구가 되어준다면 당장 이 소름끼치는 스토킹을 그만 둘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말이 제안이었지 사실상 협박에 가까웠다. 덱스는 그녀가 망설이는 것을 보고 매우 공격적인 수를 두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그녀 곁을 떠날 생각이 없다는 걸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발언이었다. 불쌍한 척, 허니를 생각하는 척 말하지만 계속 자신이 음침한 행동하는 것을 방관하든지, 공식적으로 동맹을 맺고 곁에 두든지 고르라는 말이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허니가 불편하지 않게 거리를 두고 떠나고 싶지만 망가진 자신은 그녀에게 끌려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란 말 따위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그였다. 이미 온통 거짓말만 늘어놓고 있으면서 그녀에게 거짓말쟁이가 되기 싫다고 태연하게 호소한다. 허니가 생각할 틈을 주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그녀를 몰아 붙일 수 있는 상황이 너무 즐거웠다. 덱스는 남의 비난과 조롱에 약한 사람이었다. 다른 이들과 다르게 허니는 지금까지 자신을 힐난한 적이 없었다. 덱스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음을 알고도 거부하지 않는 그녀가 미치도록 마음에 든다. 강제로 그녀의 곁을 차지할 수도 있겠지만, 잘 차려진 쉬운 길을 놔두고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자신을 비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입지를 굳힐 수 있단 생각은 흥미롭고 짜릿했다. 그녀는 본인의 의지로 자신을 받아 들이는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자신이 얼마든지 그렇게 만들 수 있었다.

그가 쉽게 떨어져 나갈 생각이 없다는 의사는 당사자에게 아주 잘 전달되었다. 허니는 결국 친구가 되자는 그의 제안을 승낙했다. 자신을 집요하게 따라다닌 스토커에게 이런 말을 하는게 보통 정신 머리로 가능한 건 아니지만, 애초에 이 동네에서 제 정신으로 돌아가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는 지금의 자신이 말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기에, 그녀의 영역 한참 밖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보다 가까이 두고 감시하는 것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이었다. 이렇게 하면 그도 자신을 대놓고 관찰하겠지만 자신도 그를 볼 수 있다. 더 이상의 질문은 할 수 없었다. 허니는 덱스와의 심리전에서 처참히 말려들어버렸다. 그렇게 덱스는 생각보다 쉽게 어둠 속에서 나와 그녀의 곁을 당당히 차지했다. 무혈 입성이라고 하기엔 이 자리에 오기까지 피를 흘린 자들이 있었으나 덱스는 그들을 잊어버린지 오래였다. 모든 것은 그녀를 자신에게 종속 시키기 위해서 거쳐가는 단계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제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는 일만 남았다.

다음 날, 비슷한 저녁 시간에 초인종이 울렸다. 전 날 저녁을 대접받은 것에 감사하다며 덱스가 음식을 포장해왔다. 허니는 얼떨떨하게 그를 맞이했지만, 그 다음 날도, 그 이튿날도. 덱스는 그녀를 스토킹하는 것을 칼같이 그만 둔 대신에 매일 저녁 그녀를 찾아왔다. 이미 알고 있는 번호를 합의하에 받아간 날 이후부터는 그는 문자로 허니에게 무엇을 먹고 싶은지, 언제쯤 방문할 것인지 연락 하기 시작했다. 정상적인 관계였다면 연인같아 보였을 모습이었다. 허니는 뭔가 대단히 잘못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덱스의 5번째 방문 날, 허니는 그가 사온 누들박스를 먹으며, 조심스럽게 용건이 없으면 매일 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고작 저녁 식사 한 번 만들어 준 걸로 도대체 언제까지 저녁을 사오려는 것인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입에 들어간 재료의 절반은 덱스의 돈으로 사온 것이었는데 말이다. 물론 저녁 식사는 구실 좋은 핑계임을 안다. 그에게 꿍꿍이가 있다는 것도 알지만 스스로 벌려놓은 일이었고, 한 번 말려 든 이상 방심할 수 없었기에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사실 무엇보다 그의 방문이 점점 익숙해지는 자신이 제일 문제였다. 덱스는 그녀의 말에 당황하는 척을 하며 자신때문에 불편했다면 미안하다고 사과한다. 허니는 그 날 자신의 치명적인 약점 중 하나를 발견했다. 자신은 덱스를 거실에서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에 약했다. 그에게 끌리고 있음을 인정하기 싫었지만 허니는 그만 찾아오라는 말은 끝내 하지 못했다. 그는 허니의 반응이 어떻든 자꾸만 그녀가 자신의 인생에 관여하는 지분이 얼마나 큰 지 강제로 대면하게 하고 있었다. 원래 공과 사의 구분이 명확하고 칼같던 그녀였지만 이상하게 덱스의 앞에선 그러지 못했고 덱스는 그 모습을 자신의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허니가 알 리 없었다. 자신을 무르게 만드는 그 눈빛에 더 이상 수습 불가한 사고를 치지 않았으면 좋겠단 생각을 해도 소용 없었다. 이미 그 숨막히는 중압감이 허니를 소리없이 길들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난 2주는 덱스 인생에서 가장 흡족한 날들이었다. 혼자 차에서 외로이 만끽하던 덱스의 저녁 시간은 이제 하루도 빠짐 없이 허니와 함께 한다. 그녀가 친구라는 이름으로 곁을 내어 주겠다 윤허한 순간부터 덱스는 매일 그녀를 찾아갈 계획을 세웠다. 음침하게 그녀를 쫓는 즐거움을 그만 두는 대신이기에 그녀가 자신을 위해 그 정도 양보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자신이 포기하는 만큼 허니도 감내해야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어느 쪽도 덱스가 잃은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허니가 뒤늦게 불편하단 내색을 해도 그는 이미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지을 때 그녀의 마음이 약해지는 지 잘 알고 있었고, 그걸 무기로 삼기 시작했다. 허니가 자신을 내치지 못하는 이유는 그녀가 너무 상냥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덱스였다. 그건 덱스가 그녀를 마음에 들어하는 이유들 중 하나지만 그 다정함은 그녀의 약점으로 삼을 수 있다는 점마저 아주 매력적이었다. 덱스는 그녀와 새 관계가 정립된 이후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추기 위해 사고치지 않고 시키는 임무만 빠르게 완수하는데에 몰두했다. M은 한동안 말썽부리지 않고 조용해진 그를 신경쓰는 듯 했으나 문제 없을거라 판단했는지 이내 관심을 껐다. 상황은 계속 덱스의 뜻대로 흘러가고 판도는 절대 뒤집히지 않을 것만 같았기에 그의 콧대는 날이 갈수록 하늘 높은지 모르고 치솟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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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천하의 덱스도 모든 상황을 쥐락 펴락하는 신이 될 수는 없었다. 누군가의 의뢰 하에 움직이며 비정기적이고 떳떳하지 않은 일의 특성상 9 to 6 같은 정해진 출퇴근 시간이 계속 지켜질리 만무했다. 이러한 사실을 덱스도 당연히 인지하고, 대비하고 있었으나 막상 겪어보니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허니를 길들이기 시작하고 처음으로 지체되는 임무는 예상보다 매우 불쾌했다. 짜증이 치밀기 시작한 덱스는 조바심에 계속해서 애꿎은 시계만 들여 보았다. 그가 오늘따라 거칠고 신경질적이게 임무를 수행하는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미션을 완수하고 나니 시간은 새벽 1시를 훌쩍 넘었다. 상식적으로도 덱스가 만들어 놓은 '친구'라는 틀을 핑계로 방문하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허니와 오늘은 볼 수 없다는 문자를 진작에 주고 받았지만 덱스는 도저히 체념이 되지 않았다. 그녀에 대한 생각을 분산할 일도 없어지자 그의 상태가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자신에겐 내일이 있었지만 이제와서 그녀를 고작 하루 못 봤다는 사실이 비정상적으로 덱스를 금단 현상 겪는 사람처럼 초조하고 불안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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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거만하게 누리던 여유가 하루 밤 사이에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해도 상태는 도통 나아지지 않았고, 억지로 잠을 청하는 것도 소용 없었다. 식탁에 앉아도, 누워있어도 온 세상이 그녀였다. 덱스는 아주 산만한 아이처럼 굴었다. 그녀를 겪지 않고 돌아온 집은 처음 온 장소처럼 너무 낯설고 불편하게 느껴졌다. 오늘 그녀는 어떤 모습을 하고 하루를 보냈을까?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일도 그녀를 볼 수 없다면? 내가 찾아가지 않아서 기뻤을까? 온갖 의미 없는 혼자만의 생각들이 그를 침식하기 시작한다. 그나마 상식이 통하는 학습된 이성은 침대에 묶여서라도 참아내라고 외치고 있었다. 차 안에서 그녀의 거실을 훔쳐보던 시절처럼 단 몇 시간만 버티면 됐다. 해가 뜨는대로 찾아가면 되니 제발 일을 그르치지 말라 말한다. 한참을 뒤척이던 덱스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이미 옷을 가볍게 챙겨입은 상태로 허니의 현관문 앞에 서 있었다. 시간은 3시를 앞두고 있었으니 그녀는 자고 있을 터였다. 그는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자신이 이 관계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하다 믿고 있었는데, 꼴 사납게도 지금 이렇게 괴로운 자신을 두고 아무렇지 않게 자고 있을 그녀를 생각하니 너무 분했다. 이 상황이 너무 불공평했다. 초인종을 누르거나 문을 두드려 그녀를 깨우고만 싶었고 자신은 그럴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매일 그녀를 보는 시간은 고작 한 두시간이었고 시간이 늦었으니 자신이 백 번 양보해 단 10분만이라도 그녀를 본다면 미련없이 귀가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깨워서 미안하지만 너무 보고 싶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면 받아주지 않을까? 그녀는 착하니까, 자신에게 약하니까 아마 괜찮다고 해 줄 것이다. 하지만 기고만장한 태도와 다르게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덱스는 고작 문 하나 두드리지 못하고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에 더 분노하기 시작했다. 한참 자리에 서서 혼자 끙끙 앓던 덱스는 결국 힘없이 벽에 기대 주저앉았다. 숨이 거칠어졌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 것을 참는 대신 머리를 쥐어짜기 시작했다. 이런 적은 살아오면서 처음이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는 상태가 된건지 감도 오지 않아 너무 당혹스러웠다. 혼자 괴로워 하고 있는 자신은 너무나도 한심하고 쓸모없게 느껴졌다. 이 문 너머에 자신이 그토록 원하는 여자가 있었으나 한편으로 반감이 들었다. 정확히는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는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하려는 자신에게 반감이 들었다. 약속된 시간도 아니고 늦은 시간임을 충분히 알고 있다. 자신의 지금 처지로 방해해서는 안되는, 그녀만의 시간임을 안다. 자신이 이상한 것도 알고 있다. 그녀가 자신을 이렇게 만들었으니 언제든 받아주는 것이 당연한 이치라고 생각했지만 모든 신경 회로들이 나서서 그를 말리고 있다. 스스로 유리한 자리에서 내려와 그녀의 발 밑을 기고 있는 꼴이었다. 자신이 미친게 분명했다. 머서 박사는 북극성이 부서지고 망가진 자신을 인도해 줄 대상이라고 했지 이렇게 자신을 미치게 만들거라고는 말해준 적 없었다. 이렇게 힘들 줄 알았으면 자신은 허니를 쫓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제와서 의미는 없었다. 그녀가 당장 필요했다. 하지만 이 외로운 밤엔 완벽하게 짜 놓은 틀에서 한참 벗어난 데다가 길을 다시 잃은 자신만이 있다. 한 번도 이렇게 전전긍긍한 적이 없었다. 휘둘리고 길들어진 것은 자신이었다. 갑자기 그동안 회피하던 현실이 체감되기 시작한다. 자신은 알고 있었다. 억지로 매일 찾아오는 자신이 그녀에게 곁에 두고 싶은 좋은 남자일리가 없었고, 허니는 그저 착해서 자신을 받아주는 것 뿐이었다. 이런 식으로 굴어서 당연히 그녀에게 좋은 이미지를 남길 수 있을리가 없었다. 허니에게 절대 버림 받으면 안된다는 생각과 거기서 파생되는 처음 느끼는 불쾌감과 불안이 덱스를 겁쟁이처럼 만들고 있었다. 덱스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기에 지금 자신을 바닥으로 찍어 누르는 이 압박감이 무엇인지 몰랐다. 덱스가 감정과 생각의 소용돌이에서 몸부림 치고 있을 때, 굳게 닫혀있던 현관문이 열리고 편한 차림의 허니가 나왔다. 자다 깬 모양인지 잔뜩 농후한 그녀의 향이 따뜻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덱스..? 지금 이게 무슨.."



잠에서 덜 깬 모습의 허니가 아직 익숙하지 않은 복도의 조명에 눈살을 찌푸리자 그녀가 화난 줄 안 덱스의 영혼은 절망의 구렁텅이로 내던져졌다. 절대 보여서는 안되는 치부를 들킨 것 같았다. 허니의 말 한 마디, 표정 하나에 자신은 무력해진다. 입술 끝에서 쓰디 쓴 좌절의 맛이 느껴진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는 아무 짓도 하지 않고도 자신을 정복했다. 그녀의 손짓 한 번에 자신의 세상 전부가 흔들린다. 바들바들 떨며 자신을 올려다 보기만 하는 덱스를 보고 허니는 어안이 벙벙했다. 2주만에 매일 보는게 익숙해 진 것인지, 덱스 생각에 잠을 설치다 겨우 잠이 들었으나 마침 복도에서 뭔가 부딪히는 작은 소리를 겨우 듣고 나온 참이었다. 허니는 빠른 눈치로 지금 덱스가 자신을 보러 이 꼭두새벽에 찾아왔고, 차마 자신을 깨우지 못하고 밖에서 서성거렸음을 알아차렸다. 솔직히 사람 대하는게 서툴다는 그의 말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제 멋대로 사는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그답지 못한 행동에 위화감마저 든다. 허니는 차가운 바닥에 앉아있는 그를 일으켜 세워 집 안으로 들였다. 부축하는 그녀 덕에 갈기갈기 찢겼던 그의 심장이 장난처럼 천천히 아물기 시작한다. 시간이 늦었으니 오늘은 자고 가요. 바깥은 전혀 추울 날씨가 아니지만 그의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우선 그를 진정시키고 재워야겠다 싶었던 허니는 그를 방금까지 자신이 있었던 침실로 들였다. 덱스는 그녀가 이끄는대로 얌전히 침대에 걸터 앉았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남자의 볼엔 미처 마르지 못한 눈물자국이 있었다.


무엇때문에 그가 이렇게 힘들어 하고 있었는 지 절대 알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허니는 정말 원치 않게 그의 얼굴을 보고 방금 전 느낀 위화감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가슴이 철렁하고 잠이 달아났다. 그제서야 현관 밖으로 나간 것이 너무 큰 실수임을 깨달았다. 그를 잠시라도 생각 했으면 안됐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왔으면 안됐다. 모르는 척 밤을 보냈어야만 했다. 후회하긴 늦었으나 빨리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평소라면 그를 달랬을 허니였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덱스는 지금 마주해선 안되는 상태라는 걸 허니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잘자요, 덱스. 이불과 베개를 챙겨 급히 거실로 나가려던 그녀의 팔을 덱스는 말 없이 붙잡았다. 전혀 강압적이지 않고 오히려 애처롭게 느껴지는 손길이었다. 덱스가 그녀에게 어렵게 보내는 마지막 용기였다. 침대 헤드의 흐릿한 조명 빛이 전부인 어둠 속에서 결국 두 시선이 얽힌다. 그녀가 약한 그 눈빛. 하지만 이번에는 의도적으로 짓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의 볼을 타고 눈물이 다시 흐르고, 허니를 붙잡은 손은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허니는 자신이 덱스에게 무른 것을 알지만 이 이상으로 봐줄 수 없었다. 머리 속에서 소리지르고 그를 때려서라도 자리를 피하라고 경고를 보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절대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감정. 알고 싶지 않았던 그 감정은 어느새 더는 무시하지 못할만큼 방에 흘러 넘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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