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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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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된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상쾌한 숙면에서 눈을 떴다. 원치 않는 악몽과 더더욱 원치 않는 길몽 따위 없었다. 도중에 화장실에 가거나 갈증이 나서 탁상 위의 자리끼를 찾는 일도 없었다. 이 세상의 온갖 죄된 것들은 아무것도 방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어좌 곁에서 잠을 청한 것만 같았다.

 

 벽에 걸린 시계는 오전 일곱 시 정각을 가리키고 있었고 창밖에는 불과 몇 시간 전까지 당신 곁에서 나를 재운 하느님이 세상을 향해 손을 뻗어 물방울과 안개를 힘껏 뿌리고 계셨다. 옆집 데보라는 착용감이 갑갑한 장화를 신고 학교에 가야 한다며 불평을 하겠지만 샛노란 태양만이 빼곡히 채워진 주간 예보에 질릴 대로 질린 내게는 참으로 반가운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지난 며칠을 아주 한심스럽게 낭비했다. 저 하늘 높은 곳의 태양이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이 세상을 굽어보는 것을 애써 외면해 보려고 문을 죄다 닫고 블라인드를 최대한 내리고는 침대 곁에 기댄 채로 바닥에 앉아서 재떨이가 수북해지도록 줄담배를 피워 댔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내 의지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한 태양은 기어코 방안으로 희미한 빛과 온기를 보냈고 괴로움에 천장을 향해 고개를 들었을 때는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죽은 아내가 “여보, 안녕? 지금 기분이 어때?” 하며 나를 조롱하고 있었다. 태양이 가장 환하게 발광하는 황혼 때에는 차라리 하늘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으로 도피하고 싶을 정도였다. 

 

 어린 아이가 그리웠다. 실상 그는 정말로 어린 아이는 아니다. 하지만 그토록 싫어하는 채소도 구운 베이컨 속에 숨겨 돌돌 말아 주면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몹시 기뻐하며 먹을 것이 분명한 그의 알맹이는 틀림없이 어린 아이일 것이다. 애정이라는 거북하고 어려운 이름 대신 사교와 위로라는 가벼운 이름으로 포장했더니 그토록 손쉽게 넘어온 그는 틀림없이 우리 모두 한때 가졌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잃어 간 순진함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 무구한 꼬마에게 정기적으로 찾아가는 날이다. 간만에 하늘이 가증스러운 미소를 띠지 않고 본색을 드러낸 반가운 날에, 매끼 식사는 제대로 챙기는지 의심스러운 꼬마의 집 식탁에 마주 앉아 홍차를 마시며 고개를 푹 숙인 채 양손으로 머그컵을 꼭 붙잡으며 수줍어하는 꼬마의 모습을 구경하는 퍽 즐거운 시간이다.

 

 이런저런 즐거운 상상을 하니 부지불식간에 마음이 들떠서 여느 때보다 채비를 서둘렀다. 여느 때보다 심혈을 기울여 면도와 세면을 마친 뒤, 그와 만날 적에는 한 번도 입지 않았던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걸치고 진갈색 로퍼를 신고는 현관을 빠져나와 천장이 있는 입구에 서서 호우가 점거한 세상과 마주했다. 드물게도 퍽 세찬 비라서 서둘러 차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나을 것 같았지만 솨 하고 쏟아내리는 빗소리가 숨이 멎을 정도로 감미로워서 잠시 눈을 감고 가만히 서서 청각을 집중시켰다. 

 

 지금쯤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서재에 홀로 앉아서 키보드를 두드리며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을까. 예정되어 있는 방문에 내심 불안함과 설렘을 함께 안고 있을까. 여전히, 관계의 진실함과 올곧음에 대하여 외롭게 고민하고 있을까. 실상 먼저 배반을 당한 것인데 아직도 자기가 배반을 저지르고 있다고 믿는 것일까. 

 

 생각만으로는 어차피 부질없을 것이다. 무엇이 됐든 간에 중요한 것은 당신과 만나는 것이다. 당신을 설득하는 것도, 다그치는 것도, 그것도 아니면 꾀어내는 것도. 당신의 그 표정과 말씨를 살핀다면 무엇이든 꾀할 수 있을 것이다. 순수한 의도의 인도引導도, 악질적이지만 피할 수 없을 정도로 달콤한 타락도.

 

 

 

 

 고속도로로 진입한 이후로 20분을 달려 두 번째 분기점에서 빠져나가서 5분 정도를 더 달리자 낯익은 주택가가 시야에 들어왔다. 입구에서부터 다섯 블록 떨어진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서 세 번째 집이었다. 

 

 집 바로 앞에 차를 세워 두고 차에서 내려 현관을 향해 다급하게 달려갔다. 현관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누르려던 그때, 바로 옆에서 다급한 기척이 느껴졌다. 그쪽으로 시선을 옮겨 일별하니 방금 전까지 굳게 닫혀 있던 여닫이창이 활짝 열렸다. 걸음을 옮겨 그쪽으로 가까이 다가가니 창문 너머의 에반이 한 눈에 보기에도 지친 표정으로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왔네요. 정말 왔어요…….”

 

 그리고는 눈물을 글썽이며 입에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중얼거리듯 말하는 것이었다. 예상 밖의 반응이었다. 저 표정은, 어떻게 해석해도 간절한 소망이 마침내 실현되어 모든 두려움과 우수憂愁에서 벗어난 이의 더없이 환희로운 표징이었다. 심상치가 않았다.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무엇에 홀린 듯 내 눈을 응시하는 당신은 내가 감히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절실한 희구를 품었음에 틀림이 없다. 

 

 이내 에반이 창문에서 두세 걸음 정도 떨어져 있는 나를 향해 떨리는 두 팔을 뻗어서 가능한 한 바싹 다가오도록 무언의 종용을 했다. 그 신비로움을 품은 행동거지에 나 역시 홀린 듯이 그의 뜻대로 이행했다. 몸이 벽에 닿을 정도로 바투 다가섰을 적에는 피안의 아득한 황홀경에 도취된 에반이 양손을 내 뺨 위에 살며시 올려 실체를 확인했다. 입가에 희미했던 미소는 서서히 입꼬리가 올라가며 뚜렷해졌고 아주 미세한 흉터가 남아 있던 두려움과 우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에서 자취를 감췄다. 

 

 준비한 말들은 삽시간에 쓸모를 잃었다. 오만함이 마침내 종말을 맞이하는 순간이었다. 당신의 찬란한 슬픔 위에 주인으로 군림하여 손바닥에 놓고서 꼭두각시 다루듯 제멋대로 쥐락펴락하겠다는 나의 계략을, 하염없이 내가 나타나기만을 고대했던 당신의 고독함이 수치스럽게 만들었다. 전에는 그가 이 덫에 걸려서 허우적거리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쾌감이 흘러넘칠 것만 같았는데 실제로 마주한 현실은 전연 그렇지 않았다.

 

 “스테판—”

 “에반, 미안하지만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말아 줄래요?”

 

 조금 전부터 에반이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입술을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마침내 내 이름을 불렀지만 침묵해 주기를 부드럽게 청했다. 그 거룩한 형상을 조금 더 가만히 감상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 거룩함이 내 언어를 압도해 버려서 도무지 무슨 말을 머릿속에서 끄집어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주문의 저의를 파악할 리가 없는 에반의 얼굴에는 금세 아까의 두려움과 우수가 돌아와 있었다.

 

 “내,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건가요……? 미안해요.”

 

 아, 왜인가 했더니 또 다시 예상치 못한 전개다. 무심코 고개를 살짝 떨구며 피식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사과를 받아야 할 사람이 먼저 다급하게 사과를 건네는 꼴이었다. 얼굴을 고이 감싸고 있던 에반의 따스한 양손을 살며시 거두고서 가죽 장갑을 벗고는 내 양손으로 그의 양손을 감쌌다. 그가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도록 얼굴에는 확실한 미소를 띠고서 그의 왼쪽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아뇨, 잘못은 당신이 아니고 내가 했죠. 내가 좀 더 잘 살폈어야 했는데, 정말 미안해요. 간절히 날 기다렸을 당신을 떠올리니까 도저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서 그랬어요.”

 

 그러자 다시 두려움과 우수는 그의 얼굴에서 말끔히 떠나갔다. 조금 전에는 그것들이 걷히고 나서 드러난 찬란하게 빛나는 거룩함이 나를 당황시켰지만 이번에는 예의 그 천진난만함이 나를 안심시켰다. 실상 두 모습은 얼핏 상반되어 보이지만 유기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을 것이다. 그의 천진난만하고 무구한 상념들이 뭉치고 뭉치다가 결국에는 내가 오지 않을 거라는 두려움이 마음을 통째로 집어삼켜 버리면, 그 괴로움을 삭히고 삭히다가 마침내 해소될 적에 일종의 흉터로서 찬란한 거룩함이 남는 것이다. 

 

 내가 당황한 것은 오로지 그 모습을 처음으로 목격했기 때문이다. 결코 그가 외로움에 허덕이고 있는 상황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내가 그에게서 읽은 신호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 사람의 모습이었다. 새 사람과 새 모험을 하느냐, 아니면 다시는 모험 따위 강행하지 않고 고독 속에 안주하느냐를 가지고 가슴 터지도록 번민하는 모습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가 죽을 때까지 우유부단할 것만 같았다. 설령 임종을 맞이할 때까지 나와 함께 산다고 해도 평생을 그 선택의 기로에서 한 걸음을 내디지 못한 채 영원히 모든 것을 유예한 채로 삶을 마칠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나의 역할은 무엇인가. 사실 내 생각과 달리 어쩌면 나는 설득을 통하여 그를 우유부단함에서 벗어나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그 우유부단함을 관망하며 쥐락펴락하는 즐거운 유희를 즐기는 것이다. 아주 교활하게, 너무 가깝다 싶으면 거리를 두고 너무 멀다 싶으면 살포시 끌어당긴다. 사실 어쩌면 이는 낭만적인 관계를 맺는 사람들 사이의 일반 법칙으로 통용될 정도로 흔해 빠진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관계 속에서도 자기 잇속은, 지저분한 자존심은 현저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 한 가지 내가 망각한 사실이 하나 존재하는데, 바로 상대가 에반이라는 것이다.

 

 “오늘 비가 와서……당신이 혹시라도 안 오는 게 아닐까, 괜히 초조한 마음이 들었어요. 사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어요. 당신 같이 사려 깊은 사람은 이렇게 억수비가 내리는 날에도 나 같은 걸 만나러 와 주겠지, 하고요……. 그런데 머리로는 믿기는 게 가슴으로는 그렇지 않아서, 혹시라도 오늘 오지 않으면 이대로 끝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 있죠. 그동안 금요일은 늘 맑았으니까요. 날씨가 변해 버리면……당신도 변해 버리는 게 아닐까…….”

 

 에반이 말끝을 흐리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나에 대한 과대평가가 몹시 양심에 가책을 느끼게 했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랬군요.” 

 

 그렇게 내 교활함이 당신의 거룩함에 패배했다는 사실은 애써 숨긴 채로 태연함을 가장하고서 에반의 얼굴에서 조심스레 안경을 벗겼다. 렌즈에 굴절되어 보였던 두 눈동자가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모습이 선명해졌다. 이번에는 내가 에반의 뺨을 쓸었다. 아까 내 뺨에 닿았던 그 손의 감촉을 머릿속으로 더듬으며 조금 더 농밀하고 상냥하게. 물론 뜻대로 잘 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빛과 어둠, 해와 달, 그리고 깨끗함과 지저분함의 대비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우월한 당신은 내게 한없이 자비롭기에, 오히려 교활하고 교만한 나와 달리 스스로를 낮추기에 당신의 얼굴에는 이 아주 작은 것조차 기꺼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바보 같아서 당신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네요. 난 변함없이 찾아왔을 거예요. 차가 고장나면 걸어서 왔을 테고, 지금 내 머리 위에 비가림막이 없으면 비를 맞으면서 당신이랑 얼굴을 마주했을 거예요. 이럴 줄 알았으면 전화라도 한 통 할 걸 그랬네요. 당신이 이러고 있을 줄은 예상도 하지 못했어요. 나랑 금요일마다 만나는 것조차 당신한테 부담일 것 같아서, 일부러 필요하지 않을 때는 연락하지 않았거든요.”

 

 담담히 고백을 마치자 에반이 살짝 몸을 흔들고는 뺨을 쓰다듬고 있는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고는 시선은 내 손을 향해 둔 채로 지긋이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이 마치 조그마한 아기 고양이가 서툴게 호흡을 하며 애교를 떠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에반이 내 온기를 느끼는 사이 앞뜰에 핀 라일락의 그윽한 향기가 바람을 타고 날아와 이윽고 에반의 향수 냄새와 뒤섞이며 내 코에 스몄다. 

 

 불현듯 작년 이맘때가 떠올랐다. 지리멸렬한 이혼 소송이 참으로 부조리하게도 먼저 외도한 이에게 유리하게 막을 내리고서 두 달여가 지난 때였다. 그 시점에도 이미 그와 나는 안면을 튼 지가 퍽 되었지만 이렇게 농밀하고 다정하게 서로를 쓰다듬지는 않았다. 지금 그의 몸에서 은은한 향을 풍기는 향수는 그때까지만 해도 침실 한구석에 선물 상자를 열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었고 에반은 언제나 파괴의 두려움 속에 사로잡혀 있었다. 

 

 “내가 선물한 거, 뿌렸네요. 마음에 들어요?”

 “네. 뿌리면서 당신 생각도 나니까……좋았어요. 이제야 뿌렸네요. 저기…….”

 “응, 말해요.”

 

 대답을 꺼내기 전, 에반이 자기 뺨에 올려져 있던 손을 모두 거두고서 창가에 있는 탁자를 가리켰다. 보라색 양초에 불빛이 은은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것 역시 내가 선물한 것이었다. 양초를 켜고 창문가에 서서 선물받은 향수를 뿌린 몸으로 기다리는 에반. 그것은 마치——

 

 “신부가 꽃단장을 한 채 하염없이 신랑을 기다렸는데, 신랑이 너무 늦게 온 모양이군요.”

 

  그 말에 에반이 아이처럼 화들짝 놀라며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이내 부끄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하면서도 수줍게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의 관계를 간접적으로 정의한 말이 썩 마음에 든 기색이었다. 나는 조금 장난스러움을 담아서 말을 이었다.

 

 “무엇을 해드려야 기분이 풀리실지요? 무엇이든 들어드리겠습니다.”

 

 무엇이든 들어주겠다는 말에 에반은 고민에 빠진 모양이었다. 잠시 호흡하는 소리조차 잘 들리지 않는 정적 속에서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이내 떠올랐는지 살짝 입꼬리를 올려 신호를 주었다.

 

 창문가 바로 앞에 놓여 있던 조그마한 목재 탁자를 옆으로 밀어서 창문가 앞 공간을 넓히고서는 에반이 아까보다도 더욱 바투 다가왔다. 그 다음에는 망설이지 않고 내 뒤통수를 잡아 고개를 앞으로 꺾고는 입매에 쪽 입을 맞췄다. 완전히 명료해진 신호를 읽은 나는 입술이 떨어지고서 뜸을 들이지 않고 곧장 그의 윗입술을 물고 말랑말랑하게 짓눌리는 살결을 맛보며 화답을 했다. 

 

 이제 주도권은 완전히 내게로 넘어왔다. 애초에 그가 자처하여 신호를 보낸 것 자체가 드문 일이었다. 다시 입술이 떨어지자 입은 더욱 크게 벌어졌고 벌어진 입술 새로 뜨겁고 묵직한 숨이 좁은 틈새로 오가고 있었다. 입술이 벌어진 틈을 타 에반의 입안으로 혀를 집어넣고는 똑같이 생겼지만 전혀 다른 감촉의 살덩이를 구석구석 집중적으로 물고 빨았다. 그가 속수무책으로 내 흥분을 가만히 받아들이자 참을 수 없는 고양감에 도취된 나는 혀 뿐만 아니라 온 입안을 마치 교접을 하듯 유린하기 시작했고 곧 그의 온 입술을 내 타액으로 흥건하게 만들었다.

 

 콧잔등에 입술을 비비고서 마침내 서로의 입술이 멀찌감치 떨어졌을 때 에반은 호흡 조절이 서투른 탓에 숨을 헥헥 몰아쉬고 있었다. 그 행동거지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주체할 수 없는 탓에 나는 다시 고개를 숙여 그와 코를 맞대고는 눈을 감고서 오감을 집중시켰다. 칠흙 같은 어둠, 라일락과 향수가 뒤섞인 냄새, 혀뿌리부터 혀끝까지 남아 있는 에반의 타액, 점점 더 거세지는 호우의 찰랑거리는 소리, 보드랍게 닿는 코의 살점. 눈을 감고 있는 중에도 그가 곧 입을 열 것 같다는 촉각이 들었다.

 

 “바라는 건, 오직 현상 유지 뿐이에요. 그거면 됐어요. 당신은 분명 믿을 만한 사람이니까, 부디 저버리지 말아 줘요. 알겠죠?”

 

 그래, 내 교활함을 드러내기에는 당신은 너무나도 부적격이다. 당신은 애초에 하나부터 열까지, 내 모든 가설과 법칙에서 예외로 적용하는 골치아프면서도 흥미롭고 사랑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죽을 때까지 모르겠지만 실상 당신 손바닥 위에 내가 있다. 당신의 지극히 순진무구한 행동거지와 상념들이 내가 꾀하는 모든 책략을 수포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한계 밖에 있는 당신은 가히 신적이며, 마땅히 흠숭을 받을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아니, 당신이 요구하지 않아도 결국 모든 것이 당신이 원하는 대로 흘러갈 것입니다. 당신은 실상 나를 길들이신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에반은 그 말의 저의를 완전히 파악한 눈치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하늘에는 비가 쏟아지고 손목시계는 오전 아홉 시를 가리켰으며 우리는 창가에 마주서서 서로의 영혼을 나눠 가지고 있었다.








내 무순은 맛없지만 스테판에반은 존맛탱이니... 랫잇삐들 츄라이

스테판에반 슼탘 ㅈ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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