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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0 02:21
다 ㅈ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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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은 모든게 잠잠했다. 형에게서는 더이상 연락이 없었고, 아버지도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라이언은 형의 말이 제돈을 뜯어가려는 개수작이라고 치부했다. 그리곤 형과의 통화를 머리속에서 밀어내고 무시했다. 제감정도, 상황도, 앞으로의 삶까지도. 그렇게 모든걸 무시한 채 어제와 비슷한 하루를 살았다. 그렇게 살다보면 모든게 없었던 일이 될 것만 같았다.
관자놀이 근처가 욱씬거렸다. 눈 앞에는 한입도 대지 않은 양송이스프가 차갑게 식어가고있었다. 라이언은 제가 앉아있는 공간을 둘러보았다. 시선를 압도하는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에 놓인 열대어 수조, 방금 막 닦은 것처럼 광이 나는 대리석 타일과 고대의 신전을 떠올리게 만드는 기둥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같이 깔끔하게 머리를 틀어올린 레스토랑 직원들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띄운 채 테이블 사이를 바쁘게 돌아다니고있었다.
“왜 안먹어? 내가 심사숙고해서 고른덴데.”
콜린은 마치 어제 만난 사람처럼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콜린 베넷. 대학시절 함께 어울리던 친구의 소개로 알게 된 애였다. 유명 기업의 아들이라는 것과 그 시절 자신을 쫓아다녔다는 사실을 빼놓고는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관심이 없다는게 더 정확했다. 대학시절 내내 어울렸지만 콜린은 라이언에게 그저 친구의 친구 정도였다.
“꼭 이래야 되니?”
라이언이 피로한 낯으로 물었다. 콜린이 4년 내내 자신을 좋아했다는 것은 알고있었다. 콜린은 매해마다 한번씩 라이언에게 제 마음을 고백했고 그때마다 라이언은 칼같이 거절했다. 잊혀진 기억이었다. 이 자리에서 다시 마주하기 전까지는.
아버지는 라이언에게 네 결혼상대를 구했다며 너는 운이 좋은편이라 말했다. 너도 아는 사람이라고. 모르는 사람보다는 낫지 않겠냐고. 아버지는 꽤나 큰 대형기업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는 사실에 내심 기뻐하는 눈치였다. 아버지는 드물게 라이언을 칭찬하기까지 했다. 잘하고있다. 이대로만 하면 돼. 그토록 듣고싶었던 말이었으나 라이언은 제 발밑이 모조리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보고싶었어.”
콜린은 눈을 내리깔면서도 미안한 기색따위 없었다. 전세가 역전 된 상황. 기가막혀 웃음이 나왔다.
“너 왜 이렇게까지 하니.”
진심이었다. 대학을 졸업한지 수년이 흘렀다. 콜린을 보지 못한 시간도 그만큼이었다.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야.”
냉담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콜린이 고개를 들었다. 수줍음이 가신 얼굴에는 이유 모를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러게 나 한번 만나주지 그랬어. 그랬으면 내가 사귀다 질려서 너 버렸을지도 모르잖아. 내가 그렇게 매달려도 네가 한번을 안만나 주니까 내가 이렇게까지 할 수 밖에 없었어.”
욱씬거림의 정도가 심해졌다. 라이언은 미간을 구기며 관자놀이 근처를 문질렀다.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점점 더 심해질뿐. 라이언이 아무말도 하지 않자 콜린의 얼굴에 초조함이 떠올랐다.
“라이, 너도 어차피 결혼 해야하잖아. 곧 회사도 물려받는다며. 나 잘 할 수 있어. 너한테 정말 최선을 다할거야. 너한테 해줄 수 있는 건 전부 해줄거야.”
대체 뭘. 라이언은 콜린이 제게 뭘 해줄 수 있는지 생각했다. 체면치례. 회사의 성장. 아버지의 신뢰. 허울뿐인 결혼 생활. 억지로 만들어 낸 가정. 가식으로 점철 된 삶. 휴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침부터 정장을 꺼내 입는 제게 어딜가냐 묻던 맑은 얼굴.
“나 너한테 관심없어. 네 이름 말고는 너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어. 앞으로도 관심 가질 일 없을 거야. 그래도 괜찮겠어?”
콜린은 상처를 받은 것처럼 보였다. 화를 내고싶었다. 이 정도 각오도 하지 않고 이런 일을 벌였냐 묻고싶었다. 상처받은 사람은 나라고 소리를 지르고싶었다.
“괜찮아..... 나는.”
콜린의 대답에 절망감이 들었다.
술에 잔뜩 쩔어 집에 도착했다. 겨우 도어락을 풀고 불꺼진 집에 발을 들였다. 침대까지 가지도 못하고 쓰러지듯 소파에 누웠다. 눈을 감고있자 곧 거실에 불이켜졌다.
“레이놀즈씨, 괜찮아요?”
“... 머리가 아파요.”
그렇게 중얼대자 휴가 다가와 조심스레 라이언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모르는 척 그 손을 붙잡고 싶었다. 그 손을 붙잡고 어디로든 떠나 버리고 싶었다. 그럴 수 없었다. 이제 곧 기사가 쏟아질테니까. 제 결혼 소식이 사방에 까발려질테니까. 모든 행복이 몰수 당한 기분. 죽음과도 같은 삶. 극단적인 생각들이 머리속을 지배했다. 그럴 수록 휴에 대한 마음은 점점 커져갔다. 커진다고 하는 게 맞을까. 이미 커져있던 마음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고 하는게 더 맞는걸까.
“무슨일이에요.”
휴가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눈을 반만 뜬 채 이마에 팔을 올렸다. 회사가. 아버지가. 콜린이. 아니, 내 인생이. 맥락 없는 단어의 나열. 말이 계속 헛돌았다. 한문장도 제대로 내뱉지 못했다. 그런주제에 우습게도 결혼이란 말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 취했음에도. 알콜이 뇌의 절반을 마비시켰는데도.
“들어가서 자요.”
자기 싫었다. 눈을 뜨면 새로운 지옥이 펼쳐져 있을 것만 같았다. 안잘래요. 자기 싫어요. 그렇게 말하자 휴가 손을 들어 라이언의 뺨을 감쌌다.
“레이놀즈씨.... 왜 울어요.”
제가 울고있다는 사실조차 휴의 말을 듣고서야 알 수 있었다. 이 꼭두각시 노릇에도 결국 한계가 찾아온 거겠지. 그럼에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 두렵게 느껴졌다.
“여기서 자요. 레이놀즈씨가 잠들때까지 제가 옆에 있을게요.”
분명 사랑같은 건 진작에 포기했다. 어머니의 기대와 제 삶을 등가교환했기에. 그러면 안되는 거였나. 내 삶을 꽉 움켜쥔 채 지켜내야만 했던건가. 돌이킬 수 없는 의문들이 가슴 속을 맴돌았다.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물 흐르듯이. 마치 원래 이래야 했던 것처럼. 라이언은 콜린의 부모님을 만났다. 콜린의 부모님은 온화했다. 그들은 라이언을 환영한다듯 맞이했지만 라이언은 시종일관 평가를 당하고 있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엄마, 라이언 수석으로 졸업했잖아. 기억나지?”
“아, 그래. 기억나지 그럼.”
콜린은 식사 내내 분위기를 띄우려고 노력했다. 콜린의 어머니는 막내 아들이 데려온 남자가 대학시절 알고지낸 라이언이라는 사실에 안도하는 것 같았으나 아버지쪽은 아니었다. 그는 라이언이 정실부인의 아들이 아니라는 점이 탐탁치 않은 것 같았다.
“어떻게 형이 아니고 자네가 회사를 물려받게 됐나?”
“아빠!”
노골적인 질문이었다. 비소가 흘러나올 뻔 했다. 이대로 깽판을 놓고 이 자리를 파투내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말을 고르고있던 찰나 테이블 아래로 콜린의 손이 떨리고있는 것이 보였다.
‘유일하게 무서운게 아빠야. 난 아빠가 제일 무서워.’
대학시절 나누었던 대화가 떠오르지만 않았어도 떨리는 손 따위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것이다.
“제가 더 간절했습니다.”
간결하게 대답했다. 진심이었다. 언제나 형보다는 제가 더 간절했으니까. 콜린의 아버지는 라이언의 대답이 꽤 마음에 든 것 같았다.
“그래, 그런 자세라면 자네에게 회사를 맞기는게 맞지. 아버지가 현명하시군.”
그는 갑자기 태도를 바꾸더니, 자신이 이룩한 기업의 성공신화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라이언은 그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그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라이언이 이 집안에 낄 수 있다는 사실에 얼마나 감사해야하는지에 대하여.
“그만하세요. 그쯤하면 됐어요.”
콜린의 어머니가 그의 말을 끊어냈다. 그녀는 분위기를 바꾸려 애를 쓰며 라이언의 칭찬을 늘어놓았다.
“대학때도 참 잘생겼다고 생각했는데, 라이언은 어쩜 점점 더 잘생겨지네. 이렇게 어린 나이에 능력도 출중하고.”
콜린의 얼굴에 뿌듯함이 차올랐다. 제가 선택한 사람이 가족들에게 인정 받았다는 사실이 마냥 기쁜 모양이었다. 라이언은 이 모든 상황이 거북하게만 느껴졌다. 과찬이십니다. 기계처럼 대답했다. 가면을 뒤집어 쓰고 있는 기분이었다.
비가 내렸다. 라이언은 차에 타있는 내내 창밖만 바라보았다.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으나 콜린은 쉼 없이 라이언에게 말을 걸었다. 대답없는 질문이 계속 됐다. 콜린은 마치 무대에서 독백을 하는 연기자처럼 보였다.
“콜린, 그만 좀 말해. 머리 울린다.”
“아, 미안!”
콜린은 사과하더니 몇분도 못가 다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벌써부터 지긋지긋한 결혼 생활이 눈 앞에 그려졌다. 창에 머리를 기댄 채 눈두덩이를 짓눌렀다. 콜린의 목소리가 소음이 되어 라이언의 신경을 끊임없이 건드렸다.
“그냥 여기서 내려줘. 걸어갈테니까.”
“무슨소리야. 비도 오는데.”
“상관 없어.”
“집 앞에서 내려줄게. 네가 어디사는지도 궁금하고.”
“하...”
기가 차다는듯 웃자 콜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라이언을 보았다.
“뒷조사 끝났을 거 아니야. 가서 그거 봐.”
상처 받은 표정. 콜린은 또 다시 상처 받은 얼굴이었다.
“왜 그렇게 말해?”
“뭐가.”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잘해보면 좋잖아. 꼭 그런식으로 말해야겠어?”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깝깝함이 차올랐다. 콜린은 여전히 기대하고있었다. 상황이 나아지기를. 라이언이 변화하기를. 그래서 언젠가는 자신을 돌아봐주기를. 시트에 몸을 붙이고 심호흡을 했다. 화를 억누르기 위한 최대한의 노력. 콜린의 눈은 벌겋게 달아올라있었다. 울지 않길 빌었다. 위로따위 해줄 수 없으니.
“콜린, 우리가 뭘 어떻게 잘해볼 수 있을까.”
“결혼 생활 내내 이런식으로 굴거야?“
콜린은 이미 결혼이라도 한 것 처럼 대꾸했다. 마치 라이언의 사랑이 식어서 이런 일이 생겼다는 듯이.
“괜찮다고 한 건 너야.”
지친 음성이 흘러나왔다.
”콜린, 나는 네가 기대하는 건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어.”
빗줄기가 거세졌다. 라이언이 차 문을 열었다.
“우린 그냥 함께 살게 되는 것뿐이야. 불행 속에서. 평생을.”
*
“왜 이렇게 젖었어요?”
라이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푹 젖은 몰골을하고 집에 돌아왔다. 라이언의 걸음이 비틀거렸다. 휴가 라이언의 팔을 붙잡았다. 몸은 차가운데 그에게서 더운 숨결이 느껴졌다. 이마에 손을 대자 손바닥 아래로 열감이 전해졌다.
“레이놀즈씨, 열나요.”
자켓을 벗기려하자 라이언이 휴의 손을 막았다.
“이러면 부끄러운데.”
그는 그렇게 말하며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수척해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라이언은 요즘들어 말수가 줄어들었고 잘 웃지도 않았다.
억지로 자켓을 벗기고 그를 방으로 이끌었다. 갈아입을 옷을 가져오자 라이언은 침대에 누워 상념에 빠진 얼굴로 천장을 노려보고있었다.
“옷 갈아입고 누워요.”
라이언은 휴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요지부동이었다. 매트리스에 걸터앉아 반쯤 젖어있는 그의 양말을 벗겼다. 부러 역하다는 표정을 짓자 드디어 라이언의 시선이 휴를 향했다. 잠시간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방에는 창을 때리는 빗소리만 울렸다.
“바지도 벗겨줘요?”
농담을 던졌으나 라이언은 웃지 않았다. 그는 휴를 보고있었지만 그의 눈동자는 더 먼 곳을 보고있는 것 같았다. 대화하길 포기했다. 뭘 묻든 그는 제대로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창백하게 질려있는 라이언의 위로 이불을 덮어주고 불을 껐다. 그대로 방을 나왔다.
휴는 식탁 앞에 앉아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듯 쏟아지는 비를 멍하니 지켜보았다. 식탁 위에 놓인 핸드폰에는 부재중 전화만 열통이 넘게 찍혀있었다. 휴는 집을 나온 뒤로 아버지의 연락을 모조리 무시했다. 라이언과 함께 지내면서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더 이상은 이렇게 살지않겠다고.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고 삶을 탓하다 그 집으로 다시 기어들어가는 일을 멈추겠다고. 늘 고인물처럼 살아왔다. 그저 되는대로. 제게 닥치는 불행들을 핑계 삼으며. 언제까지고 고여있을 수는 없었다. 라이언에게 좀더 괜찮은 인간으로 비춰지고 싶었다. 아버지는 휴가 전화를 받지 않자 그에게 원망과 애원이 교묘하게 섞여있는 문자들을 보내왔다. 문자를 다 지웠다. 망설이다 번호도 지워버렸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계속해서 휴에게 전화를 걸었다.
느닷없이 침실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자 식은땀을 흘리며 끙끙대고 있는 라이언이 보였다. 그는 얼굴을 구긴 채 의미모를 말들을 허공에 중얼댔다. 그 속에서 귀에 익은 이름이 들려왔다. 콜린. 라이언이 취한 채 반복해 뱉어내던 그이름. 라이언은 악몽의 저편을 헤메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얼굴은 고통에 차있었다. 도대체 무슨 꿈을 꾸고있기에...
라이언을 깨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몸을 붙잡고 흔들었다. 그는 쉽사리 깨어나지 못했다. 콜린이란 사람의 이름을 불러대던 라이언은 이제 꽉 막힌 신음과 함께 엄마를 찾았다. 못하겠다고 했다. 견딜 수가 없다고 했다. 이해 할 수 없는 말들을 쏟아내는 라이언의 얼굴이 너무나 괴로워 보였다.
“라이언, 눈 좀 떠요. 제발!”
그에게 소리를 질렀다. 라이언이 몸을 벌떡 일으키며 눈을 떴다. 그는 정신이 없어 보였고, 겁에 질린 사람 같았다. 그 모습이 연약한 어린아이처럼 느껴졌다. 손을 뻗어 라이언을 끌어안았다. 촉촉해진 살갗이 뺨에 닿았다.
“... 휴. 맞아?”
라이언이 아직 악몽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처럼 자신없는 목소리로 낮게 읊조렸다.
“맞아요. 저예요. 휴예요.”
라이언의 몸에 힘이 빠졌다. 그는 몸을 늘어트리며 휴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라이언의 숨에선 거친 쇳소리가 났다.
“악몽을 꿨어.”
“알아요... 무슨 꿈이길래 그렇게 소리를 질러요.”
“내 모든 걸 빼앗기는 꿈.”
가슴이 아팠다. 그를 따라다니는 불행의 정체를 알고싶어졌다. 한번도 묻지 않았고, 모르는 척 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
휴는 요즘따라 질문을 많이했다. 라이언의 가족관계, 회사 생활, 학창시절 등등. 전에는 한번도 묻지 않던 것들이었다.
“그런건 갑자기 왜 물어요?”
“라이언씨가... 궁금해서요.”
휴의 대답은 라이언을 붕떠오르게 했다가 돌아오는 현실감각에 다시 진창으로 쳐박히게 만들었다. 방금 전에도 콜린에게 전화가 왔었다. 그는 마치 일전의 다툼은 없었던 것 마냥 참새가 노래하듯 밝은 목소리로 새로운 집에 채워 넣을 가구리스트를 읊어댔다. 알아서해. 차갑게 대꾸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다시 전화가 걸려왔지만 무시했다. 휴와 함께있는 시간을 망치고싶지 않았다.
“형이 하나 있어요. 엄마는 달라요.”
“사이 좋아요?”
“아뇨. 아직 둘 다 살아있다는 게 다행일 정도죠.”
휴의 얼굴은 복잡해 보였다. 사건의 단서들을 끼워 맞추고있는 형사처럼 보이기도했다. 며칠전 제가 악몽을 꾸고 나서부터는 쭉 저런 표정이었다. 대체 무슨 헛소리를 했기에 휴가 이러는 것인지 알고싶어 기억을 되짚어 봤지만 악몽을 꿨다는 사실 빼고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꿈의 내용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휴는요. 형이 있다고 했잖아요.”
화제를 돌리자 휴의 시선이 허공을 향했다. 그는 고통 속에서 기억을 끄집어 내는 사람처럼 힙겹게 침을 삼키더니 느리게 입을 열었다.
“사이가 좋고 말고 할것도 없어요. 8살 이후로는 얼굴도 본 적 없으니까.”
“부모님이 이혼 하신 거예요?”
“그런건 아니고... 어느날 눈 떠보니까 엄마도 형도 집에 없었어요. 잠깐 어딜 갔나 했는데, 영영 돌아오지 않더라고요.”
실수했나. 걸음을 멈추자 휴가 라이언을 돌아보았다. 휴의 입술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난 괜찮으니, 신경 끄라는 뜻 같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를 위로 하고싶었다. 품에 끌어안고 괜찮다고 끊임없이 속삭이고싶었다.
“어머니가 일부러 휴를 두고간 건 아닐거예요.”
어렵사리 쥐어짜낸 위로의 말이 고작 이거였다. 처참한 기분이 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 그 집에서 휴를 꺼내오고만 싶었다. 돌아오지 않을 엄마와 형을 기다리며 덩드러니 남겨져있을 휴를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알아요. 엄마도 선택을 해야했겠죠. 그게 형이었던거고. 둘다 데려갈 수 있는 형편은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저는 괜찮아요.”
괜찮을리가. 그럴리가. 별안간 화가 치밀었다. 휴를 두고 도망친 휴의 어머니에게, 버려진 휴에게 폭력을 일삼은 그의 아버지에게, 그 모든 것을 괜찮다고 말해버리는 휴에게...
휴에게 성큼 다가가 그를 돌려세웠다. 양 팔을 붙잡고 투명하게 빛나는 눈을 마주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하나도 안괜찮아요.”
“... 전 진짜 괜찮아요.”
“내가 안괜찮다고요!”
휴는 놀란듯 보이더니 작게 웃었다.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일들도 있는거잖아요. 도망간 엄마를 붙잡아 올 수도 없는거니까...”
맥이 탁 풀렸다. 그의 말이 맞았다. 휩쓸리고 끌려다니다가 그냥 받아들이는 것. 제가 제일 잘하는 짓이었다. 누군가 휴에게 조언을 해야한다면 그게 저가 될 수는 없었다. 완전한 자격박탈. 바람이 두사람을 훑고 지나갔다. 휴의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꼈다.
“그래도... 이젠 다르게 살아보려고요.”
공원을 맴돌던 한무리의 새떼가 날개를 떨며 날아올랐다. 청명한 하늘을 가르며 날아오른 새떼들은 돌아오지 않을 곳을 향해 나아가는 것처럼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졌다. 라이언이 휴를 붙잡고있던 손을 떼어냈다.
“다르게 살고싶어졌어요. 레이놀즈씨 덕분에.”
라이언은 휴의 이 한마디가 그를 얼마나 들뜨게 만들었는지, 얼마나 더 깊은 사랑 속으로 그를 내몰았는지, 휴는 죽을 때까지 알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콜린을 발견한 라이언의 눈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콜린은 새벽부터 다리가 다쳤다며 전화해 생지랄을 떨더니, 뻔하게도 멀쩡한 꼴로 나타났다. 신경줄이 팽팽해졌다. 핏발이 선 눈을 문지르며 핸들에 얼굴을 묻었다. 콜린이 차창을 두드렸으나 바로 고개를 들지 않았다. 얼굴을 마주하면 욕설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라이언!”
콜린이 소리를 지르듯 라이언의 이름을 불렀다. 그제야 창을 내리고 콜린을 보았다.
“다리 다쳤다며. 멀쩡하잖아.”
“다쳤어. 티가 안나서 그렇지. 병원도 다녀왔어.”
“두발로 잘만 걸으면서 그딴 말이 나와?”
대학때부터 콜린은 꾀병이 심했다. 걸핏하면 어디가 아프다고했다. 그는 머리가 어지럽다, 오한이 든다와 같은 핑계들을 대며 라이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 오고는 했었다. 그때는 가만히 두었다. 제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았으니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평생을 붙어 살아야 하는 사람이 저런 인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핸들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시동을 걸자, 콜린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는 평소의 조급해 보이던 모습과는 다르게 도발적으로 라이언을 보았다. 네가 그래봤자, 결국은 다 내 뜻대로 될거야. 표정을 언어로 치환 할 수 있다면 딱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순간 모든 전의를 상실했다. 냉정한척 굴면서도 결국 여기까지 차를 몰고 온 인간은 저였다. 기어 변경을 멈추자 콜린이 냉큼 차에 올라탔다.
“라이언, 네 집에 데려가줘.”
콜린은 말같지도 않은 소리를 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더니 저번의 일을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말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마.”
생각을 그대로 내뱉었다. 콜린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묘하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버지가 당장 다음달에 식 올리는 건 어떠냐고 물으시더라. 내가 말렸어. 당장은 좀 그렇잖아. 우리도 좀 가까워질 시간이 필요하고.”
명백한 협박이었다. 내일 당장 식장으로 끌려들어가고싶지 않으면 내 말대로 움직이라는 협박. 그의 말에 토를 달지 않고 네비게이션에 집 주소를 찍은 이유는 하나였다. 당장에 휴를 내보낼 수 없기 때문에. 신고한다 협박해서 데려온 주제에 이제와 결혼할거니 네 살길 알아서 찾아가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행히 휴는 지금 집을 비웠다. 오래 된 동네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했다. 늦게 올거라며 기다리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세시. 시간은 충분했다. 저녁이 오기 전 저 또라이를 집에서 치워 버리면 오늘 하루는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아마도... 아마도는 현실이 되었다. 집에 가니 휴가 소파에 앉아있었다. 사고가 멈추고, 심장도 멈추고 발끝은 얼음덩이에 갇힌 것처럼 움직이질 않았다. 콜린이 옆에서 그를 툭툭치며 물었다. 누구야? 대답하지 않았다. 가사도우미라고 말하기 싫었다. 입이 붙은사람처럼 가만히 있자 콜린의 손길이 거세졌다. 좀 있으면 주먹으로 칠 기세였으나 라이언은 죽어라 휴만 바라보았다.
“가사도우미예요.”
먼저 입을 연 건 휴였다 아,아. 콜린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는 확인하려는 듯 라이언을 보았다. 라이언의 눈은 여전히 휴에게 붙박여 있었다. 콜린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그는 라이언의 눈에서 무언가를 읽어낸 것 같았다. 콜린이 휴에게 손을 뻗었다. 오만함이 섞인 손짓이었다.
“콜린 베넷이에요. 라이언이랑 곧 결혼 할 사람이고요.“
콜린은 그렇게 말하며 휴를 샅샅이 훑어내렸다. 그의 눈에는 폭발할 듯한 질투심이 담겨있었다. 그렇다면 휴는? 휴는 어색하게 미소지으며 레이놀즈씨에게 많이 들어 알고있다 말했다. 반갑다고 말했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기쁘다고, 이미 당신을 알고있었다고. 머리끝까지 분노가 차올랐다. 누굴 향하는 분노일까.
여기서 가장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자신뿐이었다. 손에 힘이빠졌다. 스스로를 향하는 분노가 화살이 되어 그의 가슴 정중앙에 박혀들었다.
*
피어스는 휴의 가장 오래 된 친구였다. 휴의 말 못할 사정까지 속속들이 알고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라이언에게 제 사정을 터놓기 전까지는 그랬다. 이제 휴가 버려졌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하나 더 늘었다. 피어스가 이걸 알면 섭섭해할 것이다. 그에게 그 사실을 털어 놓는데도 자그만치 십년이 걸렸으니까.
피어스가 눈짓으로 감자튀김을 가리켰다. 휴가 고개를 젓자 피어스는 한꺼번에 감자튀김을 세개씩 집어 입에 욱여넣었다. 그의 빼빼 마른 몸과는 어울리는 않는 식성이었다.
“무슨일인데.”
휴가 말이 없자 피어스가 먼저 물었다. 피어스는 눈치가 빨랐다. 두사람은 같은 동네에서 자랐고, 아주 어렸을적부터 친구였지만 성향은 완전히 반대였다. 피어스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걸 좋아했고 거침이 없고 공격적이었다. 피어스는 가족들에게 조차 상처주길 망설이지 않았다. 상대가 누구든 싸움이 붙으면 개처럼 물고 늘어졌다. 일부러 시비거리를 찾아나설 때도 있었다. 그는 망신창이가 되더라도 이겨야한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런 피어스에게 예외인 사람이 있다면 딱 한사람. 휴였다. 그는 휴에게 유난스럽게 물렀다. 휴에게 상처줄 바에는 입을 다물길 택했다. 싸움이라도 날라 치면 번번히 피어스가 먼저 피했다. 휴도 그걸 알기에 함께 자라오며 그가 벌이는 사고들을 곁에서 묵묵히 수습하고는 했다.
피어스는 요즘 대마초 가게를 운영 했다. 길거리에서 팔다가 가게까지 낼 정도로 사업이 확장됐다. 휴가 늘 돈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피어스는 그에게 함께 하자고 말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매일같이 휴에게 대마초를 권유했으나 성인이 된 이후로는 그것도 뚝 끊겼다. 그는 급격히 어른이 되어버린 것처럼 늘 휴에게 나 처럼 살지 말라고 했다. 넌 달라. 넌 나랑은 다른 삶을 살거야. 피어스 식의 위로였다.
“있잖아, 혹시 파트타임으로 너희 가게에서 일 할 수 있을까.”
피어스에게 무언갈 부탁하는 건 처음이었다. 피어스가 먹던 감자튀김을 내려놓았다. 흔히 있는 일은 아니었다. 피어스는 문신이 뒤덮힌 손등으로 이마를 누르더니 단칼에 안된다고 잘라 말했다.
“갑자기 왜. 한번도 이런 말 꺼낸 적 없었잖아.”
피어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휴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고 추측하는 모양이었으나 심경 변화의 문제일 뿐이었다.
“돈 필요해. 집 나왔거든. 모아놨던 돈도 아버지한테 다 뜯겨서 등록금부터 다시 마련해야 돼.”
피어스의 낯빛이 밝아졌다. 피어스는 늘 휴에게 학교로 돌아가라 말했다. 등록금은 제가 마련해 볼테니 학교로 돌아가라고.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시간만 죽여왔다. 매번 무력하게 돈을 빼앗기고, 어쩔 수 없었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내 말는 그렇게 안듣더니. 뭔일이래.”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 있어. 속으로만 생각했다. 피어스는 무언갈 곰곰히 생각하더니 씩 웃었다.
“얼마전에 아는 형이 카페를 개업했는데, 안그래도 사람 구하더라고. 시간이랑 돈은 내가 얘기해 볼테니까. 넌 우리 가게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마.”
휴는 하마터면 피어스를 꽉 끌어안을 뻔했다.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았다. 대마초 가게에서 정키들을 상대할 각오까지 했는데, 카페라니.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었다. 피어스에게 고맙다고 문자를 남겼다. 피어스는 곧 카페 주소를 찍어 보내주었다. 원하는 시간에 일할 수 있을거라 했다. 다행이었다. 오전에 일하고 오후에 라이언의 집으로 오면 딱 시간이 맞을 것 같았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을거라 생각하고 있을 때 문이 열렸다. 현관으로 들어오던 라이언과 눈이 딱 마주쳤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옆에는 또래로 보이는 작은 남자가 함께였다. 그는 가까이 가면 좋은 향이 날 것만 같은 반듯한 생김새를 하고있었다. 친구인걸까. 의문을 가질 때쯤 남자가 휴를 보며 라이언을 다그쳤다. 누구야? 그 격양 된 목소리를 듣자 남자가 그냥 보통 친구는 아닐거라는 직감이 왔다. 표정을 가다듬으려 노력했다. 목소리도. 남자가 휴에게 손을 내밀었다.
“콜린 베넷이에요. 라이언이랑 곧 결혼 할 사람이고요.“
최대한 태연한 척 하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라이언을 곤란하게 만들고싶지 않았다. 라이언은 집에 돌아온 뒤로 줄곧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멀끔한 옷을 차려입은 채 굳은 표정인 그는, 휴와 어울릴 수 없는 세계의 사람같아 보였다. 이곳에서 처음 그와 마주쳤을 때 느꼈던 감정이 또 다시 휴를 휘감았다. 넘을 수 없는 선, 닿을 수 없는 세계. 그렇게 생각하자 잘보이고 싶다 생각했던 마음이 우습게 느껴졌다. 아무리 발악해봐야 저들 발끝에나 미칠 수 있을까. 순간 휴는 제가 라이언에게 잘보이고 싶어하는 마음이, 선생님이나 부모님같은 존재에게 잘보이고 싶다는 마음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라이언에게 만남의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 비춰지고 싶었다. 그저 도와줘야 하는 불쌍한 아이, 연민과 동정의 대상이 아닌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 한 사람으로 보여지고싶었다. 복잡한 머리속을 정리하려 애를 썼다. 찰나 속에서 내린 결론은 명쾌했다. 라이언이 좋았다. 사실 알고있었다. 대책없이 그에게 이끌려가는 마음을 억지로 모른체 하고있었을 뿐. 하지만 라이언에게는 이제 진짜 결혼 상대가 있었다. 그렇다면 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였다. 라이언의 행복을 빌어주는 것.
“두분 결혼 소식은 레이놀즈씨에게 많이 들어서 알고있었어요. 반갑습니다. 휴 잭맨이에요. 이렇게라도 실제로 뵙게 돼서 기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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