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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9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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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확인됐어요?”

 

어렴풋이 들리는 대화 소리에 휴의 눈이 번쩍 뜨였다. 잠결에 취해 시간을 보내지 않고 살짝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은퇴하고 나서도 버리지 못한 일종의 버릇이었다.

 

낯선 천장, 낯선 침대 위였다. 모던한 디자인의 남색과 흰색이 적절히 섞인 깔끔한 집이었다. 옷은 전날에 입은 옷 그대로였지만, 여느 취객같이 엉망이었다.

 

“윽..”

 

갑자기 일어나니 머리가 깨질듯이 아팠다.

 

“.. 네, 감사합니다. 들어가세요.”

 

전화를 끊은 라이언이 돌아섰다.

 

“일어났어요?”

“아, 머리야..”

“많이 취했길래, 집에 데리고 왔어요.”

 

라이언이 물잔을 건넸다. 휴는 머리를 부여잡고 단숨에 물을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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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도통.. 예전같지가 않네.”

“오랜만에 술 마셨나봐요.”

 

혼자서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다시 가족들 생각이 났다. 안 좋은 버릇을 끊어낼수가 없어 혼자가 된 자기 자신이 처량했다. 혼자 있으면 점점 더 어두워지는게 싫어 술을 마시지 않은지 오래였지만, 지난 밤만큼은 들떠서 그런지 절제를 하지 못했다.

 

“미안, 폐를 끼쳤네. 원래 이러지 않는데..”

“뭘요.”

 

순간순간 기억의 조각이 휴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외설적인 기억의 파편들에 당황했지만, 완벽한 기억의 형태가 아니라 꿈과 숙취에 뒤엉켜 유의미하지는 않았다.

 

“..별 일 없었지? 내가 실수한거라거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듯 라이언은 침착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의 반응을 보고 휴는 안도했다. 몸살 기운이라도 있는건지, 옷감에 닿는 피부가 화끈거렸고 머리가 계속 울렸다.

 

“바이어한테 연락왔어요, 물건 전달 확인했답니다.”

“잘됐네.”

“다음에는 보석상 작업이 어떨까 문의하던데요.“

“안돼,”

 

작업 말이 나오자 휴가 정색했다.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침대에서 비척거리며 일어났다. 한껏 흐트러진 차림이 라이언의 완벽한 옷차림과 비교되었다.

 

”저번 한번만 돕는다 했잖아. 그게 마지막이야.“

”알아요, 그냥 해본말이죠. 아쉽잖아요.”

 

그의 걱정과는 달리 라이언은 깔끔하게 물러났다. 라이언은 잠시 머뭇거리곤 소년같이 수줍게 웃었다. 그때만큼은 휴가 기억하던 모습이었다.

 

“당신과 같이 다시 일해서 즐거웠어요.”

 

라이언은 유리 그릇 안에 있던 차키를 집어들었다. 코트를 잘 차려입은 그는 휴를 뒤로 남겨둔채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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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내요, 휴.”

 

 

 

 

라이언의 거실 탁자 위에는 더플백 하나만 남아있었다. 지퍼 끝까지 현금으로 채워진 더플백은 휴의 어깨에 묵직한 짐을 지워주었다.

 

돈은 모조리 가족들에게 보냈다. 수상한 정도의 현금을 다루는데 꽃집 사장이라는 직함이 생각보다 유용했다.

 

이 정도면 당분간 그들이 편하게 살 수 있겠지. 어리석다는건 알았지만 그는 수화기를 들고 전화를 걸었다.

 

“이건 뭐야?”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수화기 건너 흘러나왔다. 안부를 전하기보단 뜬끔없는 돈에 대한 경계심이었다.

 

“그동안 꽃집이 꽤 괜찮게 되어서.”

“..다시 일하는거야?”

“그런거 아니야.”

 

어설픈 거짓말이었다. 잠적하기 전에도 휴가 어디론가 가서 작업을 하고 돌아오면 그의 거짓말은 종종 가족들에게 탄로났다.

 

“결혼식장에서 일하는것도 시작했거든.”

 

정적이 흘렀다. 늘 전화는 오래 가지 않는다. 그들은 떠난지 오래되었고 그와 가족들과의 접점도 점점 더 희미해지는것 같았다. 

 

“왜 전화했어?”

 

일말의 희망은 그를 구질구질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런 실낱같은 희망마저 없다면 그는 대체 뭘 위해 살아간단 말인가.

 

“다시 되돌아가고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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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전처에게 연락을 하고 나면 늘 그랬다. 이쯤되면 왜 자꾸 희망을 가지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다음주가 되면 어김없이 다시 전화를 걸겠지, 바보처럼.

 

눈을 깜빡거릴때마다 명확하지 않은 과거의 단면들이 스쳐지나갔다. 일하지 않을때는 멍하게 문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누굴 기다리는것도 아닌데.

 

꽃다발 하나를 예약해뒀던 손님에게 백합 꽃다발을 내보이자 손님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장미 꽃다발 예약했었는데요.“

“이런.. 죄송합니다."

 

이렇게 기본적인 것도 실수하다니. 손님에게 사과하는 휴의 귀가 새빨개졌다.

 

“금방 다시 만들어드릴게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그가 멋쩍게 웃었다. 꽃집이 자리잡은 동네에는 모난 손님이 없었지만 그래도 그의 직업 윤리에 이런 실수는 따갑게 다가왔다.

 

장미 줄기를 엮어 다발을 만들때마다 기계 전선을 연결하던 느낌이 겹쳐졌다. 눈을 다시 깜빡이자 술잔과 라이언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왜인지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아..”

 

억센 장미 가시에 손가락이 찔렸다. 주책맞다.

 

그는 상처를 살짝 누르고 꽃다발을 마저 감쌌다. 능숙한 손길로 왁스지를 정리하고 리본을 묶었다. 기다리던 손님에게 꽃다발을 건네고 다시금 사과를 건넸다.

 

처음에는 얕게 보이던 상처에서 짙은 피가 흘렀다. 그는 멍하니 피가 흐르는 손가락을 바라봤다. 뚝뚝 흘려보내는 피는 싱크대 위에 고여있던 물과 섞이지 못하고 덩어리졌다.

 

그날 밤 기억이 생생하게 다가왔다. 어두운 미술관, 자유자재로 다루던 기계, 자신만이 다루고 있던 세계적인 걸작, 귀에 거슬릴 정도로 크게 뛰던 심박수. 익숙하게 그를 찾아오던 걱정, 외로움 같은 그 어떤 잡생각도 그를 괴롭히지 않았다. 과거의 불청객이 그를 찾아오고 그의 먼지덮인 심장은 다시 뛰기 시작했다.

 

라이언이 지나가듯 언급한 보석상 작업이 생각났다. 어디에 위치한 보석상이지? 뭘 훔치려고? 보석상 설계도는 확보한걸까? 그의 호기심은 주제넘게 라이언의 계획을 뜯어보고 있었다.

 

정신을 다잡으려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이 감길때마다 스쳐지나가던 장면들을 애써 일그러뜨렸다.

 

제 입으로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단언했다. 돈은 받자마자 처리하는대로 가족들에게 보내버렸고 그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휴지로 상처를 누르니 피가 얼추 멎었다. 그는 상처난 손가락을 대충 빨아들이며 주문 내역서를 한손으로 끊어 확인했다.

 

꽃다발 배달 주문이 들어왔다. 독특하게도 물망초 꽃다발이었다. 재고가 있나? 주문과 함께 요청 사항을 담은 쪽지 하나가 전달되었다.

 

종이 위에는 아무런 이름도 없이 한 문장만 적혀져있었다. 쪽지를 읽은 그는 당장 자리를 박차고 가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 나 보고싶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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