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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2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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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앤디."

나직이 아이를 부르는 목소리. 똑 닮은 브래들리와 앤드류가 나란히 고개를 들어 병실 문 쪽을 바라봤어.

"삼촌한테 오지 않아서 걱정했잖아."

제이크가 엄한 얼굴로 문가에 서 있었지.

앤디는 몸을 홉 움츠리더니 "하지만... 아저씨가 외로울 것 같아서요..." 하고 변명했어. 저렇게 귀여운 아이가 착한 마음으로 한 일에 어떻게 화를 내? 제이크는 따끔하게 혼을 내리라 별렀던 것과 달리 어조부터 조곤조곤해지고 말아.

"하지만 삼촌한테 제대로 말하고 다녀야지. 자, 아저씨 쉴 수 있게 이제 가자."

아이는 살짝 고개를 들어 눈치를 보더니 누그러진 기색을 알아채고 바로 제이크의 손을 잡으러 갔어. 최애 삼촌이 등장하자 며칠간 멋있어서 따라다녔던 군인 아저씨는 좀 뒷전이 됐지. 하지만 적어도 병실을 떠나기 전에 루스터를 돌아보며 "쾌차하세요..." 하고 안부를 전하는 일은 잊지 않았어. 제이크가 루스터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아이는 다시 못 볼 사람을 대하듯이 태도가 퍽 아련했지.

그 바람에 두 사람이 정말 병실을 떠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든 루스터의 입에서 말이 튀어나갔어. 행맨!
이미 등을 돌린 채 떠나려 했던 제이크가 순간 움찔하고는, 마지못해 다시 등을 돌려.
며칠 전 비스트로에서는 정신이 없었지. 쟤를 보는 게 얼마 만인가. 모든 생물이 그렇듯 수탉도 이제는 좀 진화(?)했나 봐. 이제는 수탉보다는 곰 같지. 등치가 커다래진 것이...

루스터 역시 제이크를 살폈어. 전에 없이 길고 보드라운 머리칼과 조금 더 투명해진 것 같은 녹회안에 창문에서 쏟아진 햇빛이 깃들고, 예전보다 메마른 선 위로 공기 중을 떠다니는 먼지가 내려앉았어. 어쩐지 현실이 현실 같지 않은 기묘함이 치밀어.

"행맨..."

마치 앞에 있는 게 너 맞냐는 확인이라도 하는 양 다시금 튀어나온 이름에, 제이크는 답없이 한번 이야기해 보라는 듯 문에 어깨를 기대고 서. 그러나 침대에 앉아 있는 자신과 거리를 좁힐 생각은 없어 보였지. 루스터는 그 거리감을 조금쯤 의식하다 말을 꺼냈어.

"...참고 조사는 받았어?"
"진즉 끝냈지."

딱 떨어지는 대답에 붙일 말이 곤궁해졌지만 루스터는 희미하게나마 웃어 보였어.

"그 비스트로에 네가 있을 줄 몰랐어. 단순히 전역한 장교가 운영하는 곳이라 협조를 구할 수 있을 거라고만 듣고 간 거였거든."
"알아. 네 보좌관이 그렇게 말해 주더라."

무정한 답변에 루스터는 유선으로 보고받았던 건을 상기해. 세러신 대위에게 도움을 받아 마을과 산을 추가 탐색하고 있다고 했지.
더 할 수 있는 말이 없는 것 같은 이 순간, 루스터는 자기가 왜 제이크를 잡았는지, 뭘 하고 싶은지 가늠할 수가 없어져. 용서를 빌고 싶은 건가, 아니면 그냥 잘살고 있는 걸 확인하고 싶은 건가.

어쨌든 감히 제이크 세러신을 상처 입혔던 죄를 사과해야 한다는 건 알아. 하지만 이제는 그런 사과가 상대에게는 그저 용서를 바라는 기만일 수도 있다는 걸 아는 나이였지. 나 편하자고 상대를 들쑤시면 안 되는 거잖아.
그렇게 망설이면서도 제이크를 보내주지 못하고 입을 달싹이는데,

"너 대단하네. 그 나이에 대령이라니. 승진이 그렇게 빨라도 되는 거야?"

제이크가 말을 붙여 준 게 절호의 기회인 것만 같아 얼른 받아쳐.

"네가 군에 있었으면 나보다 훨씬 빨랐을 거 알잖아."

그 말에 담긴 게 진심이었는데도 제이크는 그저 씩 웃고 말아. 그래, 나도 알아, 하고. 어쩐지 손끝 발끝까지 자부심이 넘쳤던 과거와는 분위기가 좀 다르지. 그냥 예쁘고 경쾌하기만 해.
루스터는 변화에 어쩐지 입이 쓴 것 같아. 자기도 왜 그렇게 느끼는지 모르겠지만.

"너 내일 퇴원한다며. 그 이튿날 너네 부대원들이 떠난다고 해서 내일 저녁에 레스토랑에서 한 끼 대접하기로 했어."

그러다 뜻밖의 소식을 들었어.

테러 조직의 잔당이 앞서 사살된 두 명만 있으리란 확신은 없으니 조사관들이 추가 탐색을 이었고, 혹시 모를 진압이나 인질극 등의 무력 사태에 대비해 부대원들 또한 마을에 대기 중이었지. 입원 중이지만 루스터도 매일 보고를 받고 있어서 탐색 상황이 어떤지 알아. 모든 사람의 신원 확인이 끝났고 사각지대도 샅샅이 뒤져서 이제 이 마을은 깨끗해.
그러니 부대를 끌고 복귀해야 하는 시점이 코앞이라는 걸 알아서 조심스러워졌어. 제가 뭘 하고 싶은지는 몰라도 그냥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나도... 가도 돼?"

제이크는 내가 너한테 그걸 왜 얘기했겠냐는 듯 이마를 찌푸리면서 입꼬리를 올렸어.

"총까지 맞은 영웅을 쫓아낼 수야 없지."

그러고는 앤드류의 손을 잡고 나가는 뒷모습을, 루스터는 그가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응시했어. 사실 이내 보이지 않게 된 뒤로도 계속.

한숨과 함께 베개에 머리를 묻은 루스터는 눈을 덮은 손 밑으로 아까 행맨이 지어 보였던 미소를 떠올려. 과거를 추억을 간직하는 어른스러움, 다른 길이 어땠을까 생각은 해도 현재와 바꾸고 싶어 하지 않는 긍정성, 그런 것들이 엿보였지.
그러니까 말이야, 제이크 세러신은 지난 세월을 밑거름 삼아 현재를 충실하게 살아온 사람 같아 보였어. 저 역시 그렇게 과거가 된 거겠지.

......그런데 나는,
난 그러고 싶지 않아.

며칠이나 외면하려 했던 본심이 결국엔 치밀어 올랐어.



*



테이블이 절반쯤 차 있는 저녁의 레스토랑, 안쪽의 큰 테이블에는 이미 적지 않은 부대원들이 앉아 있어. 레스토랑에 들어선 루스터는 습관이 든 나머지 부대원들의 상태를 살펴.
미슐랭 기록을 자랑하는 이 레스토랑을 찾은 다른 손님들은 제법 격식 있는 차림새인데 많지 않은 짐을 들고 파견 나온 부대원들만은 오늘도 기껏해야 티셔츠 차림새야. 정 입을 게 없었던지 군복을 입고 온 사람도 몇몇 있었어.
그나마 다행인 건 다른 손님들이 부대원들을 흰눈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이었지. 민간의 반응에 관해 보고 들은 것처럼 이 지역 사람들은 군인들이 지역의 안전을 위해 며칠간 고생한 걸 고마워하는 모양이야.

브래들리는 목발을 짚고 한 걸음씩 발을 옮겼어. 걸을 때마다 제법 커다란 종이봉투가 목발을 건드려 제법 거추장스러웠지만 꿋꿋이.
마침내 열두어 명쯤 되는 부대원들의 시선에 그가 걸리는 거리가 되자,

"경배하라, 캡틴 허벅지 납신다아!"

환호성과 함께 이상한 말을 쏟아 내는 등 아주 난리가 났어. 목발 때문에 상체가 적잖이 기울어진 채로도 벽처럼 큰 남자가 적당히 하라는 듯 눈알을 굴리며 자리에 앉았는데도 감히 대령의 등이며 어깨를 치고 휘파람을 부는 등 분위기는 가라앉지 않았지. 그럴 만했어. 테러 조직의 잔당이 원활히 소탕되어 임무가 끝났으며, 부상자가 단 한 명이라는 고무적인 성적으로 인질극을 마무리해 낸 상사가(비록 그 부상자가 상사였지만)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걸.
그들의 테이블이 이 레스토랑의 가장 안쪽에 있는데도 이 소란이 제법 커서 루스터는 홀을 슬쩍 살펴. 지휘관이 되고부터는 가끔 자신이 어린이집 교사가 따로없다고 생각할 때가 있는데 지금이 그런 순간임.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어.

"신경 쓰지 마. 너희 부대를 위해 레스토랑을 비워 놓은 참이니까. 오늘 있는 손님들은 사정을 알면서도 괜찮다고 한 분들이고."

제이크가 켜켜이 쌓아 올린 물수건을 가지고 등장한 거야.
세러신 대위님! 며칠 만에 그에게 길들여지기라도 한 듯 부대의 막내가 튕기듯 일어나 접시를 받았지.

왜 물수건을 가지고 오셨습니까? 저한테 말씀하시지. 아니, 여기 웨이터는 없습니까? 막내뿐만 아니라, 다들 그와 친분이라도 생긴 듯 부대원들이 한마디씩 덧붙이자 제이크가 싱긋 웃었어.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여긴 제 레스토랑이에요."

그 말에 부대원들이 고개를 돌려 레스토랑 여기저기를 바라봐. 지난 며칠간 식사와 휴식, 탐문의 기지로 삼았던 비스트로는 흰색이 기조라 밝은 분위기고 햇빛이 가득해 친근한 느낌인데 이 레스토랑은 전혀 다른 분위기였거든. 앤틱한 고가구와 초상화 같은 장식들이 아주 고풍스럽고 어두운 실내를 밝히는 주홍빛 간접 조명들이 고급스러웠어.  실제로 역사도 루스터가 입원했던 병원만큼이나 오래되었지. 부대원들이 감탄해 분위기가 멋지다며 칭찬을 늘어놓자, 제이크는 금칠하지 말라며 팔을 내저었어.

루스터는 제게서 멀어져 긴 테이블의 반대편으로 간 그를 눈으로 훑어. 몸에 남을 만큼 큰 것은 아니지만 꼭 맞는 핏이 아니라서 어깨와 가슴을 타고 흐르는 파란빛의 새틴 소재 셔츠는 도회적인데, 고상하고 오래된 멋이 있는 이 공간과 놀랄 만큼 잘 어울려. 싱그러운 웃음을 머금은 얼굴은 굳이 숨기지 않는 다정함이 감돌아 여유가 느껴졌고.
한때 행맨은 부자집 도련님 같았는데 이제는 누군가의 아들로 보이지 않았어.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예고했듯이 오늘은 제가 전부 낼 거니까 술이든 음식이든 맘껏 주문하도록. 토실토실해질 때까지 먹지 않으면 내보내 주지 않을 거니까."

비스트로도 소도시의 커뮤니티를 감당할 만큼 규모가 큰데 이렇게 예약이 쌓여 있을 게 뻔한 고급 레스토랑까지 운영하고 있다니. 전역한 선배가 생각보다도 성공한 사업가라는 걸 알게 된 부대원들은 기회를 잡아챈 매처럼 메뉴판에서 이것저것을 골랐어.

곧 웨이터들이 수프며 메인이 준비될 동안 입을 채울 전채 요리들을 가지고 왔음. 프렌치 오일 소스로 풍미를 더한 굴부터 살짝 데친 새우와 알싸한 새싹을 연겨자와 더불어 말아 놓은 롤, 아보카도와 자몽이 올려진 훈제 연어 등등 다이닝에 어울리는 재밌고 화려한 것들이 가득해. 달콤하거나 상큼한 식전주도 속속들이 도착하고.
음식이 맛있고 익숙한 사람들과 함께하니까 분위기가 점점 더 편해져서 부대원들은 정말로 토실토실해질 기세로 자리를 즐겼어.
저녁이 깊어 갈수록 술이 쌓였는데, 식사를 마친 지역 주민들이 각자 계산을 마치고 나가며 군인들을 치하하는 의미로 값비싼 샴페인이며 와인을 돌렸기 때문이야. 평소 맛볼 수 없는 비싼 술들이 더해질 때마다 다들 그 저녁을 찬양했어.

루스터만은 전혀 그럴 기분이 아니었지만.
분위기에 적당히 어울려 주거나 아니면 아예 자리를 피해 상사 없는 자리를 만들어 주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지. 오늘을 놓치면 다음 기회는 없을 것 같아서.

그런데 행맨을 다시 보는 일을 계속 생각해 왔던 저와는 달리 그는 저를 바라보지도 않아. 긴 테이블의 양끝에 앉아 대화를 나눌 기회조차 없지. 새틴 셔츠가 벌어진 틈을 그 주변의 소위 하나가 멍하게 응시하는데 루스터는 부아마저 치밀었어. 남에게 그렇게 무방비하고 상냥할 필요는 없잖아. 그렇게 엄한 데 성질을 내고 있었지만 본인은 그다지 의식하지도 못했지.

그때 잠시 추가 주문 들어갔던 농어며 관자 구이들이 대개의 사람들 앞에 안착한 걸 계기로 테이블이 잠깐 조용해지고, 그걸 깨듯 부대원이 입을 열었어.

"나 진짜 기절하는 줄 알았잖아요. 왜 그때, 대위님이,"

아, 그거! 사람들이 멋지게 조리된 음식도 뒤로하고 키득거려. 그거 진짜 아닙니까? 아니면 그렇게 닮을 수가 없는데. 그러니까!

다들 추임새를 넣으며 동조하는데 루스터만은 영문을 몰라 좌중을 바라봤어.
지난 며칠간 제이크의 비스트로를 기지로 삼았던 만큼 부대원들은 피터며 앤디를 본 참이거든. 두 아이 중에 좀 더 작은 게 피터인데 어른들 시선에는 그게 그거라 구분은 못 해도 어느 아이든 간에 루스터를 꼭 닮은 건 분명해. 그러니까 진짜 의문이 싹튼 거야. 어쩌면 세러신 대위의 말이 진실일 수도 있는 거 아니냐고.

게다가 브래드쇼 대령의 태도도 심상치 않아. 평소의 적당한 무심함과 냉정함은 어디에 팔아먹었는지 세러신 대위의 일거수일투족을 좇는 눈길하며 말을 고르는 듯한 침묵까지. 부상을 입었다고는 해도 이런 자리에서 점잔을 빼고 무게 잡을 만큼 눈치 없는 인사는 아닌데 입을 딱 붙인 채 저녁 내내 미온수만 마시고 있어. 부상 때문에 술을 먹으면 안 되니 이 자리에 계속 남아 있을 이유도 없는데. 부대원들은 루스터가 종이 봉투에 넣어 온 커다란 꽃다발에 관해서도 저들끼리 눈으로 사인을 주고받은 지 오래였어

"그때 인질이 되셨을 때 한 말 말입니다. 혹시 진짜예요?"

술이 적잖이 들어갔겠다, 제 지휘관의 태도도 심상치 않아 즉흥적이 된 녀석들 몇이 아예 직구를 던졌어. 루스터가 그들의 무례함에 얼굴을 잔뜩 굳히고 제지시키려 하는데,

"당연히 진짜지. 그럼 가짜인 줄 알았어요?"

제이크는 아주 태연하게 눈을 찡긋여. 저렇게 농을 섞을 때는 그 안에 담긴 게 뭔지, 그게 진짜인지 거짓인지 남들은 알 수가 없어. 인형처럼 매끄럽고 예쁜 얼굴이 자신감으로 빛날 뿐이니. 저것만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지.
너무도 태연스러운 대답에 다들 파하하 웃었고, 루스터는 부대원들이 제이크의 심기를 거스르지는 않았구나 싶어 쓴웃음을 지었어.

좀 더 시간이 지나 모두가 몸을 못 가눌 만큼 취하고 나니 자연스레 파티가 끝나게 되었어. 공교롭게도 자리를 주최하느라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던 제이크와 기껏해야 무알콜 샴페인만 들이켠 루스터만 제정신이었지. 레스토랑 앞까지 부대원들을 끌어온 루스터는 그나마 멀쩡한 녀석들한테 안 그런 녀석들을 맡기고 임시 숙소로 돌아갈 것을 지시했어.

레스토랑 밖에서 창문으로 봐도 제이크는 자리를 정리하느라 바빠 보였어. 평소보다 퇴근이 늦어진 직원들을 치하하고 어서 가라고 재촉하는 걸 루스터는 근처의 차에 몸을 기대고 바라봐.
문을 통해 나온 직원들이 왜 아직 안 가고 잇느냐는 듯이 그를 흘겼지. 개중 일부는 루스터가 만지작대는 커다란 꽃다발을 보곤 알겠다는 듯이 응원의 미소를 보내곤 했어. 간혹 이렇게 싱글인 사장님한테 반해 들이대는 사람들이 있거든.

이윽고 모든 정리가 끝나 제이크가 나왔을 때 거리를 밝히던 레스토랑의 불은 모두 사라진 뒤였고 거리에도 오직 둘밖에 없었어. 그럴 만했지. 이미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으니.

제이크는 루스터를 보곤 잠시 걸음을 멈추었어. 새까만 거리를 위태로이 밝히는 가로등이 깜박거릴 때마다 루스터가 보이고 사라져.
어둠 속에서 그가 말했어.

"데려다줘, 행맨."
"싫은데."

그러자 루스터는 목발을 들어 보였어. 그 꼴을 본 제이크는 몇 번쯤 침음하다 숨을 푹 내쉬었어. 그리고 제 차를 가리켰지.

"이 진상아, 이리 와라."

전우 사랑은 나라 사랑(?)이라잖아 저 다리를 하고 있는데 그냥 모른 체할 수도 없고.

루스터에겐 뜻밖에도 제이크의 차는 5인용 SUV였어. 안전하긴 해도 둔탁한 차지. 한 번도 제이크와 어울린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기색을 알아챈 모양인지 "애 태우고 다니려면 안전한 게 제일이야." 그렇게 말해.
앞에 앉은 루스터에게서 목발을 받은 제이크가 그걸 뒷좌석에 넣었어. 아이용 안전띠가 있더라.

"아이가 저걸 쓸 만큼 작지는 않던데."
"앤드류는 그렇지. 피터는 아직 조그매."
"피터가 네 아들이지?"

차를 빼는 데 집중하고 싶다는 듯 제이크는 말을 더 잇지 않았지만 루스터는 답을 듣지 않아도 알았어. 비스트로에서도 피터에게 당부했으니까.

소도시는 규모가 크지 않아서 부대가 머무는 임시 숙소인 외곽의 모텔까지는 금방 닿았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운전대를 톡톡 두드린 제이크가 고개를 돌려 루스터를 바라봤어. 그 얼굴에 모텔의 네온 사인이 음영을 만들어 내. 콧등과 뺨을 번갈아 물들이는 파란빛과 빨간빛. 그리고 머리칼과 눈두덩의 음영에 갇혀 빛을 잃은 눈동자.
루스터는 손을 뻗어서 머리칼을 옆으로 밀고 눈을 보려고 했는데, 제이크가 오른쪽 손을 뻗어 루스터의 손을 밀어냈어.

예전에 제이크는 이렇게 머리칼을 밀어 주는 걸 좋아했어. 그래서 무의식중에 손이 나간 거지.

"......미안, 내 실수야."
"......"

다시 만난 제이크는, 저에게 말도 잘 붙여 주지 않지만.
루스터가 갈 곳을 잃은 손을 거둬 내는데,

"루스터, 너 나한테 할 말 있지."

눈을 가린 머리를 제 손으로 귀 뒤로 넘긴 제이크가 단호하게 말했어. 말해 보라고.

이게 루스터가 기다렸던 순간은 맞는데, 이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아.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지만, 제이크는 너무 단단했어. 그렇지만 또 다른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어려우니 일단 말을 꺼내.

"사과하고 싶어."
"뭐를?"
"...과거를."
"그러니까 정확히 뭐를. 네 언동을? 어릴 때 네가 되바라지긴 했지. 네 팀원들은 무덤으로 갈 거라는 말이나 하고."

흐, 루스터가 희미하게 울듯 웃었어.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못했던 시절이 스쳐서 민망했지.
한편 제이크의 눈은 과거를 되돌아보듯 빛을 내뿜는 모텔의 전광판을 잠깐 바라봤다 루스터에게 돌아왔어.

"그게 아니면...... 네가 무심했던 거? 내 생일을 한 번도 챙겨 준 적이 없긴 하지. 진급도 그냥 지나쳤잖아. 크리스마스에 같이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해 놓고 여자친구한테 가 버렸던 게 아직도 기억나네. 아니면 뭐, 내 침대에서 애인한테 전화한 거나 우리 부모님 보러 가 주지 않은 거, 그런 거 말하는 거야?"

루스터는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고 싶은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젓다가 "그 모든 게." 하고 덧붙였어.

"흐음. 기회가 닿은 김에 말하자면, 내 충고는 내팽개치고 네 맘대로 구덩이에 고꾸라지는 게 제일 짜증 나는 점이었지... 하지만 루스터, 난 처음부터 알고 시작했는걸. 그건 네 잘못이 아니었어."
"아냐, 그렇지 않아. 나는, 네가 떠나고 나서야..."

그러자 제이크는 약간의 쓴웃음과 함께 루스터의 말을 끊었어.

"아마 너는 마음에 걸리는 거겠지. 내가 널 좋아한다는 걸 알면서도 오랫동안 모른 체했던 게."

정곡을 찔린 루스터는 말없이 그를 바라봐. 제이크는 그걸 말하는 게 맞구나, 하고 말을 이어.

"그런데 그것도 네가 사과할 만큼은 아니야. 너와 내 마음이 같지 않았던 게 왜 네 잘못이야?"
"하지만 행맨."

그때 나는 네가 아니면 안 된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았어. 너를 잔뜩 상처 준 다음에야.
그렇게 말하려고 했는데,

"사과하지 마, 루스터. 널 사랑했던 내가 불쌍해지지 않게."

그 말에는 아무것도 더할 수가 없어.

"Same old rooster. 여전히 고전적이네. 그거 나 주려고 가져온 거야? 오메가라 그래서 다 꽃 좋아하는 거 아닌 거 알지?"

제이크가 루스터가 무릎 위에 올려 둔 장미 다발을 가리켜.
가라앉은 분위기를 풀려고 하는 시도는 완곡하고 분명한 거부여서, 루스터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어.

"...내가 이 모양이지."
"역시 진화했네. 이제 자아 인지는 좀 생긴 모양이야. 곧 인간 되겠어."

제이크가 한때를 떠올리느라 우수에 깊어진 눈이 눈웃음으로 반쯤 감긴 눈살에 가려져. 상처의 잔재도 그 뒤로 익숙하게 숨겨졌어. 그야 십 년이나 된 이야기인걸.
자, 다 울었니? 그럼 이제 할일을 하자. 제 안의 자신이 저를 격려해.

"피터 말이야, 귀엽지?"
"응. 정말 사랑스럽더라."

루스터는 피터를 제대로 본 적도 없으면서 말을 내뱉어. 친구부터라도 좋으니까 뭐라도 이어 가고 싶어서. 그런데,

"내가 잘 키웠어. 네 아들."
"...뭐?"

충격을 전혀 숨기지 않는 그 얼굴에 제이크는 푸핫, 웃어 버리고 말아. 그렇게 생각 안 했어? 너랑 똑같이 생겼는데. 그 말에 루스터는 아이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떠올리려 해. 하지만 족히 오륙 일 전에 비스트로에서 악 쓰고 버둥거리는 것만 봤으니 기억이 안 나.
가까스로 나온 진짜냐는 말에 제이크는 나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어. 퍽 진심으로 보였지.

"왜,"

왜 말 안 했냐고 물으려다가 목 뒤로 밀어넣어. 왜 안 했는지 알겠어서.
그러나 단 한 음절만으로도 알아들은 제이크가 답을 해 왔어.

"그때는 그냥 도망치고 싶었어. 나도 어렸고... 네가 밉고 원망스러웠거든. 그래서 피터가 생긴 걸 말할 엄두가 안 났어, 너랑 뭘 더 할 게 아득해서."

이미 예상한 걸 듣는데도 루스터는 그게 너무 쓰려서 손톱이 손바닥을 찍을 만큼 손에 힘이 들어갔어.
하지만 제이크의 말은 끝나지 않았고,

"그런데 이제는 말할 수 있네."

피할 수도 없었지.

"그냥 다행이다. 너도 나도 잘 지내는 것 같아서."

저를 떠나보낸 게 여실한 미소에 심장이 차가워졌어.









#루스터행맨 #텔러파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