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7975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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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3 16:29
보고싶어 발로 써봄
제목 잘못써서 수정함;;; ㅈㅅㅈㅅ
모든 일은 그날 그렇게 시작됐다. 락커룸 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리고 땀냄새를 풀풀 풍기는 십대 남자애들이 우르르 안으로 밀어 닥쳤다. 칼럼은 목에 건 수건으로 땀에 절은 머리를 대충 털고 본인 이름이 써진 캐비냇 문을 열었다. 가방을 뒤져 새 수건을 찾는데 윙 진동 소리를 내며 폰이 울렸다. 발신인은 엄마였다.
[오늘 야간근무. 차 써야 해.]
커트네 집이 비어서 다같이 연습 끝나고 거기로 가려고 했는데. 칼럼은 미간을 찌푸리며 답장을 보내려고 했는데 엄마가 더 빨랐다.
[5시까지. 레드 브릭스로 곧장 와.]
시계를 보니 4:30분이다. 샤워 할 시간도 없겠네. 안 씻어? 라고 어깨를 치는 부원들에게 대충 손사레를 쳤다. 엄마는 만일의 사태에 늘 철저히 대비하는 사람이었다. 아빠가 떠나고 난 뒤엔 정도가 좀 더 심해졌다. 특히 돈에 대해서는 좀 더 그래졌다. 넘치는 돈을 끼고 사는 건 아니었지만 둘이 먹고 살기엔 나쁘지 않은데. 대학은 축구팀에 선발되면 장학금을 받을 수 있을거라고 말해도 못 미더운 모양이었다. 혹시 모르니까. 부상 같은 것도 있잖아. 그리고 네 성적을 봐라. 저번에 수학에서 B- 가 맞았던걸. 백팩에 숨겨 둔 시험지는 언제 꺼내 본 건지. 그럴바엔 차라리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겠다는 칼럼이었으나 그건 또 안됐다. 넌 연습에나 집중해, 하고 자기보다 머리통이 하나 더 큰 아들을 콩 쥐어 박는 엄마였다.
레드 브릭스는 간호사인 엄마가 야간조를 들어가기 전 시간을 짬내 집안일을 거두러가는 집이었다. 빨간 벽돌로 쌓아올린 고풍스런 저택이라 엄마는 첫날 다녀온 뒤 그 집을 쭉 그렇게 불렀다. 칼럼은 엄마가 남의 집 일까지 거두는게 영 마땅찮았다. 엄마를 하녀부리듯 하는 거 아니냐, 본인 집안일도 못하는 사람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이냐 불평을 늘어놓았지만 엄만 아무렇지 않아했다. 그 집에 어린 애가 있어서 맨날 어지르는 것도 아니고, 부부 내외는 일 때문에 집에 거의 없는거나 마찬가지라나. 집도 깨끗해서 별로 할 것도 없고 돈도 나쁘지 않다고 해서 오히려 좋다고 했다.
"나 오늘 못 간다!!!!"
샤워실 문을 열고 대충 크게 소리 친 칼럼은 밖으로 나와 학교 주차장으로 걸었다. 몇 대 주차 되지 않은 곳에 진회색의 SUV가 자리하고 있었다. 칼럼은 운전석을 열고 앉아 가방을 대충 뒷자석에 던져 두었다. 아빠가 타던 차였는데 엄마와 칼럼이 번갈아가며 쓰고 있었다. 원래 오늘은 칼럼이 쓰기로 했는데, 엄마의 직업상 긴급 수술이나 근무조가 바뀌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엄마는 차를 하나 더 사면 이 차를 저에게 준다고 했는데 그게 벌써 말만 2년째였다. 칼럼은 엄마가 알려준 주소로 차를 몰았다. 샤워를 하지 않아 찝찝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창문을 열고 달리며 땀에 젖은 머리칼을 바람에 식혔다.
그 집 앞에 차를 세우자 왜 엄마가 레드 브릭스라고 했는지 딱 알 수 있었다. 평범한 단층 구조의 본인 집과는 달리 빨간 벽돌로 지어진 2층 주택에, 담벽을 타고 담쟁이 덩쿨이 다닥다닥 올라 붙어 있었다. 깔끔하게 손질 된 앞마당을 보며 칼럼은 왠지 주눅이 드는 기분이었다. 하얗게 칠해진 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지만 아무 대답도 없었다. 다시 눌렀지만 마찬가지였다. 손잡이를 눌러 내리니 문이 너무나 쉽게 열렸다. 칼럼은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서며 엄마? 하고 불렀다.
집안은 오래된 가구들과 현관 근처 가구장 위에 놓인 디퓨저 냄새가 섞여 났다. 칼럼은 계속 엄마를 부르며 좀 더 안으로 들어갔다. 벽에는 풍경화와 정물화 몇 점이 걸려 있었고 장식장 위에 놓여있는 조명들도 다 영화나 빈티지 가게에서 볼 법한 물건들이었다. 본인이 오라해놓고 없어지면 어쩌잔거야.. 하고 다시 나가려고 몸을 돌리다가 들어오는 누군가와 마주쳤다.
어깨까지 찰랑거리며 내려오는 금발머리에 다소 짧은 기장의 티셔츠와 붙는 바지. 엄마는 아니었다. 엄마는 금발이 아니니까. 숙였던 고개를 들자 마주친 예쁘장한 얼굴에 칼럼은 넋을 잃고 가만히 보았다. 낯선 사람이 집에 있어 놀란 아이는 눈이 동그래졌다. 딱 오해 받기 좋은 상황아닌가. 아무도 없는 집에 땀에 절은 채로 들어와서 어슬렁거리는 덩치 한 명. 칼럼은 어버버 거리며 엄마가, 여기에.. 웅얼웅얼 거렸다. 금발 예쁜이는 (그렇게 부르기로 칼럼의 뇌가 정해버렸다) 얘가 무슨 소리를 하는건지 모르겠다며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때마침 문을 열고 칼럼의 엄마가 들어왔다.
"아, 왔네 칼럼. 가자."
엄마는 그 예쁜 애한테 너도 이제 오는구나? 하고 인사를 건네곤 자긴 가보겠다고 하고 집을 나섰다. 저에게 따라붙는 칼럼의 시선에 살짝 얼굴을 붉히며 잘가라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는 애였다. 칼럼은 쫄래쫄래 엄마 뒤를 쫓아 나가면서도 힐끔힐끔 뒤를 돌아봤다. 조수석에 앉아 집으로 가면서 곰곰히 아까본 말간 얼굴을 계속 떠올려 봤다. 학교에선 본 적이 없는 얼굴인데. 다른 학교에 다니나. 아니면 내가 놓친 얼굴인가? 혼자서 곰곰히 생각하는 사이 차가 집 앞에 섰다. 칼럼이 뒷자석에 던져놓은 가방을 집으러 몸을 기울이자 카시트가 뒤로 확 제껴졌다. 엄마가 그 모습에 깔깔거렸다.
"아 쫌! 이거 고치라고 몇 번을 말해!"
"저녁은 데워 먹어!"
차문이 닫히자 병원으로 쌩 가버리는 엄마였다. 집으로 들어와 더러워진 축구화를 대충 벗어 놓고 곧장 욕실로 직행했다. 거울을 보고 뜨악했다. 땀에 젖었던 머리가 쓸어올린 그대로 말려져서 너저분했다. 고개를 돌려 킁킁 거렸다. 냄새가 평소보단 더 구린 것 같았다. 물론 아까 본 금발의 예쁜이는 이런걸 신경 쓸 겨를도 없었겠지만. 칼럼은 샤워기를 틀어 평소보다 구석구석 박박 씻었다. 내일 학교에 가면 비슷한 얼굴을 찾아봐야지 하면서.
교실을 이동 할 때나 점심시간 카페테리아에서도 찾아 보려 했으나 그 얼굴은 없었다. 금발인 애는 있었지만 예쁜 애는 없었다. 커트가 뭘 그렇게 찾냐고 부산스럽다고 한마디 했다. 그리고 며칠 뒤 그 애를 다시 본 건 레드 브릭스에서 였다. 그 날도 연습을 끝내고 캐비넷을 여니 엄마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칼럼은 한편으로 기대가 되면서도 문자를 일찍 주지 않은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또 샤워를 못하고 가잖아. 가방에 넣어뒀던 새 수건을 유니폼 안으로 넣어 대충 닦고 데오도란트를 마구 뿌리자 여기저기서 작작 좀 하라는 소리가 들렸다. 칼럼은 평소보다 조금 더 엑셀을 밟았다. 초인종을 누르니 이번엔 누가 나오는데, 며칠 전 본 그 예쁜 애였다. 칼럼은 괜히 큼큼거리며 목을 가다듬었다.
"엄마가 여기로 오라고 해서.."
들떴던 마음은 어느새 긴장으로 바뀌어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만 나왔다. 그러자 그 애는 안다는 듯 고개를 까딱이며 안으로 들어오라는 시늉을 했다. 엄마는 손에 마른 걸레를 들고 있었는데 위층만 정리하고 오겠다며 사라졌다. 칼럼은 멀대같이 오도카니 어색하게 거실 한복판에 서 있었다. 주방으로 사라졌던 애는 유리컵에 주스를 담아 칼럼에게 내밀었다. 목이 타던 칼럼은 단숨에 들이켰다.
"운동 하나봐?"
물어오는 목소리가 생각했던 것 보다 낮아 그제야 칼럼은 여자애가 아니네, 했다. 그런것도 잠시 몸에서 땀냄새가 나서 물은건가 싶어 고개를 돌려 개처럼 킁킁 거리자 그 모습이 웃겼는지 작게 웃는 애였다. 난 오스틴이야, 라며 악수 하자고 손을 뻗어 왔다. 난 칼럼이야, 하고 손을 유니폼 바지 춤에 대충 닦고 내밀어 맞잡았다. 그게 또 웃겼는지 수줍게 웃는 모습에 칼럼이 넋이 나간채로 손을 잡은채 계속 흔들었다. 생각보다 악수가 길어지자 오스틴이 이제 그만 해도 될 것 같은데.. 라고 했고 그제서야 파드득 손을 놓는 칼럼이었다. 축구부? 라고 물어와서 칼럼은 본인이 축구팀 주장에 스트라이커라고 자랑스럽게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그러다 또 혼자 말이 많아진 것 같아 다시 큼큼 거리며 목을 가다듬었다.
"근데 넌 어느 학교야? 우리 학교에선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오스틴이 아- 하고 뜸을 들이다 대답하려는데 엄마가 내려와서 가야한다고 말했다. 칼럼은 유리컵을 건네며 잘 마셨다고, 나중에 또 봐, 하고 인사하고 엄마를 따라 나섰다.
"여자앤줄 알았는데 남자애더라."
"누구? 아, 오스틴?"
머리가 길어서 그런가? 나도 처음엔 그랬어. 신호를 기다리며 멈춰 선 차 안에서 엄마가 말했다.
"근데 학교에서 본 적이 없는데. 다른 학교 다니는건가?"
"학교는 안 다닌다는 것 같아."
왜? 하고 칼럼이 놀란 듯이 묻자 엄마는 듣기에 미들스쿨 마지막 학년부터 홈스쿨링만 했다고 하더라, 했다. 칼럼은 또 왜? 라고 물었다. 그것까진 나야 모르지, 하며 엄마가 바뀐 신호에 핸들을 왼쪽으로 꺾었다. 뒷자석에 던져 놓은 가방을 집어들려고 몸을 홱 틀었다가 또 넘어갈 뻔한 시트에 간신히 중심을 잡고선 엄마한테 또 한 소리했다. 진짜 시트 좀 고쳐! 나중에 이 차 나한테 줄 때 다 고쳐서 줘야 해. 엄마는 늘 그렇듯 대충 대답하고 갈길을 가버렸다. 현관으로 터벅터벅 걸어오며 칼럼은 궁금했다. 오스틴이 왜 학교를 안 다니는지.
그 날은 축구부 연습이 없는 날이었다. 교복을 입은 칼럼은 차를 끌어 엄마가 있는 오스틴의 집으로 향했다. 연습이 없어 시간이 뜨는 바람에 엄마의 출근시간까지 좀 기다려야 해서 다른데 있다 갈까 했지만 왠지 오스틴을 한번 더 보고 싶었다. 차에서 내려 차창에 비친 모습을 보고 구겨진 교복을 탁탁 쳤다. 초인종을 누르고 기다렸으나 나온 사람은 오스틴이 아니었다. 엄마는 기다리는 동안 앉아서 과제라도 하라고 했다. 칼럼은 쭈뼛거리며 식탁 한 켠에 앉아 오스틴이 정말 없나 두리번 거렸지만 진짜 없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다시 풀어 제출해야 할 수학 문제들과 써야 할 레포트가 몇 개 있긴 했다. 축구로 장학금을 받는다고 해도 최소 성적은 맞춰야 했기 때문에 여간 스트레스가 아니었다. 더군다가 지난 시험에서 B를 맞은 과목 때문에 추가 과제로 크레딧을 채워 넣어야 했다. 연필로 이마를 콕콕 찍으며 미간을 찌푸린채 문제 풀이에 몰두한 칼럼의 뒤로 안녕, 하는 인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한쪽 어깨에 스포츠백을 메고 있는 오스틴이 서 있었다. 운동을 다녀 온 건지 땀을 흘려 그랬나 얼굴이 평소보다 반질거리는게 깐 달걀같이 귀여웠다. 엄마 기다리는데 과제가 있어서, 주인 없는 집 식탁에 앉은 게 실례가 될까 싶어 일어나려하니 괜찮다며 앉으라고 하는 오스틴이었다. 개수대에 기대 물을 따라 마시던 오스틴은 끙끙대고 있던 칼럼을 보고 한마디했다.
"어려워?"
이걸 해가야 성적 평균을 맞출 수 있다고 칼럼은 푸념했다. 축구만 잘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이런것도 해야 하더라고, 하면서 푸우 하고 이마를 덮고 있던 곱슬거리는 앞머리를 불어 올렸다. 오스틴이 슬며시 다가와서 칼럼이 풀던 문제를 눈으로 훑다가 연필 써도 돼? 했다. 칼럼이 건네준 연필로 종이 위에 사각사각 쓰며 이건 이렇게하면 돠는 거 같은데..라고 한다. 얘는 운동을 하고 왔는데도 향기가 좋네. 칼럼은 오스틴의 향을 느끼며 다른 생각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다 이게 맞을거야, 라는 오스틴의 말에 정신을 다시 차리고 그가 적은 풀이를 읽어 보았다. 오스틴이 한 건데 맞겠지, 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들었다. 고맙다는 말에 어깨를 으쓱하는 오스틴이었다.
"이렇게 잘 하는데 학교는 왜 안 다녀?"
저도 모르게 불쑥 궁금했던게 입밖으로 튀어나왔다. 약간은 표정이 굳어지며 어색한 미소를 짓는 오스틴에 칼럼은 아차 싶어 바로 사과를 했다. 미안, 내가 건방지게- 오스틴은 괜찮다며 고개를 도리질 했다. 어색한 침묵이 둘 사이에 흐르고 칼럼은 괜히 이마를 한 번 긁적이며 바꿀 화제거리를 찾았다. 바닥에 놓인 스포츠백이 눈에 들어와 운동을 하냐고 묻자 고개를 끄덕인다.
"어떤 운동해?"
"......발레."
"발레? 내가 아는 그 발레?"
주변에 발레를 하는 남자애를 본 적이 없어 놀란 칼럼은 진짜 발레? 이거? 하면서 어디선가 본 발레 동작을 어설프게 따라해 봤다. 그러다 중심을 잃고 넘어지려다 식탁 의자를 붙잡고 간신히 서는 모습에 오스틴이 예의 그 예쁜 웃음을 보여줬다. 그제야 안심한 칼럼은 같이 웃으며 혹시 학교 과제 모르는 걸 종종 물어봐도 돼냐고 했고 오스틴은 수줍게 응.. 이라고 대답했다.
칼럼은 그 후로 종종 과제나 막히는 문제를 들고 오면 오스틴을 찾았다. 이제 둘은 주방 식탁이 아닌 오스틴의 방에서 시간을 주로 보냈다. 그의 방엔 발레 관련 포스터들도 붙어 있고 대회에서 탄 상이나 트로피, 공연 사진들이 곳곳에 있었다. 처음 오스틴의 방에 들어 갔을 때 칼럼이 홀린 듯이 그것들을 쳐다보자 오스틴은 부끄럽다는 듯이 그만 보고 과제에 집중하라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발레는 티비에서나 본게 전부니까. 실제로 본 적이 없는 칼럼은 신기할 따름이었다.
"발레 때문에 학교를 안 다니는거야?"
오스틴은 좀 뜸을 들이다가.. 응, 연습량도 점점 많아지고 해서, 라고 했다. 나중에 공연하면 나도 불러주라, 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칼럼에 오스틴은 그냥 웃고 말았다. 본인이 농담으로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는지, 칼럼은 진짜로 불러달라고 두 번 정도 더 강조 했고, 너도 나 축구하는거 보러와, 라고 했다.
칼럼은 오스틴네 드나들면서 학교에서 있었던 크고 작은 사건 사고들을 그에게 들려주었다. 관찰해보니 외출이라곤 발레 스쿨에 다녀오는게 전부인 것 같았다. 더군다가 홈스쿨링을 하면 친구도 없을 텐데. 팀스포츠의 주장을 맡으며 큰 무리들과 다니고 교류하는데 익숙한 칼럼은 아무래도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을 오스틴에게 마음이 쓰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본인이 해주는 얘기에 어쩔 땐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어이 없는 표정을 짓기도 하고 어쩔 땐 파안대소 하는 그 모습을 보는게 좋아서 칼럼은 시간이 날 때 마다, 아니 거의 매일 오스틴의 집에 오다시피 했다.
오스틴도 굳이 시간을 만들어 본인을 만나러 와주는 칼럼이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같이 시간을 보내다보면 종종 그의 친구들에게서 연락이 올때가 많았으니까. 듣지 않으려 해봐도 폰 너머 목소리들이 아 오늘도? 하면서 질타를 하는데 칼럼은 안 된다며 다 거절을 했다.
"친구들이 너를 너무 보고 싶어 하는거 같은데..여긴 가끔 와도 돼."
"너도 내 친구잖아."
덩치만 커서는 어울리지 않게 해맑게 웃으며 대답하는 칼럼의 모습에 오스틴은 왠지 뱃속이 아려왔다.
그러던 어느 날 다니는 발레 스쿨에서 작은 공연을 하니 보러 오라고 오스틴이 조심스럽게 칼럼을 초대했다. 시간이 맞지 않으면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다는 말에, 칼럼은 꼭 갈거라는 똑같은 대답을 몇 번이나 했다. 그 사이 칼럼의 엄마가 드디어 새 차를 사게 되며 옛날에 둘이 나눠 타던 차는 온전히 칼럼께 되었다. 그는 이제 시간이나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오스틴과 더 많이 어울려 다녔다.
오스틴의 공연이 있는 날 뭘 입고가야 하나 괜히 긴장되서 허둥지둥 거리다 간신히 시간을 맞춰 도착했는데 알고보니 혼자만 너무 힘줘서 입고 온게 아닌가. 약간의 민망함과 걱정도 잠시 공연이 시작되고 무대를 휘어잡는 퍼포먼스의 오스틴을 보며 칼럼은 또 한 번 넋을 잃고 말았다. 사뿐히 공중으로 날아올랐다가 착지하는 모습이나, 여자 파트너를 가볍게 들어올리는 모습. 우아하게 무대 끝에서 끝으로 회전하며 이동하는 오스틴의 모습은 누구나가 봤어도 반했을 것이다.
공연이 끝나고 백스테이지로 와서 건네준 꽃이 너무 꽉 쥔채 공연을 본터라 반은 너덜해져 칼럼은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오스틴은 그게 너무 칼럼 터너 다워서 빵 터지고 말았다. 칼럼은 조금 쑥쓰러웠지만 오스틴을 웃게 했단 사실이 뿌듯하기도 했다.
또 어떤 날은 오스틴이 칼럼의 학교에 그가 축구 연습 하는 걸 구경오기도 했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 사이에서 사복을 입고 있어서, 발레리노의 피지컬로 단연 눈에 띄었다. 연습 도중 운동장 계단석에 앉아 보고 있던 오스틴에게 크게 팔을 휘두르며 칼럼이 인사를 했고 오스틴은 작은 손짓으로 화답했다.
팀 주장이라더니, 큰 소리로 부원들에게 뭐라뭐라 지시하는 모습이 평소에 보여주던 개구진 모습하고는 또 달라 보이는 칼럼이었다. 연습 게임에서 간판 스트라이커답게 골을 넣은 칼럼 뒤로 따라 달리던 같은 편 부원들이 그에게로 달려들어 다소 과격한 포옹을 선사했다. 순간 오스틴은 저들 사이로 들어가 본인도 칼럼을 한 번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골 넣은 걸 봤냐는 손짓을 저에게 보내는 칼럼에게 작게 박수를 보냈다. 멀리 있어 아마 발게진 제 얼굴을 못 봐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연습 경기가 끝나자 부원들을 달고 오스틴이 앉아 있는 계단석으로 칼럼이 왔다. 부원들하고 인사를 시키며 이 쪽이 오스틴이라고 소개하자, 다들 안다는 듯한 말투로 아~ 그 발레리노? 라고 일제히 대답했다. 칼럼은 자기가 잔뜩 자랑했다고 씩 웃으면서 말했다. 오스틴은 조금 쑥쓰러웠지만 반겨주는 이들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샤워실에서 나온 칼럼이 젖은 머리를 대충 털며 학교를 구경시켜주겠다고 했다. 오스틴은 옆에 서서 다들 가고 없는 조용한 교실과 교정들을 둘러 보았다. 여기가 내 교실이고 여기는 랩실이고- 조잘조잘 떠들며 옆에 걷는 칼럼에게서 시원한 바디워시 향이 풍겨와 오스틴은 괜시리 두근거렸다.
"너도 같이 다니면 좋겠다."
칼럼의 말에 진지하게 며칠 고민하던 오스틴은 부모님께도 다시 학교에 가고 싶다고 조심스럽게 말해보았다. 역시나 예상대로 두 사람은 조금 놀란 눈치였지만, 내심 학교로 돌아갔으면 하는 그들의 마음이 없던것도 아니었다. 허락은 쉽게 떨어졌다. 오스틴은 오랜만의 등교에 떨리긴 했지만 큰 덩치에 맨 앞줄에 앉아 저를 소개하는 담임의 말을 들으며 히죽거리며 웃는 칼럼 때문에 애초의 걱정은 온데간데 없어졌다. 예상보다 오스틴은 학교에 잘 적응 했다. 피지컬도 좋은데 거기다 희귀한 발레하는 남자라니, 여학생들한테 인기도 많았다. 홈스쿨링 해서 다 배운거지만 뻐기지 않고 애들이 모르는 부분도 친절히 알려줘서 대부분 그를 좋게 봤다. 아는 얼굴이 몇몇 생기긴 했지만 여전히 칼럼이랑 제일 친했고, 오스틴 옆엔 늘 칼럼이 붙어 다녔다.
하루는 엄마가 야간 근무를 하는 날 축구 부원들과 친한 친구 몇 명을 집으로 초대한 칼럼이었다. 물론 오스틴도 초대했지만 사람 많은 곳은 아직은 어색한지 오스틴은 잘 모르겠다고 했다. 8시까지 오라고 했는데 9시가 넘어도 안 나타나는 오스틴에 칼럼은 다소 아쉬우면서도, 역시 불편한가.. 싶어 괜히 미안해졌다. 다른 애들하고도 친해졌으면해서 부른건데 하며 씁쓸해 하는 찰나 뒤늦게 모습을 드러낸 오스틴 이었다.
어깨까지 오던 머리를 하나로 묶고 흰 티에 붙는 바지, 데님 셔츠를 입고 왔는데 평소보다 차려입은 모습이라 칼럼은 어라, 싶었다.생각보다 오스틴은 다른 아이들과 말도 잘 했다. 술은 절대 안 된다고 했는데 누가 몰래 공수해 온 건지 어디서 난 맥주도 몇 모금 마셔본 그였다. 약간은 상기 된 볼이 귀여웠다.
칼럼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인채 웃는데 칼럼은 저도 모르게 가슴께가 간질거렸다가 옆에 앉아 있는 덩치큰 시커먼 녀석들이 눈에 들어오자 괜히 오라했나 싶었다. 자정이 넘어서 하나둘씩 집에 가고, 오스틴에게 집에 어떻게 갈거냐고 물으니 부모님께 전화하면 데리러 온다고 한단다. 그 말에 나가던 한 녀석이 가는 길에 내가 태워다 줄까? 외쳐서 칼럼이 다급하게 가로채며 본인이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이 난장판만 치우고 데려다줄게."
칼럼은 바닥에 뒹구는 게임 콘솔과 컨트롤러를 정리하여 박스에 넣는 동안 오스틴이 돌아다니며 아무데나 널브러진 과자 봉지며 유리병이며 주워 치웠다. 칼럼이 그냥 두라고 해도, 오스틴은 괜찮다며 도왔다. 이 맥주병들은 어떡할까? 라고 묻는 질문에 칼럼이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엄마가 보면 안되는데, 했다. 오스틴이 우리집 근처 적당한 곳에 버리면 어머니가 눈치 못챌 것 같은데, 했고 칼럼이 좋은 생각이라면서 봉지를 꺼내와 빈병을 담기 시작했다. 덜그럭 거리는 봉투를 들고 집을 나선 둘은 이젠 칼럼의 것이 된 차에 올랐다. 빈병이 담긴 봉투는 뒷자석이 던져두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오스틴은 오늘 재밌었다며 말했고 어느새 차가 그의 집 앞에 도착했다.
"나 아까 술 마신거 냄새 나는건 아니지?"
물으며 갑자기 가까이 다가오는 오스틴에 칼럼은 흠칫했다. 몇 모금은 괜찮겠지? 하며 뒤에 있는 병이 담긴 봉투를 집어 들려고 몸을 기울이자 뒤로 갑자기 넘어가는 망할 카시트였다. 칼럼은 오스틴의 뒤를 받쳐 넘어가게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게 오히려 그를 안으려고 하는 자세가 되어버렸다. 하마터면 닿을 뻔 했어! 이 망할 아줌마가! 내가 그렇게 고치라고 했는데! 속으로만 엄마를 욕하는 칼럼이었다.
"이게, 시트가 고장나서-"
칼럼은 그 큰 덩치를 뒤로 물리며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오스틴도 괜히 민망해져선 입을 꾹꾹 눌러 닫으며 작은 소리로 데려다줘서 고마워.. 하고 차에서 내렸다. 빈 병이 담긴 봉투는 대충 집 근처 쓰레기통에 넣은 뒤 집으로 종종 걸어 들어가는 오스틴이었다. 오스틴이 현관 문 뒤로 사라지자 칼럼은 그제야 핸들을 짚은채 이마를 대고 가까웠던 아까의 거리를 떠올려봤다. 관자놀이에서 쿵쿵거리며 심장박동이 평소보다 빨라지는게 느껴졌다.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운 오스틴도 마찬가지였다. 아까의 작은 해프닝 때문인지 가슴에서 울리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고개를 돌리자 책상 위에 놓아둔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지난번 공연에 와준 칼럼과 찍은 사진이었다. 자기보다 배는 큰 덩치를 하고선 혼자만 정장 차림와서 다 구겨진 꽃을 건넸던 칼럼. 사진 속 제 어깨에 두른 그의 손을 보니 아까 등 밑으로 들어왔던 단단한 팔의 느낌이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술 때문은 아니었다. 진작에 깼으니까. 이런 떨리는 기분은 단연코 칼럼 터너 때문이란걸 오스틴은 알았다.
이 비주얼로.. 둘이 졸라 잘 어울리자나..
칼럼오틴버 칼틴버
제목 잘못써서 수정함;;; ㅈㅅㅈㅅ
모든 일은 그날 그렇게 시작됐다. 락커룸 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리고 땀냄새를 풀풀 풍기는 십대 남자애들이 우르르 안으로 밀어 닥쳤다. 칼럼은 목에 건 수건으로 땀에 절은 머리를 대충 털고 본인 이름이 써진 캐비냇 문을 열었다. 가방을 뒤져 새 수건을 찾는데 윙 진동 소리를 내며 폰이 울렸다. 발신인은 엄마였다.
[오늘 야간근무. 차 써야 해.]
커트네 집이 비어서 다같이 연습 끝나고 거기로 가려고 했는데. 칼럼은 미간을 찌푸리며 답장을 보내려고 했는데 엄마가 더 빨랐다.
[5시까지. 레드 브릭스로 곧장 와.]
시계를 보니 4:30분이다. 샤워 할 시간도 없겠네. 안 씻어? 라고 어깨를 치는 부원들에게 대충 손사레를 쳤다. 엄마는 만일의 사태에 늘 철저히 대비하는 사람이었다. 아빠가 떠나고 난 뒤엔 정도가 좀 더 심해졌다. 특히 돈에 대해서는 좀 더 그래졌다. 넘치는 돈을 끼고 사는 건 아니었지만 둘이 먹고 살기엔 나쁘지 않은데. 대학은 축구팀에 선발되면 장학금을 받을 수 있을거라고 말해도 못 미더운 모양이었다. 혹시 모르니까. 부상 같은 것도 있잖아. 그리고 네 성적을 봐라. 저번에 수학에서 B- 가 맞았던걸. 백팩에 숨겨 둔 시험지는 언제 꺼내 본 건지. 그럴바엔 차라리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겠다는 칼럼이었으나 그건 또 안됐다. 넌 연습에나 집중해, 하고 자기보다 머리통이 하나 더 큰 아들을 콩 쥐어 박는 엄마였다.
레드 브릭스는 간호사인 엄마가 야간조를 들어가기 전 시간을 짬내 집안일을 거두러가는 집이었다. 빨간 벽돌로 쌓아올린 고풍스런 저택이라 엄마는 첫날 다녀온 뒤 그 집을 쭉 그렇게 불렀다. 칼럼은 엄마가 남의 집 일까지 거두는게 영 마땅찮았다. 엄마를 하녀부리듯 하는 거 아니냐, 본인 집안일도 못하는 사람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이냐 불평을 늘어놓았지만 엄만 아무렇지 않아했다. 그 집에 어린 애가 있어서 맨날 어지르는 것도 아니고, 부부 내외는 일 때문에 집에 거의 없는거나 마찬가지라나. 집도 깨끗해서 별로 할 것도 없고 돈도 나쁘지 않다고 해서 오히려 좋다고 했다.
"나 오늘 못 간다!!!!"
샤워실 문을 열고 대충 크게 소리 친 칼럼은 밖으로 나와 학교 주차장으로 걸었다. 몇 대 주차 되지 않은 곳에 진회색의 SUV가 자리하고 있었다. 칼럼은 운전석을 열고 앉아 가방을 대충 뒷자석에 던져 두었다. 아빠가 타던 차였는데 엄마와 칼럼이 번갈아가며 쓰고 있었다. 원래 오늘은 칼럼이 쓰기로 했는데, 엄마의 직업상 긴급 수술이나 근무조가 바뀌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엄마는 차를 하나 더 사면 이 차를 저에게 준다고 했는데 그게 벌써 말만 2년째였다. 칼럼은 엄마가 알려준 주소로 차를 몰았다. 샤워를 하지 않아 찝찝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창문을 열고 달리며 땀에 젖은 머리칼을 바람에 식혔다.
그 집 앞에 차를 세우자 왜 엄마가 레드 브릭스라고 했는지 딱 알 수 있었다. 평범한 단층 구조의 본인 집과는 달리 빨간 벽돌로 지어진 2층 주택에, 담벽을 타고 담쟁이 덩쿨이 다닥다닥 올라 붙어 있었다. 깔끔하게 손질 된 앞마당을 보며 칼럼은 왠지 주눅이 드는 기분이었다. 하얗게 칠해진 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지만 아무 대답도 없었다. 다시 눌렀지만 마찬가지였다. 손잡이를 눌러 내리니 문이 너무나 쉽게 열렸다. 칼럼은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서며 엄마? 하고 불렀다.
집안은 오래된 가구들과 현관 근처 가구장 위에 놓인 디퓨저 냄새가 섞여 났다. 칼럼은 계속 엄마를 부르며 좀 더 안으로 들어갔다. 벽에는 풍경화와 정물화 몇 점이 걸려 있었고 장식장 위에 놓여있는 조명들도 다 영화나 빈티지 가게에서 볼 법한 물건들이었다. 본인이 오라해놓고 없어지면 어쩌잔거야.. 하고 다시 나가려고 몸을 돌리다가 들어오는 누군가와 마주쳤다.
어깨까지 찰랑거리며 내려오는 금발머리에 다소 짧은 기장의 티셔츠와 붙는 바지. 엄마는 아니었다. 엄마는 금발이 아니니까. 숙였던 고개를 들자 마주친 예쁘장한 얼굴에 칼럼은 넋을 잃고 가만히 보았다. 낯선 사람이 집에 있어 놀란 아이는 눈이 동그래졌다. 딱 오해 받기 좋은 상황아닌가. 아무도 없는 집에 땀에 절은 채로 들어와서 어슬렁거리는 덩치 한 명. 칼럼은 어버버 거리며 엄마가, 여기에.. 웅얼웅얼 거렸다. 금발 예쁜이는 (그렇게 부르기로 칼럼의 뇌가 정해버렸다) 얘가 무슨 소리를 하는건지 모르겠다며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때마침 문을 열고 칼럼의 엄마가 들어왔다.
"아, 왔네 칼럼. 가자."
엄마는 그 예쁜 애한테 너도 이제 오는구나? 하고 인사를 건네곤 자긴 가보겠다고 하고 집을 나섰다. 저에게 따라붙는 칼럼의 시선에 살짝 얼굴을 붉히며 잘가라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는 애였다. 칼럼은 쫄래쫄래 엄마 뒤를 쫓아 나가면서도 힐끔힐끔 뒤를 돌아봤다. 조수석에 앉아 집으로 가면서 곰곰히 아까본 말간 얼굴을 계속 떠올려 봤다. 학교에선 본 적이 없는 얼굴인데. 다른 학교에 다니나. 아니면 내가 놓친 얼굴인가? 혼자서 곰곰히 생각하는 사이 차가 집 앞에 섰다. 칼럼이 뒷자석에 던져놓은 가방을 집으러 몸을 기울이자 카시트가 뒤로 확 제껴졌다. 엄마가 그 모습에 깔깔거렸다.
"아 쫌! 이거 고치라고 몇 번을 말해!"
"저녁은 데워 먹어!"
차문이 닫히자 병원으로 쌩 가버리는 엄마였다. 집으로 들어와 더러워진 축구화를 대충 벗어 놓고 곧장 욕실로 직행했다. 거울을 보고 뜨악했다. 땀에 젖었던 머리가 쓸어올린 그대로 말려져서 너저분했다. 고개를 돌려 킁킁 거렸다. 냄새가 평소보단 더 구린 것 같았다. 물론 아까 본 금발의 예쁜이는 이런걸 신경 쓸 겨를도 없었겠지만. 칼럼은 샤워기를 틀어 평소보다 구석구석 박박 씻었다. 내일 학교에 가면 비슷한 얼굴을 찾아봐야지 하면서.
교실을 이동 할 때나 점심시간 카페테리아에서도 찾아 보려 했으나 그 얼굴은 없었다. 금발인 애는 있었지만 예쁜 애는 없었다. 커트가 뭘 그렇게 찾냐고 부산스럽다고 한마디 했다. 그리고 며칠 뒤 그 애를 다시 본 건 레드 브릭스에서 였다. 그 날도 연습을 끝내고 캐비넷을 여니 엄마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칼럼은 한편으로 기대가 되면서도 문자를 일찍 주지 않은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또 샤워를 못하고 가잖아. 가방에 넣어뒀던 새 수건을 유니폼 안으로 넣어 대충 닦고 데오도란트를 마구 뿌리자 여기저기서 작작 좀 하라는 소리가 들렸다. 칼럼은 평소보다 조금 더 엑셀을 밟았다. 초인종을 누르니 이번엔 누가 나오는데, 며칠 전 본 그 예쁜 애였다. 칼럼은 괜히 큼큼거리며 목을 가다듬었다.
"엄마가 여기로 오라고 해서.."
들떴던 마음은 어느새 긴장으로 바뀌어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만 나왔다. 그러자 그 애는 안다는 듯 고개를 까딱이며 안으로 들어오라는 시늉을 했다. 엄마는 손에 마른 걸레를 들고 있었는데 위층만 정리하고 오겠다며 사라졌다. 칼럼은 멀대같이 오도카니 어색하게 거실 한복판에 서 있었다. 주방으로 사라졌던 애는 유리컵에 주스를 담아 칼럼에게 내밀었다. 목이 타던 칼럼은 단숨에 들이켰다.
"운동 하나봐?"
물어오는 목소리가 생각했던 것 보다 낮아 그제야 칼럼은 여자애가 아니네, 했다. 그런것도 잠시 몸에서 땀냄새가 나서 물은건가 싶어 고개를 돌려 개처럼 킁킁 거리자 그 모습이 웃겼는지 작게 웃는 애였다. 난 오스틴이야, 라며 악수 하자고 손을 뻗어 왔다. 난 칼럼이야, 하고 손을 유니폼 바지 춤에 대충 닦고 내밀어 맞잡았다. 그게 또 웃겼는지 수줍게 웃는 모습에 칼럼이 넋이 나간채로 손을 잡은채 계속 흔들었다. 생각보다 악수가 길어지자 오스틴이 이제 그만 해도 될 것 같은데.. 라고 했고 그제서야 파드득 손을 놓는 칼럼이었다. 축구부? 라고 물어와서 칼럼은 본인이 축구팀 주장에 스트라이커라고 자랑스럽게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그러다 또 혼자 말이 많아진 것 같아 다시 큼큼 거리며 목을 가다듬었다.
"근데 넌 어느 학교야? 우리 학교에선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오스틴이 아- 하고 뜸을 들이다 대답하려는데 엄마가 내려와서 가야한다고 말했다. 칼럼은 유리컵을 건네며 잘 마셨다고, 나중에 또 봐, 하고 인사하고 엄마를 따라 나섰다.
"여자앤줄 알았는데 남자애더라."
"누구? 아, 오스틴?"
머리가 길어서 그런가? 나도 처음엔 그랬어. 신호를 기다리며 멈춰 선 차 안에서 엄마가 말했다.
"근데 학교에서 본 적이 없는데. 다른 학교 다니는건가?"
"학교는 안 다닌다는 것 같아."
왜? 하고 칼럼이 놀란 듯이 묻자 엄마는 듣기에 미들스쿨 마지막 학년부터 홈스쿨링만 했다고 하더라, 했다. 칼럼은 또 왜? 라고 물었다. 그것까진 나야 모르지, 하며 엄마가 바뀐 신호에 핸들을 왼쪽으로 꺾었다. 뒷자석에 던져 놓은 가방을 집어들려고 몸을 홱 틀었다가 또 넘어갈 뻔한 시트에 간신히 중심을 잡고선 엄마한테 또 한 소리했다. 진짜 시트 좀 고쳐! 나중에 이 차 나한테 줄 때 다 고쳐서 줘야 해. 엄마는 늘 그렇듯 대충 대답하고 갈길을 가버렸다. 현관으로 터벅터벅 걸어오며 칼럼은 궁금했다. 오스틴이 왜 학교를 안 다니는지.
그 날은 축구부 연습이 없는 날이었다. 교복을 입은 칼럼은 차를 끌어 엄마가 있는 오스틴의 집으로 향했다. 연습이 없어 시간이 뜨는 바람에 엄마의 출근시간까지 좀 기다려야 해서 다른데 있다 갈까 했지만 왠지 오스틴을 한번 더 보고 싶었다. 차에서 내려 차창에 비친 모습을 보고 구겨진 교복을 탁탁 쳤다. 초인종을 누르고 기다렸으나 나온 사람은 오스틴이 아니었다. 엄마는 기다리는 동안 앉아서 과제라도 하라고 했다. 칼럼은 쭈뼛거리며 식탁 한 켠에 앉아 오스틴이 정말 없나 두리번 거렸지만 진짜 없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다시 풀어 제출해야 할 수학 문제들과 써야 할 레포트가 몇 개 있긴 했다. 축구로 장학금을 받는다고 해도 최소 성적은 맞춰야 했기 때문에 여간 스트레스가 아니었다. 더군다가 지난 시험에서 B를 맞은 과목 때문에 추가 과제로 크레딧을 채워 넣어야 했다. 연필로 이마를 콕콕 찍으며 미간을 찌푸린채 문제 풀이에 몰두한 칼럼의 뒤로 안녕, 하는 인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한쪽 어깨에 스포츠백을 메고 있는 오스틴이 서 있었다. 운동을 다녀 온 건지 땀을 흘려 그랬나 얼굴이 평소보다 반질거리는게 깐 달걀같이 귀여웠다. 엄마 기다리는데 과제가 있어서, 주인 없는 집 식탁에 앉은 게 실례가 될까 싶어 일어나려하니 괜찮다며 앉으라고 하는 오스틴이었다. 개수대에 기대 물을 따라 마시던 오스틴은 끙끙대고 있던 칼럼을 보고 한마디했다.
"어려워?"
이걸 해가야 성적 평균을 맞출 수 있다고 칼럼은 푸념했다. 축구만 잘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이런것도 해야 하더라고, 하면서 푸우 하고 이마를 덮고 있던 곱슬거리는 앞머리를 불어 올렸다. 오스틴이 슬며시 다가와서 칼럼이 풀던 문제를 눈으로 훑다가 연필 써도 돼? 했다. 칼럼이 건네준 연필로 종이 위에 사각사각 쓰며 이건 이렇게하면 돠는 거 같은데..라고 한다. 얘는 운동을 하고 왔는데도 향기가 좋네. 칼럼은 오스틴의 향을 느끼며 다른 생각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다 이게 맞을거야, 라는 오스틴의 말에 정신을 다시 차리고 그가 적은 풀이를 읽어 보았다. 오스틴이 한 건데 맞겠지, 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들었다. 고맙다는 말에 어깨를 으쓱하는 오스틴이었다.
"이렇게 잘 하는데 학교는 왜 안 다녀?"
저도 모르게 불쑥 궁금했던게 입밖으로 튀어나왔다. 약간은 표정이 굳어지며 어색한 미소를 짓는 오스틴에 칼럼은 아차 싶어 바로 사과를 했다. 미안, 내가 건방지게- 오스틴은 괜찮다며 고개를 도리질 했다. 어색한 침묵이 둘 사이에 흐르고 칼럼은 괜히 이마를 한 번 긁적이며 바꿀 화제거리를 찾았다. 바닥에 놓인 스포츠백이 눈에 들어와 운동을 하냐고 묻자 고개를 끄덕인다.
"어떤 운동해?"
"......발레."
"발레? 내가 아는 그 발레?"
주변에 발레를 하는 남자애를 본 적이 없어 놀란 칼럼은 진짜 발레? 이거? 하면서 어디선가 본 발레 동작을 어설프게 따라해 봤다. 그러다 중심을 잃고 넘어지려다 식탁 의자를 붙잡고 간신히 서는 모습에 오스틴이 예의 그 예쁜 웃음을 보여줬다. 그제야 안심한 칼럼은 같이 웃으며 혹시 학교 과제 모르는 걸 종종 물어봐도 돼냐고 했고 오스틴은 수줍게 응.. 이라고 대답했다.
칼럼은 그 후로 종종 과제나 막히는 문제를 들고 오면 오스틴을 찾았다. 이제 둘은 주방 식탁이 아닌 오스틴의 방에서 시간을 주로 보냈다. 그의 방엔 발레 관련 포스터들도 붙어 있고 대회에서 탄 상이나 트로피, 공연 사진들이 곳곳에 있었다. 처음 오스틴의 방에 들어 갔을 때 칼럼이 홀린 듯이 그것들을 쳐다보자 오스틴은 부끄럽다는 듯이 그만 보고 과제에 집중하라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발레는 티비에서나 본게 전부니까. 실제로 본 적이 없는 칼럼은 신기할 따름이었다.
"발레 때문에 학교를 안 다니는거야?"
오스틴은 좀 뜸을 들이다가.. 응, 연습량도 점점 많아지고 해서, 라고 했다. 나중에 공연하면 나도 불러주라, 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칼럼에 오스틴은 그냥 웃고 말았다. 본인이 농담으로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는지, 칼럼은 진짜로 불러달라고 두 번 정도 더 강조 했고, 너도 나 축구하는거 보러와, 라고 했다.
칼럼은 오스틴네 드나들면서 학교에서 있었던 크고 작은 사건 사고들을 그에게 들려주었다. 관찰해보니 외출이라곤 발레 스쿨에 다녀오는게 전부인 것 같았다. 더군다가 홈스쿨링을 하면 친구도 없을 텐데. 팀스포츠의 주장을 맡으며 큰 무리들과 다니고 교류하는데 익숙한 칼럼은 아무래도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을 오스틴에게 마음이 쓰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본인이 해주는 얘기에 어쩔 땐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어이 없는 표정을 짓기도 하고 어쩔 땐 파안대소 하는 그 모습을 보는게 좋아서 칼럼은 시간이 날 때 마다, 아니 거의 매일 오스틴의 집에 오다시피 했다.
오스틴도 굳이 시간을 만들어 본인을 만나러 와주는 칼럼이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같이 시간을 보내다보면 종종 그의 친구들에게서 연락이 올때가 많았으니까. 듣지 않으려 해봐도 폰 너머 목소리들이 아 오늘도? 하면서 질타를 하는데 칼럼은 안 된다며 다 거절을 했다.
"친구들이 너를 너무 보고 싶어 하는거 같은데..여긴 가끔 와도 돼."
"너도 내 친구잖아."
덩치만 커서는 어울리지 않게 해맑게 웃으며 대답하는 칼럼의 모습에 오스틴은 왠지 뱃속이 아려왔다.
그러던 어느 날 다니는 발레 스쿨에서 작은 공연을 하니 보러 오라고 오스틴이 조심스럽게 칼럼을 초대했다. 시간이 맞지 않으면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다는 말에, 칼럼은 꼭 갈거라는 똑같은 대답을 몇 번이나 했다. 그 사이 칼럼의 엄마가 드디어 새 차를 사게 되며 옛날에 둘이 나눠 타던 차는 온전히 칼럼께 되었다. 그는 이제 시간이나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오스틴과 더 많이 어울려 다녔다.
오스틴의 공연이 있는 날 뭘 입고가야 하나 괜히 긴장되서 허둥지둥 거리다 간신히 시간을 맞춰 도착했는데 알고보니 혼자만 너무 힘줘서 입고 온게 아닌가. 약간의 민망함과 걱정도 잠시 공연이 시작되고 무대를 휘어잡는 퍼포먼스의 오스틴을 보며 칼럼은 또 한 번 넋을 잃고 말았다. 사뿐히 공중으로 날아올랐다가 착지하는 모습이나, 여자 파트너를 가볍게 들어올리는 모습. 우아하게 무대 끝에서 끝으로 회전하며 이동하는 오스틴의 모습은 누구나가 봤어도 반했을 것이다.
공연이 끝나고 백스테이지로 와서 건네준 꽃이 너무 꽉 쥔채 공연을 본터라 반은 너덜해져 칼럼은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오스틴은 그게 너무 칼럼 터너 다워서 빵 터지고 말았다. 칼럼은 조금 쑥쓰러웠지만 오스틴을 웃게 했단 사실이 뿌듯하기도 했다.
또 어떤 날은 오스틴이 칼럼의 학교에 그가 축구 연습 하는 걸 구경오기도 했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 사이에서 사복을 입고 있어서, 발레리노의 피지컬로 단연 눈에 띄었다. 연습 도중 운동장 계단석에 앉아 보고 있던 오스틴에게 크게 팔을 휘두르며 칼럼이 인사를 했고 오스틴은 작은 손짓으로 화답했다.
팀 주장이라더니, 큰 소리로 부원들에게 뭐라뭐라 지시하는 모습이 평소에 보여주던 개구진 모습하고는 또 달라 보이는 칼럼이었다. 연습 게임에서 간판 스트라이커답게 골을 넣은 칼럼 뒤로 따라 달리던 같은 편 부원들이 그에게로 달려들어 다소 과격한 포옹을 선사했다. 순간 오스틴은 저들 사이로 들어가 본인도 칼럼을 한 번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골 넣은 걸 봤냐는 손짓을 저에게 보내는 칼럼에게 작게 박수를 보냈다. 멀리 있어 아마 발게진 제 얼굴을 못 봐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연습 경기가 끝나자 부원들을 달고 오스틴이 앉아 있는 계단석으로 칼럼이 왔다. 부원들하고 인사를 시키며 이 쪽이 오스틴이라고 소개하자, 다들 안다는 듯한 말투로 아~ 그 발레리노? 라고 일제히 대답했다. 칼럼은 자기가 잔뜩 자랑했다고 씩 웃으면서 말했다. 오스틴은 조금 쑥쓰러웠지만 반겨주는 이들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샤워실에서 나온 칼럼이 젖은 머리를 대충 털며 학교를 구경시켜주겠다고 했다. 오스틴은 옆에 서서 다들 가고 없는 조용한 교실과 교정들을 둘러 보았다. 여기가 내 교실이고 여기는 랩실이고- 조잘조잘 떠들며 옆에 걷는 칼럼에게서 시원한 바디워시 향이 풍겨와 오스틴은 괜시리 두근거렸다.
"너도 같이 다니면 좋겠다."
칼럼의 말에 진지하게 며칠 고민하던 오스틴은 부모님께도 다시 학교에 가고 싶다고 조심스럽게 말해보았다. 역시나 예상대로 두 사람은 조금 놀란 눈치였지만, 내심 학교로 돌아갔으면 하는 그들의 마음이 없던것도 아니었다. 허락은 쉽게 떨어졌다. 오스틴은 오랜만의 등교에 떨리긴 했지만 큰 덩치에 맨 앞줄에 앉아 저를 소개하는 담임의 말을 들으며 히죽거리며 웃는 칼럼 때문에 애초의 걱정은 온데간데 없어졌다. 예상보다 오스틴은 학교에 잘 적응 했다. 피지컬도 좋은데 거기다 희귀한 발레하는 남자라니, 여학생들한테 인기도 많았다. 홈스쿨링 해서 다 배운거지만 뻐기지 않고 애들이 모르는 부분도 친절히 알려줘서 대부분 그를 좋게 봤다. 아는 얼굴이 몇몇 생기긴 했지만 여전히 칼럼이랑 제일 친했고, 오스틴 옆엔 늘 칼럼이 붙어 다녔다.
하루는 엄마가 야간 근무를 하는 날 축구 부원들과 친한 친구 몇 명을 집으로 초대한 칼럼이었다. 물론 오스틴도 초대했지만 사람 많은 곳은 아직은 어색한지 오스틴은 잘 모르겠다고 했다. 8시까지 오라고 했는데 9시가 넘어도 안 나타나는 오스틴에 칼럼은 다소 아쉬우면서도, 역시 불편한가.. 싶어 괜히 미안해졌다. 다른 애들하고도 친해졌으면해서 부른건데 하며 씁쓸해 하는 찰나 뒤늦게 모습을 드러낸 오스틴 이었다.
어깨까지 오던 머리를 하나로 묶고 흰 티에 붙는 바지, 데님 셔츠를 입고 왔는데 평소보다 차려입은 모습이라 칼럼은 어라, 싶었다.생각보다 오스틴은 다른 아이들과 말도 잘 했다. 술은 절대 안 된다고 했는데 누가 몰래 공수해 온 건지 어디서 난 맥주도 몇 모금 마셔본 그였다. 약간은 상기 된 볼이 귀여웠다.
칼럼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인채 웃는데 칼럼은 저도 모르게 가슴께가 간질거렸다가 옆에 앉아 있는 덩치큰 시커먼 녀석들이 눈에 들어오자 괜히 오라했나 싶었다. 자정이 넘어서 하나둘씩 집에 가고, 오스틴에게 집에 어떻게 갈거냐고 물으니 부모님께 전화하면 데리러 온다고 한단다. 그 말에 나가던 한 녀석이 가는 길에 내가 태워다 줄까? 외쳐서 칼럼이 다급하게 가로채며 본인이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이 난장판만 치우고 데려다줄게."
칼럼은 바닥에 뒹구는 게임 콘솔과 컨트롤러를 정리하여 박스에 넣는 동안 오스틴이 돌아다니며 아무데나 널브러진 과자 봉지며 유리병이며 주워 치웠다. 칼럼이 그냥 두라고 해도, 오스틴은 괜찮다며 도왔다. 이 맥주병들은 어떡할까? 라고 묻는 질문에 칼럼이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엄마가 보면 안되는데, 했다. 오스틴이 우리집 근처 적당한 곳에 버리면 어머니가 눈치 못챌 것 같은데, 했고 칼럼이 좋은 생각이라면서 봉지를 꺼내와 빈병을 담기 시작했다. 덜그럭 거리는 봉투를 들고 집을 나선 둘은 이젠 칼럼의 것이 된 차에 올랐다. 빈병이 담긴 봉투는 뒷자석이 던져두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오스틴은 오늘 재밌었다며 말했고 어느새 차가 그의 집 앞에 도착했다.
"나 아까 술 마신거 냄새 나는건 아니지?"
물으며 갑자기 가까이 다가오는 오스틴에 칼럼은 흠칫했다. 몇 모금은 괜찮겠지? 하며 뒤에 있는 병이 담긴 봉투를 집어 들려고 몸을 기울이자 뒤로 갑자기 넘어가는 망할 카시트였다. 칼럼은 오스틴의 뒤를 받쳐 넘어가게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게 오히려 그를 안으려고 하는 자세가 되어버렸다. 하마터면 닿을 뻔 했어! 이 망할 아줌마가! 내가 그렇게 고치라고 했는데! 속으로만 엄마를 욕하는 칼럼이었다.
"이게, 시트가 고장나서-"
칼럼은 그 큰 덩치를 뒤로 물리며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오스틴도 괜히 민망해져선 입을 꾹꾹 눌러 닫으며 작은 소리로 데려다줘서 고마워.. 하고 차에서 내렸다. 빈 병이 담긴 봉투는 대충 집 근처 쓰레기통에 넣은 뒤 집으로 종종 걸어 들어가는 오스틴이었다. 오스틴이 현관 문 뒤로 사라지자 칼럼은 그제야 핸들을 짚은채 이마를 대고 가까웠던 아까의 거리를 떠올려봤다. 관자놀이에서 쿵쿵거리며 심장박동이 평소보다 빨라지는게 느껴졌다.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운 오스틴도 마찬가지였다. 아까의 작은 해프닝 때문인지 가슴에서 울리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고개를 돌리자 책상 위에 놓아둔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지난번 공연에 와준 칼럼과 찍은 사진이었다. 자기보다 배는 큰 덩치를 하고선 혼자만 정장 차림와서 다 구겨진 꽃을 건넸던 칼럼. 사진 속 제 어깨에 두른 그의 손을 보니 아까 등 밑으로 들어왔던 단단한 팔의 느낌이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술 때문은 아니었다. 진작에 깼으니까. 이런 떨리는 기분은 단연코 칼럼 터너 때문이란걸 오스틴은 알았다.
이 비주얼로.. 둘이 졸라 잘 어울리자나..
칼럼오틴버 칼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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