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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4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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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3 :




크리스는 꼬박 일주일을 내리 앓았다.
누군가에게 맡겨두는게 아무래도 못미더워 브래들리는 매일 직접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하루에도 몇번씩 열이 오르락 내리락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게, 이러다가 정말 큰일이라도 나는건 아닐지 여러모로 신경 쓰였다.

“좀 괜찮냐”

굳이 답을 기대했던건 아니지만 그는 대꾸도 하지 않는다. 당장 어제까지만 해도 고열에 시달리며 살려달란 헛소리를 어물대더니 정신이 좀 들었다고 그새 샐쭉해진 모습이다.

돌아나서던 그의 뒷덜미를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불러세운다.

“..뭐?”

“아이스크림 좀 사주세요”




부하 직원을 시키려다 굳이 직접 근방의 호텔에서 최고급 아이스크림을 사다 바쳤다. 퉁퉁 부은 얼굴로 과포장 상태의 아이스크림을 황당하단 듯이 바라보던 그는 이내 포장을 풀기 시작한다. 정말 기운이 없긴한지 풀러내는 손이 헛도는게 영 어설프다. 결국 브래들리는 손수 포장을 풀어낸 뒤 그의 손에 친히 스푼까지 쥐어주고 만다.

눈치를 보며 조심조심 아이스크림을 퍼먹는 모습.
부은 목을 어떻게든 가라앉혀보려 아이스크림을 찾은 것 같은데, 넘기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아보인다. 그래도 시간을 들여 그는 꾸역꾸역 한 통을 전부 비워냈다. 그제서야 배탈이라도 나는건 아닐까 신경이 쓰이는게 정말이지..보통 성가신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얼마 후 비척이며 다시 침대로 돌아가는 피라미.
무거운 눈꺼풀이 스르륵 감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른 숨을 내쉬기 시작한다. 멍진 목 주변으로는 여전히 그 날의 흔적들이 가득하다. 창백한 혈색 때문인지 푸르스름한 자국들이 더욱 도드라지는 게 좋지 않다. 회복이 꽤 길어질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미친 새끼..!”

목덜미를 들추려던 손이 순식간에 내쳐졌다. 꼴에 운동신경은 있는지 제법 매섭게 손을 쳐낸 뒤 떠내는 눈이 사납다.

“너한테까지 벌려줄 생각 없으니까 꺼져.”

“하…”

저가 정신을 놓고 있던 사이, 제 몸을 살폈던 게 누군지도 모르는 성 싶었다. 오해를 하든 말든 그냥 넘기면 될 일이건만 이상하리만치 기분이 나빴다.

알 수 없는 얼굴로 가만히 대치하고 있는 그에게 피라미는 곧 물꼬가 터진 듯 가시 돋힌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대체 어디까지하나 지켜볼 요량으로 브래들리는 그저 그가 하는대로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이걸 어떻게 고분고분하게 만들지..?


기운도 없는게 금세 지쳐 나가 떨어질 줄 알았건만 어째 점점 화를 키워나가는 모습이다. 슬슬 한계점에 도달할 때 쯤, 상황은 눈 깜짝할 사이에 반전되었다. 침대 옆의 스탠드가 날아오던 순간, 크리스의 양 손목은 순식간에 뒤로 꺾어졌고 다리 사이론 거칠게 무릎이 쑤셔져 들어왔다. 그는 제대로 된 반항도 하지 못한 채 한순간에 엎어져 다리를 벌린 굴욕적인 자세가 되고 만다. 뒤늦게 있는 힘껏 발버둥을 쳐보지만 며칠을 내리 앓은 몸엔 힘이 들어갈 리 없다.

위에서부터 샅샅이 몸을 훑어내는 눈빛. 그 시선이 너무도 싫어 크리스는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끝까지 오무리려 안간힘을 쓰던 다리가 억지로 벌려지고, 음부까지 꼼꼼하게 살펴지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브래들리의 손을 벗어날 수 있었다.

“나는.”

“…….”

“누구처럼 떡대 취향은 아니라.”

“………..”

“거저로 준대도 쳐먹을 생각 없으니까 이거나 쳐 바르던가”

분한 얼굴로 숨을 몰아쉬는 그의 앞에 연고 하나가 던져진다. 그러고는 큰 소리와 함께 닫히는 문.

문 앞에 서있던 말단의 눈이 살쾡이에게 긁힌 듯한 브래들리의 턱을 보고 놀라울 정도로 커졌다.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그는 턱 밑을 스윽 닦아낸 뒤 맨션을 나섰다.









그가 상품으로의 가치를 회복하는 데에는 정확히 3주가 걸렸다. 점점 희미해져가던 멍이 완전히 가신걸 확인한 날, 브래들리는 상부에 보고를 넣었다. 곧장 잡힐 줄 알았던 예약은 의외로 소식이 없다.

그 날 이후 더욱 경직될 줄 알았던 둘 사이는 오히려 편해졌다. 애초부터 둘이 쌓아올린 관계 따위가 있었겠냐만은, 적어도 자기를 그런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는 걸 인식한건지 브래들리 앞에서는 묘하게 풀어진 모습을 보였다. 그가 나타날 때마다 화들짝 놀라는건 여전했지만 상태 체크를 위해 몸을 내보여야 할 때나 무언가 부탁할 일이 생겼을 때, 크리스는 오직 브래들리만을 찾았다. 어디선가 이름까지 주워듣고 와서는 저를 콕 찝어 찾아대는 탓에 그도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고가 있던 날로부터 대략 한 달 정도가 지났을 무렵, 브래들리는 오랜만에 새로운 예약건을 전달 받았다. 그리고 왜 그간 새로운 예약이 잡히지 않았는지도 알게 되었다. 크리스의 몸값이 크게 올랐단다.
그저 정말로 몸이 아파 예약이 취소되었던 것인데, 몸값 관리 차원에서 비싸게 굴기 시작한다 생각한 고객들이 곧바로 더 많은 금액을 불러제꼈다고 했다. 상부도 어디까지 몸값이 치솟나 지켜볼 겸 예약을 받지 않았던 것 같았다.

새롭게 전달 받은 건은 당장 오늘 저녁이었다. 맨션을 지키고 있을 말단을 통해 미리 언질을 주라고 한 뒤, 브래들리는 오후 느즈막한 시간에 크리스를 찾았다.




이름을 부르자 안에서는 답이 없다.
일단 알겠다고는 했다는데 그 뒤로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를 않는단다. 손잡이를 비틀자 다행히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창가에 서서 애꿎은 손톱을 물어뜯고 있는 모습. 주사기를 들고 들어오던 그와 마주친 두 눈에서 순식간에 빛이 사라져갔다.

파리해진 얼굴을 앉혀놓고 브래들리는 손을 내밀었다. 곧 마지못해 딸려오는 하얀 팔. 브래들리는 주사를 놓으려다 손 끝을 타고 전해져오는 떨림에 잠시 손을 거뒀다. 몸이 심하게 떨려오고 있었다.

“진정하고.”

직전에 그렇게 당한 전적이 있으니 이러는게 무리는 아니다.

“..못하겠어요…”

잡힌 팔을 비틀어 스윽 빼보려 하지만 그는 놔 줄 생각이 없다.

팔을 사이에 놓고 대치는 계속되었다. 어느덧 꽉 부여잡은 팔목엔 붉은 손자국이 남았다. 시간은 점점 흐르고 다른 수를 써야하나 고민이 들기 시작할 때 쯤, 뻗대던 팔에 드디어 힘이 빠진다. 고개를 푹 숙인채 잠잠히 팔을 내어주고 있는 틈을 놓치지 않고 브래들리는 바늘을 찔렀다.

고개를 들어올려 마주친 눈은 벌개진지 오래다. 그렁그렁한 두 눈 가득 원망이 가득했다.

왜..이래?

차라리 전처럼 기세좋게 달려들던 시절이 나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





부두를 향하는 버스는 언제나 한산하다.
버스에 오를 때만 해도 드문드문 자리를 지키고 있던 승객들은 종점에 가까워지며 그마저도 하나 둘 사라져갔다. 어느샌가 단 한명의 승객을 태우고 내달리는 버스. 차창 너머 나른하게 쏟아져 내려오는 햇살에, 크리스는 무거운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이리저리 고개를 꾸벅인다.

덜컹. 소리와 함께 버스가 부두 초입의 문턱을 넘으며 멈춰섰다. 기계음과 함께 굳게 닫혔던 문이 열리고 곧바로 버스 안을 파고드는 찬 기운에 크리스는 몸을 떨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익숙한 풍경. 하마터면 정거장을 지나칠 뻔 했던 상황에, 그는 후다닥 버스를 나섰다.

이제 고작 한 발을 뗐을 뿐인데 난데없는 시린 바람이 얼굴을 강타해온다. 반사적으로 몸이 움츠러들어 눌러쓴 모자를 조금 더 눌러도 써보고 동여맨 목도리에 몸을 푸욱 묻어도 보지만 바닷 바람은 도저히 당해낼 재간이 없다.

그냥 돌아갈까..

나름 서프라이즈랍시고 찾아온건데 그를 놀래키기도 전에 먼저 얼어죽을 것만 같은 상황에 슬슬 꾀가 나기 시작한다. 그렇게 부두 앞 정거장에 앉아 고민하기를 수분째, 운좋게도 그를 알아본 누군가가 그를 사무실로 이끌었다.







뒷정리를 하고 있던 중 급하게 연락이 왔다.
크리스가 찾아왔단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브래들리는 동료에게 양해를 구한 뒤 서둘러 작업장을 나섰다.

아직 날이 추운데..

그새 감기라도 걸린 것은 아닐까 발걸음이 빨라진다.

사실 요 며칠 크리스의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아이들과 마주쳤던 날 이후, 밤마다 악몽을 꾸더니 깨어 있을 때의 기분도 계속 저기압 상태에 머물렀다. 벽화를 그리는 일도 잠시 중단된 상태다. 며칠새 눈에 띄게 줄은 식사량에,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슬쩍 이야기를 꺼내본게 결국 다툼이 되어 그 후론 단 한마디도 말을 섞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느닷없이 부두에 찾아왔다니..
혹여 무슨 일이라도 생긴건 아닐까 브래들리는 발걸음에 더욱 박차를 가해본다.




사무실 문을 열자마자 눈에 띄는 익숙한 금발 곱슬.
난로 앞 소파에 쪼그려 앉아 이리저리 눈만 굴리고 있던 얼굴이 그의 등장과 함께 환해진다.

“무슨 일이야?”

걱정 가득한 얼굴로 이리저리 그를 살피기 바쁜 브래들리에 크리스 역시 덩달아 당황한 기색이다.

“어…그게..점심이나 같이 먹을까 싶어서”

“어..?”

걱정과는 달리 아주 단순했던 사유에 그는 그제서야 마음을 놓는다. 조금 멋쩍은 얼굴로 다시 이리저리 눈을 굴리기 시작하는 크리스.

“아니이..계속 집에만 있는 것도 답답하고..”

말을 이으려다 보는 눈이 있어서인지 고개를 푹 숙여버리는 게 따로 할 말이 있어 보인다.

“가자”

브래들리는 망설임 없이 크리스의 손을 잡았다.



사무실 앞에서 그물을 뒤적이고 있던 마이클과 눈이 맞았다. 크리스가 여전히 자기를 어려워하는 걸 알고 자리를 피해준게 분명하다. 고마워요.라는 말을 입모양으로 대신하는 브래들리에게 그는 어깨를 으쓱해보인다.

그냥 떠나려다 굳이 뒤를 돌아와 그에게 꾸벅 인사를 하는 크리스.

“감..사합니다.”

크리스는 여전히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그래도 브래들리의 손을 꼬옥 잡은 채 어떻게든 버텨내려는 걸 보니, 보는 이의 감정도 울렁인다.


브래들리의 아픈 혹.
마이클은 크리스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덩치와는 다르게 물러터지기만한 이 아이가 브래들리를 그 세계로부터 벗어나게 만들리라곤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결국 서로만을 붙들고 어떻게든 살아나가려는게 짠하면서도 예뻤다.
빨리 좀 더 건강해지면 좋겠건만…

이 이상 감상에 젖는 것은 주책일 것 같아 마이클은 괜히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크리스의 머리를 마구잡이로 헤집었다. 바로 누굴 강아지로 아냐며 브래들리는 제 품으로 쏘옥 그를 감추기 바쁘다.

덩치 큰 두 놈이 딱 붙어 부둥대는 걸 보고 있자니 어쩐지 속이 간지러워 자꾸만 피식 웃음이 새어나오려는 걸 마이클은 가까스로 참아내었다.

때마침 타이밍 좋게 시내행 버스가 도착하고 둘은 손을 흔들며 버스에 몸을 실었다.









어정쩡한 시간이어서인지 식당엔 사람이 없다.
아무데나 앉아도 좋다는 서버의 말에 둘은 볕이 잘 드는, 조금은 구석의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막 일을 마치고 와 배고프다며 바로 16온스 스테이크를 짚어내는 브래들리와는 달리, 크리스는 메뉴판을 정독하며 한참을 고민한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결국 서버의 도움을 받아 주문을 마치고 나니 드디어 둘만의 시간이다.

오랜만의 햇살 때문이었을까, 아침에 눈을 떴을 때부터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 어제 그렇게 싸우고도 일어나자마자 브래들리가 보고 싶었던 걸 보니 저가 얼마나 그를 아끼고 또 의지하고 있는지를 다시금 알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그가 맞았다.
언제까지고 과거에 우울하게 매여있을 수는 없는 터였다. 이제는 우리 둘만 보자고, 앞만 보고 살자고 제 입으로 이야기 해놓고 지키지 못한 것이 부끄러웠다.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어 하지 말았어야 했을 말까지 해가며 바닥을 보였다는 생각에 다시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 말을 뱉은 순간 브래들리의 표정이..그 얼굴이 도저히 머리를 떠나질 않는다. 브래들리의 말대로 조만간 상담 치료를 받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복잡한 속으로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그를 가만히 바라봐주고 있는 브래들리의 얼굴. 한 때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어 시리기만 하던 저 파란 눈이 이제는 가장 따뜻한 색이 된지 오래다. 매번 그가 흔들릴 때면 나는 여기 있다고. 항상 네 옆에 있다고 붙잡아주는 그에게 대체 무슨 말을 쏟아낸 건지..또 다시 자꾸만 자책하게 된다.



불안함에 이리저리 흔들리던 크리스의 눈동자가 드디어 제 자리를 찾고 저의 눈을 마주쳐온다. 조금 겸연쩍은 얼굴로 슬그머니 손을 잡아오는 걸 보니, 며칠 바닥을 파고들며 힘들어 하던게 조금은 나아진 듯 싶다. 할 말이 있지만 선뜻 운을 떼지 못하는 듯한 그를 브래들리는 차분히 기다려본다.

미안하다는 말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한참을 망설이던 크리스가 드디어 운을 떼려던 순간 눈치없이 전화벨이 울렸다. 수신거부를 해도 다시금 걸려오는 전화에 크리스는 통화를 먼저 하는게 좋겠다며 좁혀왔던 자리를 물렀다. 발신인을 보니 썩 유쾌한 내용의 통화는 아닐 것 같아 브래들리도 금방 돌아오겠다며 자리를 피했다.

브래들리가 자리를 비운 사이,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면 좋을까 말을 고르고 있던 크리스의 앞에 낯선 그림자가 드리웠다.

뿌꾸프랫


마이클=사장인데 루커옹 생각하면서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