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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17 04:58
전 저만의 행복을 찾았어요. 엄마도 그러길 바라요.
안녕 엄마. 어디 계신지 몰라서 날씨 얘기로 서두를 꺼낼 수도 없네요. 어디에 있든 잘 지내고 계실 거라 생각해요. 내가 있는 곳은 눈이 내리고 있어요. 어릴 적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얼마나 부럽던지 결국 눈이 펑펑 내리는 곳으로 왔어요. 아카데미에 입학했을 때 알고 보니 저만 눈사람을 만들어본적이 없더라구요. 오죽하면 제 남편이 스무 살 넘어서 눈사람 만들고는 그렇게 신나서 웃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했다니까요. 아참 이 말을 아직 안 했네요.
엄마 저 결혼했어요. 아카데미로 가는 셔틀에서부터 지금까지 늘 내 옆자리를 지켜준 사람이에요. 겉보기엔 무서워 보일 수도 있지만 아주 다정하고 좋은 사람이에요. 나의 모든 결핍을 채워주고 조건 없이 아낌없이 사랑해준 사람이에요. 제가 눈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말씀드렸나요. 눈 오는 날에 결혼하려고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남들은 이해가 안 가겠지만, 전 정말 오랫동안 그날을 기다렸어요. 어릴 적 무료함에 온 집안을 탐험하다 다락방에서 발견한 오래된 DVD의 한 장면이 저를 이렇게 만들었어요. 눈 오는 크리스마스에 온 가족이 모여 트리를 꾸미고 선물을 주고받으며 다 같이 웃고 떠드는 아주 짧은 장면이 항상 내 마음속 어딘가 남아있었거든요.
그래서 뭔가 마음 한구석 어디에 그런 기대를 품고 살았던 거 같아요. 언젠가는 나도 눈 오는 날 저렇게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행복하고 싶다고. 그래서 청첩장에 날짜도 안 적었어요. 그리고 옷장에 예복을 걸어두고는 날마다 창밖을 보면서 눈이 오길 기다렸죠. 남편이 보다 못해서 인공눈이라도 뿌릴 기세였는데 그날 새벽에 눈이 내리더라고요. 그렇게 소복이 쌓인 하얀 눈을 밟으면서 결혼했어요.
그거 아세요. 이제 내가 아빠보다 나이가 더 많아요. 한평생을 나 혼자 유령과 경쟁하며 살았는데 이제야 아빠가 얼마나 어렸는지 알겠어요. 얼마나 대단했는지도요. 아빠는 저보다 어린데도 결혼에 형과 저를 가지고 부함장이란 직함을 달았잖아요. 그리고 가족을 뒤에 두고 자신을 희생하셨죠. 아, 뒤에 두고 떠났다고 원망하는 게 아니에요. 전혀요. 그저 얼마나 대단했는지 말하고 싶었어요. 아실지 모르겠지만 저도 한번 크루들을 살리기 위해 희생한 적이 있어요. 온 몸의 세포가 죽어가는 것을 생생하게 느끼며 앉아서 아빠 생각을 했어요. 내가 지켜야 하는 가족이 없는데도 이렇게 무서운데 아빠는 그날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냥 그런 생각을 했어요.
제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해서 속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그럴 분이 아니란 걸 알지만, 혹시나 해서요. 일부러 안 한 게 아니란 걸 아셨으면 좋겠어요. 음 마지막으로 변경한 주소지가 10년도 넘었더라고요. 거긴 학교가 들어섰더라고요. 제 남편이 엄마를 초대하려고 얼마나 열심히 찾아다녔는지 아시면 깜짝 놀라실걸요. 결국 실패하긴 했지만, 그 마음만이라도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 그래도 아주 외지에 계신 게 아니라면 제 결혼식을 방송에서 보셨을 거라 생각해요. 그 제임스 커크의 결혼이라 규모가 좀 컸거든요. 혹시 그것도 보셨어요? 결혼식 맨 앞자리에 한자리 비워둔 거요. 초대도 안 한 주제에 자리는 비우다니 웃기죠. 근데 사람 일 모르는 거니까요. 아 이 표현은 제 함선의 아주 유능한 조타수 히카루 술루라는 친구가 자주 쓰는 말이에요. 마음에 들어서 저도 자주 쓰다 보니 익숙해졌나 봐요.
지금 여긴 새벽이고 밖엔 눈이 내려요. 나는 거실에서 난로를 켜놓고 편지를 쓰는 중이에요. 다들 홀로그램 난로를 쓰는데 저는 불꽃 튀는 진짜 난로가 좋아요. 이것도 그 옛날 DVD의 영향 일지도요. 남들 다 자는 시간에 왜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쓰고 있냐고 물으면 뭐라고 답해야 할까요. 그냥 저도 이제 저만의 가정이 생겼고 결혼이란 의식을 치름으로써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진짜 어른이 됐는데도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어른이 필요해서겠죠. 내 인생에 그나마 괜찮은 어른은 엄마랑 파이크 함장님뿐이었는데 함장님은 돌아가셨으니까 이제 나에게 남은 어른은 엄마뿐이라서요.
엄마 난 아빠의 나이를 넘고서야 아빠의 그림자를 벗어났어요. 그리고 제 가정을 꾸렸고 행복해요. 엄마도 어디 계시든 아빠의 그림자를 벗어나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1년 내내 온화한 곳에서 그저 흘러가는 구름에서도 흔들리는 꽃들에서도 지저귀는 새들의 속삭임에서도 이제는 조지의 모습을 보지 않으시길 바라요.
아 남편이 깬 거 같아요 내가 옆에 없으면 금방 알아차리거든요. 이제 가봐야 할 거 같아요. 이만 줄일게요.
12.25 짐
ㅈㅇㅈㅇ 본즈커크 크리스마스에 올리려고 했는데 한참 늦었지만...
안녕 엄마. 어디 계신지 몰라서 날씨 얘기로 서두를 꺼낼 수도 없네요. 어디에 있든 잘 지내고 계실 거라 생각해요. 내가 있는 곳은 눈이 내리고 있어요. 어릴 적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얼마나 부럽던지 결국 눈이 펑펑 내리는 곳으로 왔어요. 아카데미에 입학했을 때 알고 보니 저만 눈사람을 만들어본적이 없더라구요. 오죽하면 제 남편이 스무 살 넘어서 눈사람 만들고는 그렇게 신나서 웃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했다니까요. 아참 이 말을 아직 안 했네요.
엄마 저 결혼했어요. 아카데미로 가는 셔틀에서부터 지금까지 늘 내 옆자리를 지켜준 사람이에요. 겉보기엔 무서워 보일 수도 있지만 아주 다정하고 좋은 사람이에요. 나의 모든 결핍을 채워주고 조건 없이 아낌없이 사랑해준 사람이에요. 제가 눈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말씀드렸나요. 눈 오는 날에 결혼하려고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남들은 이해가 안 가겠지만, 전 정말 오랫동안 그날을 기다렸어요. 어릴 적 무료함에 온 집안을 탐험하다 다락방에서 발견한 오래된 DVD의 한 장면이 저를 이렇게 만들었어요. 눈 오는 크리스마스에 온 가족이 모여 트리를 꾸미고 선물을 주고받으며 다 같이 웃고 떠드는 아주 짧은 장면이 항상 내 마음속 어딘가 남아있었거든요.
그래서 뭔가 마음 한구석 어디에 그런 기대를 품고 살았던 거 같아요. 언젠가는 나도 눈 오는 날 저렇게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행복하고 싶다고. 그래서 청첩장에 날짜도 안 적었어요. 그리고 옷장에 예복을 걸어두고는 날마다 창밖을 보면서 눈이 오길 기다렸죠. 남편이 보다 못해서 인공눈이라도 뿌릴 기세였는데 그날 새벽에 눈이 내리더라고요. 그렇게 소복이 쌓인 하얀 눈을 밟으면서 결혼했어요.
그거 아세요. 이제 내가 아빠보다 나이가 더 많아요. 한평생을 나 혼자 유령과 경쟁하며 살았는데 이제야 아빠가 얼마나 어렸는지 알겠어요. 얼마나 대단했는지도요. 아빠는 저보다 어린데도 결혼에 형과 저를 가지고 부함장이란 직함을 달았잖아요. 그리고 가족을 뒤에 두고 자신을 희생하셨죠. 아, 뒤에 두고 떠났다고 원망하는 게 아니에요. 전혀요. 그저 얼마나 대단했는지 말하고 싶었어요. 아실지 모르겠지만 저도 한번 크루들을 살리기 위해 희생한 적이 있어요. 온 몸의 세포가 죽어가는 것을 생생하게 느끼며 앉아서 아빠 생각을 했어요. 내가 지켜야 하는 가족이 없는데도 이렇게 무서운데 아빠는 그날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냥 그런 생각을 했어요.
제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해서 속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그럴 분이 아니란 걸 알지만, 혹시나 해서요. 일부러 안 한 게 아니란 걸 아셨으면 좋겠어요. 음 마지막으로 변경한 주소지가 10년도 넘었더라고요. 거긴 학교가 들어섰더라고요. 제 남편이 엄마를 초대하려고 얼마나 열심히 찾아다녔는지 아시면 깜짝 놀라실걸요. 결국 실패하긴 했지만, 그 마음만이라도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 그래도 아주 외지에 계신 게 아니라면 제 결혼식을 방송에서 보셨을 거라 생각해요. 그 제임스 커크의 결혼이라 규모가 좀 컸거든요. 혹시 그것도 보셨어요? 결혼식 맨 앞자리에 한자리 비워둔 거요. 초대도 안 한 주제에 자리는 비우다니 웃기죠. 근데 사람 일 모르는 거니까요. 아 이 표현은 제 함선의 아주 유능한 조타수 히카루 술루라는 친구가 자주 쓰는 말이에요. 마음에 들어서 저도 자주 쓰다 보니 익숙해졌나 봐요.
지금 여긴 새벽이고 밖엔 눈이 내려요. 나는 거실에서 난로를 켜놓고 편지를 쓰는 중이에요. 다들 홀로그램 난로를 쓰는데 저는 불꽃 튀는 진짜 난로가 좋아요. 이것도 그 옛날 DVD의 영향 일지도요. 남들 다 자는 시간에 왜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쓰고 있냐고 물으면 뭐라고 답해야 할까요. 그냥 저도 이제 저만의 가정이 생겼고 결혼이란 의식을 치름으로써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진짜 어른이 됐는데도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어른이 필요해서겠죠. 내 인생에 그나마 괜찮은 어른은 엄마랑 파이크 함장님뿐이었는데 함장님은 돌아가셨으니까 이제 나에게 남은 어른은 엄마뿐이라서요.
엄마 난 아빠의 나이를 넘고서야 아빠의 그림자를 벗어났어요. 그리고 제 가정을 꾸렸고 행복해요. 엄마도 어디 계시든 아빠의 그림자를 벗어나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1년 내내 온화한 곳에서 그저 흘러가는 구름에서도 흔들리는 꽃들에서도 지저귀는 새들의 속삭임에서도 이제는 조지의 모습을 보지 않으시길 바라요.
아 남편이 깬 거 같아요 내가 옆에 없으면 금방 알아차리거든요. 이제 가봐야 할 거 같아요. 이만 줄일게요.
12.25 짐
ㅈㅇㅈㅇ 본즈커크 크리스마스에 올리려고 했는데 한참 늦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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