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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7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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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그 남자라니, 누구?"
"1층 엘리베이터에서 시향지 주던 사람, 기억 안 나?"
"아, 그 잘생긴 애? 몰라, 어디 갔는지."
수 없이 많은 고객이 백화점을 찾는 만큼 매장에서 일하는 직원도 적지 않았다. 그 중 이름을 알기 전에 떠나는 자들이 태반이었다.
스테판이 선물 받은 머플러를 두르고 일터로 돌아왔을 때, 남자는 사라진 후였다. 그의 행방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문 앞에서 몇 번이나 망설였던 레코드 숍도 찾았다. 스테판이 가게 주인에게 남자의 용모를 설명했을 때, 그는 단숨에 남자를 기억하고는 충격적인 말을 꺼냈다.
"그 녀석? 그만 둔 지 며칠 됐어. 좀 더 일찍 오지 그랬어?"
그 해 날이 풀릴 때까지 타탄체크 머플러는 스테판의 목을 장식했다. 봄이 찾아오자 그는 머플러를 상자속 깊숙한 곳에 보관했다. 뒤이어 선수 유니폼이 상자를 채웠고 스테판은 그 물건들을 찾지 않았다.
기억 속으로 지워버렸다는 말이 정확했다.
16.
다이너에 들어 선 남자는 소문의 그 주인공이 틀림없었다. 브렌다의 말대로 그는 키가 크고 늘씬한 체구에 근사한 턱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예상과 달리 모델이나 배우가 아니었다.
'닉 리버스잖아.'
아무리 유행에 뒤처진 스테판이라고 한들 온 미디어를 장악한 록스타를 모를 수 없었다. 3년 전 데뷔하자마자 인기 반열에 오른 그였다. 노래를 발매하는 족족 히트곡이 되었고 특유의 무대 퍼포먼스로 모두의 사랑을 받는 그 록스타.
남자는 스스럼없이 바에 앉았다. 맨얼굴을 드러내는데 거리낌 없는 그를 대신해 스테판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각선 방향의 테이블의 카를로스는 아직 잠에 취해 있었다.
남자가 발랄하게 인사했다.
"안녕, 나 기억하지?"
인삿말은 자신감이 넘쳐 보이면서 동시에 이해하기 힘들었다.
기억하냐니, 어떤 걸? 그가 TV만 틀면 나오는 연예인이라는 사실? 아니면...
"얘기는 들었죠."
스테판이 커피 주전자를 들어 한 잔 가득 커피를 따랐다.
"1달러 50센트예요."
"뭐가?"
"갓 내린 커피는 1달러 50센트면 돼요. 20달러 짜리가 아니라."
남자는 눈에 띄게 당황한 눈치였다. 스테판은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가 연한 무채색이라는 걸 발견했다.
남자가 주저하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기억 안 나?"
이번엔 스테판이 입술을 달싹였다. 대체 어떤 대답을 원하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라디오가 스테판을 대신해 답했다. 오티스 레딩의 'Let me come on home'이 흘러나오던 라디오는 곧바로 닉 리버스의 히트곡을 연달아 들려주었다.
스테판이 작은 크기의 기계를 가리켰다.
"지금 그쪽 노래 나오는 거 아녜요?"
"아...... 그래, 그렇구나."
남자가 황급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좀 이상한 가정이었지만, 그는 마치 스테판이 그를 '록스타 닉 리버스'라고 알고 있어서 실망한 것 같았다.
뉴욕 도심도 아닌 뉴저지의 외곽 동네, 자정에 가까운 시간 장사도 잘 안되는 다이너. 남자와 같은 대스타가 이 곳에 방문한 이유는 하나 밖에 없을 터였다. 도망쳐 몸을 숨기고 잠시나마 쉬고 싶은 욕망을 발산하기 위해서겠지.
"커피가 식어요."
스테판은 위로하는 법을 잘 몰랐다.
여기서 스테판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남자는 조그마한 위안을 느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차리지 못해도 좋았다. 이 아이는 그때의 그 모습 그대로였고, 우연히 그를 만날 수 있었던 건 더없는 행운이었다.
남자는 스테판을 바라보며 커피를 한 모금 홀짝였다. 빙긋 웃어 보이자 스테판의 눈가가 살풋 들썩였다.
"난 닉이야."
"그래요."
"닉 리버스, ...너는?"
스테판은 아무런 의심 없이 통성명을 했다.
"스테판이요, 스테판 조르제비치."
"스테판이라..."
닉이 그의 이름을 입 안에 여러 번 굴렸다. 달콤한 사탕 같았다.
"좋은 이름이야."
17.
그랬다. 닉은 자신의 첫사랑 이름도 알지 못한 채 그를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18.
한사코 거절했지만 닉은 커피 값으로 20달러를 지불했다.
"줄 거면 커피 값만 주세요!"
스테판의 목소리가 커지자 닉이 재빨리 바지 주머니를 털어냈다. 구겨진 100달러 지폐 여러 장이 튀어나왔다.
"이건 어때?"
"장난해요? 거슬러줄 잔돈도 없어요."
스테판은 닉이 처음 내민 지폐만 받고 나머지 돈을 거슬러 주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닉이 가게 밖을 나서는 게 더 빨랐다.
"잠시만요!"
"괜찮아, 네 이름을 알려준 값이라고 생각해."
웃기는 소리였다.
"리버스 씨!"
스테판이 소리쳤지만 그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어쩐지 닉이 또 찾아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19.
이른 아침부터 마틴은 깜짝 놀랐다. 다인실이 즐비한 호텔 복도에서 스테판과 마주친 것이다. 스테판은 수면 시간을 철저히 지킨 듯 아주 개운한 얼굴이었다.
마틴이 황급히 스테판의 뒤를 쫓았다.
"닉은 어디에 두고?"
"방에 있겠죠?"
마틴이 경악했다.
"네 방에 있단 얘기야? 다른 스태프들은 어쩌게?"
스테판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리버스 씨는 당연히 본인 방에 있겠죠."
그의 말대로였다. 허겁지겁 달려온 스위트룸에서 닉은 홀로 덩그러니 누워 있었다.
테이블 위의 두 와인잔, 디저트를 보건데 지난밤 스테판이 닉과 같이 있었던 건 확실했다. 그런데도 그들의 관계는 큰 진전이 없어 보였다.
상황이 난감하게 돌아갔다. 마틴은 턱을 쓸어 넘기며 어제 일을 떠올렸다.
"아직까진 짝사랑!" 이라는 닉의 폭탄 발언을 함구하라고 단단히 으름장을 놓았으나 소용 없었다. 닉 리버스가 스태프 한 명을 좋아하고 있다는 말은 짧은 새에 퍼져버렸기 때문이다.
루머 속 짝사랑 상대에 대한 설명은 턱없이 부족했지만 모두들 단숨에 스테판을 지목했다. 뒤풀이 내내 그들은 자신의 보스를 낚아챈 그에 대해 떠들어댔다.
"그럴 줄 알았어, 예쁘게 생겼잖아."
"닉이 직접 데려왔단 말도 있다며?"
"걔도 난놈이야, 닉 리버스가 꼬셔도 꿈쩍 안 하다니."
"그래서 사귀는 거야, 아닌 거야?"
"짝사랑이래! 보스가 짝사랑!"
소문의 주인공이 된 스테판은 짐정리를 마치고 버스에 짐을 싣는 중이었다. 다음 공연이 있을 애틀랜타로 떠나려면 한시가 급했다.
"어이, 스테판!"
스테판을 알아본 스태프들이 한 번씩 그를 불렀다. 그가 눈짓으로 인사하면 자기들끼리 키득키득 웃으며 지나쳤다. 그 이유를 알지 못하는 스테판은 얼굴을 찌푸렸다.
"오늘따라 인기가 많네?"
음향 담당의 조이 캠벨이 그에게 다가왔다. 히죽히죽 웃는 캠벨은 스테판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지 아는 듯했다.
스테판이 톡 쏘아 붙였다.
"뒤풀이에서 제 욕이라도 했나 봐요?"
"따져보자면 그건 아니고..."
캠벨이 저 멀리 걸어 오는 닉 리버스를 보며 말했다.
"우리 보스의 짝사랑 상대에 대해서 말했지."
닉은 스태프들의 인사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다가 스테판을 보고는 화색이 되었다.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그에게 스테판은 애매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닉, 어제 공연 좋았어요."
캠벨의 인사에 닉이 적당히 맞장구쳤다.
"아아, 고마워."
"공연장이 소리가 울리는 편인데도 훌륭하던걸요."
"뭐, 당연한 거지."
닉은 연신 옆에 있는 스테판을 훔쳐보기 바빴다. 그러곤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스테피는 어땠어?"
고 말하면서 완전히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예?"
"내 공연. 말 안 해줬잖아."
"좋았어요."
"그래?"
누가 봐도 스테판에게만 관심 있는 얼굴이었다. 점차 그들 주변으로 스태프들이 서성였다.
"잠은 잘 잤어? 어제 그렇게 가버려서 섭섭했어."
스테판이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주변 사람들이 대화에 귀 기울이는 게 뻔히 보였다. 반대로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게 익숙한 닉은 스테판의 불편함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스테판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나랑 같이 이동할래?"
"...같이요?"
투어는 이동날 스태프들을 위한 대형 버스 세 대, 음향 장비를 싣는 트럭 두 대 그리고 닉 혼자 이동하는 리무진으로 전국을 누비고 있었다.
닉은 어젯밤 자신의 고백이 효과가 있길 바라는 눈빛이었다. 그 추측이 맞았다. 평소라면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아뇨, 제가 알아서 갈게요." 라며 대꾸했겠지만 스테판은 왜인지 그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지 못했다.
"생각 좀 해볼게요."
"정말이지?"
"예, 잠시만..."
닉이 미련 가득한 모습으로 멀어지자마자 다른 스태프들이 그의 빈자리를 채웠다.
"소문이 사실이었어?"
"닉이 언제부터 좋아했대?"
"둘이 사귀기로 한 거야?"
스테판이 처음 투어에 합류했을 때 들었던 말들이 다시 터져 나왔다.
시답잖은 업무를 맡은 주제에 가장 총애받고 닉 리버스가 대놓고 아끼는 스테판을 의심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렇지만 스테판은 닉의 뒤꽁무니만 쫓던 녀석들과 달랐다. 그는 매번 닉과 선을 긋고 일에 매진했으며 실력도 좋았다.
단순히 닉의 귀여움을 받는 일개 스태프라는 평가가 생길 즈음, 사고가 터진 것이다.
술기운이 점점 들자, 스태프들 입에서 입으로 대기실에 있었던 일이 퍼졌다. 천하의 닉 리버스가 스테판 조르제비치를 좋아한다. 그의 개인 매니저가 단속하기까지 했으니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소문은 조금씩 과장되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한 살이 덧붙여지기도 했다.
예를 들자면 폭탄 발언의 장소에 있었던 헤어드레서 짐 그랜트는 "닉에게 스테판은 첫사랑이자 짝사랑이래."라고 말했지만, 두 테이블 떨어져 앉은 드라이버 잭 윌슨은 "그 자그마한 녀석이 보스의 첫사랑과 닮아 좋다는데?"고 전해 들었다.
조명 오퍼레이터인 키미 윌리스가 "그 녀석 오늘 안 온 이유가 뭔지 알아? 닉이랑 지금 데이트 중이래!"라며 사실과 무척 가까운 루머를 폭로했을 때, 흥분으로 가득 찬 분위기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됐다.
스테판은 모두의 앞에서 몇 주 전과 똑같은 대답을 했다.
"아녜요, 전 리버스 씨와 그런 사이가 아니라니까요!"
하지만 이번엔 그 누구도 스테판의 말을 믿지 않았다.
캠벨은 쩔쩔매며 해명하는 스테판을 관찰하면서, 이 아이의 순진하고 솔직한 모습에 닉이 한 눈에 반해 쫓아다니는 게 아닐까라는 꽤 그럴듯한 추측을 했으나 발설하지 않았다. 이 상황이 무척 재밌었기 때문이었다.
의상 담당 로라 해리슨이 물었다.
"그럼 어제 왜 뒤풀이 안 나왔어? 닉과 데이트한 거 아냐?"
"같이 있긴 했지만 데이트는 아녔어요."
"그게 데이트 아냐?"
"아니, 저는..."
스테판이 울상지었다.
물론 객관적으로 데이트 같은 분위기이긴 했다. 멋진 야경과 와인, 혼자서 닉 리버스를 독차지할 수 있었던 순간. 그래도 스테판은 어제는 데이트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따져보자면 그건 어제가 아니라 몇 주전, 다이너에서 그를 만났을 때였다.
"아무튼 아니에요!"
이러다 이동 시간 내내 취조당할 지 몰랐다. 휴스턴에서 애틀랜타까지 꼬박 10시간이 걸렸다.
스테판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사람들을 등에 지고 닉을 향해 달려갔다.
20.
한낮의 햇살이 벌써 따갑게 느껴졌다. 마지막 기말고사를 마친 스테판의 온 몸에 힘이 쭉 빠졌다. 내리쬐는 여름 햇빛을 따라 잠시 이대로 있고 싶었다.
건물 외부 계단에 걸터앉아 캠퍼스를 누비는 학생들을 바라봤다. 시선은 어느새 담벼락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포스터로 향했다. 몇 학생들이 은밀하게 포스터를 가져가기도 했다.
스테판은 자신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동기를 붙잡았다.
"저건 무슨 포스터야?"
"닉 리버스 전미 투어, 몰라?"
신이 난 일레인이 답했다. LA에서 시작할 공연은 약 두 달가량 전국을 누비고는 바로 여기 뉴욕에서 끝날 예정이었다.
"첫 공연이 언젠데?"
"아마 보름 뒤일거야. 조르제비치 네가 이런 거에 관심 있는 줄 몰랐네."
"그냥 궁금해서."
스테판은 어젯밤 다이너에 불쑥 나타났던 그 남자를 떠올렸다. 지금 쯤이면 정반대의 서부에서 투어 준비로 바빠야 할 사람이 이 뉴저지 촌구석에 돌아다니다니.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21.
닉 리버스는 누군가를 찾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스테판의 일탈에 비해 조금은 어두운 구석이 있기 때문에 길게 설명하지 않으려 한다.
22.
자정이 되자 불청객은 어김없이 등장했다.
"안녕, 스테판."
닉은 모자를 살짝 들어 기어코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었다. 접시를 정리하던 스테판이 놀라 달려 나오자, 웃어 보이는 여유까지 있었다.
스테판이 손을 뻗어 그의 모자를 푹 눌러쓰게 도왔다. 다행히 가게 안의 손님들은 그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왜 또 온 거예요?"
"나도 손님이잖아."
스테판은 당장이라도 공연 준비를 해야 하지 않냐고 묻고 싶었다. 그는 입을 앙다물고 닉을 가장 구석자리 테이블로 안내했다.
"너무 매몰차게 대하는 거 아냐?"
닉은 어제처럼 바에 앉아 스테판과 수다라도 떨고 싶은 눈치였다. 그가 툴툴대며 싫은 기색을 냈지만 스테판은 커피 한 잔을 주었다.
"돈은 오늘 안 받아요."
"왜?"
"어제 충분히 지불했잖아요."
닉의 눈썹이 축 늘어졌다.
"내 사랑이 그렇게 싫어?"
그 목소리가 조금 어리광처럼 들려서 스테판이 실소를 터트렸다.
"재미없어요."
"진심이야."
"재미없다고요."
닉이 조용히 커피를 마시는 동안, 손님은 한둘씩 가게를 떠났고 주방의 엉클 지미는 코를 골며 수마에 빠졌다. 스테판은 잠자코 커피를 홀짝이는 닉을 멀리서 지켜보다가 주방으로 사라졌다.
"배고프지 않아요?"
스테판은 와플 한 접시를 내밀며 찾아왔다. 스프링클이 뿌려진 생크림과 함께였다.
닉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나한테 주는 거야?"
"돈 받고 파는 건 아녜요."
"고마워."
돌아서는 그를 닉이 급하게 불러 세웠다.
"스테판!"
닉이 웃으며 속삭였다.
"같이 먹자, 혼자는 싫어."
새벽 한 시 즈음 머리를 맞대고 나누어 먹는 와플 맛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음식을 공유한 것만으로 스테판은 닉과 굉장히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닉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지 그에게 살갑게 말을 걸었다.
"학교 다니는 거야?"
"오늘이 이번 학기 마지막 날이었어요."
"여기 근처?"
스테판이 고개를 설렁설렁 끄덕였다. 대학교 근처에 집과 파트타임을 구할 수 있었다니, 다시 생각해도 운이 좋았다.
스테판이 모자란 생크림을 다시 채워왔을 때 닉이 말했다.
"그런데 여긴 뉴욕 중심지와는 멀지 않아?"
남은 와플을 이등분으로 나누던 스테판이 의아해했다.
"내가 거길 왜 가요?"
"가본 적 없어? 엠파이어 스테이트라던가?"
스테판은 닉이 굉장히 돈이 많고 잘생긴 록스타이지만 꽤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이따금 이런 식으로 이해 안 가는 말을 했지만 말이다.
"그 근처에 살긴 했어요, 예전에. 학교도 일도 거기서 잠깐 했다가 이 동네로 왔죠."
다 옛날 일이었다. 18살의 스테판은 마천루가 즐비한 도심을 쏘다녔지만 그 때의 삶이란 그야말로 악몽에 가까웠다. 항상 긴장된 상태로 하루하루를 영위했으니 남들처럼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같은 명소를 갈 여유도 없었다.
스테판은 지금이 좋았다.
'그런데... 뭔갈 잊어버린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닉이 남은 와플 조각을 먹으며 실실거렸다.
"뭐가 그렇게 웃겨요?"
"나도 뉴욕에 살았거든."
스테판에겐 그리 흥미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요?"
"그냥. 더 물어봐도 돼?"
"아뇨, 와플 다 먹었으니까 끝."
스테판이 잽싸게 빈 접시를 들고 일어났다.
23.
닉은 그 후로도 매일 다이너를 방문했다. 자정이 가까워질 시간이 되면 그는 당연하게 스테판을 찾았다.
이제 단골 한두 명과 주방장 지미가 그를 알아볼 지경까지 이르렀다. 닉이 아직 정체를 들키지 않은 게 놀라웠다. 그리고 슬프게도 스테판은 그가 올 시간부터 가게 문을 바라보는 버릇이 생겼다.
닉이 연달아 가게를 찾은 지 일주일째 되는 날이었다. 주방장 지미가 일찍 가게를 비운 틈을 타 스테판이 주방에서 간단한 요리를 했다. 오늘의 야식은 스파게티였다.
요리가 거의 완성될 즈음, 닉이 주방에 모습을 드러냈다.
"스테피!"
너무나도 당연하게 주방을 활보하는 그를 향해 스테판이 짜증을 냈다.
"여긴 들어오면 안돼요."
"왜?"
이유는 생각해본 적 없었다.
"...뭐, 생각해보니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닉이 해사하게 웃으며 빈 접시들을 싱크대에 와르르 쏟았다. 닉은 스테판을 위해 자주 일을 도왔는데 크게 도움 되는 편은 아니었다.
"마지막 손님도 돌아갔어. 이제 우리 뿐이야."
"돈은 챙겼어요?"
"그럼, 봐봐. 이 사람들도 25달러나 냈어."
"그 테이블은 그만큼 먹었잖아요. 리버스 씨처럼 커피 한 잔이 아니고요."
야식은 그대로 주방에서 이루어졌다. 마주 보고 서서 베이컨을 잔뜩 넣은 스파게티를 나눠 먹었다. 스테판은 이러다 이 행위에 중독이라도 될까봐 걱정이었다.
"좋아하는 스포츠는 뭐야?"
"또 그 소리."
스테판이 키득거렸다.
일주일 째 야식을 공유하면서 그들은 게임을 이어 나갔다. 거창한 건 아니었고 단순히 상대방의 질문에 대답하는 정도였다.
"풋볼을 제일 좋아했죠."
"지금은?"
"흥미 없어요. 리버스 씨는요?"
"난 서핑."
무척 어울렸다. 스테판은 그가 파도를 타고 서핑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닉이 스테판의 웃음에 힘입어 다른 질문을 건넸다.
"다른 일도 해봤어?"
"별거 다 했죠, 지금이 제일 편하긴 한데,"
스테판이 텅 빈 가게를 슬쩍 확인했다.
"돈은 제일 안 모여요. 리버스 씨는요?"
"나?"
"응, 다른 일 해봤어요? 지금의... 일 하기 전에?"
닉이 조금 비아냥거렸다.
"오, 그럼. 사람들은 내가 처음부터 가수인 줄 알더라고."
첫만남 이후 닉이 처음으로 자신의 직업을 입 밖에 올린 순간이었다. 스테판은 의도적으로 그가 유명한 가수라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는데 닉 또한 같았다.
그는 스테판이 자신을 불쑥 찾아오는 손님처럼 취급하길 바랐고 스테판도 그게 더 마음이 갔다. 물어보고 싶은 건 많았다. 왜 이 동네에 머무는지, 왜 가게를 계속 찾아오는지, 언제까지 내 곁에 있어 줄 건지.
사치스러운 욕심이었다. 스테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24.
리무진은 끝내줬다. 번쩍번쩍 윤이 나는 차체에 스테판은 먼저 기가 죽었지만 더 기가 막힌 건 내부였다. 누워도 충분한 크기의 좌석은 푹신하고 기분 좋은 향까지 났으며, 한쪽에 샴페인이 준비되어 있었다.
스테판은 한낱 스태프에 불과한 자신이 이 호사를 누려도 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닉이 자연스레 그를 에스코트하며 차 안으로 이끌었다.
"항상 이렇게 이동했어요?"
"가끔은 전용기도 타."
닉은 으스대기는커녕 무척 상냥하게 굴었지만 스테판은 그에게 거리감을 느꼈다. 역시 닉은 스테판과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
"편하게 앉아. 하고 싶은 거라도 있어?"
"뭘 할 수 있는데요?"
"글쎄, 뭐든 맞춰줄게."
닉은 스테판의 옆자리를 꿰찬 것만으로도 부족한지 몸을 들썩였다. 그의 뺨은 보기 좋게 붉었고, 눈은 기대감에 반짝였으며 스테판을 향한 감정을 힘껏 드러내는 그 모습이 무척 아름다웠다.
여전히 믿기 힘들었지만, 그래, 그는 스테판을 좋아하고 있었다. 전혀 닿을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한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고백했다니.
스테판이 침을 꿀꺽 삼켰다.
닉이 주는 샴페인 잔을 받아 들고 스테판은 천천히 차 내부를 둘러보았다. 특이한 건 운전석이 칸막이로 가려져 아예 보이지 않는 점이었다.
스테판이 묻지 않아도 닉이 먼저 설명했다.
"멋지지? 따로 호출하는 게 아니면 막혀있어."
"우리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몰라요?"
닉이 활발하게 말했다.
"응! 크게 소리 질러도 잘 모르던데?'
스테판은 그 말에 자신이 옳은 선택을 했는지 혼란에 빠졌다.
둘은 소소하게 데이트한 전적이 있음
아이스매브
닉스테판
[Code: c5b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