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8978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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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4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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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982년 그래미 등 여러 시상식에서 최우수 신인상을 수상한 닉 리버스는 WNBC News의 간판 토크쇼에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제 커리어, 꿈, 그리고 사랑까지. 제 전부를 얻었으니까요. 온갖 상품을 파는 백화점에서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니, 멋지지 않나요?"
닉 리버스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의 미소에 방청객은 물론 포커 페이스로 유명한 진행자 팻 시몬스마저 웃음을 터트렸다.
객석에서 오랫동안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고 닉은 그 기쁨을 아낌없이 즐겼다.
"일이라도 한 건가요?"
"어린 시절이 다 거기에 있다고 할게요."
"그렇다면 이번에 발표한 곡 'Are you lonesome tonight?'은 일종의 자전적인 이야기군요?"
"그렇게 들렸나요?"
"가사에 이런 말이 있죠."
시몬스가 큐 카드를 읽었다.
"'다시 돌아와 줄래요, 오늘 밤 메이시스에서 쇼핑하며 날 사랑해줘요(Will you come back again, shop at Macy's and love me tonight)'란 구절이요. 인상 깊은데요."
대답을 뜸 들이던 닉이 결국 미소와 함께 긍정했다.
"어쩌면 그럴지도요."
9.
무대 위 닉 리버스를 향해 수천명의 관객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의 노래에 감격해 흐느끼는 팬들도 적지 않았다.
공연이 하이라이트로 치달을수록 닉의 얼굴은 생기가 넘쳤다. 그는 팬들의 눈물과 사랑을 거부하지 않고 기꺼이 먹어 해치웠다. 그를 향한 탄성이 커질수록 닉은 점점 더 빛났다.
무대 뒤 백스테이지에서 매니저 마틴은 이 낯설고도 익숙한 광경을 주시했다. 언제봐도 대단한 장면이었다.
마틴이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스테판을 슬쩍 찔러보았다.
"어때?"
"잘 부르네요."
담백한 평가였다. 그가 좀 더 자세히 말해보라는 제스처를 취하자 스테판이 어깨를 으쓱였다.
"프로페셔널하고, 체력도 좋고. 사흘을 연달아 공연하는데 목 관리도 무척 잘한 것 같아요."
"그게 다야?"
"이 정도면 충분하잖아요?"
이런 대답을 원한 게 아니었다.
저급한 비유였지만 닉 리버스는 마성의 남자였다. 남녀노소 그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단 몇 분만이라도 닉의 공연을 보면 사람들은 저 수많은 관중과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단번에 닉에게 빠져 그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내줄 것처럼 굴었다.
그런데 스테판은 조금 달랐다. 닉을 싫어하는 건 아니었지만 귀찮아 했고, 마치 정말로 일만 하기 위해 투어에 합류한 사람 같았다.
"이제 와서 묻기엔 좀 웃기지만 말야."
마틴이 망설이다가 물었다.
"이 일을 왜 하겠다고 한 거야?"
예상하는 답안이 몇 개 있었다. 투어에 처음 합류하는 스태프 대부분이 하는 소리이기도 했다.
'닉 리버스잖아요! 아주 잠시라도 근처에 있고 싶어요!'
'혹시 몰라요? 이러다가 눈맞고 닉과 사귈 수도 있잖아요.'
하지만 스테판은 눈 깜짝 않고 예상 외의 말을 꺼냈다.
"리버스 씨가 돈 많이 주는 일이 있다고 해서요. 리버스 씨도 같이 일하는 줄은 몰랐지만."
10.
스테판은 1학년을 채 마치기도 전에 대학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학교 장학 매니저는 봄이 되자 스테판에게 경기 출장 수를 늘려야 한다고 통보했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 학년부터 장학금을 장담할 수 없었다. 운 좋게도 날이 풀리면서 스테판은 몇 경기를 뛰었으나 이미 그의 마음은 다른 곳으로 기울었다.
뉴저지의 한 대학이 그에게 성적 장학금을 제안했다. 부지런하게 전공 공부에 매진한 결과였다. 새로운 대학은 도심과 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상관 없었다.
스테판은 고향에 있는 아버지와 형에게 걱정하지 말라며 전화했다.
"어차피 선수 생활은 오래 못 할 거라 생각했어."
저렴한 월세로 방을 구했고 새로 면접 본 파트타임 잡도 페이가 괜찮았다.
스테판은 최근 생활비를 벌기 위해 매일 저녁부터 새벽까지 다이너에서 일했다. 외곽진 곳에 위치한 가게는 손님이 적었고, 남은 시간을 공부로 활용할 수도 있었다.
그의 21번째 여름은 그렇게 시작했다. 졸업반을 앞둔 그는 여름 방학 동안 어떻게 지내야 할까 저울질 했다.
다행히 스테판은 전공인 전자공학에 재능이 있었다. 지난 학기 한 제조 회사에서의 인턴도 나쁘지 않았다. 그의 담당 교수는 연달아 인턴십에 참여하라고 밀어붙였지만 스테판의 지갑 사정은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 파트타임을 그만두고 인턴에 매진한다면 당장 다음 학기부터 문제였다.
하루하루 이어지는 고민이 지루했다.
그나마 이 지겨운 일상에도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며칠 전부터 요리 담당인 엉클 지미가 고질적인 어깨 통증으로 자리를 비운 탓이었다.
손님 응대와 서빙을 담당했던 스테판은 덕분에 분수에 맞지 않는 주방장 노릇을 했다. 단골 손님의 음식을 내놓기만 하면 충분했으나 스테판은 그릴 앞에서 일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땀을 훔쳐 닦으며 주방을 정리할 때였다.
"어머나!"
스테판을 대신해 밤늦게까지 서빙하는 브렌다가 작게 비명 질렀다. 벌써 세번째 였다. 며칠 째 그의 비명을 듣고 있자니 스테판은 괜한 궁금증이 일었다.
브렌다는 기분 좋은 얼굴로 팁을 자랑하고 있었다. 스테판이 주방에서 나오면서 말했다.
"또 그 남자예요?"
"그래! 참 돈도 많지."
토스트에 햄을 곁들여 먹던 단골 마크가 덧붙였다.
"멍청한 새끼야. 사내가 순 금전 감각이 없어서야!"
"그 사람이 도박을 하는 것도 아닌데 뭐 어때요?"
브렌다가 늙은 마크를 무시하며 20달러를 흔들어 보였다.
"20달러야, 스테판! 겨우 커피 한 잔에 말야!"
"참 이상한 사람이네."
주방에 콕 박혀 그를 본 적 없는 스테판과 허무맹랑한 팁을 이해하지 못하는 마크를 위해서 브렌다가 친절히 설명했다.
남자가 다이너를 찾은 건 바로 얼마 전부터였다. 자정을 막 넘길 무렵, 이 동네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남자가 다이너에 들어섰다.
그의 등장만으로 밤늦게 일하는 상황이 꾸벅꾸벅 졸던 브렌다는 벌떡 일어났다. 아니, 가게 안에 몇 안 되는 손님 모두가 그를 멍하니 바라봤다.
큰 키에 늘씬한 체구의 남자는 캡모자를 푹 눌러써 얼굴이 반쯤 가려졌지만 누가 봐도 미남이었다. 브렌다가 그의 외모를 묘사하며 재밌는 말을 덧붙였다.
"모델이나 배우 일거야. 가수도 어울리고."
"그 자식이 갑자기 노래라도 지껄였냐?"
마크가 낄낄댔다.
"그냥 느낌이 그렇다는 거예요, 마크!"
남자는 가장 구석의 테이블에 앉아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아주 사근사근한 목소리였다.
그는 커피를 마신 뒤 조용히 떠났고, 그의 부재를 알아차린 브렌다가 뒤늦게 테이블에 다가갔을 때 20달러 지폐 한 장만이 그를 반겼다.
남자는 그 후로 두 번 더 방문했다. 똑같은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주문하고 차고 넘치는 팁을 지불했다. 브렌다는 몇 번이나 그에게 말을 걸었지만 입이 무거운 남자였다.
"말수가 적으면 어때? 웨이트리스로 일하면서 이만큼 잘생기고 돈도 많은 손님은 처음인걸!"
"그래도 다음에 오면 말해봐요, 팁치고는 너무 많다고..."
"웃기는 소리!"
마크가 스테판을 꾸짖었다.
"저런 멍청이는 자주 오는 기회가 아냐."
"그럼요, 그럼요."
"아님 브렌다에게 반해서 저러는 걸지도 모르지."
브렌다가 크게 웃으며 마크의 빈 커피잔을 채워주었다.
스테판은 이름도 얼굴도 알 지 못하는 남자가 궁금해졌다. 무슨 사정이 있길래 낯선 동네에서 머무는 걸까? 조금 부럽기도 했다. 적어도 그는 지루한 일상을 훌쩍 벗어날만한 여유가 있었다.
금세 흥미를 잃어버린 스테판은 주방으로 되돌아갔다. 그릴 주변 기름때를 닦으면서 누군가를 잠시 떠올렸는데, 이내 잊어버렸다. 스테판 본인도 누구를 기억해냈는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11.
앵콜 무대가 이어지는 동안 스테판은 무대감독인 베스 메이어에게 붙잡혀 자신의 진로에 대해 설명했다.
"엔지니어가 되겠죠. 학기 중 인턴십이 있으면 파트타임은 그만둘거예요. 이번에 받을 페이면 숨통이 좀 트이거든요."
"졸업하고 어디서 일할 건데?"
"당연히 고향이요. 잘사는 동네가 아니라서 벌이는 시원치 않겠지만..."
멀리서 팬들의 함성이 들렸다. 공연이 완전히 막을 내린 것 같았다.
"그거 알아? 이 업계에서도 엔지니어 역할이 커지고 있어."
스테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꼭 제조 회사나 고향으로 돌아갈 이유가 없다는 말이야."
"그래도..."
"내가 보기엔 넌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게 적성에 맞아 보여."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스테판이 머뭇거렸다.
때마침 그의 등 뒤로 부산스러운 움직임이 느껴졌다. 무대에서 내려온 닉이 여러 사람에게 둘러쌓여 대기실로 향하는 중이었다. 닉은 후련해 보였지만 조금은 괴로운 것 같기도 했다.
닉이 스테판을 발견하자마자 손 키스를 날렸다.
"오늘 밤 잊지 마, 스테피!"
스테판은 곧장 메이어와 주변 사람들에게 해명했다.
"리버스 씨와 그런 사이 아녜요."
"아무 말도 안 했어."
"생각은 했잖아요, 그쵸?"
12.
스위트 룸에서 내려다 본 야경은 더없이 찬란했다. 어두운 밤하늘을 별들이 가득 수놓았고, 시선을 아래로 내리면 그보다 더 빛나는 네온사인과 가로등 그리고 각종 차량이 헤드라이트를 켠 채 도로를 채웠다.
창가에 몸을 기댄 스테판이 밤경치를 감상했다. 지난 3주 가량 투어를 따라다니면서 본 여러 도시는 저마다의 특색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닮은 점이 많이 있었다. 그 중 야경이야말로 가장 익숙하고 눈부신 공통점이었다.
"오래 기다린 건 아니지?"
닉이 샤워 가운을 걸치고 나타났다. 이마에 달라붙은 젖은 머리카락이 왜인지 신경에 거슬렸다.
창가 가까이에 놓인 테이블에는 고급스러운 와인과 디저트가 가득했다. 닉이 얼음통에서 와인 병을 꺼내 라벨을 체크했다.
"흠, 나쁘지 않네. 이리 와, 스테판."
스테판은 썩 내키지 않았지만 닉과 마주 앉았다.
지금쯤이면 그들을 제외한 모든 스태프들이 뒤풀이를 즐기고 있을 것이다. 스테판은 마틴이 오늘을 위해 술집 하나를 통째로 빌렸다는 걸 알았다. 스테판은 사람들에 섞여 차가운 맥주를 마시고 싶은 마음이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마틴이 그의 참석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닉이 스테판을 그의 방으로 초대했다는 얘기를 듣고만 것이다.
"오늘은 그 녀석이랑 같이 있어 줘."
"저 정말 리버스 씨와 그런 사이가..."
"데이트하라는 게 아니라 너무 취하지 않게 살펴달란 얘기야. 오버타임 페이도 쳐줄게."
"진심이세요?"
"룸서비스도 맘껏 시켜, 어차피 금전 감각 하나도 없는 놈이거든."
불편한 마음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단순히 닉의 말동무가 되어 주기 위해 남은 것치고는 분위기가 무척 데이트다웠다.
사실 스테판도 인정해야만 했다. 화이트 와인을 따르며 눈을 마주치는 닉은 부담스러울 만큼 잘생겼고, 이 데이트같은 상황이 그리 싫지 않았던 것이다.
처음 다이너에서 만났을 때부터 그는 스테판에게 호감을 드러냈다. 스테판과 너무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지만 닉은 마치 그에게 맞닿고 싶어 애쓰는 것 같았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스테판은 갈증이 일었다.
"맛이 어때?"
와인을 한 모금 마시자마자 닉이 재촉했다.
"잘 모르겠어요. 달콤해요, 그냥."
닉은 그 대답으로도 만족스러워했다.
"저녁 안 먹었지? 룸서비스 시키자."
닉이 선뜻 메뉴판을 가져와 음식을 줄줄 읊었다.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말해. 스테이크, 오. 양고기도 있대."
하지만 스테판은 그가 공연날 식사를 가볍게 하는 걸 떠올렸다.
"괜찮아요. 별로 배고프지 않아요."
닉의 한 쪽 눈썹이 올라갔다.
"디저트만 먹어도 돼요."
"배고프면 말해야 해."
"알겠어요."
"좋아, 그럼 이거 먹어 봐. 맛있을 것 같아."
스테판이 처음 보는 케이크를 조심스레 입에 넣었다. 달콤한 크림과 살구 향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베시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닉이 따라 웃었다.
"어때?"
"맛있어요, 크림은 무슨 맛인지 모르겠지만요."
스테판이 쥔 포크를 닉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닉이 포크에 묻은 크림을 핥았다.
"피스타치오야."
"그렇구나."
케이크를 몽땅 해치운 건 스테판이었지만 닉이 먼저 배부른 표정을 지었다. 그의 시선에 부끄러워진 스테판은 계획에 없던 말을 술술 꺼냈다.
"어렸을 때 엄마가 살구 케이크를 자주 만들어 주셨어요. 이렇게 근사한 모양은 아녔지만."
옛 기억을 끄집어내자 기분이 들떴다.
"네 식구가 식탁에 모여 앉아서 한 조각씩 먹었어요. 또 달라고 해도 항상 엄마는 남은 케이크를 다음날 주겠다고 했죠."
"그렇게 맛있었어?"
"무척이요, 그럼 그 순간부터 간식 시간을 기다려요. 시계를 확인하면서 엄마가 제 이름을 부를 때까지 계속 기다리는 거예요."
닉이 소리 내 웃었다.
"처음이야."
"뭐가요?"
"네가 먼저 네 얘기를 꺼내는 게 처음이라고."
스테판은 깜짝 놀랐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닉은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투정 부렸다.
"다른 사람에겐 잘만 털어놓으면서. 방금 전에도 그랬잖아, 메이어랑... 아냐?"
"그게 들렸어요?"
닉이 장난스레 말했다.
"넘겨짚은거야. 사실인가 보네."
"별 거 아녔어요."
"무슨 얘기였는데?"
"그냥, 재미없는 거요. 학업이나 취직 같은."
"나도 재미없는 얘기 좋아해."
닉의 말은 스테판을 다시 한번 혼란에 빠뜨렸다. 이따금 그에게 어떤 말을 해야할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닉 리버스는 스테판과 전혀 다른 세상의 사람이었다. 메이크업을 다 지우고 가운 하나만 걸친 모습조차 저 야경보다 화려한 남자였다.
그도 스테판과 같은 고민을 해봤을까? 평범하게 미래를 걱정하고 지겨운 일상에 벗어나고 싶어 한 적 있을까? 스테판의 시답잖은 걱정거리가 재미없진 않을까? 그러다 이 출처를 알지 못하는 호감을 잃어버리진 않을까, ... 그런 두려움이 생겼다.
스테판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만약에 리버스 씨가 이렇게 유명하지 않았다면..."
"좋아했을 거야?"
그 순간 언제나 반짝일 줄 알았던 닉의 눈이 그늘졌다. 그 눈빛이 낯익었다.
"설마..."
스테판이 침을 꿀꺽 삼키고 가까스로 말했다.
"정말로 절 좋아하는 거예요?"
닉이 팔을 쭉 뻗어 손을 내밀었다.
"호기심 같은 게 아니라?"
"그런 것 같아."
스테판은 무의식적으로 그와 손을 잡았다. 닉이 웃었다.
"그래, 널 좋아하고 있어."
13.
"닉 리버스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긴 할까요? 그리고 모두의 사랑을 받는 그에게 비밀스러운 과거가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MTV 로고가 달린 마이크를 쥐고 리포터인 마이클 로빈스가 흥분해 말했다.
영상은 닉 리버스의 학창 시절 사진이 한 장, 두 장 넘어갔다. 학교 친구들과 나란히 서 있는 사진, 교실에서 익살스런 표정으로 카메라를 바라보는 사진, 학사모를 쓰고 졸업식에 참여한 사진 등등.
사진이 넘어가는 동안 로빈슨의 내레이션이 더해졌다.
"집요한 취재에도 저희가 구한 그의 과거 사진은 이게 답니다. 어린 닉 리버스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그의 부모는요? 어떤 환경에서 자랐을까요?"
닉의 첫 번째 싱글 앨범을 작업한 트레버 손이 인터뷰에 응했다.
"타고난 남자예요. 처음부터 그랬어요, 잘생기고 꾸밀 줄 알고. 사람들이 자기에게 뭘 원하는질 아는 녀석이에요."
"닉을 처음 만났을 때가 언제죠?"
"뉴욕의 한 레코드 숍이요. 노래를 잘 부르는 애가 있다고 소개받았죠."
"어디서 소개를 받았나요? 익명의 백만장자로부터?"
프로듀서가 콧방귀를 뀌었다.
"가게 주인한테요, 닉이 거기서 일했거든요."
화면이 바뀌고 닉과 몇 달간 교제했던 모델 젠 아노드가 등장했다. 아노드는 줄담배를 피며 대답했다.
"뉴욕이 고향이라던데? 부모님 행방은 모르고."
"소문에는 부유한 집안 자제라던데요? 백화점을 경영한다는데."
"사귈 때 닉과 쇼핑을 많이 하긴 했지."
"노드스트롬? 아니면 삭스?"
아노드가 정정했다.
"보통 블루밍데일즈로 갔어."
다시 한 번 화면이 바뀌고 닉 리버스의 개인 매니저라는 마틴이 나타났다. 그는 최근 닉에 대한 갖가지 소문은 루머에 불과하다며 리포터의 질문을 가볍게 일축했다.
"닉은 평범하게 자랐습니다. 위탁 가정이지만 충분히 사랑받았어요."
"왜 그런 루머가 퍼졌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도 모릅니다."
이제 영상은 공연장 입구부터 길게 줄을 선 팬들을 담았다. 모두 닉의 이름을 연호하며 조금이라도 빨리 그와 만나고 싶어 했다.
"과거요? 상관 안 해요. 이 사람은 록스타예요, 록스타 닉 리버스!"
"사실 진짜 왕자님일지도 모르죠."
"무대 위에서의 모습이 진짜예요. 다른 건 관심 없어요. 저는요, 닉이 계속 노래 부르고 춤추고 죽을 때까지 무대에 서서..."
14.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스테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TV 채널을 돌렸다. 리포터의 요란한 목소리가 사라지자 가게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스테판! 나 좀 도와줘!"
"알겠어요."
브렌다의 요청에 스테판은 황급히 달려갔다.
하루 종일 내린 폭우로 가게는 물웅덩이 투성이었다. 그들은 한참 바닥을 아무리 쓸고 닦으며 씨름했다.
"난 이만 가야겠어, 이러다 버스를 놓칠거야."
해가 저물자 브렌다가 가디건을 걸치며 퇴근 준비를 했다.
주방장 지미의 복귀로 다이너는 원래 궤도로 돌아왔다. 브렌다는 바쁘게 옷을 걸치면서도 일찍 가게를 나서는 게 기뻐 보이지 않았다.
"그 잘생긴 손님은 이제 네 몫이야."
"제 몫이라뇨?"
"독차지할 걸 생각하니 질투나는데."
혼자 남은 스테판이 가게를 말끔히 치워냈을 땐 이미 어둑어둑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손님이라곤 맥주를 연거푸 들이키고 잠든 카우보이 카를로스 뿐이었다.
곧 빗방울이 다시 한 두방울씩 떨어져 유리창에 무늬를 만들었다. 적막한 분위기 속 빗소리에 귀 기울이던 스테판이 뒤늦게 라디오 볼륨을 키웠다. 철 지난 유행곡과 최신곡이 번갈아 나왔다.
'I know I should've been good, I never thought that I would be double-crossin', baby cross my heart.'
스테판은 턱을 괴고 음악을 들었다.
'Oh, a little rockin' and a little wine. Got me thinkin' about a little Valentine.'
그 때 소문의 그 남자가 찾아왔다.
'What's a lonely boy to do?'
남자는 빗줄기에 젖은 모자를 벗으며 가게에 들어섰고, 스테판은 그가 천천히 미소 지으며 다가오는 모습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이제 외로운 소년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클리셰 으음~
아이스매브
닉스테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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