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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02 20:36
- …아가?
짙은 어둠이 내린 새벽, 제 머리칼을 쓰다듬는 부드러운 손길에 눈을 뜬 톰 카잔스키 주니어는 옅은 조명 아래 그늘진 어머니의 얼굴을 마주했어. 어린 아이는 무거운 눈꺼풀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지.
- 어디 가요 어머니?
- …
- 아버지는요?
잠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제 어머니를 따라나선 주니어는 평소와 달리 따르는 고용인 하나 없이 조용한 집안을 둘러보며 물었어. 그러다 제 손을 부서져라 그러쥔 어머니의 세 손가락이 잘게 떨리는 것을 느끼곤 조심스레 마주잡았지. 아닌 밤중에 눈을 떠 끌려나온 주니어는 심상치 않은 집안의 공기에 눈치를 보며 종알거렸어. 그러나 어머니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지.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나고 자란 저택에서 처음 보는 공간이었어. 뿌옇게 먼지가 낀 다락방 바닥과 천장의 두터운 유리문을 허름한 나무 계단이 잇고 있었지. 주니어는 앞장서 계단을 올라탄 어머니의 뒤를 따라 좁은 계단을 올랐어.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닳은 나무가 끼익끼익 새된 비명을 질러댔지.
계단을 올라 두터운 유리문을 넘어서니 차가운 새벽 바람이 얇은 옷감 사이로 파고 들었어. 추위에 부르르 떠는 주니어를 물끄럼 바라보던 어머니는 제 어깨를 감싼 숄을 작은 아들 몸 위로 둘러 감싸주었지. 철 모르는 아이는 그런 제 어머니의 표정 한번 읽지 못한 채 주위를 둘러보며 감탄했어. 어딘가의 꼭대기인지 모를 이 곳에 올라서니 드넓은 저택 부지가 한 눈에 들어왔지. 이따금 몰래 숨곤 했던 정원, 손님들이 묵곤 하는 별채,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장미 온실…
- …어머니?
클라우스는 주니어의 작은 손을 꼭 붙든 채 난간 끝으로 가까이 걸음을 옮겼어. 난간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작은 턱을 지나면 벼랑 끝 낭떠러지였지. 흘끔 그 끝을 내려다보던 주니어가 겁에 질려 바르르 떨었어. 어머니는 위험한 행동을 싫어하셔. 종종 들려오는 큰소리에는 경기하듯 떨기도 하시지. 그런 어머니가, 오늘은 이상했어. 좀처럼 그답지 않은 행동에 주니어가 얌전히 따르던 걸음을 멈추고 조심스레 어머니를 불렀지.
제 아이의 겁에 질린 부름에도, 무서우니 내려가자며 채근하는 작은 손에도 클라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그저 멍하니 허공만을, 저택 너머 밤을 집어삼킨 검은 숲만을 바라보고 있었지.
- 클라우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념에 아득해질 무렵 클라우스는 날카롭게 들려온 목소리에 뒤를 돌았어. 그리고 그 목소리의 주인을 물끄럼 바라보았지.
- 지금, 뭐하는 거요.
- …톰
- 이리 와요. 위험해.
- …
- 내가, 다 설명하겠소.
- …
- 클라우스!
톰 카잔스키 시니어는 날선 벼랑 끝에 선 제 아내와 아들의 뒷모습에 숨이 턱 막혀오는 것만 같았어. 모든 걸 내려놓은 듯 어둠을 향해 한 걸음씩 물러서는 클라우스와 아무것도 모른 채 제 어미의 손을 꼭 붙잡고 따르는 주니어. 모두 꿈에서조차 생각치 않은 끔찍한 광경이었지. 시니어는 좀처럼 터져나오지 않는 숨을 내던져 비명처럼 아내의 이름을 불렀어.
새벽에 가까운 늦은 밤, 서재에서 일을 마치고 부부 침실로 돌아온 시니어는 온기라곤 없이 차갑게 식어있는 침대를 발견했어. 이따금 잠투정을 부리는 주니어를 재우러 가곤 했던 클라우스였기에 오늘 밤 역시 그런 줄만 알았지. 하지만 협탁에 놓인 봉투를 의아한 얼굴을 열어본 시니어는 굳은 얼굴로 편지를 몇 번이고 회독하다가, 이내 아연한 얼굴로 침실을 벗어났어. 아내의 유려한 서체로 써내려진 글 한 줄 한 줄이 그에게 쐐기를 박았지.
시니어는 그제서야 깨달았어. 클라우스는 모든 걸 알고 있었던거야. 제 추악한 과거도, 차마 돌이킬 수 없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까지도.
.
클라우스는 독일에 있는 제 가족들의 죽음에 톰 카잔스키가 아주 깊이 연루되었다는 사실을 미국에 도착한 그 날 취조실에 들었어. 그럼에도 그에게 인질처럼 맡겨져야 한다는 것도. 종국에는 혼인해 그의 곁에 붙들려야 한다는 것도. 클라우스는 그 날부터 오늘만을 꿈꾸고 달려왔을거야. 카잔스키를 위한 수만가지의 죽음, 수만가지의 복수. 그리고 그 중 최악의 지옥을 향해서-. 그의 행복이 극점에 다다를 때까지. 자신을 태워가면서.
- 이리 오라니까! 제길, 클라우스!
- 당신 곁에 머물면서 항상 생각했어요.
- 제발… 이리 와요.
- 어떻게 해야 당신을 파멸시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당신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 그래요, 내려와서 얘기합시다. 홀몸도 아니잖소…
답지 않게 무너진 모습으로 초조함을 비치는 시니어의 모습에 클라우스가 작게 미소 지었어. 그의 곁에 머문 수년의 세월에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지. 그래, 톰 카잔스키 시니어는 지금 겁에 질려있었어. 사랑하는 제 아내가 당장이라도 저 벼랑 끝에 몸을 내던질까 무서워하고 있었지. 그 사실에 소름끼치게 만족감이 차올랐지.
- 그래서 생각했어요. 아, 내가 무너진 순간이 언제였나… 조각나다 못해 바스라진 순간이 언제였던가…
- 클라우스, 제발…
- 그 날이더군요. 내 눈 앞에서 사랑하는 가족들이 모두 죽어가던, 독일에서의 지옥 같던 그 날…
- …주니어가 무서워하잖소. 그만…
- 그래서 결심했지. 당신에게 내가 겪은 지옥을 선사하기로.
- 다… 다 설명할 수 있어. 내 말 들어요.
- 날 사랑하나요 토미?
- 클라우스 카잔스키!
- Kazansky ist nicht mein Name.
(카잔스키는 내 이름이 아니야.)
시니어가 한 발 다가오자 클라우스가 한 발 뒤로 물러섰어. 그 탓에 난간 끝을 향해 한 발 더 내딘 격이 됐지. 그 모습에 시니어는 걸음을 멈추고 굳은 얼굴로 제 아내를 불렀어. 비명과 같은 부름이었지.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자리에 발을 붙이고 제발 이만 돌아오라 속삭일 뿐이었음.
클라우스는 여상한 얼굴로 제 남편과 눈을 맞추며 뱃가죽 아래 거칠게 발을 구르는 아이를 달랬어. 만삭에 가깝게 부른 배는 산달을 앞두고 있었지. 동생이 태어나기 전에 이름을 짓자는 주니어의 고집에 다같이 모여 이름을 고른 게 불과 이틀 전 주말이었지. 얼마나 대단한 이름을 고르려는지 후보를 내놓는 족족 주니어가 거절하는 통에 아직 결정하지 못한 채였어.
시니어는 지독하게 저만을 빼다박은 주니어에게 이름마저 제 것을 주었으니, 둘째 아이만큼은 클라우스를 담길 바랐어. 그래서 제 아내의 이름을 따르고 싶었지. 오늘 아침 쉽사리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아내의 배를 감싸고 그 따스한 뺨 위로 입 맞추며 든 생각이었어. 내일 아침 식탁에 둘러앉아 하나뿐인 아내와 아들에게 의견을 구할 생각이었지. 니콜라스-. 제 어머니의 이름을 딴 그 이름을 주니어가 무척 마음에 들어할 거라고, 저는 그 곁에서 부스스 웃는 클라우스의 머리칼 위로 입 맞출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어. 한 여름 밤의 꿈 같던 몇 시간 전 말이야.
- 복수는 내게 해야지, 아이들이 아니라… 주니어는 잘못한 게 없잖소.
- …내 아이들 역시 잘못한 적 없었어요.
- 주니어도 당신 아들이야!
- …Er ist auch dein Sohn.
(…당신 아들이기도 하지.)
-그래서, 뱃속에 그 아이도 데려갈텐가?
제 부모의 처음 보는 모습에 겁에 질린 주니어가 턱을 떨며 클라우스의 다리를 꼭 끌어안았어. 타고나길 워낙에 순한 아이는 차마 큰 소리도 내지 못하고, 떼도 부리지 못하고 숨죽여 울었지. 클라우스는 제 다리에 매달린 아들의 눈물에 잠시 숨을 고르며 가만히 눈을 감았어.
그래, 날 담는 이 눈동자에 모든 걸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었어. 한없이 사랑을 퍼붓는 두 남자의 이 똑닮은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자면, 모든 걸 내려두고 싶었지. 평생을 죄의식과 속죄 속에서 버둥거리면서도…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어. 그리고 그런 날이면 제 파렴치한 속내에 역겨움을 참치 못하고 한참을 앓아누웠지. 그럴 때마다 제 뺨을 걱정스레 쓰다듬는 시니어의 손길에, 그 안쓰러움이 가득한 얼굴에 또다시 무너지는 것만 같았어.
행복, 행복을 꿈꾸다니… 감히 제 가족을 죽인 남자의 품에서, 그의 아이들을 낳고, 그들과 행복해지는 꿈을…
- 그만, 클라우스! 제발…
- 어머니…?
마침내 눈을 뜬 클라우스는 시니어의 부름은 들리지 않는다는 듯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옮겼어. 시니어의 간절한 애원에도 대답하지 않았지.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덩달아 걸음을 뗀 주니어는 마침내 저가 벼랑 끝에 다다랐음을 깨달았어. 아이는 겁에 질려 제 어미의 세 손가락을 동앗줄 마냥 붙들고 매달렸지. 작은 손이 식은땀으로 끈끈했어. 클라우스는 그런 제 작은 아들을 내려보고는 알 수 없는 얼굴로 울었지. 첫째 아이가 죽을 때 이만했던가… 겁에 질려 그렁그렁 차오른 눈물을 뚝뚝 흘리는 주니어를 가만히 바라보던 클라우스가 속삭이듯 입을 뗐어.
- 너에겐 미안할 뿐이야 아가.
- 우리 가요 어머니, 아버지께 가요.
울며 매달리는 아들의 뺨을 다정한 손길로 닦아준 클라우스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어. 달빛이 내려 새하얀 얼굴 위로 자리한 미소는… 마치 우는 것 같기도 했지. 잠시 머뭇거리나 싶던 클라우스는 결심한 듯 제 손을 단단히 붙든 작은 손을 조심스레 떼어냈어. 그리고 그 손등 위로 부드럽게 입맞추며 사랑을 속삭였지.
- 차라리 미워했으면 했단다. 너도, 네 동생도.
- …
- …때로는 사랑하는 게 더 아픈 법이지.
아이의 눈물진 얼굴을 가볍게 쓸어내린 클라우스는 이내 아무런 말도, 아무 표정도 없이 제 뺨을 스치는 새벽 바람을 느끼며 눈을 감았어. 그 표정이 너무도 편안했지. 그와 함께한 단 한 순간도 보지 못한 편안함 말이야. 그 얼굴을 마주한 시니어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어.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 클라우스는 미련 한 조각 없이 저택의 암흑 속으로 몸을 뉘였어.
- 클라우스!
그 찰나의 순간- 허공을 가르고 떨어지는 저를 부르는 시니어의 외침, 그 애달픈 부름에 클라우스는 떠올렸어. 그와 함께한 매순간을 말이야. 첫만남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애석하게도 죽음을 앞두고 스친 주마등은 그와의 추억으로만 가득했지. 그와 함께한 시간을 떠올리며 저는 웃고 있었어. 다른 것은 아무것도, 그 어떤 것도 떠오르지 않았지.
머릿 속으로 그린 수만가지의 시나리오 중 이런 것 없었어.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가 톰 카잔스키 시니어를 사랑하는 계획 따윈, 그와 사랑에 빠지는 전개 따윈 없었지. 그러니까 이건, 이 복수는 실패한 계획이야. 이 복수는 틀렸어. 다가오는 암흑 속에서 클라우스는 생각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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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담 아닌 후일담 보태자면.. 뱃속에 니콜라스 슈슈랑 같이 죽어서 시니어가 사랑하는 두 사람 마른 땅에 묻으며 무너지는 것도 좋고.. 죽은 슈슈에게서 니콜라스 정말 기적처럼 어렵게 태어나는데 시니어 바램대로 슈슈만 빼다박은 것도 좋다.. 한번 보지도 못한 엄마만 빼닮은 니콜라스 정말 카잔스키 집안 금지옥엽으로 크는데 점점 지독하게 슈슈 닮아가는 그 얼굴에 시니어 죄의식에 빠지겠지. 후회와 상념 속에 아이들 등지고 술잔 기울이는 날이 많아질 것 같다.. 그럼 아빠는 자길 싫어한다고 왜 엄마는 죽고 없냐고 자길 사랑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엉엉 우는 어린 니키 등 끌어안고 형이 있지 않냐고 달래는 애어른 주니어 보고싶다… 그런 날이면 동생 옆에 누워 아빠가 우릴 얼마나 사랑하는지, 엄마가 얼마나 이쁘고 멋진 사람이었는지 니콜라스 잠들 때까지 한참을 속삭여주겠지.. 그리곤 주니어 자기도 점차 잊혀지는, 흐려져가는 엄마 얼굴에 숨죽여 울 것 같음.. 그래봤자 주니어도 열세살, 니키 여섯살 이럴 듯..ㅠㅠ
아이스매브 시니어슈슈
ㄱㅇㅁㅇ? 연주 들으면서 썼음..
수정이 많아서 재업함 ㅈㅅㅈ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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