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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30 20:17
오타비문주의 날림주의

















회사에서의 하루는 참을 수 없이 느리게만 지나가기도, 쏜살같이 빠르게 지나가기도 한다. 불편한 수트 차림인 파이브는 모니터 앞에서 자꾸만 하품이 나오는 입을 틀어막았다. 오늘따라 온몸이 피곤에 절어있는 것 같았다. 왜 이렇게 잠이 안 깨지? 미지근하게 식은 커피를 들이켜도 정신이 또렷해지지 않았다. 파이브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벗어났다. 화장실에라도 들러야 졸음기가 가실 듯 했다.


“혹시 에스테틱 어디 다녀요?”
“...네?”


퇴근하려면 멀었네...그리 생각하며 멍하니 세면대에서 손을 씻던 중이었다. 파이브는 거울 안에서 마주친 눈을 빤히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궁금증을 가득 담은 눈동자가 자신을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피부가 너무 좋길래요.”
“아..감사해요.”
“정말이에요.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무슨 관리 받았어요?”


도저히 궁금해서 참을 수 없다는 말투를 한 이는 이제껏 스몰톡도 못해본 사이였다. 옆 부서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저번 파티에서 스치듯 본 기억이 났다. 같은 남자 오메가인 그가 건네는, 얼굴이 반질반질하다는 말에 파이브는 어색하게 웃었다. 저스틴과 동침한 다음이면 늘상 듣는 말들이었다. 오랜만이라 그런가...저스틴의 목소리가 나오게 된 기념(?)인지, 거울방을 처음 쓰게 된 기념(?)인지 길고 뜨겁기만 하던 전날밤의 정사를 복기해본다. 왠지 뒷목부터 정수리까지 열이 확 오르는 느낌이었다. 대답을 얼버무리다가 자리로 돌아온 파이브는 어젯밤, 귓가에 쉴새없이 속삭이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입에 담기 힘들만큼 추잡한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쏟아져나와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듯 했다. 그 탓에 느닷없이 커피가 담긴 테이크아웃컵을 바닥에 떨어트려버렸다.


“괜찮으세요?”


기계적으로 일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바닥에 볼품없이 엎어진 커피와 파이브에게 순서대로 꽂혔다. 죄송합니다, 하고 작게 중얼거리는데 신입사원을 벗어난 지 얼마 안된 한 알파가 쏜살같이 일어나 저를 도와주었다. 그와 함께 엉망이 된 바닥을 치우고 있자니 왠지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같이 일하던, 귀여운 브래들리 생각이 났다. 고맙다고 말하며 살풋 웃는데 눈이 마주치자 빨개진 귀끝이 보였다. 기껏해야 스물대여섯 먹었을까 싶은 그 알파는 정리를 마친 뒤 어색한 표정으로 자리에 다시 돌아갔다. 흔들리던 그 눈동자에 잠깐 멈칫한 파이브는 잘못 본 거겠지, 하고는 넘겨버렸다. 그러고는 제 자리와 가까운 창문을 약간 열었다. 사무실에서 온통 커피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그렇게 좋아요?”
“응...너무 좋아요. 행복해. 그리고 나, 당신한테 프로포즈 받았다고 여기저기 다 자랑했어요. 그렇게 안 나오던 목소리가 어떻게 반지를 받았다고 나오냐면서 다들 신기해하지 뭐예요?”


그렇게 무척이나 피곤한 상태로 집에 돌아온 파이브는 한시도 빠짐없이 제게 쏟아지는 말들에 잠시 현기증을 느꼈다. 목소리를 되찾은 게 기뻤는지 저스틴은 쉴새없이 입을 움직였다. 꼭 엄마가 오길 기다리던 어린 아이처럼. 파이브는 그런 저스틴이 귀여워서 피식 웃음이 터졌다.


"나 사실은..당신이 어제 기억을 보여줄 수 없다고 해서 별에별 상상을 다 했단 말이에요."
"아....그건.."


그러다 왜 손깍지를 하지 않았냐는 투정어린 물음에 할말이 없어졌다. 그런 제게 대답을 바라지 않았다는 듯이, 해사한 미소를 띄며 끌어안는 저스틴의 품에서는 분유냄새가 났다.


"왜 그랬는지 알아요. 어찌됐든 좋아...맞다, 아까 낮에 당신 반지도 내가 똑같은 걸로 주문했어요. 가져오려다가 바로 리사이징 맞겼는데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 그래도 크리스마스 전에는 나오겠지? 아, 그러고보니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트리를 큰 걸로 주문해서 꾸며놔야겠어요. 저번에 못했던 게 내내 아쉽더라고."
"......"
"..듣고 있어요?"
"응..다 들었어요. 나 그런데-"


옷 좀 갈아입을게요, 하고 파이브는 자리를 피했다. 사실 어제 그에게 손깍지로 기억을 보여줄 수 없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션과 같이 간 주얼리 상점에서 디에고는 어떤 마음으로 반지를 샀을지를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실을 저스틴에겐 절대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근데 디에고는 왜 나하고 그렇게되고도...반지를 남겨둔 걸까? 내가 돌아오길 바랬을까? 물론 지금은 그 반지를 버렸을테지만-


그래도 알파인데....베냐민이 이런 반지를 좋아할까?
당연히. 나라면 감동해서 울지도 모르겠어.


게다가 션에 대한 기억도 조금은 곤란했다. 프로포즈링을 같이 고르러가줄 수 있냐는 부탁에 흔쾌히 나와준 그는, 들고 나온 서류가방이 자신이 사준 선물이 아님에도 기분나쁜 내색은 커녕 회사는 어떤지 물었다.


사실 걱정했거든. 네가 퇴사 전에 꽤 힘들었다고 들어서. 지쳐보이기도 했고..
...맞아. 그랬지.
지금은 한결 편안해보이는 것 같아. 다행이야.
고마워.


파이브는 잠시 션의 그 푸른 눈을 떠올렸다. 지나치게 따스한 눈빛은 마주치고 있으면 민망해져서 괜히 딴 곳으로 시선을 돌리게했다. 설마 아직도 나한테 마음이 있는 건 아니겠지? 그래...그냥 애가 착해서 다정하게 구는 거겠지. 전에도 감시당하는 것 같다고 하니 필요할 때 쓰라며 플랫 카드키를 주었던 기억이 스쳐갔다. 그 때의 션은 전혀 새까만 속내를 숨기고 제게 손을 내밀었던 게 아니라, 그저 도와주려던 것이었다.


“우리 아가, 예쁜 니키. 마미가 옷 갈아입으셨네?”


잠옷으로 갈아입고 나오니 저스틴은 니콜을 품에 안고 분유를 먹이고 있었다. 파이브는 손을 뻗어 니콜의 조그만 볼을 만져보았다. 솜털이 뽀송뽀송한 아기는 너무나도 작고 귀여웠다.


예뻐라, 사랑스러운 니키..


품에 안은 아기는 누가 봐도 저와 꼭 닮아있었다. 새까만 머리칼과 눈동자만 빼고. 까르르 웃는 니콜을 바라보고있자니 갑자기 저와 같은 눈색을 한 데스티니 생각에 가슴이 시큰거렸다. 고작 2주에 한번, 1년에 두달도 안되는 시간밖에 함께 할 수 없는 아이가 마음에 걸렸다. 파이브는 니콜을 안은지 10분도 되지 않아 일이 바빠서 오래 도와주지 못하겠다는 핑계를 댄 채 방으로 숨어들었다.


“흡..흐...”


노트북을 펼치려다말고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해 숨죽여 울었다. 이젠 또렷이 마미, 라고 부르며 제게 안겨오던 데스티니가 이 순간 보고싶었다. 너무나도.


“데시, 이리 올래? 마미는 피곤하신가봐-”
“시러어-가-”
“그러지 말고 니키하고 놀자. 응?”
“저스틴 나가-”


그러나 마음과는 달리, 파이브는 정작 데스티니가 오는 주말엔 체력이 방전된 상태라 거의 누워 있었다. 파이브는 일어나라고 제 입술에 뽀뽀하는 데스티니의 행동에 웃었다. 그래도 몸이 천근만근같은 건 어쩔 수 없어 데스티니를 저스틴이 돌봐주는 소리를 들으며 잠에 빠져들려던 참이었다. 문득 헬레나까지 이 집에 오게된다면 어떻게 해야하나 걱정이 됐다.


“우리 사랑스러운 아가..왜 이렇게 잘생겼어?”


밤이 가까워져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파이브는 초콜렛과 과자를 먹으며 행복해하는 데스티니의 사진을 마구 찍었다. 첫 아이라 그런지, 제가 직접 돌본 적이 짧게나마 있어서인지 솔직히 헬레나와 니콜보다 데스티니에게 더 마음이 갔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내 아들...보물같은 데스티니를 꼭 안고 있자 가슴이 꽉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어차피 육아랑 관련도 없는 사람이 왜 이런 걸 듣나 몰라.”


언제 끝나나 싶었던 디에고와의 이혼은 점차 마무리 되어가고 있었다. 오늘도 저스틴은 니콜을 삼촌에게 맡겨두고 같이 워싱턴 법원으로 향했다. 법원에서 그와 같이 육아 세미나를 듣는 건 정말 고역이었다. 이혼하는 부부들 사이에서 파이브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죄다 새까만 옷을 입은 디에고의 옆에 앉아 계속해서 툴툴거렸다. 물론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그에 반해 디에고는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표정을 이따금 지으며 입을 다문 채였다.


“뭐하러 애들은 자기가 키운다고 데려가? 다른 사람한테 맡겨두고 아무것도 안하면서.”
“......”
"작년에도 나한테 독박육아 시켜놓고 너는 모르쇠로 일관했잖아. 우리 데시가 사라졌을 때도 내가 헛소리하는 사람처럼 무시하고-"


그러다가 세미나 중간에 쉬는 시간이 다가오던 중, 디에고가 까만 캡모자를 고쳐쓰며 한 마디 툭 던졌다.


“말같지도 않은 소리만 하는 건 여전하네.."
“뭐?”
“네가 무슨 독박육아를 했어?"


그게 무슨 독박육아냐고? 디에고는 클라우스와 부모님의 도움을 언급했고 파이브는 순간 할말이 없어졌다. 그렇긴 해도 내가 데스티니를 돌보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네 딸은 누구한테 맡겼어?"
"아...이젠 내 딸까지 신경써주는 거야? 참 고맙기도 해라."
"그게 아니라 또 베이비시터한테 맡겼다가 납치당했다고 호들갑떨까봐 그러지."


그리고 니콜은 저스틴의 삼촌에게 맡겼다는 말에 디에고의 반응이 참 가관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오메가 자식을 알파한테 맡기고 싶냐니? 진짜 미친 거 아냐?


"돌았나봐!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고 자라면 이딴 생각을 해?"
"미안한데 나 내 딸은 앞으로 커서도 너한테 못 보내겠다. 마약중독자도 모자라서 다른 알파까지-"


디에고는 오메가인 헬레나가 혹시나 무슨 일을 당할 줄 아냐고 말해 더 화를 돋구었다. 저런 정신나간 놈하고 육아세미나를 또 들어야한다니. 파이브는 저스틴을 만나서도 분개해서 씩씩댔다.


“근데...이건 뭐예요?”


하필 법원에 간 날이 파이브의 생일 즈음이었다. 둘이서 워싱턴에서 하루를 보낸 뒤, 뉴욕으로 돌아와 처음 그와 갔던 레스토랑-뉴트가 둘이서 밥을 먹고 오라고 시켰던 그 곳-에 가서 2시간 가까이 식사를 했다. 디저트가 마무리되려던 즈음, 저스틴이 서류봉투를 두 개 내밀었다. 하나는 말리부에 있는 저택을 증여한다는 내용이었고 다른 하나는 차량계약서였다. 이게 생일 선물이라니...


“곧 겨울이니까 걸어다니는 게 힘들것 같아서요. 내가 매일 데려다주면 좋겠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도 있을 것 같고..”


안 그래도 집에서 회사까지 걸어다닐만한 거리였지만 날이 추워지면 어쩌나 걱정이었다. 문득 파이브는 작년에 그에게 차를 선물받았다가 팔아버렸던 게 생각나 부끄러웠다. 저스틴도 그 생각이 났는지 이번 차는 몰래 팔면 안된다고 농담을 했다.


“치...놀리지 마요."
"그래서 매니저님, 운전 연수는 안 받아요?"


매니저님이라. 오랜만에 듣는 호칭에 파이브는 활짝 웃었다.


"아..운전연수요. 음...팀장님이 이번에도 해주실 거예요?”
“해줄 수는 있는데..."
"있는데?"
"그 전에 차에서 한번-”
"...베냐민! 바깥에서는 그런 소리 하지 마!"


꽥, 하고 소리치자 그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삼촌이 육아를 도와주어서인지 저스틴은 육아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보다 훨씬 안정된 모습이었다. 게다가 운동도 하니 사람이 생기가 있어보였다. 나도 운동이나 할까? 전보다 튼튼해진 그의 팔뚝을 만지작거리며 파이브는 중얼거렸고 저스틴은 그러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보세요?"
-안녕. 잘 지냈어?
"죄송한데 누구..세요?"
-아...나야. 션 오프라이.


그렇게 회사일에 육아, 대학원까지 바쁘지만 순조롭게 하루하루가 지나가던 중이었다. 이번 회사 사람들과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지내고 싶어 홀로 다니던 파이브는 모르는 번호로 전화를 받았다.


“션..?”
-혹시 바빠?
“아니. 괜찮아...무슨 일이야?"
-그냥....잘 지내나해서 한번 연락해봤어.
“난 잘 지내. 근데 번호가 바뀐 거야?”
-그건 아닌데..요즘 동료들이 휴대폰을 해킹당해서. 사적인 연락은 이 번호로 하고 있어.


해킹이라니? 그러고보니 요즘 휴대폰을 해킹당해 피해를 본 연예인들을 뉴스에서 본 것 같았다. 유명해지는 건 정말 피곤한 거구나. 파이브는 점심시간에 홀로 산책을 하며 그와 전화로 회사 이야기를 했다. 션은 말수가 적어서인지 10분도 되지 않아 통화가 끝났고, 어느새 쌀쌀해진 날씨를 느끼며 다시 사무실로 돌아오는데 뭔가 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저스틴 말고 다른 누군가와 편안하게 대화해본 것은 오랜만인 것 같았다. 그러고보니 나 정말 친구가 없네...클라우스와 바냐는 친하긴 했지만 현재 상황이 다르니 전부 터놓고 이야기할 수 없었다. 우정 아닌 다른 감정이 섞여있긴 했지만, 오랜 시간 친구로 지냈던 로버트는 오해가 생겨 연락조차 주고 받지 않고 있었고, 브래들리는 왠지 자신이 하는 말을 전부 저스틴한테 중계할 것 같았다.


“마미! 대디-”


어느덧 추수감사절이 다가와 부모님을 초대했다. 처음으로 이 넓은 펜트하우스에 온 두 사람은 꽤 감탄하고 있었는데, 니콜을 보더니 예쁘다고 하면서도 아쉬워했다.


“니키도 헬렌도 우리 아가 눈을 닮았으면 더 예뻤을텐데.”
"그러게 말이에요, 여보...우리 사랑스러운 아가하고 전부 닮아야했어."


헬레나까지 돌보기엔 역부족이라 데스티니만 데려온 파이브는 그 말에 웃었다. 그리고 파이브의 아버지는 말리부의 저택을 받게 된 이야기를 듣고 기뻐하더니 이 집도 공동명의로 돌리는 게 좋겠다고 속삭였다. 대디도 참...손사래를 친 파이브는 부모님이 문이 잠겨있는, 거울방에 대해 꽤나 궁금해하자 얼굴을 붉혔다.


“그나저나 저스틴...당신 삼촌은요? 그 분도 같이 계시면 좋을텐데요.”


솔직히 저스틴의 가족들이 많이 불편했지만, 내심 그의 삼촌은 괜찮다고 생각했다. 저스틴은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 듯 했지만. 뉴욕에 온 뒤로는 제게 불편함을 줄까봐서인지 얼굴 한번 제대로 본 적없는 삼촌도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초대하자고 하자 저스틴은 고개를 저었다.


“신경 안 써도 돼요. 여행갔어요.”
"갑자기요...? 어디로요?"
"몰라. 발이 닿는대로 아무데나 갈 거래요."
"...그래요? 어떡해. 삼촌분이 길을 잃거나 할 일은 없겠죠?"


저스틴은 그 말이 웃겼는지 킥킥거렸고 파이브는 문득 저스틴의 삼촌을 저도 모르게 외국인이라고 착각했음을 깨달았다. 영어도 할 줄은 아는데 안 쓰는 거라고 했지...


“데이지. 우리 결혼식 말이에요.”
“아...”


추수감사절이라 무리해서 먹었는지 소화가 잘 되지 않았다. 소화제를 먹고 누워있는데 저스틴이 침대 맡에 앉아 갑자기 말을 꺼냈다. 결혼식. 결혼식이라...그러고보니 자신이 직접 프로포즈 해놓고도 결혼식 생각은 구체적으로 해보지 않았다. 묘하게 발그레한 얼굴의 그가 수줍게 속삭였다.


“내년 내 생일에 하고싶은데 어때요?”
"그 날 하고싶어요?"
"응...원래는 크리스마스 때 할까했는데 결혼기념일이 크리스마스인 건 별로일 것 같아서."


생일이 결혼기념일인 건 괜찮은 거예요? 그렇게 물은 파이브는 저스틴이 예복이니 뭐니 떠들어대는 것을 들으며 살며시 웃었다. 크리스마스에 결혼하면 왠지 빨간색이나 초록색을 예복으로 해야할 것 같다니...


"아닌가? 루돌프로 해야하나? 뭐든 웃기잖아요."
"그건 그래요."
"아무튼 내 생일에 결혼하면 너무 좋을 것 같아요. 새로 태어난 느낌일 거야."


그리고 문득 떠올렸다. 디에고와 예복을 맞추러 간 날을.


자기야. 예쁘다.
얼마나?
많이.
얼마나 많이?
엄청...어떡하냐. 결혼식에 우리 부대 사람들은 못 오게 해야겠다.
풉..바보야. 이 기회에 자랑해야지. 이렇게 예쁜 와이프가 나하고 결혼한다고.
그런가?


지금은 기억도 안 날만큼 다정한 눈빛. 미래를 기대하며 설레하던 감정...그래서 아기는 언제 가지면 좋을까, 라고 묻는 말에 자연스럽게 잡고 있던 손을 뿌리치며 또 그 소리냐고 짜증을 내던 스스로를-


“선배. 예복은 무슨 색이 좋아요?”
“음...”
"급할 건 없어요. 근데 결혼식에 누구까지 초대하지?"


파이브의 머릿속에서 흘러가는 회상을 알 리 없는 저스틴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제게 안겨왔다. 왜 결혼식은 생각도 하지 못했을까? 은연중에 혼인 신고만 하고 끝내려는 생각이었나? 스스로의 생각을 되짚어보는데 머리가 아파왔다. 파이브는 몸이 안좋아 자야겠다는 핑계로 그를 내보냈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복잡했다.


"여보세요...션.....?"
-파이브, 오랜만이야. 별일 없지?


그로부터 몇주 후, 형제들 모임이 있다며 저스틴이 니콜을 데리고 가버린 바람에 뭔가 허전한 밤이었다. 새벽까지 홀로 소파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영화를 보는데 갑자기 걸려온 전화에 파이브는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몰라 저장해놓지는 않았지만, 해킹당할까봐 션이 사적인 연락에 쓴다는 그 번호였다.


“별일은 없는데...무슨 일이야? 너무 늦은 시간이라.”
-아...거긴 지금 밤이겠구나. 시차를 생각 못 했어. 정말 미안해.


해외 출장 중에 그냥 생각이 나서 전화했다는 목소리를 들으며 왠지 느낌이 쎄했다. 파이브는 피곤해서 자야겠다는 말로 전화를 끊고는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계속 연락하는 게 맞나? 저스틴이 아직 제게 아무말도 하지 않은 걸로 보아 션과 가끔 연락하는 건 모르는 듯 했다. 파이브는 결국 망설이다가 문자를 써내려갔다. 저스틴이 오해할지도 모르니 앞으로는 연락하지 말아달라는 뜻을 여러번 고쳐서 문자를 전송하고 나니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리고 곧 전화가 몇통 오자 전부 거절을 눌렀다.


[그랬구나..불편하게 해서 미안해. 내가 생각이 짧아서 널 오해하게 만든 것 같아.]


괜히 휴대폰을 꺼버린 채 잠들었던 파이브는 아침에 션에게서 온 장문의 문자를 몇번이고 읽어보다가 삭제했다. 그러고는 휴지통까지 뒤져 문자를 완전히 삭제하고는 한숨을 쉬었다. 단순히 날 친구로 생각하는 게 아닌 느낌이 들어...그리고 며칠 뒤, 회사에 도착한 편지에 파이브는 혼란스러웠다.


[널 뉴욕에서 다시 만났을 때, 정말 기뻤어. 네 번호가 바뀌어서 연락할 수도 없어서...널 다신 못 볼줄 알았거든.]


편지는 굉장히 공을 들여서 쓴 티가 났고, 친구로서 좋은 관계를 이어가지 못해 아쉽다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읽는 동안 파이브는 왠지 착잡한 기분에 머리가 아파왔다.


“아...뭔가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잖아.”


그래도 버릴까? 버리기엔 좀...정성들여 쓴 것 같은데. 그렇게 고민하며 한 손에는 편지를, 한 손에는 퍼지너터를 쥔 채 한숨을 쉴 때였다.


"여기서 뭐하세요?"
"....깜짝이야."


갑자기 다가온 인기척에 파이브는 편지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신입사원인 그 알파는 편지를 빠르게 주워들어 건네더니 날이 춥다며 스몰토크를 했다. 파이브는 왠지 민망해져서 편지를 대충 정장 주머니에 구겨넣었다. 그리고 무슨 용기가 생겼는지 그 신입사원에게 질문을 꺼냈다.


"있잖아요. 혹시..."
"네?"
"그게..제 얘긴 아니고 친구 얘기인데요-"


파이브는 알파와 오메가가 친구로 지내는 게 가능하겠냐는 물음을 빙빙 돌려서했다. 가만히 제 이야기를 듣던 신입사원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지 않냐고 대답하면서도 귀가 빨개져있었다. 그걸 본 파이브는 이번에도 낮아진 기온 탓이라고 생각하고 넘겨버렸다. 그리고 결국 그 구겨진 편지를 중요하지 않은 서류 안쪽에 숨겨두었다.


그래도 당분간은 연락하지 않는 게 좋겠어.


저스틴은 니콜이 우는 사진을 여러 장 보냈다. 파이브는 사진을 확대해서 보다가 웃고는 다시 키보드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











“...엄마 목소리 들리지 않아?”


간만에 꺼낸 결혼 앨범을 집어들려던 순간이었다. 한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파이브가 저를 부르는 것이었다. 눈이 마주친 저스틴과 니콜은 서둘러 침실로 달려갔다.


“속이..속이 너무 안좋아요-”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파이브는 식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화장실을 가리키자 저스틴은 서둘러 파이브를 부축했다. 힘겨워하는 그가 변기 앞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도와주려 등을 토닥이자 파이브의 손이 혼자 해결할테니 나가달라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어떡해..”


별수없이 기다리는 동안 화장실 안에서 토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니콜과 저스틴은 화장실 문 앞에 선 채 눈을 깜빡거렸다. 정말 건강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괜찮아요?”


물음에 파이브는 고개를 저었다. 저스틴은 니콜을 이만 자라고 방으로 돌려보내려 했다. 니콜은 엄마하고 잔다며 고개를 저었고 결국 넓은 침대에는 세 명이 누워서 자게 되었다. 파이브는 가운데에, 양 옆에는 각각 저스틴과 니콜이 위치한 채로. 파이브를 밤새 간병한다더니 잠든 니콜 대신, 저스틴은 한숨도 자지 못하고 수시로 파이브의 체온을 재었다. 높진 않지만 분명 열이 났다. 이거 왠지 그 때랑 비슷한데...느낌이 이상했다.


“응....?”


날이 밝아오고 아침 7시였다. 니콜은 세상 모르게 자고 있었고, 파이브는 출근해야한다며 힘겹게 일어나고 있었다. 저스틴은 그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앉자마자 속이 괜찮은지 묻고는, 망설이다가 임신테스트기를 건넸다.


"이게 뭐예요..."
"......"


파이브는 졸린 눈으로 멍하니 그것을 보았다. 그의 초록색 눈동자가 저를 지그시 응시하자 저스틴은 침묵했다. 곧 천천히 고개를 저은 그가 의미모를 한숨을 쉬었다.


“저스틴...”
“어서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래도 해봐요.”
"하...아닐텐데 뭐하러요."
"혹시 모르잖아요. 맞는 거면 지금 당신 건강이..."


저스틴의 부드러운 설득을 끊은 건 한 통의 전화였다. 데스티니의 이름이 휴대폰 액정에 뜨자 파이브는 이 시간에 왜? 하고 중얼거리더니 걱정이 가득한 표정이 되어 전화를 받았다.


“데시..? 무슨 일이야?”


졸음이 가신 얼굴로 휴대폰을 귀에 댄 파이브는 곧 세상에, 하고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어떡해...절망과 놀람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저스틴은 덜컥 걱정부터 가슴에 얹어졌다. 지금 이 상황에서 또 무슨 일이?


“아담이 죽었대요..”


잠시 후, 통화를 마친 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저스틴은 잠시 입을 열지 못했다. 니콜은 아직도 새근거리며 쿨쿨 자고 있었다.




























파이브텀러들 건강해



벤파이브 디에고파이브 파이브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