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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05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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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편


ㅅㅅㅊㅈㅇ
ㄴㅈㅈㅇ




 

몸을 섞는 상대와 종일 마주 보고 일한다는 것은 제법 까다롭고 피곤한 일이다. 게다가 그 상대라는 인물이 자타공인 '개새끼'라면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일 테지. 그날 밤 잠깐이나마 서로가 통했다고 느꼈던 건 그야말로 머피의 착각이라는 것을 일깨워주기라도 하듯, 상대는 자신의 명성에 걸맞게 더욱더 밉살스럽고 짜증 나게 굴어댔다.

 

"아직 안 갔네?"

 

"... 뭐?"

 

"그 늘씬한 배에 총알구멍 생기기 전에 이제라도 그만 돌아가는 게 낫지 않겠어?"

 

페냐는 더 이상 말과 행동을 아끼지 않았다. 황당하다 못해 험악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머피 따윈 우습다는 듯, 하루에도 몇 번씩 그의 화를 부추겼다. 작게는 머피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콜롬비아 지부로 전임할 요원들의 정보가 도착했다며 부러 당사자의 코앞에서 파일을 흔들어 보이기도 했고, 크게는 지역 경찰과의 합동작전에서 머피의 자리를 지워버리기도 했다. 그중 몇몇은 단순한 심술이나 장난으로 치부하기엔 분명 과한 것들이었다.

페냐의 이런 웃기지도 않는 장난 하나하나에 불같이 화를 내며 반응하던 머피는 이내 무시로 일관하기 시작했다. 그가 발끈하며 달려들수록, 그의 파트너는 더욱 집요하게 굴 것이란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게다가 이미 일련의 납치사건 때 한차례 있었던 상부의 본국 귀환 권유를 머피가 거절한 시점에서, 페냐에게 머피를 돌려보낼 권한 같은 것은 사실 있지도 않았다. 이것은 그저 제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파트너를 향한 불만이자 항의의 몸부림 같은 것이다. 사실은 별 의미가 없는. 사실 누구에게도 타격을 주지 못하는. 아니, 어쩌면 심술을 부리고 있는 당사자만이 상처 입을 무의미한 분투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머피는 자신의 파트너가 열심히 저를 엿먹이기 위해 개새끼처럼 굴고 있는 와중에도 그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그의 시선은 의도와는 무관하게 항상 페냐를 쫓았다. 페냐가 책상 위에 산처럼 쌓인 서류 더미 사이에서 어울리지 않게 성실한 자세로 타자기를 두들겨대던 그때도 그랬다. 빈 책상에 턱을 괴고 앉아 그를 구경하는 것이 지루해질 때쯤이면, 꼬고 있던 다리를 풀어 남자의 정강이를 두드려댔다. 무시할 수 없는 강도에 잔뜩 골난 표정의 페냐가 고개를 들면, 바로 그때 입안 가득 물고 있던 담배 연기를 그 웃기는 얼굴 가득 뿜어주는 거다. 담배로 숨을 연명하는 골초 주제에, 그건 또 싫은지 눈살을 찌푸리며 서둘러 몸을 뒤로 물리는 모습이 어찌나 같잖고 귀여운지. 그래, 턱 끝까지 올라온 욕설을 내뱉지도 못하고 자신을 노려보기만 하는 그 남자가 귀여웠다.

자신이 말도 안 되게 유치하고 우스꽝스럽고 낯 뜨거운 연애 놀음에 빠져있다는 자각은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이렇게 돼버린 건 절대 그의 탓이다. 슬쩍 스치는 손끝에 시선을 피하고 귓가를 수줍은 발간색으로 물들이는 하비에르 페냐야말로 이 모든 것의 원인이다. 그야말로 자신을 이렇게 만들어버린 주범이다. 머피는 그렇게 모든 책임을 페냐에게로 돌려버렸다. 실수인 척 허리를 쓰다듬은 손길에 그가 흠칫거리지 않았더라면. 일부러 따라 들어간 화장실에서 자신을 보고 페냐가 민망한 듯 자리를 피하려고 하지만 않았더라면. 그랬던 주제에 자신에게 붙잡힌 손목을 억지로 빼내려고 노력도 하지 않았으니까. 끌려 들어온 좁디좁은 서류 창고에서 그에게 다가가는 자신을 밀어내지 않았으니까. 마침내 보드랍고 푹신한 입술에 닿아 황홀에 떠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으니까. 다시 한번 그에게 다가서는 자신을 향해 그 야해 빠진 입술을 기꺼이 열어줬으니까.

그러니까 이 모든 건 전부 하비에르 페냐의 탓이다.

 

 

 

* * * * *

 


 

 지난번의 작은 승리 이후로 보고타를 비롯한 메데인의 분위기는 급격하게 변한 것처럼 보였다. 귀를 찢는 총성과 비명은 더 이상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았고, 경찰조직과 정부를 향하던 폭탄 테러는 더욱 빈번하게 일어났다. 전쟁 아닌 전쟁에 휘말린 일반인 부상자들이 병원마다 넘쳐났고, 의료시설의 혜택을 볼 수 없는 신분의 이들은 그대로 길바닥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공포와 죽음이 거리를 점령했다. 온갖 상스럽고 부정적인 것들이 손쓸 새도 없이 사람들을 오염시켰고, 모두가 비난과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 마치 이대로 세상은 악당들의 손아귀에 떨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싸움을 포기하지 않는 이들은 여전히 존재했고, 그들은 그들의 자리를 굳건하게 지켜나갔다. 그에 대한 보상이라는 듯, 카르텔과 관련된 제보들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놀랍게도 신변 보호를 요청하며 자수하는 이들까지 생겨났지만, 그것들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카르텔의 핵심 멤버 중 하나였던 가챠의 구속이 정말로 나르코스들에게 위기감을 조성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그들에게 피의 복수를 실행할 동기를 부여한 것인지는 그 누구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바쁘게 뛰어다녀야 하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넘쳐나는 정보들 속에서 그 무엇이 진짜이고, 그 무엇이 세상을 지켜내는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함정인지 구분할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문을 두드려 말을 걸고, 협상을 하고, 심문을 하는 하루하루가 반복되었다. 수확이 전무한 날도 있었고, 그야말로 대어를 낚은 날도 있었다. 모두가 무사히 하루를 마감하고 집으로 돌아간 날도 있었고, 누군가의 피로 얼룩진 장례식으로 끝나버린 하루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거짓말처럼 한 남자가 나타났다.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개인 운전사라며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땀에 젖어 축축해진 종이 하나를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파블로가 소유하고 있는 저택 중 하나의 주소가 적혀있는 쪽지였다. 남자는 불안한 듯 연신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지금 그분이 머물고 계신 곳입니다. 하지만 언제 또 거처를 옮길지는 몰라요. 어제부터 짐을 싸고 있었거든요."

 

남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이야말로 이 모든 난장을 끝낼 최고의 기회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 희소식에 선뜻 반응을 보이진 못했다. 도대체 이것의 진위를 어떻게 가려낸단 말인가. 남자가 가져온 정보를 그대로 믿어버리기엔 그들이 여태껏 흘려온 피와 보내야 했던 전우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 그렇다고 의심하며 넘겨버리기엔 그들에겐 승리가 너무도 절실했다. 어차피 다른 방법은 없었다.

 

차 안에 앉아 방탄복을 조이고 탄창을 확인하며 담배를 한 개비 태우는 사이, 작전시간은 코앞으로 다가왔다.

 

"혹시 그때 말이야."

 

한 마디만큼이나 작아진 꽁초를 창밖으로 튕겨내며 페냐가 입을 열었다.

 

"뭔가 들은 거 없어?"

 

"무슨 뜻이야? 내가 올린 보고서는 이미 읽어봤잖아."

 

"알지, 아는데... 뭔가 수상하다거나,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거나... 아니면 그냥 네 감이 이상하다고 말하고 있는 거, 그런 거 말이야. 혹시 떠오르는 게 없나 해서."

 

내 감이 이상하다고 소리치고 있는 것. 페냐의 말에 머피는 나베간테와의 대화에서 무언가 석연치 않은 느낌을 받았던 것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느낌,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불길함일 뿐이었다. 지금도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날의 대화를 처음부터 다시 재생해보았지만, 그것을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근거는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중요한 작전을 앞둔 위험하고 긴장되는 순간이다. 머피는 페냐에게 괜한 고민거리를 안겨주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그저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때만 생각하면 이미 다 아문 팔이 욱신거려 견딜 수가 없으니, 위로의 키스를 해줄 것이 아니면 그 끔찍한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만들지 말아 달라고 천연덕스럽게 덧붙이면서 말이다.

콧방귀를 뀌며 앞장서는 페냐를 따라잡으며 머피가 말했다.

 

"부탁이니까, 죽지 마."

 

답지 않게 잔뜩 긴장한 기색에 페냐는 발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낯익은 얼굴들이 중무장을 한 채, 대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카리요의 직위를 걸고 겨우 한 소대 규모의 병력을 출동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센티넬의 능력 사용을 승인받기엔 제보의 신빙성과 작전의 성공 확률이 현저히 낮았다. 그게 다가 아니야. 뭔가 불안해. 예감이 좋지 않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머피에게 운을 띄워보았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도대체 뭘까 이 느낌은. 내가 뭘 놓친 거지.

삐뚤어진 웃음 뒤로 초조함을 숨기며 페냐는 제 앞에 선 남자의 가슴을 가볍게 두드렸다.

 

"웃기는 소리. 너나 총알 안 박히게 조심해."

 

 

 

도심과 제법 거리가 있는 곳에 위치한 저택은 해가 지고 나자 칠흙같은 어둠과 고요에 휩싸였다. 건물로 향하는 거대한 철문을 열어 젖히는 것을 신호로, 여기저기서 작은 불꽃과 비명이 산발적으로 터져나왔다.

 

이제 이쪽이 움직일 차례다. 무전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을 확인하며, 페냐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제보자의 말대로 저택의 주인은 이사를 준비하고 있던 모양인지, 복도 여기저기엔 가방과 꾸러미들이 산재했다. 겨우 들이치는 달빛에 의존해 복도를 통과하자, 평범한 문이 눈앞에 나타났다. 미리 숙지한 도면이 정확한 것이라면, 뒷마당으로 이어지는 것이 분명했다. 

페냐는 뒤를 따르는 이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들은 문을 사이에 두고 늘어서서 마지막으로 숨을 고르고 무기를 고쳐 쥐었다. 문밖에서 어떤 상황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흥분과 긴장, 공포와 두려움이 엉망으로 뒤엉켜 땀과 함께 온몸을 적셨다. 서늘한 밤바람도 가쁘게 들썩이는 가슴을 진정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때, 설핏 열린 문틈으로 부산스러운 발걸음과 시동이 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체하다간 차량이 출발해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시끄러운 배기음 사이로 높고 가느다란 목소리를 알아챈 페냐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No te muevas!"

 

공터 가득 남자의 외침이 울렸다. 총구를 겨누고 선 페냐의 뒤로 경찰들이 달려 나왔고, 그들의 것 또한 시동이 걸린 차량과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이들을 향했다. 대치 상황이 된 것을 확인한 페냐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운전석에서 열쇠를 뽑아냈다. 덜덜거리는 엔진소리가 사라진 곳에선 풀벌레 소리와 함께 가느다란 흐느낌 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이들이 뒤쪽에 늘어선 차량을 확인하는 사이, 페냐는 총구를 그대로 유지한 채 뒷좌석으로 향했다. 예상대로 그곳엔 공포에 질린 한 여성과 아이들이 앉아 있었다. 눈물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이의 손에 아이들의 어깨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페냐는 들고 있던 총을 거두었다.

 

"내리시죠, 부인."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아내, 타타 에스코바르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로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지금 자신이 처한 이 상황이 분해서 견딜 수 없다는 듯 입술을 짓씹으며 울분을 토해냈고, 양옆에 앉은 아이들은 그런 어미에게 매달려 서럽게 울음을 토해냈다. 공포가 뒤섞인 소리가 공터를 가득 채웠다. 

페냐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도시를 공포와 살육의 현장으로 몰아넣은 미치광이의 가족이라 하더라도, 상대는 여성과 어린아이들이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애처롭게 떨고 있는 그들을 보면서도, 지금 자기 손에 떨어진 것이 파블로가 아니라는 것에 대한 분노와 그래도 그를 불러들일 미끼로 삼을 가족은 손에 넣었으니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동시에 드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자신을 향한 아이의 원망 어린 눈망울을 마주하자, 마치 자신이 악당이 되어버린 것 같은 기분에 페냐는 입이 썼다.

저택의 수색과 잔당처리가 끝났는지, 저 멀리서 웅성거리는 소리와 묵직한 군화 소리가 들려왔다. 특별한 무전내용도 없는 걸 보면, 아마도 에스코바르 가족의 신병을 확보한 것이 오늘 작전의 최대 수확이 될 모양이었다. 페냐는 다른 이들이 몰려오기 전에 최대한 점잖은 방법으로 눈앞의 이들을 연행하기 위해 다시 한번 말을 꺼냈다.

 

"어서 내리시죠. 저희에게 협조한다면, 당신과 아이들의 안전은 보장하겠습니다. 믿으셔도 됩니다."

 

타타는 한번 숨을 고르더니, 곁에 앉은 아이들을 먼저 밖으로 내보냈다. 페냐의 도움으로 아이들이 무사히 차에서 내린 것을 확인한 타타는 천천히 가죽시트 위로 몸을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그녀의 오른발이 진흙이 엉망으로 뒤엉킨 땅에 닿았다.

 

'!'

 

순간 공기가 무거워졌다. 무거워졌다고 느꼈다. 수갑을 들고 서 있던 페냐는 눅눅해진 공기가 마치 쇠사슬처럼 몸을 휘감고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것만 같은 기묘한 감각에 지금의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그러는 사이, 몸을 짓누르는 힘은 더욱 강해졌다.

그녀의 왼발이 잔디를 밟았다. 이내 허리를 펴고 꼿꼿하게 선 타타는 페냐를 내려다보았다.

 

'내려다본다고?!'

 

페냐는 그제야 자신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음을 깨달았다. 상체가 무너지며 후들거리는 팔이 바닥을 겨우 짚었다. 순식간에 땀투성이가 된 페냐는 간신히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벌레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싶더니, 주변은 이미 정신을 잃고 쓰러진 이들로 가득했다.

 

'망할! 방심했어.'

 

"맞아요. 당신은 방심했어요. 하비에르 페냐 요원."

 

매끈하고 반짝이는 검은 구두가 듬성듬성 흙이 드러난 잔디를 밟으며 페냐에게로 다가왔다.

 

'타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상냥하고 신사적이시네요. 게다가 이렇게 둔할 줄이야."

 

역시 리미터의 영향일까요. 언제 울음을 보였냐는 듯, 타타는 노래하는 새처럼 읊조렸다. 평온하다 못해 즐거워 보이기까지 하는 그녀와는 달리, 페냐는 이제 바닥을 짚고 엎드린 자세를 유지하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몸은 무겁고 정신은 혼미해져 갔다. 페냐는 그제야 깨달았다. 공기가 무거워진 것이 아니라, 몸이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설마, 타타 당신이-'

 

바닥에서 바르작거리는 페냐를 보며 가볍게 혀를 찬 타타는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는 그새 흙먼지가 앉은 구두코를 쓰러진 페냐의 셔츠에 문질러 닦았다.

 

"그렇게 애쓰지 말고 한숨 자두도록 해요. 어차피 앞으로 이야기 할 시간은 많으니까 말이에요."

 

경쾌한 박수 소리가 들려온다 싶더니, 그대로 암전이었다.




나르코스 머피페냐
보이드페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