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hygall.com/611810478
view 681
2024.11.19 21:20
전편 https://hygall.com/611689533





사람들의 예상대로 강징과 운몽 강씨의 수사들은 연화오의 뒷산에 숨어 있었다.
사실 연화오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군량미며 전쟁에 필요한 물자들도 죄다 커다랗고 면밀하게 지어진 굴 속에 있었다.
다만 공격이 아닌 방어를 위해 마련해 둔 것들이었다.
언제든 한편으로 느껴지지 않는 사람들이 검을 겨누고 쳐들어올 것만 같은 불안감에 찬 강징이 미리부터 은밀한 공간을 만들고 만반의 대비를 해 둔 것이었다.


입구는 잘 숨겨져 있었고 불빛 하나 새어나가지 않도록 단단히 만들어졌다. 안에서는 겨우 사물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빛만 비치고 있었다.
오밤중에 깨어나 신속하게 후퇴한 수사들은 조용히 자기 자리에서 대기하며 장비를 점검하거나 군량을 씹고 있었다.
강징이 지나가자 그들은 조용하게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다.
대부분이 전쟁고아로 이루어진 강징의 사람들은 운몽 출신 뿐 아니라 고소, 청하 등 다른 지역 사람들도 섞여 있었다.
그들은 수진계의 더러운 일면을 잘 몰랐고, 간혹 듣는다 해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들이 보는 종주는 난폭하지만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은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외부에서 바친 뇌물은 죄다 하나의 창고에 처박혀 썩어가게 할 뿐, 선부 내에서 들고 나는 대부분의 일들은 지방의 안보에 관련되어 있었다. 
수사들도 바삐 밖으로 나가 양민들을 구제하는 것이 주된 일상이었다. 그들이 간혹 기분 나쁜 일을 듣고 볼 때란 주인을 따라 소위 선문가들의 모임에 참가할 때뿐이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장성한 사람들은 자연히 강징을 중심으로 똘똘 뭉쳤고 바깥 일에는 일절 관심을 두지 않았다.

강징은 굴 속의 상황을 둘러본 후 총령과 부사를 불러 잠시 나갔다 오겠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굳게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어두운 밤이었지만 산의 지형을 손바닥처럼 아는 강징은 소리없는 길짐승처럼 바닥을 미끄러지며 나아갔다.
산이 무척 컸기 때문에 운몽 강씨의 행방을 열심히 찾는 수사들이 뜸하게 지나갔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검을 딛고 날아다니고 있으면 숨은 굴의 입구는 절대로 찾아낼 수가 없었다.
강징은 이따금씩 쉭 하고 날아가는 소리가 들리면 멈추었다가 다시 움직였다.
연화오에서 바로 물러났던 건 혹시나 적지에 금릉이나 남희신이 있을지 몰라 조심했던 것이다. 지금 연화오로 되돌아가는 발길도 두 사람의 거취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다시 누군가가 머리 위로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소리가 가까웠기 때문에 강징은 더 오래 기다렸다가 발을 떼었다.
그리고 잠시 후. 갑자기 멀리서 들려오는 사람의 소리가 발목을 잡았다.
몇 발짝 떼지 못한 채 다시 멈추어선 강징은 이내 싸늘하면서도 뱃속이 들끓는 것 같은 뜨거움을 느꼈다.
“부인, 부인! 어디 계십니까, 부인!!!”
애타게 부르짖는 목소리가 커지며, 허우적거리는 인영도 더욱 가까워지고 짙어졌다.
강징은 그 자리에 못이 박혀버린 것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나 위태롭게 느껴지는 그림자가 한순간 휙 고꾸라지자 순식간에 땅을 박차고 튀어나갔다.
그를 안는 동시에 또다른 기척이 들려오자 강징은 급히 남희신의 입을 막으며 몸을 웅크렸다.
시익 하는 소리와 함께 날아와 공중에 멎은 그림자가 도로 움직여 멀리 사라져버릴 때까지 강징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리고 조그맣고 다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희신!...”
“부인......”
창백한 남희신의 얼굴에 기쁜 빛이 돌면서 못내 그리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피를 너무 많이 흘린 상태였기 때문에, 다시 한번 부인, 하고 부르면서 강징의 얼굴로 손을 뻗다가 그만 전신에 힘이 빠지고 말았다.
비로소 그를 안은 품이 축축해지며 확 끼치는 피비린내를 맡은 강징은 놀라서 어쩔 줄을 몰랐다.
얼른 기절한 남희신을 떠메고 일어선 그는 풀숲을 헤치며 눈먼 사람처럼 주변을 더듬거렸다.
한참을 헤멘 끝에 구사일생처럼 찾아낸 덩쿨의 가림막이 손에 잡히자, 강징은 힘주어 그것을 걷어올리고 아래를 힘껏 밀었다.



강징은 사력을 다해 남희신을 끌어다 안으로 집어넣고 무거운 문을 닫았다.
벽을 더듬어 보니 촛대가 손에 잡혔다. 재빠르게 불을 당기자 어스름한 빛이 일어나며 어수선하게 버려진 내부를 밝혔다. 
전초 기지를 만들려고 했을 때 제일 먼저 팠던 굴이었다. 하지만 얼마 안가 연화오와 너무 가까운 것 같다는 판단으로 공사를 중단했다. 그래서 내부에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은 아무 것도 없었지만 최소한 입구는 완전히 숨겨져 있었다.
강징은 쓰러진 남희신의 몸을 돌리고 크게 베인 팔의 상처를 살펴보았다. 허리춤에서 물병을 꺼내 엉망이 된 팔의 피를 씻어내고 소매자락을 찢어 꽁꽁 묶었다.
바깥 바람이 닿지 않아도 굴의 내부는 무척 추웠다. 강징은 대략의 처치를 마치자 곧장 장포를 벗어 남희신에게 둘러주고는 온기를 쏟아부었다.
그리고 얼마나 있었을까.
밀봉이 된 굴 속에는 외부의 바람소리조차 전해지지 않아 마치 무덤 속 같았다.
공기가 차단된 것 같은 비정상적인 고요함, 그리고 사랑하는 향기가 감돌고 있는 따스함이 천천히 남희신을 깨웠다.
그가 눈을 뜨자, 바로 앞에 너무나도 보고 싶었던 얼굴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근심하는 듯한 얼굴은 기가 막힌 일을 당했음에도 오히려 무감해 보였다.
그러나 예상과 다른 느낌을 당하자 남희신은 오히려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희열과 안타까움이 마구 엇갈렸다.
창백하고 길다란 손가락이 기어올라, 자신을 안은 사람의 손을 꽉 쥐었다.
“부인... 제가 어떻게든 여란을 구해올게요. 그러니 우리 그냥 떠나요.”
남희신의 말에 강징이 미소를 지었다. 
다시 남희신을 만나고, 두 손에 그를 만져보고 목소리를 들었다.
그것만으로도 강징은 더 바랄 것이 없다 여겼다.
하지만 미소의 끝은 차고 씁쓸했다.
“죽어도 가문을 버릴 수는 없다.”
“좋아요. 그럼 저도 당신과 함께 하겠습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대답하는 남희신을 보고, 강징은 그만 고개를 숙이며 그의 손에 이마를 묻었다.
남희신은 사일지정을 모른다.
기산 온씨도, 온약한도 알지 못했고 그의 힘을 빼앗은 강징이 얼마나 강한지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편에 서겠다 말하는 남희신은, 강징이 죽을 각오를 하는 줄로만 알았고, 그럼에도 당신을 따르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고개를 숙인 채로, 보랏빛 옷깃 뒤에 숨겨진 심장이 불길하게 날뛰었다. 그럴 때 뻗어와 부드럽게 뻗어온 손이 머리를 쓸어주자 강징은 눈을 질끈 감으며 몸서리가 쳐졌다.

---사실은 지금 연화오를 장악하고 있는 무리들을 한 손으로 다 쓸어버릴 수도 있다.
다정한 손이 소중하게 쥐어주고 있는 이 손이 얼마나 흉악하며 끔찍스러운 것인지.
남희신이 돌아온 지금, 강징은 금여란이 그 곳에 와 있지 않다는 사실만 확인하면 하나도 거리낄 것이 없었다.
강징은 남희신에게 보이지 않도록 새빨갛게 핏기가 일어난 눈을 아래로 치뜨며 생각하고 있었다.
난릉 금씨마저 저렇게 나왔다면, 나중에 금릉을 어찌 대할지 모르니, 이참에 깡그리 초토화시켜버리고 데려오는게 낫겠지.
나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났었던 그놈들도, 저놈들도!
그리고 고소 남씨를 비롯하여 나에게 대항하던 인간들을 모조리 다 죽여버려도... 그래도 이 아이는 나를 따라올까?
“부인...”
흉포한 악의에는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다시 불렀다. 부르며 애원하듯 채근했지만 강징은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나는, 정말로 그렇게 할까?
할 수... 있는 건가?
어느새 남희신의 팔에 의지하고 있는 손이 소리없이 떨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이룩해 왔던 많은 일들과 마찬가지로, 사실은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화가 나고, 성질이 나고 원한이 깊어도. 
그 길밖에 없다 해도, 반드시 해야 한다 해도. 그래서 실제로 하게 된다고 해도. 
하고 싶으냐고 마음에 묻는다면,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강징의 진심이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내가 어쩌겠는가?
내가 여기서 물러나버린다면, 가문이며 아릉의 안위는 어찌하고?
...또한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와 준 이 아이는.


강징은 다시 남희신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냥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 채로 더듬어 살포시 안았다.
이 순간만이 자신에게 남겨진 모든 것일지 몰랐다.
이 시간 후로 나는 인간이 아니게 될지도 몰라.
마주 안아주는 따뜻하고 커다란 손을 낱낱이 느끼며 강징은 다시 남희신을 돌려보내리라 마음먹었다.
평생 동안 소중히 여긴 모든 것들이 물처럼 손바닥을 흘러 빠져나갔다. 그리고는 마지막 남은 것, 한 모금쯤 될까 하는 물이 간신히 고여 있는 그마저도 곧 흘러내려 사라져버릴 참이었다.
그 바닥에서 진주처럼 발견한 반짝임이 바로 지금 안겨 있는 남희신의 존재이자 마지막 따스함이었다.
“부인,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함께 있을 것입니다.”
굳게 다짐하는 남희신의 목소리를 깊이 새기려 애쓰며 강징은 더욱 더 세게 눈을 감고 매달렸다.









언제 잠이 들어버렸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예민한 감각에 불이 켜지며 불청객이 다가온 것을 알렸다.
바깥에서 희미하게 비쳐드는 빛으로 주변에 어지러이 흩어진 남희신의 핏자국을 본 강징은 아차 싶었다.
너무 놀란데다, 칠흑처럼 어두웠던 탓에 이까지 오면서 점점이 따라오는 핏자국을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다.
강징은 깜박이며 막 눈을 뜨는 남희신의 품을 빠져나와 돌문을 향해 쌍장을 뻗었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빛이 터진 것처럼 햇살이 마구잡이로 쏟아들어왔다.
강징은 좀체 빛에 익숙해지지 못하는 눈을 억지로 부릅떴다.
입구 바깥에 여남은 명의 사람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선두에 선 것은 남계인, 섭명결, 금광선을 비롯한 가장 강력한 가문의 주인들이었다.
강징이 주먹을 쥐고 굳은 얼굴로 노려보자, 한 발 늦게 따라나온 남희신이 그의 앞을 가리고 가만히 삭월을 움켜쥐었다.
그런데.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쉰 남계인이 앞으로 나오더니 손을 모았다.
“강종주. 과거 운몽 강씨가 어렵던 시절에 당신을 도와주지 못한 점, 고소 남씨를 대표하여 사과드리오.”
강징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잇달아 적봉존이 그를 따라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자, 강징의 얼굴에는 비로소 당황한 감정이 떠올랐다. 
“청하 섭씨도 사과하오. 하지만 결코 고의는 아니었소. 다들 여유가 없어 그랬던 거요.”
그들이 이렇게 나오리라고는 절대로,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던 강징이었다.
오밤중에 기습을 당했어도 눈썹하나 까닥하지 않던 삼독성수의 얼굴에 불안한 감정이 서리며 의심스럽게 주변을 훑어보자 늘어서 있던 사람들의 얼굴에 거북한 표정이 떠올랐다.
날은 완전히 밝았고, 깨어난 숲의 소리가 주변을 떠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외에는 고요했다. 음술로 비정상적인 감각을 일깨울 수 있는 강징의 귀에도 다른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최소한 이 공간에는 강징과 남희신과, 그리고 바로 앞에 보이는 사람들 몇 명 뿐이었다.
하지만 이것조차 적들을 끌어내려는 간계일지 몰라, 강징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러자 마치 강징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남계인이 말했다.
“강종주. 부디 의심하지 마시오. 결코 당신을 속이는 게 아니외다. 내 말이 거짓이라면 이 늙은 목숨을 기꺼이 당신 앞에 내놓겠소. 또한 나는 당신을 속이지 않을 것이라고 고소 남씨의 일대 조사님께 맹세하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전 수진계의 스승으로 존경받고 있는 남계인의 한 마디는 실로 무거웠다. 게다가 그가 하는 말들을 선문가 요주의 인물들이 다 들었으니 그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강징은 마음이 어지러워지며 소매 속에서 닿은 삼독의 손잡이를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사람들은 새파란 검날처럼 질린 강징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뜨끔하며 눈을 피했다. 그러는 태도는 물론 두려워 하는 모습으로 보였으나, 전날에는 보지 못한 머쓱한 감정이 엿보이는 듯도 했다.
그 중 특히 밉살스러운 몇몇의 얼굴을 보자, 강징의 마음 속에서는 대뜸 불길같은 감정이 치밀어올랐다. 
그러나 그 감정은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갇힌 듯 이리 튀고 저리 튀고 몸부림만 쳤다.
분노하고 적개하는 마음 뿐이었을 때에는 가늠해 볼 수 없었던 생각들이 비로소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강징이라고 사일지정 직후에는 어지간한 대가문들도 여유가 없었던 걸 모르지는 않았다.
전후 처리를 하며 위태로운 가운데에서, 어쩌면 약한 가문을 감싸는 행동조차 빈틈이 되었을지 모른다는 사실도.
문득 숨은 듯이 뒤에 서 있던 금광선이 어릿한 태도로 뒷짐을 지고 나오며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강종주, 다 오해요. 누군지 모를, 분명 천신제 때 농간을 부렸던 놈들의 짓일 거요. 그놈들이 당신이 세상을 쓸어버릴 거라는 헛정보를 흘렸소. 그래서 우리는...”
하필 이럴 때에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밉게 굴었던 인간이 혀를 놀리자 울컥한 강징이 눈을 들었다.
그가 양 주먹에 힘을 주어 검푸른 영력으로 부풀어오른 소매가 펄럭거리자 금광선은 휙하니 물러나며 손을 내저었다.
“아무튼 미안하오, 정말로 미안하오! 운몽 강씨를 공격하고 싶었던게 아니었소, 다 우리 스스로를 지키려고 했던 것이지!”
섭명결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금광선에게 타박을 주지는 않았다. 그가 추태를 부리긴 했지만 그의 마지막 말은 모두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이내 그가 시원스럽게 말했다. 
“우리들의 과오를 인정하고 진심으로 뉘우치니, 삼독성수. 당신도 깊은 원한이 없다면 더 이상 우리를 적대시하지 말았으면 좋겠소. 모든 사람들이 단지 예전처럼 평화로워지기만을 원하고 있소. 만약 우리들의 사죄가 만족스럽지 않다면, 어떤 방법으로든 갚아드릴 거요.”
강징은 이미 사기를 꺼뜨렸지만 말이 없었다.
무섭도록 굳은 얼굴, 형형한 눈빛은 자칫 과거의 분노를 몇배나 터뜨려 주변을 초토화시켜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사실은 그도 알고 있었다.
강자의 손에 쑥대밭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남의 가문까지 지켜줄 의리나 명분은 없었다는 것을.
하지만 너무도 외롭고, 약하고 힘들었던 강징에게는 아주 작은 소홀함이나 무시도 커다란 가시가 되어 박혔다.
거대한 힘을 손에 넣고 보니 오히려 그 힘 때문에, 이 길이 아니다 싶어도 다시 돌아갈 수조차 없게 되고 말았다.
본디 그는 남들과 화합하는 성격도 아니었고, 믿을 수 없는 사람들과 나란히 설 수도 없었다.
지금도 그들의 말 몇 마디로 신뢰가 되살아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때와는 다르게...
지금은.
강징이 시선을 돌리자, 비스듬하게 앞을 막고 서 있던 남희신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억지로 걸친 하얀 장포의 팔뚝에 강징이 감아 준 붕대가 피로 푹 절어 금세라도 무겁게 떨어져내릴 것 같았다. 
아마 피를 너무 흘기 때문에 서 있는 것도 한계이리라. 하지만 남희신은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을 하고도 마치 강징의 앞을 가려 막아줄 철벽이라도 되는 것처럼 결연한 태도였다.
저 인사들의 속은 모를지라도, 이 소년의 마음만은 잘 알고 있다.
강징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뭐라도 생각난 것처럼 홱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강징은 자신이 무엇을 하려는지 스스로도 잘 몰랐다. 그는 계속 안으로, 안으로 들어가며 따라오는 햇살을 뿌리치려는 것처럼 내달리다가 파다 만 벽에 몸을 부딪히는 바람에 멈추었다.
뒤따라온 남희신이 팔을 뻗자 강징은 곧장 그 품에 안겨들었고 이내 길다란 울음이 터져나왔다.
양친이 죽어나가는 모습을 본 후로 강징은 어떤 일을 겪어도 운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차고 캄캄한 굴 속에서, 기꺼이 저를 받아주는 가슴을 꽉 부둥켜안은 그는 마치 비명같은 울음소리를 높였다.
울고, 울다가 문득 남희신의 팔에 감긴 붕대가 만져지자 고개를 들었다.
“아프지?”
강징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묻자 남희신은 가만히 그의 얼굴을 감싸안고 말했다.
“당신은요?”
강징은 마냥 고개를 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도 둑이 터져버린 것처럼 끝없이 북받치는 감정을 누를 수 없어 구슬 같은 눈물 방울이 톡톡 떨어져내렸다.  




 

밖에 서 있던 사람들은 안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울음 소리에 헛기침을 하며 서성였다.
대권을 쥔 사람들은 감정에 흔들리기 쉽지 않았지만 드물게 속을 찔러대는 양심에 어색해하며 서로의 눈을 피했다.
그래도 점차 안도감이 깃들며 알게 되었다.
십여년 전, 사일지정으로 시작되었던 전쟁이 이제야 막을 내리려 한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