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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1 08:21
결국에 비무하는 비성연화도 보고싶다
연화루는 도로 천기당의 근처 숲으로 돌아왔음.
어쩐지 방다병이 다시 어디로 가자고 하지 않아서 그대로 몇 달이 흘렀음.
방다병이 적비성만 보면 삐죽거리니까 이연화는 아마 저를 끌고가면 적맹주도 따라올 게 싫어서 그런가보다 했지.
근데 사실은 방다병 나름대로 한 쌍의 연인을 배려해주는 거였지. 상대가 적비성이라는 건 용납 안되지만, 아무튼 이연화의 입장을 생각해서 말임.
이 날도 방다병은 몇 주간 멀리 나갔다가 어떤 사건을 해결하고 돌아와 무용담처럼 풀어놓고 있었음.
완전한 강호의 사건으로, 몇몇 고수들의 싸움에 민간인이 말려드는 바람에 문제가 되었는데 거기에는 만인책에 새로이 오른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에 적비성도 흥미를 보이는 듯했음.
“그런데... 아비.”
갑자기 방다병이 적비성을 향해 말을 걸자, 그가 의외로운 듯 눈썹을 까닥였음.
“너 혹시 새로 만든 만인책 봤어?”
적비성이 흥 하고 콧소리를 날리며 대꾸했음.
“내가 뭣하러?”
최대의 적수를 바로 옆구리에 끼고 살고 있는 중인데, 내가 왜. 바로 그런 말투였음.
하지만 방다병은 고까운 말투에 화를 내는 대신 표정이 야릇해졌음.
“이연화. 너한테는 물어볼 필요도 없겠지?”
“왜? 뭣 땜에 뜸을 들이는 거야? 만인책에 뭐가 적혔길래?”
“뭐가 적혔을지 몰라서 물어? 너희도 참!”
방다병이 답답하다는 듯 탁자를 치더니 말을 이었음.
“지금 세상이 어떻게 됐어? 죽은 줄 알았던 이상이가 돌아왔고, 폐관을 했던... 아비도 밖으로 나왔잖아! 만인책의 1, 2위에 너네 둘이 올라 있단 말이야!!”
“누가 1위야?”
“누가 1위인가?”
방다병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연화와 적비성이 동시에 물었음. 방다병은 그들을 보며 기가 차다는 듯 웃었어.
“그게 문제야. 이름만 적혀 있지, 누가 1위이고 누가 2위인지는 공란으로 남아 있다니까.”
방다병이 돌아간 후. 이연화는 슬쩍슬쩍 적비성의 눈치를 살폈음.
곧 그 얘기를 꺼내겠거니, 싶었던 건데 그는 날이 저물고 완전히 밤이 내릴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
2층에 올라 먼저 누운 적비성의 곁으로 다가가 살며시 이불을 들추고 누웠을 때에도 그는 언제나처럼 한 팔을 내주었을 뿐 그대로 조용해졌음.
몇 달이 흐르면서 그들은 매일 정사를 벌이지는 않게 되었어.
적비성의 열의가 식은 게 아니라, 피곤하고 아프다고 이연화가 불평을 했기 때문임.
그래서 오늘처럼-“그녀석이 왔다 가면 흥이 식는다”- 뭔가 어수선한 하루였다 싶을때 곱게 잠을 재워 주곤 했음.
적비성은 잠을 잘 때마다 꼭꼭 이연화에게 팔베개를 해주었음. 처음에는 아무리 더운 날이라도 품에 껴안고 자려 하길래 거부했더니, 손만 떼면 도망갈 것 같다는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했음. 그러면서 되레 비난하는 것처럼 노려보자 이연화는 할 말이 없었음.
“맘에 들지 않으면, 손을 잡고 자자.”
그런 헛소리를 내뱉는 눈빛도 아주 진지해서, 한 며칠 정말로 적비성과 깍지손을 끼고 잠을 자야 했던 이연화는 묘한 민망함 때문에 잠을 설쳤어.
결국은 팔베개로 타협하곤 두껍고 딱딱한 팔뚝을 베고 자느라고 또 며칠 잠을 설쳤지만, 지금에 와서는 목침처럼 익숙해졌기 때문에 적비성이 없는 날에는 되레 베개가 불편하게 느껴질 정도였어.
웃옷을 벗고 있는 적비성의 팔뚝에 기대자 뜨끈한 열기가 전해져왔음.
벌레가 기어들까봐 등불을 끄고, 가만히 고개를 돌려보니 은은한 달빛이 적비성의 옆얼굴을 비추고 있었음.
길다란 속눈썹, 무뚝뚝한 콧날. 세상의 고집과 오만은 다 모아놓은 듯한 입술 위에서 고수답게 깊고 고른 숨결이 흘렀음.
관심이 없는 건지, 아니면 없는 척하며 또 나를 놀리려는 건지-
요즘 알게 모르게 농짓거리를 치는 적비성의 속을 헤아려보며 이연화는 솔솔 잠이 쏟아졌음.
다음날 아침.
이연화는 늦잠을 잤어.
이미 해가 높이 떴고 탁탁 소리가 나서 내려다보니, 적비성이 마당에 앉아 나무를 깎고 있었음.
“뭐하는 거야...? 아침부터.”
적비성이 하품을 하며 나오는 이연화를 흘끗 쳐다보고 대꾸했음.
“네가 선반을 고치고 싶다고 했잖아. 방가 녀석이 재목을 갖다주고 갔다.”
이연화는 적비성이 소매를 어깨까지 걷어부치고 작업하는 모습을 보다가 웃음이 나왔음.
방소보 녀석, 완품을 사 올 수도 있었을텐데. 아비에게 심술을 부리려고 일부러 나무토막을 던져주고 갔네.
아마 적비성도 알텐데 말없이 나무를 깎고 있는 것도 어쩐지 귀엽다 싶었음.
이연화는 작은 걸상을 갖다가 적비성의 옆에 앉아 구경했음.
핏줄이 선 손이 능숙하게 나무를 돌리면 단도가 주욱 미끄러지며 목재의 표면을 베어내렸음.
보기에는 쉬워 보였지만, 강목을 그렇게 무 깎듯 하는 건 예삿일이 아니었지.
아마 단도가 잘 들긴 하겠지만 상당한 내력을 싣고 있는 거였음.
근육이 불룩거리는 두꺼운 팔뚝은 바로 어제도 베고 잤고, 숱하게 안겨도 봐서 익숙하지만. 이연화는 새삼스레 바라보았음.
비풍백양도, 상이태검도 각자 정점에 다다라 초술로 우열을 가릴 수는 없었음.
승패를 내는 건 술자의 내공과 재간에 달려 있었음.
이연화는 외공이 강한 편은 아니었어. 하지만 적비성은 완력이 대단했지. 강건한 몸은 충격에도 강하겠지만 이연화의 체술은 상대에게 닿지도 않는 듯 흘려보내는 솜씨가 귀신같았음.
분명 적비성은 이연화보다 나이가 많아. 둘 다 어렸을 때부터 수련해왔지만 수련한 방식도, 재능도 달랐어.
적비성도 영리하지만 이연화는 천재라 불릴 정도의 경지였어.
그렇게 다른 두 사람의 싸움은, 동해대전에서 이상이가 중독됨으로써 불완전하게 막을 내렸음.
도대체 누가 더 강할 것인가.
이연화는 호젓하게 앉아 적비성의 존재를 대면하며, 마음 속에 처음으로 순수한 의문이 떠올랐음.
그의 열망을 이해할 것도 같았어.
단지 겨루고 싶고, 단지 느끼고 알고 싶은 것이지.
이연화가 천천히 입을 열었음.
“적맹주, 너는... 궁금하지 않아?”
“뭐가?”
이연화가 말하자, 적비성이 재깍 손을 멈추며 쳐다보았음.
매우 교활한 눈빛. 무슨 뜻인지 뻔히 알면서 그런 사실을 드러내는 것에도 아무 거리낌이 없는 뻔뻔스러운 눈빛을 보자 역시 부아가 치밀었음.
“그러니까...”
이연화는 어물어물 말끝을 흐리다가 홱 소매를 뿌리며 내뱉았음.
“...이제는 세우지 않고 나랑 싸울 수 있지?”
적비성이 시원스럽게 웃음을 터뜨렸음.
“나랑 싸우고 싶나, 이상이?”
능글맞게 도발하는 말에 이연화가 미소지으며 말했어.
“그래, 적맹주. 이번에야말로 허심탄회하게 싸워 보자고.”
두 사람이 평소 수련장으로 이용하는 대숲에 서자 쌀쌀한 바람이 휘몰아쳤음.
우뚝 선 적비성으로부터 한 발 양보하려는 눈빛을 읽어낸 이연화가 먼저 몸을 솟구쳐 검기를 뿌렸음.
적비성은 대도를 뽑지 않은채 검집으로 막아내며 조금씩 뒷걸음질을 쳤음.
소사검은 파괴되었지만, 천기당에서 제작해 준 검도 명도였어. 상이태검은 이미 숱하게 맞받아본 적 있어 매서운 공격을 받을 때마다 느껴지는 팔의 저림이 친숙하게 느껴질 정도였지.
이연화는 이번만큼은 마음을 비우고 전력을 다하려고 생각했음. 그런데 싸우다보니 어쩐지 적비성이 슬슬 물러나는 것처럼 느껴졌음.
그러다 헛점을 발견한 이연화가 검을 휘두르자, 적비성의 소매자락 아래가 치익 하면서 아슬아슬하게 찢겨나가고 말았음.
“뭐하는 거야!”
이연화가 화를 내자, 적비성은 말없이 씩 웃으면서 초식을 재개했음.
그런데 다시 싸워봐도 이상했어.
틈이 보이면 가차없이 강풍으로 공격하고, 상대가 발 딛을 자리도 만들지 못하도록 주변을 도려내어버리는 듯한 적맹주의 초술이 아니었지.
강격으로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끌어당기는 듯, 직선으로 뻗어야 할 공격들이 자꾸만 비스듬하게 허공으로 빗겨 날아가자 본래 적비성의 전투법에 익숙한 이연화는 정신이 산란해졌음.
두 사람은 고도의 무공을 지닌데다 막상막하였기 때문에, 아주 작은 헛점도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 있었어. 살기는 하나도 없는데다, 호쾌하게 장을 내지른 다음 쓸데없는 틈을 두었다가 뱀같은 발걸음으로 주변을 맴도는 적비성의 보법은 어째 이상이를 흉내내는 듯이 괴상했지.
이연화는 생경한 적비성의 초술에 긴가민가하며 임기응변으로 피하다가 한순간 저도 모르게 말려들고 말았음. 잠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싶자, 이미 몸이 적비성의 품 속에 들어가 있었지.
사실상 진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지만.
애초부터 적비성에게 거침없는 살심을 가졌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쉽게 마음이 흔들린 거였어. 아무래도 정정당당하게 초술을 겨룬 게 아니고 농락을 당한 것만 같아 이연화가 이건 무효라고 외치려 하는데, 적비성이 웃으면서 입을 맞추었음.
은은하게 끼치는 거친 향기를 느끼며 입술을 쪼옥 빨리자, 이연화는 당장에 전신의 힘이 빠지는 것 같았어.
---역시 이거냐고- 진지하게 싸울 생각은 없었던 거지?!
그러나 적비성은 이연화가 옴쭉 달싹도 못하도록 잡고,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또 입맞추곤 꼬옥 안기만 했어.
이연화는 이도 저도 아닌 상황에서 축 처진 손에 간신히 검을 매달고는 점점 부끄러워졌음.
“이상이.”
“뭐야...!”
자포자기한 이연화가 숨막히게 안긴 채 대꾸하자, 적비성이 말했음.
“나는, 너에게만은 절대로 지고 싶지 않다.”
“어련할까...”
“그런데.”
적비성은 이연화가 도망치지 않을 것을 확인하고 한 손으로 살짝 얼굴을 꼬집었음.
“왠지 너에게 맞는 것은 기분이 나쁘지 않아.”
이연화가 살풋 흘겨보았음.
“적맹주 너... 점점 변태가 되어가는 거 아냐?”
비아냥거리는 말을 무시하고 적비성이 물었음.
“너는 어느쪽인가? 나에게 이기고 싶어?”
그렇게 묻는 얼굴이 묘하게 짓궂어 보여서 떨떠름해진 이연화가 시선을 피하며 말했음.
“...바보 같으니. 보통 연인들은 승패를 놓고 다투지도 않는다고...”
이연화의 말에 적비성이 웃었음.
그가 놓아주지도 않고 다른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닌 채 계속 웃고만 있자 양팔을 꽁꽁 잡힌 이연화가 볼멘 소리로 내뱉았음.
“뭐야? 싸우려면 싸우든지, 아니면...”
“우리가 연인인가?”
그제사 이연화는 별말없이 내뱉은 단어를 깨닫고 아차 싶었음.
“...우리가 아무 사이도 아니라면, 내가 방탕하게 너랑 그런 짓을 하겠어?!”
이연화는 바락 화를 내며 무렴함을 덮으려고 했음.
“너도 나에게 마음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 하지만 이 입으로는 한 번도 인정한 적이 없었어.”
꼭 피하고 싶은 부분만 따박따박 쪼아대는 것이 역시 이순간만은 검으로 찔러버리고 싶게 얄미웠음.
“사내가 앵알앵알 지껄이면 뭐하는데! 맘에 안들면 당장 놓고 떠나라구!”
하지만 그 자신이 앵알앵알 소리치고 있는 이연화는 정말 누구도 본 적이 없는 이상이이자 이연화일 것 같았지.
이 순간 즐거운 얼굴로 웃고 있는 적비성도 누구도 본 적이 없는 적맹주일 거야.
적비성이 양 팔에 더욱 힘을 주어 이연화의 허리를 감싸면서 말했음.
“이제껏 나는 한 번도 너를 놓아준 적이 없었다.”
몸을 젖혀서 피하려는 이연화를 쫓아갈 듯 약을 올리며 그가 속삭였음.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거야.”
곧 익어 터지기 일보 직전에 이연화는 내력을 왕창 써서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음.
그러고 났더니 이연화의 얼굴에도 어쩔 수 없는 웃음이 떠올랐지.
“오늘은 정말로 이길 생각 말라고, 적비성!”
이연화가 똑바로 검을 뻗으며 겨누자.
비스듬히 서서 도의 손잡이를 잡은 적비성이 어서 오라는 듯 손짓했음.
***
방다병이 도착했을 때 이연화는 또다시 몸져 누워 끙끙 앓고 있는 상태였음.
그 옆에서 적비성은 보양이라도 한 것처럼 상쾌한 얼굴로 앉아 찻잔을 비우고 있었어.
“너희들 말야, 피해가 안 가는 곳에서 좀 싸워줄래? 저 대숲은 귀한 건데 엉망진창이 됐잖아!”
그래도 호기심은 이기지 못한 듯, 그가 말투를 누그러뜨리며 물었음.
“그래서... 누가 이겼는데?”
적비성이 피식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음.
“남의 부부의 일에 신경 꺼라, 방다병.”
---아니, 우리가 언제 또 부부가 됐어?!
구석에 누운 이연화는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입을 댔다간 더 골만 아파질 것 같아서 돌아누운 채 눈을 질끈 감았음.
너넨 오늘 밥도 없어!
괜시리 캐묻는 방다병에게까지 뾰족한 화살을 돌리며 이연화는 억지로 잠을 청했음.
*누가 이겼는지는 아무도 모름 나도모름
이연화가 몸져누운 건 물론 비무 때문이 아님.
비성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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