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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8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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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끝물이라고 하지만 이곳은 외지였고 산에 둘러쌓여 아침과 밤에는 꽤 쌀쌀했다.
이 곳은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다. 전시관도 이제는 휴관이었고 오고가는 사람은 직원들 뿐이라 만나는 것도 극히 드물었다. 회의가 정해져 있지 않으면 점심시간도 자유롭게 정할 수 있었다. 장소가 시골이라 식당있는 곳까지의 거리도 꽤 멀었기 때문이었다.

장철한은 건물 뒤 벤치에 앉아 에너지바를 까서 먹었다. 일부러 멀리 식당까지 가는 것도 번거롭기도 하고 숙사에 가서 라면을 끓여먹는 것도 귀찮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무릇 모범적인 생활을 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장철한은 커피와 에너지바를 먹으며 검색을 했다.

’가슴이 뻐근해지는 증상‘

식도염? 협심증?

흠...

나오는 검색결과는 좋은 내용이 아니었다.
이번에 병원에 갈 때 검사를 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꿈은 꿔도 이런 고통은 처음이었고 또 몇 번 번복되니 신경이 쓰였다.

그 때 건물 밖으로 나오는 공준과 눈이 마주쳤다. 요 며칠 민망함 때문에 잘 피해다녔다고 생각했는데 1:1로 마주치고 말았다. 장철한은 속으로 ‘으악!’ 비명을 지르며 어정쩡한 모습으로 벌떡 일어났다.

그 날 악몽에서 깬 이후 장철한은 새벽이 되서야 잠깐 잠이 들 수 있었다. 그 때까지 그의 방에서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으니 공준은 아마 밤을 샜을지도 모르겠다. 시끄럽게 꿈을 꾼 저 때문에 잠이 설쳤을 그에게 미안했다. 아침에 일어났을때 다시 한번 사과를 하고 싶었지만 그의 방이 너무 조용해서 자는 걸로 알고 그냥 나와버렸다.

공준도 장철한을 보고 눈이 살짝 커졌지만 가볍게 목례만 하고는 주차장 방향으로 걸어갔다.
장철한은 서둘러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그의 뒤를 쫓았다.

"저기요, 팀장님!“

공준이 뒤를 돌아봤다. 장철한은 미안한 얼굴로 커피를 내밀며 말했다.

"저번에 저 때문에 잠을 설치셨죠. 미안해요."

"아니에요.”

공준은 장철한이 내민 커피를 잠깐 보다가 손을 내밀어 받았다.

“그 후로 잠은 좀 잤어요?”

“네. 팀장님은요?”

“저도 금방 잤어요.”

장철한은 물론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공준이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혹시, 지금 지내는 숙사가 맞지 않는다면 다른 방으로 바꾸셔도 돼요."

공준의 말에 장철한의 눈이 살짝 커졌다.

"네?"

"침대가 불편하거나 해서 안 좋은 꿈을 꿀 수도 있으니까요. 비어있는 방은 아무곳이나 써도 상관없어요. 사무실에 미리 말만 해주신다면.“

공준은 그 후로도 장철한이 침대에서 뒤척이는 소리를 몇번 들었다. 듣지 않으려고 해도 숙사 벽이 워낙 얇아 어쩔 수 없었다. 장철한은 제대로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 그건 그냥..."

순간 장철한은 말을 멈췄다.

어릴 때부터 꿨던 꿈 때문이라는 말을 굳이 그에게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공준은 다음 말을 기다리는 눈빛으로 장철한을 쳐다봤다. 장철한은 손으로 안경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냥 피곤해서 그랬던것 같아요. 일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조심하도록 노력할게요.“

"잠깐만요. 그런 뜻이 아니에요."

공준이 머리를 긁적이며 덧붙였다.

”조심해달라는 말이 아니고.. 오해하지 마세요. 그게, 조심한다고 악몽을 안꾸는 것도 아니니까... 아... 그러니까 제 말은.“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장철한의 말에 공준은 당황했다.
나름 말을 조리있게 잘하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순간은 머리 속이 까맣게 되어서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공준의 어깨너머로 걸린 박물관의 시계를 보며 장철한이 말했다.

”오해안하니까 걱정마세요, 벌써 2시네요. 제 점심시간이 끝났어요.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장철한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서둘러 박물관 쪽으로 사라졌다. 공준은 그런 장철한의 모습을 눈으로 쫓다가 그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그제서야 움직였다.



장철한은 밤늦게까지 전시관 로비에 설치할 인공나무의 조명을 달고 있었다. 나무를 만들고 그 아래 피장자의 인물모형을 만들어 세우는 계획이었다.

나무가지와 잎사귀 뒷면에 전부 led조명을 달아야했다. 어렵지는 않지만 꽤 시간을 잡아먹는 작업이라 장철한은 늦은 시간까지 혼자 남아 작업을 하고 있었다.



높은 사다리의자에 앉아 조명을 붙인 나뭇잎을 달았다. 조용한 관내 분위기가 어색해서 장철한은 헤드셋으로 음악을 들으며 작업을 하고 있었다. 어깨와 허리가 뻣뻣해졌을 때 쯤 유리 너머의 반지를 보게 되었다.

고운 기름을 듬뿍 머금은 듯 은은하게 빛나는 양지옥-

장철한은 사다리 의자를 가져가 아예 그 앞에 앉아 천천히 관찰했다. 그러다 손을 뻗어봤다.
유리로 막혔지만 어쩐지 손에 만져지는 느낌이었다.

따뜻하고 윤기가 흐르는 이 반지는 천년동안 차갑게 식어있던 피장자를 뎁혀주고 있었을까.

그 때 문득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이렇게나 피장자에게 애정을 쏟았던 사람은 어디에 묻혔을까.
나라면 같이 묻혔거나 무덤 옆에 묻혔을 것 같은데.
하지만 피장자 근처에선 많은 유물이 발견됐을 뿐 다른 미라나 인골이 발견됐다는 자료는 보지 못했다.


다시 작업을 시작하고 시간이 지나니 눈이 피로했다.
장철한은 잠깐 쉬고 일어나기로 하고 사다리에서 내려와 벽에 기대앉아 눈에 안약을 넣었다. 손을 비벼 마찰로 따뜻해진 손바닥으로 두 눈을 지긋이 누르며 마사지를 하고 있었을 때였다.
그 때 머리카락을 스치는 부드러운 바람을 느꼈다. 손을 내리고 주변을 쳐다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실내에서 바람이라니.

잠시 생각하던 장철한은 몸이 피곤해서 이런 착각도 하는 거라며 결론을 내리고 짐을 정리하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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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차. 나오지 말라니까.“

주자서는 곧 날아갈 것같은 마른 몸으로 창가에 기대어 온객행을 지켜보고 있었다.

”네가 잘 하나 지켜봐야지. 넌 내가 그 씨앗을 심을 때부터 투덜거렸잖아. 대우를 잘하고 있는지 두 눈으로 봐야겠어.“

“네가 걱정을 하는게 내 허리가 아니라 겨우 이런 씨앗을 걱정한다는 것이 믿을 수가 없어. 대체 이게 뭐길래?“

온객행이 엄살부리며 굳어진 허리를 두드렸다.

주자서는 지난번 온객행과 절에 다녀오며 웬 씨앗을 가지고 왔다. 그것을 어디에서 얻었냐는 온객행의 질문에는 웃음으로 대답했다.
그는 사계산장에서 햇볕이 제일 잘 드는 곳에 씨앗을 묻었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가 무엇을 심었는지 궁금한 온객행이 결국 씨앗을 돌보기 시작했다.
씨앗은 따사로운 장소에서 튼튼한 뿌리를 내고 곧 싹을 틔웠다. 자라는건 더뎠으나 건강했다.

온객행은 겨울이 오기 전에 화초를 좀 더 해가 드는 곳으로 옮겨심는 중이었다.

“겨우 화초하나 옮겨 심는 걸로 투덜대기는.”

”내가 언제 투덜거렸어? 이 화초가 자라면서 네가 기침을 더 하는 것 같아서 그런거지.“

”화초탓이 아니라고 수십번 말했잖아. 이 가짜 의원아.

사실 그건 병의 진행 때문이었지 절대 화초 탓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서로는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투닥거렸지만 속으로 진심은 아니었다. 그들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늘 이랬고, 주자서의 병이 깊어지면서 휴전에 들어갔다. 근래 주자서는 무슨 일인지 전보다 체력이 좋아져 온객행이 무엇을 하든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고 그것을 온객행은 속으로 매우 기쁘게 생각하며 맞받아쳤다.

온객행은 흙이 묻은 손을 닦고는 주자서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옷을 걸쳤다. 바람 하나도 그를 스치게 하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함부로 대하지마.“

”감히 누가 그러겠어.“

온객행은 주자서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주자서의 입술은 매우 차가웠다. 온객행은 잠시동안 주자서의 입술을 머금고 따뜻한 숨을 불어넣었다.

“들어가지. 아주 맛있는 차를 끓여줄테니.“

온객행은 입술만큼 차가운 주자서의 손을 끌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한밤 중 주자서는 조용히 방문을 닫고 나왔다.
온객행이 낮동안 옮겨 심은 화초는 아직 새 장소에 적응을 못했는지 힘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주자서는 다정한 손길로 화초를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너는 내가 세상을 떠나더라도 남아서 그를 위해 꽃을 피워야 한다. 그것이, 내 유일한 바램이다.“

주자서는 알고 있었다. 지금의 몸상태는 해가 지기 직전에 잠깐 하늘이 밝아진다는 것과 같다는 것을.
주자서는 주술이나 사도따위엔 무지했다. 그저 마음이 가는대로 움직일 뿐이었다.

달이 눈부시게 밝아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은 밤-

자신의 중지를 깨물어 피를 낸 후 화초 위에 뿌리던 주자서의 염원이 무엇이었는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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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다 일어난 장철한은 숨을 고르게 쉬며 가슴을 눌렀다. 방금까지 지난번과 같은 꿈을 꾸었다.
그날 이후로 자주 같은 꿈을 꾸고 있는데 정말 잠자리가 바뀌어서 이런 건지 궁금했다.

두려움보다는 가슴이 아프고 아린 이 느낌이 뭔지.
매번 자신을 두고 가버리는 사람은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
이 답을 알려줄 사람이 간절했다. 정말 오죽하면 점집에 가볼까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장철한은 옷을 걸치고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바스락거리는 잎들을 밟으며 전시관 근처를 돌았다. 전시관 주위는 산으로 둘러쌓여 있어 공기가 매우 쾌적했다.
새벽이라 전부 불이 꺼져있는데 벤치 옆 자판기만 빛이 나고 있었다. 갑자기 따뜻한 걸 마시고 싶어 주머니를 뒤졌지만 지갑을 놓고 나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돈을 가지러 다시 숙사까지 가기 귀찮았던 장철한은 그냥 벤치에 앉아 바람을 쐬었다.

얼마 전까지 더웠는데 벌써 춥다는 생각이 들다니...맨발이 시렵다는게 헛웃음이 났다. 그 때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몸을 차게 하면 안돼.’

깜짝 놀란 장철한은 뒤를 돌아봤으나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없는게 당연한게 벤치 뒤로는 넝쿨이 뒤덮힌 담이었기 때문이었다.

꿈의 연장인가. 잘못 들은거겠지.

놀란 마음이 사라지자 왠지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헛소리를 들었다 쳐도 누군가 자신의 건강을 염려해 준 게, 요 몇 년 간 그런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어서인지 외로운 감정이 밀려왔다. 코 앞에 둔 수술 때문일 수도 있었다. 장철한에게 있어 외로움이란 굉장히 당연한 거였는데 이 순간만큼은 버거웠다. 혼자가 아니었으면 바랬다. 누군가가 곁에 있기를 원했다.


장철한은 떨리는 두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제발...나에게 뭘 원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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