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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1 22:33
망천화처럼 이연화 해독할 수 있는 약초가 있는데, 형질을 바꾸는 부작용이 있어서 떨떠름해하던 이연화와 그런 게 뭐가 중하냐 하던 주변사람들이 우당탕하는 게 보고싶다로 시작했던 거 2.5부 8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다음날 아침, 이연화의 눈과 얼굴은 말끔히 나았다. 다만 이연화는 잠에서 깼을 때부터 심기가 상해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일어나자마자 이연화의 상태를 확인한 방다병이 다행이라는 말과 함께 안도의 미소를 지었으나, 이연화는 조금도 웃지 못했다. 어젯밤의 일을 좀처럼 믿을 수가 없었다(자신을 지금껏 그런 식으로 다룬 사람은 칠목산 하나뿐이었으며, 그조차도 열 살 이전까지였다!). 민망한 동시에 꽁해지는 마음을 막을 길이 없어, 이연화는 연화루 내부에 소변을 본 불여우를 탓하듯이 방다병을 바라보았다. 영 심상찮은 낌새를 느꼈는지, 방다병은 상대를 진정시키기 위한 웃음을 해해 흘리며 달래는 소리를 냈다.
"너무 그러지 마. 잘 나았으니 다행이잖아."
"이거나 빨리 풀어."
이연화가 미간을 잔뜩 좁힌 채 쏘아붙이자, 방다병이 얼른 고개를 끄덕이고는 붕대를 잘라주었다. 방다병이 손을 풀어주는 동안, 이연화는 그 정수리를 노려보며 마음껏 투덜거렸다. "너 말이야, 대체 이게 무슨 막돼먹은 짓이야? 망신을 주는 것도 정도가 있지. 어떻게 다 큰 사람을, 그것도 네가 어릴 적부터 스승이라고 노래를 부르던 사람을 그렇게 애처럼 다룰 수가 있어?" 아무렇게나 잘린 붕대를 재빨리 내려놓고, 방다병은 양손을 가슴 앞에서 가볍게 모아 잡으며 사과했다.
"미안해, 어제는 정말 걱정돼서 그랬어."
"이건 쉽게 넘어갈 일이 아니야, 방 공자. 아무리 의도가 좋더라도 사람을 마음대로 휘두르면 안 되지."
"그래, 네 말이 맞아. 내가 잘못했어. 다음에는 먼저 얘기부터 할게. 화 풀어, 응?"
방다병이 양손으로 이연화의 오른팔을 잡고는 가볍게 흔들었다. 무해하고도 귀여운 모습이었으나, 그 말의 내용을 놓치지 않은 이연화의 눈이 가늘어졌다. 다음엔 얘기부터 한다니, 다시 안 그러겠다는 말은 못하는군. 이연화가 방다병의 손을 탁 떨쳐내고는 돌아앉았다. "내가 여생을 이렇게 살려고 하는 참이라니, 정말 믿을 수가 없네." 상대를 제대로 보지도 않은 채 불만스럽게 중얼거리자, 방다병의 얼굴로 퍼뜩 경각심이 번졌다. 청년은 이미 동그래졌던 눈동자를 더욱 보름달처럼 뜨며 이연화의 팔을 끌어당겼다. 이연화가 짜증스럽게 돌아보자, 방다병은 염려가 배어나다 못해 흘러넘치는 태도로 조르듯 호소했다.
"진짜 미안해, 응? 네가 끝까지 싫다고 했으면 강요하지 않았을 거야. 그런데 아비가 널 재워버려서-."
"수면혈 정도는 네가 풀어주면 되잖아, 공범이면서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해?"
이연화가 다시 고개를 홱 돌리며 투덜거렸다. 방다병이 잔뜩 시무룩해진 얼굴로 대꾸하기 전, 근처에서 냉랭한 코웃음이 들려왔다. 뚱하게 돌아보자, 팔짱을 낀 적비성이 퍽 헛짓거리를 한다는 눈으로 이연화를 응시하던 참이었다. "화가 나면 이러쿵저러쿵하지 말고 차라리 덤비기나 해라. 네가 그런 어중이떠중이의 공격을 피하지 않아 자초한 일인데, 무슨 말이 그리 많은지 모르겠군." 적비성이 당당히 건넨 말에, 이연화가 건조하게 대꾸했다.
"자기 행동을 내 탓으로 돌리지 마, 적 맹주. 말을 안 듣는다고 바로 혈도를 짚다니, 나는 네 각인 상대지 포로나 수하가 아니라고."
"심각한 척 하지 마라. 네가 정말 원했다면 방다병이 감은 붕대도 진즉 풀 수 있었고, 내가 마비혈을 찍었을 때에도 바로 풀 수 있었어. 나와 방소보가 너이기 때문에 과격하게 행동했던 것처럼, 너도 우리였기 때문에 여지를 준 것이지.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테니, 그게 정 마음에 안 든다면 다음부터는 바로 방어를 해라."
억. 이연화는 세상에서 한 손에 드는 철면피를 만난 사람답게 뒷목을 짚으며 눈을 감았다. 상대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점이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적비성의 말처럼, 손에 칼이 없더라도 마음만 먹는다면 붕대쯤은 금방 풀 수 있었다. 또한 혈을 짚였다 해도, 지체하지 않고 바로 힘을 썼다면 마비된 몸을 자유롭게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거야 적의 손에 잡혔을 때의 이야기고! 금원맹주의 태연한 얼굴을 삿대질하며, 이연화는 나무를 쪼는 딱따구리처럼 빠르게 따졌다.
"너희를 믿어서 가만히 있다가 봉변을 당한 게 내 탓이야? 그럼 뭐, 앞으론 너희를 기본적으로 신뢰하더라도 긴장의 끈을 완전히 놓진 말라는 거야? 내가 앞으로 너랑 방소보를 운피구처럼 대하길 원해? 정말 그런 거야?"
"이연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지금 운 원주가 했던 짓과 어젯밤의 일을 비교하는 거야?"
"지금 그런 비겁한 배신자와 나를 동일선상에 둔 거냐? 무례하군, 이연화."
두 사람의 얼굴이 대뜸 우그러지는 광경에, 이연화는 그만 이마를 짚으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분명 똑똑한 녀석들이었던 듯한데, 가끔씩 왜 이리 멍청해지는 걸까? 예전에는 그나마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속을 썩이는 듯하더니, 각인한 뒤로는 자주 한 쌍이 되어 동시에 복장을 뒤집곤 했다. 이연화가 이를 반쯤 악문 채 신음하듯 말했다. 푹 자고 일어난 참이건만 어째선지 피로감이 밀려왔다.
"지금 그 말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난 너희 앞에서 조금도 긴장하기 싫다는 뜻이야. 다음부턴 내 의사와 관계없이 날 재우거나 하지 마. 알겠어?"
"알았어, 알았어. 미안해."
방다병이 순순히 양손을 모으며 약속했다. 적비성은 물론 사과하거나 약조하는 대신, 팔짱을 낀 채 슥 고개를 돌려버렸다. 저 뻔뻔한 꼴을 평생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보고 살아야 하다니, 내가 정말 현명한 선택을 하는 중일까? 번민에 휩싸인 이연화의 시선이 더욱 뾰족해졌다. 하기야, 합리성을 따졌다면 애초부터 이런 처지에 놓이지 않았을 터였다. 이연화가 심란한 한숨을 길게 내뱉자, 적비성이 눈썹을 찌푸린 채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알았으니 앞으론 잘 생각하고 움직여라. 만에 하나라도 그 자가 이성을 잃고 극독을 뿌렸다면, 이렇게 대화하지도 못하고 약마를 찾아갔을 거다."
"끝까지 남의 탓은."
이연화가 뿔이 난 투로 꿍얼거리면서 팔짱을 끼었다. "아비는 네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 너무 화내지 마. 응?" 이연화에게 바짝 다가앉은 방다병이 애교를 부리듯 건넸다. 이연화가 어이없게 상대를 흘겨보았다. "뭐야, 방소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비한테 대마두니 뭐니 했으면서, 이제는 편도 들어주네." 방다병이 선량하고도 머쓱한 웃음을 머금은 채 이연화의 한쪽 팔에 팔짱을 끼었다. 어머니의 화를 풀어주려는 아들처럼 행동하지 말라 건네려던 때, 다급한 발소리가 방 앞으로 가까워졌다.
곧 벌컥 열린 문으로, 생정이 구르듯이 들어왔다. 잔뜩 창백해진 얼굴이 땀에 젖어 있었다. 지금껏 보여준 연륜에 어울리지 않도록, 그 태도가 퍽 부산스러운 데다 겁에 질려 있었다.
"대협들. 피가...취화탕에 피가 가득합니다!"
생정이 혼비백산해 외쳤다. 세 사람이 잠시 시선을 교환했다. 이연화가 짐짓 놀란 표정을 지은 채 물었다.
"피라고요? 취화탕이 핏빛으로 물든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만, 그런 현상이 또 일어난 것 아닙니까?"
"아이고, 아무리 그래도 정말로 피비린내를 풍긴 적은 없었습니다. 가까이 가서 확인해 보니 정말로...정말로 피가 섞여 있지 뭡니까!"
생정이 흙빛에 가까운 안색으로 전했다. 이연화가 심각한 얼굴을 하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떻게 이런 변이...정말 괴이한 일이로군요."
"취, 취화탕의 물을 뺄 것이란 소문을 냈기 때문일까요? 정말로 귀신이 존재하고, 자신의 터를 빼앗기기 싫어 벌인 일이라면...."
생정이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방다병이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턱을 매만졌다. "그러고 보니, 그런 기현상을 종종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귀신이 붙은 땅이나 물건을 함부로 없애고 망가뜨리려 들면, 노한 귀신이 신묘한 방식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지요." 생정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장년인은 5년 전의 난리통이 떠오르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고는 물었다.
"이를 대체 어쩌면 좋겠습니까? 그저 물의 빛깔이 변할 때에도 흉한 소문이 돌았는데, 지금은...하필 여러 일꾼들이 작업하러 들어갔을 때에 그런 변고를 발견한 바람에, 소문을 도무지 막을 수가 없었어요. 객잔 사람들이 모두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일단 가서 한 번 보지요."
이연화가 얼른 일어서며 말했다. 생정이 떨떠름한 얼굴로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이 취화탕 부근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객잔의 일꾼들이 죄다 모여 있었다. 그들은 차마 탕 가까이에 다가가지 못한 채, 꽃나무 앞에 둘러서서 숙덕거리던 참이었다. 그들 중에는 일행이 첫날 만났던 세 여자도 끼어 있었다. 탕에 조심스레 다가간 이연화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생정의 말대로, 탕 근처에 다가갈 때부터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이연화는 벌건 물에 부적 한 장을 담그고는 무슨 말을 읊조리는 시늉을 했다. 방다병이 그 팔을 잡아끌었다.
"조심해. 악귀의 사기가 옮겨붙을지도 몰라."
"괜찮아. 이 탕에 서린 원혼은 분명한 목적이 있어."
이연화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오른손에 들린 부적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멀찍이서 지켜보던 생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 대협은 원혼의 기운을 느낄 수 있습니까?"
"내세우기엔 부끄러운 말이지만, 저는 법술에 조금 조예가 있습니다. 때로는 아직 제 길을 찾지 못한 영혼과 소통하여 복잡한 상황을 해결하기도 하지요. 어르신의 말대로, 이 탕에는 귀신이 들려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크게 노해 있군요."
이연화가 낮지만 힘을 준 목소리로 말하자, 생정뿐 아니라 멀리서 귀를 쫑긋 세운 채 듣고 있던 일꾼들이 일제히 놀란 소리를 내며 수군거렸다. "그래, 맞아. 저 대협께서 법술을 익혔다고 하셨어. 몸을 떠난 혼백과 대화한 적도 있다고." 미아의 말에, 근처의 사람들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이연화를 바라보았다. 어떤 해결책을 간절히 기대하는 태도였다. 잠시 고민하던 이연화가 엄숙한 태도로 이야기했다.
"어르신, 아무래도 제를 지내야겠습니다."
"제, 제를 말입니까? 어떻게 준비하면 되겠습니까?"
"화려하게 준비할 필요는 없습니다. 상은 소박하게 차리되, 여기 있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 진심으로 치성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그러면...그러면 이런 변고가 멈추는 겁니까?"
생정이 떨며 물었을 때, 이연화의 손에서 무언가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좌중의 시선이 그편으로 쏠렸다. 이연화가 들었던 피 묻은 부적이,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잡아뜯긴 것처럼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그 현상을 목격한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그와 거의 동시에, 이연화가 이마를 짚으며 잠시 휘청했다. 방다병이 놀란 얼굴로 그 몸을 부축했다. "괜찮아?" 현기증을 추스르는 사람처럼 한 손을 내저으며, 이연화는 천천히 상체를 세웠다. 침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마도...이 원혼은 복수를 원하는 듯합니다. 오래된 살의가 서려, 그 독기가 어마어마하군요."
여러 사람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개중 가장 어린 일꾼 하나는 양손으로 입을 가린 채 울음을 참기까지 했다. 이연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그 원한이 뭇 사람들을 아무렇게나 향한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 중, 귀가 원한을 품은 자가 있는 듯한데...설령 죽을 죄를 지었단들 산 자의 목숨을 죽은 자가 취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으니, 제를 지내며 원혼을 달래보도록 하지요."
"아니, 대체 무슨 원한을 품었기에 이런 흉한 일을 벌인단 말입니까?"
생정이 두렵고도 답답한 얼굴로 물었다. 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듯 집중하던 이연화가, 이내 안타까운 얼굴로 한숨을 토했다. "원혼이 너무도 노해 있어, 그 사연을 제대로 들려주지 못합니다. 일단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오늘 저녁, 식당에 상을 차리고 모두 모여주십시오. 그럼 제가 법술로 혼을 달래보겠습니다." 생정이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저녁, 객잔의 모든 사용인들은 하나둘 식당으로 모여들었다. 손님들을 위해 아늑하면서도 고급스럽게 단장된 공간이었으나, 그 누구도 편안해 보이지 않았다. 제사상 위에는 향이 꽂혀 있었는데, 아직 불이 붙지 않은 채였다. 일꾼들은 서로의 눈치를 힐끔힐끔 볼 뿐, 마음껏 소리높여 떠들지도 못했다. 몇몇 사람들만이 나직하게 '정말 오기 싫었으나, 이럴 때 핑계를 대고 빠지면 더욱 의심받지 않겠느냐' 하는 요지의 말을 주고받았다. 그조차도 흰 옷을 차려입은 이연화가 방다병과 함께 나타나자 잦아들어, 실내는 곧 옷 스치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해졌다. 이연화가 사람들을 향해 진중히 건넸다.
"자, 여러분. 이제 원혼을 달래기 위한 법술을 행할 것입니다. 기이한 현상이 벌어질 수도 있고, 제 일신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만, 부디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원혼의 극락왕생을 빌어주시길 청합니다. 섣불리 치성이 끊기면 원혼이 더욱 노하여, 원한과 무관한 이들까지 노릴지도 모릅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열렸던 문이 탁 닫혔다. 사람들이 헉 소리를 내며 돌아보았다. 문을 닫은 적비성이 왜 유난을 떠느냐 말하는 듯한 태도로 그 시선을 돌려주었다. 평소와 별다를 것도 없는 표정이었으나, 금원맹주의 시선은 보통 타의가 없다 해도 위압적이었으므로 사람들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럼 시작하지요." 그렇게 말한 이연화가 상 앞에 등을 보인 채 앉았다.
향에 불을 붙이고, 이연화는 부적을 한 장 태우며 주문 같은 말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디선가 엷은 안개가 피어올라 시야를 흐리게 뭉개놓았다. 놀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경거망동하지 마시오! 법술의 효과입니다. 죽은 자의 혼이 산 자의 부름에 응하는 것이오." 방다병이 퍽 위엄 있는 투로 외쳤다. 사람들이 얼른 입을 다물고는 치성을 이어갔다.
이윽고 주문을 멈춘 이연화가 입을 열었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 말은 묘하도록 또렷하게 울렸다.
"원혼에게 할 말이 있다 합니다. 이 안에...모인 사람들 중에 자신을 죽인 자가 있다고 하는군요."
모인 사람들이 처음으로 큰 소리를 내며 서로를 돌아보았다. "죽였다고?" "무슨 소리지? 살해당했다는 거야?" "여기서 사람이 죽었다니, 그건 5년 전 일인데." "설마...양연인가?" 그 이름이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온 순간, 몇 사람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양연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이었다. 이연화가 긴장한 목소리로 이었다.
"이 자리에서 죄를 고하지 않으면, 그 자를 처참하게 죽이고 객잔의 사람들까지 해코지하겠다 합니다."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공기처럼 은은히 깔려 있던 두려움이 순식간에 그 덩치를 키웠다. "귀, 귀신이 그 이름을 알려주진 않습니까? 나오면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 사람이 제발로 나서겠습니까?" 생정의 곁에 섰던 호명이 잔뜩 떨며 물었다. 이연화가 곤혹스러운 한숨을 쉬었다.
"들리는 이름이 있습니다만, 원혼이 바라는 것은 그자가 스스로 뉘우치는 일입니다. 제가 말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귀신이 감히 산 사람을 해치는 일에 제가 일조할 수는...."
이연화의 말이 문득 흐려졌다. 갑작스러운 통증을 느낀 것처럼, 이연화가 윽 소리를 내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놀란 소리를 냈다. 이연화가 풀썩 쓰러진 것과 동시에, 피어오르던 안개가 폭발적으로 짙어져 사람들의 시야를 가렸다. "귀, 귀신이 노했다!" 누군가가 외치자, 장내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도망치려는 사람들이 출입구로 우르르 몰려갔으나, 누가 밖에서 막아버린 것처럼 문이 열리지 않았다.
"누, 누가 범인이에요? 정말 이 안에 있으면 빨리 얘기해요, 당신 때문에 우리 다 죽어도 상관없다는 거예요?"
공황에 빠진 미아가 새파래진 얼굴로 외쳤다. 하지만 나서는 자는 없었고, 이내 안개에 뒤섞여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소리의 출처를 찾아 사람들이 두리번거렸으나, 웃음은 비정상적인 속도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이윽고 차갑고 섬뜩한 바람 한 줄기가 화살처럼 쌕 불더니, 한 사람의 몸뚱이가 보이지 않는 맹수에 붙들린 것마냥 허공을 날아 바닥에 쿵 떨어졌다. 사람들이 높은 비명을 내질렀다. 엉덩방아를 찧은 사람이 아픈 소리를 내며 엉거주춤하게 바닥을 짚었다. 그 앞에, 녹색 겉옷을 걸치고 산발을 한 형상이 나타났다. 눈앞으로 늘어진 머리칼 사이에서, 시뻘건 눈가와 새하얀 피부가 불길한 빛을 발했다. 그 무시무시한 몰골에, 몇 사람이 소리를 치며 물러나거나 넘어졌다. "귀신, 귀신이야!" 미아의 동료가 크게 외쳤다.
"내 분명 기회를 주었는데도, 네 손으로 그 기회를 버리는구나."
귀신이 끔찍하게 긁히는 소리로 말했다. 그 시선의 끝에 주저앉은 남자가 창백한 얼굴로 뻐끔거렸다. 그 눈가가 발진으로 인해 붉게 일어나 있었다.
"그, 그럴 리가 없어. 그건 헛것이었어, 진짜 귀신이었을 리가...."
호명이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초면에 과묵하고 믿음직하던 그 인상은, 겁에 질린 시궁쥐처럼 잔뜩 뒤틀려 사뭇 다른 느낌을 풍겼다. 귀신의 형체가 허상처럼 흐릿해졌다가 호명의 뒤에서 나타나자, 사람들이 비명과 함께 손가락질했다. 퍼뜩 돌아본 남자가 발작하듯 도망치려 들었으나, 자리에 엎드린 귀신이 흰 손을 번개처럼 뻗어 그 발목을 확 잡아챘다. 남자는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한 채 고꾸라져, 눈을 크게 뜨고는 헐떡였다.
"네 입으로 실토하지 않으니, 약속대로 네 명을 가져가겠다."
그 말과 함께, 귀신의 손이 발목에서부터 점차 위편으로 올라갔다. 그 손끝에서부터 퍼지는 한기를 느낀 것처럼, 호명이 진저리를 치며 버둥거렸다. 그러나 도망칠 길은 요원했고, 호명은 곧 목줄기까지 닿은 손끝에 전율하며 살려달라 외쳤다. 그러나 감히 호명에게 가까워지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당한 고통을 똑같이 느껴봐라!" 무시무시한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리자, 호명의 눈으로 핏발이 섰다. 그 다리 사이가 약간의 습기로 젖어들며 고약한 냄새를 풍겼다. 호명이 땀에 번들거리는 얼굴로 외쳤다.
"알았-알았어! 말할게. 내가, 내가 죽였어!"
"더 자세히 말하지 못하겠느냐?"
귀신의 손가락으로 힘이 들어갔다. 캑캑거리던 남자가 더듬더듬 말했다.
"내가, 내가 널...양연을 죽였어!"
공포에 질려 허둥거리던 사람들이 우뚝 굳어졌다. 큰 공간이 일순 조용해졌다. 불신과 경악이 빚어낸 정적이었다. 귀신의 얼굴이 호명에게 바싹 다가갔다. 호명이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네 죄가 그뿐이냐?" 그 귓가에 숨결이 닿자, 호명의 다리 사이에 생겼던 얼룩이 조금 더 커졌다. "날 왜 죽였는지 말해." 귀신의 손톱이 그 목덜미를 살짝 파고들었다. 호명은 이제 발진이 돋은 얼굴로 줄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내가, 내가 도둑질하던 걸 네가 보고...날 협박해서...그래서, 도망치는 널 쫓아서...."
작다 못해 볼품없는 목소리였으나, 워낙 장내가 고요했으므로 사람들은 그 말을 무리없이 알아듣고 숨을 삼켰다. 모든 이가 놀랐지만, 개중에서도 생정은 사람 모양으로 만든 밀랍인형처럼 입을 벌린 채 경직되었다. 귀신의 눈이 가늘어졌다.
"네가 저지른 죄의 현장에서, 감히 귀신 소동을 벌인 것도 네놈이지 않으냐?"
"사람들을 못 오게 하려면 어, 어쩔 수 없었어! 거기 네가 비녀를 꽂아둔 바람에...."
호명이 정신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느새 그 얼굴에는 콧물마저 잔뜩 흘러 있었다. "살, 살려줘. 다 얘기했잖아. 네가 원하는 대로 다 말했으니, 부디 목숨만은 거두지 말아줘!" 남자가 처절하게 애걸했다.
귀신은 그 말에 불같이 화를 내는 대신, 호명의 위로 드리웠던 몸을 일으켰다. 유연하고도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 가운데, 귀신이 가볍게 양팔을 벌렸다. 곧 뼈와 근육이 움직이는 소리가 울리자, 호명을 비롯한 이들이 놀라 입을 쩍 벌렸다. 귀신의 몸이 한결 커지면서, 녹색 겉옷의 솔기가 툭툭 튿어졌다. 한편에 섰던 방다병이 얼른 다가가 흰 겉옷을 둘러주었다. 사방을 채웠던 안개가 어느새 한결 옅어져 있었다. 등을 쭉 편 귀신은, 길게 늘어진 머리를 대충 정리해 올리고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냈다. 능청스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자백하면서도 끝까지 고인을 탓하는 모양새가 썩 만족스럽지는 않네요. 하지만 어쨌든, 스스로 여러 사람 앞에서 죄를 인정했으니 반쪽짜리라도 인정해 드려야겠지요."
"어...? 이게 무슨...너...아니, 당신이...어제...?"
호명이 얼빠진 목소리로 두서없이 중얼거렸다. 닫혔던 문이 벌컥 열리며, 줄곧 출입구를 막았던 적비성이 나타났다. 그 손바닥이 일장을 날리자, 큰 바람이 일어 자욱하던 안개가 몽땅 사라졌다. 깨끗해진 장내에서, 흐트러진 잔머리를 귀에 걸어 넘긴 이연화가 싱긋 웃었다.
"워낙 오래된 일을 밝혀내려니, 죽은 사람의 손이라도 빌려야겠다 싶더군요."
"아니, 하지만...온천의 그 피는...."
"당신이 물을 붉게 만드는데, 다른 사람이라고 못하겠습니까? 당신이 갖다놓은 색소도 나쁘진 않으나, 지금까지와 크게 다를 게 없지 않습니까. 모든 이를 빠짐없이 한 자리에 모을 만큼 강력하고 충격적인 사건이 필요했을 뿐입니다. 색깔만 바꾸는 것보다야, 정육점에서 얻은 피를 쏟아붓는 편이 낫지요."
이연화가 대수롭지 않게 설명했다. 그를 위해 금원맹의 사람 몇이 수고했다는 사실까지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생정이 멍청한 얼굴로 이연화와 호명을 번갈아 보며 더듬거렸다.
"이게, 무슨...대협, 그럼 그 피부터 지금까지, 모든 게 연극이었단 말입니까? 하지만, 하지만 부적이 갑자기 뜯어진 것은-."
"내력을 화살처럼 날릴 수 있는 친구가 근처에 있었던 덕입니다. 무공이 뛰어난 사람들은 물방울 하나로 바위를 뚫기도 하지요."
이연화가 적비성을 슬쩍 눈짓하며 대답했다. 생정이 한 발짝 다가서며 중얼거렸다.
"그럼, 그러면 조금 전에 자욱하던 안개는...."
"아, 그것은 어떤 무림인의 미무진과 천기당의 기관을 조합한 것입니다. 실내라서 연기만 피우면 금방 들통날 것 같았거든요."
이연화가 이번에는 방다병을 슬쩍 가리키며 대꾸했다. 방다병이 얄밉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했다.
"하지만-하지만, 막 귀신처럼 사라졌다가 나타나셨잖아요!"
미아가 동그래진 눈으로 끼어들어 외쳤다. 상이태검의 초식 중에 그런 것이 있노라고 말할 수는 없었기에, 이연화는 고개를 까딱하며 얼버무렸다. "뭐, 그것도 무공의 일종입니다. 제 몸이 줄어들었다가 늘어난 것과 비슷한 일이지요." 이연화가 못된 장난을 성공시킨 여우처럼 웃으며 고개를 까딱했다. 무서움에 쩔쩔매던 사람들이 일제히 망연해졌다. 새로운 충격에 빠진 이들을 둘러보며, 이연화가 양손을 가볍게 모으고는 정중히 건넸다.
"무고한 여러분을 상대로 이리 끔찍한 연극을 펼친 것은 참으로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곳에 머물던 중, 우연히도 5년 전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사정을 알게 되었습니다. 조사를 이어간 끝에 망자의 유품이 취화탕의 바위 사이에 박혀 있었다는 것, 또한 망자를 해친 범인이 꺼림칙한 마음에 그 유품을 없애려 귀신 소동을 꾸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자세한 내막을 파헤치고자, 어젯밤 취화탕 근처에서 한번 귀신 흉내를 내어 보았습니다. 그때 마주친 범인이 바로 당신이었지요."
이연화가 호명을 돌아보며 놀리듯 맺었다. 말투는 묘하게 가벼웠으나, 그 시선과 표정이 매우 차가웠다. "죄를 순순히 자백하리라고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이리 여러 사람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음에도 끝까지 버티다니. 그 이기심이 실로 대단합니다." 이연화가 대놓고 빈정거렸다. 호명의 새파랬던 안색이 점차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남자가 분연히 일어서서 크게 고함쳤다.
"아니오, 그게 아니오! 갑자기 나타난 귀신이 실토하지 않으면 죽이겠다며 나를 죄인으로 모는데, 어찌 거짓으로라도 자백하지 않고 버틸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그리고 설령 취화탕에 고인의 유품이 남아있다 한들, 그게 내가 죽였다는 확실한 증거는 아니지 않습니까?"
놀아났다는 사실에 잔뜩 성이 난 듯, 호명은 이연화를 쏘아보며 씩씩거렸다. 물론 이연화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 얼굴을 삐딱하게 바라보았다. "어리석은 사람이군요. 하긴, 그러니 어젯밤의 일을 헛것으로 치부하며 지금까지 버텼을 테지." 이연화가 무심하기까지 한 태도로 비웃었다. 더욱 벌게진 호명이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남자가 다시 뭐라 소리치기 전에, 이연화는 팔짱을 낀 채 상대를 딱한 눈으로 훑어보았다.
"당신이 조금 전 실토한 내용은, 어젯밤 우리 셋이 들었던 사실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뭐, 이번에는 본 사람이 더욱 많으니 빠져나가기 쉽지 않겠지요. 그러나 자백만으로 죄를 물을 생각이었다면, 지체할 것 없이 어젯밤에 바로 실행했을 겁니다. 왜 굳이 당신에게 하루의 말미를 주었다고 생각합니까? 설마 정말로 당신이 개과천선할지도 모른다 믿었기 때문이라고 여기진 않겠지요."
이연화가 신랄하게 말하자, 호명의 얼굴에서 노기가 빠져나갔다. 남자는 어젯밤부터 바로 이 시간까지의 행적을 되짚어 보듯이 눈을 데룩데룩 굴리다가, 이내 도로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오른손을 검처럼 뻗어 그 졸렬한 얼굴을 가리키며, 이연화는 선고를 내리듯이 건넸다.
"당신 덕분에 모든 그림이 확실해졌으니, 이 일의 시작부터 낱낱이 까발려 드리지요."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다음날 아침, 이연화의 눈과 얼굴은 말끔히 나았다. 다만 이연화는 잠에서 깼을 때부터 심기가 상해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일어나자마자 이연화의 상태를 확인한 방다병이 다행이라는 말과 함께 안도의 미소를 지었으나, 이연화는 조금도 웃지 못했다. 어젯밤의 일을 좀처럼 믿을 수가 없었다(자신을 지금껏 그런 식으로 다룬 사람은 칠목산 하나뿐이었으며, 그조차도 열 살 이전까지였다!). 민망한 동시에 꽁해지는 마음을 막을 길이 없어, 이연화는 연화루 내부에 소변을 본 불여우를 탓하듯이 방다병을 바라보았다. 영 심상찮은 낌새를 느꼈는지, 방다병은 상대를 진정시키기 위한 웃음을 해해 흘리며 달래는 소리를 냈다.
"너무 그러지 마. 잘 나았으니 다행이잖아."
"이거나 빨리 풀어."
이연화가 미간을 잔뜩 좁힌 채 쏘아붙이자, 방다병이 얼른 고개를 끄덕이고는 붕대를 잘라주었다. 방다병이 손을 풀어주는 동안, 이연화는 그 정수리를 노려보며 마음껏 투덜거렸다. "너 말이야, 대체 이게 무슨 막돼먹은 짓이야? 망신을 주는 것도 정도가 있지. 어떻게 다 큰 사람을, 그것도 네가 어릴 적부터 스승이라고 노래를 부르던 사람을 그렇게 애처럼 다룰 수가 있어?" 아무렇게나 잘린 붕대를 재빨리 내려놓고, 방다병은 양손을 가슴 앞에서 가볍게 모아 잡으며 사과했다.
"미안해, 어제는 정말 걱정돼서 그랬어."
"이건 쉽게 넘어갈 일이 아니야, 방 공자. 아무리 의도가 좋더라도 사람을 마음대로 휘두르면 안 되지."
"그래, 네 말이 맞아. 내가 잘못했어. 다음에는 먼저 얘기부터 할게. 화 풀어, 응?"
방다병이 양손으로 이연화의 오른팔을 잡고는 가볍게 흔들었다. 무해하고도 귀여운 모습이었으나, 그 말의 내용을 놓치지 않은 이연화의 눈이 가늘어졌다. 다음엔 얘기부터 한다니, 다시 안 그러겠다는 말은 못하는군. 이연화가 방다병의 손을 탁 떨쳐내고는 돌아앉았다. "내가 여생을 이렇게 살려고 하는 참이라니, 정말 믿을 수가 없네." 상대를 제대로 보지도 않은 채 불만스럽게 중얼거리자, 방다병의 얼굴로 퍼뜩 경각심이 번졌다. 청년은 이미 동그래졌던 눈동자를 더욱 보름달처럼 뜨며 이연화의 팔을 끌어당겼다. 이연화가 짜증스럽게 돌아보자, 방다병은 염려가 배어나다 못해 흘러넘치는 태도로 조르듯 호소했다.
"진짜 미안해, 응? 네가 끝까지 싫다고 했으면 강요하지 않았을 거야. 그런데 아비가 널 재워버려서-."
"수면혈 정도는 네가 풀어주면 되잖아, 공범이면서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해?"
이연화가 다시 고개를 홱 돌리며 투덜거렸다. 방다병이 잔뜩 시무룩해진 얼굴로 대꾸하기 전, 근처에서 냉랭한 코웃음이 들려왔다. 뚱하게 돌아보자, 팔짱을 낀 적비성이 퍽 헛짓거리를 한다는 눈으로 이연화를 응시하던 참이었다. "화가 나면 이러쿵저러쿵하지 말고 차라리 덤비기나 해라. 네가 그런 어중이떠중이의 공격을 피하지 않아 자초한 일인데, 무슨 말이 그리 많은지 모르겠군." 적비성이 당당히 건넨 말에, 이연화가 건조하게 대꾸했다.
"자기 행동을 내 탓으로 돌리지 마, 적 맹주. 말을 안 듣는다고 바로 혈도를 짚다니, 나는 네 각인 상대지 포로나 수하가 아니라고."
"심각한 척 하지 마라. 네가 정말 원했다면 방다병이 감은 붕대도 진즉 풀 수 있었고, 내가 마비혈을 찍었을 때에도 바로 풀 수 있었어. 나와 방소보가 너이기 때문에 과격하게 행동했던 것처럼, 너도 우리였기 때문에 여지를 준 것이지.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테니, 그게 정 마음에 안 든다면 다음부터는 바로 방어를 해라."
억. 이연화는 세상에서 한 손에 드는 철면피를 만난 사람답게 뒷목을 짚으며 눈을 감았다. 상대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점이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적비성의 말처럼, 손에 칼이 없더라도 마음만 먹는다면 붕대쯤은 금방 풀 수 있었다. 또한 혈을 짚였다 해도, 지체하지 않고 바로 힘을 썼다면 마비된 몸을 자유롭게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거야 적의 손에 잡혔을 때의 이야기고! 금원맹주의 태연한 얼굴을 삿대질하며, 이연화는 나무를 쪼는 딱따구리처럼 빠르게 따졌다.
"너희를 믿어서 가만히 있다가 봉변을 당한 게 내 탓이야? 그럼 뭐, 앞으론 너희를 기본적으로 신뢰하더라도 긴장의 끈을 완전히 놓진 말라는 거야? 내가 앞으로 너랑 방소보를 운피구처럼 대하길 원해? 정말 그런 거야?"
"이연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지금 운 원주가 했던 짓과 어젯밤의 일을 비교하는 거야?"
"지금 그런 비겁한 배신자와 나를 동일선상에 둔 거냐? 무례하군, 이연화."
두 사람의 얼굴이 대뜸 우그러지는 광경에, 이연화는 그만 이마를 짚으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분명 똑똑한 녀석들이었던 듯한데, 가끔씩 왜 이리 멍청해지는 걸까? 예전에는 그나마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속을 썩이는 듯하더니, 각인한 뒤로는 자주 한 쌍이 되어 동시에 복장을 뒤집곤 했다. 이연화가 이를 반쯤 악문 채 신음하듯 말했다. 푹 자고 일어난 참이건만 어째선지 피로감이 밀려왔다.
"지금 그 말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난 너희 앞에서 조금도 긴장하기 싫다는 뜻이야. 다음부턴 내 의사와 관계없이 날 재우거나 하지 마. 알겠어?"
"알았어, 알았어. 미안해."
방다병이 순순히 양손을 모으며 약속했다. 적비성은 물론 사과하거나 약조하는 대신, 팔짱을 낀 채 슥 고개를 돌려버렸다. 저 뻔뻔한 꼴을 평생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보고 살아야 하다니, 내가 정말 현명한 선택을 하는 중일까? 번민에 휩싸인 이연화의 시선이 더욱 뾰족해졌다. 하기야, 합리성을 따졌다면 애초부터 이런 처지에 놓이지 않았을 터였다. 이연화가 심란한 한숨을 길게 내뱉자, 적비성이 눈썹을 찌푸린 채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알았으니 앞으론 잘 생각하고 움직여라. 만에 하나라도 그 자가 이성을 잃고 극독을 뿌렸다면, 이렇게 대화하지도 못하고 약마를 찾아갔을 거다."
"끝까지 남의 탓은."
이연화가 뿔이 난 투로 꿍얼거리면서 팔짱을 끼었다. "아비는 네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 너무 화내지 마. 응?" 이연화에게 바짝 다가앉은 방다병이 애교를 부리듯 건넸다. 이연화가 어이없게 상대를 흘겨보았다. "뭐야, 방소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비한테 대마두니 뭐니 했으면서, 이제는 편도 들어주네." 방다병이 선량하고도 머쓱한 웃음을 머금은 채 이연화의 한쪽 팔에 팔짱을 끼었다. 어머니의 화를 풀어주려는 아들처럼 행동하지 말라 건네려던 때, 다급한 발소리가 방 앞으로 가까워졌다.
곧 벌컥 열린 문으로, 생정이 구르듯이 들어왔다. 잔뜩 창백해진 얼굴이 땀에 젖어 있었다. 지금껏 보여준 연륜에 어울리지 않도록, 그 태도가 퍽 부산스러운 데다 겁에 질려 있었다.
"대협들. 피가...취화탕에 피가 가득합니다!"
생정이 혼비백산해 외쳤다. 세 사람이 잠시 시선을 교환했다. 이연화가 짐짓 놀란 표정을 지은 채 물었다.
"피라고요? 취화탕이 핏빛으로 물든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만, 그런 현상이 또 일어난 것 아닙니까?"
"아이고, 아무리 그래도 정말로 피비린내를 풍긴 적은 없었습니다. 가까이 가서 확인해 보니 정말로...정말로 피가 섞여 있지 뭡니까!"
생정이 흙빛에 가까운 안색으로 전했다. 이연화가 심각한 얼굴을 하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떻게 이런 변이...정말 괴이한 일이로군요."
"취, 취화탕의 물을 뺄 것이란 소문을 냈기 때문일까요? 정말로 귀신이 존재하고, 자신의 터를 빼앗기기 싫어 벌인 일이라면...."
생정이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방다병이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턱을 매만졌다. "그러고 보니, 그런 기현상을 종종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귀신이 붙은 땅이나 물건을 함부로 없애고 망가뜨리려 들면, 노한 귀신이 신묘한 방식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지요." 생정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장년인은 5년 전의 난리통이 떠오르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고는 물었다.
"이를 대체 어쩌면 좋겠습니까? 그저 물의 빛깔이 변할 때에도 흉한 소문이 돌았는데, 지금은...하필 여러 일꾼들이 작업하러 들어갔을 때에 그런 변고를 발견한 바람에, 소문을 도무지 막을 수가 없었어요. 객잔 사람들이 모두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일단 가서 한 번 보지요."
이연화가 얼른 일어서며 말했다. 생정이 떨떠름한 얼굴로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이 취화탕 부근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객잔의 일꾼들이 죄다 모여 있었다. 그들은 차마 탕 가까이에 다가가지 못한 채, 꽃나무 앞에 둘러서서 숙덕거리던 참이었다. 그들 중에는 일행이 첫날 만났던 세 여자도 끼어 있었다. 탕에 조심스레 다가간 이연화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생정의 말대로, 탕 근처에 다가갈 때부터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이연화는 벌건 물에 부적 한 장을 담그고는 무슨 말을 읊조리는 시늉을 했다. 방다병이 그 팔을 잡아끌었다.
"조심해. 악귀의 사기가 옮겨붙을지도 몰라."
"괜찮아. 이 탕에 서린 원혼은 분명한 목적이 있어."
이연화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오른손에 들린 부적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멀찍이서 지켜보던 생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 대협은 원혼의 기운을 느낄 수 있습니까?"
"내세우기엔 부끄러운 말이지만, 저는 법술에 조금 조예가 있습니다. 때로는 아직 제 길을 찾지 못한 영혼과 소통하여 복잡한 상황을 해결하기도 하지요. 어르신의 말대로, 이 탕에는 귀신이 들려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크게 노해 있군요."
이연화가 낮지만 힘을 준 목소리로 말하자, 생정뿐 아니라 멀리서 귀를 쫑긋 세운 채 듣고 있던 일꾼들이 일제히 놀란 소리를 내며 수군거렸다. "그래, 맞아. 저 대협께서 법술을 익혔다고 하셨어. 몸을 떠난 혼백과 대화한 적도 있다고." 미아의 말에, 근처의 사람들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이연화를 바라보았다. 어떤 해결책을 간절히 기대하는 태도였다. 잠시 고민하던 이연화가 엄숙한 태도로 이야기했다.
"어르신, 아무래도 제를 지내야겠습니다."
"제, 제를 말입니까? 어떻게 준비하면 되겠습니까?"
"화려하게 준비할 필요는 없습니다. 상은 소박하게 차리되, 여기 있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 진심으로 치성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그러면...그러면 이런 변고가 멈추는 겁니까?"
생정이 떨며 물었을 때, 이연화의 손에서 무언가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좌중의 시선이 그편으로 쏠렸다. 이연화가 들었던 피 묻은 부적이,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잡아뜯긴 것처럼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그 현상을 목격한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그와 거의 동시에, 이연화가 이마를 짚으며 잠시 휘청했다. 방다병이 놀란 얼굴로 그 몸을 부축했다. "괜찮아?" 현기증을 추스르는 사람처럼 한 손을 내저으며, 이연화는 천천히 상체를 세웠다. 침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마도...이 원혼은 복수를 원하는 듯합니다. 오래된 살의가 서려, 그 독기가 어마어마하군요."
여러 사람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개중 가장 어린 일꾼 하나는 양손으로 입을 가린 채 울음을 참기까지 했다. 이연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그 원한이 뭇 사람들을 아무렇게나 향한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 중, 귀가 원한을 품은 자가 있는 듯한데...설령 죽을 죄를 지었단들 산 자의 목숨을 죽은 자가 취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으니, 제를 지내며 원혼을 달래보도록 하지요."
"아니, 대체 무슨 원한을 품었기에 이런 흉한 일을 벌인단 말입니까?"
생정이 두렵고도 답답한 얼굴로 물었다. 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듯 집중하던 이연화가, 이내 안타까운 얼굴로 한숨을 토했다. "원혼이 너무도 노해 있어, 그 사연을 제대로 들려주지 못합니다. 일단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오늘 저녁, 식당에 상을 차리고 모두 모여주십시오. 그럼 제가 법술로 혼을 달래보겠습니다." 생정이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저녁, 객잔의 모든 사용인들은 하나둘 식당으로 모여들었다. 손님들을 위해 아늑하면서도 고급스럽게 단장된 공간이었으나, 그 누구도 편안해 보이지 않았다. 제사상 위에는 향이 꽂혀 있었는데, 아직 불이 붙지 않은 채였다. 일꾼들은 서로의 눈치를 힐끔힐끔 볼 뿐, 마음껏 소리높여 떠들지도 못했다. 몇몇 사람들만이 나직하게 '정말 오기 싫었으나, 이럴 때 핑계를 대고 빠지면 더욱 의심받지 않겠느냐' 하는 요지의 말을 주고받았다. 그조차도 흰 옷을 차려입은 이연화가 방다병과 함께 나타나자 잦아들어, 실내는 곧 옷 스치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해졌다. 이연화가 사람들을 향해 진중히 건넸다.
"자, 여러분. 이제 원혼을 달래기 위한 법술을 행할 것입니다. 기이한 현상이 벌어질 수도 있고, 제 일신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만, 부디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원혼의 극락왕생을 빌어주시길 청합니다. 섣불리 치성이 끊기면 원혼이 더욱 노하여, 원한과 무관한 이들까지 노릴지도 모릅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열렸던 문이 탁 닫혔다. 사람들이 헉 소리를 내며 돌아보았다. 문을 닫은 적비성이 왜 유난을 떠느냐 말하는 듯한 태도로 그 시선을 돌려주었다. 평소와 별다를 것도 없는 표정이었으나, 금원맹주의 시선은 보통 타의가 없다 해도 위압적이었으므로 사람들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럼 시작하지요." 그렇게 말한 이연화가 상 앞에 등을 보인 채 앉았다.
향에 불을 붙이고, 이연화는 부적을 한 장 태우며 주문 같은 말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디선가 엷은 안개가 피어올라 시야를 흐리게 뭉개놓았다. 놀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경거망동하지 마시오! 법술의 효과입니다. 죽은 자의 혼이 산 자의 부름에 응하는 것이오." 방다병이 퍽 위엄 있는 투로 외쳤다. 사람들이 얼른 입을 다물고는 치성을 이어갔다.
이윽고 주문을 멈춘 이연화가 입을 열었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 말은 묘하도록 또렷하게 울렸다.
"원혼에게 할 말이 있다 합니다. 이 안에...모인 사람들 중에 자신을 죽인 자가 있다고 하는군요."
모인 사람들이 처음으로 큰 소리를 내며 서로를 돌아보았다. "죽였다고?" "무슨 소리지? 살해당했다는 거야?" "여기서 사람이 죽었다니, 그건 5년 전 일인데." "설마...양연인가?" 그 이름이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온 순간, 몇 사람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양연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이었다. 이연화가 긴장한 목소리로 이었다.
"이 자리에서 죄를 고하지 않으면, 그 자를 처참하게 죽이고 객잔의 사람들까지 해코지하겠다 합니다."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공기처럼 은은히 깔려 있던 두려움이 순식간에 그 덩치를 키웠다. "귀, 귀신이 그 이름을 알려주진 않습니까? 나오면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 사람이 제발로 나서겠습니까?" 생정의 곁에 섰던 호명이 잔뜩 떨며 물었다. 이연화가 곤혹스러운 한숨을 쉬었다.
"들리는 이름이 있습니다만, 원혼이 바라는 것은 그자가 스스로 뉘우치는 일입니다. 제가 말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귀신이 감히 산 사람을 해치는 일에 제가 일조할 수는...."
이연화의 말이 문득 흐려졌다. 갑작스러운 통증을 느낀 것처럼, 이연화가 윽 소리를 내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놀란 소리를 냈다. 이연화가 풀썩 쓰러진 것과 동시에, 피어오르던 안개가 폭발적으로 짙어져 사람들의 시야를 가렸다. "귀, 귀신이 노했다!" 누군가가 외치자, 장내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도망치려는 사람들이 출입구로 우르르 몰려갔으나, 누가 밖에서 막아버린 것처럼 문이 열리지 않았다.
"누, 누가 범인이에요? 정말 이 안에 있으면 빨리 얘기해요, 당신 때문에 우리 다 죽어도 상관없다는 거예요?"
공황에 빠진 미아가 새파래진 얼굴로 외쳤다. 하지만 나서는 자는 없었고, 이내 안개에 뒤섞여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소리의 출처를 찾아 사람들이 두리번거렸으나, 웃음은 비정상적인 속도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이윽고 차갑고 섬뜩한 바람 한 줄기가 화살처럼 쌕 불더니, 한 사람의 몸뚱이가 보이지 않는 맹수에 붙들린 것마냥 허공을 날아 바닥에 쿵 떨어졌다. 사람들이 높은 비명을 내질렀다. 엉덩방아를 찧은 사람이 아픈 소리를 내며 엉거주춤하게 바닥을 짚었다. 그 앞에, 녹색 겉옷을 걸치고 산발을 한 형상이 나타났다. 눈앞으로 늘어진 머리칼 사이에서, 시뻘건 눈가와 새하얀 피부가 불길한 빛을 발했다. 그 무시무시한 몰골에, 몇 사람이 소리를 치며 물러나거나 넘어졌다. "귀신, 귀신이야!" 미아의 동료가 크게 외쳤다.
"내 분명 기회를 주었는데도, 네 손으로 그 기회를 버리는구나."
귀신이 끔찍하게 긁히는 소리로 말했다. 그 시선의 끝에 주저앉은 남자가 창백한 얼굴로 뻐끔거렸다. 그 눈가가 발진으로 인해 붉게 일어나 있었다.
"그, 그럴 리가 없어. 그건 헛것이었어, 진짜 귀신이었을 리가...."
호명이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초면에 과묵하고 믿음직하던 그 인상은, 겁에 질린 시궁쥐처럼 잔뜩 뒤틀려 사뭇 다른 느낌을 풍겼다. 귀신의 형체가 허상처럼 흐릿해졌다가 호명의 뒤에서 나타나자, 사람들이 비명과 함께 손가락질했다. 퍼뜩 돌아본 남자가 발작하듯 도망치려 들었으나, 자리에 엎드린 귀신이 흰 손을 번개처럼 뻗어 그 발목을 확 잡아챘다. 남자는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한 채 고꾸라져, 눈을 크게 뜨고는 헐떡였다.
"네 입으로 실토하지 않으니, 약속대로 네 명을 가져가겠다."
그 말과 함께, 귀신의 손이 발목에서부터 점차 위편으로 올라갔다. 그 손끝에서부터 퍼지는 한기를 느낀 것처럼, 호명이 진저리를 치며 버둥거렸다. 그러나 도망칠 길은 요원했고, 호명은 곧 목줄기까지 닿은 손끝에 전율하며 살려달라 외쳤다. 그러나 감히 호명에게 가까워지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당한 고통을 똑같이 느껴봐라!" 무시무시한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리자, 호명의 눈으로 핏발이 섰다. 그 다리 사이가 약간의 습기로 젖어들며 고약한 냄새를 풍겼다. 호명이 땀에 번들거리는 얼굴로 외쳤다.
"알았-알았어! 말할게. 내가, 내가 죽였어!"
"더 자세히 말하지 못하겠느냐?"
귀신의 손가락으로 힘이 들어갔다. 캑캑거리던 남자가 더듬더듬 말했다.
"내가, 내가 널...양연을 죽였어!"
공포에 질려 허둥거리던 사람들이 우뚝 굳어졌다. 큰 공간이 일순 조용해졌다. 불신과 경악이 빚어낸 정적이었다. 귀신의 얼굴이 호명에게 바싹 다가갔다. 호명이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네 죄가 그뿐이냐?" 그 귓가에 숨결이 닿자, 호명의 다리 사이에 생겼던 얼룩이 조금 더 커졌다. "날 왜 죽였는지 말해." 귀신의 손톱이 그 목덜미를 살짝 파고들었다. 호명은 이제 발진이 돋은 얼굴로 줄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내가, 내가 도둑질하던 걸 네가 보고...날 협박해서...그래서, 도망치는 널 쫓아서...."
작다 못해 볼품없는 목소리였으나, 워낙 장내가 고요했으므로 사람들은 그 말을 무리없이 알아듣고 숨을 삼켰다. 모든 이가 놀랐지만, 개중에서도 생정은 사람 모양으로 만든 밀랍인형처럼 입을 벌린 채 경직되었다. 귀신의 눈이 가늘어졌다.
"네가 저지른 죄의 현장에서, 감히 귀신 소동을 벌인 것도 네놈이지 않으냐?"
"사람들을 못 오게 하려면 어, 어쩔 수 없었어! 거기 네가 비녀를 꽂아둔 바람에...."
호명이 정신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느새 그 얼굴에는 콧물마저 잔뜩 흘러 있었다. "살, 살려줘. 다 얘기했잖아. 네가 원하는 대로 다 말했으니, 부디 목숨만은 거두지 말아줘!" 남자가 처절하게 애걸했다.
귀신은 그 말에 불같이 화를 내는 대신, 호명의 위로 드리웠던 몸을 일으켰다. 유연하고도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 가운데, 귀신이 가볍게 양팔을 벌렸다. 곧 뼈와 근육이 움직이는 소리가 울리자, 호명을 비롯한 이들이 놀라 입을 쩍 벌렸다. 귀신의 몸이 한결 커지면서, 녹색 겉옷의 솔기가 툭툭 튿어졌다. 한편에 섰던 방다병이 얼른 다가가 흰 겉옷을 둘러주었다. 사방을 채웠던 안개가 어느새 한결 옅어져 있었다. 등을 쭉 편 귀신은, 길게 늘어진 머리를 대충 정리해 올리고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냈다. 능청스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자백하면서도 끝까지 고인을 탓하는 모양새가 썩 만족스럽지는 않네요. 하지만 어쨌든, 스스로 여러 사람 앞에서 죄를 인정했으니 반쪽짜리라도 인정해 드려야겠지요."
"어...? 이게 무슨...너...아니, 당신이...어제...?"
호명이 얼빠진 목소리로 두서없이 중얼거렸다. 닫혔던 문이 벌컥 열리며, 줄곧 출입구를 막았던 적비성이 나타났다. 그 손바닥이 일장을 날리자, 큰 바람이 일어 자욱하던 안개가 몽땅 사라졌다. 깨끗해진 장내에서, 흐트러진 잔머리를 귀에 걸어 넘긴 이연화가 싱긋 웃었다.
"워낙 오래된 일을 밝혀내려니, 죽은 사람의 손이라도 빌려야겠다 싶더군요."
"아니, 하지만...온천의 그 피는...."
"당신이 물을 붉게 만드는데, 다른 사람이라고 못하겠습니까? 당신이 갖다놓은 색소도 나쁘진 않으나, 지금까지와 크게 다를 게 없지 않습니까. 모든 이를 빠짐없이 한 자리에 모을 만큼 강력하고 충격적인 사건이 필요했을 뿐입니다. 색깔만 바꾸는 것보다야, 정육점에서 얻은 피를 쏟아붓는 편이 낫지요."
이연화가 대수롭지 않게 설명했다. 그를 위해 금원맹의 사람 몇이 수고했다는 사실까지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생정이 멍청한 얼굴로 이연화와 호명을 번갈아 보며 더듬거렸다.
"이게, 무슨...대협, 그럼 그 피부터 지금까지, 모든 게 연극이었단 말입니까? 하지만, 하지만 부적이 갑자기 뜯어진 것은-."
"내력을 화살처럼 날릴 수 있는 친구가 근처에 있었던 덕입니다. 무공이 뛰어난 사람들은 물방울 하나로 바위를 뚫기도 하지요."
이연화가 적비성을 슬쩍 눈짓하며 대답했다. 생정이 한 발짝 다가서며 중얼거렸다.
"그럼, 그러면 조금 전에 자욱하던 안개는...."
"아, 그것은 어떤 무림인의 미무진과 천기당의 기관을 조합한 것입니다. 실내라서 연기만 피우면 금방 들통날 것 같았거든요."
이연화가 이번에는 방다병을 슬쩍 가리키며 대꾸했다. 방다병이 얄밉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했다.
"하지만-하지만, 막 귀신처럼 사라졌다가 나타나셨잖아요!"
미아가 동그래진 눈으로 끼어들어 외쳤다. 상이태검의 초식 중에 그런 것이 있노라고 말할 수는 없었기에, 이연화는 고개를 까딱하며 얼버무렸다. "뭐, 그것도 무공의 일종입니다. 제 몸이 줄어들었다가 늘어난 것과 비슷한 일이지요." 이연화가 못된 장난을 성공시킨 여우처럼 웃으며 고개를 까딱했다. 무서움에 쩔쩔매던 사람들이 일제히 망연해졌다. 새로운 충격에 빠진 이들을 둘러보며, 이연화가 양손을 가볍게 모으고는 정중히 건넸다.
"무고한 여러분을 상대로 이리 끔찍한 연극을 펼친 것은 참으로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곳에 머물던 중, 우연히도 5년 전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사정을 알게 되었습니다. 조사를 이어간 끝에 망자의 유품이 취화탕의 바위 사이에 박혀 있었다는 것, 또한 망자를 해친 범인이 꺼림칙한 마음에 그 유품을 없애려 귀신 소동을 꾸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자세한 내막을 파헤치고자, 어젯밤 취화탕 근처에서 한번 귀신 흉내를 내어 보았습니다. 그때 마주친 범인이 바로 당신이었지요."
이연화가 호명을 돌아보며 놀리듯 맺었다. 말투는 묘하게 가벼웠으나, 그 시선과 표정이 매우 차가웠다. "죄를 순순히 자백하리라고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이리 여러 사람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음에도 끝까지 버티다니. 그 이기심이 실로 대단합니다." 이연화가 대놓고 빈정거렸다. 호명의 새파랬던 안색이 점차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남자가 분연히 일어서서 크게 고함쳤다.
"아니오, 그게 아니오! 갑자기 나타난 귀신이 실토하지 않으면 죽이겠다며 나를 죄인으로 모는데, 어찌 거짓으로라도 자백하지 않고 버틸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그리고 설령 취화탕에 고인의 유품이 남아있다 한들, 그게 내가 죽였다는 확실한 증거는 아니지 않습니까?"
놀아났다는 사실에 잔뜩 성이 난 듯, 호명은 이연화를 쏘아보며 씩씩거렸다. 물론 이연화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 얼굴을 삐딱하게 바라보았다. "어리석은 사람이군요. 하긴, 그러니 어젯밤의 일을 헛것으로 치부하며 지금까지 버텼을 테지." 이연화가 무심하기까지 한 태도로 비웃었다. 더욱 벌게진 호명이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남자가 다시 뭐라 소리치기 전에, 이연화는 팔짱을 낀 채 상대를 딱한 눈으로 훑어보았다.
"당신이 조금 전 실토한 내용은, 어젯밤 우리 셋이 들었던 사실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뭐, 이번에는 본 사람이 더욱 많으니 빠져나가기 쉽지 않겠지요. 그러나 자백만으로 죄를 물을 생각이었다면, 지체할 것 없이 어젯밤에 바로 실행했을 겁니다. 왜 굳이 당신에게 하루의 말미를 주었다고 생각합니까? 설마 정말로 당신이 개과천선할지도 모른다 믿었기 때문이라고 여기진 않겠지요."
이연화가 신랄하게 말하자, 호명의 얼굴에서 노기가 빠져나갔다. 남자는 어젯밤부터 바로 이 시간까지의 행적을 되짚어 보듯이 눈을 데룩데룩 굴리다가, 이내 도로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오른손을 검처럼 뻗어 그 졸렬한 얼굴을 가리키며, 이연화는 선고를 내리듯이 건넸다.
"당신 덕분에 모든 그림이 확실해졌으니, 이 일의 시작부터 낱낱이 까발려 드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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