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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7 17:37
남망기의 태도는 별안간 손바닥 뒤집듯 바뀌었어. 근래 탈사라도 당한 양 보드랍게 굴던 건 언제고 또 이젠 찬바람이 쌩하니 불었지. 하지만 강징을 보는 표정은 또 그리 경멸만이 담겨있는 건 아니라 조금 얼떨떨했음. 여전히 미시마다 그는 집무실에 찾아오고 향을 풀어주지만 안 그래도 없던 말수는 더욱 줄었어. 언젠가는 이상한 질문을 하기도 했지. 이제 배가 점점 불러오는데 앞으로는 어떡할 거냐고. 강징은 여상하게 답했음. 축제가 끝나면 부사를 종주 대리로 세우고 폐관 수련에 들어갈 것이라 말했지.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어. 어쩐지 남망기가 풀어주는 향에서 기분 나쁜 듯한 티가 나 슬쩍 고개를 들었지만 여전히 그 옥같은 표정에선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었지. 사실 남망기는 강징이 계획한 미래에 본인의 존재라곤 없었기에 기분이 상한 거였겠지만 남망기 본인도, 강징도 망기가 왜 빈정이 상했는지 이유를 몰랐음. 아무튼 강징 딴에는 남망기 기분 풀어주려고 이따 희신이 오기로 했으니 같이 차나 들자 했는데 향에서 더욱 기분 나쁜 기운 훅 감돌아서 잘해주려 해도 지랄이라고 생각했겠지. 문득 집무실에서 문서를 읽던 강징은 각서를 내밀었을 때, 남망기의 얼굴을 떠올렸음.
함광군.
......
읽어보시고 지장을 찍어 주시지요.
제 앞으로 내밀어지는 종이에 남망기는 말없이 그 종이를 제 앞으로 당겨 와 읽었지. 그건 각서였어. 태중의 아이는 운몽 강씨 강만음의 적자로 자랄 것이며 고소 남씨 남망기와는 아무런 연관성 없이 자랄 것이라는. 강징은 내심 그가 화를 내리라 생각했음. 왜냐하면 고소 남씨의 혈육에 대한 집착이 어떠한지 그간 봐 온 것이 있으니까. 만약 남망기가 거절한다면 그는 정말로 자전을 사용할 심산이었지. 비록 그 함광군인지라 쉽지는 않겠지만, 임부를 상대로 그렇게 모질겠어? 음... 남망기라면 그럴수도... 생각하던 찰나 각서를 따라 읽는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지.
강만음의 태중 아이는 운몽 강씨로 자랄 것이며.
......
고소 남씨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을 것임에 동의한다.
......
강 종주도 이에 진정으로 동의 하십니까?
강징은 잠시 생각에 잠겼어. 당연한 것을 묻는 남망기가 무슨 대답을 원하는지 몰랐거든. 강징이 대답을 않자 남망기가 말을 덧붙였지.
강 종주가 말하는 고소 남씨에 형장도 포함 되는지 묻는 겁니다.
강징은 그제야 남망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음. 직설적으로 묻는 것에 강징은 미간을 구겼어. 생각해 보면 남망기가 오해할 만도 하지. 워낙에 남희신은 다정한 자라 임신한 후 기댈 곳 없는 저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줬으니, 남들 눈엔 그렇게 보였을만도 해. 강징은 이제야 복잡했던 머릿속이 해결되는 기분이었음. 그간 남망기가 이랬다 저랬다 한 것이, 제 형장과 강징이 혹여 정을 나눈 사이일까봐 그런 거겠지. 남망기가 비록 그 동안은 아이를 밴 저를 배려해주었다고는 하나, 그에게 강징은 눈엣가시같은 존재에다 남의 아이를 배고도 자기 형장과 정인이라니 수치스럽지도 않을까, 그리 생각했겠지. 강징은 남망기의 생각이 나름 이해가 되긴 했어. 하지만 기분이 나쁜 건 나쁜 거였지. 그래도 저는 운몽 강씨의 종주인데, 비록 지금은 힘이 부족한 세가지만, 저가 남희신의 상대가 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거잖아.
함광군. 무슨 오해를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저랑 택무군은 그런 사사로운 관계가 아닙니다.
......
쓸데없는 염려 말고 지장이나 찍으세요.
형장에게도 이 각서를 보였습니까? 형장이 동의한다면 저 또한 동의하겠습니다.
냉한 음성과 함께 자리를 뜨는 남망기에, 강징은 얼떨떨하게 멀어지는 뒷모습만 쳐다봤음.
강징이 더 이상 망기에게 밤에 향을 풀어주지 않아도 된다고는 했지만, 망기는 여전히 사흘에 한 번 씩은 강징의 침소에 몰래 드나들었겠지. 그간은 들키지 않았지만, 하필 강징은 오늘 쉽게 잠이 들지 않았음. 조용히 침소 문을 열고 들어서는 달빛에 비춰진 흰 옷자락을 걸친 이에게선 익숙한 향이 났어. 강징은 말없이 눈을 뜨곤 스르르 일어나 앉았지. 찾아올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었냐 말하려는데, 이 자는 티도 안 내곤 계속 나를 챙겨줬다는 부채감에 날카롭게 쏘아붙이려다 괜시리 꾹 눌러참게 되는 거지. 또… 각서 때문에 서로 감정이 상했던 것도 떠오르고. 복잡해지는 심경에 제 침상 앞에 의자를 끌어다 앉는 남망기를 말없이 쳐다보고만 있는데, 남망기가 강징을 빤히 보더니 혼자 읊조림.
어쩐지 꼭… 나를 보고 있는 것만 같군.
그러면서 픽 웃는데, 강징은 남망기가 웃는 얼굴을 처음 봐서 저 치가 탈사라도 당했나 싶었음.
강만음.
……
나에게서 또 형장을 보느냐?
……??
또, 라니? 강징은 커다란 눈만 끔벅였음.
당과는 어찌 먹지를 않지.
……
괘씸해.
……
밤마다 널 도운 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아아. 강징은 그제서야 부지불식간에 깨달았음. 남망기는 정말로, 그간 있었던 모든 악몽을… 강징의 가장 나약한 부분을 샅샅이 들여다 보았음을. 순간 눈 앞에서 불꽃이 튀는 것만 같았지. 저도 모르게 숨을 씨근덕거리자 남망기는 그제야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했음.
미치광이가 제 멋대로 떠드는 꼴이 퍽도 재밌으셨겠습니다, 함광군?
강 종주.
왜 멋대로 그런 짓을 했지? 누가 감사라도 할 줄 알고?!
흥분해 벌떡 일어선 강징을 남망기는 진정시키려 했음. 그러나 망기의 말은 씨알도 안 먹혔겠지. 진정하고 앉으시오, 하는 말에도 강징은 계속해서 쏘아붙혔음.
당과도 네가 보냈으면서 왜 거짓을 고했지?
......그러는 너는. 형장을 마음에 품었나? 네 뱃속의 아이를 형장의 아이로 키울 심산인가?
강징은 남망기의 물음에 기가 찼어. 각서를 내밀었던 날과 같은 대화였지. 그래, 걱정하지 마라, 무슨 일이 있어도 죽어도 네 그 잘난 형장과 엮일 일 없도록 할 테니까, 생각하며 간신히 목소리를 억눌렀음.
남망기. 고소 남씨와 누구보다 엮이기 싫은 이가 있다면 그건 바로 나다. 택무군에게 연화오에 더는 걸음하지 말라 전할테니 억측하지마.
……
...나가.
......
다시는 허락없이 내 침소에 들어오지 마시오, 함광군.
남망기 쫓아낸 뒤에 뜬 눈으로 밤새곤 날 밝자마자 부사 찾아가서 탈탈 털었겠지. 부사가 무슨 힘이 있나… 그간 있었던 일의 전말을 죄다 전해듣곤 자존심 상하고 수치스럽고 분해서 미칠 지경이겠지만, 아연이 무사히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것에 남망기의 공이 크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어서 더 미칠 것 같았음. 제 종주가 제 성질을 못 이겨 까무러치지는 않을까 안절부절 못 하는 부사를 보다 강징은 한숨만 길게 뱉었어.
종주님, 함광군께서는 정말 성심성의껏 종주님을 돌보셨습니다. 정말입니다.
……
너무 괘씸히 여기지는 마시고… 함광군의 부정(父情)을 달갑게 생각하셔도…
부정? 부정이라 했느냐?
하. 강징은 마른 웃음을 터트렸음. 부정이라고. 남망기가 비록 제 씨라고는 하나 원수의 뱃속에 들어앉은 아이에게 부정을 느껴? 그건 그저 책임감이자, 제 형장의 부탁에 의한… 하지만 또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처음 아연의 태동을 느끼던 그 날. 제 앞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은 남망기의 다정한 음성과 상기된 뺨, 찰나였지만 공유하던 감정 따위였겠지. 온 몸에서 힘이 쭉 풀렸음. …오늘 남은 집무는 네가 처리하도록 해라. 부사는 펄쩍 뛰었지만 한순간에 너무나도 지쳐보이는 강징의 모습에 알겠다며 울며 겨자먹기로 고개를 끄덕였어.
이렇게 급속히 냉랭해진 관계로 지내다가 어느 날 야렵 나갔던 강징이 다쳐서 들어오는 날도 있었겠지. 남망기는 사실 처음부터 강징의 야렵을 반대하고 싶었지만 명분도 없는데다 네가 뭔데 끼어드냐고 난리칠 게 뻔해서 아무 말 않았던 거였어. 그래도 뱃 속에 애도 있으니 몸 좀 사리면서 잘 하겠지 싶었는데 의식 잃곤 업혀 들어오는 꼴을 보니까 순간 속이 확 뒤집히는 것만 같음. 한숨 꾹 참곤 주위 사람들 다 물린 후에야 강징 침상 앞에 의자 끌어다 앉음. 왜 제 몸 소중한 줄 모르고 그저 운몽의 손익이 달린 일이라면 눈 뒤집혀 달려드는지, 뱃 속 아이 때문에 자존심 다 구겨가며 부탁할 때는 언제고 그렇게 소중한 아이라면 지킬 생각을 해야지 왜… 치미는 감정에 주먹 꽉 쥐다가 눈 감고 있는 창백한 얼굴 보면서 자기 향 풀어줌. 조금 더 편하게 풀어지는 얼굴 보면서 평소엔 늘 인상 쓰고 있어서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 어린 얼굴이란걸 새삼 깨닫겠지. 그리고 미련하다고도 생각할거임. 애를 떼려면 쉽게 뗄 수 있을텐데 정을 통한 사이도 아니고 실수로 생긴 애 때문에 쌍방 이게 무슨 고생인지… 하지만 차마 더 이상 생각을 이어나가지는 못했음. 아파… 중얼거리는 강징 때문에.
아파… 위무선… 누님…
이럴때면 여지없이 막내 티가 나는군. 남망기는 끙끙 앓는 이를 내려다보며 이마에 흥건한 식은 땀을 마른 수건으로 훔쳐주었음. 남망기는 아직도 강징을 증오하는가? 남망기는 아직도 강징에게서 오롯한 혐오감만을 느끼는가? 스스로 이 물음에 확실한 답을 할 수 없었음. 차라리 강징을 향한 마음에 순수한 적개심만 존재할 때가 더 편했겠지. 제 사형과 누님을 부르며 흐느끼는 강징을 내려다보는데 남망기는 괴로움. 왜 미워할 수도 없게 만드냐고, 전처럼 증오할 수도 없게 하냐고 원망하겠지.
한 시진 가량 향을 풀어준 후에야 망기는 제 처소로 돌아오는데 강징이 의식을 잃은 탓에 향이 새어나왔던지 옷에 배인 희미한 연꽃향을 맡고선 이제 이것이 내 향인지 저 자의 향인지도 모르겠군 자조적인 생각이나 함.
그 이후로 야렵을 나갈 일이 있을 때면 무조건 망기도 동행함. 강징이 뭐라 비꼬든, 만류하든 아랑곳 않았지. 지난 번과 같은 일이 없으리라 어찌 단정합니까? 또 다시 사고가 날 경우 강 종주 뒷수습은 내 몫 아니오? 침착한 목소리에 강징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겠지. 그런데 하필 그 야렵 행선지가 고소 남씨가 향하는 야렵지와 길 뿐만 아니라 일정도 겹쳐서 중간에 잠시 동행하게 됨. 오랜만에 보는 제 형장의 얼굴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아서 스스로도 놀랐겠지. 강징은 툴툴대는 듯 하면서도 희신의 손길을 익숙하게 받아들여서 그걸 몇 걸음 떨어진 채 지켜보는 남망기 속만 괜히 또 뒤집힘. 스스로도 이유는 모르지만 자꾸 기분이 가라앉을 거야. 빨리 고소 남씨와 길이 갈렸으면 좋겠고. 희신이 좀 속상한 낯으로 강징에게 말하는 게 들려. 만음, 연화오에서 보낸 축객령은 여전합니까? 혹 제가 무언가 실수라도 하여 그러신다면… 다정한 목소리에 강징은 또 화득 떨면서 그런 거 아니라고 부정함. 슬쩍 망기 쪽으로 향하는 시선 모른체 먼 곳만 쳐다보고 있으려니 다시금 시선 갈무리한 강징이 조용히 남희신 달래겠지. 그런 것이 아니라, 아연에게 다른 양인의 향이 좋지 않아 그런 것입니다. 의원이 다시금 당부하기에 어쩔 수 없이… 그럼 훗날 아연과 함께 연화호를 구경시켜 주시겠습니까? 정말 기쁠 겁니다, 만음. 더 이상 남의 대화를 훔쳐 듣기 싫어 남망기는 걸음을 옮겼기에 강징의 대답은 알 수 없었어.
고소 남씨와 헤어진 후 마을에서 같이 점심 먹는데 강징 혼자 슥 빠져나가길래 망기 몰래 뒤따라갔다가 구석에서 헛구역질하는거 보곤 다가감. 근데 먹은게 없으니 나오는 것도 없고 괴로워만 하길래 서둘러 근처 객잔에서 따뜻한 물이라도 얻어다 건네 줬어. 물을 받아 마시는 강징에게서 백단향이 약하게 풍겼음. 남망기는 이제 강징이 아닌 제 형장에게 더 화가 나기 시작했겠지. 아이의 친부가 아닌 양인의 향이 음인에게 독인 것을 알면서도 제 향을 또 묻혀놓다니. 혹, 남희신이 강징의 온 몸에 덕지덕지 묻은 남망기의 향에 본능적으로 제 향을 묻힌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음. 아정함의 현신인 남희신이 그런 자가 아님을 스스로 잘 알고 있으면서도 어쩐지 자꾸만 강징을 추궁하고 싶어짐. 남희신의 마음도, 강징의 마음도, 본인의 마음도 어느 무엇 하나 확신 할 수가 없어서 답답한 거야. 결국 남망기는 지친 낯으로 물을 홀짝이는 강징에게 묻고야 말았어.
형장에게 뭐라고 답했습니까?
갑자기 무슨 말입니까?
…아이를 출산하게 되면, 아이와 함께 연화호를 구경시켜주겠다 했냐는 뜻입니다.
…그건 함광군이 왜요.
강 종주, 그리 아둔한 자는 아니지 않소?
하. 분명 지난 번 이 엇비슷한 대화를 했던 것만 같소만.
픽 웃으며 강징은 비꼬는 말투로 내뱉었음.
아정하신 함광군께서는 감히 동생의 씨를 품은 몸으로 제 형장에게 들러붙는 꼴이 역겨울만도 하시겠소. 그래, 내가 희신의 마음을 이용했습니다. 사방에서 내 목을 죄어오는데 오직 택무군 하나만이 내게 손을 내밀더군요. 그래서, 그 마음에 기대고자 한 것이 죄라도 된다더이까? 함광군, 선을 넘지 마시오. 내가 비록 지금은 당신에게 은혜를 입었음을 알지만, 때가 되면 알아서 답례를 톡톡히 할 테니.
남망기는 여전히 옥같은 낯으로 강징을 내려다봤음. 지금 강징이 아득바득 자존심을 내세우는 것을 알지. 그렇기에 강징의 말을 죄다 믿는 건 아니야. 이제 남망기는 강징이 다른 이의 마음을 이용하는 후안무치가 아님을 알아. 다만 남망기가 정말로 알고 싶은 것은…
강만음. 내가 물은 건 그게 아니다.
......닥쳐.
형장을, 남희신을 은애하는가?
닥치라 했어!
네가 형장에게 마음을 준 이유가 고작 다정이라면, 너에게 다정히 구는 이에게는 죄다 연심을 품을 셈인가?
남망기!! 더 이상 주제넘게 굴지 마!
...나는 네가 형장을 연모하여 화가 난 게 아니다.
......
네가 누군가를 마음에 품은 것이 거슬려. 그 이가 형장이 아니더라도 그랬을 거다.
뭐라고 지껄이는 거지. 스스로를 을러대면서도 입 밖으로 이미 튀어나간 말은 갈무리 해 담을 수 없음을 알아. 강징도, 망기도 잠시 말을 잃었음. 먼저 탄식 같은 헛웃음을 흘린 건 강징이야.
...하.
......부사에게 일러 빈 속에 좋은 차를 올리라 하겠소.
함광군. 당최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나 아는 게요?
이만 객잔에 들어가 좀 쉬도록 하시오. 나머지 야렵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도망치듯 강징을 뒤로 하고 걸어가면서 망기는 무언가 잘못된 기분에 휩싸이면서도 한결 후련해진 모순된 감정에 속이 아주 시끄럽고 혼란스러움. 그러면서도 뒤통수에 따라붙는 강징의 시선에 묘한 만족감도 들겠지. 내가 혼란스러운 만큼 너 또한 혼란스럽기를 바라서. 뭐라 이름 붙이기도 애매한 이 오묘한 감정에 자꾸 휩쓸리는데, 강징 또한 남망기 생각에 잠 못 이루기를 바라서… 아정하신 남이공자, 제가 이런 생각 한다는 사실 깨닫자마자 본인이 매우 한심스럽고 비겁하게 느껴져 자괴감도 들겠지.
그 날 이후 강징과 남망기는 기묘한 휴전 상태를 이어갔음. 부러 서로의 앞에서 일절 남희신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지. 강징이 여전히 희신과 서신을 주고받고 있고, 남망기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암묵적인 규칙마냥 그렇게 된 거야. 그리고 강징은 남망기가 원했던 대로 매우 속시끄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음. 안 그래도 신경쓸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닌데 저 망할 남망기도 기행을 일삼으니… 평소 음주가무를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만 그 날 따라 달빛이 매우 아름다웠고, 얼마 남지 않은 축제 덕에 연화호에 만개해 가는 연꽃 또한 무척이나 아름다웠기에 핑계는 충분했음. 제법 도톰해진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강징은 하풍주 한 병을 들곤 연화호 앞에 자리잡고 앉았음. 신발까지 벗어던지곤 두 발만 물에 담근 채 달빛과 연꽃과 함께하는 달밤에 기울이는 술잔이란. 두어잔이나 입에 대었을까, 달빛 아래 더욱 환하게 비춰지는 흰 옷자락이 강징의 눈 앞에 너울거렸지.
뭐하시는 겁니까.
담담한 음성과 함께 남망기가 강징의 손에서 술잔을 가볍게 뺏어갔음. 미미하게 찡그려진 미간을 올려다보며 강징은 픽 웃었음.
부러 도수가 없다시피 하게 하여 빚은 것입니다. 이리 주시지요.
......
함광군.
안 됩니다.
…지가 뭔데?! 또 성질이 나려는 걸 꾹 참으며 강징은 남망기를 노려봤음. 남망기는 대꾸없이 강징과 세 뼘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앉았어. 결국 강징은 날 선 시선을 거둬들였고, 둘은 말없이 연화호 수면에 비친 달이나 쳐다봤겠지. 여름밤의 선선한 바람과 풀벌레 소리 사이 침묵을 먼저 깨뜨린 건 강징이었어. 이젠 제법 남망기와의 시간이 편해져서 그런가, 평소같았더라면 쓸데없다 여겼을 말들이 흘러나왔지.
고소 수학 시절, 위무선과 몰래 천자소를 마시다 남 선생님께 걸려 혼이 나곤 했지요.
......
지금 생각해보면 그까짓 술이 뭐라고 싶은데. 위무선은 워낙에 망아지 같은 놈이라 하지 말라면 더욱 해대는 놈이니.
남망기 앞에서 위무선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일종의 불문율과도 같았는데, 하지만 남망기와의 공통분모 중 무엇보다 큰 것이 위무선이기에 자연스레 제 사형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음. 강징은 내심 남망기가 자리를 뜨지는 않을까 생각했지만 남망기는 그러지 않았지. 강징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말을 이었어.
그리 술을 즐기지는 않는 편인데, 종종 천자소 생각이 나곤 하더이다. 그 이후로 한 번도 입에 대 본 적은 없지만.
......
취객의 넋두리이니 듣기 싫으시다면 이만 들어가 보세요.
제가 자리를 뜨면 또 술잔을 채우실 것 아닙니까.
안 그럽니다. 안 마실 테니 그만 가세요.
나름 친절하게 축객령을 내렸음에도 여전히 흰 옷자락은 올곧은 자세로 앉은 채였지. 멍하게 연화호에 비친 달빛을 보던 강징의 귓가에 차분한 음성이 들렸어.
언젠가, 위영이 천자소보다 뛰어난 술이 하나 있다고 했습니다.
......
연화호를 보며 즐기는 하풍주라 하였지요.
강징은 남망기의 의도를 그제야 알아챘음.
한 잔 따라 드리고 싶다만 술잔이 하나 밖에 없군요.
괜찮습니다.
남망기는 스스로 강징이 마시던 잔에 술을 따라 마셨지. 강징의 입술이 꾹 다물렸어. 이상해. 정말 이상하다. 남망기도, 나도 뭘 하고 있는 거지. 그와 내가 제정신이 맞나. 사실 이 모든 것이 한 순간의 환상은 아닐까. 강징은 정말로 남망기를 보내야겠다고 생각했어. 이건 이상해. 정말… 이상해.
함광군.
......
이제 그만 돌아가십시오. 몸 상태도 안정기에 접어든 듯 하니, 필요하다면 제가 운심부지처로 가겠습니다.
산달까지는 머무르겠습니다.
택무군 때문이라면 제가 서신을 보내지요.
연화오에 머무르는 것은 형장이 강요한 일이 아닙니다.
그럼 왜 구태여 스스로를 괴롭게 하십니까?
강징의 순수한 의문에 남망기는 잠시 말문이 막혔음. 강징은 비록 남망기가 저를 대하는 것이 이젠 제법 유순해졌음을 알지만 여전히 그 기저에는 증오가 있음을 알아. 강징이 그 사실을 안다는 것을 남망기 또한 알지. 증오하는 이를 계속해서 마주보는 것이 고통스럽지 않을리 없으니, 보내주려 할 때 순순히 가라는 건데. 남망기는 태생적으로 술을 못하는 탓에 매우 약한 도수임에도 취기가 어른거리며 올랐음. 그 탓일 테지.
......모르겠습니다.
......
한 때는 위영이 해답을 찾기 어려운 난제 같았고... 또 지금은 제 마음이 그렇습니다.
......
제가 혼란스러운 것이 무엇 때문인지 스스로도 설명하지 못하겠다면, 비웃으실 겁니까.
이런 무책임한 말이나 지껄이는 것은. 강징은 혀를 찼음.
취하셨군요. 그만 잔을 이리 주십시오.
강 종주.
......
위영의 말이 맞군요. 천자소를 그리 자주 마셔보지는 않았다만, 하풍주의 주향이 더욱 뛰어납니다.
제대로 익지도 않은 술인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강징은 취기 탓인지 미미하게 열 오른 남망기의 얼굴을 건너다보다 픽 웃고 말았음. 잠시 입을 다물었던 강징은 이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어.
함광군.
......
저는 저희의 관계가 변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함광군께서도 마찬가지시리라 믿습니다. 본디 저희는... 서로를 경멸하고 괄시하는 사이 아닙니까?
......
저를 보면 도무지 잊혀지지 않는 이가 있어 괴로우시지요. 저 또한 마찬가집니다. 평생을 그 이를 가슴에 묻지도, 파내지도 못한 채 살 테지요. 잠시 혼란스러우신 겝니다. 아시다시피 그와 제게선... 같은 향이 나니까요.
......
곧 있으면 연꽃 축제가 열립니다. 연화호에 만개한 연꽃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니 축제를 즐기신 후에 돌아가십시오. 부사에게 일러 짐을 빼두라 하겠습니다.
여전히 올곧은 자세로 앉아있는 남망기를 뒤로 한 채 강징은 먼저 자리를 떴어. 자꾸만 풀리려는 다리에 힘을 주어 걸어가며, 늘어지는 걸음은 여름밤의 달빛과 연꽃, 홀릴 수 밖에 없는 정취 탓이리라 되뇌이며. 그러나 침상에 누운 뒤에도 자꾸 남망기가 떠오르는 것을 멈출 수는 없었음. 남망기의 혼란스러움이 제게도 옮은 모양이지. 하지만…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는 안 되지. 언젠가 후회할 일을, 그르치고 말 일을 또 다시 만들 수는 없었음. 한순간의 실수는 뱃 속의 아이만으로도 충분했어. 아직 남망기는 여전히 위무선에 대한 연심을 지우지 못했고, 지금은 잠시 혼돈을 겪더라도 언젠가는 그 오래묵은 마음이 또다시 고개를 쳐들겠지. 무려 16년 간을 위무선 하나만 원했던 자다. 강징은 조용히 흐느꼈음. 위무선의 그림자에서 영영 벗어나지 못할 이가 있다면 그는 말할 것도 없이 남망기와 강징일 테니. 지긋지긋했어.
시간이 흘러 드디어 연화오에서 연꽃 축제가 열렸어. 제법 큰 축제인지라 인근 뿐 아닌 먼 곳에서도 관광객들이 몰려들었겠지. 사실 남망기는 별 흥미가 없었지만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이 곳 저 곳 돌아다니느라 바쁜 강징을 눈으로 쫓았음. 신이 난 금릉의 손을 꼭 붙들고 거니는 강징은 평소답지 않게 제법 즐거워보였어. 남희신이 마라 양념을 친 꼬치를 먹다 사레가 들려 기침을 하는 것에 냉차를 건네주며 남망기는 그러게 못 드시는 매운 것은 왜 자꾸 입에 대시냐며 한 소리를 했겠지. 말하고 보니 어쩐지 금릉을 혼내는 강징의 말투를 닮은 듯해 스스로도 좀 놀랐을 거야. 남희신도 그걸 느낀 모양인지 제 동생을 보다 웃고 말았음. 연화오에서 지낸 뒤로 제법 말수가 늘었구나, 망기. 남망기는 대답하지 않았지.
절간과도 같은 운심부지처와 달리 언제나 정 많고 흥이 넘치는 운몽의 사람들은 축제가 되니 더욱 신이 났어. 사방에서 흥겨운 음악이 흘러 나오고 즐거운 웃음소리만이 들렸겠지. 그래서 더더욱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음. 갑작스레 달려드는 마물의 존재를. 방금까지 웃고 떠들며 음악소리만 넘치던 곳이 순식간에 비명소리로 가득 찼어. 강징은 놀라서 금릉을 제 품으로 당기려 했으나 사방에 사람들이라 실수로 손을 놓치고 말았지. 아릉!!!! 외치는데 하필이면 겁먹은 아이 뒤에서 길다란 촉수가 공격해 와. 강징은 앞 뒤 가릴 것 없이 사람들을 헤치고 달려가 금릉을 감싸안았음. 그리고 촉수에 가슴이 꿰뚫렸어. 후두둑 핏물이 떨어지는데 아래에서도 피가 쏟아져. 아니, 가슴에서 떨어지는 핏물이 아래를 적시는 걸지도 몰라. 그렇게 믿고 싶었어.
공자께서는...
......
가장 소중한 것을 잃으시겠군요.
순간 남망기의 머릿속에 벼락처럼 점쟁이의 말이 떠올랐겠지. 남망기는 넋이 나간 마냥 되뇌임. 아니야. 난 이미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어. 그러니 네가 잘못 될 리가 없어.
강징만큼이나 망기 얼굴도 허옇게 질리는데 아수라장 한 가운데 외숙!!!! 비명지르는 금릉을 수사 몇이 붙들곤 안으로 데려가는게 보여. 또 다른 수사들은 강징을 재빨리 옮기고 겁 먹은 사람들도 이게 무슨 일인지 웅성거리고… 남망기는 무의식적으로 연화오 수사들 따라가려는데 남희신이 뒤에서 잡음. 마물들 먼저 처리해야 한다고 고개 젓는데 남망기 결국 악 지르며 우는 금릉 목소리 뒤로 하고 남희신을 따라갈 거야. 마물들 베어내는 손길에 분노와 걱정이 어려있겠지. 한 순간 핏덩이를 후두둑 떨어뜨리는 그 모습이 잊히지 않아서, 강징의 그 표정이 눈 앞에서 자꾸 어른거려 괴로워. 그런데 방심한 탓인지 망기마저 마물에 당하고 말았음. 망기야!!! 저를 부르는 형장의 목소리가 들리는데 독이라도 있는 놈이었던지 금세 눈앞이 흐릿해지고 망기도 혼절하고 말았지.
그런데 정신이 들고 보니까 위무선이 헌사해서 돌아온거야. 이게 꿈인지 생신지 남망기는 무척이나 기뻤음. 남잠, 남이공자, 하면서 안겨드는 몸 끌어안는데, 기쁜 와중에도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함. 아이는... 죽었겠지. 원체 약한 몸이었는데 그렇게 심한 부상을 입고도 아이가 붙어 있을리가 없었어. 아이를 살리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쓰던 강징이 아이를 잃고도 제정신일 수 있을까. 급격하게 어두워진 표정에 위무선이 남잠 왜 그래? 물으니 남망기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개 저으며 위무선을 더욱 꽉 끌어안고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음. 익숙한 향이야. 그렇게 그리워했던 그 향. 그런데 저 너머 어딘가에선 그보다 조금 더 옅고 물비린내가 나는 연꽃향이 떠오르겠지. 분명 품에는 그토록 그리던 이가 안겨있는데 왜 이렇게 속이 쓰린지, 끔찍한 기분이 드는지 모를거야. 자면서도 아이가 잘못되는 악몽을 꾸는 이인데... 자꾸 속이 꽉 조여드는 기분임.
위무선은 강징을 보러 가겠다며 얼마 뒤 연화오로 떠났고, 그를 보러 가겠다는 핑계로 연화오로 향한 김에 강징 슬쩍 보러 가는데 강징은 평소같은 얼굴을 하고서 집무를 보고 있겠지. 그 얼굴 보자마자 시뻘건 피 쏟던 모습이 부지불식간에 떠올라. 몸이 아직 다 회복되지 않았을텐데 벌써 일을 하나 독하다 싶기도 하고 생각보다 멀쩡한 모습에 아이를 잃은게 슬프지도 않나 싶었어. 하긴 강징은 언제나 그랬지. 늘 뱃 속의 아이가 소중한듯 굴다가도 막상 연화오나 금릉에게 무슨 일이 닥치면 아이는 뒷전이었으니. 그래, 아이가 그렇게 큰 의미는 아니었을지 몰라, 하고 남망기는 뒷맛이 나쁜 생각을 곱씹었음.
그러다가 마주친 둘이 결국 싸우게 되겠지. 넌 네 자식이 죽었는데 아무렇지도 않냐는 말에 강징은 픽 웃어. 비록 몇 달 품지도 못했지만 그 앤 내 뱃속에 있었어. 달이 찰수록 점점 배가 불러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날마다 애를 태우던걸 네가 알기나 할까? 아이가 잘못되지는 않을까, 혹여 태어나더라도 제 구실 못하지는 않을까, 아비 없이 태어나게 했다고 나를 원망하지는 않을까 속을 얼마나 끓였는지도 모르는 주제에 함부로 지껄이지마. 이제 와서 반쪽짜리나마 아비 노릇을 하고 싶어? 왜 아이를 끝까지 지켜내지 못했냐고 나를 원망할 셈인가? 아니지, 오히려 남망기 넌 나한테 고마워 해야지. 이 아이가 지금까지도 내 뱃속에서 살아있었더라면 위무선에게 뭐라고 변명을 하겠어? 그땐 네가 애를 죽이려 들었을걸. 내 말이 틀렸나, 남망기?
씨근덕거리다가 강징이 축객령을 내림. 나가. 남망기는 가쁜 숨을 몰아쉬는 강징을 보면서 저 이가 매우 슬프고 좌절했다는걸 알지만 그냥 뒤돌아 나갈 수 밖에는 없었지. 등 뒤로 닫히는 문 너머에서 무너져내리는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도 해. 남망기는 몇 걸음 가다말고 뒤돌아서 닫힌 문을 열었어. 지금 자기 행동이 매우 충동적이라는걸 알아. 그냥 본 계획대로 위무선을 보러가야 한다고 이성은 말하지만 어쨌거나 죽은 아이는 남망기의 아이이기도 했단 말이야. 비록 그 아이를 위해 해준거라곤 얄팍한 동정심 섞인 행동밖에는 없었지만, 그래도. 눈물범벅이된 강징의 얼굴이 보여. 핏발 선 눈이 남망기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듯이 노려봐.
아이는 어디에 묻었어.
그런데 그 한마디에 맥이 탁 풀린 강징이 울면서 웃어. 막 흐득이는 어깨가 떨리고 숙여진 고개에 얼굴이 보이진 않지만 웃음 소리와 울음 소리가 섞여서 괴이하게 들려. 남망기는 저 어깨를 감싸안아주어야할지 토닥여주어야할지 망설이지만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겠지. 흐느낌 사이로 간신히 알아들은 거라곤 연화호 그 한 마디 뿐이야.
남망기 처음엔 걷다가 점점 걸음이 빨라져 뛰듯이 연화호에 다다르겠지. 막막할 정도로 넓은 연화호에 피어있는 아름다운 연꽃들 보다가 결국 무너지는 남망기. 이 곳에 그 핏덩이를 뿌렸나 혹은 묻었나... 물속이라니, 빛을 보기도 전에 가버린 어린 것이 있기에는 너무 추운 곳은 아닌가. 함광군이 연화호에서 무릎 꿇은채 울고있으니 다들 수근거리는데 위무선이 헐레벌떡 달려오겠지. 남잠!! 무슨 일이야, 어떤 놈이야?! 주술이라도 씌었나. 왜 그래, 응? 남망기는 위무선 품에 무너져내리면서 울어. 왜 우는지 절대 말 못하고 이름도 지어주지 못한 채 빛도 보지 못하고 죽은 자기 자식 무덤 앞에 두곤 꺽꺽 울겠지. 위무선이 어찌할바 모르고 남잠, 왜 그래? 남잠. 망기야. 망기야. 하는데 목소리가 점점 남희신 같이 들려. 그런데 문득 고개 들어보니 눈 앞에는 위무선이 아닌 남희신이 저를 내려다보고 있어. 그리고 남망기는 꿈에서 깨어남.
희신이 걱정하는 얼굴로 망기야. 괜찮으냐. 하면서 침상 맡에 앉아있겠지. 그제야 정신 든 남망기 일어나 앉으려는데 윽, 하고 단말마의 신음성이 저도 모르게 흘러나와. 남희신은 몸을 일으키려는 남망기를 만류함. 꼬박 닷새를 앓았다. 좀 더 누워있거라. 의원을 다시 부르려던 참이었다. 남망기는 자기 얼굴이 눈물범벅인거 그제야 깨닫지. 저를 다시 눕히려는 형장 손 저지하곤 물어. ...강만음, 강 종주는 어찌 되었습니까. 남희신이 걱정스러운 낯으로 운몽의 수사들이 연화오로 데려갔다. 상처가 중하니만큼 강 종주도 아직 회복을 다 하지는 못하였겠지. 답하니 남망기는 입술 꾹 다물음. 그러다 다시금 비틀거리면서도 일어서는거 남희신이 만류하니까 괜찮습니다. 하곤 억지로 걸음 떼겠지. 입술 밖으로 새어나오는 음성이 깔깔해.
형장. 언젠가 제게 부정과 연심을 헷갈리고 있다 하셨지요.
……
형장이 틀리셨습니다. 제가 그를 은애합니다. 부친으로서 아이를 아끼는 것과 별개로 제가 강만음을 마음에 품었습니다.
……
하여 이만 그를 보러 가야겠습니다. 비켜 주십시오.
남희신 말 없이 자기 동생 보는데 사실 오래 전 부터 남희신은 알고 있었어. 평생을 보아왔던 제 동생의 마음을 남희신이 모를 리가 없으니. 그래, 사실 그 동안 남희신의 행동은 아집이었으며 질투였음을 스스로도 모르지 않았음. 다만 인정하기 싫었던 거야. 망기가 제 마음을 확실히 깨닫기 전에 어떻게든 강징을 붙들고 싶었기에 꼴사납게 굴었음을. 망기가 강징에게 애증 가지고 있는걸 눈치챈 지 오래지만 그러나 저런 어중간한 마음이면 결국에 누구 하나 행복할 리 없으니 차라리 빨리 접게 하자는 생각이었겠지. 자기가 사랑하는 동생과 사랑하는 이, 강징 뱃 속의 조카이자 자식으로 기를 아이 모두 행복했으면 했으니. 그러나 이제는 망기가 알아버렸고, 스스로 인정해 버렸으니 더는 붙들지 않고 보내 줌. 그래도 아직 몸이 덜 회복되었으니 마차 타고 가라 하는데 남망기 마음이 급해서 그냥 어검해서 갈 거야. 어지럽고 쓰러질것 같은데 정신력으로 아득바득 버텨가며 단 하나만을 떠올림. 강징. 연화오로 향하는 내내 꿈 속 강징이, 그 무너지듯 우는 얼굴이, 까마득히 넓게만 느껴지던 연화호가 떠올라. 항상 매끈하니 무표정하던 얼굴이 누가 봐도 동요하는게 티나겠지.
참담한 분위기 속 연화오 문은 걸어 잠겨있고 수사들이 못 들어가게 막는데 부사가 들여 보내 줌. 침상에 고요히 누워있는 창백한 낯의 강징에게 천천히 다가가서 침상 맡에 앉는 남망기. 아직 독이 다 해독된 건 아니라 머리가 어지럽고 아파. 그러나 자기 향 풀어주겠지. 그간 향 없이 견뎠을 강징 생각해서. 그러면서 계속 자길 괴롭혀왔던 아이가 혹시 잘못됐을까 하는 걱정에 미세하게 떨리는 음성으로 몇 걸음 떨어져 서 있는 부사에게 물어. ...아이는? 다행히 사산되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답을 듣곤 남망기 파도처럼 밀려드는 안도감에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아. 아직도 꿈 속의 광활한 연화호 앞에서 느꼈던 무력감이 너무 생생해서...
잠시 망설이다 말곤 그리 불러오지 않은 배 위에 손 얹자 태아의 기운이 느껴져서 밀려드는 안도감에 또 눈물 쏟아짐. 부사는 조용히 둘만 남겨둔 채 나가고, 남망기는 입술 꾹 깨물고 참으면서 향 더 풀겠지. ...강만음. 중얼거리는 동시에 깨달을거야. 꿈에서 깬 뒤로 한번도 위무선 생각을 안 했다는 걸. 그 몇 년간 남망기 머릿속에서 위무선이 떠난 적이 없었는데, 매정한 이가 꿈에도 한번 나타나 주지 않는다고 원망하다가도 그런 마음이 드는 자신이 죄스러워서 속만 까맣게 타들어갔는데, 어쩌다 한 번 꿈에 위무선이 나오는 날이면 그 날은 내내 그 꿈만 되새기며 살았었어. 그런데 연화오로 오는 내내 단 한번도 위무선 생각을 안 한 거야. 오로지 강징이랑 그 뱃 속의 아이 걱정에 가슴이 터져버릴것만 같았겠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강징이 으음... 웅얼거리다 천천히 눈을 떠. 그 짙은 쌍커풀 아래로 커다란 눈동자가 드러나는 순간 시선이 마주치면서 그냥 어쩔 수 없이 완벽하게 인정하게 될 거야.
...함광군?
내 마음을 이 자에게 주었구나. 비록 위무선에게 그랬듯 온전한 연심으로 이루어진 감정은 아니지만 이제 강징을 보면 전처럼 증오에 치를 떨고 혐오스럽지는 않아. 미련스럽게 아등바등하는 걸 보며 왜 저러나 짜증스러웠던 것이 실은 왜 제 몸 귀한 줄 모르나 애가 탔었던 거였어. 속은 여린 이가 모질게 구는 걸 보면서 한번쯤은 그 짓이겨진 속내를 보듬어주고 싶다고 생각했던 걸 애써 모른 척 했었던 거였겠지.
함광군? 왜... 우십니까? 몸이 안 좋으십니까?
누가 누굴 걱정하는지 당황해선 일어나 앉으려는 강징 다시 눕히곤 남망기 무표정한 낯으로 자기 턱에 맺힌 눈물방울 손등으로 쓱 닦아냄. 잘못 보셨습니다. 무뚝뚝하게 그러는데 잘못 보긴 개뿔 아직 눈가가 발갛거든. 그러고보니 눈도 좀 부은 듯 싶은데 강징은 독에 중독된 건 아니어서 중간중간 정신 들 때 부사가 대강 무슨 일 있었는지 설명해 줬어서 남망기도 중상 입은거 알았겠지. 목석 같은 이가 저러는 걸 보아하니 여간 큰 부상이 아니구나, 그런데 남망기가 왜 연화오에 그것도 자기 처소에 있는지 일어나자마자 온갖 생각에 머리가 핑핑 도는데 남망기가 예의 그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함. 눈을 더 붙이십시오. 여전히 의문만 가득한데 어차피 물어봤자 대답 안 해 줄 거 아니까 강징 작게 한숨쉬곤 순순히 눈 감고.
오신 김에 식사라도 하고 가시겠습니까. 거절할 거 알면서도 예의상 묻는데 의외로 남망기가 승낙하니까 감았던 눈 동그랗게 뜨는 강징에 처음으로 귀엽다고 생각하는 남망기.
...운몽의 음식은 고소와 달리 향도 맛도 강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빈 속에 자극적인 음식은 나쁠겁니다.
괜찮습니다.
마음대로 하세요, 그럼.
더 대거리하기도 귀찮다는 양 팩 돌아눕는 뒷모습 참 여전하다 싶으면서도 성질머리 똑같은 거 보니 그제야 안심되어선 긴 숨 내쉬는 남망기겠지.
그리고 사실 강징이 남망기에게서 돌아누운 건, 누가봐도 아직 제 몸도 다 못 추스른채 정신 들자마자 달려온 게 뻔한 꼴이라 자꾸 눈물이 날 것 같아서였음. 저 자가 진심인 것처럼 착각하게 될까봐, 영원이라도 맹세하기를 바라게 될까봐. 그러나 결국 새어나오는 눈물 탓에 미세하게 떨리는 어깨와 훌쩍이는 코에 쪽팔리고 짜증나겠지. 축객령을 내리려던 차에 뒤에서 남망기의 음성이 들림.
본계획과 달리 예상치 못한 변고 탓에 축제를 즐기지 못하였으니 다음번 축제가 끝난 후 돌아가겠습니다.
그 단정한 음성에 실린 다정을 모를리가 없으니. 자꾸 욕심이 나. 이러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다잡고 또 다잡지만 이미 허물어지기 시작한 마음은 어찌할 도리가 없어서…
zip zip 하고 강징 애 낳을 때 난산이라 남망기 눈 돌아갈 뻔 함. 닫힌 문 너머로 억누른 비명소리와 다급한 의원의 목소리, 분주하게 깨끗한 물과 천 따위를 계속하여 실어 나르는 가복들 틈 사이에 서서 백지장마냥 하얘진 낯을 하고 선 남망기에게 수군대는 시선 꽂혀도 아랑곳 않을 듯.
그리고 남망기는 내내 점쟁이 말이 마음에 걸려서 미칠 것 같을거야. 아무리 그 점쟁이가 돌팔이라고는 해도… 혹시 모르잖아. 미미한 가능성일지라도 있다면… 그 함광군이 한낱 점쟁이 말에 휘둘리는 걸 아무도 모르겠지.
마침내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고 결국 참지 못한 남망기가 부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산실 안으로 뛰어들어가. 이제 더 이상은 보고싶지 않은 창백한 낯으로 눈 감고 있는 얼굴이, 또 다시 남망기의 앞에 정신을 잃고서 누워있음. 지독한 난산 탓에 주위에 즐비한 피묻은 천과, 피 섞인 물대야에 현기증이 나. 강징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아기씨는 아드님이시라고 말하는 의원에게 사나운 목소리로 묻겠지.
강 종주의 상태는?
초산인데다 난산이신지라… 하혈이 심하셨기에 경과를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또한…
또한?
이번이 마지막 출산이 되실 듯 합니다. 아기집이 망가져버려서…
그건 상관없었어. 강징만 다시 멀쩡하게 눈을 뜨면 되니까. 아이를 포함한 모든 이를 주변에서 물리곤 강징 앞에 앉은 채 남망기는 참회하듯 읊조려.
너는 강한 이잖아. 네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했던 이 모든 것을 뒤에 두고 갈 테냐?
……
강만음. 제발 정신 차려. 내가 그간 못나게 굴어서 벌을 주고 싶은 거라면 무엇이든 달게 받겠다.
그래, 남망기는 두려워. 몇 번이나 잃을 뻔 했지. 몇 번이나, 제 어리석음과 아집 탓에. 남망기는 더 이상은 소중한 이를 잃고 싶지 않아. 더 이상 홀로 남겨진 채 과거에 붙들려 괴로워하며 자책하고 후회하는 악몽을 겪고 싶지 않아.
그리고 강징은 며칠 간 남망기 애를 태우다 못해 잿더미로 만든 뒤에야 의식이 돌아옴. 눈 뜨자마자 제 아이를 찾는 것에 품에 안겨주면서 밀려드는 안도감에 눈 뜬 강징의 수척한 얼굴만 집요하게 뜯어보겠지. 아이를 살핀 뒤에야 희미하게 웃으며 남망기를 올려다보는 강징은 메마른 음성으로 소리내어 웃음.
함광군.
……
어째 울보가 다 되셨습니다.
……몸은, 어떠십니까. 기갈이 들 텐데, 죽을 올리라 하겠습니다.
안아보셨습니까? 아연이요. 딸인가 하였는데 아들이군요.
잠시 망설이던 남망기는 떨리는 손으로 아이를 받아들어 품에 안아봄. 제가 그럴 자격이나 있나 싶어서 부사의 권유도 마다했었어. 처음으로 안아보는 제 아이였음. 품에서 느껴지는 연약한 무게와 함께 풍기는 포근한 젖내, 따끈한 체온. 아연. 내 아이. 나와… 저 이의… 아이. 남망기와 강징의 아이. 이미 흠뻑 젖은 얼굴은 마를 새 없이 계속해서 습기만 더했지. 조용히 흐느끼는 남망기의 어깨에 강징은 어색하게 손을 올려 울음을 달랬음. 한참이 지나서야 긴 울음이 멎었겠지.
또다시 zip zip 하고 강징 애가 남망기 애이기도 하다는건 부사랑 남희신만 알 거야. 근데 남망기가 지나치게 자주 종주실 드나들고 애 지극정성으로 보살피고 강징이랑도 분위기 묘해서 나중엔 다들 눈치챌 거임. 내심 운몽과 고소 간에 곧 혼인식이 있지는 않을까 운몽 사람들은 기대하고 있었어.
한편 운몽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강징 첨에 아기 낳고 아이가 너무 본인과 똑닮아서 혹시 남망기가 애 안 예뻐할까봐 자낮해했겠지. 근데 왠걸 남망기 애가 조금 앵-하면 벌떡 일어나 애 안고 달래고 기저귀도 지가 척척 갈고 유모는 괜히 들였나 싶을 정도로 싸고 돌 거야. 그래서 다행이다 싶은 강징... 둘 사이 아직 애매하겠지. 공표한건 아니지만 다들 아이가 남망기랑 강징 사이 친자인 것도 알고 근데 둘은 정인이라기엔 지나치게 조심스럽고 그렇다고 예전처럼 서로를 혐오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튼 둘 다 서로 조심스럽게 대하는 중이야.
그리고 아이 이름은 탁성이라고 남망기가 지어줌. 밝을 탁에 별 성을 썼지. 강징은 마음에 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음. 아연, 네 이름은 이제 탁성이다. 마음에 드느냐? 아이가 배냇짓하며 꺄르르 웃자 강징과 남망기도 저도 모르게 따라 웃었지.
나중에 탁성이 좀 커서 지 아빠랑 장난친다고 아부부거리다 말액 잡아채서 흐트러지는 날도 있을 거야. 강징이 부친께 그러면 못 쓴다, 아성. 하면서 애 받아들려고함. 말액은 처자식만 만질수있는데 자기랑 남망기는 일단 대외적으로 아무런 사이도 아니고 아무튼 남망기와의 관계에서 조심스럽고 자신없는 강징임을 망기도 잘 알겠지. 망기가 탁성이 안 건네주니까 강징이 의아하게 쳐다봄.
아성을 이리 주세요. 말액이 흐트러졌지 않습니까.
망기가 이마에 말액 비뚤어진 채로 덤덤하게 말하겠지.
고쳐 매어 주십시오.
...예?
이 곳엔 경대도 없고 하니.
말액 수십년간 매고 살았는데 경대 없다고 못 맬까, 싶어 황당해진 강징이 무슨 소리냐고 하려다 순간 깨닫곤 입 다물어. 머뭇거리다 말액 조심스럽게 고쳐매 주는 동안 남망기는 품 속의 아이 어르겠지.
...다 되었습니다.
강 종주.
……
종주실로 거처를 옮기고자 합니다.
......
아성이 부친의 얼굴을 잊을라 우려됩니다. 이 맘때 아이들은 쑥쑥 자라니 못 보는 하루 한 시가 아쉽고.
...함광군.
그리고 혼례를 올리고자 합니다. 물론 강 종주께서도 원하신다면.
강징 눈물 후두둑 떨구는거 남망기 말없이 끌어당겨 안겠지. 둘 사이에서 영문 모른채 행복한 탁성이만 옹알이하고... 그리고 혼인하는 둘이 보고싶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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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너무 늦게 왔네... 혹시 아직 기다리는 붕들이 있었다면 정말 코맙고 미안하조 무려 4년만에 와버렸네 ㅎㅎ; 사실 보고 싶은 장면들과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었는데 그래도 매우매우 늦었지만 얼기설기 이어붙히더라도 끝은 내고 싶어서 이제야 왔음 난 여전히 싸섹의 바이블인 망기강징이 좋다,,, 이 글 속 망기강징은 앞으로는 탁성이까지 셋이서 쭉 행복할거야 읽어준 싸섹비들 다들 너무 고마워!!
진정령 망기강징 약희신강징
함광군.
......
읽어보시고 지장을 찍어 주시지요.
제 앞으로 내밀어지는 종이에 남망기는 말없이 그 종이를 제 앞으로 당겨 와 읽었지. 그건 각서였어. 태중의 아이는 운몽 강씨 강만음의 적자로 자랄 것이며 고소 남씨 남망기와는 아무런 연관성 없이 자랄 것이라는. 강징은 내심 그가 화를 내리라 생각했음. 왜냐하면 고소 남씨의 혈육에 대한 집착이 어떠한지 그간 봐 온 것이 있으니까. 만약 남망기가 거절한다면 그는 정말로 자전을 사용할 심산이었지. 비록 그 함광군인지라 쉽지는 않겠지만, 임부를 상대로 그렇게 모질겠어? 음... 남망기라면 그럴수도... 생각하던 찰나 각서를 따라 읽는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지.
강만음의 태중 아이는 운몽 강씨로 자랄 것이며.
......
고소 남씨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을 것임에 동의한다.
......
강 종주도 이에 진정으로 동의 하십니까?
강징은 잠시 생각에 잠겼어. 당연한 것을 묻는 남망기가 무슨 대답을 원하는지 몰랐거든. 강징이 대답을 않자 남망기가 말을 덧붙였지.
강 종주가 말하는 고소 남씨에 형장도 포함 되는지 묻는 겁니다.
강징은 그제야 남망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음. 직설적으로 묻는 것에 강징은 미간을 구겼어. 생각해 보면 남망기가 오해할 만도 하지. 워낙에 남희신은 다정한 자라 임신한 후 기댈 곳 없는 저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줬으니, 남들 눈엔 그렇게 보였을만도 해. 강징은 이제야 복잡했던 머릿속이 해결되는 기분이었음. 그간 남망기가 이랬다 저랬다 한 것이, 제 형장과 강징이 혹여 정을 나눈 사이일까봐 그런 거겠지. 남망기가 비록 그 동안은 아이를 밴 저를 배려해주었다고는 하나, 그에게 강징은 눈엣가시같은 존재에다 남의 아이를 배고도 자기 형장과 정인이라니 수치스럽지도 않을까, 그리 생각했겠지. 강징은 남망기의 생각이 나름 이해가 되긴 했어. 하지만 기분이 나쁜 건 나쁜 거였지. 그래도 저는 운몽 강씨의 종주인데, 비록 지금은 힘이 부족한 세가지만, 저가 남희신의 상대가 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거잖아.
함광군. 무슨 오해를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저랑 택무군은 그런 사사로운 관계가 아닙니다.
......
쓸데없는 염려 말고 지장이나 찍으세요.
형장에게도 이 각서를 보였습니까? 형장이 동의한다면 저 또한 동의하겠습니다.
냉한 음성과 함께 자리를 뜨는 남망기에, 강징은 얼떨떨하게 멀어지는 뒷모습만 쳐다봤음.
강징이 더 이상 망기에게 밤에 향을 풀어주지 않아도 된다고는 했지만, 망기는 여전히 사흘에 한 번 씩은 강징의 침소에 몰래 드나들었겠지. 그간은 들키지 않았지만, 하필 강징은 오늘 쉽게 잠이 들지 않았음. 조용히 침소 문을 열고 들어서는 달빛에 비춰진 흰 옷자락을 걸친 이에게선 익숙한 향이 났어. 강징은 말없이 눈을 뜨곤 스르르 일어나 앉았지. 찾아올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었냐 말하려는데, 이 자는 티도 안 내곤 계속 나를 챙겨줬다는 부채감에 날카롭게 쏘아붙이려다 괜시리 꾹 눌러참게 되는 거지. 또… 각서 때문에 서로 감정이 상했던 것도 떠오르고. 복잡해지는 심경에 제 침상 앞에 의자를 끌어다 앉는 남망기를 말없이 쳐다보고만 있는데, 남망기가 강징을 빤히 보더니 혼자 읊조림.
어쩐지 꼭… 나를 보고 있는 것만 같군.
그러면서 픽 웃는데, 강징은 남망기가 웃는 얼굴을 처음 봐서 저 치가 탈사라도 당했나 싶었음.
강만음.
……
나에게서 또 형장을 보느냐?
……??
또, 라니? 강징은 커다란 눈만 끔벅였음.
당과는 어찌 먹지를 않지.
……
괘씸해.
……
밤마다 널 도운 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아아. 강징은 그제서야 부지불식간에 깨달았음. 남망기는 정말로, 그간 있었던 모든 악몽을… 강징의 가장 나약한 부분을 샅샅이 들여다 보았음을. 순간 눈 앞에서 불꽃이 튀는 것만 같았지. 저도 모르게 숨을 씨근덕거리자 남망기는 그제야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했음.
미치광이가 제 멋대로 떠드는 꼴이 퍽도 재밌으셨겠습니다, 함광군?
강 종주.
왜 멋대로 그런 짓을 했지? 누가 감사라도 할 줄 알고?!
흥분해 벌떡 일어선 강징을 남망기는 진정시키려 했음. 그러나 망기의 말은 씨알도 안 먹혔겠지. 진정하고 앉으시오, 하는 말에도 강징은 계속해서 쏘아붙혔음.
당과도 네가 보냈으면서 왜 거짓을 고했지?
......그러는 너는. 형장을 마음에 품었나? 네 뱃속의 아이를 형장의 아이로 키울 심산인가?
강징은 남망기의 물음에 기가 찼어. 각서를 내밀었던 날과 같은 대화였지. 그래, 걱정하지 마라, 무슨 일이 있어도 죽어도 네 그 잘난 형장과 엮일 일 없도록 할 테니까, 생각하며 간신히 목소리를 억눌렀음.
남망기. 고소 남씨와 누구보다 엮이기 싫은 이가 있다면 그건 바로 나다. 택무군에게 연화오에 더는 걸음하지 말라 전할테니 억측하지마.
……
...나가.
......
다시는 허락없이 내 침소에 들어오지 마시오, 함광군.
남망기 쫓아낸 뒤에 뜬 눈으로 밤새곤 날 밝자마자 부사 찾아가서 탈탈 털었겠지. 부사가 무슨 힘이 있나… 그간 있었던 일의 전말을 죄다 전해듣곤 자존심 상하고 수치스럽고 분해서 미칠 지경이겠지만, 아연이 무사히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것에 남망기의 공이 크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어서 더 미칠 것 같았음. 제 종주가 제 성질을 못 이겨 까무러치지는 않을까 안절부절 못 하는 부사를 보다 강징은 한숨만 길게 뱉었어.
종주님, 함광군께서는 정말 성심성의껏 종주님을 돌보셨습니다. 정말입니다.
……
너무 괘씸히 여기지는 마시고… 함광군의 부정(父情)을 달갑게 생각하셔도…
부정? 부정이라 했느냐?
하. 강징은 마른 웃음을 터트렸음. 부정이라고. 남망기가 비록 제 씨라고는 하나 원수의 뱃속에 들어앉은 아이에게 부정을 느껴? 그건 그저 책임감이자, 제 형장의 부탁에 의한… 하지만 또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처음 아연의 태동을 느끼던 그 날. 제 앞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은 남망기의 다정한 음성과 상기된 뺨, 찰나였지만 공유하던 감정 따위였겠지. 온 몸에서 힘이 쭉 풀렸음. …오늘 남은 집무는 네가 처리하도록 해라. 부사는 펄쩍 뛰었지만 한순간에 너무나도 지쳐보이는 강징의 모습에 알겠다며 울며 겨자먹기로 고개를 끄덕였어.
이렇게 급속히 냉랭해진 관계로 지내다가 어느 날 야렵 나갔던 강징이 다쳐서 들어오는 날도 있었겠지. 남망기는 사실 처음부터 강징의 야렵을 반대하고 싶었지만 명분도 없는데다 네가 뭔데 끼어드냐고 난리칠 게 뻔해서 아무 말 않았던 거였어. 그래도 뱃 속에 애도 있으니 몸 좀 사리면서 잘 하겠지 싶었는데 의식 잃곤 업혀 들어오는 꼴을 보니까 순간 속이 확 뒤집히는 것만 같음. 한숨 꾹 참곤 주위 사람들 다 물린 후에야 강징 침상 앞에 의자 끌어다 앉음. 왜 제 몸 소중한 줄 모르고 그저 운몽의 손익이 달린 일이라면 눈 뒤집혀 달려드는지, 뱃 속 아이 때문에 자존심 다 구겨가며 부탁할 때는 언제고 그렇게 소중한 아이라면 지킬 생각을 해야지 왜… 치미는 감정에 주먹 꽉 쥐다가 눈 감고 있는 창백한 얼굴 보면서 자기 향 풀어줌. 조금 더 편하게 풀어지는 얼굴 보면서 평소엔 늘 인상 쓰고 있어서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 어린 얼굴이란걸 새삼 깨닫겠지. 그리고 미련하다고도 생각할거임. 애를 떼려면 쉽게 뗄 수 있을텐데 정을 통한 사이도 아니고 실수로 생긴 애 때문에 쌍방 이게 무슨 고생인지… 하지만 차마 더 이상 생각을 이어나가지는 못했음. 아파… 중얼거리는 강징 때문에.
아파… 위무선… 누님…
이럴때면 여지없이 막내 티가 나는군. 남망기는 끙끙 앓는 이를 내려다보며 이마에 흥건한 식은 땀을 마른 수건으로 훔쳐주었음. 남망기는 아직도 강징을 증오하는가? 남망기는 아직도 강징에게서 오롯한 혐오감만을 느끼는가? 스스로 이 물음에 확실한 답을 할 수 없었음. 차라리 강징을 향한 마음에 순수한 적개심만 존재할 때가 더 편했겠지. 제 사형과 누님을 부르며 흐느끼는 강징을 내려다보는데 남망기는 괴로움. 왜 미워할 수도 없게 만드냐고, 전처럼 증오할 수도 없게 하냐고 원망하겠지.
한 시진 가량 향을 풀어준 후에야 망기는 제 처소로 돌아오는데 강징이 의식을 잃은 탓에 향이 새어나왔던지 옷에 배인 희미한 연꽃향을 맡고선 이제 이것이 내 향인지 저 자의 향인지도 모르겠군 자조적인 생각이나 함.
그 이후로 야렵을 나갈 일이 있을 때면 무조건 망기도 동행함. 강징이 뭐라 비꼬든, 만류하든 아랑곳 않았지. 지난 번과 같은 일이 없으리라 어찌 단정합니까? 또 다시 사고가 날 경우 강 종주 뒷수습은 내 몫 아니오? 침착한 목소리에 강징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겠지. 그런데 하필 그 야렵 행선지가 고소 남씨가 향하는 야렵지와 길 뿐만 아니라 일정도 겹쳐서 중간에 잠시 동행하게 됨. 오랜만에 보는 제 형장의 얼굴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아서 스스로도 놀랐겠지. 강징은 툴툴대는 듯 하면서도 희신의 손길을 익숙하게 받아들여서 그걸 몇 걸음 떨어진 채 지켜보는 남망기 속만 괜히 또 뒤집힘. 스스로도 이유는 모르지만 자꾸 기분이 가라앉을 거야. 빨리 고소 남씨와 길이 갈렸으면 좋겠고. 희신이 좀 속상한 낯으로 강징에게 말하는 게 들려. 만음, 연화오에서 보낸 축객령은 여전합니까? 혹 제가 무언가 실수라도 하여 그러신다면… 다정한 목소리에 강징은 또 화득 떨면서 그런 거 아니라고 부정함. 슬쩍 망기 쪽으로 향하는 시선 모른체 먼 곳만 쳐다보고 있으려니 다시금 시선 갈무리한 강징이 조용히 남희신 달래겠지. 그런 것이 아니라, 아연에게 다른 양인의 향이 좋지 않아 그런 것입니다. 의원이 다시금 당부하기에 어쩔 수 없이… 그럼 훗날 아연과 함께 연화호를 구경시켜 주시겠습니까? 정말 기쁠 겁니다, 만음. 더 이상 남의 대화를 훔쳐 듣기 싫어 남망기는 걸음을 옮겼기에 강징의 대답은 알 수 없었어.
고소 남씨와 헤어진 후 마을에서 같이 점심 먹는데 강징 혼자 슥 빠져나가길래 망기 몰래 뒤따라갔다가 구석에서 헛구역질하는거 보곤 다가감. 근데 먹은게 없으니 나오는 것도 없고 괴로워만 하길래 서둘러 근처 객잔에서 따뜻한 물이라도 얻어다 건네 줬어. 물을 받아 마시는 강징에게서 백단향이 약하게 풍겼음. 남망기는 이제 강징이 아닌 제 형장에게 더 화가 나기 시작했겠지. 아이의 친부가 아닌 양인의 향이 음인에게 독인 것을 알면서도 제 향을 또 묻혀놓다니. 혹, 남희신이 강징의 온 몸에 덕지덕지 묻은 남망기의 향에 본능적으로 제 향을 묻힌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음. 아정함의 현신인 남희신이 그런 자가 아님을 스스로 잘 알고 있으면서도 어쩐지 자꾸만 강징을 추궁하고 싶어짐. 남희신의 마음도, 강징의 마음도, 본인의 마음도 어느 무엇 하나 확신 할 수가 없어서 답답한 거야. 결국 남망기는 지친 낯으로 물을 홀짝이는 강징에게 묻고야 말았어.
형장에게 뭐라고 답했습니까?
갑자기 무슨 말입니까?
…아이를 출산하게 되면, 아이와 함께 연화호를 구경시켜주겠다 했냐는 뜻입니다.
…그건 함광군이 왜요.
강 종주, 그리 아둔한 자는 아니지 않소?
하. 분명 지난 번 이 엇비슷한 대화를 했던 것만 같소만.
픽 웃으며 강징은 비꼬는 말투로 내뱉었음.
아정하신 함광군께서는 감히 동생의 씨를 품은 몸으로 제 형장에게 들러붙는 꼴이 역겨울만도 하시겠소. 그래, 내가 희신의 마음을 이용했습니다. 사방에서 내 목을 죄어오는데 오직 택무군 하나만이 내게 손을 내밀더군요. 그래서, 그 마음에 기대고자 한 것이 죄라도 된다더이까? 함광군, 선을 넘지 마시오. 내가 비록 지금은 당신에게 은혜를 입었음을 알지만, 때가 되면 알아서 답례를 톡톡히 할 테니.
남망기는 여전히 옥같은 낯으로 강징을 내려다봤음. 지금 강징이 아득바득 자존심을 내세우는 것을 알지. 그렇기에 강징의 말을 죄다 믿는 건 아니야. 이제 남망기는 강징이 다른 이의 마음을 이용하는 후안무치가 아님을 알아. 다만 남망기가 정말로 알고 싶은 것은…
강만음. 내가 물은 건 그게 아니다.
......닥쳐.
형장을, 남희신을 은애하는가?
닥치라 했어!
네가 형장에게 마음을 준 이유가 고작 다정이라면, 너에게 다정히 구는 이에게는 죄다 연심을 품을 셈인가?
남망기!! 더 이상 주제넘게 굴지 마!
...나는 네가 형장을 연모하여 화가 난 게 아니다.
......
네가 누군가를 마음에 품은 것이 거슬려. 그 이가 형장이 아니더라도 그랬을 거다.
뭐라고 지껄이는 거지. 스스로를 을러대면서도 입 밖으로 이미 튀어나간 말은 갈무리 해 담을 수 없음을 알아. 강징도, 망기도 잠시 말을 잃었음. 먼저 탄식 같은 헛웃음을 흘린 건 강징이야.
...하.
......부사에게 일러 빈 속에 좋은 차를 올리라 하겠소.
함광군. 당최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나 아는 게요?
이만 객잔에 들어가 좀 쉬도록 하시오. 나머지 야렵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도망치듯 강징을 뒤로 하고 걸어가면서 망기는 무언가 잘못된 기분에 휩싸이면서도 한결 후련해진 모순된 감정에 속이 아주 시끄럽고 혼란스러움. 그러면서도 뒤통수에 따라붙는 강징의 시선에 묘한 만족감도 들겠지. 내가 혼란스러운 만큼 너 또한 혼란스럽기를 바라서. 뭐라 이름 붙이기도 애매한 이 오묘한 감정에 자꾸 휩쓸리는데, 강징 또한 남망기 생각에 잠 못 이루기를 바라서… 아정하신 남이공자, 제가 이런 생각 한다는 사실 깨닫자마자 본인이 매우 한심스럽고 비겁하게 느껴져 자괴감도 들겠지.
그 날 이후 강징과 남망기는 기묘한 휴전 상태를 이어갔음. 부러 서로의 앞에서 일절 남희신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지. 강징이 여전히 희신과 서신을 주고받고 있고, 남망기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암묵적인 규칙마냥 그렇게 된 거야. 그리고 강징은 남망기가 원했던 대로 매우 속시끄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음. 안 그래도 신경쓸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닌데 저 망할 남망기도 기행을 일삼으니… 평소 음주가무를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만 그 날 따라 달빛이 매우 아름다웠고, 얼마 남지 않은 축제 덕에 연화호에 만개해 가는 연꽃 또한 무척이나 아름다웠기에 핑계는 충분했음. 제법 도톰해진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강징은 하풍주 한 병을 들곤 연화호 앞에 자리잡고 앉았음. 신발까지 벗어던지곤 두 발만 물에 담근 채 달빛과 연꽃과 함께하는 달밤에 기울이는 술잔이란. 두어잔이나 입에 대었을까, 달빛 아래 더욱 환하게 비춰지는 흰 옷자락이 강징의 눈 앞에 너울거렸지.
뭐하시는 겁니까.
담담한 음성과 함께 남망기가 강징의 손에서 술잔을 가볍게 뺏어갔음. 미미하게 찡그려진 미간을 올려다보며 강징은 픽 웃었음.
부러 도수가 없다시피 하게 하여 빚은 것입니다. 이리 주시지요.
......
함광군.
안 됩니다.
…지가 뭔데?! 또 성질이 나려는 걸 꾹 참으며 강징은 남망기를 노려봤음. 남망기는 대꾸없이 강징과 세 뼘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앉았어. 결국 강징은 날 선 시선을 거둬들였고, 둘은 말없이 연화호 수면에 비친 달이나 쳐다봤겠지. 여름밤의 선선한 바람과 풀벌레 소리 사이 침묵을 먼저 깨뜨린 건 강징이었어. 이젠 제법 남망기와의 시간이 편해져서 그런가, 평소같았더라면 쓸데없다 여겼을 말들이 흘러나왔지.
고소 수학 시절, 위무선과 몰래 천자소를 마시다 남 선생님께 걸려 혼이 나곤 했지요.
......
지금 생각해보면 그까짓 술이 뭐라고 싶은데. 위무선은 워낙에 망아지 같은 놈이라 하지 말라면 더욱 해대는 놈이니.
남망기 앞에서 위무선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일종의 불문율과도 같았는데, 하지만 남망기와의 공통분모 중 무엇보다 큰 것이 위무선이기에 자연스레 제 사형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음. 강징은 내심 남망기가 자리를 뜨지는 않을까 생각했지만 남망기는 그러지 않았지. 강징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말을 이었어.
그리 술을 즐기지는 않는 편인데, 종종 천자소 생각이 나곤 하더이다. 그 이후로 한 번도 입에 대 본 적은 없지만.
......
취객의 넋두리이니 듣기 싫으시다면 이만 들어가 보세요.
제가 자리를 뜨면 또 술잔을 채우실 것 아닙니까.
안 그럽니다. 안 마실 테니 그만 가세요.
나름 친절하게 축객령을 내렸음에도 여전히 흰 옷자락은 올곧은 자세로 앉은 채였지. 멍하게 연화호에 비친 달빛을 보던 강징의 귓가에 차분한 음성이 들렸어.
언젠가, 위영이 천자소보다 뛰어난 술이 하나 있다고 했습니다.
......
연화호를 보며 즐기는 하풍주라 하였지요.
강징은 남망기의 의도를 그제야 알아챘음.
한 잔 따라 드리고 싶다만 술잔이 하나 밖에 없군요.
괜찮습니다.
남망기는 스스로 강징이 마시던 잔에 술을 따라 마셨지. 강징의 입술이 꾹 다물렸어. 이상해. 정말 이상하다. 남망기도, 나도 뭘 하고 있는 거지. 그와 내가 제정신이 맞나. 사실 이 모든 것이 한 순간의 환상은 아닐까. 강징은 정말로 남망기를 보내야겠다고 생각했어. 이건 이상해. 정말… 이상해.
함광군.
......
이제 그만 돌아가십시오. 몸 상태도 안정기에 접어든 듯 하니, 필요하다면 제가 운심부지처로 가겠습니다.
산달까지는 머무르겠습니다.
택무군 때문이라면 제가 서신을 보내지요.
연화오에 머무르는 것은 형장이 강요한 일이 아닙니다.
그럼 왜 구태여 스스로를 괴롭게 하십니까?
강징의 순수한 의문에 남망기는 잠시 말문이 막혔음. 강징은 비록 남망기가 저를 대하는 것이 이젠 제법 유순해졌음을 알지만 여전히 그 기저에는 증오가 있음을 알아. 강징이 그 사실을 안다는 것을 남망기 또한 알지. 증오하는 이를 계속해서 마주보는 것이 고통스럽지 않을리 없으니, 보내주려 할 때 순순히 가라는 건데. 남망기는 태생적으로 술을 못하는 탓에 매우 약한 도수임에도 취기가 어른거리며 올랐음. 그 탓일 테지.
......모르겠습니다.
......
한 때는 위영이 해답을 찾기 어려운 난제 같았고... 또 지금은 제 마음이 그렇습니다.
......
제가 혼란스러운 것이 무엇 때문인지 스스로도 설명하지 못하겠다면, 비웃으실 겁니까.
이런 무책임한 말이나 지껄이는 것은. 강징은 혀를 찼음.
취하셨군요. 그만 잔을 이리 주십시오.
강 종주.
......
위영의 말이 맞군요. 천자소를 그리 자주 마셔보지는 않았다만, 하풍주의 주향이 더욱 뛰어납니다.
제대로 익지도 않은 술인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강징은 취기 탓인지 미미하게 열 오른 남망기의 얼굴을 건너다보다 픽 웃고 말았음. 잠시 입을 다물었던 강징은 이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어.
함광군.
......
저는 저희의 관계가 변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함광군께서도 마찬가지시리라 믿습니다. 본디 저희는... 서로를 경멸하고 괄시하는 사이 아닙니까?
......
저를 보면 도무지 잊혀지지 않는 이가 있어 괴로우시지요. 저 또한 마찬가집니다. 평생을 그 이를 가슴에 묻지도, 파내지도 못한 채 살 테지요. 잠시 혼란스러우신 겝니다. 아시다시피 그와 제게선... 같은 향이 나니까요.
......
곧 있으면 연꽃 축제가 열립니다. 연화호에 만개한 연꽃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니 축제를 즐기신 후에 돌아가십시오. 부사에게 일러 짐을 빼두라 하겠습니다.
여전히 올곧은 자세로 앉아있는 남망기를 뒤로 한 채 강징은 먼저 자리를 떴어. 자꾸만 풀리려는 다리에 힘을 주어 걸어가며, 늘어지는 걸음은 여름밤의 달빛과 연꽃, 홀릴 수 밖에 없는 정취 탓이리라 되뇌이며. 그러나 침상에 누운 뒤에도 자꾸 남망기가 떠오르는 것을 멈출 수는 없었음. 남망기의 혼란스러움이 제게도 옮은 모양이지. 하지만…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는 안 되지. 언젠가 후회할 일을, 그르치고 말 일을 또 다시 만들 수는 없었음. 한순간의 실수는 뱃 속의 아이만으로도 충분했어. 아직 남망기는 여전히 위무선에 대한 연심을 지우지 못했고, 지금은 잠시 혼돈을 겪더라도 언젠가는 그 오래묵은 마음이 또다시 고개를 쳐들겠지. 무려 16년 간을 위무선 하나만 원했던 자다. 강징은 조용히 흐느꼈음. 위무선의 그림자에서 영영 벗어나지 못할 이가 있다면 그는 말할 것도 없이 남망기와 강징일 테니. 지긋지긋했어.
시간이 흘러 드디어 연화오에서 연꽃 축제가 열렸어. 제법 큰 축제인지라 인근 뿐 아닌 먼 곳에서도 관광객들이 몰려들었겠지. 사실 남망기는 별 흥미가 없었지만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이 곳 저 곳 돌아다니느라 바쁜 강징을 눈으로 쫓았음. 신이 난 금릉의 손을 꼭 붙들고 거니는 강징은 평소답지 않게 제법 즐거워보였어. 남희신이 마라 양념을 친 꼬치를 먹다 사레가 들려 기침을 하는 것에 냉차를 건네주며 남망기는 그러게 못 드시는 매운 것은 왜 자꾸 입에 대시냐며 한 소리를 했겠지. 말하고 보니 어쩐지 금릉을 혼내는 강징의 말투를 닮은 듯해 스스로도 좀 놀랐을 거야. 남희신도 그걸 느낀 모양인지 제 동생을 보다 웃고 말았음. 연화오에서 지낸 뒤로 제법 말수가 늘었구나, 망기. 남망기는 대답하지 않았지.
절간과도 같은 운심부지처와 달리 언제나 정 많고 흥이 넘치는 운몽의 사람들은 축제가 되니 더욱 신이 났어. 사방에서 흥겨운 음악이 흘러 나오고 즐거운 웃음소리만이 들렸겠지. 그래서 더더욱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음. 갑작스레 달려드는 마물의 존재를. 방금까지 웃고 떠들며 음악소리만 넘치던 곳이 순식간에 비명소리로 가득 찼어. 강징은 놀라서 금릉을 제 품으로 당기려 했으나 사방에 사람들이라 실수로 손을 놓치고 말았지. 아릉!!!! 외치는데 하필이면 겁먹은 아이 뒤에서 길다란 촉수가 공격해 와. 강징은 앞 뒤 가릴 것 없이 사람들을 헤치고 달려가 금릉을 감싸안았음. 그리고 촉수에 가슴이 꿰뚫렸어. 후두둑 핏물이 떨어지는데 아래에서도 피가 쏟아져. 아니, 가슴에서 떨어지는 핏물이 아래를 적시는 걸지도 몰라. 그렇게 믿고 싶었어.
공자께서는...
......
가장 소중한 것을 잃으시겠군요.
순간 남망기의 머릿속에 벼락처럼 점쟁이의 말이 떠올랐겠지. 남망기는 넋이 나간 마냥 되뇌임. 아니야. 난 이미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어. 그러니 네가 잘못 될 리가 없어.
강징만큼이나 망기 얼굴도 허옇게 질리는데 아수라장 한 가운데 외숙!!!! 비명지르는 금릉을 수사 몇이 붙들곤 안으로 데려가는게 보여. 또 다른 수사들은 강징을 재빨리 옮기고 겁 먹은 사람들도 이게 무슨 일인지 웅성거리고… 남망기는 무의식적으로 연화오 수사들 따라가려는데 남희신이 뒤에서 잡음. 마물들 먼저 처리해야 한다고 고개 젓는데 남망기 결국 악 지르며 우는 금릉 목소리 뒤로 하고 남희신을 따라갈 거야. 마물들 베어내는 손길에 분노와 걱정이 어려있겠지. 한 순간 핏덩이를 후두둑 떨어뜨리는 그 모습이 잊히지 않아서, 강징의 그 표정이 눈 앞에서 자꾸 어른거려 괴로워. 그런데 방심한 탓인지 망기마저 마물에 당하고 말았음. 망기야!!! 저를 부르는 형장의 목소리가 들리는데 독이라도 있는 놈이었던지 금세 눈앞이 흐릿해지고 망기도 혼절하고 말았지.
그런데 정신이 들고 보니까 위무선이 헌사해서 돌아온거야. 이게 꿈인지 생신지 남망기는 무척이나 기뻤음. 남잠, 남이공자, 하면서 안겨드는 몸 끌어안는데, 기쁜 와중에도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함. 아이는... 죽었겠지. 원체 약한 몸이었는데 그렇게 심한 부상을 입고도 아이가 붙어 있을리가 없었어. 아이를 살리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쓰던 강징이 아이를 잃고도 제정신일 수 있을까. 급격하게 어두워진 표정에 위무선이 남잠 왜 그래? 물으니 남망기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개 저으며 위무선을 더욱 꽉 끌어안고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음. 익숙한 향이야. 그렇게 그리워했던 그 향. 그런데 저 너머 어딘가에선 그보다 조금 더 옅고 물비린내가 나는 연꽃향이 떠오르겠지. 분명 품에는 그토록 그리던 이가 안겨있는데 왜 이렇게 속이 쓰린지, 끔찍한 기분이 드는지 모를거야. 자면서도 아이가 잘못되는 악몽을 꾸는 이인데... 자꾸 속이 꽉 조여드는 기분임.
위무선은 강징을 보러 가겠다며 얼마 뒤 연화오로 떠났고, 그를 보러 가겠다는 핑계로 연화오로 향한 김에 강징 슬쩍 보러 가는데 강징은 평소같은 얼굴을 하고서 집무를 보고 있겠지. 그 얼굴 보자마자 시뻘건 피 쏟던 모습이 부지불식간에 떠올라. 몸이 아직 다 회복되지 않았을텐데 벌써 일을 하나 독하다 싶기도 하고 생각보다 멀쩡한 모습에 아이를 잃은게 슬프지도 않나 싶었어. 하긴 강징은 언제나 그랬지. 늘 뱃 속의 아이가 소중한듯 굴다가도 막상 연화오나 금릉에게 무슨 일이 닥치면 아이는 뒷전이었으니. 그래, 아이가 그렇게 큰 의미는 아니었을지 몰라, 하고 남망기는 뒷맛이 나쁜 생각을 곱씹었음.
그러다가 마주친 둘이 결국 싸우게 되겠지. 넌 네 자식이 죽었는데 아무렇지도 않냐는 말에 강징은 픽 웃어. 비록 몇 달 품지도 못했지만 그 앤 내 뱃속에 있었어. 달이 찰수록 점점 배가 불러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날마다 애를 태우던걸 네가 알기나 할까? 아이가 잘못되지는 않을까, 혹여 태어나더라도 제 구실 못하지는 않을까, 아비 없이 태어나게 했다고 나를 원망하지는 않을까 속을 얼마나 끓였는지도 모르는 주제에 함부로 지껄이지마. 이제 와서 반쪽짜리나마 아비 노릇을 하고 싶어? 왜 아이를 끝까지 지켜내지 못했냐고 나를 원망할 셈인가? 아니지, 오히려 남망기 넌 나한테 고마워 해야지. 이 아이가 지금까지도 내 뱃속에서 살아있었더라면 위무선에게 뭐라고 변명을 하겠어? 그땐 네가 애를 죽이려 들었을걸. 내 말이 틀렸나, 남망기?
씨근덕거리다가 강징이 축객령을 내림. 나가. 남망기는 가쁜 숨을 몰아쉬는 강징을 보면서 저 이가 매우 슬프고 좌절했다는걸 알지만 그냥 뒤돌아 나갈 수 밖에는 없었지. 등 뒤로 닫히는 문 너머에서 무너져내리는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도 해. 남망기는 몇 걸음 가다말고 뒤돌아서 닫힌 문을 열었어. 지금 자기 행동이 매우 충동적이라는걸 알아. 그냥 본 계획대로 위무선을 보러가야 한다고 이성은 말하지만 어쨌거나 죽은 아이는 남망기의 아이이기도 했단 말이야. 비록 그 아이를 위해 해준거라곤 얄팍한 동정심 섞인 행동밖에는 없었지만, 그래도. 눈물범벅이된 강징의 얼굴이 보여. 핏발 선 눈이 남망기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듯이 노려봐.
아이는 어디에 묻었어.
그런데 그 한마디에 맥이 탁 풀린 강징이 울면서 웃어. 막 흐득이는 어깨가 떨리고 숙여진 고개에 얼굴이 보이진 않지만 웃음 소리와 울음 소리가 섞여서 괴이하게 들려. 남망기는 저 어깨를 감싸안아주어야할지 토닥여주어야할지 망설이지만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겠지. 흐느낌 사이로 간신히 알아들은 거라곤 연화호 그 한 마디 뿐이야.
남망기 처음엔 걷다가 점점 걸음이 빨라져 뛰듯이 연화호에 다다르겠지. 막막할 정도로 넓은 연화호에 피어있는 아름다운 연꽃들 보다가 결국 무너지는 남망기. 이 곳에 그 핏덩이를 뿌렸나 혹은 묻었나... 물속이라니, 빛을 보기도 전에 가버린 어린 것이 있기에는 너무 추운 곳은 아닌가. 함광군이 연화호에서 무릎 꿇은채 울고있으니 다들 수근거리는데 위무선이 헐레벌떡 달려오겠지. 남잠!! 무슨 일이야, 어떤 놈이야?! 주술이라도 씌었나. 왜 그래, 응? 남망기는 위무선 품에 무너져내리면서 울어. 왜 우는지 절대 말 못하고 이름도 지어주지 못한 채 빛도 보지 못하고 죽은 자기 자식 무덤 앞에 두곤 꺽꺽 울겠지. 위무선이 어찌할바 모르고 남잠, 왜 그래? 남잠. 망기야. 망기야. 하는데 목소리가 점점 남희신 같이 들려. 그런데 문득 고개 들어보니 눈 앞에는 위무선이 아닌 남희신이 저를 내려다보고 있어. 그리고 남망기는 꿈에서 깨어남.
희신이 걱정하는 얼굴로 망기야. 괜찮으냐. 하면서 침상 맡에 앉아있겠지. 그제야 정신 든 남망기 일어나 앉으려는데 윽, 하고 단말마의 신음성이 저도 모르게 흘러나와. 남희신은 몸을 일으키려는 남망기를 만류함. 꼬박 닷새를 앓았다. 좀 더 누워있거라. 의원을 다시 부르려던 참이었다. 남망기는 자기 얼굴이 눈물범벅인거 그제야 깨닫지. 저를 다시 눕히려는 형장 손 저지하곤 물어. ...강만음, 강 종주는 어찌 되었습니까. 남희신이 걱정스러운 낯으로 운몽의 수사들이 연화오로 데려갔다. 상처가 중하니만큼 강 종주도 아직 회복을 다 하지는 못하였겠지. 답하니 남망기는 입술 꾹 다물음. 그러다 다시금 비틀거리면서도 일어서는거 남희신이 만류하니까 괜찮습니다. 하곤 억지로 걸음 떼겠지. 입술 밖으로 새어나오는 음성이 깔깔해.
형장. 언젠가 제게 부정과 연심을 헷갈리고 있다 하셨지요.
……
형장이 틀리셨습니다. 제가 그를 은애합니다. 부친으로서 아이를 아끼는 것과 별개로 제가 강만음을 마음에 품었습니다.
……
하여 이만 그를 보러 가야겠습니다. 비켜 주십시오.
남희신 말 없이 자기 동생 보는데 사실 오래 전 부터 남희신은 알고 있었어. 평생을 보아왔던 제 동생의 마음을 남희신이 모를 리가 없으니. 그래, 사실 그 동안 남희신의 행동은 아집이었으며 질투였음을 스스로도 모르지 않았음. 다만 인정하기 싫었던 거야. 망기가 제 마음을 확실히 깨닫기 전에 어떻게든 강징을 붙들고 싶었기에 꼴사납게 굴었음을. 망기가 강징에게 애증 가지고 있는걸 눈치챈 지 오래지만 그러나 저런 어중간한 마음이면 결국에 누구 하나 행복할 리 없으니 차라리 빨리 접게 하자는 생각이었겠지. 자기가 사랑하는 동생과 사랑하는 이, 강징 뱃 속의 조카이자 자식으로 기를 아이 모두 행복했으면 했으니. 그러나 이제는 망기가 알아버렸고, 스스로 인정해 버렸으니 더는 붙들지 않고 보내 줌. 그래도 아직 몸이 덜 회복되었으니 마차 타고 가라 하는데 남망기 마음이 급해서 그냥 어검해서 갈 거야. 어지럽고 쓰러질것 같은데 정신력으로 아득바득 버텨가며 단 하나만을 떠올림. 강징. 연화오로 향하는 내내 꿈 속 강징이, 그 무너지듯 우는 얼굴이, 까마득히 넓게만 느껴지던 연화호가 떠올라. 항상 매끈하니 무표정하던 얼굴이 누가 봐도 동요하는게 티나겠지.
참담한 분위기 속 연화오 문은 걸어 잠겨있고 수사들이 못 들어가게 막는데 부사가 들여 보내 줌. 침상에 고요히 누워있는 창백한 낯의 강징에게 천천히 다가가서 침상 맡에 앉는 남망기. 아직 독이 다 해독된 건 아니라 머리가 어지럽고 아파. 그러나 자기 향 풀어주겠지. 그간 향 없이 견뎠을 강징 생각해서. 그러면서 계속 자길 괴롭혀왔던 아이가 혹시 잘못됐을까 하는 걱정에 미세하게 떨리는 음성으로 몇 걸음 떨어져 서 있는 부사에게 물어. ...아이는? 다행히 사산되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답을 듣곤 남망기 파도처럼 밀려드는 안도감에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아. 아직도 꿈 속의 광활한 연화호 앞에서 느꼈던 무력감이 너무 생생해서...
잠시 망설이다 말곤 그리 불러오지 않은 배 위에 손 얹자 태아의 기운이 느껴져서 밀려드는 안도감에 또 눈물 쏟아짐. 부사는 조용히 둘만 남겨둔 채 나가고, 남망기는 입술 꾹 깨물고 참으면서 향 더 풀겠지. ...강만음. 중얼거리는 동시에 깨달을거야. 꿈에서 깬 뒤로 한번도 위무선 생각을 안 했다는 걸. 그 몇 년간 남망기 머릿속에서 위무선이 떠난 적이 없었는데, 매정한 이가 꿈에도 한번 나타나 주지 않는다고 원망하다가도 그런 마음이 드는 자신이 죄스러워서 속만 까맣게 타들어갔는데, 어쩌다 한 번 꿈에 위무선이 나오는 날이면 그 날은 내내 그 꿈만 되새기며 살았었어. 그런데 연화오로 오는 내내 단 한번도 위무선 생각을 안 한 거야. 오로지 강징이랑 그 뱃 속의 아이 걱정에 가슴이 터져버릴것만 같았겠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강징이 으음... 웅얼거리다 천천히 눈을 떠. 그 짙은 쌍커풀 아래로 커다란 눈동자가 드러나는 순간 시선이 마주치면서 그냥 어쩔 수 없이 완벽하게 인정하게 될 거야.
...함광군?
내 마음을 이 자에게 주었구나. 비록 위무선에게 그랬듯 온전한 연심으로 이루어진 감정은 아니지만 이제 강징을 보면 전처럼 증오에 치를 떨고 혐오스럽지는 않아. 미련스럽게 아등바등하는 걸 보며 왜 저러나 짜증스러웠던 것이 실은 왜 제 몸 귀한 줄 모르나 애가 탔었던 거였어. 속은 여린 이가 모질게 구는 걸 보면서 한번쯤은 그 짓이겨진 속내를 보듬어주고 싶다고 생각했던 걸 애써 모른 척 했었던 거였겠지.
함광군? 왜... 우십니까? 몸이 안 좋으십니까?
누가 누굴 걱정하는지 당황해선 일어나 앉으려는 강징 다시 눕히곤 남망기 무표정한 낯으로 자기 턱에 맺힌 눈물방울 손등으로 쓱 닦아냄. 잘못 보셨습니다. 무뚝뚝하게 그러는데 잘못 보긴 개뿔 아직 눈가가 발갛거든. 그러고보니 눈도 좀 부은 듯 싶은데 강징은 독에 중독된 건 아니어서 중간중간 정신 들 때 부사가 대강 무슨 일 있었는지 설명해 줬어서 남망기도 중상 입은거 알았겠지. 목석 같은 이가 저러는 걸 보아하니 여간 큰 부상이 아니구나, 그런데 남망기가 왜 연화오에 그것도 자기 처소에 있는지 일어나자마자 온갖 생각에 머리가 핑핑 도는데 남망기가 예의 그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함. 눈을 더 붙이십시오. 여전히 의문만 가득한데 어차피 물어봤자 대답 안 해 줄 거 아니까 강징 작게 한숨쉬곤 순순히 눈 감고.
오신 김에 식사라도 하고 가시겠습니까. 거절할 거 알면서도 예의상 묻는데 의외로 남망기가 승낙하니까 감았던 눈 동그랗게 뜨는 강징에 처음으로 귀엽다고 생각하는 남망기.
...운몽의 음식은 고소와 달리 향도 맛도 강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빈 속에 자극적인 음식은 나쁠겁니다.
괜찮습니다.
마음대로 하세요, 그럼.
더 대거리하기도 귀찮다는 양 팩 돌아눕는 뒷모습 참 여전하다 싶으면서도 성질머리 똑같은 거 보니 그제야 안심되어선 긴 숨 내쉬는 남망기겠지.
그리고 사실 강징이 남망기에게서 돌아누운 건, 누가봐도 아직 제 몸도 다 못 추스른채 정신 들자마자 달려온 게 뻔한 꼴이라 자꾸 눈물이 날 것 같아서였음. 저 자가 진심인 것처럼 착각하게 될까봐, 영원이라도 맹세하기를 바라게 될까봐. 그러나 결국 새어나오는 눈물 탓에 미세하게 떨리는 어깨와 훌쩍이는 코에 쪽팔리고 짜증나겠지. 축객령을 내리려던 차에 뒤에서 남망기의 음성이 들림.
본계획과 달리 예상치 못한 변고 탓에 축제를 즐기지 못하였으니 다음번 축제가 끝난 후 돌아가겠습니다.
그 단정한 음성에 실린 다정을 모를리가 없으니. 자꾸 욕심이 나. 이러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다잡고 또 다잡지만 이미 허물어지기 시작한 마음은 어찌할 도리가 없어서…
zip zip 하고 강징 애 낳을 때 난산이라 남망기 눈 돌아갈 뻔 함. 닫힌 문 너머로 억누른 비명소리와 다급한 의원의 목소리, 분주하게 깨끗한 물과 천 따위를 계속하여 실어 나르는 가복들 틈 사이에 서서 백지장마냥 하얘진 낯을 하고 선 남망기에게 수군대는 시선 꽂혀도 아랑곳 않을 듯.
그리고 남망기는 내내 점쟁이 말이 마음에 걸려서 미칠 것 같을거야. 아무리 그 점쟁이가 돌팔이라고는 해도… 혹시 모르잖아. 미미한 가능성일지라도 있다면… 그 함광군이 한낱 점쟁이 말에 휘둘리는 걸 아무도 모르겠지.
마침내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고 결국 참지 못한 남망기가 부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산실 안으로 뛰어들어가. 이제 더 이상은 보고싶지 않은 창백한 낯으로 눈 감고 있는 얼굴이, 또 다시 남망기의 앞에 정신을 잃고서 누워있음. 지독한 난산 탓에 주위에 즐비한 피묻은 천과, 피 섞인 물대야에 현기증이 나. 강징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아기씨는 아드님이시라고 말하는 의원에게 사나운 목소리로 묻겠지.
강 종주의 상태는?
초산인데다 난산이신지라… 하혈이 심하셨기에 경과를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또한…
또한?
이번이 마지막 출산이 되실 듯 합니다. 아기집이 망가져버려서…
그건 상관없었어. 강징만 다시 멀쩡하게 눈을 뜨면 되니까. 아이를 포함한 모든 이를 주변에서 물리곤 강징 앞에 앉은 채 남망기는 참회하듯 읊조려.
너는 강한 이잖아. 네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했던 이 모든 것을 뒤에 두고 갈 테냐?
……
강만음. 제발 정신 차려. 내가 그간 못나게 굴어서 벌을 주고 싶은 거라면 무엇이든 달게 받겠다.
그래, 남망기는 두려워. 몇 번이나 잃을 뻔 했지. 몇 번이나, 제 어리석음과 아집 탓에. 남망기는 더 이상은 소중한 이를 잃고 싶지 않아. 더 이상 홀로 남겨진 채 과거에 붙들려 괴로워하며 자책하고 후회하는 악몽을 겪고 싶지 않아.
그리고 강징은 며칠 간 남망기 애를 태우다 못해 잿더미로 만든 뒤에야 의식이 돌아옴. 눈 뜨자마자 제 아이를 찾는 것에 품에 안겨주면서 밀려드는 안도감에 눈 뜬 강징의 수척한 얼굴만 집요하게 뜯어보겠지. 아이를 살핀 뒤에야 희미하게 웃으며 남망기를 올려다보는 강징은 메마른 음성으로 소리내어 웃음.
함광군.
……
어째 울보가 다 되셨습니다.
……몸은, 어떠십니까. 기갈이 들 텐데, 죽을 올리라 하겠습니다.
안아보셨습니까? 아연이요. 딸인가 하였는데 아들이군요.
잠시 망설이던 남망기는 떨리는 손으로 아이를 받아들어 품에 안아봄. 제가 그럴 자격이나 있나 싶어서 부사의 권유도 마다했었어. 처음으로 안아보는 제 아이였음. 품에서 느껴지는 연약한 무게와 함께 풍기는 포근한 젖내, 따끈한 체온. 아연. 내 아이. 나와… 저 이의… 아이. 남망기와 강징의 아이. 이미 흠뻑 젖은 얼굴은 마를 새 없이 계속해서 습기만 더했지. 조용히 흐느끼는 남망기의 어깨에 강징은 어색하게 손을 올려 울음을 달랬음. 한참이 지나서야 긴 울음이 멎었겠지.
또다시 zip zip 하고 강징 애가 남망기 애이기도 하다는건 부사랑 남희신만 알 거야. 근데 남망기가 지나치게 자주 종주실 드나들고 애 지극정성으로 보살피고 강징이랑도 분위기 묘해서 나중엔 다들 눈치챌 거임. 내심 운몽과 고소 간에 곧 혼인식이 있지는 않을까 운몽 사람들은 기대하고 있었어.
한편 운몽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강징 첨에 아기 낳고 아이가 너무 본인과 똑닮아서 혹시 남망기가 애 안 예뻐할까봐 자낮해했겠지. 근데 왠걸 남망기 애가 조금 앵-하면 벌떡 일어나 애 안고 달래고 기저귀도 지가 척척 갈고 유모는 괜히 들였나 싶을 정도로 싸고 돌 거야. 그래서 다행이다 싶은 강징... 둘 사이 아직 애매하겠지. 공표한건 아니지만 다들 아이가 남망기랑 강징 사이 친자인 것도 알고 근데 둘은 정인이라기엔 지나치게 조심스럽고 그렇다고 예전처럼 서로를 혐오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튼 둘 다 서로 조심스럽게 대하는 중이야.
그리고 아이 이름은 탁성이라고 남망기가 지어줌. 밝을 탁에 별 성을 썼지. 강징은 마음에 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음. 아연, 네 이름은 이제 탁성이다. 마음에 드느냐? 아이가 배냇짓하며 꺄르르 웃자 강징과 남망기도 저도 모르게 따라 웃었지.
나중에 탁성이 좀 커서 지 아빠랑 장난친다고 아부부거리다 말액 잡아채서 흐트러지는 날도 있을 거야. 강징이 부친께 그러면 못 쓴다, 아성. 하면서 애 받아들려고함. 말액은 처자식만 만질수있는데 자기랑 남망기는 일단 대외적으로 아무런 사이도 아니고 아무튼 남망기와의 관계에서 조심스럽고 자신없는 강징임을 망기도 잘 알겠지. 망기가 탁성이 안 건네주니까 강징이 의아하게 쳐다봄.
아성을 이리 주세요. 말액이 흐트러졌지 않습니까.
망기가 이마에 말액 비뚤어진 채로 덤덤하게 말하겠지.
고쳐 매어 주십시오.
...예?
이 곳엔 경대도 없고 하니.
말액 수십년간 매고 살았는데 경대 없다고 못 맬까, 싶어 황당해진 강징이 무슨 소리냐고 하려다 순간 깨닫곤 입 다물어. 머뭇거리다 말액 조심스럽게 고쳐매 주는 동안 남망기는 품 속의 아이 어르겠지.
...다 되었습니다.
강 종주.
……
종주실로 거처를 옮기고자 합니다.
......
아성이 부친의 얼굴을 잊을라 우려됩니다. 이 맘때 아이들은 쑥쑥 자라니 못 보는 하루 한 시가 아쉽고.
...함광군.
그리고 혼례를 올리고자 합니다. 물론 강 종주께서도 원하신다면.
강징 눈물 후두둑 떨구는거 남망기 말없이 끌어당겨 안겠지. 둘 사이에서 영문 모른채 행복한 탁성이만 옹알이하고... 그리고 혼인하는 둘이 보고싶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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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너무 늦게 왔네... 혹시 아직 기다리는 붕들이 있었다면 정말 코맙고 미안하조 무려 4년만에 와버렸네 ㅎㅎ; 사실 보고 싶은 장면들과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었는데 그래도 매우매우 늦었지만 얼기설기 이어붙히더라도 끝은 내고 싶어서 이제야 왔음 난 여전히 싸섹의 바이블인 망기강징이 좋다,,, 이 글 속 망기강징은 앞으로는 탁성이까지 셋이서 쭉 행복할거야 읽어준 싸섹비들 다들 너무 고마워!!
진정령 망기강징 약희신강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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