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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4 00:04
망천화처럼 이연화 해독할 수 있는 약초가 있는데, 형질을 바꾸는 부작용이 있어서 떨떠름해하던 이연화와 그런 게 뭐가 중하냐 하던 주변사람들이 우당탕하는 게 보고싶다로 시작했던 거 2부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아무도 만족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적어도 방다병은 그렇게 짐작했다.
하지만 청년은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어 투덜거리지는 않았다. 그 불만을 표현하는 순간, 오히려 역풍이 불어닥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대신 방다병은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국수를 먹던 이연화를 빤히 바라보았다. 자신과 다르게, 이연화는 겉으로나마 평소처럼 태연한 태도로 국물을 뜨고 있었다. 이건 불공평해. 방다병의 퀭해진 내면이 꿍얼거렸다. 그래도 이연화와 내가 동시에 힘든 것보다는, 나 하나만 괴로운 게 나아. 방다병의 선량한 내면이 반박하듯 중얼거렸다. 적어도 나뿐 아니라 적비성까지 괴로운 상황이라 다행이지. 방다병의 이기적인 내면이 어둡게 덧붙였다.
"생각하는 게 시끄러울 정도다, 방소보. 그만하고 국수나 먹어."
이연화가 국수 그릇에서 슬쩍 시선을 들고는 타박했다. 입을 삐죽 내밀고, 방다병은 일부러 국수 아닌 채소 요리를 집어 우적우적 씹었다. 이연화가 작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각인을 한 건지, 양자를 들인 건지." 그 중얼거림에, 방다병은 입 밖으로 불평하지 않겠다던 다짐을 홀랑 잊어버리고 볼멘소리를 냈다.
"네가 갑자기 날-우릴 침대에 안 들여주니까 그렇잖아."
차를 마시던 이연화가 고개를 돌리고는 두어 차례 기침을 뱉었다. 객잔의 다른 사람들이 듣지 않았는지 휘 둘러보고, 이연화는 미간을 좁힌 채 경고하듯 말했다.
"세상 사람들에게 방이라도 뿌릴 참이야?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번 얘기했잖아."
"그게 통보지, 무슨 이야기야? 각인에 대해 결정하기 전에도 잠은 같이 잤으면서, 왜 갑자기 안 된다는 거야."
"전과는 상황이 다르잖아. 벌써 두 번이나 그런-일이 있었으니, 함께 잘 때 무슨 상황이 생길지 몰라."
"전처럼 묶어두면 되는데-."
"뭣보다, 방다병. 오히려 결정했으니까 이러는 거라고 분명히 말하지 않았어?"
이연화가 낮게 힘주어 건넨 말에, 방다병은 잠시 입을 딱 다물었다.
여현을 떠나던 날, 이연화는 처음으로 '하 당주에게 허락을 얻기 전까지, 두 사람과 함께 자거나 접촉하는 일은 보류'라는 이야기를 꺼냈다. 물론 적비성처럼 험악해지거나 위협조로 말하지는 않았으나, 청년은 동그란 눈을 평소보다 훨씬 더 크게 뜨고는 잔뜩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왜 그러느냐고 동동거리던 방다병을 향해, 이연화는 차근차근 이야기했다. 오히려 이전의 내 태도가 명확하지 않았던 것이다. 내 마음이 정해진 이상, 네 어머니에 의해 가부가 판가름나기 전까지는 선을 긋는 것이 맞다. 사고에 가깝긴 했지만 벌써 두 번씩이나 정을 통한 직후이니, 만일의 상황을 각별히 더 주의하고 조심할 필요가 있다.
일리가 있었으나, 바로 수용하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그러나 이미 선택을 한 이연화는, 여느 때처럼 질기도록 고집스러워 잘 꺾이지 않았다. 다소 시간이 걸릴지언정 결국 허락하시리라 이야기해봤자 별 소용은 없었다. "그럼 문제 없네, 좀 기다리면 될 일이잖아." 이연화가 얄미울 정도로 단호하게 대꾸했다. 좌절감에 괴로워하는 방다병의 옆에서, 적비성은 당연하게도 성을 냈다.
"나는 대체 무슨 상관이냐?"
"당연히 너하고도 상관이 있지, 적 맹주. 결정이 나지 않은 상황에서 너하고만 자면, 방다병의 원성이 얼마나 크겠어? 너는 어디로 사라졌다가 밤에 나타날 때가 많지만, 나는 방 대협과 여정을 함께하는 입장이란 말이야. 견디기 힘들다고. 만에 하나라도, 예전처럼 갑자기 병증 같은 희락기가 터지면 어떡해. 여기엔 관 협의도 없는데."
이연화가 짐짓 귀찮은 투로 이야기하며 손을 내저었다. 적비성의 미간 골이 한층 깊어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군. 그럼 방다병이 제 어머니와 결론을 내지 못해 몇 달씩 기다려야 한다면, 그땐 어쩔 셈이냐?"
"그땐 상황을 봐서 다시 의논하면 될 일이지. 어쨌든, 최소한 천기산장에 가는 동안엔 안 돼."
이연화가 산뜻하게 못을 박았다. 적비성은 불만스럽다 못해 분기탱천한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떴지만, 이연화와 길게 논쟁하지 않은 채 자리를 떠버렸다. 그 서슬에 거칠게 열린 문이,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덜컹거렸다. "하여간, 자기 뜻대로 안 되면 바로 인상 쓰면서 툴툴거리고 말이야. 그런 점은 옛날부터 변하질 않았다니까." 이연화가 삐걱대는 문을 슬쩍 흘겨보며 핀잔처럼 중얼거렸다. 방다병은 청천벽력을 접한 심정과, 그 청천벽력에 아주 조금이나마 안도할 구석이 있어 다행이라는 심정을 동시에 느끼며 울상을 지었다.
그 후, 방다병은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이유는 두 가지 정도였다.
첫 번째로, 혼자 누운 침상이 묘하게도 썰렁했다. 낮은 숨소리와 고요한 체온이 사라지자 심신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이연화와 함께 잔 세월에 비하면, 홀로 잠든 날이 훨씬 많은데. 방다병이 뜬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침울하게 생각했다. 어머니께 허락을 받기 전까지는 계속 이런 밤을 보내야 하는 건가? 그 좌절스러운 상념은, 자연스레 두 번째 이유로 방다병을 인도했다. 어머니께 어떤 말들을, 어떤 순서로 이야기해야 일을 더 수월하게 만들 수 있을까? 컴컴한 천장에 어머니의 모습을 그리며 이런저런 말들을 중얼거리다 보면, 어느새 동이 부옇게 터 오기 일쑤였다. 그런 나날을 며칠 보내고 나자, 무림인의 몸이라도 피로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이제 거의 다 왔잖아. 몇 시진만 있으면 하 당주를 만날 텐데, 어떻게 얘기할지 생각은 했어?"
이연화가 빈 찻잔을 채우며 물었다. 회상에서 퍼뜩 빠져나온 방다병이 팔짱을 끼었다. 그 눈이 사뭇 단호한 빛을 띠었다.
"물론이지. 어머니랑은 내가 얘기할 테니까, 너는 들어오지 마."
"방소보, 내가 이 일의 당사자인데 어떻게 쏙 빠져있을 수 있겠어? 네 어머니가 그렇게 무책임한 사람을 퍽이나 좋아하겠다."
"빠져 있으라는 게 아니야, 그냥...일단 내가 먼저 설명할 테니까, 나중에 함께 이야기해. 그럼 됐지?"
방다병이 허둥지둥 말했다. 이연화는 영 미덥지 못한 표정이었지만, 이내 고개를 까딱하고는 다시 차를 마셨다. 하효혜의 염려 섞인 말들이 이연화의 귀에 조금도 들어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방다병은 그릇에 얼굴을 반쯤 박은 채 식사를 이어갔다.
드디어 천기산장에 도착했을 때, 하효혜는 자리를 비운 참이었다. 어머니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방다병에게, 리아가 상황을 설명했다. 하 당주는 새로 시작한 몇 개의 사업 현황을 둘러보기 위해 집을 나선 참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시일이 더 소요될 예정이었으나, 방다병이 성공적으로 일을 마무리하고 돌아온다는 소식을 접한 하 당주가 산장으로 서신을 보냈다. 아들이 오는 날짜에 맞추어 귀환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리아는 마님께서 곧 도착하실 테니, 몸을 씻고 여독을 푸시라 이야기했다.
그러나 목욕을 마치고, 저녁까지 먹은 후에도 어머니는 귀환하지 않았다. 방다병은 어쩐지 안절부절못하며 하효혜를 기다렸다. 좀처럼 차분해질 수가 없었다. 잔뜩 열중한 얼굴로 손마디를 씹어먹을 듯 잘근거리고 있자니, 가까이서 지켜보던 이연화가 한숨과 함께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심악의 약이 없어도 발작하겠다, 방소보."
"안 되겠어, 운기를 해야겠어."
방다병이 얼른 침상에 앉아 운기할 자세를 취했다. 이연화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왜 그렇게까지 가슴을 졸여? 어머니가 네 뜻을 결국 존중할 거라고 자신 있게 얘기하더니."
"난 물론 어머니를 설득할 자신이 있지만, 결과를 아는 것과 마음을 대비하는 건 다른 문제야. 이건 중대사잖아."
눈을 감은 채 대꾸하다가, 방다병은 문득 눈꺼풀을 반쯤 올리고는 뚱하게 쏘아붙였다.
"그리고, 누가 날 침상에서 쫓아내는 바람에 머리도 아파."
"뭐야, 각인통을 말하는 거야? 전에는 안 그랬잖아? 너와 내가 계속 떨어져 있던 것도 아닌데, 왜 그래?"
이연화가 살짝 커진 눈으로 물었다. 걱정스러운 얼굴에 순간 마음이 약해져, 방다병은 괜히 말했다며 자신의 입을 책망했다. 낮은 한숨을 쉬고, 청년은 한결 누그러진 투로 대답했다.
"아마 두 번째로...그랬던 날 때문인가봐. 약의 후유증일 수도 있고. 그렇게 심하진 않아."
"어디 봐."
이연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큼 다가오는 몸짓에 작은 바람이 일었다. 최근 들어 가장 좁혀진 거리에, 방다병이 자기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이연화가 아무렇지 않게 방다병의 팔을 잡았다. 내력으로 몸을 확인하는 얼굴이 진지하다 못해 심각했다. 상대는 퍽 불편하고 속상해 보였지만, 방다병은 가까이 다가온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며칠 동안 닿는 일은 고사하고 가까이 다가가지도 않았던 터라, 단둘이 붙어 있자니 심장 소리가 금세 요란해졌다.
"음, 경맥이 상한 것 같지는 않은데. 기력이 조금 허하기는 하네. 몸을 보하는 음식들을 달라고 해야겠다."
진맥을 마친 이연화가 이야기했다. 하지만 잠시 집중력이 흐트러져, 방다병은 이연화의 말을 금방 처리하지 못하고 입을 살짝 벌렸다. 품에 꽉 차게 끌어안은 다음 눕고 싶다. 맨 살갗에 코를 댄 채 마음껏 냄새 맡다가 잠들고 싶다. 일어났을 때에도 팔 안에 있었으면 좋겠다...잠깐 몽롱해진 정신이 고삐 풀린 말처럼 질주했다. 갈증에 시달리다 갑작스레 샘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이내 그 꼴을 발견한 이연화가, 이상한 표정을 짓고는 방다병의 팔을 가볍게 흔들었다.
"방다병, 뭐야? 꿈 꿔?"
"어, 어어?"
방다병이 퍼뜩 눈을 깜박였다. 그와 동시에 밖에서 사람의 기척이 들려와, 청년은 찬물을 맞은 사람처럼 움찔 튀어올랐다.
문 밖에서 리아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 활달한 한 마디에, 방다병은 잠깐 흐트러졌던 자세를 정리하며 벌떡 일어섰다.
"도련님, 도련님! 마님께서 오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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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선생, 정말 고생이 많으셨어요. 어르신께서 어찌나 긴 서신을 주셨던지. 그 중의 반이 이 선생을 칭찬하는 내용이더군요. 방씨 집안이 선생께 정말 큰 신세를 졌지 뭡니까."
"과찬이십니다. 방소보의 공이 반 이상이었는데, 어르신께서 손님에게 예를 차려주신 모양이군요."
밝은 표정의 하효혜를 만나자마자, 이연화는 미소와 함께 공손하게 인사했다. 하효혜가 웃음을 터뜨리며 방다병의 등을 두드렸다. 그 얼굴이 자녀에 대한 자부심으로 기쁘게 빛나고 있었다. "그래, 너에 대한 칭찬도 한가득 쓰셨더라. 정말 수고했다, 소보." 방다병이 살짝 억지 미소처럼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그 투명한 태도에, 이연화는 몇 번째일지도 모를 한숨을 참으며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아들의 경직된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하효혜가 양손으로 방다병의 뺨을 착 감싸고는 걱정스러운 낯을 했다.
"아니, 너는 왜 이렇게 얼굴이 어두워? 살도 조금 내린 것 같고. 돌아오는 길에 배탈이라도 난 거냐?"
"아니에요, 전 멀쩡해요. 어머니는 잘 다녀오셨어요? 예정보다 늦으셨네요."
"음, 오는 길에 마차 바퀴가 잠시 말썽을 부려 지체되었지 뭐야. 밥은 먹은 거냐? 아직이면 같이 먹자. 듣고 싶은 얘기가 많아."
하효혜의 말에, 방다병의 얼굴이 복잡해졌다. 아마도 '긴 여정에서 막 돌아온 어머니가, 제대로 식사도 하시기 전에 대뜸 중요한 이야기부터 꺼내면 안 되겠지' 정도의 속내일 터였다. 잠시 고민하다, 청년은 곧 순순히 고개를 끄덕했다.
"요기하기는 했는데, 더 먹을 수 있어요. 식사하고 얘기 나눠요."
"그래, 그럼 조금만 기다려라. 간단히 씻고 나올 테니까. 선생도 함께 오시지요?"
"아, 이연화는 같이 안 와요!"
방다병이 불쑥 끼어들어 급히 말했다. 아이고, 이 녀석. 이연화가 내심 이마를 짚었다. 하효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주는 퍽 괴이쩍은 시선으로 방다병과 이연화를 번갈아 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냐, 왜 식사하는 자리에 이 선생을 빼놓아야 해?"
"아, 그, 그게...이연화는 배부르대요, 아까 그랬거든요. 더 먹으면 탈 나요."
방다병이 어설픈 웃음을 해해 흘리며 말했다. 내심 눈을 굴린 이연화가 목을 가다듬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이미 배가 많이 차서요. 오랜만의 재회일 텐데, 모자의 회포를 푸시지요."
"그래요, 그럼 내일 함께하도록 해요. 가자, 소보."
하효혜가 방다병의 팔을 즐겁게 잡아끌었다. 친밀하고 화목한 그림이었으나, 팔을 잡힌 아들의 표정은 아주 비장하고 결연했다. 어머니와 보폭을 맞추어 걷는 모양새가 나무 인형처럼 뻣뻣했다. 이연화는 모자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이내 참던 한숨을 길게 내뱉고는 발길을 돌렸다.
비록 방다병의 등을 떠밀어 어머니의 허락을 받으라 요구했으나, 이연화는 결코 편안한 마음으로 그런 제안을 하지 않았다. 다만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 생각하여 말을 꺼냈을 뿐이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지만, 사실 이연화 역시 방다병만큼이나 긴장하고 있었다. 하 당주와 어떤 식으로 대화를 나누어야 할지 머리를 열심히 굴려보기도 했다(방다병은 자신이 해결하겠다 큰소리를 쳤으나, 이연화는 언젠가 반드시 자신이 하효혜를 대면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상상해 보아도, 결국은 자신이 하효혜에게 석고대죄하는 그림밖에 그려지지 않았다.
꽤 늦은 밤이었지만, 방으로 돌아온 이연화는 바로 겉옷을 벗고 잘 준비를 하지 않았다. 하 당주가 곧 자신을 부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마음이 푹 가라앉을 듯이 심란하여, 이연화는 탁자 앞에 앉아 느리게 차를 비웠다. 미지근한 찻물이 마치 술처럼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줄곧 신경이 곤두선 탓으로 손발마저 슬쩍 서늘했다. 깊은 한숨과 함께 양손을 맞잡아 비비다가, 이연화는 뻐근한 몸 이곳저곳을 가볍게 두드렸다. 방다병처럼 두통이 있지는 않았으나, 자신 역시 홀로 드는 잠자리가 영 불만족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갑작스레 바깥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이연화가 고개를 돌려 방 한편을 돌아보았다. 뒷문을 열어젖힌 금원맹주가 불쑥 들어오던 참이었다. 그 옷이며 얼굴이 온통 어두워, 마치 밤의 일부분이 뚝 떨어져 나온 듯한 모습이었다.
"심장 떨어지겠네. 금원맹에는 제대로 된 문으로 출입한다는 개념이 없어?"
이연화가 눈살을 찌푸리고 쏘아붙였다. 그 말을 들은 척 만 척 하고, 적비성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연화의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다짜고짜 덥석 안아오는 팔에, 이연화는 눈을 크게 뜨고는 한 손으로 그 어깨를 짚었다. 밀어낼 심산이었으나 상대는 요지부동이었다. 이연화의 미간으로 골이 생겼다. 물론 내력을 쓴다면야 상대를 튕겨낼 수 있었지만, 이연화는 거칠게 반응하는 대신 그 어깨를 손등으로 탁 쳤다.
"뭐야, 왜 이래. 너도 머리가 아파서 온 거야?"
"동굴에서 몸을 섞은 이후로 더 심해진 느낌이다."
적비성이 이연화의 등을 더 깊이 끌어안으며 신음처럼 말했다. 이연화가 미간을 좁혔다. 아무래도 두 사람이 느끼는 각인통은 자신보다 훨씬 더해 보였다. 역시 약의 후유증인가? 고개를 갸웃하는 이연화의 목에 얼굴을 묻고, 적비성이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 코끝과 입술이 귓가와 목덜미에 눌리자, 등으로 기쁜 소름이 은근히 돋았다. 마른침을 삼킨 이연화가 상대의 반대편 어깨를 탁 때렸다. 뜨끈한 체열이 한편으로 반가웠으나, 겉으로 티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약마의 비급을 되찾았잖아. 약을 받지는 못했어?"
"만들 때까지 시간이 걸린다더군. 쓸모라곤 없어."
적비성이 무심히 비난했다. 야, 그래도 그 노인장이 정파와 사파를 통틀어 약과 독에 가장 정통한 사람인데. 그렇게 건네려다, 이연화는 적비성이 재차 깊은 숨을 들이마셨을 때 혀를 차며 그 머리칼을 꾹 잡아당겼다. 적비성이 불만스러운 신음을 낮게 흘리고는 고개를 들었다.
"방다병은 어디 있지? 아직 당주와 얘기 중인가?"
"맞아. 조금만 떨어져. 혹시라도 방다병이 보면 기절한다."
이연화가 반 농담처럼 건네며 적비성을 떠밀었다. "왜 그 녀석 때문에 내가 이런 불편을 겪어야 하는지 모르겠군." 적비성이 투덜거리며 이연화의 손을 턱 잡았다. 그만 밀어내라고 강변하는 듯한 동작이었으나, 적비성은 곧 미간을 찌푸리고는 이연화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보았다.
"손이 왜 이렇게 차가운 거냐?"
이연화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자, 적비성의 눈썹이 높이 올라갔다. "왜 네가 긴장하지? 하 당주가 네 어머니도 아니잖나." 무신경하지만 퍽 적비성다운 말에, 이연화는 유감스럽고도 무안한 심정으로 눈가를 만졌다.
"그...아무래도, 내가 천기산장에 좋지 못한 풍파를 불러온 참이니까? 어머니가 아니라도, 은인에게 고난을 주는 일이 달가울 리가 없잖아."
"방다병이 무슨 사술에 홀려 널 따라다닌 것도 아닌데, 그게 왜 네 탓이냐. 풍파를 불러온 건 방다병이다."
적비성이 코웃음을 쳤다. 냉정해 보일 만큼 담백한 태도와 달리, 남자는 이연화의 양손을 꽉 맞잡아 주무르기 시작했다. 따뜻해서 좋긴 하네. 이연화가 반사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방다병과 하효혜가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위가 쓰린 기분이었다. 그 모습을 마뜩찮은 눈으로 바라보던 적비성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걱정되면, 내가 다녀오지." 이연화가 퍼뜩 눈을 들어 상대를 보았다.
"뭐? 네가 가서 뭘 어쩌려고. 너까지 나타나면 훨씬 더 복잡해질걸."
"이야기에 끼어든다는 뜻이 아니다. 상황을 보고 알려주겠다는 뜻이지."
"엿듣겠다는 거잖아. 됐어, 어차피 방다병이 알려줄 텐데-."
"이 선생, 주무십니까?"
밖에서 하효혜의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이연화는 실제로 반 치쯤 뛰어오를 만큼 대경해 문을 돌아보았다. 주의가 아무리 산만해졌어도 그렇지, 사람이 다가오는 기척도 미리 눈치채지 못하다니! 스스로를 질타할 틈도 없이, 이연화는 적비성을 퍽 소리가 나도록 떠밀며 낮게 건넸다. "얼른 나가!" 적비성이 짜증스러운 눈으로 이연화를 바라보았다.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아무도 만족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적어도 방다병은 그렇게 짐작했다.
하지만 청년은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어 투덜거리지는 않았다. 그 불만을 표현하는 순간, 오히려 역풍이 불어닥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대신 방다병은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국수를 먹던 이연화를 빤히 바라보았다. 자신과 다르게, 이연화는 겉으로나마 평소처럼 태연한 태도로 국물을 뜨고 있었다. 이건 불공평해. 방다병의 퀭해진 내면이 꿍얼거렸다. 그래도 이연화와 내가 동시에 힘든 것보다는, 나 하나만 괴로운 게 나아. 방다병의 선량한 내면이 반박하듯 중얼거렸다. 적어도 나뿐 아니라 적비성까지 괴로운 상황이라 다행이지. 방다병의 이기적인 내면이 어둡게 덧붙였다.
"생각하는 게 시끄러울 정도다, 방소보. 그만하고 국수나 먹어."
이연화가 국수 그릇에서 슬쩍 시선을 들고는 타박했다. 입을 삐죽 내밀고, 방다병은 일부러 국수 아닌 채소 요리를 집어 우적우적 씹었다. 이연화가 작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각인을 한 건지, 양자를 들인 건지." 그 중얼거림에, 방다병은 입 밖으로 불평하지 않겠다던 다짐을 홀랑 잊어버리고 볼멘소리를 냈다.
"네가 갑자기 날-우릴 침대에 안 들여주니까 그렇잖아."
차를 마시던 이연화가 고개를 돌리고는 두어 차례 기침을 뱉었다. 객잔의 다른 사람들이 듣지 않았는지 휘 둘러보고, 이연화는 미간을 좁힌 채 경고하듯 말했다.
"세상 사람들에게 방이라도 뿌릴 참이야?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번 얘기했잖아."
"그게 통보지, 무슨 이야기야? 각인에 대해 결정하기 전에도 잠은 같이 잤으면서, 왜 갑자기 안 된다는 거야."
"전과는 상황이 다르잖아. 벌써 두 번이나 그런-일이 있었으니, 함께 잘 때 무슨 상황이 생길지 몰라."
"전처럼 묶어두면 되는데-."
"뭣보다, 방다병. 오히려 결정했으니까 이러는 거라고 분명히 말하지 않았어?"
이연화가 낮게 힘주어 건넨 말에, 방다병은 잠시 입을 딱 다물었다.
여현을 떠나던 날, 이연화는 처음으로 '하 당주에게 허락을 얻기 전까지, 두 사람과 함께 자거나 접촉하는 일은 보류'라는 이야기를 꺼냈다. 물론 적비성처럼 험악해지거나 위협조로 말하지는 않았으나, 청년은 동그란 눈을 평소보다 훨씬 더 크게 뜨고는 잔뜩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왜 그러느냐고 동동거리던 방다병을 향해, 이연화는 차근차근 이야기했다. 오히려 이전의 내 태도가 명확하지 않았던 것이다. 내 마음이 정해진 이상, 네 어머니에 의해 가부가 판가름나기 전까지는 선을 긋는 것이 맞다. 사고에 가깝긴 했지만 벌써 두 번씩이나 정을 통한 직후이니, 만일의 상황을 각별히 더 주의하고 조심할 필요가 있다.
일리가 있었으나, 바로 수용하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그러나 이미 선택을 한 이연화는, 여느 때처럼 질기도록 고집스러워 잘 꺾이지 않았다. 다소 시간이 걸릴지언정 결국 허락하시리라 이야기해봤자 별 소용은 없었다. "그럼 문제 없네, 좀 기다리면 될 일이잖아." 이연화가 얄미울 정도로 단호하게 대꾸했다. 좌절감에 괴로워하는 방다병의 옆에서, 적비성은 당연하게도 성을 냈다.
"나는 대체 무슨 상관이냐?"
"당연히 너하고도 상관이 있지, 적 맹주. 결정이 나지 않은 상황에서 너하고만 자면, 방다병의 원성이 얼마나 크겠어? 너는 어디로 사라졌다가 밤에 나타날 때가 많지만, 나는 방 대협과 여정을 함께하는 입장이란 말이야. 견디기 힘들다고. 만에 하나라도, 예전처럼 갑자기 병증 같은 희락기가 터지면 어떡해. 여기엔 관 협의도 없는데."
이연화가 짐짓 귀찮은 투로 이야기하며 손을 내저었다. 적비성의 미간 골이 한층 깊어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군. 그럼 방다병이 제 어머니와 결론을 내지 못해 몇 달씩 기다려야 한다면, 그땐 어쩔 셈이냐?"
"그땐 상황을 봐서 다시 의논하면 될 일이지. 어쨌든, 최소한 천기산장에 가는 동안엔 안 돼."
이연화가 산뜻하게 못을 박았다. 적비성은 불만스럽다 못해 분기탱천한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떴지만, 이연화와 길게 논쟁하지 않은 채 자리를 떠버렸다. 그 서슬에 거칠게 열린 문이,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덜컹거렸다. "하여간, 자기 뜻대로 안 되면 바로 인상 쓰면서 툴툴거리고 말이야. 그런 점은 옛날부터 변하질 않았다니까." 이연화가 삐걱대는 문을 슬쩍 흘겨보며 핀잔처럼 중얼거렸다. 방다병은 청천벽력을 접한 심정과, 그 청천벽력에 아주 조금이나마 안도할 구석이 있어 다행이라는 심정을 동시에 느끼며 울상을 지었다.
그 후, 방다병은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이유는 두 가지 정도였다.
첫 번째로, 혼자 누운 침상이 묘하게도 썰렁했다. 낮은 숨소리와 고요한 체온이 사라지자 심신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이연화와 함께 잔 세월에 비하면, 홀로 잠든 날이 훨씬 많은데. 방다병이 뜬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침울하게 생각했다. 어머니께 허락을 받기 전까지는 계속 이런 밤을 보내야 하는 건가? 그 좌절스러운 상념은, 자연스레 두 번째 이유로 방다병을 인도했다. 어머니께 어떤 말들을, 어떤 순서로 이야기해야 일을 더 수월하게 만들 수 있을까? 컴컴한 천장에 어머니의 모습을 그리며 이런저런 말들을 중얼거리다 보면, 어느새 동이 부옇게 터 오기 일쑤였다. 그런 나날을 며칠 보내고 나자, 무림인의 몸이라도 피로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이제 거의 다 왔잖아. 몇 시진만 있으면 하 당주를 만날 텐데, 어떻게 얘기할지 생각은 했어?"
이연화가 빈 찻잔을 채우며 물었다. 회상에서 퍼뜩 빠져나온 방다병이 팔짱을 끼었다. 그 눈이 사뭇 단호한 빛을 띠었다.
"물론이지. 어머니랑은 내가 얘기할 테니까, 너는 들어오지 마."
"방소보, 내가 이 일의 당사자인데 어떻게 쏙 빠져있을 수 있겠어? 네 어머니가 그렇게 무책임한 사람을 퍽이나 좋아하겠다."
"빠져 있으라는 게 아니야, 그냥...일단 내가 먼저 설명할 테니까, 나중에 함께 이야기해. 그럼 됐지?"
방다병이 허둥지둥 말했다. 이연화는 영 미덥지 못한 표정이었지만, 이내 고개를 까딱하고는 다시 차를 마셨다. 하효혜의 염려 섞인 말들이 이연화의 귀에 조금도 들어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방다병은 그릇에 얼굴을 반쯤 박은 채 식사를 이어갔다.
드디어 천기산장에 도착했을 때, 하효혜는 자리를 비운 참이었다. 어머니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방다병에게, 리아가 상황을 설명했다. 하 당주는 새로 시작한 몇 개의 사업 현황을 둘러보기 위해 집을 나선 참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시일이 더 소요될 예정이었으나, 방다병이 성공적으로 일을 마무리하고 돌아온다는 소식을 접한 하 당주가 산장으로 서신을 보냈다. 아들이 오는 날짜에 맞추어 귀환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리아는 마님께서 곧 도착하실 테니, 몸을 씻고 여독을 푸시라 이야기했다.
그러나 목욕을 마치고, 저녁까지 먹은 후에도 어머니는 귀환하지 않았다. 방다병은 어쩐지 안절부절못하며 하효혜를 기다렸다. 좀처럼 차분해질 수가 없었다. 잔뜩 열중한 얼굴로 손마디를 씹어먹을 듯 잘근거리고 있자니, 가까이서 지켜보던 이연화가 한숨과 함께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심악의 약이 없어도 발작하겠다, 방소보."
"안 되겠어, 운기를 해야겠어."
방다병이 얼른 침상에 앉아 운기할 자세를 취했다. 이연화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왜 그렇게까지 가슴을 졸여? 어머니가 네 뜻을 결국 존중할 거라고 자신 있게 얘기하더니."
"난 물론 어머니를 설득할 자신이 있지만, 결과를 아는 것과 마음을 대비하는 건 다른 문제야. 이건 중대사잖아."
눈을 감은 채 대꾸하다가, 방다병은 문득 눈꺼풀을 반쯤 올리고는 뚱하게 쏘아붙였다.
"그리고, 누가 날 침상에서 쫓아내는 바람에 머리도 아파."
"뭐야, 각인통을 말하는 거야? 전에는 안 그랬잖아? 너와 내가 계속 떨어져 있던 것도 아닌데, 왜 그래?"
이연화가 살짝 커진 눈으로 물었다. 걱정스러운 얼굴에 순간 마음이 약해져, 방다병은 괜히 말했다며 자신의 입을 책망했다. 낮은 한숨을 쉬고, 청년은 한결 누그러진 투로 대답했다.
"아마 두 번째로...그랬던 날 때문인가봐. 약의 후유증일 수도 있고. 그렇게 심하진 않아."
"어디 봐."
이연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큼 다가오는 몸짓에 작은 바람이 일었다. 최근 들어 가장 좁혀진 거리에, 방다병이 자기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이연화가 아무렇지 않게 방다병의 팔을 잡았다. 내력으로 몸을 확인하는 얼굴이 진지하다 못해 심각했다. 상대는 퍽 불편하고 속상해 보였지만, 방다병은 가까이 다가온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며칠 동안 닿는 일은 고사하고 가까이 다가가지도 않았던 터라, 단둘이 붙어 있자니 심장 소리가 금세 요란해졌다.
"음, 경맥이 상한 것 같지는 않은데. 기력이 조금 허하기는 하네. 몸을 보하는 음식들을 달라고 해야겠다."
진맥을 마친 이연화가 이야기했다. 하지만 잠시 집중력이 흐트러져, 방다병은 이연화의 말을 금방 처리하지 못하고 입을 살짝 벌렸다. 품에 꽉 차게 끌어안은 다음 눕고 싶다. 맨 살갗에 코를 댄 채 마음껏 냄새 맡다가 잠들고 싶다. 일어났을 때에도 팔 안에 있었으면 좋겠다...잠깐 몽롱해진 정신이 고삐 풀린 말처럼 질주했다. 갈증에 시달리다 갑작스레 샘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이내 그 꼴을 발견한 이연화가, 이상한 표정을 짓고는 방다병의 팔을 가볍게 흔들었다.
"방다병, 뭐야? 꿈 꿔?"
"어, 어어?"
방다병이 퍼뜩 눈을 깜박였다. 그와 동시에 밖에서 사람의 기척이 들려와, 청년은 찬물을 맞은 사람처럼 움찔 튀어올랐다.
문 밖에서 리아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 활달한 한 마디에, 방다병은 잠깐 흐트러졌던 자세를 정리하며 벌떡 일어섰다.
"도련님, 도련님! 마님께서 오셨어요."
-
"이 선생, 정말 고생이 많으셨어요. 어르신께서 어찌나 긴 서신을 주셨던지. 그 중의 반이 이 선생을 칭찬하는 내용이더군요. 방씨 집안이 선생께 정말 큰 신세를 졌지 뭡니까."
"과찬이십니다. 방소보의 공이 반 이상이었는데, 어르신께서 손님에게 예를 차려주신 모양이군요."
밝은 표정의 하효혜를 만나자마자, 이연화는 미소와 함께 공손하게 인사했다. 하효혜가 웃음을 터뜨리며 방다병의 등을 두드렸다. 그 얼굴이 자녀에 대한 자부심으로 기쁘게 빛나고 있었다. "그래, 너에 대한 칭찬도 한가득 쓰셨더라. 정말 수고했다, 소보." 방다병이 살짝 억지 미소처럼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그 투명한 태도에, 이연화는 몇 번째일지도 모를 한숨을 참으며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아들의 경직된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하효혜가 양손으로 방다병의 뺨을 착 감싸고는 걱정스러운 낯을 했다.
"아니, 너는 왜 이렇게 얼굴이 어두워? 살도 조금 내린 것 같고. 돌아오는 길에 배탈이라도 난 거냐?"
"아니에요, 전 멀쩡해요. 어머니는 잘 다녀오셨어요? 예정보다 늦으셨네요."
"음, 오는 길에 마차 바퀴가 잠시 말썽을 부려 지체되었지 뭐야. 밥은 먹은 거냐? 아직이면 같이 먹자. 듣고 싶은 얘기가 많아."
하효혜의 말에, 방다병의 얼굴이 복잡해졌다. 아마도 '긴 여정에서 막 돌아온 어머니가, 제대로 식사도 하시기 전에 대뜸 중요한 이야기부터 꺼내면 안 되겠지' 정도의 속내일 터였다. 잠시 고민하다, 청년은 곧 순순히 고개를 끄덕했다.
"요기하기는 했는데, 더 먹을 수 있어요. 식사하고 얘기 나눠요."
"그래, 그럼 조금만 기다려라. 간단히 씻고 나올 테니까. 선생도 함께 오시지요?"
"아, 이연화는 같이 안 와요!"
방다병이 불쑥 끼어들어 급히 말했다. 아이고, 이 녀석. 이연화가 내심 이마를 짚었다. 하효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주는 퍽 괴이쩍은 시선으로 방다병과 이연화를 번갈아 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냐, 왜 식사하는 자리에 이 선생을 빼놓아야 해?"
"아, 그, 그게...이연화는 배부르대요, 아까 그랬거든요. 더 먹으면 탈 나요."
방다병이 어설픈 웃음을 해해 흘리며 말했다. 내심 눈을 굴린 이연화가 목을 가다듬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이미 배가 많이 차서요. 오랜만의 재회일 텐데, 모자의 회포를 푸시지요."
"그래요, 그럼 내일 함께하도록 해요. 가자, 소보."
하효혜가 방다병의 팔을 즐겁게 잡아끌었다. 친밀하고 화목한 그림이었으나, 팔을 잡힌 아들의 표정은 아주 비장하고 결연했다. 어머니와 보폭을 맞추어 걷는 모양새가 나무 인형처럼 뻣뻣했다. 이연화는 모자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이내 참던 한숨을 길게 내뱉고는 발길을 돌렸다.
비록 방다병의 등을 떠밀어 어머니의 허락을 받으라 요구했으나, 이연화는 결코 편안한 마음으로 그런 제안을 하지 않았다. 다만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 생각하여 말을 꺼냈을 뿐이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지만, 사실 이연화 역시 방다병만큼이나 긴장하고 있었다. 하 당주와 어떤 식으로 대화를 나누어야 할지 머리를 열심히 굴려보기도 했다(방다병은 자신이 해결하겠다 큰소리를 쳤으나, 이연화는 언젠가 반드시 자신이 하효혜를 대면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상상해 보아도, 결국은 자신이 하효혜에게 석고대죄하는 그림밖에 그려지지 않았다.
꽤 늦은 밤이었지만, 방으로 돌아온 이연화는 바로 겉옷을 벗고 잘 준비를 하지 않았다. 하 당주가 곧 자신을 부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마음이 푹 가라앉을 듯이 심란하여, 이연화는 탁자 앞에 앉아 느리게 차를 비웠다. 미지근한 찻물이 마치 술처럼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줄곧 신경이 곤두선 탓으로 손발마저 슬쩍 서늘했다. 깊은 한숨과 함께 양손을 맞잡아 비비다가, 이연화는 뻐근한 몸 이곳저곳을 가볍게 두드렸다. 방다병처럼 두통이 있지는 않았으나, 자신 역시 홀로 드는 잠자리가 영 불만족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갑작스레 바깥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이연화가 고개를 돌려 방 한편을 돌아보았다. 뒷문을 열어젖힌 금원맹주가 불쑥 들어오던 참이었다. 그 옷이며 얼굴이 온통 어두워, 마치 밤의 일부분이 뚝 떨어져 나온 듯한 모습이었다.
"심장 떨어지겠네. 금원맹에는 제대로 된 문으로 출입한다는 개념이 없어?"
이연화가 눈살을 찌푸리고 쏘아붙였다. 그 말을 들은 척 만 척 하고, 적비성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연화의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다짜고짜 덥석 안아오는 팔에, 이연화는 눈을 크게 뜨고는 한 손으로 그 어깨를 짚었다. 밀어낼 심산이었으나 상대는 요지부동이었다. 이연화의 미간으로 골이 생겼다. 물론 내력을 쓴다면야 상대를 튕겨낼 수 있었지만, 이연화는 거칠게 반응하는 대신 그 어깨를 손등으로 탁 쳤다.
"뭐야, 왜 이래. 너도 머리가 아파서 온 거야?"
"동굴에서 몸을 섞은 이후로 더 심해진 느낌이다."
적비성이 이연화의 등을 더 깊이 끌어안으며 신음처럼 말했다. 이연화가 미간을 좁혔다. 아무래도 두 사람이 느끼는 각인통은 자신보다 훨씬 더해 보였다. 역시 약의 후유증인가? 고개를 갸웃하는 이연화의 목에 얼굴을 묻고, 적비성이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 코끝과 입술이 귓가와 목덜미에 눌리자, 등으로 기쁜 소름이 은근히 돋았다. 마른침을 삼킨 이연화가 상대의 반대편 어깨를 탁 때렸다. 뜨끈한 체열이 한편으로 반가웠으나, 겉으로 티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약마의 비급을 되찾았잖아. 약을 받지는 못했어?"
"만들 때까지 시간이 걸린다더군. 쓸모라곤 없어."
적비성이 무심히 비난했다. 야, 그래도 그 노인장이 정파와 사파를 통틀어 약과 독에 가장 정통한 사람인데. 그렇게 건네려다, 이연화는 적비성이 재차 깊은 숨을 들이마셨을 때 혀를 차며 그 머리칼을 꾹 잡아당겼다. 적비성이 불만스러운 신음을 낮게 흘리고는 고개를 들었다.
"방다병은 어디 있지? 아직 당주와 얘기 중인가?"
"맞아. 조금만 떨어져. 혹시라도 방다병이 보면 기절한다."
이연화가 반 농담처럼 건네며 적비성을 떠밀었다. "왜 그 녀석 때문에 내가 이런 불편을 겪어야 하는지 모르겠군." 적비성이 투덜거리며 이연화의 손을 턱 잡았다. 그만 밀어내라고 강변하는 듯한 동작이었으나, 적비성은 곧 미간을 찌푸리고는 이연화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보았다.
"손이 왜 이렇게 차가운 거냐?"
이연화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자, 적비성의 눈썹이 높이 올라갔다. "왜 네가 긴장하지? 하 당주가 네 어머니도 아니잖나." 무신경하지만 퍽 적비성다운 말에, 이연화는 유감스럽고도 무안한 심정으로 눈가를 만졌다.
"그...아무래도, 내가 천기산장에 좋지 못한 풍파를 불러온 참이니까? 어머니가 아니라도, 은인에게 고난을 주는 일이 달가울 리가 없잖아."
"방다병이 무슨 사술에 홀려 널 따라다닌 것도 아닌데, 그게 왜 네 탓이냐. 풍파를 불러온 건 방다병이다."
적비성이 코웃음을 쳤다. 냉정해 보일 만큼 담백한 태도와 달리, 남자는 이연화의 양손을 꽉 맞잡아 주무르기 시작했다. 따뜻해서 좋긴 하네. 이연화가 반사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방다병과 하효혜가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위가 쓰린 기분이었다. 그 모습을 마뜩찮은 눈으로 바라보던 적비성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걱정되면, 내가 다녀오지." 이연화가 퍼뜩 눈을 들어 상대를 보았다.
"뭐? 네가 가서 뭘 어쩌려고. 너까지 나타나면 훨씬 더 복잡해질걸."
"이야기에 끼어든다는 뜻이 아니다. 상황을 보고 알려주겠다는 뜻이지."
"엿듣겠다는 거잖아. 됐어, 어차피 방다병이 알려줄 텐데-."
"이 선생, 주무십니까?"
밖에서 하효혜의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이연화는 실제로 반 치쯤 뛰어오를 만큼 대경해 문을 돌아보았다. 주의가 아무리 산만해졌어도 그렇지, 사람이 다가오는 기척도 미리 눈치채지 못하다니! 스스로를 질타할 틈도 없이, 이연화는 적비성을 퍽 소리가 나도록 떠밀며 낮게 건넸다. "얼른 나가!" 적비성이 짜증스러운 눈으로 이연화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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