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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3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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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ㅅㅈ주의, 주화입마 사파 주의.
16편
"정말 저 자를 선기탑에 데려가려고?"
객잔을 나서자마자 방다병이 마뜩찮은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적비성도 뭔가 거슬렸는지 눈썹을 치켜 올리고 이연화를 보았다.
"비술사들이 못 푸는 지도를 순식간에 풀었어. 일부러 갑자기 동행을 청했는데 망설이지도 않잖아."
이연화도 방다병의 말에 동의했다. 모한과는 만나게 된 일부터가 어딘지 극적이었다. 모한이 잡배에게 정말로 맞기나 한 것일까 싶었다. 정말로 몸을 가누지 못해 몸이 부자유한 줄 알았으나 객잔에 들어선 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른 사람처럼 굴었다. 제 요력을 알아보고 반인반요라 밝힌 것도, 자신이 필요할거라 장담한 것도, 염탐차 보낸 시호에 제 나비를 붙여 보낸 것도 범상치가 않았다.
"나도 저 자가 영 마뜩찮아. 아무래도 비술원로들과 논의해야겠군. 저런 고수라면 누군가 알지 않겠어?"
세 사람이 인파에 섞여 들어갔다. 창으로 이연화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본 모한은 종을 들고 흔들어 객잔의 시비를 불렀다. 앳된 시비에게 작은 엽전 꾸러미를 던진 모한이 말했다.
"내일 아침까지 아무도 들이지 말아라. 수련을 하고 잠을 청할 것이니 아침 식사 전에 누구도 들어오지 않아야 한다. 어길 시에는 객잔을 통째로 날릴 것이다."
시비는 뭔지 모를 느낌에 압도되어 얼어 붙었다. 분부대로 전하겠다며 황급히 돌아서 나가다가 넘어질 뻔 하고는 저 혼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모한은 손대지 않고 요력으로 들창을 닫았다. 창을 모두 닫자 허공에 글자를 쓰고 손바닥으로 이를 잡아 늘렸다. 붉은 글자들이 모한을 가운데 두고 원을 그리며 돌더니 사방으로 흩어져 벽에 날아가 붙었다. 그리고는 잠시 번쩍이다가 벽에 스미듯 사라졌다. 보호 결계를 친 그는 침상에 바로 누웠다. 다시 현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현야의 요력은 환영육화술을 쓰는 동안 육화된 몸이 주변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만큼 충분히 강했으나, 가짜인 환체가 현야의 요력을 감당치 못해 일정 시간이 지나면 일종의 가사 상태에 빠졌다. 못해도 하루의 삼분지일은 육화한 몸에서 나갈 필요가 있었다. 생기가 빠진 몸에서 나는 시신과도 비슷한 냄새를 지우기 위해 피운 난향이 더욱 짙어졌다. 모한의 몸이 굳어짐과 동시에, 칠곡산 천마곡의 침상에 앉은 현야의 눈이 떠졌다.
피투성이가 되어도 형형한 눈빛으로 결연하던 이상이를 떠올렸다. 그의 머리채를 잡아 입안을 헤집었던 일도, 감히 천마왕의 어깨에 검을 찌르고 밀어낸 일도, 숨이 사그라드는 그에게 독을 써 요력을 넣은 일도 엊그제 일처럼 선명했다. 이상이에게 제 피를 주며 욕정했던 밤에, 현야는 잠든 그를 제멋대로 범하는 대신 무릎을 꿇어 자기를 압도하는 알 수 없는 무언가에 복종했다. 이상이가 원한다면 현야는 그것이 무엇이든 갖다 바칠 터였다.
이상이는 자기를 이연화라 불렀다. 내력이 약해 요력을 누르기도 바빠 보였다. 그는 이상이와 달랐지만 현야의 눈에는 이상이였다. 지난 세월을 조용히 지낸 그가 보옥을 가진 문파의 인물들과 움직이는 것은 천마곡에 관여하겠다는 뜻이 분명했다. 아마도 이상이는 다시 한 번 천마왕을 막으려 할 것이다. 현야는 나른한 숨을 뱉었다.
네가 여기로 오려한다면-
어깨의 상처가 기분 좋게 욱신거렸다.
나는 기꺼이 네가 오도록 도울 것이다.
현야는 제 손으로 직접 이상이를 만지는 상상을 했다. 결계를 깨려는 이유는 인간들이 상상하는 것과 달랐다. 피의 복수도, 천하를 가지려는 야망도 아니었다. 인간 세계 따위를 가져서 어디에 쓴단 말인가. 하지만 결계를 깨면 이상이를 직접 볼 수 있었다. 그 생각을 바로 하지 않은 이유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지금 원하면 지금 하면 그만이었다. 어쩌면 이상이에게 연형제가 생겨서, 내 것을 빼앗길까봐 움직이는지도 몰랐다.
내가 천하를 가지겠다고 들면 네가 여기로 올 것이냐. 그렇다면 천하를 가지겠다.
내가 인간을 쓸어버린다 하면 네가 여기로 올 것이냐. 그렇다면 살육을 벌이겠다.
하지만 너무도 간단하게도 보옥을 가져온 것만으로도 이상이가 움직였다. 그것만으로도 현야는 몸서리치게 기뻤다. 제 여인에게 무릉도원을 전부 사서 주려 했는데 복사꽃 한 다발에 기뻐 품에 안겨드는 모습을 본 사내의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처럼, 현야는 이상이가 천마곡을 향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흥분되었다. 현야는 곧 나탁을 불러들였다.
"열흘 후에 천기당과 사고문을 쳐라. 보옥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선기탑에 있는 현월도가 무엇인지 알아내라."
"받들겠습니다, 마존."
나탁은 절을 하고 물러나자, 현야는 제 앞에 놓인 술을 병째로 들이켰다. 현야는 필요한 명령을 하고 그제서야 사소한 두 인간을 떠올렸다.
연형제라니, 우습군.
약해 빠져서 둘이 짝을 지어야 뭘 할 수 있다니. 이상이는 혼자서 제 몸에 검을 꽂았다. 그 강하고 결연한 힘과 의지는 가히 탐스러웠다. 거추장스럽게 둘이나 붙은 연형제가 현야의 눈에는 절경이 들어찬 창 앞에서 왔다 갔다 하며 시야를 가리는 잡새처럼 보였다. 이상이에게 연형제 따위가 필요할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상이는 다른 놈의 기운을 받아들였다. 현야의 표정이 무섭게 굳었다. 이상이를 보던 자의 눈빛이 떠올랐다. 현야는 그 눈빛을 설명할 단어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최대한 비슷한 말을 떠올리려 애썼다. 지배? 소유? 이것과도 달랐다. 복종과도 비슷했지만 경외나 두려움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저 역시 이상이가 두려워 복종의 예를 갖춘 것은 아니었다. 제 일부를 가져간 자에게 느끼는 압도감, 이것이 현야가 해석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이연화가 그를 대할 때의 표정이 떠올랐다. 평범했지만 어딘지 편해 보였다. 이연화만 보면 눈빛이 달라지는 사내는 수시로 이연화의 등이며 팔에 손을 대었다. 이연화는 아무렇지 않게 손길을 받고 심지어 어느 순간에는 긴장을 푸는 듯 보이기까지 했다. 현야는 그 자가 자신이 보지 못한 이상이의 어떤 부분을 가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쾅-
순간적으로 날카롭게 방출된 요력에 와장창 소리를 내며 탁자가 반으로 갈려나갔다. 흰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휘날리고 깨어져 나간 술병과 술방울들이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현야의 눈동자에 붉은 빛이 어렸다가 사라졌다. 가슴팍이 크게 오르 내리며 요동쳤다. 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 나에게 보이지 않는 면을 다른 이에게 보인다는데에서 오는 분노가 밀려 들었다.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조바심에 현야는 이상이가 얼마나 저를 소유했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
해가 뉘엿하게 지고 있었다. 흰 얼룩이 군데 군데 박힌 갈색 말, 윤기 흐르는 털을 가진 갈색 말, 준수한 검은 말이 제 주인들에게 당근을 하나씩 얻어먹었다. 방다병은 제 얼룩말의 목을 쓸며 말했다.
"야영할 데를 찾는게 좋겠어. 마을까지 사흘을 더 가야해."
이연화와 적비성도 고개를 끄덕였다.
"당최 이 쪽은 사람이 통 살지를 않네. 가는 길에 마을이 하나 뿐이라니. 게다가 마을 지나면 엿새 가는 동안 사람 사는 곳이 없어. 식량을 잘 비축해야 해."
방다병이 지도를 펼치고 투덜댔다. 북쪽의 산간지역은 척박하여 사람이 살지 않았다. 그나마 가는 길목에 마을이 하나 있었는데 교류도 알려진 바도 거의 없었다. 멀다고는 해도 못 갈 거리가 아닌데도 폐쇄적인 마을이라 드나드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했다.
"정비를 하고 갈만한 마을이어야 할텐데."
이연화도 중얼댔다. 그리고는 곧 팔로 몸을 감쌌다. 이를 놓치지 않고 방다병이 물었다.
"추워, 이연화?"
"봄이어도 북쪽은 추워. 걸쳐라."
적비성이 이연화의 말에 걸쳐진 도톰한 겉옷을 가져와 건넸다. 묘한 표정을 지은 방다병은 제 일을 뺏긴 황당함에 잠시 멈칫했다. 이연화는 이연화대로 의외라는 표정으로 옷을 받아 들었다.
"그 비술사가 제대로 찾아올까?"
"서찰을 남겼으니 마을로 오겠지."
"영 찜찜해. 장로들이 우기지 않았으면 같이 가지 않았을텐데."
"현월도에도 고급 비술이 걸려 있을거라 확신하니 어째. 다들 마음이 급한게지. 자기들이 무능해서 지도도 못 풀고 현월도도 못 가져오면 책임을 어떻게 지겠어. 나중에 모한을 포섭하려 들거야."
장포를 걸치고 말하면서도 몸을 부르르 떠는 이연화를 본 방다병의 얼굴에 걱정이 스몄다.
"내 것도 걸쳐."
제 옷을 꺼내온 방다병이 이연화에 어깨에 장포를 둘렀다. 고마워, 이연화의 대답에 싱긋 웃은 방다병은 곧 적비성과 함께 나뭇가지를 끌어 모았다. 기대어 앉을 나무가 제법 있는 야트막한 산자락의 숲 초엽은 야영하기에 썩 괜찮았다. 근처에 호수가 있어 물을 구하기 수월했고, 땅이 젖지 않아 주워오는 나뭇가지가 건조해 불도 잘 붙을 것 같았다. 이연화도 가지를 주우려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제 연형제 둘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앉아 있어."
"좀 쉬어."
적비성과 방다병이 서로를 흘끔 보았다. 그리고는 앉으라는 눈빛으로 다시 이연화를 쳐다 보았다. 이연화는 엉거주춤하게 선 자세로 눈만 꿈뻑였다.
"왜 사람을 병자 취급해? 빨리 주워서 불을 피우면 좋잖아."
이연화에 말에도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이 꼼짝도 안했다. 마치 네가 할 일은 지금 거기 앉아 있는거야,라고 말하는 듯 했다.
"둘 다 지금 뭐하는거야? 옷을 갖다주질 않나, 사람 앉혀 놓고 나뭇가지도 못 줍게 하고."
"추워 떨면서 말이 많군. 갈 길이 멀고 아프면 낭패다. 내력을 아껴둬."
적비성의 말에 방다병이 드물게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무공도 못하는 나는 너희들한테 걸어다니는 약재긴 하지. 잘 모셔. "
이연화가 마지못해 투덜대며 자리에 앉았다. 한편으로는 제 상태를 들키지 않아 다행이라 여겼다. 장포를 둘이나 걸쳤는데도 몸 안의 한기가 가시지를 않았다. 벽차지독의 발작이 올 때처럼 심하지는 않았지만 안에서부터 도는 한기에 몸이 으슬대고 손발이 차졌다. 그러다가도 갑자기 회음에서 뜨거운 기운이 피어올라 퍼져 나가 몸을 노곤하게 했다. 그 열기가 몸 속 한기를 녹여 차라리 기다리게 되었는데, 간헐적으로 터져나오는 열기라 예측할 수가 없었다. 하단전과 중단전을 가리지 않고 열기가 터져나와 경맥을 휘돌았다. 이연화는 냉탕과 열탕에 들락대듯 몸이 날뛰어 몹시 불편했다.
벽차지독은 이런 식으로 작용하지 않았다. 남은 가능성은 하나였다. 경맥을 통했다 해도 내력의 3할만을 튼 방다병에게 제 몸이 그 이상을 요구하며 냉해지는 것과, 적비성과 역류하여 감응하는 경맥이 열기를 날카롭게 뿜어내는 것, 즉, 연형제간에 경맥이 감응하느라 몸이 곤혹을 치르는 것이 분명했다. 동시에 둘과 감응하느라 이리 정신이 없는지도 몰랐다.
방다병이 옆으로 와 나뭇가지를 쌓고 비술로 불을 붙였다. 적비성도 사술을 써 불씨를 살려서 불을 키웠다. 두 사람은 금방 모닥불을 피웠다. 이연화의 옆에 방다병이 붙어 앉았다.
"금새 따뜻해질거야. 조금 기다려."
이연화는 제 앞의 모닥불의 온기보다 방다병이 옆에 앉았을 때 느껴지는 온기가 제 몸을 더 녹이고 한기를 가라앉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연형제가 과연 대단하군. 이상이로 살았던 시절, 누구보다도 연형제가 있었다면 훨훨 날았을 때에도 못 느꼈던 필요가 지금 오돌오돌 떠는 순간에 절실해졌다. 난로가 따로 없군. 이연화는 저도 모르게 방다병 쪽으로 몸을 붙였다. 의지할 마음이 없음에도 몸이 절로 기울어졌다. 이를 눈치챈 방다병이 조심스레 물었다.
"이연화, 많이 추워? 내가 따뜻하게 해줄게."
대답도 구박도 없자 방다병은 이연화의 등으로 팔을 둘렀다. 그리고 다른 손까지 동원해 내력을 부드럽게 밀어 넣었다. 이연화의 몸에 긴장이 사그라드는 것이 팔을 통해 전달되었다. 방다병의 내력이 밀고 들어가 상대의 기운을 조르던 경맥의 한기를 잠재웠다. 이연화는 내색을 하지 않으려 했지만 몸이 편해 느슨해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제 괜찮아, 방소보."
이연화가 몸을 세우자 방다병이 조금 아쉽다는 듯 팔을 떼었다. 적비성은 잠자코 불쏘시개를 모닥불에 던져 넣고 있었다. 모로 앉은 그를 보자 급한 불을 끈 몸이 다음 요구를 해왔다. 다시금 회음에서 찌릿한 열기가 쳐올라와 이연화는 하반신에 순간적으로 힘을 주어야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쩌다 제 처지가 연형제 둘 사이에 껴서 몸이 이리도 말을 안듣게 된 것인지.
두번째로 열기가 오르자 이연화는 눈썹을 찡그렸다. 냉기와 싸우느라 뒤로 밀렸던 열감이 회음과 하단전을 두드려와 골반에 힘이 들어갔다. 통증과 묘한 감각이 뒤섞여 괴로웠다. 얼척이 없게도 파정할 때의 사정감과 비슷한 찰나의 쾌감이 아주 짧은 순간 스쳐가 곤혹스러웠다. 결국 이연화는 벌떡 일어났다.
"말에 물을 먹이고 올게. 내 몸이 냉해서 이놈도 힘들었을거야."
"에? 갑자기...같이 가!"
방다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적비성은 따라올 작정인지 바닥에서 엉덩이를 뗐다. 이연화가 큰 소리로 말하며 손가락질까지 했다.
"아니! 나 혼자 갈거야. 따라오지마."
단호한 말에 두 사람이 자리에 못 박힌 듯 앉았다. 볼일이라도 보러 갈 수도 있겠다 싶어 둘은 조심하라는 말만 던졌다. 이연화는 제 말을 데리고 호숫가로 갔다. 둘에게서 멀어지니 조금 살 것 같았다. 말에 물을 먹이는 도중에도 이연화는 고삐를 쥔 손에 힘을 주다가 주저 앉아야 했다.
신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밭은 소리가 잇새를 뚫고 새어나왔다. 내가 이렇다면 적비성은 괜찮을까?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고 내력을 받는게 나을 것 같았다. 이대로 참기만 하면 이성을 잃고 접문을 해버릴지도 몰랐다. 방다병이 얼마나 충격을 받을지, 이연화는 그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몸이 너무도 아우성을 쳐댔다. 연형제가 이렇게 성가신지 몰랐다.
호숫물을 묻혀 세수를 하며 정신을 차린 이연화는 훅 끼쳐오는 기운에 손을 멈추었다. 강하진 않았지만 다수의 요기가 느껴졌다. 돌아서니 과연 벌건 눈을 하고 침을 질질 흘리는 들짐승들이 다가들고 있었다. 말을 노리나? 자세히 보니 머리뼈, 갈비뼈, 정강이뼈 등을 가리지 않고 드러나 피투성이가 된 반시인 삵이었다. 요마가 되어 덩치가 큰 늑대만했다. 말이 불안해하며 몸을 들썩였다. 말이 다치면 정말 낭패였다. 이연화는 말 앞을 막아서며 소사검을 빼들었다.
"걱정마. 내가 막아줄테니."
두 마리가 동시에 뛰어 들었다. 이연화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들어가 검을 휘둘렀다. 보통 사람 눈에는 보이지도 않을 검날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만 들렸다. 삵 두 마리는 목이 잘려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다행히 모양만 흉측했지 대수롭지는 않았다. 그때, 남은 삵이 말을 향해 뛰었다. 이연화는 몸을 날려 삵의 몸통에 검을 꽂으려 했다. 그런데 삵이 갑작스레 멈추더니 방향을 돌려 이연화의 앞을 노렸다. 워낙 빠른 속도로 움직인터라 방향을 돌리기 어려웠던 이연화는 몸을 빙글 돌려 검을 뻗었다. 삵은 검에 머리가 궤뚫리면서도 이연화의 종아리에 이를 박았다. 이연화가 조금 더 빨라 다행히 콱 물지는 못했지만 송곳니가 반쯤 박혀 피가 흘렀다. 이연화는 통증에 인상을 쓰면서도 재빨리 물린 다리를 빼 삵의 머리통을 걷어찼다. 검에 꽂힌 머리가 찢기듯 날아갔다. 몇 보를 뒷걸음질하며 멈춘 이연화는 주변에서 요기가 사그라들자 그제서야 제 다리를 살폈다. 별로 아프지 않아 제대로 못 물었나 싶어 바짓단을 올린 이연화는 눈을 크게 뜰 수 밖에 없었다. 송곳니에 찍혀 동그랗게 피를 뿜던 상처가 눈으로도 보일만큼 빠르게 아물고 있었다.
"이게 무슨..."
자신이 반인반요라 회복이 빠른지도 몰랐다. 지난 세월 크게 다친 적이 없던 그였다. 약한 요마들은 상대가 안되었고, 어쩌다 만난 강한 상급 요마는 요력을 써서 상대하면 제압하기 어렵지 않았다. 설마 그 탓인가 하던 이연화는 생각을 멈추고 얼른 말을 데리고 야영 장소로 향했다. 그러다 뭐가 생각난 듯 다시 호숫가로 온 이연화는 손에 붉은 빛을 띄웠다. 두 사람이 요마를 발견하면 누가 이리 난도질을 했는지 궁금할 터였다. 술인을 그려 죽은 삵에게 던지자 시신이 흩어져 공중으로 사라졌다.
다시 몸을 돌린 이연화는 놀란 말을 진정시키며 걸음을 재촉했다. 걱정할 필요가 없는 두 사람이었지만 그럼에도 발길이 바빴다.
*
방다병과 적비성은 흉측한 모습의 삵 여섯 마리에 둘러싸여 있었다. 둘은 동시에 이연화를 떠올렸지만 눈 앞의 요마들부터 정리해야 했다. 덤벼드는 삵에 두 사삼은 각자의 검을 뽑아 날카롭게 휘둘렀다. 캥 소리를 내며 삵이 나가 떨어졌지만 다시 덤벼 들었다.
"반시 요마다. 몸뚱이에 상처내는 걸로는 소용이 없어."
"머리를 베어야겠어. 적맹주, 나물 뽑을 때처럼 저놈들만 하나씩 날릴 수 있어?"
적비성이 무슨 말을 하냐는 듯한 눈으로 방다병을 쳐다 보았다. 방다병이 똘방하게 머리를 굴렸다.
"하나씩 붙어서 치기엔 시간이 많이 걸려. 내가 반대편으로 갈테니 네가 비풍백양으로 한둘씩 날려줘. 그럼 목을 벨테니."
적비성이 고개를 끄덕이자 방다병이 삵의 주의를 끌지 않도록 뒤로 돌아 반대편으로 날아 올랐다. 적비성은 방다병이 수 장 뒤로 착지하는 것을 보자마자 비풍백양으로 삵 두 마리를 날려보냈다. 방다병이 날아올라 순식간에 삵의 머리통를 날렸다.
"애송이 주제에 쓸만하군."
적비성은 입꼬리를 올리고는 호쾌하게 다음 놈들을 날렸다. 방다병이 날아오르는 것과 동시에, 적비성은 어리둥절해있는 남은 세 마리가 모인 곳으로 돌진해 바닥을 내리쳤다. 삵 세 마리가 공중으로 떴다. 적비성은 같이 뛰어올라 공중에서 두 놈의 머리를 날리고 빙글 돌아 내려오면서 바닥에 내쳐져 기절한 한 마리의 머리를 베어냈다. 방다병이 썰어낸 두 마리의 머리통이 날아와 옆에 떨어졌다. 둘은 눈을 마주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확인하고는 이연화가 있는 호숫가로 몸을 돌렸다. 날아오르려던 차에, 이연화가 나무 사이에서 말을 데리고 나타났다.
"이연화!"
이연화는 여기저기 널린 삵의 시체를 보고 놀란 척을 했다.
"이게 무슨 일이야?"
"넌 괜찮아? 뭔 일 없었어?"
"보다시피. 이것들은 다 뭐야?"
"반시가 된 요마다. 또 올지도 모르니 이쪽으로 와."
모닥불 근처로 간 세 사람은 말을 더 가까이로 데려왔다. 방다병도 적비성도 검을 거두지 않고 선 채 주변을 경계했다. 이연화는 굳이 앉혀둔 채였다. 이연화는 방다병의 다리에 피가 묻은 것을 보고 인상을 썼다.
"방소보, 다쳤잖아. 보여줘."
방다병이 무슨 소리냐는 듯 이연화를 쳐다보았다. 적비성도 눈썹을 치켜 올렸다. 다칠 새가 없이 삵의 목을 딴 두 사람이었다. 이연화가 턱짓을 하자 방다병은 그제서야 제 종아리에 발갛게 피가 스민 것을 발견했다. 아픈 것도 같았다. 애초에 다치질 않았으니 전투에 흥분한 상태에서 인식조차 못했다.
"피가 튀었나?"
바지를 올리자 종아리에 송곳니 자국이 선명했다. 검게 뚫린 구멍이 깊지는 않아도 붉은 피가 울컥대며 솟아 나와 다리를 적시고 있었다.
"물린 적이 없는데?"
방다병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제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이연화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 애썼다.
"의원 눈에는 명백히 다친거야. 얼마나 싸워댔으면 다친 줄을 몰라. 어서 이리 내."
이연화는 당혹감을 숨기려 얼른 일어나 말에 걸린 등짐에서 약을 찾았다. 방다병의 다리에 난 상처는 분명히 이연화 본인이 입은 상처였다. 위치도 모양도 같았다. 이상이인 자신이 다치면, 연형제인 방다병이 상처를 나눠가지는 것이 분명했다. 그 말인즉슨, 방다병이 다치면 자신 또한 다친다는 뜻이었다.
상처에 약을 바르고 처치를 하면서 이연화는 계속해서 상처가 왜 났는지 기막혀하는 방다병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잔소리를 해야했다. 적비성은 그 모습을 유심히 보다가 다리에 묻은 피를 발견했다. 잠시 생각한 그는 무방비 상태의 이연화의 바지를 잡아 올렸다.
"뭐하는거야!"
이연화보다도 방다병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연화는 놀람보다 조마조마함이 앞서 잔소리를 할 엄두를 못냈다. 이연화의 다리는 작은 상처에 핏자욱만이 나있었다. 방다병의 몸이 굳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이연화, 요마를 만났냐."
"그랬으면 내가 살았겠어?"
이연화는 딴청을 피웠지만 등뒤로 식은땀이 나는 듯 했다. 방다병이 심각해졌다.
"혹시 내 상처를 나눠가진게 아니야?"
"그럼 왜 네 상처가 더 심하고 이연화는 상처가 경미하지?"
적비성이 묻자 방다병도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이연화를 보았다.
"그걸 난들 알아? 멀리 있어 감응이 약해 상처가 전이되지 않은게 아니야? 무공도 비술도 몰라 거절했더니 상처를 대신 받을 줄이야. 방소보, 몸 건사 잘해."
이연화는 최대한 태연한 척 너스레를 떨며 일어섰다. 그러다가 방다병과 눈이 마주쳤다. 방다병이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미안해."
방다병은 고개를 떨구었다. 이연화는 한숨을 쉬며 방다병의 몸을 홱 돌려 등에 손을 대었다. 방다병이 불에 데기라도 한 듯 몸을 떼었다. 받을 수 없어, 상처까지 줘버렸는데. 이연화는 속이 터지는걸 느끼며 끙 소리를 냈다. 너 나때문에 상처 난거야.
"얼른 나아야 날 지킬거 아냐. 다리 절뚝대다가 더 크게 다칠 셈이야?"
이연화가 방다병에게 내력을 불어 넣었다. 방다병의 가슴이 크게 오르내렸다. 이연화는 두 사람 사이에서 다시 몸이 불편해지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아까 보잘것 없는 놈들을 상대할 때 내력을 쓴데다 경맥이 날뛴 통에 요력이 우세를 점하는 것 같았다. 방다병이 민망한 듯 개미소리로 아니라고 웅얼댔다.
방다병에게서 손을 떼자 현기증이 크게 일었다. 내력을 소모해서 지친 몸에 한기가 들고 동시에 저릿한 열감이 터져 정신이 없었다. 결국 이연화는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졌다. 화들짝 놀란 두 남자가 양쪽에서 이연화의 등을 받쳐 안았다.
"이연화!"
동시에 이연화의 등을 받쳐 안은 두 남자는 머리를 다치지 않게 조심하며 바닥에 그를 눕혔다. 이연화가 힘겹게 눈을 떴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그냥 넘..어진 것 뿐이야. 시끄럽게 호들갑이야."
이연화는 눈을 부릅떴다. 아니, 아무렇지 않게 눈으로 구박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밖에서 보는 이연화는 그저 눈을 치뜨는 것으로만 보였다. 얼굴이 붉고 입에서 새어나오는 소리가 어딘지 힘겹게 버티는 것 같아 분위기가 묘했다. 게다가 두 남자의 경맥 또한 이연화의 상태와 감응하여 이리저리 휘몰아치는 중이었다. 이연화는 제 양주만을 적당히 아낀 것이 후회되었다.
"괜찮아?"
그리 묻는 방다병도 핼쓱했다. 사실 방다병은 아파 쓰러진 이연화를 보고 목울대를 울리는 저 자신에게 놀라는 중이었다. 심장이 요동치고 몸의 모든 기운이 이연화를 향해 쏠려드는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입을 맞추고픈 충동과 싸우느라 방다병의 말아 쥔 주먹이 새하얗게 질렸다. 방다병은 그 와중에도 내력을 둘러 넣어 이연화를 편하게 해주려 애썼다. 평소와 달리 부드럽기 보다 침범하듯 밀고 들어오는 내력에 이연화는 방다병의 상태가 좋지 않음을 알았다.
적비성은 몸에서 느껴지는 저릿한 감각에 인상을 쓰며 털어내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연화와 닿은 제 팔과 가슴팍, 허벅지가 뜨거웠다. 팽팽하게 당겨지는 감각에 속으로 신음을 삼킨 적비성은 제 아래가 묵직해져오자 눈살을 더 찌푸렸다. 이대로는 안되었다.
"이러다 널 다치게 할 것 같다."
적비성이 이연화를 품에 꽉 안았다. 닿은 몸이 저릿해왔다. 적비성이 밀고 들어오는 내력에 이연화의 눈이 크게 떠졌다. 붕 뜨는 듯한 감각이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휩쓸었다. 적비성이 고비를 넘긴 듯 숨을 몰아쉬었다. 상황은 이연화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제 허벅지에 닿는 적비성을 느낀 이연화는 제 몸 또한 반응하고 있음을 알고 기가 막혔다.
속사정은 몰라도 방다병은 지금 두 남자가 이연화에게 어쩔 줄 몰라하고 있다는 것만은 잘 알 수 있었다. 속절없이 늘어져 달뜬 눈을 한 이연화에 제 아래가 빳빳해져 오는 것을 느낀 방다병은 당장 자리를 떠야할지 적비성에게 잡힌 이연화를 구해야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적비성의 말마따나 이렇게라도 해야 이연화가 더 안전하다는 말을, 방다병은 너무나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내력에 상태가 나아진 이연화가 적비성을 떼어냈다. 당혹감을 숨기지 못한 이연화가 팍 신경질이라도 내듯 몸을 일으켰다.
"거참 성가시네!"
이연화는 같이 일어서 제 옆에 선 사내 둘을 돌려 한 손씩 어깨에 얹었다. 그리고 그들이 무어라 대꾸할 틈을 주지 않고 내력을 강하게 집어 넣었다.
"작작들 해. 그리고 접근 금지야!"
이연화는 당혹감을 감추느라 일부러 성을 냈다. 둘에게 내력을 나눠준 그는 양 소매를 탁 치고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둘에게서 멀리 떨어진 다른 쪽 언덕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남은 두 사람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이연화가 안전하도록 밤새 지켜야겠다는 생각만 할 뿐이었다.
17편.
마을 어귀에는 대문이라 부르기에는 어딘지 석연찮은 낡고 썩은 나무문이 너덜대며 달려 있었다. 대들보 양 옆으로 둘러친 돌담은 외부 침입으로부터 마을을 지키기 보다는 그저 마을 안팎을 구분하는 경계의 역할만 겨우 하고 있었다. 성인 남자의 어깨에도 닿지 않을 낮은 담은 윗부분이 파손되었는지 들쭉날쭉 높이가 저마다 달랐다. 마치 누가 담 윗부분만 쓸고 지나간 것 같았다. 돌담 사이사이에는 숭숭 구멍이 나있어 바람조차 막아주지 못해 담은 참으로 무력해 보였다. 반면 새로 세운 것이 분명하게 윤기가 흐르는 나무 기둥은 공들여 새긴 글자에 먹을 채워 넣어 까맣고 반들반들했다. 마을 이름은 풍림촌이었다.
"지도에는 분명 석주촌이라고 되어 있는데?"
방다병이 지도와 기둥을 번갈아보며 중얼댔다.
"아무래도 최근에 이름을 바꾼 모양이야. 문도 담도 온전치 않은데 기둥에만 신경을 쓰다니 이상하네.
이연화가 붉은색이 흐르는 기둥을 살피며 말했다.
"주목이군. 요기가 잘 흐르는 나무라 이리 쓰지 않는데."
바람이 지나가 허술한 대문짝이 삐걱대며 비명을 질렀다. 문 안으로 마을의 모습이 훤히 보였다. 푸르스름한 달빛이 비쳐 바닥이 창백해 보이는 마을은 사람이 보이지 않아 을씨년스러웠다. 갈비뼈가 드러나도록 마른 개 한마리가 배춧잎으로 보이는 채소를 물고 골목을 지나갔다.
"밖에서 야영을 하는게 낫겠군."
적비성의 말에 방다병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연화는 인상을 팍 썼다. 거듭된 야영에 안 그래도 독의 한기로 괴롭던 몸에 오한이 들던 차였다. 지금의 이연화는 마을에 요마가 있다해도 뜨거운 술 한 병만 있으면 요마와 대작이라도 하며 밤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잠깐만. 너희는 괜찮은지 몰라도 나는 곤란해. 너네 둘 다한테 이리저리 감응하느라 안 그래도 부실한 몸이 더 축났다고. 추운 곳에서 더는 무리야. 바람 막아주는 집이 절실해. 게다가 말도 쉬어야 하고 북쪽은 더 추우니 물건도 챙겨야지. 그냥 천기당 소당주와 금원맹 맹주 믿고 들어가면 안되겠어?"
"한기 든거 아니야?"
이연화의 하소연에 방다병은 얼른 제 겉옷을 벗어 둘러주러 다가왔고, 적비성은 벌써 열 걸음은 앞서서 걸어 마을로 들어다고 있었다. 이연화는 제 안위를 들먹이면 두 사람이 순순히 말을 듣는다는 사실을 십분 써먹으면서도 동시에 기가 찼다. 연형제가 뭐라고, 몸이 동하는게 뭐라고 이리 싸고 도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방다병은 그렇다쳐도 적비성마저 저리 물렁하게 굴 줄 몰랐다. 표정만 심각했을 뿐 가만 보면 하자는대로 착실하게도 따랐다. 하긴 이상이였던 자신도 교완만이 기침이라도 할라치면 제 옷부터 벗어 둘러주긴 했지만 그건 은애의 감정이었고 연형제간에 몸이 동한다는 이유로 살갑게 구는 일은 그와 달리 퍽 희한하게 느껴졌다.
"네 몸이나 잘 건사해, 방소보. 네가 멀쩡해야 나도 안전하지."
이연화의 핀잔 아닌 핀잔에 방다병은 눈을 데룩 굴렸다. 마을에 들어선 세 사람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초입의 집엔 아무도 살지 않는지 집기들이 굴러다니고 창이나 문이 떨어져 나가 있었다.
"뭔가 이상해. 요기가 엷게 퍼져있다."
다른 이들을 저지하듯이 앞선 걸음을 멈추어 팔을 뻗은 적비성이 날카로운 눈을 하고 폐가를 둘러보았다. 입구에 가까운 집들은 비었고 안쪽으로 갈수록 불이 켜져 있거나 인영이 보였다.
....
연화루 이연화 방다병 적비성 현야 현야상이 다병연화 비성연화 성의 츼츼
* ㅅㅈ주의, 주화입마 사파 주의.
16편
"정말 저 자를 선기탑에 데려가려고?"
객잔을 나서자마자 방다병이 마뜩찮은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적비성도 뭔가 거슬렸는지 눈썹을 치켜 올리고 이연화를 보았다.
"비술사들이 못 푸는 지도를 순식간에 풀었어. 일부러 갑자기 동행을 청했는데 망설이지도 않잖아."
이연화도 방다병의 말에 동의했다. 모한과는 만나게 된 일부터가 어딘지 극적이었다. 모한이 잡배에게 정말로 맞기나 한 것일까 싶었다. 정말로 몸을 가누지 못해 몸이 부자유한 줄 알았으나 객잔에 들어선 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른 사람처럼 굴었다. 제 요력을 알아보고 반인반요라 밝힌 것도, 자신이 필요할거라 장담한 것도, 염탐차 보낸 시호에 제 나비를 붙여 보낸 것도 범상치가 않았다.
"나도 저 자가 영 마뜩찮아. 아무래도 비술원로들과 논의해야겠군. 저런 고수라면 누군가 알지 않겠어?"
세 사람이 인파에 섞여 들어갔다. 창으로 이연화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본 모한은 종을 들고 흔들어 객잔의 시비를 불렀다. 앳된 시비에게 작은 엽전 꾸러미를 던진 모한이 말했다.
"내일 아침까지 아무도 들이지 말아라. 수련을 하고 잠을 청할 것이니 아침 식사 전에 누구도 들어오지 않아야 한다. 어길 시에는 객잔을 통째로 날릴 것이다."
시비는 뭔지 모를 느낌에 압도되어 얼어 붙었다. 분부대로 전하겠다며 황급히 돌아서 나가다가 넘어질 뻔 하고는 저 혼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모한은 손대지 않고 요력으로 들창을 닫았다. 창을 모두 닫자 허공에 글자를 쓰고 손바닥으로 이를 잡아 늘렸다. 붉은 글자들이 모한을 가운데 두고 원을 그리며 돌더니 사방으로 흩어져 벽에 날아가 붙었다. 그리고는 잠시 번쩍이다가 벽에 스미듯 사라졌다. 보호 결계를 친 그는 침상에 바로 누웠다. 다시 현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현야의 요력은 환영육화술을 쓰는 동안 육화된 몸이 주변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만큼 충분히 강했으나, 가짜인 환체가 현야의 요력을 감당치 못해 일정 시간이 지나면 일종의 가사 상태에 빠졌다. 못해도 하루의 삼분지일은 육화한 몸에서 나갈 필요가 있었다. 생기가 빠진 몸에서 나는 시신과도 비슷한 냄새를 지우기 위해 피운 난향이 더욱 짙어졌다. 모한의 몸이 굳어짐과 동시에, 칠곡산 천마곡의 침상에 앉은 현야의 눈이 떠졌다.
피투성이가 되어도 형형한 눈빛으로 결연하던 이상이를 떠올렸다. 그의 머리채를 잡아 입안을 헤집었던 일도, 감히 천마왕의 어깨에 검을 찌르고 밀어낸 일도, 숨이 사그라드는 그에게 독을 써 요력을 넣은 일도 엊그제 일처럼 선명했다. 이상이에게 제 피를 주며 욕정했던 밤에, 현야는 잠든 그를 제멋대로 범하는 대신 무릎을 꿇어 자기를 압도하는 알 수 없는 무언가에 복종했다. 이상이가 원한다면 현야는 그것이 무엇이든 갖다 바칠 터였다.
이상이는 자기를 이연화라 불렀다. 내력이 약해 요력을 누르기도 바빠 보였다. 그는 이상이와 달랐지만 현야의 눈에는 이상이였다. 지난 세월을 조용히 지낸 그가 보옥을 가진 문파의 인물들과 움직이는 것은 천마곡에 관여하겠다는 뜻이 분명했다. 아마도 이상이는 다시 한 번 천마왕을 막으려 할 것이다. 현야는 나른한 숨을 뱉었다.
네가 여기로 오려한다면-
어깨의 상처가 기분 좋게 욱신거렸다.
나는 기꺼이 네가 오도록 도울 것이다.
현야는 제 손으로 직접 이상이를 만지는 상상을 했다. 결계를 깨려는 이유는 인간들이 상상하는 것과 달랐다. 피의 복수도, 천하를 가지려는 야망도 아니었다. 인간 세계 따위를 가져서 어디에 쓴단 말인가. 하지만 결계를 깨면 이상이를 직접 볼 수 있었다. 그 생각을 바로 하지 않은 이유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지금 원하면 지금 하면 그만이었다. 어쩌면 이상이에게 연형제가 생겨서, 내 것을 빼앗길까봐 움직이는지도 몰랐다.
내가 천하를 가지겠다고 들면 네가 여기로 올 것이냐. 그렇다면 천하를 가지겠다.
내가 인간을 쓸어버린다 하면 네가 여기로 올 것이냐. 그렇다면 살육을 벌이겠다.
하지만 너무도 간단하게도 보옥을 가져온 것만으로도 이상이가 움직였다. 그것만으로도 현야는 몸서리치게 기뻤다. 제 여인에게 무릉도원을 전부 사서 주려 했는데 복사꽃 한 다발에 기뻐 품에 안겨드는 모습을 본 사내의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처럼, 현야는 이상이가 천마곡을 향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흥분되었다. 현야는 곧 나탁을 불러들였다.
"열흘 후에 천기당과 사고문을 쳐라. 보옥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선기탑에 있는 현월도가 무엇인지 알아내라."
"받들겠습니다, 마존."
나탁은 절을 하고 물러나자, 현야는 제 앞에 놓인 술을 병째로 들이켰다. 현야는 필요한 명령을 하고 그제서야 사소한 두 인간을 떠올렸다.
연형제라니, 우습군.
약해 빠져서 둘이 짝을 지어야 뭘 할 수 있다니. 이상이는 혼자서 제 몸에 검을 꽂았다. 그 강하고 결연한 힘과 의지는 가히 탐스러웠다. 거추장스럽게 둘이나 붙은 연형제가 현야의 눈에는 절경이 들어찬 창 앞에서 왔다 갔다 하며 시야를 가리는 잡새처럼 보였다. 이상이에게 연형제 따위가 필요할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상이는 다른 놈의 기운을 받아들였다. 현야의 표정이 무섭게 굳었다. 이상이를 보던 자의 눈빛이 떠올랐다. 현야는 그 눈빛을 설명할 단어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최대한 비슷한 말을 떠올리려 애썼다. 지배? 소유? 이것과도 달랐다. 복종과도 비슷했지만 경외나 두려움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저 역시 이상이가 두려워 복종의 예를 갖춘 것은 아니었다. 제 일부를 가져간 자에게 느끼는 압도감, 이것이 현야가 해석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이연화가 그를 대할 때의 표정이 떠올랐다. 평범했지만 어딘지 편해 보였다. 이연화만 보면 눈빛이 달라지는 사내는 수시로 이연화의 등이며 팔에 손을 대었다. 이연화는 아무렇지 않게 손길을 받고 심지어 어느 순간에는 긴장을 푸는 듯 보이기까지 했다. 현야는 그 자가 자신이 보지 못한 이상이의 어떤 부분을 가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쾅-
순간적으로 날카롭게 방출된 요력에 와장창 소리를 내며 탁자가 반으로 갈려나갔다. 흰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휘날리고 깨어져 나간 술병과 술방울들이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현야의 눈동자에 붉은 빛이 어렸다가 사라졌다. 가슴팍이 크게 오르 내리며 요동쳤다. 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 나에게 보이지 않는 면을 다른 이에게 보인다는데에서 오는 분노가 밀려 들었다.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조바심에 현야는 이상이가 얼마나 저를 소유했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
해가 뉘엿하게 지고 있었다. 흰 얼룩이 군데 군데 박힌 갈색 말, 윤기 흐르는 털을 가진 갈색 말, 준수한 검은 말이 제 주인들에게 당근을 하나씩 얻어먹었다. 방다병은 제 얼룩말의 목을 쓸며 말했다.
"야영할 데를 찾는게 좋겠어. 마을까지 사흘을 더 가야해."
이연화와 적비성도 고개를 끄덕였다.
"당최 이 쪽은 사람이 통 살지를 않네. 가는 길에 마을이 하나 뿐이라니. 게다가 마을 지나면 엿새 가는 동안 사람 사는 곳이 없어. 식량을 잘 비축해야 해."
방다병이 지도를 펼치고 투덜댔다. 북쪽의 산간지역은 척박하여 사람이 살지 않았다. 그나마 가는 길목에 마을이 하나 있었는데 교류도 알려진 바도 거의 없었다. 멀다고는 해도 못 갈 거리가 아닌데도 폐쇄적인 마을이라 드나드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했다.
"정비를 하고 갈만한 마을이어야 할텐데."
이연화도 중얼댔다. 그리고는 곧 팔로 몸을 감쌌다. 이를 놓치지 않고 방다병이 물었다.
"추워, 이연화?"
"봄이어도 북쪽은 추워. 걸쳐라."
적비성이 이연화의 말에 걸쳐진 도톰한 겉옷을 가져와 건넸다. 묘한 표정을 지은 방다병은 제 일을 뺏긴 황당함에 잠시 멈칫했다. 이연화는 이연화대로 의외라는 표정으로 옷을 받아 들었다.
"그 비술사가 제대로 찾아올까?"
"서찰을 남겼으니 마을로 오겠지."
"영 찜찜해. 장로들이 우기지 않았으면 같이 가지 않았을텐데."
"현월도에도 고급 비술이 걸려 있을거라 확신하니 어째. 다들 마음이 급한게지. 자기들이 무능해서 지도도 못 풀고 현월도도 못 가져오면 책임을 어떻게 지겠어. 나중에 모한을 포섭하려 들거야."
장포를 걸치고 말하면서도 몸을 부르르 떠는 이연화를 본 방다병의 얼굴에 걱정이 스몄다.
"내 것도 걸쳐."
제 옷을 꺼내온 방다병이 이연화에 어깨에 장포를 둘렀다. 고마워, 이연화의 대답에 싱긋 웃은 방다병은 곧 적비성과 함께 나뭇가지를 끌어 모았다. 기대어 앉을 나무가 제법 있는 야트막한 산자락의 숲 초엽은 야영하기에 썩 괜찮았다. 근처에 호수가 있어 물을 구하기 수월했고, 땅이 젖지 않아 주워오는 나뭇가지가 건조해 불도 잘 붙을 것 같았다. 이연화도 가지를 주우려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제 연형제 둘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앉아 있어."
"좀 쉬어."
적비성과 방다병이 서로를 흘끔 보았다. 그리고는 앉으라는 눈빛으로 다시 이연화를 쳐다 보았다. 이연화는 엉거주춤하게 선 자세로 눈만 꿈뻑였다.
"왜 사람을 병자 취급해? 빨리 주워서 불을 피우면 좋잖아."
이연화에 말에도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이 꼼짝도 안했다. 마치 네가 할 일은 지금 거기 앉아 있는거야,라고 말하는 듯 했다.
"둘 다 지금 뭐하는거야? 옷을 갖다주질 않나, 사람 앉혀 놓고 나뭇가지도 못 줍게 하고."
"추워 떨면서 말이 많군. 갈 길이 멀고 아프면 낭패다. 내력을 아껴둬."
적비성의 말에 방다병이 드물게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무공도 못하는 나는 너희들한테 걸어다니는 약재긴 하지. 잘 모셔. "
이연화가 마지못해 투덜대며 자리에 앉았다. 한편으로는 제 상태를 들키지 않아 다행이라 여겼다. 장포를 둘이나 걸쳤는데도 몸 안의 한기가 가시지를 않았다. 벽차지독의 발작이 올 때처럼 심하지는 않았지만 안에서부터 도는 한기에 몸이 으슬대고 손발이 차졌다. 그러다가도 갑자기 회음에서 뜨거운 기운이 피어올라 퍼져 나가 몸을 노곤하게 했다. 그 열기가 몸 속 한기를 녹여 차라리 기다리게 되었는데, 간헐적으로 터져나오는 열기라 예측할 수가 없었다. 하단전과 중단전을 가리지 않고 열기가 터져나와 경맥을 휘돌았다. 이연화는 냉탕과 열탕에 들락대듯 몸이 날뛰어 몹시 불편했다.
벽차지독은 이런 식으로 작용하지 않았다. 남은 가능성은 하나였다. 경맥을 통했다 해도 내력의 3할만을 튼 방다병에게 제 몸이 그 이상을 요구하며 냉해지는 것과, 적비성과 역류하여 감응하는 경맥이 열기를 날카롭게 뿜어내는 것, 즉, 연형제간에 경맥이 감응하느라 몸이 곤혹을 치르는 것이 분명했다. 동시에 둘과 감응하느라 이리 정신이 없는지도 몰랐다.
방다병이 옆으로 와 나뭇가지를 쌓고 비술로 불을 붙였다. 적비성도 사술을 써 불씨를 살려서 불을 키웠다. 두 사람은 금방 모닥불을 피웠다. 이연화의 옆에 방다병이 붙어 앉았다.
"금새 따뜻해질거야. 조금 기다려."
이연화는 제 앞의 모닥불의 온기보다 방다병이 옆에 앉았을 때 느껴지는 온기가 제 몸을 더 녹이고 한기를 가라앉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연형제가 과연 대단하군. 이상이로 살았던 시절, 누구보다도 연형제가 있었다면 훨훨 날았을 때에도 못 느꼈던 필요가 지금 오돌오돌 떠는 순간에 절실해졌다. 난로가 따로 없군. 이연화는 저도 모르게 방다병 쪽으로 몸을 붙였다. 의지할 마음이 없음에도 몸이 절로 기울어졌다. 이를 눈치챈 방다병이 조심스레 물었다.
"이연화, 많이 추워? 내가 따뜻하게 해줄게."
대답도 구박도 없자 방다병은 이연화의 등으로 팔을 둘렀다. 그리고 다른 손까지 동원해 내력을 부드럽게 밀어 넣었다. 이연화의 몸에 긴장이 사그라드는 것이 팔을 통해 전달되었다. 방다병의 내력이 밀고 들어가 상대의 기운을 조르던 경맥의 한기를 잠재웠다. 이연화는 내색을 하지 않으려 했지만 몸이 편해 느슨해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제 괜찮아, 방소보."
이연화가 몸을 세우자 방다병이 조금 아쉽다는 듯 팔을 떼었다. 적비성은 잠자코 불쏘시개를 모닥불에 던져 넣고 있었다. 모로 앉은 그를 보자 급한 불을 끈 몸이 다음 요구를 해왔다. 다시금 회음에서 찌릿한 열기가 쳐올라와 이연화는 하반신에 순간적으로 힘을 주어야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쩌다 제 처지가 연형제 둘 사이에 껴서 몸이 이리도 말을 안듣게 된 것인지.
두번째로 열기가 오르자 이연화는 눈썹을 찡그렸다. 냉기와 싸우느라 뒤로 밀렸던 열감이 회음과 하단전을 두드려와 골반에 힘이 들어갔다. 통증과 묘한 감각이 뒤섞여 괴로웠다. 얼척이 없게도 파정할 때의 사정감과 비슷한 찰나의 쾌감이 아주 짧은 순간 스쳐가 곤혹스러웠다. 결국 이연화는 벌떡 일어났다.
"말에 물을 먹이고 올게. 내 몸이 냉해서 이놈도 힘들었을거야."
"에? 갑자기...같이 가!"
방다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적비성은 따라올 작정인지 바닥에서 엉덩이를 뗐다. 이연화가 큰 소리로 말하며 손가락질까지 했다.
"아니! 나 혼자 갈거야. 따라오지마."
단호한 말에 두 사람이 자리에 못 박힌 듯 앉았다. 볼일이라도 보러 갈 수도 있겠다 싶어 둘은 조심하라는 말만 던졌다. 이연화는 제 말을 데리고 호숫가로 갔다. 둘에게서 멀어지니 조금 살 것 같았다. 말에 물을 먹이는 도중에도 이연화는 고삐를 쥔 손에 힘을 주다가 주저 앉아야 했다.
신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밭은 소리가 잇새를 뚫고 새어나왔다. 내가 이렇다면 적비성은 괜찮을까?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고 내력을 받는게 나을 것 같았다. 이대로 참기만 하면 이성을 잃고 접문을 해버릴지도 몰랐다. 방다병이 얼마나 충격을 받을지, 이연화는 그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몸이 너무도 아우성을 쳐댔다. 연형제가 이렇게 성가신지 몰랐다.
호숫물을 묻혀 세수를 하며 정신을 차린 이연화는 훅 끼쳐오는 기운에 손을 멈추었다. 강하진 않았지만 다수의 요기가 느껴졌다. 돌아서니 과연 벌건 눈을 하고 침을 질질 흘리는 들짐승들이 다가들고 있었다. 말을 노리나? 자세히 보니 머리뼈, 갈비뼈, 정강이뼈 등을 가리지 않고 드러나 피투성이가 된 반시인 삵이었다. 요마가 되어 덩치가 큰 늑대만했다. 말이 불안해하며 몸을 들썩였다. 말이 다치면 정말 낭패였다. 이연화는 말 앞을 막아서며 소사검을 빼들었다.
"걱정마. 내가 막아줄테니."
두 마리가 동시에 뛰어 들었다. 이연화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들어가 검을 휘둘렀다. 보통 사람 눈에는 보이지도 않을 검날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만 들렸다. 삵 두 마리는 목이 잘려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다행히 모양만 흉측했지 대수롭지는 않았다. 그때, 남은 삵이 말을 향해 뛰었다. 이연화는 몸을 날려 삵의 몸통에 검을 꽂으려 했다. 그런데 삵이 갑작스레 멈추더니 방향을 돌려 이연화의 앞을 노렸다. 워낙 빠른 속도로 움직인터라 방향을 돌리기 어려웠던 이연화는 몸을 빙글 돌려 검을 뻗었다. 삵은 검에 머리가 궤뚫리면서도 이연화의 종아리에 이를 박았다. 이연화가 조금 더 빨라 다행히 콱 물지는 못했지만 송곳니가 반쯤 박혀 피가 흘렀다. 이연화는 통증에 인상을 쓰면서도 재빨리 물린 다리를 빼 삵의 머리통을 걷어찼다. 검에 꽂힌 머리가 찢기듯 날아갔다. 몇 보를 뒷걸음질하며 멈춘 이연화는 주변에서 요기가 사그라들자 그제서야 제 다리를 살폈다. 별로 아프지 않아 제대로 못 물었나 싶어 바짓단을 올린 이연화는 눈을 크게 뜰 수 밖에 없었다. 송곳니에 찍혀 동그랗게 피를 뿜던 상처가 눈으로도 보일만큼 빠르게 아물고 있었다.
"이게 무슨..."
자신이 반인반요라 회복이 빠른지도 몰랐다. 지난 세월 크게 다친 적이 없던 그였다. 약한 요마들은 상대가 안되었고, 어쩌다 만난 강한 상급 요마는 요력을 써서 상대하면 제압하기 어렵지 않았다. 설마 그 탓인가 하던 이연화는 생각을 멈추고 얼른 말을 데리고 야영 장소로 향했다. 그러다 뭐가 생각난 듯 다시 호숫가로 온 이연화는 손에 붉은 빛을 띄웠다. 두 사람이 요마를 발견하면 누가 이리 난도질을 했는지 궁금할 터였다. 술인을 그려 죽은 삵에게 던지자 시신이 흩어져 공중으로 사라졌다.
다시 몸을 돌린 이연화는 놀란 말을 진정시키며 걸음을 재촉했다. 걱정할 필요가 없는 두 사람이었지만 그럼에도 발길이 바빴다.
*
방다병과 적비성은 흉측한 모습의 삵 여섯 마리에 둘러싸여 있었다. 둘은 동시에 이연화를 떠올렸지만 눈 앞의 요마들부터 정리해야 했다. 덤벼드는 삵에 두 사삼은 각자의 검을 뽑아 날카롭게 휘둘렀다. 캥 소리를 내며 삵이 나가 떨어졌지만 다시 덤벼 들었다.
"반시 요마다. 몸뚱이에 상처내는 걸로는 소용이 없어."
"머리를 베어야겠어. 적맹주, 나물 뽑을 때처럼 저놈들만 하나씩 날릴 수 있어?"
적비성이 무슨 말을 하냐는 듯한 눈으로 방다병을 쳐다 보았다. 방다병이 똘방하게 머리를 굴렸다.
"하나씩 붙어서 치기엔 시간이 많이 걸려. 내가 반대편으로 갈테니 네가 비풍백양으로 한둘씩 날려줘. 그럼 목을 벨테니."
적비성이 고개를 끄덕이자 방다병이 삵의 주의를 끌지 않도록 뒤로 돌아 반대편으로 날아 올랐다. 적비성은 방다병이 수 장 뒤로 착지하는 것을 보자마자 비풍백양으로 삵 두 마리를 날려보냈다. 방다병이 날아올라 순식간에 삵의 머리통를 날렸다.
"애송이 주제에 쓸만하군."
적비성은 입꼬리를 올리고는 호쾌하게 다음 놈들을 날렸다. 방다병이 날아오르는 것과 동시에, 적비성은 어리둥절해있는 남은 세 마리가 모인 곳으로 돌진해 바닥을 내리쳤다. 삵 세 마리가 공중으로 떴다. 적비성은 같이 뛰어올라 공중에서 두 놈의 머리를 날리고 빙글 돌아 내려오면서 바닥에 내쳐져 기절한 한 마리의 머리를 베어냈다. 방다병이 썰어낸 두 마리의 머리통이 날아와 옆에 떨어졌다. 둘은 눈을 마주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확인하고는 이연화가 있는 호숫가로 몸을 돌렸다. 날아오르려던 차에, 이연화가 나무 사이에서 말을 데리고 나타났다.
"이연화!"
이연화는 여기저기 널린 삵의 시체를 보고 놀란 척을 했다.
"이게 무슨 일이야?"
"넌 괜찮아? 뭔 일 없었어?"
"보다시피. 이것들은 다 뭐야?"
"반시가 된 요마다. 또 올지도 모르니 이쪽으로 와."
모닥불 근처로 간 세 사람은 말을 더 가까이로 데려왔다. 방다병도 적비성도 검을 거두지 않고 선 채 주변을 경계했다. 이연화는 굳이 앉혀둔 채였다. 이연화는 방다병의 다리에 피가 묻은 것을 보고 인상을 썼다.
"방소보, 다쳤잖아. 보여줘."
방다병이 무슨 소리냐는 듯 이연화를 쳐다보았다. 적비성도 눈썹을 치켜 올렸다. 다칠 새가 없이 삵의 목을 딴 두 사람이었다. 이연화가 턱짓을 하자 방다병은 그제서야 제 종아리에 발갛게 피가 스민 것을 발견했다. 아픈 것도 같았다. 애초에 다치질 않았으니 전투에 흥분한 상태에서 인식조차 못했다.
"피가 튀었나?"
바지를 올리자 종아리에 송곳니 자국이 선명했다. 검게 뚫린 구멍이 깊지는 않아도 붉은 피가 울컥대며 솟아 나와 다리를 적시고 있었다.
"물린 적이 없는데?"
방다병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제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이연화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 애썼다.
"의원 눈에는 명백히 다친거야. 얼마나 싸워댔으면 다친 줄을 몰라. 어서 이리 내."
이연화는 당혹감을 숨기려 얼른 일어나 말에 걸린 등짐에서 약을 찾았다. 방다병의 다리에 난 상처는 분명히 이연화 본인이 입은 상처였다. 위치도 모양도 같았다. 이상이인 자신이 다치면, 연형제인 방다병이 상처를 나눠가지는 것이 분명했다. 그 말인즉슨, 방다병이 다치면 자신 또한 다친다는 뜻이었다.
상처에 약을 바르고 처치를 하면서 이연화는 계속해서 상처가 왜 났는지 기막혀하는 방다병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잔소리를 해야했다. 적비성은 그 모습을 유심히 보다가 다리에 묻은 피를 발견했다. 잠시 생각한 그는 무방비 상태의 이연화의 바지를 잡아 올렸다.
"뭐하는거야!"
이연화보다도 방다병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연화는 놀람보다 조마조마함이 앞서 잔소리를 할 엄두를 못냈다. 이연화의 다리는 작은 상처에 핏자욱만이 나있었다. 방다병의 몸이 굳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이연화, 요마를 만났냐."
"그랬으면 내가 살았겠어?"
이연화는 딴청을 피웠지만 등뒤로 식은땀이 나는 듯 했다. 방다병이 심각해졌다.
"혹시 내 상처를 나눠가진게 아니야?"
"그럼 왜 네 상처가 더 심하고 이연화는 상처가 경미하지?"
적비성이 묻자 방다병도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이연화를 보았다.
"그걸 난들 알아? 멀리 있어 감응이 약해 상처가 전이되지 않은게 아니야? 무공도 비술도 몰라 거절했더니 상처를 대신 받을 줄이야. 방소보, 몸 건사 잘해."
이연화는 최대한 태연한 척 너스레를 떨며 일어섰다. 그러다가 방다병과 눈이 마주쳤다. 방다병이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미안해."
방다병은 고개를 떨구었다. 이연화는 한숨을 쉬며 방다병의 몸을 홱 돌려 등에 손을 대었다. 방다병이 불에 데기라도 한 듯 몸을 떼었다. 받을 수 없어, 상처까지 줘버렸는데. 이연화는 속이 터지는걸 느끼며 끙 소리를 냈다. 너 나때문에 상처 난거야.
"얼른 나아야 날 지킬거 아냐. 다리 절뚝대다가 더 크게 다칠 셈이야?"
이연화가 방다병에게 내력을 불어 넣었다. 방다병의 가슴이 크게 오르내렸다. 이연화는 두 사람 사이에서 다시 몸이 불편해지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아까 보잘것 없는 놈들을 상대할 때 내력을 쓴데다 경맥이 날뛴 통에 요력이 우세를 점하는 것 같았다. 방다병이 민망한 듯 개미소리로 아니라고 웅얼댔다.
방다병에게서 손을 떼자 현기증이 크게 일었다. 내력을 소모해서 지친 몸에 한기가 들고 동시에 저릿한 열감이 터져 정신이 없었다. 결국 이연화는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졌다. 화들짝 놀란 두 남자가 양쪽에서 이연화의 등을 받쳐 안았다.
"이연화!"
동시에 이연화의 등을 받쳐 안은 두 남자는 머리를 다치지 않게 조심하며 바닥에 그를 눕혔다. 이연화가 힘겹게 눈을 떴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그냥 넘..어진 것 뿐이야. 시끄럽게 호들갑이야."
이연화는 눈을 부릅떴다. 아니, 아무렇지 않게 눈으로 구박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밖에서 보는 이연화는 그저 눈을 치뜨는 것으로만 보였다. 얼굴이 붉고 입에서 새어나오는 소리가 어딘지 힘겹게 버티는 것 같아 분위기가 묘했다. 게다가 두 남자의 경맥 또한 이연화의 상태와 감응하여 이리저리 휘몰아치는 중이었다. 이연화는 제 양주만을 적당히 아낀 것이 후회되었다.
"괜찮아?"
그리 묻는 방다병도 핼쓱했다. 사실 방다병은 아파 쓰러진 이연화를 보고 목울대를 울리는 저 자신에게 놀라는 중이었다. 심장이 요동치고 몸의 모든 기운이 이연화를 향해 쏠려드는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입을 맞추고픈 충동과 싸우느라 방다병의 말아 쥔 주먹이 새하얗게 질렸다. 방다병은 그 와중에도 내력을 둘러 넣어 이연화를 편하게 해주려 애썼다. 평소와 달리 부드럽기 보다 침범하듯 밀고 들어오는 내력에 이연화는 방다병의 상태가 좋지 않음을 알았다.
적비성은 몸에서 느껴지는 저릿한 감각에 인상을 쓰며 털어내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연화와 닿은 제 팔과 가슴팍, 허벅지가 뜨거웠다. 팽팽하게 당겨지는 감각에 속으로 신음을 삼킨 적비성은 제 아래가 묵직해져오자 눈살을 더 찌푸렸다. 이대로는 안되었다.
"이러다 널 다치게 할 것 같다."
적비성이 이연화를 품에 꽉 안았다. 닿은 몸이 저릿해왔다. 적비성이 밀고 들어오는 내력에 이연화의 눈이 크게 떠졌다. 붕 뜨는 듯한 감각이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휩쓸었다. 적비성이 고비를 넘긴 듯 숨을 몰아쉬었다. 상황은 이연화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제 허벅지에 닿는 적비성을 느낀 이연화는 제 몸 또한 반응하고 있음을 알고 기가 막혔다.
속사정은 몰라도 방다병은 지금 두 남자가 이연화에게 어쩔 줄 몰라하고 있다는 것만은 잘 알 수 있었다. 속절없이 늘어져 달뜬 눈을 한 이연화에 제 아래가 빳빳해져 오는 것을 느낀 방다병은 당장 자리를 떠야할지 적비성에게 잡힌 이연화를 구해야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적비성의 말마따나 이렇게라도 해야 이연화가 더 안전하다는 말을, 방다병은 너무나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내력에 상태가 나아진 이연화가 적비성을 떼어냈다. 당혹감을 숨기지 못한 이연화가 팍 신경질이라도 내듯 몸을 일으켰다.
"거참 성가시네!"
이연화는 같이 일어서 제 옆에 선 사내 둘을 돌려 한 손씩 어깨에 얹었다. 그리고 그들이 무어라 대꾸할 틈을 주지 않고 내력을 강하게 집어 넣었다.
"작작들 해. 그리고 접근 금지야!"
이연화는 당혹감을 감추느라 일부러 성을 냈다. 둘에게 내력을 나눠준 그는 양 소매를 탁 치고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둘에게서 멀리 떨어진 다른 쪽 언덕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남은 두 사람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이연화가 안전하도록 밤새 지켜야겠다는 생각만 할 뿐이었다.
17편.
마을 어귀에는 대문이라 부르기에는 어딘지 석연찮은 낡고 썩은 나무문이 너덜대며 달려 있었다. 대들보 양 옆으로 둘러친 돌담은 외부 침입으로부터 마을을 지키기 보다는 그저 마을 안팎을 구분하는 경계의 역할만 겨우 하고 있었다. 성인 남자의 어깨에도 닿지 않을 낮은 담은 윗부분이 파손되었는지 들쭉날쭉 높이가 저마다 달랐다. 마치 누가 담 윗부분만 쓸고 지나간 것 같았다. 돌담 사이사이에는 숭숭 구멍이 나있어 바람조차 막아주지 못해 담은 참으로 무력해 보였다. 반면 새로 세운 것이 분명하게 윤기가 흐르는 나무 기둥은 공들여 새긴 글자에 먹을 채워 넣어 까맣고 반들반들했다. 마을 이름은 풍림촌이었다.
"지도에는 분명 석주촌이라고 되어 있는데?"
방다병이 지도와 기둥을 번갈아보며 중얼댔다.
"아무래도 최근에 이름을 바꾼 모양이야. 문도 담도 온전치 않은데 기둥에만 신경을 쓰다니 이상하네.
이연화가 붉은색이 흐르는 기둥을 살피며 말했다.
"주목이군. 요기가 잘 흐르는 나무라 이리 쓰지 않는데."
바람이 지나가 허술한 대문짝이 삐걱대며 비명을 질렀다. 문 안으로 마을의 모습이 훤히 보였다. 푸르스름한 달빛이 비쳐 바닥이 창백해 보이는 마을은 사람이 보이지 않아 을씨년스러웠다. 갈비뼈가 드러나도록 마른 개 한마리가 배춧잎으로 보이는 채소를 물고 골목을 지나갔다.
"밖에서 야영을 하는게 낫겠군."
적비성의 말에 방다병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연화는 인상을 팍 썼다. 거듭된 야영에 안 그래도 독의 한기로 괴롭던 몸에 오한이 들던 차였다. 지금의 이연화는 마을에 요마가 있다해도 뜨거운 술 한 병만 있으면 요마와 대작이라도 하며 밤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잠깐만. 너희는 괜찮은지 몰라도 나는 곤란해. 너네 둘 다한테 이리저리 감응하느라 안 그래도 부실한 몸이 더 축났다고. 추운 곳에서 더는 무리야. 바람 막아주는 집이 절실해. 게다가 말도 쉬어야 하고 북쪽은 더 추우니 물건도 챙겨야지. 그냥 천기당 소당주와 금원맹 맹주 믿고 들어가면 안되겠어?"
"한기 든거 아니야?"
이연화의 하소연에 방다병은 얼른 제 겉옷을 벗어 둘러주러 다가왔고, 적비성은 벌써 열 걸음은 앞서서 걸어 마을로 들어다고 있었다. 이연화는 제 안위를 들먹이면 두 사람이 순순히 말을 듣는다는 사실을 십분 써먹으면서도 동시에 기가 찼다. 연형제가 뭐라고, 몸이 동하는게 뭐라고 이리 싸고 도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방다병은 그렇다쳐도 적비성마저 저리 물렁하게 굴 줄 몰랐다. 표정만 심각했을 뿐 가만 보면 하자는대로 착실하게도 따랐다. 하긴 이상이였던 자신도 교완만이 기침이라도 할라치면 제 옷부터 벗어 둘러주긴 했지만 그건 은애의 감정이었고 연형제간에 몸이 동한다는 이유로 살갑게 구는 일은 그와 달리 퍽 희한하게 느껴졌다.
"네 몸이나 잘 건사해, 방소보. 네가 멀쩡해야 나도 안전하지."
이연화의 핀잔 아닌 핀잔에 방다병은 눈을 데룩 굴렸다. 마을에 들어선 세 사람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초입의 집엔 아무도 살지 않는지 집기들이 굴러다니고 창이나 문이 떨어져 나가 있었다.
"뭔가 이상해. 요기가 엷게 퍼져있다."
다른 이들을 저지하듯이 앞선 걸음을 멈추어 팔을 뻗은 적비성이 날카로운 눈을 하고 폐가를 둘러보았다. 입구에 가까운 집들은 비었고 안쪽으로 갈수록 불이 켜져 있거나 인영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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