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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0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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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ㅅㅈ주의, 주화입마 사파 주의.
15편.
방다병과 적비성은 아침 댓바람부터 제 앞에 놓인 바구니를 멀뚱하게 쳐다보았다. 이연화는 두 사람 앞에 작은 호미를 하나씩 놔주며 흐뭇하다는 듯 팔짱을 꼈다. 그리고 뿌리까지 싹 뽑힌 봄나물도 하나씩 얹었다.
"땔깜은 그만하면 충분하니 이제 나물 차례야."
"나물? 어제 캤잖아?"
"너희가 고새를 못 참고 찾으러 오는 바람에 얼마 못 캤잖아. 데쳐 놓고 말리려면 세 바구니는 필요해."
이연화는 팔짱을 끼며 한숨을 폭 쉬었다. 적비성이 먼저 일어나 바구니와 호미를 들었다. 방다병이 어라,하는 표정으로 적비성을 봤다가 저도 발딱 일어나 제 몫의 도구를 잡았다. 방다병은 벌써 연화루를 빠져나간 적비성에 질세라 우당탕대며 뒤를 쫓았다.
방다병은 적비성이 왜 이리 고분고분하게 구는지가 의아했다. 금원맹 맹주에게 나물이나 캐오라니, 무시하고 나가버리는 쪽이 더 어울리는 인간이 야무지게 바구니를 옆에 끼고 섰다. 이제보니 이연화도 말을 편하게 하고 있었다. 방다병은 얼굴 가득 꺼림칙한 표정을 지었다.
"적맹주가 말을 참 잘 듣네. 이연화랑 말은 언제부터 튼거야?"
적비성은 방다병의 떽떽대는 소리에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묵묵부답이었다. 적비성이 군말없이 바로 물건을 챙겨나온 속사정은 따로 있었다. 한 번 공력이 배가되는 경험을 한 몸이 더욱 제 연형제의 내력을 원해 조금 전 탁자를 사이에 두고 근거리에 있을 때 등에 열감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번거롭군.
적비성은 인상을 쓰며 제 몸이 멋대로 반응하는 것에 역정을 냈다. 일단 거리를 두면 경맥이 들끓는 감각이 덜해져 냉큼 나왔지만 언제까지 이럴 수 있을지는 몰랐다. 남에게 의존하는 듯한 모양새도 맘에 들지 않았다.
"사람이 물으면 답을 좀 하지?"
방다병이 옆을 지나가며 일부러 어깨로 팔을 밀쳤다. 흘겨보듯 적비성의 옆얼굴을 보면서도 방다병의 옆구리에는 소중한 듯 바구니와 호미가 꽉 껴있었다.
두 사내는 이연화가 일러준 곳에 가서 멀뚱히 섰다. 풀밭에 온갖 잡초가 가득한데 뭐가 나물이고 뭐가 독초인지 도무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방다병은 모친이 직접 시키는 수련보다 어렵다고 생각하며 이연화가 견본으로 건네준 나물을 들어올려 유심히 관찰했다. 그리고 쪼그려 앉아 비슷해 보이는 이파리를 찾으려 온통 초록인 것들을 이리저리 헤집었다.
"너도 얼른 찾아."
적비성이 손바닥 위에 혼절한 여인처럼 누워있는 갸날픈 나물을 물끄러미 보다가 방다병이 쪼그려 앉아 하는 짓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바구니와 호미를 내팽겨치고 장검을 뽑아 들었다.
"비켜라."
방다병이 적비성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검을 든 모습에 방다병이 본능적으로 제 검에 손을 댔다. 하지만 적비성은 방다병에게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는 비풍백양을 미약하게 검에 싣고는 그대로 잡초인지 나물인지 모를 식물이 그득한 땅을 향해 내리쳤다.
콰광!
주변의 땅이 요동치며 흙먼지를 냈다. 풀떼기 조각이 하늘로 솟고 나무의 잎사귀들이 떨어지며 새들이 날아 올랐다.
"뭐하는 짓이야?"
방다병이 어이없어하며 버럭하자 적비성은 보란듯이 턱짓을 했다. 짜증이 묻은 표정으로 시선을 따라간 방다병은 금방 표정을 폈다. 방금 적비성이 내려친 곳의 흙이 뒤집혀 온갖 풀들이 뿌리째 밖으로 나와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비참하게 널브러진 패잔병들을 연상케 했다.
오호, 쓸만한 생각을 다 하네? 방다병의 얼굴에 금새 화색이 돌았다. 그래도 티를 내지 않으려 얼른 표정을 바꾼 방다병이 괜한 타박을 했다.
"풀 하나 뽑겠다고 주변을 다 날리다니 과연 적맹주답군."
사람을 날려도 주변은 그대로 두도록 공력을 집중시키는 비풍백양이 나물 뽑기에 이리도 적절할 줄이야.
"비풍백양을 이런데에다 쓰다니 금원맹 사람들이 알면 통탄하겠어."
말은 그렇게 해도 방다병은 수고를 던 기쁨에 히죽댔다. 둘은 곧 나란히 쪼그려 앉아 각자의 바구니에 나물과 비슷해 보이는 풀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이연화의 내력이 필요하지? 얼굴이 누렇게 떴어."
방다병이 반쯤 찬 바구니를 흔들어 나물을 고르게 흐트리며 물었다. 적비성은 별 반응을 하지 않고 제 바구니를 채웠다. 방다병은 적비성의 바구니를 흘끔 보고는 풀 몇 줄기를 골라냈다.
"그건 잡초. 아무튼 답지 않게 참으려고?"
"필요하면 말할거다."
방다병은 입을 삐죽해 보이고 다시 작업으로 돌아갔다.
적비성은 사실 지난 밤부터 몸상태가 좋지 않았다. 편히 잠들기 어려워 바깥으로 나온 그는 잘린 나무 밑둥에 앉아 홀로 술을 마시는 이연화를 발견했다. 이지러져가는 그믐달을 보며 술병을 기울이는 뒷모습이 사연이 있어 보였다. 보통 때 같았다면 모른 척 했을테지만 제 연형제라서인지 내력이 필요하다고 몸이 아우성을 쳐서인지, 적비성은 홀린 듯 이연화의 옆에 가서 섰다. 몸이 약하다더니 정말 못 느끼는지 이연화는 제 옆에서도 그리 불편해 보이지가 않았다. 실상은 이연화가 고통에 익숙해 있어 경맥이 감응하는 정도의 불편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쪽에 가까웠지만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이연화가 옆자리에 온 적비성을 올려다 보았다. 과음했는지 취기가 오른 얼굴이 붉었다.
"적맹주, 내력이 필요해서 온겁니까?"
"적절한 때가 아닌 것 같군."
"앉아요. 보시다시피 제가 곧게 설 처지가 아니라서요."
혀가 꼬인 듯 어눌한 발음이 새어나와 적비성은 눈썹을 찡그리고 반신반의하며 이연화의 앞쪽에 앉았다. 그믐달의 희미한 빛이 이연화의 얼굴을 비췄다. 적비성도 알아차릴만큼 눈이 발갰다. 교원로를 만나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몰라도 긴히 이야기를 나눈 이가 죽었다니 참담한 심경이라도 된 것인지 몰랐다.
정말로 적절치 않지만, 적비성은 자신이 이연화에게서 눈을 떼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청산유수로 말을 늘리던 남자의 얼굴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적비성은 타인의 슬픔은 물론 저 자신의 것도 마음에 담아본 적이 없었다. 살수로 키워진 때의 감정이라고는 끝없이 반복되는 공포와 분노 뿐이었고, 금원맹에 와서는 강해질 때마다 즐거이 여겼지만 이는 나를 죽일 놈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에서 오는 안도가 섞인 기이한 즐거움에 가까웠다. 적가네에서부터 감정은 생존에 하등 쓸모없고 거치적대는 방해물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어쩌면 적비성이 천기당 소당주가 작은 개처럼 왈왈대는 것을 쳐내지 않는 것도 그리 쉽게 희로애락을 드러내며 부딪히는 방다병이 낯설면서도 퍽 신기해서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연화는 조금 달랐다. 제 연형제는 속내를 알 수 없다는 점에서 그와 통하는 면이 있었다. 지금처럼 날 것의 감정이 묻어난 모습을 대하자니 적비성은 이연화에게도 저처럼 응어리진 과거가 있으리라 짐작할 뿐이었다.
이연화가 내력을 불어넣기 위해 팔을 뻗어 적비성의 가슴팍에 대었다. 상념을 깨운 행위에 적비성은 멈칫하며 그대로 이연화를 쳐다보았다.
"경맥이..."
"됐다. 술 취한 자의 내력은 달갑지 않아."
적비성은 비틀대며 일어서려는 이연화를 끌어 앉혔다. 그 바람에 이연화가 앞으로 고꾸라져 적비성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모양새가 되었다. 제 가슴께로 흐드러져 내리는 이연화의 머리카락을 본 적비성은 다소 충동적으로 이연화의 뒷머리를 손으로 감싸 제 어깨에 기대게 두었다. 이연화는 갑작스레 다가온 타인의 온기에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교완만을 품에 안고 눈물 흘린 엊그제의 일이 떠올랐다. 그녀의 죽음으로 한바탕 꿈처럼 더 아련해진 기억이 적비성의 품에서 되살아나는 듯 했다. 이연화는 결국 참지 못하고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눈물을 떨궜다. 적비성은 제 손등에 떨어진 눈물에 잠시 이연화를 내려다보았다. 어깨가 잔잔하게 떨고 있었다. 적비성은 조용히 이연화를 덮은 손에 살며시 힘을 주었다. 위로는 몰랐지만 침묵은 잘 아는 그였다.
"추한 꼴을 보였네."
잠시 뒤 몸을 추스린 이연화가 말했다. 혼잣말인지, 상대를 방다병으로 착각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후자에 생각이 이르자 적비성은 새삼 거리감을 느꼈고 그게 거슬렸다.
"적맹주, 못 본걸로 해주시지요. 추한 꼴을 보여드렸습니다."
"괜찮아."
드물게 즉각 대답하는 적비성에 이연화가 반사적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말. 낮춰도."
적비성은 괜히 말투에 방점을 찍고 몸을 돌렸다. 이연화는 어느새 성큼 걸어가는 적비성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느슨해진 정신에도 그의 속내가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
사고문에 모인 비술사들은 몹시 곤란한 처지에 빠졌다.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모여 70년 전의 비술사 장로가 비술로 잠궈 둔 지도를 풀어내지 못해 빛바랜 백지만 들고 전전긍긍하고 있어서였다. 아무래도 장로는 후대의 누군가가 당
자신의 비술을 풀만큼 열심히 수련하길 바랬던 모양이었다. 비술사들의 입에서 이런저런 핑계가 흘러나왔지만 결론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 누구도 현월도의 위치가 담긴 지도를 풀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정오가 되기 전에 한달음에 달려온 세 사람, 이연화와 방다병, 적비성은 여적 종이를 붙들고 있는 비술사들이 웅성대는 모습에 허탈함을 느껴야 했다.
"쓸모 없긴."
적비성이 볼일 없다는 듯 제일 먼저 몸을 돌렸다. 이연화 역시 돌아서려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걸음을 멈췄다.
"허문주, 제가 아는 비술사가 있는데 청해보면 어떨지요? 외지인같아 출입이 꺼려지면 제가 지도를 가지고 가서 만날 수도 있습니다."
"도성의 비술사들이 예 와있는데 추천할만한 비술사가 또 있습니까?"
"사실은 저도 장담은 못하지만 상황이 상황인만큼 급히 움직여야겠지요. 술법이 수준급이라 내용을 밝히지 않고 접근해볼만 한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이연화는 제 방에 날아들어온 나비 한 쌍을 떠올렸다. 비술 나비는 실체가 아니라 제 비술로 만든 것이 아닌 개체를 통제하기 어려웠다. 남이 만들어낸 술법체를 움직이게 하는 비술이 있긴해도 쓰임이 적고 다른 비술에 비해 은근히 까다로워 엔간한 술법을 통달한 이들이나 시간을 들여 연마했다. 애초에 염탐을 목적으로 한 시호의 행동을 바꾸고 제 나비와 돌려보내는 수준이라면 비술의 경지가 제법 높을 터였다. 현월도의 지도를 만든 원로 비술사도 술자리 여흥에서 다른 비술사가 만든 학에 다른 학을 더해 한 쌍이 연회장을 빙 돌게 해 감탄을 자아냈다는 일화가 있었더랬다. 이연화는 모한을 신뢰하지 않았으나 현월도의 행방을 찾는 일이 더 중하다고 판단했다.
허문주가 쉬이 결정하지 못하고 다른 비술사들과 소란스레 의논하는 내내 이연화 일행은 마당에 멀뚱히 서있어야 했다.
"비술사들이 못 풀다니 얼마나 대단한 술법이길래."
방다병이 걱정된다는 투로 말했다. 내심 초조했다가 대안을 찾은 이연화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창 전쟁 중일 때야 절박하게 수련하는 이가 많았지만, 천마왕에 결계를 두르고 난 후에는 해이해졌어. 그때만큼 위급하지가 않아서인지 모르겠지만."
"네가 말한 비술사가 풀 수 있을까? 그자도 지도를 못 풀면 어쩌지?"
"보옥이라도 잘 지켜야지."
방다병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게 쉽게 뺏기는데? 방다병의 의중을 눈치 챈 이연화가 얼르듯이 말했다.
"칠십 년이나 지났어. 각 문파에도 요마전을 기억하는 이가 드물지. 느슨해진 것도 무리가 아니야."
허문주를 감싸는 것인지 적비성을 두둔하는 것인지 모를 말에 방다병은 이연화를 흘끔 쳐다보았다. 아침부터 적비성에게 말이 가벼워지더니 이연화가 좀 더 부드러워진 것 같기도 하고. 방다병은 곁눈으로 적비성을 쳐다 보았다. 팔짱을 끼고 선 적비성은 평소처럼 굳은 표정이었으나 혈색이 좋았다. 아침엔 누렇더니, 이연화가 내력을 준 모양이었다. 방다병은 어쩔 수 없다 생각하면서도 신경이 쓰여 괜히 이연화 곁에 더 바짝 붙어 섰다.
"오래 기다리시게 하여 죄송합니다. 지도만 풀 수 있다면 외지인이 대수입니까. 다만 혹시 모르니 그 자리에 적맹주와 방소협이 함께 하면 안심이겠습니다."
허문주의 말에 세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
객잔에 들어서 모한을 찾으러 왔다 하니 종업원이 귀한 손님을 맞은 양 크게 굽신대며 안내를 했다. 방다병은 저도 못 받아본 대접이라 눈썹을 올리며 이연화에게 속닥댔다.
"모한이라는 자가 대단한 인물인가봐?"
"돈은 많아 보이더군."
2층 객실에 들어서자 난향이 짙게 풍겼다. 모한이 병풍 뒤쪽에서 걸어나왔다. 감청색의 장옷이 고급스러워 보였다. 어깨에 드리운 백발과도 퍽 잘 어울렸다. 모한은 이연화를 보며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또 뵙는군요. 이번에는 동행분들도 오셨군요."
모한이 방다병과 적비성에게 인사를 했다. 묘한 분위기가 고수라는 비술사와 어울려 두 사람은 지도를 풀 수 있을 것 같은 기대로 정중하게 답배를 했다. 모한은 이연화의 연형제일 것이 분명한 두 사내를 찬찬히 뜯어 보았다. 모한, 아니 현야의 눈에는 둘 다 애송이나 다름 없었으나 한 명은 그 중에서도 더 앳되고 팔팔했다. 이연화에게 딱 붙어 떨어지지 않는 꼴을 보니 이상이의 요력을 밀어 누르고 경맥을 통한 자인 듯 했다. 다른 하나는 인상이 날카롭고 강인해 보였다. 두 사내가 이연화의 연형제랍시고 곁을 지키는 모양새가 현야는 몹시 거슬렸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현야는 그들을 보며 손을 튕겨 둘의 머리를 날려버리는 상상을 했다. 오른손 엄지가 제 중지를 핥듯이 스쳐갔다. 지금은 때가 아니지만 언젠가 거슬리는 것들을 치워 버리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으로서는 남은 보옥이 다 있어야 결계를 깰 수 있다. 그리해야 이상이를 칠곡산으로 불러들일 수 있을 터였다. 현야는 냉정을 되찾았다.
"이선생은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습니까? 일행이 있으신데 일전의 이야기는 아니실테지요."
모한이 웃으며 하는 말에 방다병의 눈썹이 꿈찔댔다. 적비성은 반응이 없었지만 모한이라는 자가 이연화와 둘만 아는 이야기를 꺼내면서 자신과 방다병을 묘하게 밀어낸다는 느낌을 받았다.
둘만 있었다면 나비 이야기를 꺼냈겠으나 이연화는 되려 모한이 나비를 언급하지 않게 막아야할 입장이었다. 제 연형제들 앞에서는 비술은 커녕 무공도 할 줄 모르는 의원일 뿐이었다. 그래서 이연화는 얼른 지도를 내밀었다.
"비술로 봉인한 지도입니다. 모공자의 높은 술법으로 이를 풀 수 있을 것 같아 긴히 부탁드리러 왔습니다."
모한은 지도를 받아들어 이리 저리 살폈다. 손에 올려 다른 손으로 기운을 느끼니 과연 단순한 봉인은 아니었다.
"간단히 걸어 잠그진 않았군요. 중요한 자료인가봅니다."
이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한은 본능적으로 지도와 저를 가둔 결계가 관련이 있음을 알았다. 은둔하던 이상이가 직접 나섰고, 보옥을 갖고 있을 천기당의 소당주와, 보옥을 되찾아야 하는 금원맹 맹주가 같이 움직인다면 이 지도가 예사로운 물건이 아닐 터였다. 모한은 한 손으로 허공에 작게 진을 그려 다른 손 위에 놓인 지도로 보내 스며들게 했다. 지도가 절로 펴지더니 빛바랜 종이 위에 먹으로 그린 지형도와 그림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모한을 제외한 세 사람이 놀랍다는 표정으로 모한과 지도를 번갈아 보았다. 도성의 뛰어나다는 비술사들이 이틀을 쓰고도 풀지 못한 지도를 모한은 아무렇지도 않게 즉석에서 풀어냈다.
"북쪽의 선기탑이로군요."
태연하게 말하는 모한에 다른 이들이 두번째로 놀랐다.
"여기를 아십니까?"
"수련을 하며 가 본 적이 있습니다. 거긴 중원의 협정에 속하지 않는 요마들이 들끓는 곳이라 고산지대의 지형만큼이나 주변이 험하지요. 선기탑은 옛적에 비술사들이 지었다고 하나 지금은 어찌 되었는지 모릅니다."
백여년 전에 비술에 요력을 끌어다 쓸 방도를 연구하려는 사파들이 있었다. 정파에서는 이를 배척했으나 그들은 인적이 없는 북부 고산지대에 지하까지 뚫은 탑을 쌓고 들어갔다. 요력을 연구하다가 주화입마로 죽었다거나, 근방의 요마에게 몰살 당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 후로 그들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현야가 이를 아는 이유는 백여년 전에 주제도 모르고 덤벼온 선기탑의 요마를 가루로 만든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기탑은 버려진지 오래야."
이연화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현월도를 숨기기에 적절한지 아닐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방다병은 먹이 다 드러난 종이를 들고 그림을 살펴 보았다. 현월이라는 이름답게 초승달처럼 곡선을 그리며 굽어진 단도에는 북두칠성 모양으로 작은 보석들이, 손잡이는 투박한 가운데 둥글게 세공한 보석이 박혀 있었다. 현월도에 건 술법이 녹아 있을 터였다.
"선기탑은 비술사들이 쳐둔 비술 결계와 진이 가득하다고 하지요. 하지만 그리 까다로운 곳은 아닙니다."
모한의 말투에 묘한 자신감이 어려 있었다.
"그곳에 가본 사람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모한이 이연화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묘한 위화감을 느끼면서도 이연화는 눈 앞의 사내가 이 여정에 필요한 존재일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딘지 께름칙했다.
"모공자, 비술도 수준급이더니 선기탑도 어렵지 않다 하시는군요."
"평범한 실력입니다. 비술을 건 선기탑에 숨겨두었을 정도면 당신들이 찾으려는 물건도 술법 없이는 가져오지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비술사는 최후의 결계를 걸어 물건을 옮기거나 쓰지 못하게 손을 썼을겁니다. 이 지도처럼요."
이연화는 생각에 잠긴 듯 말을 아꼈다. 비밀스러운데다 반인반요인 모한을 동행시키는 일이 괜찮을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모공자, 괜찮다면 선기탑에 동행할 생각이 있으십니까?"
방다병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적비성도 팔짱을 끼고 모한의 얼굴을 보았다. 모한은 눈을 내리깔고 웃었다. 그리고는 이연화를 응시했다. 마치 다른 사람은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제가 필요할거라 하지 않았습니까."
모한의 정중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오만한 말투가 자신있게 들렸다. 이연화는 모한의 눈을 마주 쳐다보았다. 모한의 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현야가 길게 숨을 내뱉었다. 이상이가 있다면 선기탑이든 어디든 상관 없었다.
+) 고마워.
연화루 이연화 방다병 적비성 현야 성의 증순희 초순요 다병연화 비성연화 현야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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