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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22 23:58
망천화처럼 이연화 해독할 수 있는 약초가 있는데, 형질을 바꾸는 부작용이 있어서 떨떠름해하던 이연화와 그런 게 뭐가 중하냐 하던 주변사람들이 우당탕하는 게 보고싶다로 시작했던 거 2부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방시문의 거처에 도착해, 방다병은 술기운을 물리치려 차를 마시다가 잠시 탁자에 얼굴을 박고 잠이 들었다. 상대에게 술을 잔뜩 먹이려면, 자신 역시 어느 정도 박자를 맞춰 마셔줄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어깨를 흔드는 손길에, 방다병이 눈을 감은 채 나른한 소리를 냈다.
"방다병, 너 괜찮아? 힘들면 내력으로 날려."
"으응...괜찮아."
방다병이 눈을 감은 채 웅얼거렸다. 졸릴 뿐이지 딱히 괴롭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술기운 탓에 제대로 내력을 운용할 자신도 없었다. 낮은 한숨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곧 단단한 손이 상체를 번쩍 안아올렸다. 방다병의 눈이 반쯤 뜨였다. 흔들거리는 몸이 어쩐지 재미있게 느껴지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단단히 취한 듯했다. 이연화는 괜히 히죽거리던 방다병을 침상에 눕히고는, 그 몸 위로 이불을 덮어주었다. 상대의 얼굴이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 방다병이 손을 내밀어 그 팔을 잡았다. 이연화가 퍼뜩 돌아보았다.
"왜 그래? 뭐 필요해? 물 줘?"
"필요 없어. 내가 무슨 애인 줄 알아."
방다병이 입을 내밀고는 꿍얼거렸다. 세 공자들을 속이기 위해 뱉었던 말이 떠올랐다. 그 사람 눈에 저는 별것 아닌 어린애로밖에 안 보이겠죠. 방다병은 갑자기 조금 침울해졌다. 그 문장에는 진실의 편린이 담겨 있었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이연화와 자신의 사이에 존재하는 경험과 실력의 차이를 따라잡기란 지난한 일이었다. 이연화의 눈에, 나는 언제까지고 그냥 꼬마로밖에 비치지 않을까? 방다병의 입꼬리가 시무룩하게 처졌다. 눈썹을 살짝 올린 채 방다병을 바라보다, 이연화는 피식 웃고는 상대의 이마를 손끝으로 톡 건드렸다.
"애는 술을 못 먹으니 이럴 일도 없지.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발전했어, 방 대협. 오늘 그 공자들을 아주 멋지게 속이던데. 혼자 유람하는 사이 많이 배웠나봐."
드물게 듣는 칭찬에, 방다병은 조금 머쓱한 심정으로 이연화의 팔을 주물거렸다. 평소라면 앞머리를 휘날리며 자신의 진보를 뽐냈겠지만, 어쩐지 지금은 마냥 기쁘다기보다 묘하게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그냥...연기해야 해결할 수 있는 일들도 많았으니까. 아직 갈 길이 멀어." 방다병이 웅얼웅얼 대답하자, 이연화가 어이없는 눈웃음을 띤 채 물었다.
"항상 자랑스러운 방 대협처럼 굴더니, 갑자기 왜 겸손한 척이야? 넌 부도삼성도 이겼잖아. 이제 협객으로서도 꽤 유명해졌고. 어디까지 가고 싶은 건데? 아직도 무림의 정상에 서고 싶어?"
"난 네 옆에 서고 싶어."
방다병이 반사적으로 진심을 꺼냈다. 술기운의 마음과 말 사이의 거름망을 치워버린 것처럼,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이연화의 얼굴이 굳어졌다. 잡힌 손목의 맥이 살짝 빨라지면서, 반듯한 미간으로 얕은 골이 생겼다. 왜 심각해졌지? 방다병이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생각했다. 잠시 시선을 돌린 채 눈가를 만지다가, 이연화는 쓴 기운이 배인 미소를 띠고는 낮게 읊조렸다.
"내 옆은 힘든 일밖에 없어, 방소보."
"지금까진 뭐 쉬운 일밖에 없어서 너랑 있었던 줄 알아?"
코웃음을 치며, 방다병이 우습지도 않다는 투로 받았다. 이연화가 그 말에 눈을 도르륵 굴렸다. 그도 그렇네. 그 머릿속을 스친 생각이 손에 잡힐 것 같았다. 방다병이 벙긋 웃었다. 각인 이전에도 상대의 속내를 짐작하는 데에는 한결 도가 터 있었으나, 각인한 후로는 훨씬 본능적인 차원에서 이연화의 기분과 생각을 짐작할 수 있었다. 실실거리는 방다병을 향해, 이연화가 꺼림칙한 표정을 짓고는 잡힌 팔을 대충 흔들었다.
"뭐야, 왜 갑자기 웃고 그래. 이거나 좀 놓고 얘기해."
"싫어. 혼자 두고 갈 거잖아."
방다병이 이연화를 잡아당기며 툴툴댔다. 여러 가지 말들이 두서 없이 피어올라 목구멍을 맴돌았다. 오늘도 같이 자자. 너랑 자고 나면 아침에 가뿐해서 좋아. 각인통 있다고 했던 건 다 거짓말이 아니었어, 각인한 이후에 제대로 자지 못한 날이 벌써 며칠인지 알아? 날 혼자 두고 가도 상관없지만, 적비성이랑 둘만 자면 안 돼. 이연화, 나 너랑 같이 있고 싶어. 대체 무슨 말부터 먼저 꺼내야 할지 몰라 눈썹을 찌푸린 방다병을 어이없게 바라보다, 이연화는 청년의 손을 탁 떨치고는 방 내부를 휘 손짓했다.
"방다병, 너 여기가 네 방이라고 착각한 거야? 여기 내 방이야. 내가 어디로 가."
"그래?"
방다병이 눈을 깜박깜박했다. 이연화의 인도에 따라 걸었을 뿐, 자신이 어디로 들어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이연화가 억울하고도 답답한 한숨을 푹 쉬며 뒷목을 문질렀다. "그래. 분명 오늘도 아비가 함께 자자고 쳐들어올 게 뻔한데, 너를 네 방에서 혼자 재웠다간 무슨 일이 생기겠어? 새벽에 술이 깨서 쳐들어오거나, 아니면 다음날 나를 죽도록 원망하며 괴롭히거나 둘 중 하나겠지. 그런 뒷감당을 할 마음은 없으니, 자. 네 팔이나 내놔." 쏘아붙이듯 말한 이연화가 한 손을 불쑥 내밀었다.
사실 방다병은 이연화의 말을 반 정도밖에 알아듣지 못했다. 속도가 빠르기 때문이기도 했고, 취기 때문에 두뇌의 처리 속도가 현저히 떨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상대가 자신을 혼자 재우지 않으리란 사실은 명백해 보여, 방다병은 다시 히죽 웃고는 오른팔을 내주었다.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방다병을 흘겨본 이연화가, 그 팔을 탁 낚아채 흰 끈을 묶었다. "하여간 괴상한 녀석이야. 세상 사람의 대부분이 평안한 삶을 바라는데, 너는 어째 이 모양이야?" 불평하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이연화가 매듭을 두어 번씩 꼼꼼하게 지었다. 방다병이 뭐라 대꾸하려던 때, 벌컥 열린 문에서 바깥 바람이 들어왔다.
방다병의 시야로, 곧 밤과 비슷한 색깔의 옷을 입은 금원맹주가 나타났다. 늘어진 방다병을 힐끗 본 얼굴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묘하게 상쾌해 보이는 남자를 향해, 이연화가 눈을 가늘게 떴다.
"너, 정말 자르고 온 건 아니지?"
"자르진 않았다. 꺾었을 뿐이지."
적비성이 매우 당당하게 말했다. 아이고. 이연화가 눈을 감으며 잠시 이마를 짚었다. 금원맹주는 어깨를 으쓱하곤 천연덕스럽게 덧붙였다. "네 의견을 십분 반영한 처사였어." 뻔뻔한 태도를 향해, 이연화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질책했다.
"내 의견은 괜히 건드리지 말라는 쪽이었잖아, 대체 뭘 반영한 건데? 쓸데없이 폭력을 쓴 일에 고마워하진 않을 거야, 적 맹주. 내 소맷자락이 뭐라고 다른 사람 손가락을 부러뜨려."
"네게는 쓸데없을지 몰라도, 내게는 아니야. 전에도 말했잖나, 난 널 막지 않는다. 다만 내가 하려는 일도 막지 마."
"그런 약속은 못해. 범죄자와 그 친구들이었으니 그냥 뒀지, 평범한 사람들이었으면 이미 한바탕 싸웠어. 널 여기 들이는 일도 없었겠지."
냉랭하게 쏘아붙이며 고개를 돌리는 이연화의 앞으로, 적비성이 한걸음에 성큼 다가섰다. "뭐야?" 이연화가 괴이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신경질적인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적비성은 이연화의 목과 어깨 근처를 잠시 킁킁거렸다. "왜 그래." 이연화가 미간을 찌푸린 채 물러나려 했지만, 적비성은 그 어깨를 턱 잡고는 조금 더 냄새를 맡았다. 이내 그 한쪽 입매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잡스러운 냄새는 안 남았군."
"그 사람들하고 맨살을 맞댄 것도 아닌데 무슨 냄새가 배겠어."
이연화가 퍽 유난을 떤다는 투로 대꾸하며 적비성의 어깨를 손등으로 탁 쳤다. 이유야 어찌됐든, 가까이 다가붙은 두 사람을 지켜보던 방다병의 얼굴이 우그러졌다. "둘만 그러지 마!" 상당히 원초적으로 요구하자, 적비성이 괴상한 시선을 던졌다.
"저 녀석은 왜 퇴행한 것처럼 구는 거냐? 술자리에선 좀 봐줄 만하더니."
"취하면 다들 그렇지, 뭐. 피곤해, 너도 얼른 알아서 묶고 누워."
이연화가 대충 핀잔 주듯 손짓하고는 발길을 돌렸다. 비죽 내민 입을 바로 넣지는 않았지만, 방다병은 일단 그들 사이의 거리가 조금 멀어졌다는 사실에서 위안을 얻었다. 겉옷을 벗어두고 침상으로 다가오는 두 사람을 지켜보다-이제 겨우 두 번째인데, 적비성과 이연화가 자신의 눈앞에서 잘 준비를 마친 상황이 썩 어색하지 않았다-청년은 자기도 모르게 깜박 잠이 들었다.
그날 새벽, 방다병은 잠깐 눈을 떴다.
코로 엷은 체취가 맡아졌고, 몸으로는 온기가 느껴졌다. 편안하면서도 은근히 들뜬 기분에, 방다병은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올리고는 잠시 상황을 파악했다. 반듯하게 누운 이연화가 바로 가까이 있었다. 어제도 함께 잠자리에 들었던가? 잠시 기억을 되돌리다, 방다병은 자신의 손목을 묶어주던 이연화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푸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오랜만에 취해서인지 여태 머리가 뿌연 느낌이었다.
그래도, 그런 자들이 모인 술자리에 이연화만 들여보내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지. 하필 또 백의 대협처럼 입고 나타나서는. 방다병이 뚱하게 생각했다. 필사적인 기지를 발휘했던 순간을 회상하면 모골이 송연해졌다. 물론 이연화가 그 안에서 다치거나 크게 해를 입을 가능성은 적었지만, 이것은 단순히 강하고 약한 일에 대한 문제가 아니었다.
"바보 이연화."
방다병이 옆을 돌아보며 육성 없이 속삭였다. 고요히 잠든 상대는 물론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약간 혼몽한 기분으로, 청년은 이연화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뜯어보았다. 감긴 속눈썹 아래로 쭉 뻗은 콧대와 다물린 입술이 보였다. 턱과 목으로 이어지는 유려한 곡선을 멍하게 응시하다, 방다병은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약간 벌렸다. 그 목덜미를 씹었을 때 울컥울컥 새어나오던 체취가 불현듯 기억난 탓이었다. 그날 이후, 이연화는 당연하게도 그때만큼 짙은 체취를 흘린 적이 없었다. 그러나 방다병은 그 연꽃 냄새에 질식할 것처럼 휩싸였던 순간을 똑똑히 기억했다.
-아, 으...방...방소보...?
-잠깐, 이거 꿈 아니-.
-아, 이상해. 이상....
상대의 낮은 신음소리가 환청처럼 귓전을 스쳤다.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 방다병의 몸으로 은은히 열기가 올랐다.
때가 좋지 않게도, 이연화가 방다병을 향해 슬쩍 돌아누웠다. 방다병이 화들짝 놀라 눈을 깜박였다. 이연화의 얼굴은 여전히 평화로웠다. 자세가 바뀌면서 아주 살짝 열린 입술 사이로, 가늘고 차분한 숨결이 흘러나왔다. 방다병의 눈길이 부지불식간에 그 입술로 떨어졌다.
어느새 빠르고 거세진 심장박동이, 가슴뿐 아니라 머리까지 쿵쿵 울렸다. 방다병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평소에도 그를 보며 무언가를 참을 때가 많았지만, 지금은 뭔가 이상했다. 희락기도 아니었는데 어쩐지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아직 취기가 모두 가시지 않았기 때문일까? 하지만 방다병은 취했다는 이유로 크게 후회할 짓을 저질러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왜-정신없이 자문하다가, 청년은 어느새 입술로 부드러운 감촉이 닿을 듯 말 듯 스쳤을 때 불에 데인 듯 황급히 물러났다. 온몸의 피부가 여러 이유로 후끈 달아올랐다. 경악에 휩싸여 자신의 입을 턱 막고, 방다병은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방다병, 네가 미쳤구나! 언제 그렇게 가까이 다가갔지? 내가 다가간 게 맞겠지? 말도 안 돼, 내가 아무리 이연화를 마음에 두었다 해도 자는 사람에게 입 맞추려는 무도한 짓을 했다고? 차라리 꿈이길 바라며 허벅지를 꼬집었다가, 방다병은 더욱 참담해졌다. 어쩐지 어머니가 말하던 '쓰레기 같은 놈' 혹은 '절제라곤 모르는 무뢰배'가 된 기분이었다. 정신 차려, 방다병! 내심 스스로를 열심히 두들겨 패며, 방다병은 이연화를 등지는 방향으로 홱 돌아누웠다. 높고 가느다란 나뭇가지 위에서 잠을 청하는 동물처럼, 청년은 침상 가장자리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채 억지로 눈을 감았다.
옆에서 불만스러운 신음이 들려왔다. 한쪽 눈만 살짝 뜨고 어깨너머를 돌아보니, 이연화의 미간으로 얕은 골이 생겨 있었다. 갑자기 멀어진 온기가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연화가 추워하는 일은 원치 않아, 방다병은 이연화를 등진 채 조금 더 안쪽으로 몸을 옮겼다. 체온이 다시 가까워지자, 이연화는 뒤척이던 것을 멈추고 방다병의 등에 이마를 부볐다. 방다병이 눈을 질끈 감았다. 마음 같아서야 당장 돌아누워 상대를 끌어안고 싶었으나, 지금은 도무지 스스로를 신뢰할 수가 없었다. 내심 피눈물을 삼키면서, 방다병은 고행자의 태도로 가슴 앞에 양손을 모은 채 머릿속으로는 군자의 도를 읊었다. 이렇게 깨어 있느니, 차라리 누군가에게 점혈이라도 당해 기절하고 싶었다.
다음날, 방다병은 비교적 말끔해진 몸과 그렇지 못한 정신으로 깨어났다(다시 잠들 때까지 한 시진 반이나 걸린 일은 그리 놀랍지도 않았다). 이연화는 풀이 죽은 방다병을 조금 이상한 눈으로 보았으나, 청년이 일부러 부산스레 움직이며 나갈 채비를 하자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선화루에서 약간의 실랑이를 거쳤지만, 방다병은 결국 귀장으로 가는 통행증을 받아냈다. 선화루의 지배인은 매우 난처한 얼굴로 '귀장 통행증은 손님이 먼저 요청하여 받는 것이 아니라, 선화루에서 적합한 사람을 골라 발급해주는 것'이라고 구구절절 설명했다. 방다병은 집요하고 버릇없는 공자를 썩 훌륭하게 연기함으로써-"지금 본 공자를 무시하는 겐가? 내가 어제 이곳에서 쓴 돈이 얼마인지 아나? 내가 어제 함께 술을 마신 공자들보다 떨어지는 부분이 뭐란 말인가? 뭣보다 나는 그 공자들의 호의로 귀장에 대해 알게 된 것인데, 자네가 이리 나오면 그분들을 무시하는 일이 되지 않겠나? 자네가 그리 대단한가?"-선화루 지배인의 지긋지긋한 눈길과 함께 목패를 받아냈다.
중년인은 이 귀장의 존재와 통행증에 대해 함부로 발설했다간 무시무시한 일이 생기기라 경고했으나, 정말 무시무시한 일을 나이에 비해 많이 겪어본 청년은 내심 콧방귀를 뀌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다병은 42라는 숫자가 새겨진 목패를 살피다 적비성을 돌아보았다. 남자는 전서구에게서 서신을 전달받던 참이었다.
"아비, 동행인은 한 명만 데려갈 수 있대. 장소는 알아냈으니까, 필요하면 경공으로 몰래 들어와. 계곡 근처의 버려진 사당이야."
"귀장이란 이름에 어울리는 장소네."
이연화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방다병은 잠시 그 입술과 목덜미를 바라보다, 제발이 심하게 저려 고개를 홱 돌렸다. 작은 쪽지를 살피던 적비성이 말했다.
"무안이 장부에서 품목을 확인했는데, 선화루에서 사간 약들은 대부분 사람의 기분을 들뜨게 만들거나 절제력을 잃게 하는 효과가 있다는군. 미약한 중독성이 있고, 장기적으로 복용하면 평소에도 성미가 급하거나 부주의해지는 모양이야."
"음, 선화루가 잘나가던 이유는 무용단 말고도 또 있었네."
이연화가 슬쩍 비웃듯 말했다. 방다병의 눈이 둥그레졌다.
"그게 무슨...그럼 선화루에서 그 약을 손님들한테 썼다는 거야?"
"그렇겠지. 한 4년 전쯤인가? 비슷한 수법을 쓰는 기루를 본 적이 있어. 술이나 음식에 약을 조금씩 타서 손님들한테 먹이는 거지. 기분이 좋아지고 절제력이 없어지면, 돈을 펑펑 쓸 확률이 높아지잖아. 약값이 싸지 않을 테니, 모든 이에게 그러진 않았을 거야. 자제력을 잃으면 약값보다 훨씬 많은 돈을 뿌릴 게 확실한 사람들에게 썼겠지. 어제 우리가 만난 공자들처럼 말이야."
"그래서였구나!"
방다병이 갑자기 크게 외쳤다. 이연화와 적비성이 흠칫하고, 금원맹주의 팔에 앉았던 전서구가 놀라 푸드득 날아갈 정도였다. 두 명과 한 마리의 정신건강에 신경 쓸 새도 없이, 방다병은 찜찜한 비밀 하나를 풀어낸 기분으로 밝은 표정을 지었다. 내 마음이 금수처럼 변한 게 아니라, 괴상한 약 때문에 조절을 못했던 거구나! 방다병은 가슴에 한 손을 얹은 채 눈을 감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눈을 떴을 때에는, 이연화와 적비성이 병증을 의심하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다병이 머리를 만지며 어색하게 웃었다.
"별건 아닌데...어제 단순히 취했을 때하고는 조금 다르다고 느꼈거든. 술이 독해서 그런가 싶었는데, 아니었네. 넌 아무렇지도 않았어?"
괜히 아비를 툭 치며 묻자, 적비성이 코웃음과 함께 이죽거렸다.
"내가 자제력을 잃었다면, 어제 그놈들은 죽었을 거다."
"사람 쉽게 죽이는 게 참 자랑이다, 적 맹주. 어제 얘는 그놈들한테 맞춰주느라 너보다 훨씬 많이 마셨어. 당연히 영향을 더 크게 받았겠지. 방소보, 내 눈에는 그냥 취한 것 같아서 자게 뒀는데. 불편하면 말하지 그랬어?"
적비성에게 핀잔을 준 이연화가, 방다병을 향해 가볍게 타박하듯 건넸다. 방다병이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문제의 순간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연화는 자신의 존엄을 충분히 도운 셈이었다. "나도 몰라서 그랬지. 난 괜찮으니까 어서 귀장이 열린다는 곳에 가 보자. 신춘광에게 약을 판 사람을 조사하면, 증좌를 찾고 심악의 행방도 알아낼 수 있을지 몰라." 방다병이 과한 의욕을 담아 말했다. 이연화는 방다병이 왜 이리 산만하게 구는지 의심스러운 듯 고개를 갸웃했으나, 등을 떠미는 손길에 입을 다물고 발을 옮겼다.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방시문의 거처에 도착해, 방다병은 술기운을 물리치려 차를 마시다가 잠시 탁자에 얼굴을 박고 잠이 들었다. 상대에게 술을 잔뜩 먹이려면, 자신 역시 어느 정도 박자를 맞춰 마셔줄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어깨를 흔드는 손길에, 방다병이 눈을 감은 채 나른한 소리를 냈다.
"방다병, 너 괜찮아? 힘들면 내력으로 날려."
"으응...괜찮아."
방다병이 눈을 감은 채 웅얼거렸다. 졸릴 뿐이지 딱히 괴롭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술기운 탓에 제대로 내력을 운용할 자신도 없었다. 낮은 한숨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곧 단단한 손이 상체를 번쩍 안아올렸다. 방다병의 눈이 반쯤 뜨였다. 흔들거리는 몸이 어쩐지 재미있게 느껴지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단단히 취한 듯했다. 이연화는 괜히 히죽거리던 방다병을 침상에 눕히고는, 그 몸 위로 이불을 덮어주었다. 상대의 얼굴이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 방다병이 손을 내밀어 그 팔을 잡았다. 이연화가 퍼뜩 돌아보았다.
"왜 그래? 뭐 필요해? 물 줘?"
"필요 없어. 내가 무슨 애인 줄 알아."
방다병이 입을 내밀고는 꿍얼거렸다. 세 공자들을 속이기 위해 뱉었던 말이 떠올랐다. 그 사람 눈에 저는 별것 아닌 어린애로밖에 안 보이겠죠. 방다병은 갑자기 조금 침울해졌다. 그 문장에는 진실의 편린이 담겨 있었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이연화와 자신의 사이에 존재하는 경험과 실력의 차이를 따라잡기란 지난한 일이었다. 이연화의 눈에, 나는 언제까지고 그냥 꼬마로밖에 비치지 않을까? 방다병의 입꼬리가 시무룩하게 처졌다. 눈썹을 살짝 올린 채 방다병을 바라보다, 이연화는 피식 웃고는 상대의 이마를 손끝으로 톡 건드렸다.
"애는 술을 못 먹으니 이럴 일도 없지.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발전했어, 방 대협. 오늘 그 공자들을 아주 멋지게 속이던데. 혼자 유람하는 사이 많이 배웠나봐."
드물게 듣는 칭찬에, 방다병은 조금 머쓱한 심정으로 이연화의 팔을 주물거렸다. 평소라면 앞머리를 휘날리며 자신의 진보를 뽐냈겠지만, 어쩐지 지금은 마냥 기쁘다기보다 묘하게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그냥...연기해야 해결할 수 있는 일들도 많았으니까. 아직 갈 길이 멀어." 방다병이 웅얼웅얼 대답하자, 이연화가 어이없는 눈웃음을 띤 채 물었다.
"항상 자랑스러운 방 대협처럼 굴더니, 갑자기 왜 겸손한 척이야? 넌 부도삼성도 이겼잖아. 이제 협객으로서도 꽤 유명해졌고. 어디까지 가고 싶은 건데? 아직도 무림의 정상에 서고 싶어?"
"난 네 옆에 서고 싶어."
방다병이 반사적으로 진심을 꺼냈다. 술기운의 마음과 말 사이의 거름망을 치워버린 것처럼,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이연화의 얼굴이 굳어졌다. 잡힌 손목의 맥이 살짝 빨라지면서, 반듯한 미간으로 얕은 골이 생겼다. 왜 심각해졌지? 방다병이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생각했다. 잠시 시선을 돌린 채 눈가를 만지다가, 이연화는 쓴 기운이 배인 미소를 띠고는 낮게 읊조렸다.
"내 옆은 힘든 일밖에 없어, 방소보."
"지금까진 뭐 쉬운 일밖에 없어서 너랑 있었던 줄 알아?"
코웃음을 치며, 방다병이 우습지도 않다는 투로 받았다. 이연화가 그 말에 눈을 도르륵 굴렸다. 그도 그렇네. 그 머릿속을 스친 생각이 손에 잡힐 것 같았다. 방다병이 벙긋 웃었다. 각인 이전에도 상대의 속내를 짐작하는 데에는 한결 도가 터 있었으나, 각인한 후로는 훨씬 본능적인 차원에서 이연화의 기분과 생각을 짐작할 수 있었다. 실실거리는 방다병을 향해, 이연화가 꺼림칙한 표정을 짓고는 잡힌 팔을 대충 흔들었다.
"뭐야, 왜 갑자기 웃고 그래. 이거나 좀 놓고 얘기해."
"싫어. 혼자 두고 갈 거잖아."
방다병이 이연화를 잡아당기며 툴툴댔다. 여러 가지 말들이 두서 없이 피어올라 목구멍을 맴돌았다. 오늘도 같이 자자. 너랑 자고 나면 아침에 가뿐해서 좋아. 각인통 있다고 했던 건 다 거짓말이 아니었어, 각인한 이후에 제대로 자지 못한 날이 벌써 며칠인지 알아? 날 혼자 두고 가도 상관없지만, 적비성이랑 둘만 자면 안 돼. 이연화, 나 너랑 같이 있고 싶어. 대체 무슨 말부터 먼저 꺼내야 할지 몰라 눈썹을 찌푸린 방다병을 어이없게 바라보다, 이연화는 청년의 손을 탁 떨치고는 방 내부를 휘 손짓했다.
"방다병, 너 여기가 네 방이라고 착각한 거야? 여기 내 방이야. 내가 어디로 가."
"그래?"
방다병이 눈을 깜박깜박했다. 이연화의 인도에 따라 걸었을 뿐, 자신이 어디로 들어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이연화가 억울하고도 답답한 한숨을 푹 쉬며 뒷목을 문질렀다. "그래. 분명 오늘도 아비가 함께 자자고 쳐들어올 게 뻔한데, 너를 네 방에서 혼자 재웠다간 무슨 일이 생기겠어? 새벽에 술이 깨서 쳐들어오거나, 아니면 다음날 나를 죽도록 원망하며 괴롭히거나 둘 중 하나겠지. 그런 뒷감당을 할 마음은 없으니, 자. 네 팔이나 내놔." 쏘아붙이듯 말한 이연화가 한 손을 불쑥 내밀었다.
사실 방다병은 이연화의 말을 반 정도밖에 알아듣지 못했다. 속도가 빠르기 때문이기도 했고, 취기 때문에 두뇌의 처리 속도가 현저히 떨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상대가 자신을 혼자 재우지 않으리란 사실은 명백해 보여, 방다병은 다시 히죽 웃고는 오른팔을 내주었다.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방다병을 흘겨본 이연화가, 그 팔을 탁 낚아채 흰 끈을 묶었다. "하여간 괴상한 녀석이야. 세상 사람의 대부분이 평안한 삶을 바라는데, 너는 어째 이 모양이야?" 불평하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이연화가 매듭을 두어 번씩 꼼꼼하게 지었다. 방다병이 뭐라 대꾸하려던 때, 벌컥 열린 문에서 바깥 바람이 들어왔다.
방다병의 시야로, 곧 밤과 비슷한 색깔의 옷을 입은 금원맹주가 나타났다. 늘어진 방다병을 힐끗 본 얼굴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묘하게 상쾌해 보이는 남자를 향해, 이연화가 눈을 가늘게 떴다.
"너, 정말 자르고 온 건 아니지?"
"자르진 않았다. 꺾었을 뿐이지."
적비성이 매우 당당하게 말했다. 아이고. 이연화가 눈을 감으며 잠시 이마를 짚었다. 금원맹주는 어깨를 으쓱하곤 천연덕스럽게 덧붙였다. "네 의견을 십분 반영한 처사였어." 뻔뻔한 태도를 향해, 이연화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질책했다.
"내 의견은 괜히 건드리지 말라는 쪽이었잖아, 대체 뭘 반영한 건데? 쓸데없이 폭력을 쓴 일에 고마워하진 않을 거야, 적 맹주. 내 소맷자락이 뭐라고 다른 사람 손가락을 부러뜨려."
"네게는 쓸데없을지 몰라도, 내게는 아니야. 전에도 말했잖나, 난 널 막지 않는다. 다만 내가 하려는 일도 막지 마."
"그런 약속은 못해. 범죄자와 그 친구들이었으니 그냥 뒀지, 평범한 사람들이었으면 이미 한바탕 싸웠어. 널 여기 들이는 일도 없었겠지."
냉랭하게 쏘아붙이며 고개를 돌리는 이연화의 앞으로, 적비성이 한걸음에 성큼 다가섰다. "뭐야?" 이연화가 괴이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신경질적인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적비성은 이연화의 목과 어깨 근처를 잠시 킁킁거렸다. "왜 그래." 이연화가 미간을 찌푸린 채 물러나려 했지만, 적비성은 그 어깨를 턱 잡고는 조금 더 냄새를 맡았다. 이내 그 한쪽 입매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잡스러운 냄새는 안 남았군."
"그 사람들하고 맨살을 맞댄 것도 아닌데 무슨 냄새가 배겠어."
이연화가 퍽 유난을 떤다는 투로 대꾸하며 적비성의 어깨를 손등으로 탁 쳤다. 이유야 어찌됐든, 가까이 다가붙은 두 사람을 지켜보던 방다병의 얼굴이 우그러졌다. "둘만 그러지 마!" 상당히 원초적으로 요구하자, 적비성이 괴상한 시선을 던졌다.
"저 녀석은 왜 퇴행한 것처럼 구는 거냐? 술자리에선 좀 봐줄 만하더니."
"취하면 다들 그렇지, 뭐. 피곤해, 너도 얼른 알아서 묶고 누워."
이연화가 대충 핀잔 주듯 손짓하고는 발길을 돌렸다. 비죽 내민 입을 바로 넣지는 않았지만, 방다병은 일단 그들 사이의 거리가 조금 멀어졌다는 사실에서 위안을 얻었다. 겉옷을 벗어두고 침상으로 다가오는 두 사람을 지켜보다-이제 겨우 두 번째인데, 적비성과 이연화가 자신의 눈앞에서 잘 준비를 마친 상황이 썩 어색하지 않았다-청년은 자기도 모르게 깜박 잠이 들었다.
그날 새벽, 방다병은 잠깐 눈을 떴다.
코로 엷은 체취가 맡아졌고, 몸으로는 온기가 느껴졌다. 편안하면서도 은근히 들뜬 기분에, 방다병은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올리고는 잠시 상황을 파악했다. 반듯하게 누운 이연화가 바로 가까이 있었다. 어제도 함께 잠자리에 들었던가? 잠시 기억을 되돌리다, 방다병은 자신의 손목을 묶어주던 이연화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푸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오랜만에 취해서인지 여태 머리가 뿌연 느낌이었다.
그래도, 그런 자들이 모인 술자리에 이연화만 들여보내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지. 하필 또 백의 대협처럼 입고 나타나서는. 방다병이 뚱하게 생각했다. 필사적인 기지를 발휘했던 순간을 회상하면 모골이 송연해졌다. 물론 이연화가 그 안에서 다치거나 크게 해를 입을 가능성은 적었지만, 이것은 단순히 강하고 약한 일에 대한 문제가 아니었다.
"바보 이연화."
방다병이 옆을 돌아보며 육성 없이 속삭였다. 고요히 잠든 상대는 물론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약간 혼몽한 기분으로, 청년은 이연화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뜯어보았다. 감긴 속눈썹 아래로 쭉 뻗은 콧대와 다물린 입술이 보였다. 턱과 목으로 이어지는 유려한 곡선을 멍하게 응시하다, 방다병은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약간 벌렸다. 그 목덜미를 씹었을 때 울컥울컥 새어나오던 체취가 불현듯 기억난 탓이었다. 그날 이후, 이연화는 당연하게도 그때만큼 짙은 체취를 흘린 적이 없었다. 그러나 방다병은 그 연꽃 냄새에 질식할 것처럼 휩싸였던 순간을 똑똑히 기억했다.
-아, 으...방...방소보...?
-잠깐, 이거 꿈 아니-.
-아, 이상해. 이상....
상대의 낮은 신음소리가 환청처럼 귓전을 스쳤다.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 방다병의 몸으로 은은히 열기가 올랐다.
때가 좋지 않게도, 이연화가 방다병을 향해 슬쩍 돌아누웠다. 방다병이 화들짝 놀라 눈을 깜박였다. 이연화의 얼굴은 여전히 평화로웠다. 자세가 바뀌면서 아주 살짝 열린 입술 사이로, 가늘고 차분한 숨결이 흘러나왔다. 방다병의 눈길이 부지불식간에 그 입술로 떨어졌다.
어느새 빠르고 거세진 심장박동이, 가슴뿐 아니라 머리까지 쿵쿵 울렸다. 방다병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평소에도 그를 보며 무언가를 참을 때가 많았지만, 지금은 뭔가 이상했다. 희락기도 아니었는데 어쩐지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아직 취기가 모두 가시지 않았기 때문일까? 하지만 방다병은 취했다는 이유로 크게 후회할 짓을 저질러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왜-정신없이 자문하다가, 청년은 어느새 입술로 부드러운 감촉이 닿을 듯 말 듯 스쳤을 때 불에 데인 듯 황급히 물러났다. 온몸의 피부가 여러 이유로 후끈 달아올랐다. 경악에 휩싸여 자신의 입을 턱 막고, 방다병은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방다병, 네가 미쳤구나! 언제 그렇게 가까이 다가갔지? 내가 다가간 게 맞겠지? 말도 안 돼, 내가 아무리 이연화를 마음에 두었다 해도 자는 사람에게 입 맞추려는 무도한 짓을 했다고? 차라리 꿈이길 바라며 허벅지를 꼬집었다가, 방다병은 더욱 참담해졌다. 어쩐지 어머니가 말하던 '쓰레기 같은 놈' 혹은 '절제라곤 모르는 무뢰배'가 된 기분이었다. 정신 차려, 방다병! 내심 스스로를 열심히 두들겨 패며, 방다병은 이연화를 등지는 방향으로 홱 돌아누웠다. 높고 가느다란 나뭇가지 위에서 잠을 청하는 동물처럼, 청년은 침상 가장자리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채 억지로 눈을 감았다.
옆에서 불만스러운 신음이 들려왔다. 한쪽 눈만 살짝 뜨고 어깨너머를 돌아보니, 이연화의 미간으로 얕은 골이 생겨 있었다. 갑자기 멀어진 온기가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연화가 추워하는 일은 원치 않아, 방다병은 이연화를 등진 채 조금 더 안쪽으로 몸을 옮겼다. 체온이 다시 가까워지자, 이연화는 뒤척이던 것을 멈추고 방다병의 등에 이마를 부볐다. 방다병이 눈을 질끈 감았다. 마음 같아서야 당장 돌아누워 상대를 끌어안고 싶었으나, 지금은 도무지 스스로를 신뢰할 수가 없었다. 내심 피눈물을 삼키면서, 방다병은 고행자의 태도로 가슴 앞에 양손을 모은 채 머릿속으로는 군자의 도를 읊었다. 이렇게 깨어 있느니, 차라리 누군가에게 점혈이라도 당해 기절하고 싶었다.
다음날, 방다병은 비교적 말끔해진 몸과 그렇지 못한 정신으로 깨어났다(다시 잠들 때까지 한 시진 반이나 걸린 일은 그리 놀랍지도 않았다). 이연화는 풀이 죽은 방다병을 조금 이상한 눈으로 보았으나, 청년이 일부러 부산스레 움직이며 나갈 채비를 하자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선화루에서 약간의 실랑이를 거쳤지만, 방다병은 결국 귀장으로 가는 통행증을 받아냈다. 선화루의 지배인은 매우 난처한 얼굴로 '귀장 통행증은 손님이 먼저 요청하여 받는 것이 아니라, 선화루에서 적합한 사람을 골라 발급해주는 것'이라고 구구절절 설명했다. 방다병은 집요하고 버릇없는 공자를 썩 훌륭하게 연기함으로써-"지금 본 공자를 무시하는 겐가? 내가 어제 이곳에서 쓴 돈이 얼마인지 아나? 내가 어제 함께 술을 마신 공자들보다 떨어지는 부분이 뭐란 말인가? 뭣보다 나는 그 공자들의 호의로 귀장에 대해 알게 된 것인데, 자네가 이리 나오면 그분들을 무시하는 일이 되지 않겠나? 자네가 그리 대단한가?"-선화루 지배인의 지긋지긋한 눈길과 함께 목패를 받아냈다.
중년인은 이 귀장의 존재와 통행증에 대해 함부로 발설했다간 무시무시한 일이 생기기라 경고했으나, 정말 무시무시한 일을 나이에 비해 많이 겪어본 청년은 내심 콧방귀를 뀌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다병은 42라는 숫자가 새겨진 목패를 살피다 적비성을 돌아보았다. 남자는 전서구에게서 서신을 전달받던 참이었다.
"아비, 동행인은 한 명만 데려갈 수 있대. 장소는 알아냈으니까, 필요하면 경공으로 몰래 들어와. 계곡 근처의 버려진 사당이야."
"귀장이란 이름에 어울리는 장소네."
이연화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방다병은 잠시 그 입술과 목덜미를 바라보다, 제발이 심하게 저려 고개를 홱 돌렸다. 작은 쪽지를 살피던 적비성이 말했다.
"무안이 장부에서 품목을 확인했는데, 선화루에서 사간 약들은 대부분 사람의 기분을 들뜨게 만들거나 절제력을 잃게 하는 효과가 있다는군. 미약한 중독성이 있고, 장기적으로 복용하면 평소에도 성미가 급하거나 부주의해지는 모양이야."
"음, 선화루가 잘나가던 이유는 무용단 말고도 또 있었네."
이연화가 슬쩍 비웃듯 말했다. 방다병의 눈이 둥그레졌다.
"그게 무슨...그럼 선화루에서 그 약을 손님들한테 썼다는 거야?"
"그렇겠지. 한 4년 전쯤인가? 비슷한 수법을 쓰는 기루를 본 적이 있어. 술이나 음식에 약을 조금씩 타서 손님들한테 먹이는 거지. 기분이 좋아지고 절제력이 없어지면, 돈을 펑펑 쓸 확률이 높아지잖아. 약값이 싸지 않을 테니, 모든 이에게 그러진 않았을 거야. 자제력을 잃으면 약값보다 훨씬 많은 돈을 뿌릴 게 확실한 사람들에게 썼겠지. 어제 우리가 만난 공자들처럼 말이야."
"그래서였구나!"
방다병이 갑자기 크게 외쳤다. 이연화와 적비성이 흠칫하고, 금원맹주의 팔에 앉았던 전서구가 놀라 푸드득 날아갈 정도였다. 두 명과 한 마리의 정신건강에 신경 쓸 새도 없이, 방다병은 찜찜한 비밀 하나를 풀어낸 기분으로 밝은 표정을 지었다. 내 마음이 금수처럼 변한 게 아니라, 괴상한 약 때문에 조절을 못했던 거구나! 방다병은 가슴에 한 손을 얹은 채 눈을 감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눈을 떴을 때에는, 이연화와 적비성이 병증을 의심하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다병이 머리를 만지며 어색하게 웃었다.
"별건 아닌데...어제 단순히 취했을 때하고는 조금 다르다고 느꼈거든. 술이 독해서 그런가 싶었는데, 아니었네. 넌 아무렇지도 않았어?"
괜히 아비를 툭 치며 묻자, 적비성이 코웃음과 함께 이죽거렸다.
"내가 자제력을 잃었다면, 어제 그놈들은 죽었을 거다."
"사람 쉽게 죽이는 게 참 자랑이다, 적 맹주. 어제 얘는 그놈들한테 맞춰주느라 너보다 훨씬 많이 마셨어. 당연히 영향을 더 크게 받았겠지. 방소보, 내 눈에는 그냥 취한 것 같아서 자게 뒀는데. 불편하면 말하지 그랬어?"
적비성에게 핀잔을 준 이연화가, 방다병을 향해 가볍게 타박하듯 건넸다. 방다병이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문제의 순간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연화는 자신의 존엄을 충분히 도운 셈이었다. "나도 몰라서 그랬지. 난 괜찮으니까 어서 귀장이 열린다는 곳에 가 보자. 신춘광에게 약을 판 사람을 조사하면, 증좌를 찾고 심악의 행방도 알아낼 수 있을지 몰라." 방다병이 과한 의욕을 담아 말했다. 이연화는 방다병이 왜 이리 산만하게 구는지 의심스러운 듯 고개를 갸웃했으나, 등을 떠미는 손길에 입을 다물고 발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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