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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03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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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어디십니까.

"방금 입국했습니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바로 본가로 갈 예정이니 오늘 오전 미팅은 오후로 미뤄주세요."

-알겠습니다. 공항에 사람을 보냈으니...

"혼자 조용히 가고 싶네요. 제가 알아서 본가로 이동할테니 다시 돌려보내세요."

-하지만 도련님...

"이따 본가에서 뵙죠."

전화를 끊은 주자서는 공항을 나와 눈이 펑펑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 봤어.

"오랜만이구나."

외국 지사에서 근무하다 9년만에 돌아온 본국은 하얀 눈으로 뒤덮여 그 옛날 설산을 떠올리게 했지. 불로불사의 몸으로 천년을 살다 온객행을 살리기 위해 피워낸 환생초가 꽃잎을 붉게 물들인 후 28년이 흘렀어. 환생초의 부작용으로 빠르게 나빠진 몸상태에 금방 죽을 줄 알았던 주자서는 여즉 붙어있는 제 목숨줄에 감사해야할 지 슬퍼해야 할 지 몰랐어. 그 아이는 잘 지내고 있을까...저를 붙잡는 소년을 애써 떼어내고 홀로 죽기 위해 무작정 떠난 타국 생활이 이토록 길어졌을 줄이야...장씨 일가의 사업이 확장되며 제 도움이 필요해졌다는 장집사의 말에 잠시 돌아온 고향은 떠났을 때와 다름없이 아름다워서 슬펐어. 떨리는 눈을 감고 그리운 고향의 공기를 들이마신 주자서는 하얀 입김을 뱉으며 옅게 미소지었지. 로온...나 돌아왔어.


눈바람을 가르고 달려온 택시가 장씨 일가의 저택 앞에서 속도를 줄이며 멈추자 대기하고 있던 직원들이 트렁크에 실린 주자서의 짐을 옮기기 시작했어. 그리고 그 직원들 중 가장 연로해보이는 장집사가 지팡이를 힘겹게 짚으며 택시문을 열었지.

"오셨습니까. 철한 도련님."

"응...오랜만이야. 장집사."

세월이 느껴지는 장집사의 주름진 눈가에 눈물이 맺히자 덩달아 뭉클해진 주자서가 택시에서 나와 장집사의 마른 몸을 안았다 놓아주었어.

"도련님.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식사는 하셨는지..."

"아...조금 피곤하군...그냥 좀 쉬면..."


쿨럭-


반가움도 잠시 주자서가 피를 토하며 기침하자 놀란 장집사가 직원들을 다급히 불렀지.

"어서...! 어서 도련님을 침실로 모셔...!"


얼마나 잠들었던 걸까...몽롱한 의식을 붙잡고 힘겹게 눈을 뜬 주자서는 물...하고 마른 입술을 달싹였어. 그러자 누군가 주자서의 상체를 조심스레 일으켜 입술에 물컵을 대어주었지. 하지만 의식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주자서가 물을 제대로 삼킬 리 없었어. 그대로 흘러내린 물은 주자서의 잠옷을 젖게 했지. 콜록- 갈증이 해소되지 못한 주자서가 다시 기침을 하자 그에게 물을 먹이려던 남자는 자신이 물컵의 물을 마시더니 그대로 주자서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어. 그러자 남자가 입안에 머금고 있던 물이 주자서에게 넘어갔고 남자가 혀를 이용해 부드럽게 키스하자 주자서는 무사히 물을 삼키며 기침을 멈추었지. 갈증이 해소된 주자서가 약 기운에 취해 다시 잠들자 입술을 뗀 남자는 주자서의 젖은 잠옷을 갈아입혀주곤 잠시 그의 뺨을 어루만지다 침실 밖으로 나갔어.



창밖이 어두워지며 노을빛이 침실을 붉게 물들이자 한결 안색이 돌아온 주자서가 눈을 떴지. 그러자 장집사가 어디론가 전화를 하더니 이내 주자서를 부축해 일으켜주었어.

"괜찮으십니까? 도련님..."

"괜찮네...장기간 비행을 하였더니 몸에 조금 무리가 갔을 뿐이야. 너무 걱정말게."

"그치만..."

"그건 그렇고. 오후 미팅은 어떻게 됐는가? 내가 생각보다 오래 잠든 것 같은데."

주자서가 방안을 가득 메운 노을빛에 걱정스런 얼굴을 하자 장집사가 안심하라는 듯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지.

"걱정마세요. 상대쪽에서 도련님이 쓰러졌다는 소식에 미팅 스케줄은 언제든지 다시 조정할 수 있으니 지금은 건강회복에 집중하시랍니다."

"내가 큰 결례를 범했군. 그쪽 비서를 통해서 심심치 않게 답례를 보내드리게. 비용은 신경쓰지 말고. 그리고..."

"예. 도련님."

"미뤄진 미팅은 내일 오전에 다시 잡아주게."

단호한 주자서의 목소리에 당황한 장집사는 여기서 조금만 더 무리하면 정말 잘못될 것 같은 주자서의 안색에 그를 다급히 말렸어.

"예...? 하지만 도련님 지금 몸상태로는...!"

"괜찮대도. 내 이번 계약 때문에 부러 입국한 것인데 겨우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계약을 미뤄서 되겠는가."

"어찌 그리 서두르십니까. 미팅이야 몸상태가 나아지시면 다시 잡으면 될 것을..."

그 말에 주자서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한숨을 내쉬곤 대답했지.

"이번 계약이 무사히 성사되면 빠른 시일 내에 다시 외국지사로 넘어갈 생각이야...그리 알고 준비해주게."

"하지만 도련님. 도련님을 진료한 의사가 당분간은 절대 안정을..."

절대 안정이라니...얼마나 쉬든 나아질 리 없는 제 몸상태를 알고 있는 주자서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 웃으며 진정하라는 듯 장집사의 어깨에 손을 올리곤 말했어.

"오늘 잠시 나를 진료한 의사가 내 몸상태에 대해 뭘 그리 잘 알겠는가...내 몸은 그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으니 걱정할 거 없어. 자네가 지시를 거부하면 내가 직접 스케줄을 조정할테니 시키는 대로 하게."

"도련님..."

걱정으로 장집사의 얼굴에 그늘이 지자 안심하라는 듯 주자서가 밝게 웃으며 장집사의 어깨를 두드렸지. 정말 괜찮다니까...

"그리고 지금 당장 내 서재로 계약과 관련된 자료들을 가져와 주게. 미국지사에서 확인은 했다만 제대로 다시 검토해봐야겠어."

"글쎄 도련님 지금은 절대 안정을...!"

거추장스럽다는 듯 미련없이 손목에 꼽힌 주삿바늘을 뽑아낸 주자서가 침대에서 일어나 가운을 걸치자 장집사가 안절부절못하며 그의 팔을 잡고 말렸지. 아랑곳 않고 잡힌 팔을 풀어내 방문으로 향하는데 저가 열지 않았음에도 문손잡이가 알아서 돌아가며 방문이 열렸어.

"제가 분명 '절대' 안정하라 말씀드렸을텐데요."

그리 말하며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온 남자는 키가 너무 커서 제법 키가 큰 편에 속했던 주자서마저 고개를 들어야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실루엣만 봐도 남자가 보기드문 미남이라는 걸 알 수 있었지.

"누구..."

흰 가운을 지나 길고 곧은 목, 다부진 턱을 차례대로 올려본 주자서는 곧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크게 놀라며 말을 잃었어.

"오랜만입니다. 이사장님."

"너...넌..."

"잘 지냈어요?"

난 잘 못지냈는데...

그를 단번에 알아본 주자서가 천천히 뒷걸음치자 남자가 쓰게 웃으며 멀어진 만큼 거리를 좁혔고, 뒤로 물러서던 주자서가 테이블 다리에 발이 걸려 넘어지려 하자 남자가 잽싸게 그의 허리에 팔을 감아 당겼지. 남자는 어느새 제 품에 안긴 모양새가 된 주자서의 귓가에 다정하고 부드럽게 속삭였어.

"또 도망가려구요?"

"주, 준이 너..."

"이번에는 어디로 갈 건데요?"

글쎄...이런 몸상태로 당신이 어딜 갈 수 있을까...

그리 말하며 공준의 눈에 이채가 서리자 소름이 돋은 주자서는 처음으로 소년, 아니 이젠 남자가 되어버린 그에게 두려움을 느꼈을 거야.



객행자서 준저 사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