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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23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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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해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자신의 어머니는 그런 속설을 즐겨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어쩌면 자신을 돌봐준 유모나 아직 그런 말들을 좋아하는 나이 어린 시종에게서 들었던 것도 같았다. 하지만 란각은 그 눈밑이 붉다는 것이, 어떻게 붉다는 건지, 그럼 술을 한 잔만 마셔도 온 피부가 다 벌개지는 큰 숙부랑 결혼한 숙모는 얼마나 불행한 건지, 이런 쓸데없는 고찰을 하다가 또 숙부가 술을 마실 때마다 숙모가 소리를 지르시긴 하니 아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다지 쓸모없는 생각이었지만 그때는 어렸고, 그러고는 아주 오랫동안 이 말을 떠올리지 않았다.
이 말을 두번째로 떠올린 것은 고청장을 만나고 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고청장은 여름날 정오의 햇볓 아래에서도 핏기하나 없이 창백한 피부를 가지고 있어서, 가끔 잠을 설친 날에 눈을 비비고 나면 눈밑이 잠시 붉게 변했다. 그 날은 어쩐지 기분이 들떠서 결국 생각나는 대로 실없는 소리를 하고 말았다. 물론 고청장은 란각이 하는 어떤 실없는 소리도 절대 비웃는 법이 없어서 그저 평소처럼 자상하게, 자신도 어디선가 그런 이야기를 대꾸해주었다.
"자넨 눈밑이 붉진 않지만, 대신 눈물점이 있군."
어렸을 때부터 질리게 들어온 소리라 란각은 그저 짧은 웃음을 뱉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황제의 등에 업혀 놀았다는 송 귀비도 바로 그 자리에 점이 있었다고 하지."
"지금 날 세기의 요부와 비교하는 건가? 고마워 해야할지 화를 내야 할지 모르겠군."
"귀비의 눈밑의 점이 마치 눈물 한 방울처럼 보여서, 황제는 귀비가 고개를 숙이기만 하면 매번 우는 줄 알고 가슴에 통증을 느꼈다고 하지. 그래서 애첩의 요청을 단 하나도 거절하지 못해서 결국에는 암군이 되었다고."
자신을 바라보는 고청장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어려있었다.
"눈물점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면, 마음을 다친다고들 하지."
"방금 자네가 지어낸 게 아니고?"
"옛부터 정말 있는 말이야."
"들어본 적 없어."
"그거야, 정말 눈물점이 있는 사람 앞에서 대놓고 말하기엔 껄끄러우니까 그렇겠지."
이야기를 먼저 꺼낸 란각으로써는 멋쩍어지는 답변이었다.
"딱히 정말 믿어서 말한 건 아니야. 화내지 말게."
"난 화나지 않았어, 패지."
고청장이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소매를 걷고 찻잔을 집어들었다.
"자네는 믿지 않을지 몰라도. 난 믿어."
"이런 미신을?"
"어차피 인간이 이 세상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게 얼마나 된다고. 난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
"그럼 자네를 사랑하는 여인은 불행해질 텐데."
"괜찮아. 이 생에 날 사랑하는 이는 없을 테니까."
"말도 안되는 소리."
란각은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있지."
"만약 있다면 가련한 일이지."
"말도 안 돼. 이런 말들은 그냥 어리고 순진한 마음을 다치지 말라고 아무렇게나 경고하는 말들이지. 밤에 피리를 불면 요괴에게 혼을 뺏긴다는 이야기처럼."
"그건 밤에 뱀이 나타나기 쉬우니 실용적인 미신이지만, 눈밑이 붉은 남자는 전혀 아닌 걸."
"그것도 사실 잘 보면 누가 붉지 않겠어. 누구나 마음을 줄 때는 조심하라고 만든 말이겠지."
"자네가 먼저 꺼낸 이야기에 자네가 더 흥분하면 어떡하나."
"아무튼 그냥 우스갯소리일 뿐이야."
고청장은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소리로 답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 고청장이 란각의 인생에서 홀연히 사라진 뒤, 란각은 다시 그 말을 떠올렸다. 둘째 왕 공자는 그 출처를 알 수 없는 미신 속의 남자를 그대로 현실로 옮긴 듯한 생김새였다. 수려한 용모에 얼핏보면 호탕하다 못해 방탕해보이는 행실, 뼛속까지 가득찬 듯한 자신감과, 그 모든 것을 도저히 밉지 않게 만드는 붉은 눈가.
그리고 이번에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자신도 아니었다.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던 여인은 아주 오랫동안 왕연을 보아왔다고 했다. 란각은 그녀가 왕연에게 마음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오히려 왕 공자가 자신에게 이런 자리에 익숙하지 않은 란각을 살뜰히 챙기라 했다 말하며 란각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가 채운 세번 째 술잔을 입가로 가져갔을 때 란각은 잔에 든 것이 더 이상 술이 아닌 물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그가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낮게 속삭였다.
"아직 위장병이 다 낫지 않으셨다면서요?"
그녀와는 초면이었지만 그걸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물을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왕 공자께서 손님께 술을 너무 많이 올리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답니다."
"괜한 걱정을 하는 군."
하지만 사실은 이미 위가 쿡쿡 쑤시기 시작한지 한 시진은 족히 되었을 때였다. 그렇지만 란각은 그녀의 친밀한 태도가 어쩐지 달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떤 자리는 피할 수 없는 거라지만, 왕연과 그녀의 친분은 공적인 관계 이상으로 보였고 그건 어쩐지 란각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왕 공자는 이곳에 자주 들리시는 편인가?"
무심한 말투로 물었지만 그녀는 어쩐지 재미있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란각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몸을 붙여왔다.
"저래보여도 성격이 자상하신 분이라 저희 같은 여인들과의 인연도 소홀하게 대하진 않으시거든요."
때마침 찻물이 목 안으로 잘못 들어가는 바람에 란각은 고개를 돌리고 몇 번이고 기침을 해야했다. 여자의 손이 자신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세세한 건, 굳이 내게 말해주지 않아도 괜찮네."
그때 연회장 안의 누군가 또 자신에게 술을 권했다. 란각이 술잔을 받아 들기도 전에 어디선가 나타난 손이 잔을 채어갔다. 당연한 말이지만, 손의 주인은 왕연이었다.
"남는 술이 있으면 제게 주시죠."
그가 평소보다 술기가 오른 목소리로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바쁜 란 공자는 내버려두자고요."
그가 눈썹을 으쓱여보이자 여기저기서 낮은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동시에 여자의 팔이 란각의 어깨를 더 깊숙히 끌어 당겼다. 누군가 본다면 분명 오해하기 좋은 광경이었다. 란각이 닿은 몸을 밀어내려고 하자 그녀가 속삭였다.
"이 시랑은 젊은 이들이 기절할 때까지 술을 권하는 게 취미인 사람이죠."
그저 학문으로 따지자면, 란각 스스로도 자신이 왕연에 한 치도 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신이 우위라고 할 수 있었다. 그건 딱히 타고난 재능이나 천성과는 상관없이, 왕연보다 자신이 책을 파고든 시간이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실은 그의 앞에서 이렇게 말한다고 해도 란각은 그가 한치의 부끄러움 없이 인정할 것을 알았다.
하지만 왕 공자의 진정한 재능은 이런 술자리에서 발휘되곤 했다. 농담이 아니라, 왕연은 연회에 관해서라면 정말이지 모르는 게 없었다. 그저 분위기를 띄우는 것뿐만이 아니라, 직위에 따라 어떤 순서대로 손님을 앉혀야 하는지, 어떤 술을 준비하고 어떤 식사를 준비해야 하는지, 어쩌면 왕 가의 안주인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왕연의 첫인상은 안하무인의 도련님이었지만, 란각에게 세가의 도련님들의 세계에도 나름 엄연한 법칙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가르쳐준 것도 왕연이었다.
왕연이 술을 잘 마시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저녁 내내 자신에게 권해진 술에다 란각에게 권해진 술의 거진 절반 이상을 다 마신 그는 이미 취한 듯 보였다. 그렇지만 동작과 어투는 여전히 또릿했고, 단지 평소보다도 훨씬 붉어진 눈가가 눈에 띄었다.
"저희들끼리 하는 말이지만, 눈밑이 붉은 기를 띄는 남자는 피해야 한다고 하죠."
란각은 그녀의 말에 깜짝 놀랐다.
"들어보신 적 있으세요?"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다시 술인 척 차를 따르며 말을 이었다.
"붉은 기는 사람의 마음을 홀린다고 하는데, 우리 왕 공자님은 그 재능을 어찌나 아낌없이 쓰시는지."
"너무 많이 마시는 것 아닌가?"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말에 그녀가 자신을 올려다보곤, 자신의 시선을 쫓아 왕연을 바라보았다.
"걱정되세요?"
"오늘은 마차도 가져오지 않았는데."
"이럴 줄 알고 이미 방을 마련해놓았답니다. 란 공자께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위가 다시 한 번 욱씬거렸다.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지만 란각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서... 밤을 보낼 예정이었던 건가?"
그녀가 웃었다.
"란 공자도 저렇게 인사불성으로 취한 사람을 두고 가실만큼 차가운 분은 아니시겠죠? 란 공자를 위해서 저렇게까지 하시는 분인데."
"아."
"걱정마세요. 이 곳에 왕 공자를 흠모하는 아이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저는 불행을 자초하고 싶은 마음은 없답니다."
그녀가 방 안의 다른 여인들을 향해 소매 밑으로 슬쩍 신호를 보내는 것을 란각을 놓치지 않았다. 고개를 들자 어느새 방안의 손님들은 자신을 제외하고는 다들 거나하게 취한 모양새였다.
"하지만 눈가가 붉은 남자를 사랑하는 여인이 불행해진다고 했지, 남자는 어떨지 모르죠."
이번에도 길을 잘못든 찻물을 내뱉을 지경에 처한 란각이 서둘러 소매로 입을 가렸다.
"저렇게까지 애쓰시는데 란 공자께서는 부디 우리 왕 공자를 너무 걱정시키지 말아주세요."
그녀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란각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다, 다시 왕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언제부터인지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그와 눈이 마주치자 알 수 없는 부드러운 감정이 가슴을 맴돌았다.
군자맹 묵문란각
불행해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자신의 어머니는 그런 속설을 즐겨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어쩌면 자신을 돌봐준 유모나 아직 그런 말들을 좋아하는 나이 어린 시종에게서 들었던 것도 같았다. 하지만 란각은 그 눈밑이 붉다는 것이, 어떻게 붉다는 건지, 그럼 술을 한 잔만 마셔도 온 피부가 다 벌개지는 큰 숙부랑 결혼한 숙모는 얼마나 불행한 건지, 이런 쓸데없는 고찰을 하다가 또 숙부가 술을 마실 때마다 숙모가 소리를 지르시긴 하니 아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다지 쓸모없는 생각이었지만 그때는 어렸고, 그러고는 아주 오랫동안 이 말을 떠올리지 않았다.
이 말을 두번째로 떠올린 것은 고청장을 만나고 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고청장은 여름날 정오의 햇볓 아래에서도 핏기하나 없이 창백한 피부를 가지고 있어서, 가끔 잠을 설친 날에 눈을 비비고 나면 눈밑이 잠시 붉게 변했다. 그 날은 어쩐지 기분이 들떠서 결국 생각나는 대로 실없는 소리를 하고 말았다. 물론 고청장은 란각이 하는 어떤 실없는 소리도 절대 비웃는 법이 없어서 그저 평소처럼 자상하게, 자신도 어디선가 그런 이야기를 대꾸해주었다.
"자넨 눈밑이 붉진 않지만, 대신 눈물점이 있군."
어렸을 때부터 질리게 들어온 소리라 란각은 그저 짧은 웃음을 뱉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황제의 등에 업혀 놀았다는 송 귀비도 바로 그 자리에 점이 있었다고 하지."
"지금 날 세기의 요부와 비교하는 건가? 고마워 해야할지 화를 내야 할지 모르겠군."
"귀비의 눈밑의 점이 마치 눈물 한 방울처럼 보여서, 황제는 귀비가 고개를 숙이기만 하면 매번 우는 줄 알고 가슴에 통증을 느꼈다고 하지. 그래서 애첩의 요청을 단 하나도 거절하지 못해서 결국에는 암군이 되었다고."
자신을 바라보는 고청장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어려있었다.
"눈물점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면, 마음을 다친다고들 하지."
"방금 자네가 지어낸 게 아니고?"
"옛부터 정말 있는 말이야."
"들어본 적 없어."
"그거야, 정말 눈물점이 있는 사람 앞에서 대놓고 말하기엔 껄끄러우니까 그렇겠지."
이야기를 먼저 꺼낸 란각으로써는 멋쩍어지는 답변이었다.
"딱히 정말 믿어서 말한 건 아니야. 화내지 말게."
"난 화나지 않았어, 패지."
고청장이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소매를 걷고 찻잔을 집어들었다.
"자네는 믿지 않을지 몰라도. 난 믿어."
"이런 미신을?"
"어차피 인간이 이 세상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게 얼마나 된다고. 난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
"그럼 자네를 사랑하는 여인은 불행해질 텐데."
"괜찮아. 이 생에 날 사랑하는 이는 없을 테니까."
"말도 안되는 소리."
란각은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있지."
"만약 있다면 가련한 일이지."
"말도 안 돼. 이런 말들은 그냥 어리고 순진한 마음을 다치지 말라고 아무렇게나 경고하는 말들이지. 밤에 피리를 불면 요괴에게 혼을 뺏긴다는 이야기처럼."
"그건 밤에 뱀이 나타나기 쉬우니 실용적인 미신이지만, 눈밑이 붉은 남자는 전혀 아닌 걸."
"그것도 사실 잘 보면 누가 붉지 않겠어. 누구나 마음을 줄 때는 조심하라고 만든 말이겠지."
"자네가 먼저 꺼낸 이야기에 자네가 더 흥분하면 어떡하나."
"아무튼 그냥 우스갯소리일 뿐이야."
고청장은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소리로 답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 고청장이 란각의 인생에서 홀연히 사라진 뒤, 란각은 다시 그 말을 떠올렸다. 둘째 왕 공자는 그 출처를 알 수 없는 미신 속의 남자를 그대로 현실로 옮긴 듯한 생김새였다. 수려한 용모에 얼핏보면 호탕하다 못해 방탕해보이는 행실, 뼛속까지 가득찬 듯한 자신감과, 그 모든 것을 도저히 밉지 않게 만드는 붉은 눈가.
그리고 이번에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자신도 아니었다.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던 여인은 아주 오랫동안 왕연을 보아왔다고 했다. 란각은 그녀가 왕연에게 마음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오히려 왕 공자가 자신에게 이런 자리에 익숙하지 않은 란각을 살뜰히 챙기라 했다 말하며 란각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가 채운 세번 째 술잔을 입가로 가져갔을 때 란각은 잔에 든 것이 더 이상 술이 아닌 물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그가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낮게 속삭였다.
"아직 위장병이 다 낫지 않으셨다면서요?"
그녀와는 초면이었지만 그걸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물을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왕 공자께서 손님께 술을 너무 많이 올리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답니다."
"괜한 걱정을 하는 군."
하지만 사실은 이미 위가 쿡쿡 쑤시기 시작한지 한 시진은 족히 되었을 때였다. 그렇지만 란각은 그녀의 친밀한 태도가 어쩐지 달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떤 자리는 피할 수 없는 거라지만, 왕연과 그녀의 친분은 공적인 관계 이상으로 보였고 그건 어쩐지 란각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왕 공자는 이곳에 자주 들리시는 편인가?"
무심한 말투로 물었지만 그녀는 어쩐지 재미있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란각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몸을 붙여왔다.
"저래보여도 성격이 자상하신 분이라 저희 같은 여인들과의 인연도 소홀하게 대하진 않으시거든요."
때마침 찻물이 목 안으로 잘못 들어가는 바람에 란각은 고개를 돌리고 몇 번이고 기침을 해야했다. 여자의 손이 자신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세세한 건, 굳이 내게 말해주지 않아도 괜찮네."
그때 연회장 안의 누군가 또 자신에게 술을 권했다. 란각이 술잔을 받아 들기도 전에 어디선가 나타난 손이 잔을 채어갔다. 당연한 말이지만, 손의 주인은 왕연이었다.
"남는 술이 있으면 제게 주시죠."
그가 평소보다 술기가 오른 목소리로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바쁜 란 공자는 내버려두자고요."
그가 눈썹을 으쓱여보이자 여기저기서 낮은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동시에 여자의 팔이 란각의 어깨를 더 깊숙히 끌어 당겼다. 누군가 본다면 분명 오해하기 좋은 광경이었다. 란각이 닿은 몸을 밀어내려고 하자 그녀가 속삭였다.
"이 시랑은 젊은 이들이 기절할 때까지 술을 권하는 게 취미인 사람이죠."
그저 학문으로 따지자면, 란각 스스로도 자신이 왕연에 한 치도 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신이 우위라고 할 수 있었다. 그건 딱히 타고난 재능이나 천성과는 상관없이, 왕연보다 자신이 책을 파고든 시간이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실은 그의 앞에서 이렇게 말한다고 해도 란각은 그가 한치의 부끄러움 없이 인정할 것을 알았다.
하지만 왕 공자의 진정한 재능은 이런 술자리에서 발휘되곤 했다. 농담이 아니라, 왕연은 연회에 관해서라면 정말이지 모르는 게 없었다. 그저 분위기를 띄우는 것뿐만이 아니라, 직위에 따라 어떤 순서대로 손님을 앉혀야 하는지, 어떤 술을 준비하고 어떤 식사를 준비해야 하는지, 어쩌면 왕 가의 안주인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왕연의 첫인상은 안하무인의 도련님이었지만, 란각에게 세가의 도련님들의 세계에도 나름 엄연한 법칙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가르쳐준 것도 왕연이었다.
왕연이 술을 잘 마시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저녁 내내 자신에게 권해진 술에다 란각에게 권해진 술의 거진 절반 이상을 다 마신 그는 이미 취한 듯 보였다. 그렇지만 동작과 어투는 여전히 또릿했고, 단지 평소보다도 훨씬 붉어진 눈가가 눈에 띄었다.
"저희들끼리 하는 말이지만, 눈밑이 붉은 기를 띄는 남자는 피해야 한다고 하죠."
란각은 그녀의 말에 깜짝 놀랐다.
"들어보신 적 있으세요?"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다시 술인 척 차를 따르며 말을 이었다.
"붉은 기는 사람의 마음을 홀린다고 하는데, 우리 왕 공자님은 그 재능을 어찌나 아낌없이 쓰시는지."
"너무 많이 마시는 것 아닌가?"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말에 그녀가 자신을 올려다보곤, 자신의 시선을 쫓아 왕연을 바라보았다.
"걱정되세요?"
"오늘은 마차도 가져오지 않았는데."
"이럴 줄 알고 이미 방을 마련해놓았답니다. 란 공자께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위가 다시 한 번 욱씬거렸다.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지만 란각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서... 밤을 보낼 예정이었던 건가?"
그녀가 웃었다.
"란 공자도 저렇게 인사불성으로 취한 사람을 두고 가실만큼 차가운 분은 아니시겠죠? 란 공자를 위해서 저렇게까지 하시는 분인데."
"아."
"걱정마세요. 이 곳에 왕 공자를 흠모하는 아이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저는 불행을 자초하고 싶은 마음은 없답니다."
그녀가 방 안의 다른 여인들을 향해 소매 밑으로 슬쩍 신호를 보내는 것을 란각을 놓치지 않았다. 고개를 들자 어느새 방안의 손님들은 자신을 제외하고는 다들 거나하게 취한 모양새였다.
"하지만 눈가가 붉은 남자를 사랑하는 여인이 불행해진다고 했지, 남자는 어떨지 모르죠."
이번에도 길을 잘못든 찻물을 내뱉을 지경에 처한 란각이 서둘러 소매로 입을 가렸다.
"저렇게까지 애쓰시는데 란 공자께서는 부디 우리 왕 공자를 너무 걱정시키지 말아주세요."
그녀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란각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다, 다시 왕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언제부터인지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그와 눈이 마주치자 알 수 없는 부드러운 감정이 가슴을 맴돌았다.
군자맹 묵문란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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