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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6 21:44
망천화처럼 이연화 해독할 수 있는 약초가 있는데, 형질을 바꾸는 부작용이 있어서 떨떠름해하던 이연화와 그런 게 뭐가 중하냐 하던 주변사람들이 우당탕하는 게 보고싶다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방다병, 어때 보여?"
이연화가 시각적인 농담을 던지듯이 양팔을 슬쩍 벌려 보였다. 백천원 사람들이 무섭도록 진지한 눈으로 골라 내민 옷이었다. 단정하면서도 과히 하늘거리지 않게, 하지만 마냥 수수하거나 투박하지 않게, 기품이 있으면서도 절도 있게! 이연화는 그들이 옷의 취지를 설명하는 동안, 그저 예의바른 웃음을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옷가지가 어쨌든 별 상관은 없었으나-자신을 노리는 악당들이라면, 이연화가 산발을 하고 미친 사람처럼 나타나도 후보로 남고자 발악할 터였다-고생하는 백천원주들에게 굳이 반박할 마음은 더욱 없었다.
"어때 보이긴, 늙은 여우처럼 보이지."
방다병이 입을 비죽 내밀고는 팔짱을 끼었다. 이연화가 쯧쯧 혀를 차며 방다병을 삿대질했다.
"네가 그렇게 말했다고 석수한테 이른다. 이 옷을 찾느라 석 원주가 꽤 고생했다던데."
"누가 옷이 이상하다고 했어? 네가 음흉해 보인다고 했지. 옷은 괜찮아."
방다병이 얼른 정정했다. 이연화가 피식 웃으며 거울을 돌아보았다. 전체적으로 이상이가 예전에 입었던 전투복을 떠올리게끔 했지만, 그 색깔과 형태가 약간 달랐다. 선명한 붉은색이 아닌 은은한 녹색 옷은, 패기 넘치는 무인의 전투복이라기보다 그윽한 서생의 옷가지처럼 섬세하면서도 단아하게 늘어뜨려져 있었다. 머리장식도 평소에 하던 것과 달리, 아주 좋은 은과 옥으로 만든 물건이었다.
"이렇게까지 차려 입어야 해? 어차피 적에게 덫을 놓으려는 거잖아. 여러 사람한테 좋게 보일 필요는 없을 텐데."
방다병이 걱정인지 타박인지 모를 투로 물었다. 이연화가 머리장식을 살짝 손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나름대로 꾸민 외양과 달리, 그 어조는 거리에서 반쪽짜리 의원 노릇을 할 때처럼 한가로웠다.
"물론 그렇지만, 이 행사는 어쨌든 백천원이 주관한 거란 말이지. 내가 아무리 부정해도, 나는 아직 백천원에서 문주라 불리는 사람이고. 손님을 대하는 예의 정도는 제대로 갖추어야 나중에 백천원이 괜한 구설수에 오르지 않겠지. 나 때문에 다들 고생하고 있는데, 내가 좋게 보이지 않으면 백천원에 너무 배은망덕한 일이 아니겠어?"
"알았어, 알았어. 관 협의가 준 약은 제대로 챙겼지?"
이연화는 당연한 소리를 한다는 뜻으로 눈을 흘기며 품을 툭 두드렸다. 자신에게 특히 잘 맞았던 약이 네 포 들어 있었다. 관하몽은 설령 양인의 영향을 둔화시키는 억제제를 가졌다 해도, 희락기를 억지로 유도하는 약이나 독 따위에 절대 노출되지 않기를 당부했다. 불안정하고 강력한 형질은 보통 그런 것과 상성이 좋지 않았다. 방다병이 진지하게 이었다.
"아무리 이곳이 백천원이라도, 꼭 조심해야 해. 일이 끝나기 전까진, 먹거나 마실 때 꼭 독이 있나 없나 확인해 보고. 평소에 쓰는 물건이라도 한 번씩 점검해 봐. 장기간에 걸쳐 피부로 서서히 침투하는 약도 있잖아. 아, 그리고 혹시라도 초나 향이 타는 곳에는 접근하지 마. 자칫 잘못 다가갔다간 정신을 잃거나 운신이 힘들어질 수도 있으니까. 전에 아비랑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그리고-."
"아, 알았어. 방소보, 너 오늘따라 내 어머니처럼 군다."
이연화가 귀찮은 투로 이야기하며 오른손을 내저었다. 방다병이 울컥한 얼굴로 말하며 한 방향을 가리켰다.
"내가 안 그러게 생겼어? 밖에 너랑 혼인하고 싶다 모인 사람들이 백오십이나 되는데, 저 중에 적이 섞여 있단 거잖아."
"상이.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어."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연화와 방다병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여느 때처럼 아름다운 모습의 완만이 미끄러지듯 다가오고 있었다. 이연화를 본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그 반응에, 이연화는 음인이 된 후 거의 처음으로 약간 무안해졌다. 헛기침을 한 번 하자, 방다병은 이연화를 일별하고는 얼른 말했다. "난 먼저 가 있을게. 준비되면 와." 이연화가 대꾸하기도 전에, 청년은 척척 걸어 자리를 떴다. 흥미로운 눈으로 자신을 살피는 교완만을 향해, 이상이는 눈가를 살짝 긁으며 웃었다.
"음, 완만. 너한테 이런 상황에서 이런 차림을 보이려니 조금 민망하긴 하네. 사고문주일 때는 이런 식으로 입은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그냥 예인의 분장이라고 생각해주면 좋겠어."
"분장이라고 할 만큼 과하지 않아. 혼인하는 사람처럼 꾸며놓은 것도 아닌걸."
교완만이 가벼운 농을 던졌다. 이연화가 피식 웃었다. 완만은 형질이 변한 이상이를 보고 물론 놀랐지만, 더 이상 이연화가 고통받지 않는다는 사실에 순수하게 기뻐했다. 교완만과 연인 관계였던 옛적이었다면, 아무리 낫기 위해서라지만 음인이 될지 모를 위험을 감수했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이연화는 곧 내심 고개를 저었다. 하등 쓸모없는 생각이었다.
"상이, 중간에 그만해도 돼."
교완만이 팔을 가볍게 잡으며 건넨 말에, 이연화가 퍼뜩 돌아보았다. 교완만의 반듯한 이마로 엷은 근심이 걸려 있었다. 이연화가 빙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피구가 나 때문에 며칠을 못 잤는데, 그래서야 되겠어?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지."
"피구는 네가 힘들어하는 것보다, 그냥 며칠 못 자고 끝나는 편이 백배 낫다고 생각할 거야."
"나 이제 괜찮아. 정말로. 아직 예전의 2할 정도밖에 안 돌아왔지만, 전처럼 힘 좀 쓴다고 부서지거나 하지 않아."
"이런 건 단순한 힘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어서 그래. 난 평생 음인으로 살았지. 내가 어떤 어려움들을 겪었는지 알잖아. 몸이 크게 다치지 않더라도, 어떤 일들은 잊기 힘든 불쾌감을 남겨. 아마 네가 지금껏 모르고 살았던 종류의 불쾌감일 거야."
교완만이 조용히 맺었다. 이연화가 물끄러미 교완만을 응시했다. 자신과 교제하기 전에도, 교완만은 이미 천하의 미인들을 논할 때 빠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교완만이 절세 고수라는 사실보다, 아름다운 음인이라는 사실에 멍청하게 굴 때가 많았다.
"넌 그럴 때마다 어떻게 했어?"
"어릴 적엔 참을 때가 많았지만, 무공을 익힌 후로는...보통 때렸지? 가끔은 네가 대신 때리기도 했고."
교완만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이연화가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러면 너도 나랑 함께 때려주면 되겠네." 교완만이 짐짓 눈을 흘겼다. 이연화가 에이 소리와 함께 손을 저었다.
"내가 겪을 고난이 네 고난보다는 덜할 거야. 넌 각려초와 함께 늘 천하제일미 자리를 놓고 다퉜잖아? 나는 소문이 부풀려져서 그렇지, 그냥 옛날부터 양인이었던 남자라고. 얼굴을 보면 실망할까 싶어서, 면포라도 써야 하나 고민하던 참이었어."
이연화가 익살스럽게 말하며 눈 아래를 손으로 가려 보였다. 함께 웃고자 건넨 말이었으나, 교완만은 금방 웃지 않았다. 오히려 그 얼굴로 약간의 의심과 걱정이 함께 떠올랐다. 살짝 가늘어진 눈으로 이연화를 바라보다, 교완만이 떠보듯이 물었다.
"상이, 혹시...네가 평범하게 생겼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이연화가 눈을 깜박였다. 잠시 고민하다, 이연화는 뺨을 긁적이며 느리게 말했다.
"별로...내 외모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교완만이 한숨과 함께 이마를 짚었다. 이연화가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진실이었지만 어쩐지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미추에 대한 안목이라면 물론 있었으나, 그 기준으로 자신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본 기억은 별로 없었다. 그런 데에 신경을 쓰기엔 늘 너무 바빴다. 무공을 수련하거나, 사고문을 이끌거나 사파와 싸우는 일에 외모는 별 영향을 주지 못했다. 이연화가 변명처럼 늘어놓았다.
"물론 잘났다는 소리도 몇 번 들었으니 딱히 못났다고 여긴 적은 없지만, 그건 양인을 기준으로 했을 때니까. 나는 지금 음인이 됐잖아. 그러니까-."
"됐어, 무슨 뜻인지 알겠어. 상이, 방금 전 내가 했던 말 꼭 기억해. 일을 진행하다가 마음이 상할 것 같으면, 언제든 그만해도 돼."
교완만이 한 손을 들고 단호하게 잘랐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만두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이연화는 상대의 배려에 감사하며 고개를 끄덕했다. 그때 밖에서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의 시작을 기대하며 축하하는 듯한 환성이었다. 교완만이 말했다.
"한불이 인사를 마친 모양이야. 이제 가보는 게 좋겠어."
"그래야겠네. 백천원이 오랜만에 소란스러운걸."
이연화가 눈을 빛내며 씩 웃었다. 방다병이 듣는다면 성격 나쁜 늙은 여우라 매도할 것이 뻔했으나, 이연화는 계획을 설계해 적을 잡는 과정을 꽤 즐겼다. 교완만이 묘한 시선을 보냈다. 그 눈길을 느낀 이연화가 의아하게 마주보자, 교완만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으응, 잠시 예전 너를 보는 것 같아서. 떠들썩한 분위기를 좋아하고, 대담하면서도 무모한 계획을 밀고 나가는 거."
이연화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어두워졌다. 과거의 자신을 떠올릴 때마다, 아직도 후회와 죄책감이 습관처럼 밀려들어 속이 얹히는 느낌이었다. 교완만의 낯빛도 따라 흐려졌다. 이연화의 팔을 잡고, 교완만은 상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상이. 예전의 너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나쁜 사람도 아니었어. 우리 모두가 그랬지. 지금도 그렇고."
이연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떠오르는 단어들은 있었지만 도무지 꺼낼 수가 없었다. 교완만의 입가로 옅은 미소가 감돌았다.
"그러니, 과거의 너를 너무 미워하지 말아줘. 용서는 네 몫이니까 내가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이상이를 적대하진 않았으면 좋겠어."
상대를 가만히 바라보다, 이연화는 곧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비록 전과 같은 사이가 아니라 해도, 교완만은 늘 좋은 사람이었다.
"노력할게. 고마워, 완만."
"그래. 네가 노력하지 않으면, 방 공자가 언제까지고 어미새처럼 잔소리를 할 거야."
교완만이 놀리듯 건넨 말에, 이연화가 짐짓 지긋지긋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다니까. 그 녀석 앞에선 무서워서 무슨 말을 못 하겠어. 사부를 어찌나 우습게 보는지." 교완만이 소리내어 웃었다. 완만과 마지막으로 시선을 나누고, 이연화는 발길을 돌려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향했다. 거대한 문 너머로 빼곡하게 들어찬 사람들이 보였다.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이연화가 모습을 나타내자 곧 조용해졌다. 수많은 시선이 날아와 꽂혔다. 이연화는 잠시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시선의 중심에 서는 일은 꽤 흔했는데, 지금 쏟아지는 눈길들은 그 종류가 조금 달랐다. 하긴, 지금껏 나를 잠재적 혼인 대상으로 보는 군중 앞에 섰던 적은 없었지. 이연화는 예의바른 미소를 띤 채, 살짝 고개를 숙여 모인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곧 크지 않지만 또렷하게 들리는 목소리가 울렸다.
"필부의 방에 응해 이렇게 모여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소생은 이연화라 합니다. 이상이라는 이름으로 아시는 분이 더 많겠지요. 과거에는 사고문을 이끌었으나, 현재에는 그저 강호를 떠돌고 소일이나 하며 산답니다."
이연화가 소박하게 말하며 빙긋 웃었다. 몇몇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모습을 보니, 사고문주라는 직위를 부정하는 이연화에 당황한 듯했다. 백여 명의 면면을 빠르게 훑으며, 이연화는 차분한 목소리로 이었다.
"본디 혼사에 본인이 직접 나서 이야기하는 경우는 드물지요. 이런 모양새가 법도에 어긋날까 조심스럽기도 합니다. 허나 제게 남은 혈족이 없는 고로, 제 가족에 가장 가까웠던 백천원 사람들에게 이런 일을 부탁하게 되었습니다. 도움을 받는 입장에서 그저 손을 놓고 뒷짐을 지는 것은 배은망덕한 일인지라, 이렇게 손님들을 맞으러 나왔습니다."
이연화가 정중히 맺었다. 모인 자들 중 누군가가 성급히 외쳐 물었다. 눈썹이 유난히 짙은 청년이었다.
"후보들은 어떻게 추리실 생각입니까?"
"아. 그 얘기를 하기 전에, 먼저 반드시 드려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이연화가 말하자, 사람들의 얼굴이 의아해졌다. 퍽 미안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며, 이연화가 조심스레 말했다.
"여러분들 중 누군가는 기분이 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사람을 속이는 것보다는 진실이 늘 중하다고 여겨, 말씀드리지 않을 수가 없군요. 제가 알기로, 구혼서를 내신 분들 중 저를 개인적으로 아는 분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런 염려가 들더군요. 어쩌면 이연화가 아닌, 과거의 이상이를 바라는 분들이 많을지도 모른다는 염려 말입니다. 하지만 조금 전 말씀드렸다시피, 소생은 더 이상 사고문주가 아닙니다. 그저 소일이나 하고 사는 이연화일 뿐이지요. 무공도 전만 못하고, 과거의 인맥을 이용할 능력도 없답니다."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그들 중 몇몇을 놀라면서도 불편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처음 질문했던 남자가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다분히 방어적이었다.
"혼사는 일생을 좌우할 대사이거늘, 전 사고문주의 조건을 보고 혼담을 넣은 것이 잘못되었습니까?"
"저런, 공자. 제 의도를 오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저는 그런 일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런 마음을 가지셨다면, 제가 적절한 대상이 되지 못할 테니 더 이상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주십사 미리 부탁드리는 것뿐이지요. 지금 여길 떠나신대도, 결코 얕거나 속되다고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일각의 여유를 드릴 테니, 부디 숙고하신 후 결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연화는 진정성이 가득한 표정을 지은 채 가볍게 예를 표했다. 군데군데서 웅성거림이 피어올랐다. 실제로 누군가는 자리를 떠나려는 듯 주섬주섬 짐을 챙기기도 했다. 조금 전까지 말하던 청년이 팔짱을 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럼 방에도 그런 부분을 명시해두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여기까지 오느라 얼마나 오래 걸렸는데. 이미 시간 낭비가 되었지 않습니까."
이연화가 내심 코웃음을 쳤다. 남자와 수행원의 차림새를 보니, 아마도 강호인이 아니라 어느 부잣집 도련님인 듯했다. 이연화는 그 청년에게 쓸데없이 집중하는 대신, 살짝 웃음을 띤 채 미동 없는 자들을 확인했다. 모인 사람들 중 명확한 목표를 가진 자들을 식별해야 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이렇게 많은 분들이 모여주실 줄 몰라 당황했습니다. 정확한 상황을 미리 알리지 못한 점은 사과드리지요."
"애초에, 전 사고문주의 인맥과 능력을 배제하면 누가 이 산중까지 혼담을 넣겠다고 오겠습니까? 심지어 얼마 전까지는 양인이었던 사람에게 말입니다. 이 문주, 충고드리건대 정말 좋은 혼사를 원하신다면 조건을 재고해보심이 좋겠습니다. 혼사가 과거의 명성이나 사람의 겉모습만으로 결정되는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남자가 이연화를 훑어보며 맺은 말에, 이연화는 조금 귀찮다고 생각했다. 자신이야 계획에 무관한 이이니 적당히 달래거나 무시할 수 있었지만, 곁에 선 석수는 당장이라도 입을 열어 불호령을 내릴 듯한 표정이었다. 운피구는 저런 자를 걸러내지 못한 스스로의 목을 조르고 싶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칼자루를 잡는 석수를 눈으로 저지하는데, 갑작스레 무뚝뚝한 목소리가 울렸다.
"시끄럽다. 갈 거면 얼른 꺼져."
내력이 섞여 실제보다 크게 들리는 음성이었다. 이연화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가면을 쓴 남자가 팔짱을 낀 채 청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는 분노보다도, 벌레를 내려다보는 듯한 냉랭함이 가득했다. 억. 이연화는 허공에서 사레가 들릴 뻔했다. 비록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나, 그 태도와 인영만으로도 상대를 도무지 오해할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이연화가 다급한 당혹이 섞인 눈으로 운피구를 돌아보았다(고개를 슥 돌리는 모양새가 영 수상했다). 별 적의도 없는 폭언에, 청년이 입을 벌리고는 적비성을 바라보았다.
"지금, 지금 뭐라고-."
"이연화에게는 관심이 없다고 했잖나. 그럼 빨리 꺼지라고."
"무슨, 무슨 저런 무례한 자가-."
"방금 전까지 남의 혼사를 두고 왈가왈부한 놈이 무례를 논하다니. 웃기는군."
적비성이 코웃음을 쳤다. 청년의 얼굴에 벌게졌다.
"내가 틀린 말을 했습니까?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무례라니-."
"그런가? 그럼 나도 사실을 말하지. 이연화 본인만으로 그 가치가 충분하지 않다고 여긴다면, 그건 네놈의 안목이 형편없다는 증거다. 그런 안목으로 후보를 추릴 때 살아남을 리도 없고, 네놈도 이상이 아닌 이연화에게 관심이 없다고 하니, 시간 낭비는 그만두고 사라져라. 나도 너 같은 놈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적비성이 파리를 쫓듯이 말했다. 드물게도 길게 말하네. 이연화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남자를 보았다. 하긴, 어쩌면 저 말이 일부분 적비성의 진심인지도 몰랐다. 과거의 이상이가 설령 무명의 떠돌이 검객이었더라도, 적비성은 무공 실력만으로 상대를 존중하고 겨루었을 터였다. 이연화가 가난하든 아니든, 유명하든 아니든, 잘생겼든 추하든 적비성에게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청년의 얼굴이 더욱 시뻘겋게 변했다.
"안 그래도 내 의지로 가려고 했소! 당신은 뭐요? 구혼하러 왔다는 사람이 그런 가면으로 얼굴을 가려도 되는 건가?"
"나는 네놈처럼 외모에 가치를 두지 않는다."
"내가 언제 외모에 가치를 두고-."
"이연화를 보는 눈을 보면 안다. 더 이상 보기 싫으니 꺼져."
적비성이 발정난 개를 쫓듯이 한 손을 휙 내젓고는 뒷짐을 지었다. 이연화는 순간 터질 뻔한 웃음을 겨우 참았다. 그야말로 어이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저 파격적인 행동이 짜증스러운 자를 향하니 구경하기에 퍽 재미있었다. "네놈!" 울그락푸르락하던 청년이 칼을 뽑을 것처럼 외친 찰나, 이연화와 적비성이 거의 동시에 한 방향을 돌아보았다. 고수의 감각에 거슬리는 기운이 느껴진 탓이었다.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방다병, 어때 보여?"
이연화가 시각적인 농담을 던지듯이 양팔을 슬쩍 벌려 보였다. 백천원 사람들이 무섭도록 진지한 눈으로 골라 내민 옷이었다. 단정하면서도 과히 하늘거리지 않게, 하지만 마냥 수수하거나 투박하지 않게, 기품이 있으면서도 절도 있게! 이연화는 그들이 옷의 취지를 설명하는 동안, 그저 예의바른 웃음을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옷가지가 어쨌든 별 상관은 없었으나-자신을 노리는 악당들이라면, 이연화가 산발을 하고 미친 사람처럼 나타나도 후보로 남고자 발악할 터였다-고생하는 백천원주들에게 굳이 반박할 마음은 더욱 없었다.
"어때 보이긴, 늙은 여우처럼 보이지."
방다병이 입을 비죽 내밀고는 팔짱을 끼었다. 이연화가 쯧쯧 혀를 차며 방다병을 삿대질했다.
"네가 그렇게 말했다고 석수한테 이른다. 이 옷을 찾느라 석 원주가 꽤 고생했다던데."
"누가 옷이 이상하다고 했어? 네가 음흉해 보인다고 했지. 옷은 괜찮아."
방다병이 얼른 정정했다. 이연화가 피식 웃으며 거울을 돌아보았다. 전체적으로 이상이가 예전에 입었던 전투복을 떠올리게끔 했지만, 그 색깔과 형태가 약간 달랐다. 선명한 붉은색이 아닌 은은한 녹색 옷은, 패기 넘치는 무인의 전투복이라기보다 그윽한 서생의 옷가지처럼 섬세하면서도 단아하게 늘어뜨려져 있었다. 머리장식도 평소에 하던 것과 달리, 아주 좋은 은과 옥으로 만든 물건이었다.
"이렇게까지 차려 입어야 해? 어차피 적에게 덫을 놓으려는 거잖아. 여러 사람한테 좋게 보일 필요는 없을 텐데."
방다병이 걱정인지 타박인지 모를 투로 물었다. 이연화가 머리장식을 살짝 손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나름대로 꾸민 외양과 달리, 그 어조는 거리에서 반쪽짜리 의원 노릇을 할 때처럼 한가로웠다.
"물론 그렇지만, 이 행사는 어쨌든 백천원이 주관한 거란 말이지. 내가 아무리 부정해도, 나는 아직 백천원에서 문주라 불리는 사람이고. 손님을 대하는 예의 정도는 제대로 갖추어야 나중에 백천원이 괜한 구설수에 오르지 않겠지. 나 때문에 다들 고생하고 있는데, 내가 좋게 보이지 않으면 백천원에 너무 배은망덕한 일이 아니겠어?"
"알았어, 알았어. 관 협의가 준 약은 제대로 챙겼지?"
이연화는 당연한 소리를 한다는 뜻으로 눈을 흘기며 품을 툭 두드렸다. 자신에게 특히 잘 맞았던 약이 네 포 들어 있었다. 관하몽은 설령 양인의 영향을 둔화시키는 억제제를 가졌다 해도, 희락기를 억지로 유도하는 약이나 독 따위에 절대 노출되지 않기를 당부했다. 불안정하고 강력한 형질은 보통 그런 것과 상성이 좋지 않았다. 방다병이 진지하게 이었다.
"아무리 이곳이 백천원이라도, 꼭 조심해야 해. 일이 끝나기 전까진, 먹거나 마실 때 꼭 독이 있나 없나 확인해 보고. 평소에 쓰는 물건이라도 한 번씩 점검해 봐. 장기간에 걸쳐 피부로 서서히 침투하는 약도 있잖아. 아, 그리고 혹시라도 초나 향이 타는 곳에는 접근하지 마. 자칫 잘못 다가갔다간 정신을 잃거나 운신이 힘들어질 수도 있으니까. 전에 아비랑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그리고-."
"아, 알았어. 방소보, 너 오늘따라 내 어머니처럼 군다."
이연화가 귀찮은 투로 이야기하며 오른손을 내저었다. 방다병이 울컥한 얼굴로 말하며 한 방향을 가리켰다.
"내가 안 그러게 생겼어? 밖에 너랑 혼인하고 싶다 모인 사람들이 백오십이나 되는데, 저 중에 적이 섞여 있단 거잖아."
"상이.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어."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연화와 방다병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여느 때처럼 아름다운 모습의 완만이 미끄러지듯 다가오고 있었다. 이연화를 본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그 반응에, 이연화는 음인이 된 후 거의 처음으로 약간 무안해졌다. 헛기침을 한 번 하자, 방다병은 이연화를 일별하고는 얼른 말했다. "난 먼저 가 있을게. 준비되면 와." 이연화가 대꾸하기도 전에, 청년은 척척 걸어 자리를 떴다. 흥미로운 눈으로 자신을 살피는 교완만을 향해, 이상이는 눈가를 살짝 긁으며 웃었다.
"음, 완만. 너한테 이런 상황에서 이런 차림을 보이려니 조금 민망하긴 하네. 사고문주일 때는 이런 식으로 입은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그냥 예인의 분장이라고 생각해주면 좋겠어."
"분장이라고 할 만큼 과하지 않아. 혼인하는 사람처럼 꾸며놓은 것도 아닌걸."
교완만이 가벼운 농을 던졌다. 이연화가 피식 웃었다. 완만은 형질이 변한 이상이를 보고 물론 놀랐지만, 더 이상 이연화가 고통받지 않는다는 사실에 순수하게 기뻐했다. 교완만과 연인 관계였던 옛적이었다면, 아무리 낫기 위해서라지만 음인이 될지 모를 위험을 감수했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이연화는 곧 내심 고개를 저었다. 하등 쓸모없는 생각이었다.
"상이, 중간에 그만해도 돼."
교완만이 팔을 가볍게 잡으며 건넨 말에, 이연화가 퍼뜩 돌아보았다. 교완만의 반듯한 이마로 엷은 근심이 걸려 있었다. 이연화가 빙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피구가 나 때문에 며칠을 못 잤는데, 그래서야 되겠어?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지."
"피구는 네가 힘들어하는 것보다, 그냥 며칠 못 자고 끝나는 편이 백배 낫다고 생각할 거야."
"나 이제 괜찮아. 정말로. 아직 예전의 2할 정도밖에 안 돌아왔지만, 전처럼 힘 좀 쓴다고 부서지거나 하지 않아."
"이런 건 단순한 힘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어서 그래. 난 평생 음인으로 살았지. 내가 어떤 어려움들을 겪었는지 알잖아. 몸이 크게 다치지 않더라도, 어떤 일들은 잊기 힘든 불쾌감을 남겨. 아마 네가 지금껏 모르고 살았던 종류의 불쾌감일 거야."
교완만이 조용히 맺었다. 이연화가 물끄러미 교완만을 응시했다. 자신과 교제하기 전에도, 교완만은 이미 천하의 미인들을 논할 때 빠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교완만이 절세 고수라는 사실보다, 아름다운 음인이라는 사실에 멍청하게 굴 때가 많았다.
"넌 그럴 때마다 어떻게 했어?"
"어릴 적엔 참을 때가 많았지만, 무공을 익힌 후로는...보통 때렸지? 가끔은 네가 대신 때리기도 했고."
교완만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이연화가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러면 너도 나랑 함께 때려주면 되겠네." 교완만이 짐짓 눈을 흘겼다. 이연화가 에이 소리와 함께 손을 저었다.
"내가 겪을 고난이 네 고난보다는 덜할 거야. 넌 각려초와 함께 늘 천하제일미 자리를 놓고 다퉜잖아? 나는 소문이 부풀려져서 그렇지, 그냥 옛날부터 양인이었던 남자라고. 얼굴을 보면 실망할까 싶어서, 면포라도 써야 하나 고민하던 참이었어."
이연화가 익살스럽게 말하며 눈 아래를 손으로 가려 보였다. 함께 웃고자 건넨 말이었으나, 교완만은 금방 웃지 않았다. 오히려 그 얼굴로 약간의 의심과 걱정이 함께 떠올랐다. 살짝 가늘어진 눈으로 이연화를 바라보다, 교완만이 떠보듯이 물었다.
"상이, 혹시...네가 평범하게 생겼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이연화가 눈을 깜박였다. 잠시 고민하다, 이연화는 뺨을 긁적이며 느리게 말했다.
"별로...내 외모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교완만이 한숨과 함께 이마를 짚었다. 이연화가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진실이었지만 어쩐지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미추에 대한 안목이라면 물론 있었으나, 그 기준으로 자신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본 기억은 별로 없었다. 그런 데에 신경을 쓰기엔 늘 너무 바빴다. 무공을 수련하거나, 사고문을 이끌거나 사파와 싸우는 일에 외모는 별 영향을 주지 못했다. 이연화가 변명처럼 늘어놓았다.
"물론 잘났다는 소리도 몇 번 들었으니 딱히 못났다고 여긴 적은 없지만, 그건 양인을 기준으로 했을 때니까. 나는 지금 음인이 됐잖아. 그러니까-."
"됐어, 무슨 뜻인지 알겠어. 상이, 방금 전 내가 했던 말 꼭 기억해. 일을 진행하다가 마음이 상할 것 같으면, 언제든 그만해도 돼."
교완만이 한 손을 들고 단호하게 잘랐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만두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이연화는 상대의 배려에 감사하며 고개를 끄덕했다. 그때 밖에서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의 시작을 기대하며 축하하는 듯한 환성이었다. 교완만이 말했다.
"한불이 인사를 마친 모양이야. 이제 가보는 게 좋겠어."
"그래야겠네. 백천원이 오랜만에 소란스러운걸."
이연화가 눈을 빛내며 씩 웃었다. 방다병이 듣는다면 성격 나쁜 늙은 여우라 매도할 것이 뻔했으나, 이연화는 계획을 설계해 적을 잡는 과정을 꽤 즐겼다. 교완만이 묘한 시선을 보냈다. 그 눈길을 느낀 이연화가 의아하게 마주보자, 교완만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으응, 잠시 예전 너를 보는 것 같아서. 떠들썩한 분위기를 좋아하고, 대담하면서도 무모한 계획을 밀고 나가는 거."
이연화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어두워졌다. 과거의 자신을 떠올릴 때마다, 아직도 후회와 죄책감이 습관처럼 밀려들어 속이 얹히는 느낌이었다. 교완만의 낯빛도 따라 흐려졌다. 이연화의 팔을 잡고, 교완만은 상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상이. 예전의 너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나쁜 사람도 아니었어. 우리 모두가 그랬지. 지금도 그렇고."
이연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떠오르는 단어들은 있었지만 도무지 꺼낼 수가 없었다. 교완만의 입가로 옅은 미소가 감돌았다.
"그러니, 과거의 너를 너무 미워하지 말아줘. 용서는 네 몫이니까 내가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이상이를 적대하진 않았으면 좋겠어."
상대를 가만히 바라보다, 이연화는 곧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비록 전과 같은 사이가 아니라 해도, 교완만은 늘 좋은 사람이었다.
"노력할게. 고마워, 완만."
"그래. 네가 노력하지 않으면, 방 공자가 언제까지고 어미새처럼 잔소리를 할 거야."
교완만이 놀리듯 건넨 말에, 이연화가 짐짓 지긋지긋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다니까. 그 녀석 앞에선 무서워서 무슨 말을 못 하겠어. 사부를 어찌나 우습게 보는지." 교완만이 소리내어 웃었다. 완만과 마지막으로 시선을 나누고, 이연화는 발길을 돌려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향했다. 거대한 문 너머로 빼곡하게 들어찬 사람들이 보였다.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이연화가 모습을 나타내자 곧 조용해졌다. 수많은 시선이 날아와 꽂혔다. 이연화는 잠시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시선의 중심에 서는 일은 꽤 흔했는데, 지금 쏟아지는 눈길들은 그 종류가 조금 달랐다. 하긴, 지금껏 나를 잠재적 혼인 대상으로 보는 군중 앞에 섰던 적은 없었지. 이연화는 예의바른 미소를 띤 채, 살짝 고개를 숙여 모인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곧 크지 않지만 또렷하게 들리는 목소리가 울렸다.
"필부의 방에 응해 이렇게 모여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소생은 이연화라 합니다. 이상이라는 이름으로 아시는 분이 더 많겠지요. 과거에는 사고문을 이끌었으나, 현재에는 그저 강호를 떠돌고 소일이나 하며 산답니다."
이연화가 소박하게 말하며 빙긋 웃었다. 몇몇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모습을 보니, 사고문주라는 직위를 부정하는 이연화에 당황한 듯했다. 백여 명의 면면을 빠르게 훑으며, 이연화는 차분한 목소리로 이었다.
"본디 혼사에 본인이 직접 나서 이야기하는 경우는 드물지요. 이런 모양새가 법도에 어긋날까 조심스럽기도 합니다. 허나 제게 남은 혈족이 없는 고로, 제 가족에 가장 가까웠던 백천원 사람들에게 이런 일을 부탁하게 되었습니다. 도움을 받는 입장에서 그저 손을 놓고 뒷짐을 지는 것은 배은망덕한 일인지라, 이렇게 손님들을 맞으러 나왔습니다."
이연화가 정중히 맺었다. 모인 자들 중 누군가가 성급히 외쳐 물었다. 눈썹이 유난히 짙은 청년이었다.
"후보들은 어떻게 추리실 생각입니까?"
"아. 그 얘기를 하기 전에, 먼저 반드시 드려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이연화가 말하자, 사람들의 얼굴이 의아해졌다. 퍽 미안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며, 이연화가 조심스레 말했다.
"여러분들 중 누군가는 기분이 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사람을 속이는 것보다는 진실이 늘 중하다고 여겨, 말씀드리지 않을 수가 없군요. 제가 알기로, 구혼서를 내신 분들 중 저를 개인적으로 아는 분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런 염려가 들더군요. 어쩌면 이연화가 아닌, 과거의 이상이를 바라는 분들이 많을지도 모른다는 염려 말입니다. 하지만 조금 전 말씀드렸다시피, 소생은 더 이상 사고문주가 아닙니다. 그저 소일이나 하고 사는 이연화일 뿐이지요. 무공도 전만 못하고, 과거의 인맥을 이용할 능력도 없답니다."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그들 중 몇몇을 놀라면서도 불편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처음 질문했던 남자가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다분히 방어적이었다.
"혼사는 일생을 좌우할 대사이거늘, 전 사고문주의 조건을 보고 혼담을 넣은 것이 잘못되었습니까?"
"저런, 공자. 제 의도를 오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저는 그런 일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런 마음을 가지셨다면, 제가 적절한 대상이 되지 못할 테니 더 이상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주십사 미리 부탁드리는 것뿐이지요. 지금 여길 떠나신대도, 결코 얕거나 속되다고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일각의 여유를 드릴 테니, 부디 숙고하신 후 결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연화는 진정성이 가득한 표정을 지은 채 가볍게 예를 표했다. 군데군데서 웅성거림이 피어올랐다. 실제로 누군가는 자리를 떠나려는 듯 주섬주섬 짐을 챙기기도 했다. 조금 전까지 말하던 청년이 팔짱을 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럼 방에도 그런 부분을 명시해두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여기까지 오느라 얼마나 오래 걸렸는데. 이미 시간 낭비가 되었지 않습니까."
이연화가 내심 코웃음을 쳤다. 남자와 수행원의 차림새를 보니, 아마도 강호인이 아니라 어느 부잣집 도련님인 듯했다. 이연화는 그 청년에게 쓸데없이 집중하는 대신, 살짝 웃음을 띤 채 미동 없는 자들을 확인했다. 모인 사람들 중 명확한 목표를 가진 자들을 식별해야 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이렇게 많은 분들이 모여주실 줄 몰라 당황했습니다. 정확한 상황을 미리 알리지 못한 점은 사과드리지요."
"애초에, 전 사고문주의 인맥과 능력을 배제하면 누가 이 산중까지 혼담을 넣겠다고 오겠습니까? 심지어 얼마 전까지는 양인이었던 사람에게 말입니다. 이 문주, 충고드리건대 정말 좋은 혼사를 원하신다면 조건을 재고해보심이 좋겠습니다. 혼사가 과거의 명성이나 사람의 겉모습만으로 결정되는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남자가 이연화를 훑어보며 맺은 말에, 이연화는 조금 귀찮다고 생각했다. 자신이야 계획에 무관한 이이니 적당히 달래거나 무시할 수 있었지만, 곁에 선 석수는 당장이라도 입을 열어 불호령을 내릴 듯한 표정이었다. 운피구는 저런 자를 걸러내지 못한 스스로의 목을 조르고 싶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칼자루를 잡는 석수를 눈으로 저지하는데, 갑작스레 무뚝뚝한 목소리가 울렸다.
"시끄럽다. 갈 거면 얼른 꺼져."
내력이 섞여 실제보다 크게 들리는 음성이었다. 이연화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가면을 쓴 남자가 팔짱을 낀 채 청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는 분노보다도, 벌레를 내려다보는 듯한 냉랭함이 가득했다. 억. 이연화는 허공에서 사레가 들릴 뻔했다. 비록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나, 그 태도와 인영만으로도 상대를 도무지 오해할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이연화가 다급한 당혹이 섞인 눈으로 운피구를 돌아보았다(고개를 슥 돌리는 모양새가 영 수상했다). 별 적의도 없는 폭언에, 청년이 입을 벌리고는 적비성을 바라보았다.
"지금, 지금 뭐라고-."
"이연화에게는 관심이 없다고 했잖나. 그럼 빨리 꺼지라고."
"무슨, 무슨 저런 무례한 자가-."
"방금 전까지 남의 혼사를 두고 왈가왈부한 놈이 무례를 논하다니. 웃기는군."
적비성이 코웃음을 쳤다. 청년의 얼굴에 벌게졌다.
"내가 틀린 말을 했습니까?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무례라니-."
"그런가? 그럼 나도 사실을 말하지. 이연화 본인만으로 그 가치가 충분하지 않다고 여긴다면, 그건 네놈의 안목이 형편없다는 증거다. 그런 안목으로 후보를 추릴 때 살아남을 리도 없고, 네놈도 이상이 아닌 이연화에게 관심이 없다고 하니, 시간 낭비는 그만두고 사라져라. 나도 너 같은 놈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적비성이 파리를 쫓듯이 말했다. 드물게도 길게 말하네. 이연화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남자를 보았다. 하긴, 어쩌면 저 말이 일부분 적비성의 진심인지도 몰랐다. 과거의 이상이가 설령 무명의 떠돌이 검객이었더라도, 적비성은 무공 실력만으로 상대를 존중하고 겨루었을 터였다. 이연화가 가난하든 아니든, 유명하든 아니든, 잘생겼든 추하든 적비성에게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청년의 얼굴이 더욱 시뻘겋게 변했다.
"안 그래도 내 의지로 가려고 했소! 당신은 뭐요? 구혼하러 왔다는 사람이 그런 가면으로 얼굴을 가려도 되는 건가?"
"나는 네놈처럼 외모에 가치를 두지 않는다."
"내가 언제 외모에 가치를 두고-."
"이연화를 보는 눈을 보면 안다. 더 이상 보기 싫으니 꺼져."
적비성이 발정난 개를 쫓듯이 한 손을 휙 내젓고는 뒷짐을 지었다. 이연화는 순간 터질 뻔한 웃음을 겨우 참았다. 그야말로 어이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저 파격적인 행동이 짜증스러운 자를 향하니 구경하기에 퍽 재미있었다. "네놈!" 울그락푸르락하던 청년이 칼을 뽑을 것처럼 외친 찰나, 이연화와 적비성이 거의 동시에 한 방향을 돌아보았다. 고수의 감각에 거슬리는 기운이 느껴진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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