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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2 0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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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이긴한데 진척은 없음 주의
쓰다보니 감정선이 좀 달라져서 1이랑 다른것 같다고 느껴도 이상한게 아니다...
인간들은 한번씩 잡도리를 할 필요가 있다. 그건 위무선이 기나 긴 세월을 살아오며 깨우친 것들 중 하나였다. 누군가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건방지고 귀여운 그의 제물은- 신선된 자로 깨우친게 고작 저보다 훨씬 약한 미물들을 쥐잡듯 잡는 것이냐고 묻겠지만 사실이 그러했다. 이건 위무선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나서 인간들 본인이 뿌린 피로 쓰여진 가르침이었다.
강징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아무튼 아주 아주 옛날의 위무선은 이릉을 뒤로 하고 번화가로 내려가 음주가무를 즐기는 인간들 틈에 슬쩍 섞이기도 했더랬다. 그게 시작이었다. 처음엔 그저 즐거웠다. 그는 꽤나 그 짓에 재능이 있었고 그 비범함을 알아본 인간들이 그를 알아서 떠받들었다. 기나 긴 세월동안 위무선은 어느 학문을 창시한 학자였고, 전쟁터를 휩쓴 백전불패의 장군이었고, 백성의 삶의 질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기술자였고, 천하를 뒤흔든 미인이었으며 천년의 영광을 누린 나라의 황제였다. 재물은 흘러 넘쳤고 향긋한 술이 바닥에 흘렀으며 침소에는 그를 갈망하는 자들이 지천이었다. 그때의 위무선은 자신의 능력을 한계까지 시험하는데 취해있었다. 자신의 정의대로 판단하고 거리낌없이 행동했다. 걸릴 것도 두려울 것도 없었다. 심심찮게 질투나 반란과 마주쳤지만 그에겐 벌레에 물리 것과도 비교되지 않았다. 그저 백년도 살지 못하고 흙으로 돌아가는 미물에 대한 동정과 자비로 넘어가주었다. 나도 참 순진했지.
불멸 속에서 흥밋거리를 찾는 자들이 으레 그렇듯, 결국 그 짓도 점점 질리게 되었다. 수많은 인간 군상을 흘려보냈다. 그 오랜 세월을 지나오면서도 특별히 위무선에게 흔적을 남긴 인간은 없었다. 필멸과 불멸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간극과 덧없는 애정이며 자비를 뿌리고도 주변을 돌아보지 않는 성정이 맞물린 탓이었다. 누군가 갈가리 찢기는 마음으로 사랑을 고백해도 눈물을 흩뿌리며 목숨을 구걸해도 위무선에겐 아무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다만 딱 하나, 그의 시선과 인정을 끌어내는 것이 있었다. 그건 선의였다. 희생정신, 혹은 자신만의 길을 가는 의지, 목에 칼이 들어와도 꺾이지 않는 신념을 가진 자들. 잊을만하면 나타나는 그들은 위무선의 존중을 이끌어 내는 얼마 되지 않는 이들이었다. 마주할때면 온몸에 전율이 흘렀고 살아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위무선조차 그 올바름을,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볍게 여기거나 무시해선 안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그 수가 매우 적었으나 어디에나 있었다. 운이 좋으면(물론 인간들에게) 조정에 있었고 운이 나쁘다면 길거리에 있었다. 위무선은 그들을 마주칠때마다 알게 모르게 그 선의의 배를 돌려주었고, 어려움이 닥칠때면 구원의 손을 내밀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에게 질릴 때쯤 위무선을 붙드는 것 또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언제였던가. 그즈음 위무선은 권력을 탐하는 것에 질려 낮은 자리를 찾아 전전하고 있었다. 시골 작은 약방의 의원, 시장 상인, 사당패 등등. 어떤 시점의 그는 이릉에서 작은 서당을 차리고 고아들을 모아 스승 노릇을 하던 중이었다. 어린 것들은 솔직하고 음험한 수를 부리지 않는다. 허리께나 겨우 미치는 작은 것들을 쓰다듬으며 소소한 낙을 느끼던 중이었다. 단지 걸림돌이 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살해당한 황제의 사생아를, 그의 제자였던 아이를 내려다보던 위무선의 눈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등뒤에는 울며 그의 옷자락을 쥐고 옹기종기 숨은 제자들이, 앞으로는 칼을 쥔 자들이 한가득이었다. 날붙이를 휘두르며 가까워지는 이들을 두고서도 위무선의 눈은 이미 차게 식은 시신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위무선은 생각했다. 과일 하나로 기뻐하며 순하게 웃던 얼굴을, 여름 햇빛이 쏟아지는 대청마루에서 그와 열띤 토론을 했던 날을, 그가 자라 이룰 수 있었던 수많은 일들과 이어졌을 인연들을. 이 미물들은 어떻게 이렇게 한치 앞도 보지 못한단 말인가. 문득 모든 것이 참을 수 없이 피곤하고 질렸다. 그가 어리석었다.
그날 위무선의 손에 수많은 목숨이 스러졌다. 위무선은 과거에 그가 번영시켰던 황실을 무너뜨리고 재앙을 풀었다. 황제궁 한복판에 나타난 괴한을 보고 손가락질 하던 황제의 목은 그대로 떨어졌다. 살아남은 이가 있었다해도, 대전에 걸린 고아한 초대 황제의 초상화와 붉은 눈을 한 귀신이 닮은 얼굴이라는 것을 알아보지는 못했으리라. 비명과 핏물이 발목에 감겨들었다. 위무선은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알았다. 처음 눈을 떴던 산으로, 이릉으로 돌아와 절벽을 깎고 돌을 세웠다. 무슨 소문이 어떻게 퍼졌는지 개미떼같은 군대가 산으로 기어들어왔다. 그대로 땅속에 묻어주었다. 그 짓을 몇번 반복하고 수년이 흐르자 용서와 자비를 바라는 기원과 제사가 매일같이 골을 울렸다. 위무선은 그를 스쳐간, 죽음이 아까웠던 선한 이들을 생각해 마지막으로 온갖 자비를 끌어모아 재앙을 거두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조건을 내걸었다. 너희 중 가장 순수하고 깨끗한 영혼을 가진 자를 10년마다 바쳐라. 그건 위무선이 인간들에게 내릴 수 있는 최고의 벌이었다. 신선의 존경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강인한 마음과 그것이 불러올 인간 전체의 가능성이며 잠재력을 빼앗는 일이었다.
당장의 재앙을 피한 것에 기뻐하는 인간들을 비웃으면서도 위무선은 괴로웠다. 그의 분노에 얼떨결에 휩쓸렸던 죄없는 목숨들을 생각했다. 그가 세상을 호령하던 시절에는 그의 발 밑에 그런 목숨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알려고 하지도 않고 그저 자아도취에 빠져있던 지난날이 부끄러웠다. 인간을 이해할 수도 없으면서 어떻게 그 위에서 정의나 자비란 것을 휘두를 생각을 했단말인가.
다시는 인세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난공불락의 산에 가둔 동안에도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위무선은 망각이라는 축복이 인간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내려진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할지 몰랐다. 밤낮으로 술을 퍼붓게 했던 고뇌도 점점 지나갔다. 다만 어떤 경험은 살아있는 것에게 깊은 흔적을 남기는 법이라. 정신이 바짝 마른 나뭇잎처럼 바스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는 일이라고는 술을 퍼마시거나 권속을 부려 산천을 돌보는 일뿐인 시간 속에서 그는 그저 존재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기를 또 얼마나 지났나.
문득 귓가에 울리는 악기 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제물이 올라오는 날이었다. 벌써 또 10년이 흘렀나. 슬슬 귀찮은데 이 짓도 그만두라고 할까. 가르침 또는 화풀이의 대상이었던 인간들은 죽어 썩고 다시 태어나 또 죽음을 몇 번을 반복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한 때 천지를 울렸던 위무선의 존재감을 기억하는 이들도 이젠 없다. 전국 각지에서 골라 바쳐지던 제물 또한 언제부터인가 이릉의 인간들만 올라왔다. 이제 여우 신선의 전설은 그의 터전인 이 이릉 안에서나 핏줄과 입을 타고 흐르고 흐를 뿐. 어차피 이릉에 터를 잡은 인간들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대로 완전히 단절되는 것도....
무심히 생각하던 위무선의 눈이 제물에게 향했다. 순간 위무선은 오랜만에 인간을 본 탓에 눈이 잘못되었는가 의심했다. 그럴리가 없게 태어났음을 알면서도. 깊은 한숨이 터져나왔다.
인간들은 제물을 바치라는 말은 의외로 오랫동안 지켰으나, ‘가장 깨끗하고 순수한 영혼을 가진’ 인간을 바치라는 조건은 와전된 모양이었다. 영혼에 대한 말만 쏙 빠져서. 그럴만도 하지. 위무선이 이제는 전설로 남았다 해도 땅을 핏물로 물들였던 여우 신선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고 새겨졌다. 신적인 존재가 인간을 왜 필요로 하는지 알 수 없었던 이들은 나름의 이유를 찾아 납득한 모양이었다. 잡아먹거나 탐하거나. 인간의 상상력은 거기까지다. 하여 제물로 바쳐지는 인간들은 속아 넘어왔거나 대가를 받았거나 어차피 살날이 남지 않은 이들 뿐이었다. 그 얕은 술수와 계산은 제물의 그것을 인간의 얼굴 가죽 밑으로 빤히 들여다볼 수 있는 위무선의 심기를 건드렸으나 그뿐이었다. 더는 개입하지 않기로 했고, 처음에 조건을 내걸때부터 끝까지 지켜지리라는 기대는 당연히 하지 않았기에. 인간들의 상상에 보답하지 못해 미안하지만 위무선은 모든 제물을 마주하는 즉시 기억을 지우고 이릉과 한참 떨어진 땅으로 내려보냈었다.
그래도 이건 좀 심했다. 제물이 눈을 한번 깜빡이는 동안 위무선은 그것의 머리 끝부터 발까지를 샅샅이 훑었다. 짧아서 자세히 볼 것도 없었다. 외지인인가. 마을 인간들과는 생김새가 확연히 달랐다. 애초에 제물로 바치기 위해 길러졌나. 애지중지 키운 티가 났으나 기저에 깔린 의도를 알 수 없다. 설마 납치한건 아니겠지. 아니, 애초에 먹이가 되거나 정기를 빨아들인다고 알고 있으면서 이런...이런 솜털 난 어린애를 올려보내다니. 흐려진 기억 속에서 허리에 매달린 어린 아이들이 스쳐지나갔다. 미물들이 선을 넘어도 단단히 넘었다. 아주, 아주 오랜만에 화가 치솟았다. 그랬는데.
-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앳되지만 단호한 목소리에 붙들린 위무선은 다시한번 천천히 제물을 살폈다. 그제서야 반짝이는, 살구씨 같은 눈과 마주쳤다. 위무선이 멍청하게 눈을 깜빡였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 하면서도 누구와도 닮지 않은 눈이다. 아니, 아닌가?
- 제물이 된 것은 제 선택이었습니다.
거짓말이 아니다. 단박에 간파했다. 이어 제물은 볼 수 없는 권속이 ‘강징’의 사연을 속삭이고 사라졌다. 위무선은 뚫릴 듯 한 시선 속에서 질타를 마주했다. 어디에도 매여있지 않은 눈. 감히 초월자에게도 제 뜻을 내비칠 수 있는 눈. 위무선이 어여쁘게, 가엾게 여기고 존중했던 눈, 그 눈! 손끝까지 전율이 내달렸다. 물속에 잠겨 있다가 끌어올려진듯, 깊은 꿈을 꾸다가 비로소 눈을 뜬 듯, 벼락을 맞은 듯 했다. 위무선은 깨달았다. 인간이 지긋지긋하다며 산으로 숨어들었던 그 오랜 유폐를 지나오고서도 그는 다시 이런 인간을 만나기를 갈망했다는 것을. 그를 살아있다고 느꼈던 감각들을 느끼고 싶어 했다는 것을.
비로소 제물의 진짜 의미에 맞는 인간이 나타났다. 강징은 이젠 의미 없어진 복수를 완성시키는 대신 오래된 권태를 깨우고야 말았다.
그는 정말 구제불능인 신선이었다.
하지만 나를 찾아온 것은 너다.
- 넌 별로 먹고 싶지 않아졌어.
그러니 억울할 것도 없지.
- 어차피 돌아가지도 못할텐데, 여기서 나랑 사는 건 어때?
역시 제물은 더이상 바치지 말라고 전해야겠다. 위무선이 부채를 펼쳐 고양감에 한껏 올라간 입꼬리를 가렸다. 인간들은 대화의 시작을 이렇게 했었지.
이미 알고있지만,
이름이 뭐야?
2편이긴한데 진척은 없음 주의
쓰다보니 감정선이 좀 달라져서 1이랑 다른것 같다고 느껴도 이상한게 아니다...
인간들은 한번씩 잡도리를 할 필요가 있다. 그건 위무선이 기나 긴 세월을 살아오며 깨우친 것들 중 하나였다. 누군가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건방지고 귀여운 그의 제물은- 신선된 자로 깨우친게 고작 저보다 훨씬 약한 미물들을 쥐잡듯 잡는 것이냐고 묻겠지만 사실이 그러했다. 이건 위무선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나서 인간들 본인이 뿌린 피로 쓰여진 가르침이었다.
강징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아무튼 아주 아주 옛날의 위무선은 이릉을 뒤로 하고 번화가로 내려가 음주가무를 즐기는 인간들 틈에 슬쩍 섞이기도 했더랬다. 그게 시작이었다. 처음엔 그저 즐거웠다. 그는 꽤나 그 짓에 재능이 있었고 그 비범함을 알아본 인간들이 그를 알아서 떠받들었다. 기나 긴 세월동안 위무선은 어느 학문을 창시한 학자였고, 전쟁터를 휩쓴 백전불패의 장군이었고, 백성의 삶의 질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기술자였고, 천하를 뒤흔든 미인이었으며 천년의 영광을 누린 나라의 황제였다. 재물은 흘러 넘쳤고 향긋한 술이 바닥에 흘렀으며 침소에는 그를 갈망하는 자들이 지천이었다. 그때의 위무선은 자신의 능력을 한계까지 시험하는데 취해있었다. 자신의 정의대로 판단하고 거리낌없이 행동했다. 걸릴 것도 두려울 것도 없었다. 심심찮게 질투나 반란과 마주쳤지만 그에겐 벌레에 물리 것과도 비교되지 않았다. 그저 백년도 살지 못하고 흙으로 돌아가는 미물에 대한 동정과 자비로 넘어가주었다. 나도 참 순진했지.
불멸 속에서 흥밋거리를 찾는 자들이 으레 그렇듯, 결국 그 짓도 점점 질리게 되었다. 수많은 인간 군상을 흘려보냈다. 그 오랜 세월을 지나오면서도 특별히 위무선에게 흔적을 남긴 인간은 없었다. 필멸과 불멸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간극과 덧없는 애정이며 자비를 뿌리고도 주변을 돌아보지 않는 성정이 맞물린 탓이었다. 누군가 갈가리 찢기는 마음으로 사랑을 고백해도 눈물을 흩뿌리며 목숨을 구걸해도 위무선에겐 아무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다만 딱 하나, 그의 시선과 인정을 끌어내는 것이 있었다. 그건 선의였다. 희생정신, 혹은 자신만의 길을 가는 의지, 목에 칼이 들어와도 꺾이지 않는 신념을 가진 자들. 잊을만하면 나타나는 그들은 위무선의 존중을 이끌어 내는 얼마 되지 않는 이들이었다. 마주할때면 온몸에 전율이 흘렀고 살아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위무선조차 그 올바름을,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볍게 여기거나 무시해선 안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그 수가 매우 적었으나 어디에나 있었다. 운이 좋으면(물론 인간들에게) 조정에 있었고 운이 나쁘다면 길거리에 있었다. 위무선은 그들을 마주칠때마다 알게 모르게 그 선의의 배를 돌려주었고, 어려움이 닥칠때면 구원의 손을 내밀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에게 질릴 때쯤 위무선을 붙드는 것 또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언제였던가. 그즈음 위무선은 권력을 탐하는 것에 질려 낮은 자리를 찾아 전전하고 있었다. 시골 작은 약방의 의원, 시장 상인, 사당패 등등. 어떤 시점의 그는 이릉에서 작은 서당을 차리고 고아들을 모아 스승 노릇을 하던 중이었다. 어린 것들은 솔직하고 음험한 수를 부리지 않는다. 허리께나 겨우 미치는 작은 것들을 쓰다듬으며 소소한 낙을 느끼던 중이었다. 단지 걸림돌이 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살해당한 황제의 사생아를, 그의 제자였던 아이를 내려다보던 위무선의 눈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등뒤에는 울며 그의 옷자락을 쥐고 옹기종기 숨은 제자들이, 앞으로는 칼을 쥔 자들이 한가득이었다. 날붙이를 휘두르며 가까워지는 이들을 두고서도 위무선의 눈은 이미 차게 식은 시신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위무선은 생각했다. 과일 하나로 기뻐하며 순하게 웃던 얼굴을, 여름 햇빛이 쏟아지는 대청마루에서 그와 열띤 토론을 했던 날을, 그가 자라 이룰 수 있었던 수많은 일들과 이어졌을 인연들을. 이 미물들은 어떻게 이렇게 한치 앞도 보지 못한단 말인가. 문득 모든 것이 참을 수 없이 피곤하고 질렸다. 그가 어리석었다.
그날 위무선의 손에 수많은 목숨이 스러졌다. 위무선은 과거에 그가 번영시켰던 황실을 무너뜨리고 재앙을 풀었다. 황제궁 한복판에 나타난 괴한을 보고 손가락질 하던 황제의 목은 그대로 떨어졌다. 살아남은 이가 있었다해도, 대전에 걸린 고아한 초대 황제의 초상화와 붉은 눈을 한 귀신이 닮은 얼굴이라는 것을 알아보지는 못했으리라. 비명과 핏물이 발목에 감겨들었다. 위무선은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알았다. 처음 눈을 떴던 산으로, 이릉으로 돌아와 절벽을 깎고 돌을 세웠다. 무슨 소문이 어떻게 퍼졌는지 개미떼같은 군대가 산으로 기어들어왔다. 그대로 땅속에 묻어주었다. 그 짓을 몇번 반복하고 수년이 흐르자 용서와 자비를 바라는 기원과 제사가 매일같이 골을 울렸다. 위무선은 그를 스쳐간, 죽음이 아까웠던 선한 이들을 생각해 마지막으로 온갖 자비를 끌어모아 재앙을 거두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조건을 내걸었다. 너희 중 가장 순수하고 깨끗한 영혼을 가진 자를 10년마다 바쳐라. 그건 위무선이 인간들에게 내릴 수 있는 최고의 벌이었다. 신선의 존경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강인한 마음과 그것이 불러올 인간 전체의 가능성이며 잠재력을 빼앗는 일이었다.
당장의 재앙을 피한 것에 기뻐하는 인간들을 비웃으면서도 위무선은 괴로웠다. 그의 분노에 얼떨결에 휩쓸렸던 죄없는 목숨들을 생각했다. 그가 세상을 호령하던 시절에는 그의 발 밑에 그런 목숨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알려고 하지도 않고 그저 자아도취에 빠져있던 지난날이 부끄러웠다. 인간을 이해할 수도 없으면서 어떻게 그 위에서 정의나 자비란 것을 휘두를 생각을 했단말인가.
다시는 인세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난공불락의 산에 가둔 동안에도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위무선은 망각이라는 축복이 인간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내려진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할지 몰랐다. 밤낮으로 술을 퍼붓게 했던 고뇌도 점점 지나갔다. 다만 어떤 경험은 살아있는 것에게 깊은 흔적을 남기는 법이라. 정신이 바짝 마른 나뭇잎처럼 바스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는 일이라고는 술을 퍼마시거나 권속을 부려 산천을 돌보는 일뿐인 시간 속에서 그는 그저 존재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기를 또 얼마나 지났나.
문득 귓가에 울리는 악기 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제물이 올라오는 날이었다. 벌써 또 10년이 흘렀나. 슬슬 귀찮은데 이 짓도 그만두라고 할까. 가르침 또는 화풀이의 대상이었던 인간들은 죽어 썩고 다시 태어나 또 죽음을 몇 번을 반복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한 때 천지를 울렸던 위무선의 존재감을 기억하는 이들도 이젠 없다. 전국 각지에서 골라 바쳐지던 제물 또한 언제부터인가 이릉의 인간들만 올라왔다. 이제 여우 신선의 전설은 그의 터전인 이 이릉 안에서나 핏줄과 입을 타고 흐르고 흐를 뿐. 어차피 이릉에 터를 잡은 인간들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대로 완전히 단절되는 것도....
무심히 생각하던 위무선의 눈이 제물에게 향했다. 순간 위무선은 오랜만에 인간을 본 탓에 눈이 잘못되었는가 의심했다. 그럴리가 없게 태어났음을 알면서도. 깊은 한숨이 터져나왔다.
인간들은 제물을 바치라는 말은 의외로 오랫동안 지켰으나, ‘가장 깨끗하고 순수한 영혼을 가진’ 인간을 바치라는 조건은 와전된 모양이었다. 영혼에 대한 말만 쏙 빠져서. 그럴만도 하지. 위무선이 이제는 전설로 남았다 해도 땅을 핏물로 물들였던 여우 신선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고 새겨졌다. 신적인 존재가 인간을 왜 필요로 하는지 알 수 없었던 이들은 나름의 이유를 찾아 납득한 모양이었다. 잡아먹거나 탐하거나. 인간의 상상력은 거기까지다. 하여 제물로 바쳐지는 인간들은 속아 넘어왔거나 대가를 받았거나 어차피 살날이 남지 않은 이들 뿐이었다. 그 얕은 술수와 계산은 제물의 그것을 인간의 얼굴 가죽 밑으로 빤히 들여다볼 수 있는 위무선의 심기를 건드렸으나 그뿐이었다. 더는 개입하지 않기로 했고, 처음에 조건을 내걸때부터 끝까지 지켜지리라는 기대는 당연히 하지 않았기에. 인간들의 상상에 보답하지 못해 미안하지만 위무선은 모든 제물을 마주하는 즉시 기억을 지우고 이릉과 한참 떨어진 땅으로 내려보냈었다.
그래도 이건 좀 심했다. 제물이 눈을 한번 깜빡이는 동안 위무선은 그것의 머리 끝부터 발까지를 샅샅이 훑었다. 짧아서 자세히 볼 것도 없었다. 외지인인가. 마을 인간들과는 생김새가 확연히 달랐다. 애초에 제물로 바치기 위해 길러졌나. 애지중지 키운 티가 났으나 기저에 깔린 의도를 알 수 없다. 설마 납치한건 아니겠지. 아니, 애초에 먹이가 되거나 정기를 빨아들인다고 알고 있으면서 이런...이런 솜털 난 어린애를 올려보내다니. 흐려진 기억 속에서 허리에 매달린 어린 아이들이 스쳐지나갔다. 미물들이 선을 넘어도 단단히 넘었다. 아주, 아주 오랜만에 화가 치솟았다. 그랬는데.
-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앳되지만 단호한 목소리에 붙들린 위무선은 다시한번 천천히 제물을 살폈다. 그제서야 반짝이는, 살구씨 같은 눈과 마주쳤다. 위무선이 멍청하게 눈을 깜빡였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 하면서도 누구와도 닮지 않은 눈이다. 아니, 아닌가?
- 제물이 된 것은 제 선택이었습니다.
거짓말이 아니다. 단박에 간파했다. 이어 제물은 볼 수 없는 권속이 ‘강징’의 사연을 속삭이고 사라졌다. 위무선은 뚫릴 듯 한 시선 속에서 질타를 마주했다. 어디에도 매여있지 않은 눈. 감히 초월자에게도 제 뜻을 내비칠 수 있는 눈. 위무선이 어여쁘게, 가엾게 여기고 존중했던 눈, 그 눈! 손끝까지 전율이 내달렸다. 물속에 잠겨 있다가 끌어올려진듯, 깊은 꿈을 꾸다가 비로소 눈을 뜬 듯, 벼락을 맞은 듯 했다. 위무선은 깨달았다. 인간이 지긋지긋하다며 산으로 숨어들었던 그 오랜 유폐를 지나오고서도 그는 다시 이런 인간을 만나기를 갈망했다는 것을. 그를 살아있다고 느꼈던 감각들을 느끼고 싶어 했다는 것을.
비로소 제물의 진짜 의미에 맞는 인간이 나타났다. 강징은 이젠 의미 없어진 복수를 완성시키는 대신 오래된 권태를 깨우고야 말았다.
그는 정말 구제불능인 신선이었다.
하지만 나를 찾아온 것은 너다.
- 넌 별로 먹고 싶지 않아졌어.
그러니 억울할 것도 없지.
- 어차피 돌아가지도 못할텐데, 여기서 나랑 사는 건 어때?
역시 제물은 더이상 바치지 말라고 전해야겠다. 위무선이 부채를 펼쳐 고양감에 한껏 올라간 입꼬리를 가렸다. 인간들은 대화의 시작을 이렇게 했었지.
이미 알고있지만,
이름이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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