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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0 23:55
배경은 진정령 수선계 맞는데 평행세계... 그 정도로 보면 될 듯 강징으로 너무 많은 것을 보고 싶어한 죄 아무튼 강징너붕붕 맞음
푸른 하늘에 만월이라는 용이 있었다. 그런데 이 용은 자애로운 마음으로 만물을 굽어살펴야 하는 존재임에도 유독 인간을 혐오했는데, 청정한 만월의 눈에는 그들이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족속으로만 보였던 것이다. 작은 일에도 매달리면서 서로를 헐뜯어대지 않나. 원한이라는 것에 인생을 통째로 얽매이지를 않나.
천제의 보살핌 아래 세상에 때묻지 않고 자란 순수의 용은 이 모든 일의 원흉인 인간이라면 응당 가지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반면 천제는 이런 만월이 부덕하다 보고 그를 인간계로 추방했다. 천제의 깊은 생각으로는 인간의 삶을 배워오라는 의미였으나…… 오만한 만월은 정반대로 천제에게 분노했고, 백지 위로 한 방울 뚝 떨어진 먹물이 무서운 속도로 번져나가듯 뼛속 깊이 타락했다. 추방당한 만월이 가장 먼저 배운 감정은 분노였다.
분노로 휩싸인 만월은 곧 파괴를 일삼는 흉포한 악룡으로 변모했다. 사랑과 자비를 모르고 분노와 혐오만을 몸에 익힌 만월은 그저 요괴와 다름없었다. 무차별하게 부수고 빼앗고 죽이는 것에도 끝내 질린 만월은 따분한 마음에 요괴들을 규합하여 요왕으로 올라섰다.
이름하여 요왕 망월, 오합지졸 요괴들의 영광스러운 첫 수장이었다.
요왕으로 군림한 지 수년이 흐르고 어느 날, 망월은 길거리에서 기이한 나무 한 그루를 만난다. 그것은 본래 단순 평범한 나무였으나, 긴 세월 동안 인간들에게 신목이라고 받들어지다 보니 마음이 깃들어버린 요목이었다. 다시 말해 나무 요괴. 망월은 나무 앞에서 간단히 제를 지내는 인간 무리를 보고 놀란다. 이상하게도 어쩐지 조금 부러우면서, 조금 탐이 났고, 끝에서는 매우 성가셨다.
심통 난 망월이 수작을 부려서 나무 앞에 있던 인간들을 모두 쫓아내자 신목이 슬며시 말을 걸어왔다.
어라, 한창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던 중이었는데요. 혹 대왕께서도 궁금하신지요?
그날 이후 망월은 이 괴상한 나무를 굳이 찾아 보러 가는 일이 많아졌다. 단지, 이야기 한 번을 듣기 위해서였다.
썩어도 한 번 준치는 영원한 준치인 법, 힘이 흘러넘치는 망월의 영향을 받아 신목은 곧 나무의 틀에서 벗어나 다른 요괴들처럼 움직일 수 있는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한때 그녀 자신이자 그녀의 모든 것이었던 상수리나무, 그 아래 더러운 수렁에서 기어나온 여인에게 망월은 허니栩泥란 이름을 주었다.
이리하여 두 존재는 가족으로 거듭나는 듯했으나…… 안타깝게도.
타락한 악룡은 포용할 줄 몰랐고, 무구한 신목은 미워할 줄 몰랐다.
백 년 가까이 의남매처럼 동고동락한 요괴들의 왕과 나무 요괴는 어느 날 인간에 대한 견해 차이로 크게 다투어 결국에는 완전히 갈라섰다. 갈라섰다고 표현했지만 사실 누군가 일방적으로 내쫓긴 것과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날 밤, 갈 곳 잃고 정처 없이 헤매던 허니는 망월의 반대파에게 붙잡혀 그대로 끌려가 살해당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갈가리 찢겨 죽었다. 신목도 당연 불태워졌다.
절망한 망월은 잿더미가 된 허니의 혼이 흩어지기 전 남은 것을 어렵사리 끌어모아 어느 부유한 임부의 태에 잉태시켰다. 이로써 임부는 쌍생아를 해산할 것이다. 한때 누군가 살려주자고 말했던 패배자들은 이제 모조리 죽여버리고 없다. 역시 살려주지 말았어야 했다. 결국에는 보복으로 돌아왔다. 인간 요괴 할 것 없이 이 땅 위에 살아 있는 모든 것은 하나같이 지독하다. 지독하게 원한만을 기억하고 은혜 따위 제 편의 좋게 잊을 뿐.
그러나……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 하나 지켜내지 못한 용은 피투성이 두 손으로 하늘에게 기도했다.
하늘이시여, 제 사랑하는 누이가 다음 생에는 부디…….
금자봉, 일찍이 양친을 모두 여읜 그녀는 마음을 나누는 가족이라곤 동생 금자훈 하나뿐이다. 아명은 유미봉요柳眉蜂腰에서 따와 ‘요’. 올해 열일곱이 된 아요는 겉보기에는 정숙하고 아주 참한 규중 아가씨다. 약관이 되면 금가를 떠나 살고 싶지만 숙부에게 의존적인 동생 꼴을 보아하니 먼 것 같다. 오늘은 늘 그래 왔듯이 숙부의 면을 치켜세워주기 위해 야렵 대회에 동석한 날, 요 며칠 새 연달아 꾼 악몽으로 마음이 뒤숭숭했던 금자봉은 홀로 멀리까지 나아갔다.
어차피 훤히 아는 숲이다, 길을 잃을 염려 따위 없었으나.
방심하던 금자봉의 심장으로 퍽 하고 날아든 건 시퍼런, 독화살이었다.
어째서?
금자봉은 비틀대며 황급하게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암살범의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았다. 감히 반격 불가능한 빈틈없는 한 수였다. 그러나 지면 판을 엎고 처음부터 다시 둘 수 있는 바둑이나 장기와 달리, 인생에서 둘 수 있는 목숨이란 말은 오직 태어나면서 주어진 하나뿐. 가슴을 정확히 파고 든 화살을 뽑지도 못하고 그대로 움켜쥔 소녀는 죽음을 직감하고는 두 눈을 그저 지그시 감았다. 모란을 금실로 수놓은 금성설랑포가 순식간에 양지에서 어둠으로 추락했다.
화살을 맞아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진 금자봉이 다시 깨어났을 때, 눈앞에 펼쳐진 건 놀랍게도 황천의 나루터가 아니라 태양이 어느새 하늘 저편으로 넘어간 숲이었다. 소녀는 이 모든 일을 겪고도 아직 살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쩐지 가슴께가 시큰거려 손을 얹어 보니 느껴져야 할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
박혔던 화살뿐만이 아니라 심장 고동, 그것까지도. 그렇다면 자신은 지금 대체 어떻게 살아 있는 것인가?
금자봉은 텅 빈 몸을 가까스로 일으키며 생각했다. 몸 사정이 어찌 됐든 밤의 숲은 낮과 달리 시시각각으로 변해 위험하다. 돌아가자, 돌아가야 해결된다. 일단 무작정 앞으로 나아가려던 찰나.
“너, 그 성치 않은 몸으로 어딜 가려 하느냐.”
고작 열 걸음, 열 걸음 앞에 사람이 아닌 무언가 있다.
한밤중의 어스름한 달빛 아래, 자욱하게 끼어 있는 안개 너머 누군가 천 년 묵은 고목처럼 장엄하게 서 있다. 가히 칠 척은 되어 보였다. 그에 맞서 두 발로 바닥을 디디고 서 있을 뿐인데도 분위기에 압도된다. 새카만 천이 거대한 몸을 꼼꼼하게도 감싸고 있지만 이 모든 것을 뚫고 나오는 억겁의 살기가 도저히 감추어지지 않는다. 흑의인黑衣人의 방향에서 불어오는 밤바람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섬뜩하게 와 닿는다.
무엇보다 손아귀에 쥐고 있는 새빨간 핏덩이, 달빛을 받아 더욱 선명히 소름 끼치게 보이는 둥근 고깃덩어리.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저것은 내 심장.
자신의 심장과 정면으로 맞닥뜨린 금자봉은, 이내 평정심을 잃고 창백하게 실색하여 풀썩 쓰러졌다.
미동 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던 흑의인은 소녀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힘이 다 빠져 늘어진 몸을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그의 손안에 있던 심장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주인에게 돌려준 건 아니었다. 그러나 언젠가 돌려줄 것이다. 누이가 잃어버린 물건은 항상, 늘 이 오라비가 칼산과 불바다를 건너서라도 되찾아왔으니까.
“찢겨 죽어, 불타 죽어…… 이제 하다 하다 암살까지 당해.”
시뻘겋게 물든 흑의인의 눈은 마치 미치광이 같다. 어쩌면 그는 이미 오래전 미쳤는지도 모른다. 저벅저벅, 아주 먼 옛날 천명을 등진 용이 거대한 몸을 이끌고 어둠 속으로 안개처럼 녹아들었다.
이 날, 대회 중 실종되었던 금가 여식이 하룻밤 만에 무사히 돌아왔다고 한다.
금자봉은 어제 일을 똑똑하게 기억했다. 그렇지만 어디에도 털어놓을 수 없었다. 누구도 믿지 못할 끔찍한 괴담 아닌가. 의원? 그야 거절했다. 짚을 맥이 없는데 와 봤자. 자신의 맥 따위 스스로도 명백히 알았다. 그 무엇도 짚어지지 않았으며, 왼쪽 가슴 또한 쥐 죽은 듯 매우 고요했다. 야렵 대회 중 홀로 실종된 것도 모자라 활시가 되어 돌아오다니. 이 집안에서 쫓겨나는 걸 잠시 상상하는 것만으로 온몸의 피가 바싹 말랐다.
아니 아니, 쫓겨나는 수준일까. 모두가 보는 앞에서 죽을지 몰라. 이미 죽었는데도 한 번 더.
금자봉은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 초조하게 사방으로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가장 중요한 암살당했던 일을 뒤늦게 떠올리고는 비로소 덜컥 멈춰 섰다. 평소 누군가에게 원한 살 만한 일을 저지른 적은 맹세코 없다. 소녀는 자신의 주제와 한계를 명확히 알았다. 그런 제가 죽어 봤자 아무에게도 득 될 일이 없다는 것까지.
그러니까 왜? 왜 자신은 어젯밤 죽어야 했나.
범인 말고는 대답해줄 수 없는 질문에 금자봉은 우울하게 침상 위로 엎어졌다. 스스로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분간조차 되지 않아, 자신에게 독화살을 쏜 범인은 상상마저 불허하다. 열일곱 소녀는 수마를 핑계 삼아 또다시 잠에 들었다. 긴긴 꿈만이 유일무이한 도피처였다.
꿈속에서는, 악몽을 꿨던 지난 며칠을 제외하고는 항상 대왕이라는 사람이 곁에 있어주었다. 어째서 하필 대왕이냐고? 이유는 단순, 자신이 그를 언제나 대왕이라고 높여 불렀다.
대왕, 오랜만이네요.
나흘 만에 보는 대왕의 얼굴은 어쩐지 반갑다. 사실 얼굴이라고 할 건 없는 게, 대왕은 늘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래.
어린아이를 겁주려는 듯 흉악하게 일그러진 용 가면을 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왕은 소녀에게 너무나도 아름답다. 그는 감히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기품이라는 게 있었다.
대왕과의 첫 만남은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현실이 아니라 단순히 꿈이란 걸 인지하기 시작했을 무렵, 소녀가 아주 어렸을 적이다. 당시를 회상해보면 대왕도 우연히 이 꿈속으로 흘러들어온 것 같았다. 당황한 그는 이 광활한 꿈속에서 무작정 소녀를 피해 다니고 피해 다니다, 어느 날 홀로 무언가 깨달았는지 이내 도망가기를 포기하고는 모든 걸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때, 금자봉은 본능적으로 그를 대왕이라고 호칭했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는 게 당시의 감상이다.
그는 대왕이라는 부름에 한참 멍하니 멈춰 서 있다 어린 소녀가 바지 자락을 툭툭 끌어 당기자 나직이 ‘그래’ 하고는 답해주었다. 대왕은 소녀가 하는 어떤 이야기든지 항상 묵묵히, 그저 잠자코 들어주었다. 양친을 모두 일찍이 여의고 이 휘황찬란한 금가에서 감히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던 약하고 어린 소녀는 본능적으로 생면부지의 귀인에게 꼭 매달렸다. 믿고 의지해야 할 숙부는 앳된 질녀를 하나뿐인 제 아들의 후계자 자리를 빼앗아갈지도 모르는 강력한 적으로서 경계했다. 쌍둥이 동생 또한 마찬가지로 같은 취급을 받았다. 그 애는 워낙 멍청해 아직까지도 전혀 모르겠지만.
금자봉이 흔치 않게 멍한 눈으로 과거의 일을 더듬고 있자,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던 대왕이 말한다.
안색이 나빠졌구나. 볼도, 그새 패였어.
그렇게 말하는 대왕은 어째서인지 슬퍼 보인다. 대왕에게서 그런 얼굴을 난생 처음 본 금자봉은 대답 대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무리 가면을 썼다고 하나 그가 이렇게까지 가까이 온 건 처음이어서, 몇 번 올려보다가 금방 아래로 고개를 내려버렸다.
반면 대왕은 개의치 않고 이어 말한다.
많이 아픈가?
……아팠다.
몸도 마음도 모든 게 지쳐 지독하게도 몹시 아팠다. 하지만 이 사람에게 아프다 말해도 나아지는 건 없었다. 아픈 건 계속, 홀로 아팠다. 금자봉이 열두 살이 되었을 쯤 대왕에게 제 집안의 이야기를 그만둔 이유이기도 했다. 늘 힘든 이야기밖에 없어 털어놓기가 민망해졌다. 비참해졌다.
어느새 열일곱 소녀의 눈에는 눈물이 어렸다. 지난 하루 너무나도 많은 일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아파요, 아픈데. 아파도 어떻게 할 수 없잖아요. 대왕이 고쳐주실 것도 아니잖아요. 아니, 고쳐주실 수도 없잖아요.
금자봉은 끝내 오랜 시간 외면해온 진실을 토해냈다.
당신은 늘 제 꿈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환영이니까. 이 대화도 저만이 기억하겠죠. 당신은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이니까.
흉악하게 일그러진 용 가면이 조금 흔들린 것 같다. 그러나 금자봉은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불쌍하게 훌쩍훌쩍 울기 시작한다. 용 가면을 쓴 귀인은 소녀의 볼에 자신의 손이 닿지 않도록 소매를 바싹 끌어 쥐고는,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들을 하나하나 닦아주기 시작한다. 진이 빠진 금자봉은 무거운 고개를 대왕의 손에 순순히 맡겼다. 그는 확실히 이상적으로 믿음직스러운 상대였다. 아, 너무나도 이상적으로.
너, 정말 그리도 내가 네 앞에 나타났으면 좋겠느냐?
그래요. 대왕이 진짜 대왕이 아니더라도, 그냥…… 그냥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을 것 같아요. 멀리서라도 괜찮으니까. 훌쩍
후회할 텐데.
나타나지도 않을 거면서 뭐를 후회한다는 거예요? 거짓말쟁이. 말만이라도 좋게 해주면 대체 어디가 덧나냐고요!
금자봉은 꿈속에서도 거절당하는 현실에 눈물이 또 울컥 솟았다. 환영이라는 걸 밝혔으니 이제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을지도 몰랐다. 눈물이 마르면 다시 울고 계속 운 끝에 꿈은 끝났다. 대왕은 정말 마지막까지 답을 주지 않고 눈물만 닦아주었다. 그러므로 환영이요 거짓이요 허구여라, 모든 게 달콤쌉싸름한 일장춘몽에 불과했다. 금자봉은 그 뒤로도 며칠이고 며칠이고 좁은 방에 스스로를 철저하게 가두었다.
사흘 뒤, 어려서부터 자진해 폐관수련에 들어가 수행에 정진했었던 운몽 강씨의 차남이 드디어 돌아왔다는 소식이 화려하게도 퍼졌다. 운몽 강씨는 흔치 않게 큰 잔치를 열어 그 초대장은 골방 속의 한 소녀에게도 툭 떨어졌다. 금자봉, 자신의 이름 석 자였다. 가기 싫었고, 가 봤자 괜한 눈치만 볼 게 명백했으나 금자봉은 곧 바쁘게 준비를 시작했다. 만약 자신의 멍청한 동생이 혼자 간다면 어떤 실수들을 저지를지 상상하는 것만으로 벌써 끔찍했다.
강만음이라…….
소녀는 가장 수수한 옷을 차려입으며 초대장에 적혀 있던 그의 이름을 우물우물 곱씹었다.
푸른 하늘에 만월이라는 용이 있었다. 그런데 이 용은 자애로운 마음으로 만물을 굽어살펴야 하는 존재임에도 유독 인간을 혐오했는데, 청정한 만월의 눈에는 그들이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족속으로만 보였던 것이다. 작은 일에도 매달리면서 서로를 헐뜯어대지 않나. 원한이라는 것에 인생을 통째로 얽매이지를 않나.
천제의 보살핌 아래 세상에 때묻지 않고 자란 순수의 용은 이 모든 일의 원흉인 인간이라면 응당 가지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반면 천제는 이런 만월이 부덕하다 보고 그를 인간계로 추방했다. 천제의 깊은 생각으로는 인간의 삶을 배워오라는 의미였으나…… 오만한 만월은 정반대로 천제에게 분노했고, 백지 위로 한 방울 뚝 떨어진 먹물이 무서운 속도로 번져나가듯 뼛속 깊이 타락했다. 추방당한 만월이 가장 먼저 배운 감정은 분노였다.
분노로 휩싸인 만월은 곧 파괴를 일삼는 흉포한 악룡으로 변모했다. 사랑과 자비를 모르고 분노와 혐오만을 몸에 익힌 만월은 그저 요괴와 다름없었다. 무차별하게 부수고 빼앗고 죽이는 것에도 끝내 질린 만월은 따분한 마음에 요괴들을 규합하여 요왕으로 올라섰다.
이름하여 요왕 망월, 오합지졸 요괴들의 영광스러운 첫 수장이었다.
요왕으로 군림한 지 수년이 흐르고 어느 날, 망월은 길거리에서 기이한 나무 한 그루를 만난다. 그것은 본래 단순 평범한 나무였으나, 긴 세월 동안 인간들에게 신목이라고 받들어지다 보니 마음이 깃들어버린 요목이었다. 다시 말해 나무 요괴. 망월은 나무 앞에서 간단히 제를 지내는 인간 무리를 보고 놀란다. 이상하게도 어쩐지 조금 부러우면서, 조금 탐이 났고, 끝에서는 매우 성가셨다.
심통 난 망월이 수작을 부려서 나무 앞에 있던 인간들을 모두 쫓아내자 신목이 슬며시 말을 걸어왔다.
어라, 한창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던 중이었는데요. 혹 대왕께서도 궁금하신지요?
그날 이후 망월은 이 괴상한 나무를 굳이 찾아 보러 가는 일이 많아졌다. 단지, 이야기 한 번을 듣기 위해서였다.
썩어도 한 번 준치는 영원한 준치인 법, 힘이 흘러넘치는 망월의 영향을 받아 신목은 곧 나무의 틀에서 벗어나 다른 요괴들처럼 움직일 수 있는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한때 그녀 자신이자 그녀의 모든 것이었던 상수리나무, 그 아래 더러운 수렁에서 기어나온 여인에게 망월은 허니栩泥란 이름을 주었다.
이리하여 두 존재는 가족으로 거듭나는 듯했으나…… 안타깝게도.
타락한 악룡은 포용할 줄 몰랐고, 무구한 신목은 미워할 줄 몰랐다.
백 년 가까이 의남매처럼 동고동락한 요괴들의 왕과 나무 요괴는 어느 날 인간에 대한 견해 차이로 크게 다투어 결국에는 완전히 갈라섰다. 갈라섰다고 표현했지만 사실 누군가 일방적으로 내쫓긴 것과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날 밤, 갈 곳 잃고 정처 없이 헤매던 허니는 망월의 반대파에게 붙잡혀 그대로 끌려가 살해당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갈가리 찢겨 죽었다. 신목도 당연 불태워졌다.
절망한 망월은 잿더미가 된 허니의 혼이 흩어지기 전 남은 것을 어렵사리 끌어모아 어느 부유한 임부의 태에 잉태시켰다. 이로써 임부는 쌍생아를 해산할 것이다. 한때 누군가 살려주자고 말했던 패배자들은 이제 모조리 죽여버리고 없다. 역시 살려주지 말았어야 했다. 결국에는 보복으로 돌아왔다. 인간 요괴 할 것 없이 이 땅 위에 살아 있는 모든 것은 하나같이 지독하다. 지독하게 원한만을 기억하고 은혜 따위 제 편의 좋게 잊을 뿐.
그러나……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 하나 지켜내지 못한 용은 피투성이 두 손으로 하늘에게 기도했다.
하늘이시여, 제 사랑하는 누이가 다음 생에는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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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자봉, 일찍이 양친을 모두 여읜 그녀는 마음을 나누는 가족이라곤 동생 금자훈 하나뿐이다. 아명은 유미봉요柳眉蜂腰에서 따와 ‘요’. 올해 열일곱이 된 아요는 겉보기에는 정숙하고 아주 참한 규중 아가씨다. 약관이 되면 금가를 떠나 살고 싶지만 숙부에게 의존적인 동생 꼴을 보아하니 먼 것 같다. 오늘은 늘 그래 왔듯이 숙부의 면을 치켜세워주기 위해 야렵 대회에 동석한 날, 요 며칠 새 연달아 꾼 악몽으로 마음이 뒤숭숭했던 금자봉은 홀로 멀리까지 나아갔다.
어차피 훤히 아는 숲이다, 길을 잃을 염려 따위 없었으나.
방심하던 금자봉의 심장으로 퍽 하고 날아든 건 시퍼런, 독화살이었다.
어째서?
금자봉은 비틀대며 황급하게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암살범의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았다. 감히 반격 불가능한 빈틈없는 한 수였다. 그러나 지면 판을 엎고 처음부터 다시 둘 수 있는 바둑이나 장기와 달리, 인생에서 둘 수 있는 목숨이란 말은 오직 태어나면서 주어진 하나뿐. 가슴을 정확히 파고 든 화살을 뽑지도 못하고 그대로 움켜쥔 소녀는 죽음을 직감하고는 두 눈을 그저 지그시 감았다. 모란을 금실로 수놓은 금성설랑포가 순식간에 양지에서 어둠으로 추락했다.
화살을 맞아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진 금자봉이 다시 깨어났을 때, 눈앞에 펼쳐진 건 놀랍게도 황천의 나루터가 아니라 태양이 어느새 하늘 저편으로 넘어간 숲이었다. 소녀는 이 모든 일을 겪고도 아직 살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쩐지 가슴께가 시큰거려 손을 얹어 보니 느껴져야 할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
박혔던 화살뿐만이 아니라 심장 고동, 그것까지도. 그렇다면 자신은 지금 대체 어떻게 살아 있는 것인가?
금자봉은 텅 빈 몸을 가까스로 일으키며 생각했다. 몸 사정이 어찌 됐든 밤의 숲은 낮과 달리 시시각각으로 변해 위험하다. 돌아가자, 돌아가야 해결된다. 일단 무작정 앞으로 나아가려던 찰나.
“너, 그 성치 않은 몸으로 어딜 가려 하느냐.”
고작 열 걸음, 열 걸음 앞에 사람이 아닌 무언가 있다.
한밤중의 어스름한 달빛 아래, 자욱하게 끼어 있는 안개 너머 누군가 천 년 묵은 고목처럼 장엄하게 서 있다. 가히 칠 척은 되어 보였다. 그에 맞서 두 발로 바닥을 디디고 서 있을 뿐인데도 분위기에 압도된다. 새카만 천이 거대한 몸을 꼼꼼하게도 감싸고 있지만 이 모든 것을 뚫고 나오는 억겁의 살기가 도저히 감추어지지 않는다. 흑의인黑衣人의 방향에서 불어오는 밤바람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섬뜩하게 와 닿는다.
무엇보다 손아귀에 쥐고 있는 새빨간 핏덩이, 달빛을 받아 더욱 선명히 소름 끼치게 보이는 둥근 고깃덩어리.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저것은 내 심장.
자신의 심장과 정면으로 맞닥뜨린 금자봉은, 이내 평정심을 잃고 창백하게 실색하여 풀썩 쓰러졌다.
미동 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던 흑의인은 소녀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힘이 다 빠져 늘어진 몸을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그의 손안에 있던 심장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주인에게 돌려준 건 아니었다. 그러나 언젠가 돌려줄 것이다. 누이가 잃어버린 물건은 항상, 늘 이 오라비가 칼산과 불바다를 건너서라도 되찾아왔으니까.
“찢겨 죽어, 불타 죽어…… 이제 하다 하다 암살까지 당해.”
시뻘겋게 물든 흑의인의 눈은 마치 미치광이 같다. 어쩌면 그는 이미 오래전 미쳤는지도 모른다. 저벅저벅, 아주 먼 옛날 천명을 등진 용이 거대한 몸을 이끌고 어둠 속으로 안개처럼 녹아들었다.
이 날, 대회 중 실종되었던 금가 여식이 하룻밤 만에 무사히 돌아왔다고 한다.
***
금자봉은 어제 일을 똑똑하게 기억했다. 그렇지만 어디에도 털어놓을 수 없었다. 누구도 믿지 못할 끔찍한 괴담 아닌가. 의원? 그야 거절했다. 짚을 맥이 없는데 와 봤자. 자신의 맥 따위 스스로도 명백히 알았다. 그 무엇도 짚어지지 않았으며, 왼쪽 가슴 또한 쥐 죽은 듯 매우 고요했다. 야렵 대회 중 홀로 실종된 것도 모자라 활시가 되어 돌아오다니. 이 집안에서 쫓겨나는 걸 잠시 상상하는 것만으로 온몸의 피가 바싹 말랐다.
아니 아니, 쫓겨나는 수준일까. 모두가 보는 앞에서 죽을지 몰라. 이미 죽었는데도 한 번 더.
금자봉은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 초조하게 사방으로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가장 중요한 암살당했던 일을 뒤늦게 떠올리고는 비로소 덜컥 멈춰 섰다. 평소 누군가에게 원한 살 만한 일을 저지른 적은 맹세코 없다. 소녀는 자신의 주제와 한계를 명확히 알았다. 그런 제가 죽어 봤자 아무에게도 득 될 일이 없다는 것까지.
그러니까 왜? 왜 자신은 어젯밤 죽어야 했나.
범인 말고는 대답해줄 수 없는 질문에 금자봉은 우울하게 침상 위로 엎어졌다. 스스로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분간조차 되지 않아, 자신에게 독화살을 쏜 범인은 상상마저 불허하다. 열일곱 소녀는 수마를 핑계 삼아 또다시 잠에 들었다. 긴긴 꿈만이 유일무이한 도피처였다.
꿈속에서는, 악몽을 꿨던 지난 며칠을 제외하고는 항상 대왕이라는 사람이 곁에 있어주었다. 어째서 하필 대왕이냐고? 이유는 단순, 자신이 그를 언제나 대왕이라고 높여 불렀다.
대왕, 오랜만이네요.
나흘 만에 보는 대왕의 얼굴은 어쩐지 반갑다. 사실 얼굴이라고 할 건 없는 게, 대왕은 늘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래.
어린아이를 겁주려는 듯 흉악하게 일그러진 용 가면을 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왕은 소녀에게 너무나도 아름답다. 그는 감히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기품이라는 게 있었다.
대왕과의 첫 만남은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현실이 아니라 단순히 꿈이란 걸 인지하기 시작했을 무렵, 소녀가 아주 어렸을 적이다. 당시를 회상해보면 대왕도 우연히 이 꿈속으로 흘러들어온 것 같았다. 당황한 그는 이 광활한 꿈속에서 무작정 소녀를 피해 다니고 피해 다니다, 어느 날 홀로 무언가 깨달았는지 이내 도망가기를 포기하고는 모든 걸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때, 금자봉은 본능적으로 그를 대왕이라고 호칭했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는 게 당시의 감상이다.
그는 대왕이라는 부름에 한참 멍하니 멈춰 서 있다 어린 소녀가 바지 자락을 툭툭 끌어 당기자 나직이 ‘그래’ 하고는 답해주었다. 대왕은 소녀가 하는 어떤 이야기든지 항상 묵묵히, 그저 잠자코 들어주었다. 양친을 모두 일찍이 여의고 이 휘황찬란한 금가에서 감히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던 약하고 어린 소녀는 본능적으로 생면부지의 귀인에게 꼭 매달렸다. 믿고 의지해야 할 숙부는 앳된 질녀를 하나뿐인 제 아들의 후계자 자리를 빼앗아갈지도 모르는 강력한 적으로서 경계했다. 쌍둥이 동생 또한 마찬가지로 같은 취급을 받았다. 그 애는 워낙 멍청해 아직까지도 전혀 모르겠지만.
금자봉이 흔치 않게 멍한 눈으로 과거의 일을 더듬고 있자,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던 대왕이 말한다.
안색이 나빠졌구나. 볼도, 그새 패였어.
그렇게 말하는 대왕은 어째서인지 슬퍼 보인다. 대왕에게서 그런 얼굴을 난생 처음 본 금자봉은 대답 대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무리 가면을 썼다고 하나 그가 이렇게까지 가까이 온 건 처음이어서, 몇 번 올려보다가 금방 아래로 고개를 내려버렸다.
반면 대왕은 개의치 않고 이어 말한다.
많이 아픈가?
……아팠다.
몸도 마음도 모든 게 지쳐 지독하게도 몹시 아팠다. 하지만 이 사람에게 아프다 말해도 나아지는 건 없었다. 아픈 건 계속, 홀로 아팠다. 금자봉이 열두 살이 되었을 쯤 대왕에게 제 집안의 이야기를 그만둔 이유이기도 했다. 늘 힘든 이야기밖에 없어 털어놓기가 민망해졌다. 비참해졌다.
어느새 열일곱 소녀의 눈에는 눈물이 어렸다. 지난 하루 너무나도 많은 일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아파요, 아픈데. 아파도 어떻게 할 수 없잖아요. 대왕이 고쳐주실 것도 아니잖아요. 아니, 고쳐주실 수도 없잖아요.
금자봉은 끝내 오랜 시간 외면해온 진실을 토해냈다.
당신은 늘 제 꿈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환영이니까. 이 대화도 저만이 기억하겠죠. 당신은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이니까.
흉악하게 일그러진 용 가면이 조금 흔들린 것 같다. 그러나 금자봉은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불쌍하게 훌쩍훌쩍 울기 시작한다. 용 가면을 쓴 귀인은 소녀의 볼에 자신의 손이 닿지 않도록 소매를 바싹 끌어 쥐고는,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들을 하나하나 닦아주기 시작한다. 진이 빠진 금자봉은 무거운 고개를 대왕의 손에 순순히 맡겼다. 그는 확실히 이상적으로 믿음직스러운 상대였다. 아, 너무나도 이상적으로.
너, 정말 그리도 내가 네 앞에 나타났으면 좋겠느냐?
그래요. 대왕이 진짜 대왕이 아니더라도, 그냥…… 그냥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을 것 같아요. 멀리서라도 괜찮으니까. 훌쩍
후회할 텐데.
나타나지도 않을 거면서 뭐를 후회한다는 거예요? 거짓말쟁이. 말만이라도 좋게 해주면 대체 어디가 덧나냐고요!
금자봉은 꿈속에서도 거절당하는 현실에 눈물이 또 울컥 솟았다. 환영이라는 걸 밝혔으니 이제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을지도 몰랐다. 눈물이 마르면 다시 울고 계속 운 끝에 꿈은 끝났다. 대왕은 정말 마지막까지 답을 주지 않고 눈물만 닦아주었다. 그러므로 환영이요 거짓이요 허구여라, 모든 게 달콤쌉싸름한 일장춘몽에 불과했다. 금자봉은 그 뒤로도 며칠이고 며칠이고 좁은 방에 스스로를 철저하게 가두었다.
***
사흘 뒤, 어려서부터 자진해 폐관수련에 들어가 수행에 정진했었던 운몽 강씨의 차남이 드디어 돌아왔다는 소식이 화려하게도 퍼졌다. 운몽 강씨는 흔치 않게 큰 잔치를 열어 그 초대장은 골방 속의 한 소녀에게도 툭 떨어졌다. 금자봉, 자신의 이름 석 자였다. 가기 싫었고, 가 봤자 괜한 눈치만 볼 게 명백했으나 금자봉은 곧 바쁘게 준비를 시작했다. 만약 자신의 멍청한 동생이 혼자 간다면 어떤 실수들을 저지를지 상상하는 것만으로 벌써 끔찍했다.
강만음이라…….
소녀는 가장 수수한 옷을 차려입으며 초대장에 적혀 있던 그의 이름을 우물우물 곱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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