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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27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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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은 갑자기 찾아왔다.

온 몸이 투명막에 감싸져있던 주자서가 갑자기 몸을 꿈틀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주 느리게 손을 뻗어 투명막을 밀어보지만 투명막은 질기게 늘어날 뿐 찢어지지 않았다.
온객행은 투명막 너머로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만졌다.

아슈...어서 찢고 나와.

오랫만에 만져보는 그의 손을 놓으며 온객행은 생각했다.

하루종일 뱀이 되었다가 인간이 되기도 하며 투명막과 씨름을 하는 주자서 옆에서 온객행은 물을 끓이며 습도를 높였다. 이러면 막을 찢기가 조금은 쉽다.마음같아서는 도와주고 싶지만 상처를 낼 수 있으니 참았다. 스스로 하는 것이 그에게도 좋았다.
고생은 하겠지만 안에서 꾸물거리며 느리게 발버둥을 치는 그의 모습이 온객행은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 때 뱀꼬리 쪽이 탕-! 하며 바닥을 치면서 막이 찢어졌다.

동시에 온객행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드디어 나온다.

얼마나 자라있을지 빨리 그를 보고 싶었다.

긴장으로 식은 땀이 난 손바닥을 옷에 문지르고 온객행은 다시 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저녁무렵이 되자 꼬리 쪽의 막이 거의 벗겨졌다. 집 안은 하루종일 끓여댄 물로 인해 천장에서 물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습했다. 투명막 안에서 꿈틀거림이 쎄진다.
탈피라고 하지만 보통 뱀과는 다르다. 반인반사는 거대한 고치를 만들어 그 안에서 몸을 키웠다. 탈피는 반인반사의 성장을 돕고 강한 힘을 줬다.


두 시진쯤 지나자 몸이 반쯤 모습을 드러냈다. 생각보다 느렸다. 주자서는 체력이 좋지 않은데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어느 순간 간간히 움직이던 꼬리도 잠잠해졌다.

"아슈, 조금 남았어. 힘내."

온객행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꼬리가 살짝 움직였다.

하지만 그것 뿐이었다. 꼬리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불안한 눈빛으로 일다경을 지켜본 후 온객행은 그를 꺼내기로 결심했다. 결심이 서자 망설이지 않았다. 바로 그의 위로 올라타 막을 찢기 시작했다. 주자서가 쉽게 찢지 못한 막들이 온객행의 손에서 종이처럼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찢겨진 막과 함께 미끈한 액이 사방으로 튀었다.
뱀의 모습이었던 주자서가 갑작스럽게 바뀐 온도에 몸이 수축하더니 사람으로 변했다.

온객행은 탈진한 주자서를 안고 옷을 입은 채로 욕탕에 함께 들어갔다. 따뜻한 물을 끼얹으며 눈을 뜨기를 기다렸지만 그는 지쳤는지 계속 잠만 잤다.
주자서의 몸 구석구석에 온객행의 손길이 닿았다. 몸에 붙어있던 자잘한 껍질과 미끌미끌한 액체들을 꼼꼼히 씻어냈다.

"잘 했어. 고생했어."

따뜻한 목욕물에 분홍빛으로 달아오른 얼굴에 입을 짧게 맞추고는 그를 꺼내 수건으로 닦아낸 후 침의를 입혔다. 놀랍게도 침의가 조금 짧아져 있었다.
얼굴은... 같아 보이지만 자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을 쳐다보는 그 까만 눈동자가 보고 싶다. 날이 밝으면 볼 수 있겠지.
온객행은 복받치는 감정을 누르며 주자서를 안고 침상에 누웠다. 그를 안고 자는 것이 오랫만이라 살짝 가슴이 뭉클했다. 가슴팍에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들으니 안도감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온객행은 두 팔로 그를 꼭 껴안고 눈을 감았다.




한밤중 서늘한 기운에 번뜩 눈이 뜨였다. 손을 뻗어 옆을 더듬자 아무도 없었다. 온객행은 몸을 일으켜 캄캄한 방 안을 둘러보었다.
주자서가 맨발로 창가에 서서 목을 꺾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등을 타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달빛에 반짝였다. 묘한 공기의 흐름이 낯설었다.

"아슈."

밖을 가만히 바라보던 주자서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버드나무 잎처럼 아름다운 눈썹이 높게 들리며 온객행을 쳐다봤다.

주자서를 향해 걷던 발걸음이 멈췄다.

온객행은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슈?"

온객행은 주자서의 황금빛 눈동자를 넋놓고 바라봤다.

방금까지 들리던 풀벌레의 소리가 사라졌다. 두 사람을 둘러싼 세계가 일순 고요에 빠졌다.
기묘한 고요함 속에 심장이 뛰는 소리만이 크게 들려왔다.




----



신기하게도 그날 밤 이후로 황금빛 눈동자는 다시 흑요석같이 까만 눈빛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온객행이 험악하게 찌푸린 표정을 보고 주자서는 놀랬고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바닥에 주저앉아 몸을 동글게 말았다. 그가 다가갔을 때도 주자서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두려워하며 얼굴을 가리기만 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괜찮아. 몇 번이고 달래고나서야 겨우 얼굴을 보여줬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올라갔을 때는 이미 예전과 같은 눈동자였다.

사실 온객행도 주자서와 같은 마음으로 당황했지만 더이상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그를 안고 달랬다.


잘못 본걸거야.
그게 아니라면 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탈피가 시작되던 밤, 주자서를 덮었던 비늘도 금색이었다.

마음 한구석 자리잡은 불안한 마음은 끝을 모르고 헛된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머리 속에 떠오른건 구연완이었다.

주자서와 세상에 나온 후 얼마되지 않아 혼란스러웠을때 잠시동안 그들을 돌봐준 사람이 있었다. 그는 혈통은 천족이었으나 어떤 이유로 땅으로 떨어져 마족이 되었다고 했다. 어떤 사람을 찾으며 세상을 헤매던 그는 운이 좋게도 도인을 만났고 십육특승법을 전수받아 이를 파고들면서 수련을 하며 세월을 쌓아갔다.

구연완은 자신의 업보를 갚기 위해 공덕을 베풀고 선을 쌓아 도탄에 빠진 민생을 돕고자 노력했다. 그는 절대로 음행과 살생을 하지 않았고 세끼를 선식으로만 떼웠다. 그렇다고 온객행에게 그런 것들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구연완은 그들이 인간들과 지낼 때 지켜야할 것들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의복을 갖추는 법, 사람처럼 식사를 하는 법도, 인간들의 생활습관 전반적인 것을 알려준 것은 구연완이었다.


도움을 청할 사람이라고는 그가 유일무이했다. 조만간 산을 내려가 그에게 서찰을 보내야겠다고 온객행은 생각했다.


----


동그란 눈이 또르르르 움직인다.
오른쪽, 왼쪽, 위, 아래
몸을 움직이고 싶지만 꽉 붙잡혀있어서 쉽지 않다.
주자서는 눈을 감고 있는 온객행의 얼굴을 슬쩍 본 후 팔을 위로 올린 채 숨을 멈추고 밑으로 쑤욱 내려왔다. 성공했다고 생각한 찰나 몸이 다시 끌려 올라갔다.

자는 줄만 알았던 온객행이 눈을 뜬 채 주자서를 쳐다보고 있었다. 놀란 주자서가 배시시 웃으며 온객행의 목을 감고 매달렸다. 배가 고팠는데 그가 일어나서 기뻤다. 그의 목에 얼굴을 비비며 몸에 올라탔다.

"어디 좀 보자."

두 손으로 주자서의 얼굴을 감싸고 살펴봤다.
근래들어 주자서는 하루사이에도 미묘하게 달라져 있다.
눈, 코, 입은 전부 그대로인데 어째 점점 더 예뻐지는 지 모르겠다.
어리둥절한 주자서는 만져지는 동안 그저 온객행을 쳐다봤다.

주자서가 검지 손가락으로 제 입을 가리키며 입술을 세네번 두드리자 온객행이 엄지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쓰다듬었다.

언제쯤 목소리가 트일까. 이번에 탈피를 마치면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까 내심 기대를 했었다.
태어날 때 뭔가 잘못되었었나. 온객행의 걱정과는 달리 구연완은 성대가 다친 것 같지는 않다고 했다.

'나름 이유가 있지 않겠나.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는다면 큰 일을 하기 위해 오랫동안 조용히 때를 기다리는 것이겠지.'

목소리를 내고 싶을 때를 기다린다.

그게 언제일까?

자신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분명 아름다운 목소리겠지.

"배고파?"

끄덕끄덕.

환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드는 그를 보며 온객행은 몸을 일으켰다.










맨 발로 풀 숲을 뛰어다니다가 상처가 났다.
아프다. 상처 사이로 새어나오는 붉은 피가 예뻤다.
물끄러미 상처를 보고 있으려니 그가 다가온다.
손에 발을 올려놓고 한껏 눈썹을 휘어 걱정스런 표정으로 상처를 본다. 그는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상처를 눌렀다.

"다칠 수 있으니까 신발을 벗으면 안된다고 했잖아. 많이 아파?"

나는 대답대신 그의 뺨을 만졌다. 적당히 시원한 피부. 날이 너무 더워서였을까. 그의 뺨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이 열기가 괴로워.

"아슈?"

그가 나를 부른다. 나는 입을 열어서 대답을 해보려고 했지만 늘 그렇듯이 아무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의 이름을 불러보고 싶다. 예전 함께 살았던 도사는 그를 '로온'이라고 불렀다. 나도 목소리가 나오면 실컷 불러야지.

목에 손을 대고 몇 번이나 입을 벙긋거리자 그가 웃었다. 시원하게 뻗은 눈길이 예뻤다. 손을 뻗어 눈꼬리를 매만졌다. 그리고 나는 그의 얼굴을 잡고 입을 맞췄다. 이 행동은 너무나 자주해서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그의 옅은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진다. 아니, 그건 나일지도 몰랐다.
다시 입술이 겹쳐지고 혀가 얽혔다가 떨어졌다.
혀와 혀를 맞대고 뜨거운 숨결을 주고받는 이 행위가 무척 기분이 좋았다.

몸이 간질거리는 느낌이 이상했다. 그는 분명 차가운데 몸에 열이 점점 오르는 느낌이다. 갑갑했다. 온 몸을 잡아뜯고 싶다. 어서 이 느낌에서 벗어나고 싶어. 이대로 그를 안고 날아오르고 싶다.






객행자서
메이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