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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11 20:06
진정령 ㅅ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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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됐다.
익숙하달지 그새 낯설어졌달지 모를 부정세 사람들의 얼굴을 보며 나는 그밖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어쩌다보니 당신네들 종주랑 나랑 같이 살게 됐습니다. 껄끄러워도 서로 참아봅시다. 그 말 외에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더 해 봐야 내가 데려온 혹덩이도 좀 봐달라는 것 정도가 다였다. 그 외에는 정말 더 할 말이 없었다.
하기야 섭회상이 친히 배를 띄우러 송호까지 갔던 것을 부정세 사람들이 모를 리 없으니, 그가 나를 부정세에 데려왔을 때 다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얼굴이었다. 그 중 절반은 그러면서도 내가 정말 여기 돌아왔다는 사실을 신기해하는 듯했으며, 나머지 절반은 그저 떨떠름해 하는 것 같았다. 나도 딱 그 감상이었다. 나를 반가워 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했는데 그 쪽이라고 편하진 않았다. 물론 부정세 대부분이 금광요와 나의 관계를 모른다. 그래서 그들 입장에선 내가 그들의 원수도 무엇도 아닐 수 있지만, 그래도...... 그저 불편했다. 그래서 나는 섭회상이 건네는 장죽을 그냥 묵묵히 받아들고 지난 반 년 간의 금연을 그만뒀다.
광산에서 떨어지며 생겼던 장죽의 갈라진 틈이 매끈하게 메워져 있는 것이 어쩐지 묘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위의 은색 줄은 또 뭐람. 마음에 안 드냐며 그새 내 눈치를 살피는 섭회상에겐 마음에 든다고 고개를 저었지만, 솔직히 어떤 흉터들은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는 편이 좋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섭회상이 그날 겨우 피가 멎은 손목을 말아쥐고 내가 머물던 방에 들어왔을 걸 생각하면, 침상 위에 내던져져 있던 내 장죽을 주워들어 그걸 고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의 그 심정을 생각하면...... 메워야지. 뭐 어쩌겠는가.
그렇다곤 해도, 부정세에서의 새로운 생활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적응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친정이라 할 만한 곳이 없는 데다, 내가 제발 이상한 거 하지 말자고 섭회상에게 애걸복걸해서, 혼례는 한 듯 안 한 듯 조용히 지나가긴 했다. 그래도 일단 종주의 도려라는 신분이 되었으니 나를 부르는 호칭이나 사람들의 대우가 변하는 건 어쩔 수 없었는데, 그게 너무 싫었다.
왜 종주들은 부인을 하나만 둘까. 여러 명 있어서 그중 제일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않는 부인 정도가 되고 싶다. 그런 생각을 했으나 섭회상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괜시리 그를 서운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난 진심인데. 혼인을 하든 하지 않든,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그를 향한 내 마음이 바뀔 일은 없을 것이라 도려니 부인이니 뭐니 하는 호칭이 내게는 별 의미가 없었다. 죽어서 같이 묻힐 수 있다는 게 유일하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섭회상이 나를 다른 사람들 앞에서 뭐라 칭하든, 적어도 나에게 말을 걸 때는 부인이니 뭐니 하는 낯간지러운 호칭을 쓰지 않고 이름으로 부르는 것도 다행이었다. 사실 이름이라기보다는 그의 말대로 애칭에 가까웠지만, 무슨 상관 있겠는가. 어차피 밀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부를 사람은 섭회상뿐이었다.
아키라가 괜히 나를 그 이름으로 부르겠다고 뻗댈 줄 알았는데 안 그러는 게 신기했다. 그 애는 생각보다 부정세에 잘 적응했다. 말 배우랴 글 배우랴 수련하랴 사실 적응할 새 없이 바쁘다고 보는 게 더 맞겠지만, 매 식사 때마다, 아니면 시간 날 때마다 만나서 보면 두 눈이 초롱초롱한 게 자기 생활에 무척 만족하는 듯싶었다.
섭회상이 아키라를 무척 좋아했다. 너무 좋아해서 식사 때마다 아예 꼬박꼬박 아키라를 부르지 뭔가. 나보다 섭회상이 그 애를 더 챙기는 게 조금 머쓱했지만, 내가 뭐 내 자식으로 아키라를 데려온 것도 아니고 종주가 자기네 문하생이랑 돈독하게 지내면 좋은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종주님이 스승님을 얼마나 좋아하시는데요! 복 받은 줄 알아요.
-그래, 그래.
-맨날 동영에서 저희가 뭐 했는지 물어보신다고요. 스승님이 그때 어땠는지, 많이 아팠는지......
-그래?
-그래라는 말 밖에 못 해요?
-까불지 마라.
나는 아키라의 입에 대충 당과를 하나 더 물려준 뒤 이제 그만 오후 치 공부하러 가라고 돌려보냈다. 그러고 나서 복도를 걷다 보면 지나가는 수사들이 나에게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때마다 뻣뻣하게 굳는 걸 티내지 않으려 열심히 노력해야 했다.
불편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버티는 수밖에. 섭회상이 내가 여기 적응하길 바라기도 했고, 나도...... 섭회상의 곁에 있을 수 있다면 이 정도 대가는 극히 가벼운 것일 테다. 그런 생각을 하며 부사의 집무실에 들어서긴 했지만.
-오셨습니까.
막상 그 공간의 주인이 거기 떡하니 있는 걸 보니 기분이 더러웠다. 차라리 총령 쪽은 그냥 서로 고개만 끄덕이고 끝이었어서 마음이 편한데, 이 사람은 자꾸 말을 건단 말이다. 늘 부사님이라 불러야 했던 사람이 나에게 존대를 하는 게 영 적응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대충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말을 놓으라는 것 아닌가. 근데 그러면서 웃고 있는 얼굴이 밝은 가을 햇빛을 받아 소름끼쳤다.
섭회상 보고 싶다. 나는 고개를 돌려 괜히 문가를 두리번거리며 생각했다. 그게 현실도피라는 걸 모르기만 해도 편할 텐데, 너무 잘 알았다. 결국 한숨을 내쉬며 다시 눈을 마주하자 눈 앞의 남자는 정말 여우같게도 웃었다.
-세 분의 종주님을 모셨는데, 종부님도 세 분 모시게 되었군요.
죽을란다. 그렇게 말은 못 하고 뭐 씹은 얼굴로 고개만 끄덕이다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악연이라고는 해도 섭회상의 사람이고 섭회상에게 충성하는데, 얼굴 맞대고 대충 살 수 있을 정도로는 관계를 개선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제가 마음에 안 든다는 것 압니다. 미안해요. 하지만......
-말 놓으십시오.
-서로 존대하죠, 그럼.
말꼬리 잡긴.
-아무튼 이제 제가 뭘 해야 하는지 좀 알려주시면 그대로 하겠습니다.
드물게 당황한 듯한 부사의 얼굴을 보며 나는 아주 조금 통쾌했다.
-뭘 해야 하는지, 라고 하시면......
-말 그대로입니다. 제가 배운 게 없어서 다른 세가 종부님들 만큼 뭘 할 수 있진 않겠지만, 그래도 해야 할 일이 있을 거잖습니까.
-우선은 몸부터 돌보시는 게 우선이고......
-살 만합니다.
부사는 나를 잠시동안 빤히 바라보더니 물었다.
-아직 신혼을 즐기실 때 아닙니까.
신혼 좋아하네.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게 대답이 되었는지 부사가 말했다.
-신혼이 아니더라도, 몸을 돌보시긴 해야 할 텐데요. 한 달 전보다 지금 더 낯빛이 좋지 않으신 걸 보면.
-그건 그냥 밤마다 잠을 못 자서 그럽니다.
부사 표정이 이상해져서 왜 그런가 잠깐 생각하다가 입 안을 씹었다. 그거 아니다. 그거 아니라고. 하지만 그거 아니라고 말해봐야 분위기가 더 이상해질 걸 알아서 나는 그냥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면 그래도 나보다 몇십 년 더 산 것 답게 상대편이 먼저 화제를 돌렸다.
-그럼 마침 오신 김에 이것들을 좀 검토해주시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내밀어진 종이뭉치를 받아들었다가, 그게 무엇인지 깨닫곤 그대로 굳었다. 그건 족보였다. 여러 다른 집안들의. 왜 섭회상의 부사가 다른 집안 족보를 살피고 있는지 그 이유를 나는 잘 알았다.
-종주의 동생이 있고 방계에도 건강한 아이들이 많은 남씨와 달리, 섭씨는 후사 문제를 더 이상은 미룰 수 없으니까요.
고소 남씨...... 종주 동생이래봐야 후사가 문제인 거면 의미 없을 텐데. 단수잖아.
-운몽 강씨는요?
-그쪽도 이제 금여란이 종주가 되었으니 본격적으로 강씨 집안 후사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할 겁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침묵이 흐르는 동안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그새 검을 안 잡았다고 손이 조금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그게 징그러웠다. 하지만 그것도 받아들여야 하는 거겠지.
허울뿐이래도 금단도 있고, 어떻게 힘써 보면 일 년 내로 애 하나 정도는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내가 기침을 하면서도 그런 생각을 하던 때였다.
-이건 종부님의 책임이 아닙니다.
종부라고 불린 데 인상을 써야 할지,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물어야 할지 나는 일 초 정도 고민하다가 후자를 택했다.
-뭐가 말입니까?
-종주께서는 꽤 오랫동안, 이리 하실 생각이셨으니까요.
그러니까 내가 송호에서 제대로 들었던 게 맞다는 거지. 나는 섭씨 피 운운하던 섭회상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왜 그런 생각에 도달했는진 알지만, 그래도...... 말리지 않으셨습니까?
-처음엔 당연히 반대했지요. 하지만 피와 이름, 둘 중에 자기가 무엇을 남겨야겠느냐고 종주께서 물으셨을 때, 저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사의 눈가에 아주 희미하게 진 주름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나서도 사실, 그 분이 언젠가 좋은 분을 만나 자기 자식을 얻고자 하는 욕심을 가지게 되시길 바랐습니다. 하지만 일이 이리 되어버렸으니, 받아들일 수밖에요.
-미안하게 됐습니다.
멍하니 말하는데, 부사가 고개를 저었다.
-종주님의 모친께서는 출산으로 인해 몸이 급격히 약해지셨고, 결국 지금의 종주님보다도 어린 나이에 세상을 뜨셨습니다. 종주님께서 후사에 관한 논의를 차일피일 미루실 때마다, 아마 그 영향이 있지 않을까 다들 생각했지요.
부사의 시선이 나를 가볍게 훑었다.
-종부께서 건강하시다면 또 몰라도 그렇지도 않으니...... 당연히 종주께서는 아이를 원치 않으실 겁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는 아닙니다. 사실 제 이해가 필요한 일도 아니지요. 저는 아랫사람이고, 종주께서 결정을 내리시면 그제야 제 일이 시작되니까요.
그래서 자기가 지금 이 족보들을 보고 있는 것이라고, 부사는 가볍게 말했다. 나는 그의 말투가 지나치게 담담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정체를 숨기고 부정세에 머물던 은은한 적의가 지금은 느껴지지 않는 것도 뒤늦게 깨달았다.
-혹시 종주님에 대해 더 궁금하신 게 있으시면 뭐든 여쭤보시지요.
뭐지? 왜 잘해주지? 나는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대놓고 그렇게 물으면 너무 멍청해보일 것이고, 안 그래도 자기 종주의 취향 때문에 심란한 사람을 더 심란하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생각을 잠시 정리한 뒤 질문했다.
-제가 정말 여기 계속 있기를 바랍니까?
내가 일찍 죽거나 뭐 그러길 바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며 눈 앞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면, 곧 그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가문을 위해서라면 물론 그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기 어렵겠지요. 하지만 저는 종주님의 선친을 모셨고, 종주께서 태어나 자라시는 것을 모두 지켜보았습니다. 종주께서 겨우 찾으신 행복을 지켜야 하는 입장이지, 무너뜨려야 하는 입장이 아닙니다. 종부님께 악감정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더 이상은.
나는 어쩐지 가라앉은 분위기를 느끼며 마른 입술을 핥았다.
-악감정이 있긴 했다는 걸 인정하시는 거군요.
-그야, 뭐......
부정하지 않는 부사를 보며 나는 작게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을 그렇게 쥐어패요?
-자네...... 죄송합니다. 종부께서 못 이겨 떠나시기를 바랐습니다. 종주께선 오히려 종부님을 잡아두려 하셨고, 그게 종부님을 역으로 이용하기 위함이라 하셨지만, 그때 이미 제 눈에는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게 보였으니까요.
또 다시 할 말을 잃은 나는, 잠시 멍하니 침묵을 지키다가 물었다.
-종주님도 알고 계셨습니까?
엄청 중요한 질문은 아닌데, 궁금하긴 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내 궁금증을 전혀 해결해주지 못했다.
-저도 모릅니다.
-예?
-관련해서 종주님과 한 번도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으니까요. 종주께서 그만두라고 말을 꺼내셨을 때는 종부께서 못 참고 터뜨리셨던 그 칠석날 이후라, 종주님이 그 일로 알게 되신 것인지, 전부터 이미 알고 계셨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부사는 섭회상과 그나마 가장 가까운 이일 텐데, 그조차도 섭회상의 속마음을 모른다. 그 사실을 곱씹으며 나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수사에게 주화입마가 온 건. 종주님이 관여 안 하신 게 맞습니까?
-그것도 알 수 없습니다.
거짓말을 하는 눈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내 생각이 궁금하다는 듯 부사가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종주께서 꾸미신 일이라 생각하시나요?
-제 생각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진심이었다. 하필이면 그 수사가 주화입마로 죽고, 내가 섭회상에게 내 과거를 밝히고, 음호부에 대해 더 궁금해 하게 되고 금광요와 섭명결에 대해 알게 된 그 모든 흐름을 우연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아니면 섭회상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계획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운명이든 섭회상의 마음이든 나에게는 나보다 상위 차원의 것들이어서, 해가 왜 뜨는지 고민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나도 그냥 현실을 현실 자체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만약 섭회상이 내가 궁금해 하길 원하면, 그때 가서 궁금해 하면 되지 않겠는가.
그러는 게 다른 사람 눈에 단순무식해 보인다면, 그러라지. 그러나 부사는 제법 호의적인 시선을 나에게 보내고 있었다.
-행로령에 대해 처음 물으셨을 때, 제가 드렸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섭씨 사람이 되실 의향이 있다면 뭐든 말씀드릴 수 있다고 했지요. 그 약속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러니 필요하신 게 있다면 언제든 찾아주십시오.
나는 이번에도, 정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굳어있다가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괜히 어색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손에 들린 족보에 시선을 박았다.
-양자를 들이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 생각해두신 곳은 있어요?
-종주님의 외가쪽부터 차근차근 알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외가요?
-종주님의 부친과 외숙께서는 서로 절친한 친우 사이셨습니다. 사일지정 때도 가장 먼저 섭씨에 협력한 가문이 종주님의 외가였지요. 믿을 만한 곳이고, 지금 종주로 계신 종주님의 사촌도 인품이 좋기로 유명한 분이니, 지금으로선 그곳이 가장 안전한 후보군입니다.
-하지만 물건도 아니고 아이를 데려오는 건데, 직계 아이를 데려오긴 어려울 테고...... 데려온대도 방계쪽 아이를 데려오게 되지 않겠습니까?
내가 알기로 직계가 훌륭하다고 방계가 훌륭한 건 아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내 생각이 맞다는 듯 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뿐만 아니라 아이는 쉽게 생기지도 않고 하루가 빠르게 자라기도 하니, 뜻대로 되기 어렵지요. 하여 한동안은 이 일이 제 주업무가 될 듯합니다. 종부님께도 종종 의견을 구하게 될 터이고요.
-그렇겠죠.
그러면서 또 다시 기침을 하자, 부사는 잠시 내 안색을 살피더니 물었다.
-원하는 조건이 혹시 있으십니까?
-딱히...... 싹수 노란 애만 아니면 됩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종주님을 닮으면 제일 좋긴 하겠죠.
섭회상 닮은 어린 애...... 진짜 잘 기를 자신 있다. 내 생각을 읽었는지 부사는 웃음을 참는 듯 아니면 착잡한 듯 묘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
그 뒤로 나는 부사실에서 늦은 오후까지 시간을 보내다가 나왔다. 족보를 열심히 보다가 몇 번 꾸벅거렸더니 부사가 어느 순간부터는 나에게 섭씨 재산 목록을 보여주고 있었는데, 아직 열지도 않은 광산 소재가 여러 개 적혀 있는 걸 보고 잠이 확 깼다.
솔직히, 섭씨 이제 다 망해가는 가문이라 생각하고 혼자 좀 안쓰러워했었다. 섭회상이 자꾸 돈 펑펑 쓰려고 할 때마다 똑똑하다는 양반이 현실감각은 없나 답답했는데 그게 나야말로 꼴값하는 것이었을 줄이야.
물론 나도 이제 따지고 보면 섭씨 사람이니 남일처럼 이렇게 말할 건 아니지만서도...... 새삼 궁금했다. 금광요나 여러 승냥이 같은 다른 가문들에게서 어떻게 이걸 다 꽁꽁 숨겼을까.
참 대단한 사람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면 수사들이 나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든 종부님이라고 부르든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었다.
발걸음이 다다른 곳은 연무장이었다. 부정세로 온 뒤부터 나는 간간히 목검 들고 헤매는 어린 문하생들의 자세를 봐주고 있었다. 내가 직접 수사들과 대련을 하거나 시범을 보이기엔 너무 망가졌다고 해도, 기본적인 훈련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누구보다 잘 아니까.
몇 번 애들을 봐주다보니 총령이 암묵적으로 연무장 한쪽을 나와 어린 문하생들에게 할애해주는 느낌이라, 나는 마침 눈이 마주친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는 것으로 소소한 감사 인사를 대신했다. 저 멀리 있는 아키라가 펄쩍 펄쩍 뛰는 게 보여 손도 작게 흔들어주었다.
사실 아키라를 내가 끼고 가르칠 수도 있겠지만, 이 땅에 적응하려면 나와 계속 시간을 보내는 것보단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대화를 나눠보는 게 좋을 거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겁 먹은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는 어린애들 앞에 멈춰섰다. 대체 내가 뭘 했다고 저렇게 겁 먹는 얼굴인지.
-몸은 다 풀었어?
내 질문에 얌전히 고개를 주억이는 애들을, 나는 그 뒤로 한 시진 걸쳐 차근 차근 교육시켰다. 원래 같으면 해시에서 자시 넘어가기 직전까지 계속 굴릴 텐데, 아직 어린 애들이니 일찍 자야하지 않겠는가. 다리가 후들거리는지 터덜터덜 걸어가는 뒷모습을 내가 벌써부터 저러면 어쩌나 싶어 걱정스레 바라볼 때였다.
-아직 어린 아이들에게 벌써부터 그리 험한 훈련을 시키실 필요는 없을 텐데요.
뒤를 돌자 늘 그렇듯 무표정한 얼굴의 총령이 있었다. 부사는 원체가 여우 같은 사람이라 나한테 존댓말을 써도 기분이 나쁘지 그리 어색하지는 않았는데 총령이 나에게 존댓말하는 것은 기분이 매우...... 그랬다. 아직도 저 큰 덩치에 대고 공수해야 할 것 같은데. 어색함을 떨쳐내기 위해 괜시리 기지개를 켜며, 나는 하품하듯 말했다.
-필요한 자세들을 어렸을 때 몸에 각인시켜놔야 쟤네도 편하고 가르치는 사람도 편하니까 그렇죠.
총령은 다행히도 나에게 굳이 말을 놓으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식이면 초장부터 나가떨어질 확률이 더 높지 않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근데 그걸 날 그렇게 굴리던 저 사람이 할 말인가 싶으면서도...... 맞는 말이긴 하니까.
-그럼 앞으로 좀 쉬엄쉬엄 가르치죠, 뭐.
총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나는 노을져 가는 하늘 아래 잠시 동안 바라보며 서 있었다. 다들 저녁 수련을 마치고 식사를 하러 가는 시간대라 연무장에는 그와 나를 제외하고 사람이 거의 많지 않았다. 먼저 입을 연 건 그였다.
-죄송합니다.
뭐가, 라고 물을 뻔 했다가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속인 건 저였으니까, 미안하다는 말도 제가 먼저 해야 하는데 선수를 뺏겼네요.
나름 농담이라고 건넨 거였는데 총령은 웃지 않았다. 시발.
-죄송하다고, 내내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그가 묵묵히 말하는 동안 나는 그저 들었다.
-수사로서...... 영력이 고갈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압니다.
진짜 직설적이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내 금단을 부순 것도 아닌데요, 뭐. 물론 무슨 말인지 이해는 합니다만...... 사실 난 그렇게 아쉽진 않습니다.
원래 내 것이 아니었던 무언가를 비로소 놓게 된 기분이라, 차라리 홀가분했다. 무엇보다도 너덜너덜해진 몸마저도 섭회상과 보낸 시간의 흔적이라고 생각하면 기꺼운데. 이걸 말해봐야 이해할 사람 따위 없겠지. 나는 연무장 저쪽에서부터 헥헥대며 달려오는 아키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스승님, 저 팔이 떨어져나갈 것 같아요......
-그럼 팔굽혀펴기 백 개만 더 하고 들어가자.
-뭐라구요! 팔이 떨어질 것 같다는데 팔굽혀펴기를 하라는 게 무슨 말이에요!
투닥거리는 나와 아키라를 총령은 아주 희미하게 웃는 얼굴로 바라보다가 먼저 등을 돌렸다.
나는 아키라에게 팔굽혀펴기 대신 연무장을 열 바퀴 뛰게 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고, 아키라가 달리는 동안 해가 저물어 가는 하늘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생각이래봐야 섭회상이 뭘 하고 있으려나 하는 게 다이긴 했다. 오늘 하루 종일 뭐 조사할 게 있다고 바쁘댔는데, 그거 얼굴 몇 시진 못 봤다고 이렇게 허전하다니. 저녁은 먹으러 오겠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아키라가 내 발 밑에 벌러덩 드러누웠고, 나는 그 애 몸에서 모래를 털어낸 뒤 연무장에서 끌고 나왔다.
아키라가 목욕을 마치고 식탁에 앉은 뒤에야 나는 섭회상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책에 정기를 다 빨리기라도 한 모양인지 아침에 비해 어쩐지 눈밑이 퀭했다.
-뭘 그렇게 조사하신 겁니까?
나도 모르게 묻자, 섭회상은 피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방에서 말해줄게. 그나저나 아키라 너도 오늘따라 피곤해보이는구나.
그러자 아키라는 내가 오늘 자기를 얼마나 혹사시켰는지 아냐며 푸념을 늘어놓았고 그날의 식사 시간도 늘 그렇듯 요란하게 지나갔다.
방으로 돌아오자 정말 한밤중이었다. 촛불 켜진 방 안은 어둡고 조용했다. 잠들기 딱 좋은 환경인데.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내 목침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섭회상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오늘은 뭘 그렇게 찾아보신 겁니까?
-그냥,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들을 잘 지킬 방법이 뭐가 있나 찾아봤어.
무슨 약속? 고개를 기울이자, 어느새 침의 차림이 된 섭회상이 다가와 내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도령을 없애고 싶어. 봉인하는 게 아니라.
이건 정말 예상 못 했던 대답이라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섭회상이 작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내 옆에 앉았다.
-그리고, 손님을 초대할 방법도 생각했어.
-손님이요?
-조만간 위 형이 여기 올 것 같아.
위 형. 위무선? 무슨 말인가 싶어 섭회상을 바라보자, 그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내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함광군은 도움을 청하는 세가를 외면할 정도로 냉정하지 못하니...... 선독 자리에 정말 딱인 인물이지. 그렇지 않아?
-예?
-그 사람이 위무선을 정말 많이 사랑하기도 하고. 물론, 그래도 그 사람이 정말 위 형을 여기 보내줄지 장담할 순 없지만.
내가 섭회상의 말을 못 따라가겠는 게 정상인지 아닌지를 알 수가 없었다. 섭회상은 상관 없다는 듯 내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나는 착실히 몸을 떨었고, 섭회상은 나직히 웃으며 그런 나에게 몸을 붙여왔다. 그가 침대 맡의 촛불을 불어 끄는 것을 나는 반쯤 감긴 눈으로 바라보았다.
안 질리나, 이 사람은...... 하기야 저번에 그 춘궁도도 그렇고, 평소 분위기도 그렇고, 원래 색에 관심 많은 사람 같긴 했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별로 그런 쪽으로 관심은 없지만 섭회상이라면 뭐든 좋았으니...... 안으로 끈적하게 파고드는 손가락 때문에, 나는 생각을 더 이어가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섭회상의 가쁜 웃음소리가 귓가에 닿자 그 자체로 또 소름이 돋았다.
-넌 정말 민감하다니까.
-그게 아니라 종주님이 좋은 거예요.
다른 인간이랑 이런다고 생각하자 민감이고 뭐고 그저 불쾌할 뿐이었다. 애초에 왜 다른 사람을 생각했는지 내 머리를 한 대 치기라도 하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신음을 참는데, 섭회상이 몸을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그의 새까만 눈동자는 황홀하다는 듯 반짝이고 있었다. 그게 내게 과분하다는 생각을 할 여지조차 주지 않고, 아래에서부터 끊임없이 자극과 이물감이 밀려와 나는 이를 악물어야 했다.
-나는 정말, 네가 너무 좋아......
그렇게 속삭이며 입맞춰오는 그를 밀어내는 대신 그의 얼굴을 감싸쥐고, 더 깊게 입을 맞췄다.
행위가 끝나고 포식한 고양이 마냥 내 품에 안긴 섭회상을 보며 이게 맞는 건가 싶긴 했지만, 생각해보면 내가 그에게 안기는 것보단 이 편이 더 어울리는 그림인 것도 같았다. 호흡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며 나는 끈적한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한기를 말없이 느꼈다.
-무슨 생각 해?
갑작스런 질문은 사실 섭회상이 매일같이 내게 하는 것이라 이제 더 이상 갑작스럽지도 않았다.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종주님이 귀엽다는 생각이요.
섭회상이 작게 키득거렸다. 나는 가슴께에 와닿는 그의 숨결을 느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종주.
-응?
-정말 원하지 않으세요? 아이요.
섭회상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두 뺨이 아직 약간 상기되어있긴 했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신중했다.
-왜? 너는 원하니?
-종주님이 원하시면 저도 가지고 싶은 거고, 아니면 아니고요.
하지만 섭회상은 아마 내가 아이 갖기를 원치 않는 거겠지. 내가 매일 같이 먹는 약에 어떤 약재가 들어있는지 잘 알았다. 비슷한 약재가 섭회상이 먹는 약에 들어있다는 것도.
그러니까, 아이를 가지냐 안 가지냐는 차치하고서라도,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질문하고 싶기는 했다.
-전부터 궁금해서...... 찾아봤었어. 찾아보니 여인들은 아이를 낳다가 정말 많이 죽는다지. 설사 출산을 무사히 마친다고 하더라도, 그 여파로 일찍 세상을 뜨는 경우가 부지기수래.
나는 부사가 들려주었던 섭회상의 모친 이야기를 떠올렸다. 섭회상이 내게 더 깊숙히 몸을 기대어왔다.
-나는 그런 위험을 감수하기 싫어. 어떻게 너를 만났는데...... 겨우 두 손바닥 만한 아이에게 너를 빼앗기고 싶진 않아.
표현이 좀.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럼 약은 그냥 저만 먹으면 되지, 왜 종주님도 드시고 그러세요.
나야 그렇다 쳐도 섭회상은 좀 여지를...... 남겨두어야 하지 않나? 그러나 섭회상이 내 입가에 지그시 자기 입술을 내리눌렀다. 그리곤 속삭였다.
-그래야 공평하잖아.
-공평이요?
나도 모르게 숨죽인 목소리로 되묻자, 섭회상이 여전히 내 입가에 입술을 댄 채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너만 있으면 돼. 계속 우리 둘만 있으면 좋겠어...... 안 될까?
안 되겠냐고. 나는 그의 입맞춤에 조용 조용 응했다.
잠시 뒤 잠에 빠진 섭회상의 얼굴을 나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의 고른 숨소리를 들었고, 그 외에 정적이 흐르는 부정세의 복도로 멀리 시선을 두었다가, 새까만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다시 섭회상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부정세에 다시 온 뒤로, 한 번도 잠을 제대로 자본 적 없다.
일단 잠이 안 오는 게 문제였고, 불면증에 좋다는 약을 먹어도 막상 잠을 자면 악몽을 안 꾸는 날이 없어서...... 이렇게 됐다.
악몽의 내용을 알면 거기 구체적인 이름이라도 붙여볼 수 있을 텐데, 그냥 악몽이라는 것 외에는 기억나는 게 없었다.
아마 금광요가 나왔는데 내가 기억 못 하는 게 아닐까. 아니면 내가 동영에서 죽인 그 사람. 그것도 아니면, 죽은 내 가족들이려나. 적어도 그 두 세 가지가 제일 가능성 높아보이긴 했다.
진짜 죽은 사람들이 산 사람에게 이렇게 영향을 끼칠 수 있나? 근데 그게 말이 되나? 그럼 금광선부터 악몽으로 죽었어야 했는데. 이거 혹시 잡귀들의 소행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생각이 죽은 이들을 위로해야겠다는 수진계의 일반적인 사고회로를 타는 게 아니라 악몽이고 뭐고 다 좆까라는 될 대로 되라 회로를 탔다. 이러니 내가 글러먹은 거다.
사실 악몽을 꾸든 어쩌든 무시하고 잠을 잘 수도 있었다. 하지만 괜히 내가 그랬다가 금광요 이름이라도 부른다거나...... 그러면.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
잠든 섭회상을 바라보는 게 즐겁기도 했다. 어차피 죽으면 못 볼 얼굴인데 지금이라도 많이 봐 놔야지. 근데 봐도 봐도 이렇게 계속 좋을 수가 있나? 그런 생각을 하며 섭회상의 얼굴을 요리조리 뜯어보기도 하고,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기도 하고...... 도령을 없앤다니 말이 쉽지 앞으로 이 사람이 얼마나 더 힘들까를 생각하기도 했다.
왜 하필이면 이 사람 어깨에 그렇게 거대한 짐이 놓인 걸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다 보면 벌써 새벽이었다. 새벽의 푸르스름한 빛이 스며든 섭회상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나는 그의 어깨 위로 이불을 끌어올려 덮어주었다. 그러곤 이제 그만 일어날 생각이었다. 그러나 내가 침상에서 일어나기 전에 섭회상이 눈을 떴다.
-벌써 깼어?
그렇게 하품하는 그에게 웃어주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머리가 핑 돌았다.
-밀아!
섭회상이 내 손목을 잡아당기지 않았다면 침대 모서리에 이마를 박았을지도 모른다. 아...... 죽겠네. 나는 섭회상의 품에 등을 대고 안긴 채 잠시동안 눈만 깜박거리고 있었다. 빠르게 뛰는 그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괜찮아?
고개를 돌리자, 잠이 깨다 못해 겁 먹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섭회상의 얼굴이 보였다.
-종주.
이거 진짜 어떻게 하지. 나는 어지러운 머리로 할 말을 골랐다. 그리고 말했다.
-종주. 저희 앞으로 따로 잘까요.
-뭐?
잘 살다가 갑자기 소박맞은 부인도 저런 얼굴은 안 할 것 같았다. 사실 그런 우스갯소리로 넘기기에는 심지어 새벽빛 때문인지 섭회상의 얼굴이 너무 새파랬다.
-왜...... 왜? 내가 뭐 잘못 했어? 잠꼬대라도 이상하게 했니?
-아뇨.
찔리는 거라도 있나? 뭐가 됐든 그 반대였으니 나는 차근차근 말했다.
-그 반대입니다. 제가 요즘 잠만 자면 악몽을 꿔서요. 괜히 종주님 깨시기라도 하면...... 그게 싫어서, 그냥 웬만해선 안 잤어요.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냥 다 말했다.
-악몽에 특별히 누가 나오는 건 아닌데요, 가위 눌리는 것 같다고 해야 할지 아무튼 자고 깨면 상태가 영 안 좋습니다.
그렇게 말을 마치고 다시 한 번 그를 돌아보자, 섭회상은 멍하니 내 얼굴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서서히 울 것 같아지는 그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조금 어색하지만 그의 품으로 더 파고들었다. 섭회상이 그런 나를 꽉 끌어안았다.
-계속 꿨다고? 악몽을? 괜찮아진 게 아니었어?
-그렇게 됐습니다.
나는 잠시 내 대답을 곱씹다가 말했다.
-그래도 종주님은 요즘 엄청 잘 주무시던데요. 다행입니다. 살면서 악몽 꿔본 적이 거의 없어서 잘 체감이 안 됐는데, 그동안 정말 힘드셨겠어요.
내 말의 어디가 섭회상을 울게 했는지 모르지만, 잠시 뒤 내 맨 어깨에 차가운 물방울이 떨어졌다. 동시에 내 심장도 멎었다. 잠이 깨다 못해 평생 안 자도 될 것 같았다. 말하지 말 걸 그랬나? 괜히 내가 말해서 앞으로 섭회상도 불편한 마음에 잘 못 자면 어떡하지? 하지만 다른 방법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정말 없었나. 묵언술 같은 걸 걸고 그냥 조용히 잘 걸 그랬나 하는 기상천외한 생각까지 떠올렸을 때였다.
-왜 항상 하나를 이루면 하나가 엇나갈까.
나는 생각하던 것을 모두 멈추고 다시 섭회상을 돌아보았다. 그는 반쯤 눈을 내리깔고 있었고, 눈가가 눈물로 반짝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닦았다.
-인생이라는 게 원래 그렇죠, 뭐.
침묵이 흐르는 동안 섭회상은 두 눈을 내리깐 채 계속 나를 바라보지 않았고, 나는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창 밖은 이제 슬슬 밝아지고 있었다.
-왜 진작에 말 안 했어?
이건...... 잘 생각해야 한다. 물론 내가 열심히 머리를 굴려도 섭회상 앞에선 생쥐 재롱이겠지만, 그래도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래서 내놓은 답이라는 게 이거였다.
-죄송합니다. 종주님 괜히 걱정시키기 싫어서 그랬는데, 오히려 일이 이렇게 됐네요. 죄송해요.
섭회상은 잠시 동안 말이 없다가 물었다.
-악몽을 사실 계속 꾸고 싶은 게 아니니?
-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한 달 동안 하루에 한 시진도 제대로 못 잔 사람한테 할 말 아니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어쩐지 섭회상이 그런 질문을 던진 의도를 알 것 같았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섭회상의 숨결이 머리 위로 느껴졌다.
-사랑해. 정말이야.
나도 그렇다고 속삭이려던 때였다.
-꿈을 나눠 꿀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건 좀? 나는 인상을 썼다.
-그럼 괜히 저 때문에 종주님도 악몽 꾸실 수 있는 거잖아요. 저는 싫습니다.
-나는 좋아.
섭회상이 고집스럽게 말했다. 그가 나를 더 세게 끌어안아서, 갈비뼈가 아주 조금 아팠다.
-있지, 밀아. 만약 내가 너보다 먼저 죽으면, 나는 밤마다 네 꿈에 찾아갈 거야.
-종주님 돌아가시면 저도 바로 죽을 건데요?
왜 깊은 밤도 아니고 해 다 뜬 새벽녘에 이런 낯간지러운 대화를 해야 하나 생각하면서도 나는 그렇게 대꾸했다. 섭회상이 내 귓가에 헛웃음을 흘렸다.
-그럼 만약, 네가 먼저 떠나면…… 내 꿈에 매일 나와줄래?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해보겠습니다.
-응.
섭회상이 나직하게 대꾸했다. 그의 손이 내 아랫배를 지나 더 아래로 느리게 내려가는 걸 느끼며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네가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을 때까지 내가 옆을 지키고 있을게. 그 정도는 나도 할 수 있는 거잖아.
나는 착실히 가빠지는 호흡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섭회상의 입술이 내 뒷목에 닿았다.
-그러니까 앞으로 평생, 나 혼자 재우지 마. 밀아.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섭회상이 내 어깨를 지그시 깨물었다. 그의 입맞춤이 날개뼈를 지나 등을 타고 내려가는 것을 느끼다 보면 어느새 나는 침상을 마주하고 있었다. 이런 자세로 한 적 있었던가......
-아밀.
나직한 목소리 때문인지, 섭회상의 얼굴이 조금도 보이지 않아서인지, 자꾸만 몸을 지탱한 팔이 떨렸다. 의미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두 눈을 감았다. 차가운 손이 간질이듯 허벅지를 타고 올라왔다.
-그런 거......
나는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거 그만 하고, 그냥......
-그냥?
되묻는 그의 목소리에는 기묘한 열기가 서려 있었다. 몸이 형편없이 떨리는 것을 느끼며, 나는 체념하듯 고개를 숙였다.
-그냥, 들어와 주세요......
곧 내 위로 그림자가 졌다. 아래를 빠듯하게 파고드는 부피감 때문에 몸이 잘게 떨렸다. 완전히 맞닿은 몸으로 그 진동이 전해지고 있을 것임이 분명했다. 그러니 내가 적응할 시간을 주지 않고 내 위에 더 무게를 싣는 섭회상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명백했다. 나는 내내 떨리고 있던 두 팔에 힘을 풀었다. 이불 위로 무너진 채 헐떡이는 사이, 서늘한 입술이 내 귓바퀴에 닿았다.
-사랑해.
나직한 속삭임이 귓가를 적실 때마다 아랫배가 지끈거리며 조여들었다. 눈을 뜨자 검은 이불이 눈 앞에서 점점 더 구겨지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몸이 흔들릴 때마다 시야가 흐려졌기에, 눈을 감든 뜨든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나는 굳이 잇새로 흐르는 앓는 소리를 참지 않았다. 섭회상이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밀.
등 뒤에서 나를 밀어붙이던 움직임이 멎자, 오히려 몸이 더 떨려왔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침상에 지탱하고 있던 섭회상의 손을 찾았다. 그가 내 손을 단단히 쥐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내 이름, 불러주면 안 돼?
나는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가, 섭회상과 맞잡은 내 손에 이마를 기댔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회상.
동시에, 섭회상의 차가운 손이 내 턱을 감싸쥐곤 자기 입술로 이끌었다.
*
언제 그 행위가 끝났는지는 모르겠다. 눈을 떴을 땐 이른 오전이었다. 두어 시진쯤 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기지개를 켜던 나는 침대 맡 의자에 앉아 졸고 있는 섭회상이 보여 순간 어리둥절해졌다. 왜 침대에 누워서 안 자고 저러고 자나...... 싶어 조심스럽게 섭회상의 어깨에 손을 댔더니, 섭회상이 퍼뜩 눈을 떠서 나를 바라보았다. 멍하니 나를 바라보던 그가 정신을 차린 듯 내 두 어깨를 붙잡았다.
-괜찮아?
-예? 뭐가요?
-너 꼬박 이틀 동안 잠들어 있었어.
내가? 나도 덩달아 섭회상처럼 멍한 얼굴이 되었다가, 무언가를 깨닫곤 두 눈을 크게 떴다. 웃음이 터졌다. 내가 소리내어 웃는 동안 섭회상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점점 울상이 되어갔다. 나는 그런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웃음이 더 이상 나오지 않을 때까지 웃었다. 그리곤 대체 무슨 일인 거냐며 울먹거리는 섭회상을 올려다보았다.
-저 이번에 정말 잘 잤어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나를 바라보던 섭회상의 얼굴에 점점 깨달음이 깃드는 것을 보자니 뒤늦게 겸연쩍어져서, 나는 괜시리 어색하게 웃었다.
-왜인지 모르겠네요......
대꾸 좀 해주지, 사람 무안하게 섭회상은 나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결국 나는 어색하다 못해 다 갈라진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러야 했다.
-회상.
잠시 뒤, 섭회상의 눈에서 눈물 방울이 하나 뚝 떨어졌다. 나에게 와락 안기는 그 때문에 나는 하마터면 또 침대 모서리에 머리를 박을 뻔 했다. 그러나 그러는 대신 나는 푹신한 침상 위로 풀썩 쓰러졌고, 환한 햇빛이 새어드는 창문이 내 눈에 거꾸로 비쳤다. 품 안의 섭회상은 분명 또 울고 있었지만, 굳이 그를 그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웃음이 터지는 것을 나는 막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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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됐다.
익숙하달지 그새 낯설어졌달지 모를 부정세 사람들의 얼굴을 보며 나는 그밖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어쩌다보니 당신네들 종주랑 나랑 같이 살게 됐습니다. 껄끄러워도 서로 참아봅시다. 그 말 외에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더 해 봐야 내가 데려온 혹덩이도 좀 봐달라는 것 정도가 다였다. 그 외에는 정말 더 할 말이 없었다.
하기야 섭회상이 친히 배를 띄우러 송호까지 갔던 것을 부정세 사람들이 모를 리 없으니, 그가 나를 부정세에 데려왔을 때 다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얼굴이었다. 그 중 절반은 그러면서도 내가 정말 여기 돌아왔다는 사실을 신기해하는 듯했으며, 나머지 절반은 그저 떨떠름해 하는 것 같았다. 나도 딱 그 감상이었다. 나를 반가워 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했는데 그 쪽이라고 편하진 않았다. 물론 부정세 대부분이 금광요와 나의 관계를 모른다. 그래서 그들 입장에선 내가 그들의 원수도 무엇도 아닐 수 있지만, 그래도...... 그저 불편했다. 그래서 나는 섭회상이 건네는 장죽을 그냥 묵묵히 받아들고 지난 반 년 간의 금연을 그만뒀다.
광산에서 떨어지며 생겼던 장죽의 갈라진 틈이 매끈하게 메워져 있는 것이 어쩐지 묘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위의 은색 줄은 또 뭐람. 마음에 안 드냐며 그새 내 눈치를 살피는 섭회상에겐 마음에 든다고 고개를 저었지만, 솔직히 어떤 흉터들은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는 편이 좋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섭회상이 그날 겨우 피가 멎은 손목을 말아쥐고 내가 머물던 방에 들어왔을 걸 생각하면, 침상 위에 내던져져 있던 내 장죽을 주워들어 그걸 고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의 그 심정을 생각하면...... 메워야지. 뭐 어쩌겠는가.
그렇다곤 해도, 부정세에서의 새로운 생활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적응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친정이라 할 만한 곳이 없는 데다, 내가 제발 이상한 거 하지 말자고 섭회상에게 애걸복걸해서, 혼례는 한 듯 안 한 듯 조용히 지나가긴 했다. 그래도 일단 종주의 도려라는 신분이 되었으니 나를 부르는 호칭이나 사람들의 대우가 변하는 건 어쩔 수 없었는데, 그게 너무 싫었다.
왜 종주들은 부인을 하나만 둘까. 여러 명 있어서 그중 제일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않는 부인 정도가 되고 싶다. 그런 생각을 했으나 섭회상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괜시리 그를 서운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난 진심인데. 혼인을 하든 하지 않든,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그를 향한 내 마음이 바뀔 일은 없을 것이라 도려니 부인이니 뭐니 하는 호칭이 내게는 별 의미가 없었다. 죽어서 같이 묻힐 수 있다는 게 유일하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섭회상이 나를 다른 사람들 앞에서 뭐라 칭하든, 적어도 나에게 말을 걸 때는 부인이니 뭐니 하는 낯간지러운 호칭을 쓰지 않고 이름으로 부르는 것도 다행이었다. 사실 이름이라기보다는 그의 말대로 애칭에 가까웠지만, 무슨 상관 있겠는가. 어차피 밀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부를 사람은 섭회상뿐이었다.
아키라가 괜히 나를 그 이름으로 부르겠다고 뻗댈 줄 알았는데 안 그러는 게 신기했다. 그 애는 생각보다 부정세에 잘 적응했다. 말 배우랴 글 배우랴 수련하랴 사실 적응할 새 없이 바쁘다고 보는 게 더 맞겠지만, 매 식사 때마다, 아니면 시간 날 때마다 만나서 보면 두 눈이 초롱초롱한 게 자기 생활에 무척 만족하는 듯싶었다.
섭회상이 아키라를 무척 좋아했다. 너무 좋아해서 식사 때마다 아예 꼬박꼬박 아키라를 부르지 뭔가. 나보다 섭회상이 그 애를 더 챙기는 게 조금 머쓱했지만, 내가 뭐 내 자식으로 아키라를 데려온 것도 아니고 종주가 자기네 문하생이랑 돈독하게 지내면 좋은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종주님이 스승님을 얼마나 좋아하시는데요! 복 받은 줄 알아요.
-그래, 그래.
-맨날 동영에서 저희가 뭐 했는지 물어보신다고요. 스승님이 그때 어땠는지, 많이 아팠는지......
-그래?
-그래라는 말 밖에 못 해요?
-까불지 마라.
나는 아키라의 입에 대충 당과를 하나 더 물려준 뒤 이제 그만 오후 치 공부하러 가라고 돌려보냈다. 그러고 나서 복도를 걷다 보면 지나가는 수사들이 나에게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때마다 뻣뻣하게 굳는 걸 티내지 않으려 열심히 노력해야 했다.
불편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버티는 수밖에. 섭회상이 내가 여기 적응하길 바라기도 했고, 나도...... 섭회상의 곁에 있을 수 있다면 이 정도 대가는 극히 가벼운 것일 테다. 그런 생각을 하며 부사의 집무실에 들어서긴 했지만.
-오셨습니까.
막상 그 공간의 주인이 거기 떡하니 있는 걸 보니 기분이 더러웠다. 차라리 총령 쪽은 그냥 서로 고개만 끄덕이고 끝이었어서 마음이 편한데, 이 사람은 자꾸 말을 건단 말이다. 늘 부사님이라 불러야 했던 사람이 나에게 존대를 하는 게 영 적응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대충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말을 놓으라는 것 아닌가. 근데 그러면서 웃고 있는 얼굴이 밝은 가을 햇빛을 받아 소름끼쳤다.
섭회상 보고 싶다. 나는 고개를 돌려 괜히 문가를 두리번거리며 생각했다. 그게 현실도피라는 걸 모르기만 해도 편할 텐데, 너무 잘 알았다. 결국 한숨을 내쉬며 다시 눈을 마주하자 눈 앞의 남자는 정말 여우같게도 웃었다.
-세 분의 종주님을 모셨는데, 종부님도 세 분 모시게 되었군요.
죽을란다. 그렇게 말은 못 하고 뭐 씹은 얼굴로 고개만 끄덕이다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악연이라고는 해도 섭회상의 사람이고 섭회상에게 충성하는데, 얼굴 맞대고 대충 살 수 있을 정도로는 관계를 개선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제가 마음에 안 든다는 것 압니다. 미안해요. 하지만......
-말 놓으십시오.
-서로 존대하죠, 그럼.
말꼬리 잡긴.
-아무튼 이제 제가 뭘 해야 하는지 좀 알려주시면 그대로 하겠습니다.
드물게 당황한 듯한 부사의 얼굴을 보며 나는 아주 조금 통쾌했다.
-뭘 해야 하는지, 라고 하시면......
-말 그대로입니다. 제가 배운 게 없어서 다른 세가 종부님들 만큼 뭘 할 수 있진 않겠지만, 그래도 해야 할 일이 있을 거잖습니까.
-우선은 몸부터 돌보시는 게 우선이고......
-살 만합니다.
부사는 나를 잠시동안 빤히 바라보더니 물었다.
-아직 신혼을 즐기실 때 아닙니까.
신혼 좋아하네.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게 대답이 되었는지 부사가 말했다.
-신혼이 아니더라도, 몸을 돌보시긴 해야 할 텐데요. 한 달 전보다 지금 더 낯빛이 좋지 않으신 걸 보면.
-그건 그냥 밤마다 잠을 못 자서 그럽니다.
부사 표정이 이상해져서 왜 그런가 잠깐 생각하다가 입 안을 씹었다. 그거 아니다. 그거 아니라고. 하지만 그거 아니라고 말해봐야 분위기가 더 이상해질 걸 알아서 나는 그냥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면 그래도 나보다 몇십 년 더 산 것 답게 상대편이 먼저 화제를 돌렸다.
-그럼 마침 오신 김에 이것들을 좀 검토해주시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내밀어진 종이뭉치를 받아들었다가, 그게 무엇인지 깨닫곤 그대로 굳었다. 그건 족보였다. 여러 다른 집안들의. 왜 섭회상의 부사가 다른 집안 족보를 살피고 있는지 그 이유를 나는 잘 알았다.
-종주의 동생이 있고 방계에도 건강한 아이들이 많은 남씨와 달리, 섭씨는 후사 문제를 더 이상은 미룰 수 없으니까요.
고소 남씨...... 종주 동생이래봐야 후사가 문제인 거면 의미 없을 텐데. 단수잖아.
-운몽 강씨는요?
-그쪽도 이제 금여란이 종주가 되었으니 본격적으로 강씨 집안 후사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할 겁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침묵이 흐르는 동안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그새 검을 안 잡았다고 손이 조금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그게 징그러웠다. 하지만 그것도 받아들여야 하는 거겠지.
허울뿐이래도 금단도 있고, 어떻게 힘써 보면 일 년 내로 애 하나 정도는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내가 기침을 하면서도 그런 생각을 하던 때였다.
-이건 종부님의 책임이 아닙니다.
종부라고 불린 데 인상을 써야 할지,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물어야 할지 나는 일 초 정도 고민하다가 후자를 택했다.
-뭐가 말입니까?
-종주께서는 꽤 오랫동안, 이리 하실 생각이셨으니까요.
그러니까 내가 송호에서 제대로 들었던 게 맞다는 거지. 나는 섭씨 피 운운하던 섭회상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왜 그런 생각에 도달했는진 알지만, 그래도...... 말리지 않으셨습니까?
-처음엔 당연히 반대했지요. 하지만 피와 이름, 둘 중에 자기가 무엇을 남겨야겠느냐고 종주께서 물으셨을 때, 저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사의 눈가에 아주 희미하게 진 주름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나서도 사실, 그 분이 언젠가 좋은 분을 만나 자기 자식을 얻고자 하는 욕심을 가지게 되시길 바랐습니다. 하지만 일이 이리 되어버렸으니, 받아들일 수밖에요.
-미안하게 됐습니다.
멍하니 말하는데, 부사가 고개를 저었다.
-종주님의 모친께서는 출산으로 인해 몸이 급격히 약해지셨고, 결국 지금의 종주님보다도 어린 나이에 세상을 뜨셨습니다. 종주님께서 후사에 관한 논의를 차일피일 미루실 때마다, 아마 그 영향이 있지 않을까 다들 생각했지요.
부사의 시선이 나를 가볍게 훑었다.
-종부께서 건강하시다면 또 몰라도 그렇지도 않으니...... 당연히 종주께서는 아이를 원치 않으실 겁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는 아닙니다. 사실 제 이해가 필요한 일도 아니지요. 저는 아랫사람이고, 종주께서 결정을 내리시면 그제야 제 일이 시작되니까요.
그래서 자기가 지금 이 족보들을 보고 있는 것이라고, 부사는 가볍게 말했다. 나는 그의 말투가 지나치게 담담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정체를 숨기고 부정세에 머물던 은은한 적의가 지금은 느껴지지 않는 것도 뒤늦게 깨달았다.
-혹시 종주님에 대해 더 궁금하신 게 있으시면 뭐든 여쭤보시지요.
뭐지? 왜 잘해주지? 나는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대놓고 그렇게 물으면 너무 멍청해보일 것이고, 안 그래도 자기 종주의 취향 때문에 심란한 사람을 더 심란하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생각을 잠시 정리한 뒤 질문했다.
-제가 정말 여기 계속 있기를 바랍니까?
내가 일찍 죽거나 뭐 그러길 바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며 눈 앞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면, 곧 그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가문을 위해서라면 물론 그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기 어렵겠지요. 하지만 저는 종주님의 선친을 모셨고, 종주께서 태어나 자라시는 것을 모두 지켜보았습니다. 종주께서 겨우 찾으신 행복을 지켜야 하는 입장이지, 무너뜨려야 하는 입장이 아닙니다. 종부님께 악감정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더 이상은.
나는 어쩐지 가라앉은 분위기를 느끼며 마른 입술을 핥았다.
-악감정이 있긴 했다는 걸 인정하시는 거군요.
-그야, 뭐......
부정하지 않는 부사를 보며 나는 작게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을 그렇게 쥐어패요?
-자네...... 죄송합니다. 종부께서 못 이겨 떠나시기를 바랐습니다. 종주께선 오히려 종부님을 잡아두려 하셨고, 그게 종부님을 역으로 이용하기 위함이라 하셨지만, 그때 이미 제 눈에는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게 보였으니까요.
또 다시 할 말을 잃은 나는, 잠시 멍하니 침묵을 지키다가 물었다.
-종주님도 알고 계셨습니까?
엄청 중요한 질문은 아닌데, 궁금하긴 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내 궁금증을 전혀 해결해주지 못했다.
-저도 모릅니다.
-예?
-관련해서 종주님과 한 번도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으니까요. 종주께서 그만두라고 말을 꺼내셨을 때는 종부께서 못 참고 터뜨리셨던 그 칠석날 이후라, 종주님이 그 일로 알게 되신 것인지, 전부터 이미 알고 계셨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부사는 섭회상과 그나마 가장 가까운 이일 텐데, 그조차도 섭회상의 속마음을 모른다. 그 사실을 곱씹으며 나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수사에게 주화입마가 온 건. 종주님이 관여 안 하신 게 맞습니까?
-그것도 알 수 없습니다.
거짓말을 하는 눈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내 생각이 궁금하다는 듯 부사가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종주께서 꾸미신 일이라 생각하시나요?
-제 생각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진심이었다. 하필이면 그 수사가 주화입마로 죽고, 내가 섭회상에게 내 과거를 밝히고, 음호부에 대해 더 궁금해 하게 되고 금광요와 섭명결에 대해 알게 된 그 모든 흐름을 우연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아니면 섭회상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계획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운명이든 섭회상의 마음이든 나에게는 나보다 상위 차원의 것들이어서, 해가 왜 뜨는지 고민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나도 그냥 현실을 현실 자체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만약 섭회상이 내가 궁금해 하길 원하면, 그때 가서 궁금해 하면 되지 않겠는가.
그러는 게 다른 사람 눈에 단순무식해 보인다면, 그러라지. 그러나 부사는 제법 호의적인 시선을 나에게 보내고 있었다.
-행로령에 대해 처음 물으셨을 때, 제가 드렸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섭씨 사람이 되실 의향이 있다면 뭐든 말씀드릴 수 있다고 했지요. 그 약속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러니 필요하신 게 있다면 언제든 찾아주십시오.
나는 이번에도, 정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굳어있다가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괜히 어색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손에 들린 족보에 시선을 박았다.
-양자를 들이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 생각해두신 곳은 있어요?
-종주님의 외가쪽부터 차근차근 알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외가요?
-종주님의 부친과 외숙께서는 서로 절친한 친우 사이셨습니다. 사일지정 때도 가장 먼저 섭씨에 협력한 가문이 종주님의 외가였지요. 믿을 만한 곳이고, 지금 종주로 계신 종주님의 사촌도 인품이 좋기로 유명한 분이니, 지금으로선 그곳이 가장 안전한 후보군입니다.
-하지만 물건도 아니고 아이를 데려오는 건데, 직계 아이를 데려오긴 어려울 테고...... 데려온대도 방계쪽 아이를 데려오게 되지 않겠습니까?
내가 알기로 직계가 훌륭하다고 방계가 훌륭한 건 아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내 생각이 맞다는 듯 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뿐만 아니라 아이는 쉽게 생기지도 않고 하루가 빠르게 자라기도 하니, 뜻대로 되기 어렵지요. 하여 한동안은 이 일이 제 주업무가 될 듯합니다. 종부님께도 종종 의견을 구하게 될 터이고요.
-그렇겠죠.
그러면서 또 다시 기침을 하자, 부사는 잠시 내 안색을 살피더니 물었다.
-원하는 조건이 혹시 있으십니까?
-딱히...... 싹수 노란 애만 아니면 됩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종주님을 닮으면 제일 좋긴 하겠죠.
섭회상 닮은 어린 애...... 진짜 잘 기를 자신 있다. 내 생각을 읽었는지 부사는 웃음을 참는 듯 아니면 착잡한 듯 묘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
그 뒤로 나는 부사실에서 늦은 오후까지 시간을 보내다가 나왔다. 족보를 열심히 보다가 몇 번 꾸벅거렸더니 부사가 어느 순간부터는 나에게 섭씨 재산 목록을 보여주고 있었는데, 아직 열지도 않은 광산 소재가 여러 개 적혀 있는 걸 보고 잠이 확 깼다.
솔직히, 섭씨 이제 다 망해가는 가문이라 생각하고 혼자 좀 안쓰러워했었다. 섭회상이 자꾸 돈 펑펑 쓰려고 할 때마다 똑똑하다는 양반이 현실감각은 없나 답답했는데 그게 나야말로 꼴값하는 것이었을 줄이야.
물론 나도 이제 따지고 보면 섭씨 사람이니 남일처럼 이렇게 말할 건 아니지만서도...... 새삼 궁금했다. 금광요나 여러 승냥이 같은 다른 가문들에게서 어떻게 이걸 다 꽁꽁 숨겼을까.
참 대단한 사람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면 수사들이 나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든 종부님이라고 부르든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었다.
발걸음이 다다른 곳은 연무장이었다. 부정세로 온 뒤부터 나는 간간히 목검 들고 헤매는 어린 문하생들의 자세를 봐주고 있었다. 내가 직접 수사들과 대련을 하거나 시범을 보이기엔 너무 망가졌다고 해도, 기본적인 훈련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누구보다 잘 아니까.
몇 번 애들을 봐주다보니 총령이 암묵적으로 연무장 한쪽을 나와 어린 문하생들에게 할애해주는 느낌이라, 나는 마침 눈이 마주친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는 것으로 소소한 감사 인사를 대신했다. 저 멀리 있는 아키라가 펄쩍 펄쩍 뛰는 게 보여 손도 작게 흔들어주었다.
사실 아키라를 내가 끼고 가르칠 수도 있겠지만, 이 땅에 적응하려면 나와 계속 시간을 보내는 것보단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대화를 나눠보는 게 좋을 거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겁 먹은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는 어린애들 앞에 멈춰섰다. 대체 내가 뭘 했다고 저렇게 겁 먹는 얼굴인지.
-몸은 다 풀었어?
내 질문에 얌전히 고개를 주억이는 애들을, 나는 그 뒤로 한 시진 걸쳐 차근 차근 교육시켰다. 원래 같으면 해시에서 자시 넘어가기 직전까지 계속 굴릴 텐데, 아직 어린 애들이니 일찍 자야하지 않겠는가. 다리가 후들거리는지 터덜터덜 걸어가는 뒷모습을 내가 벌써부터 저러면 어쩌나 싶어 걱정스레 바라볼 때였다.
-아직 어린 아이들에게 벌써부터 그리 험한 훈련을 시키실 필요는 없을 텐데요.
뒤를 돌자 늘 그렇듯 무표정한 얼굴의 총령이 있었다. 부사는 원체가 여우 같은 사람이라 나한테 존댓말을 써도 기분이 나쁘지 그리 어색하지는 않았는데 총령이 나에게 존댓말하는 것은 기분이 매우...... 그랬다. 아직도 저 큰 덩치에 대고 공수해야 할 것 같은데. 어색함을 떨쳐내기 위해 괜시리 기지개를 켜며, 나는 하품하듯 말했다.
-필요한 자세들을 어렸을 때 몸에 각인시켜놔야 쟤네도 편하고 가르치는 사람도 편하니까 그렇죠.
총령은 다행히도 나에게 굳이 말을 놓으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식이면 초장부터 나가떨어질 확률이 더 높지 않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근데 그걸 날 그렇게 굴리던 저 사람이 할 말인가 싶으면서도...... 맞는 말이긴 하니까.
-그럼 앞으로 좀 쉬엄쉬엄 가르치죠, 뭐.
총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나는 노을져 가는 하늘 아래 잠시 동안 바라보며 서 있었다. 다들 저녁 수련을 마치고 식사를 하러 가는 시간대라 연무장에는 그와 나를 제외하고 사람이 거의 많지 않았다. 먼저 입을 연 건 그였다.
-죄송합니다.
뭐가, 라고 물을 뻔 했다가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속인 건 저였으니까, 미안하다는 말도 제가 먼저 해야 하는데 선수를 뺏겼네요.
나름 농담이라고 건넨 거였는데 총령은 웃지 않았다. 시발.
-죄송하다고, 내내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그가 묵묵히 말하는 동안 나는 그저 들었다.
-수사로서...... 영력이 고갈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압니다.
진짜 직설적이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내 금단을 부순 것도 아닌데요, 뭐. 물론 무슨 말인지 이해는 합니다만...... 사실 난 그렇게 아쉽진 않습니다.
원래 내 것이 아니었던 무언가를 비로소 놓게 된 기분이라, 차라리 홀가분했다. 무엇보다도 너덜너덜해진 몸마저도 섭회상과 보낸 시간의 흔적이라고 생각하면 기꺼운데. 이걸 말해봐야 이해할 사람 따위 없겠지. 나는 연무장 저쪽에서부터 헥헥대며 달려오는 아키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스승님, 저 팔이 떨어져나갈 것 같아요......
-그럼 팔굽혀펴기 백 개만 더 하고 들어가자.
-뭐라구요! 팔이 떨어질 것 같다는데 팔굽혀펴기를 하라는 게 무슨 말이에요!
투닥거리는 나와 아키라를 총령은 아주 희미하게 웃는 얼굴로 바라보다가 먼저 등을 돌렸다.
나는 아키라에게 팔굽혀펴기 대신 연무장을 열 바퀴 뛰게 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고, 아키라가 달리는 동안 해가 저물어 가는 하늘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생각이래봐야 섭회상이 뭘 하고 있으려나 하는 게 다이긴 했다. 오늘 하루 종일 뭐 조사할 게 있다고 바쁘댔는데, 그거 얼굴 몇 시진 못 봤다고 이렇게 허전하다니. 저녁은 먹으러 오겠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아키라가 내 발 밑에 벌러덩 드러누웠고, 나는 그 애 몸에서 모래를 털어낸 뒤 연무장에서 끌고 나왔다.
아키라가 목욕을 마치고 식탁에 앉은 뒤에야 나는 섭회상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책에 정기를 다 빨리기라도 한 모양인지 아침에 비해 어쩐지 눈밑이 퀭했다.
-뭘 그렇게 조사하신 겁니까?
나도 모르게 묻자, 섭회상은 피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방에서 말해줄게. 그나저나 아키라 너도 오늘따라 피곤해보이는구나.
그러자 아키라는 내가 오늘 자기를 얼마나 혹사시켰는지 아냐며 푸념을 늘어놓았고 그날의 식사 시간도 늘 그렇듯 요란하게 지나갔다.
방으로 돌아오자 정말 한밤중이었다. 촛불 켜진 방 안은 어둡고 조용했다. 잠들기 딱 좋은 환경인데.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내 목침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섭회상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오늘은 뭘 그렇게 찾아보신 겁니까?
-그냥,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들을 잘 지킬 방법이 뭐가 있나 찾아봤어.
무슨 약속? 고개를 기울이자, 어느새 침의 차림이 된 섭회상이 다가와 내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도령을 없애고 싶어. 봉인하는 게 아니라.
이건 정말 예상 못 했던 대답이라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섭회상이 작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내 옆에 앉았다.
-그리고, 손님을 초대할 방법도 생각했어.
-손님이요?
-조만간 위 형이 여기 올 것 같아.
위 형. 위무선? 무슨 말인가 싶어 섭회상을 바라보자, 그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내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함광군은 도움을 청하는 세가를 외면할 정도로 냉정하지 못하니...... 선독 자리에 정말 딱인 인물이지. 그렇지 않아?
-예?
-그 사람이 위무선을 정말 많이 사랑하기도 하고. 물론, 그래도 그 사람이 정말 위 형을 여기 보내줄지 장담할 순 없지만.
내가 섭회상의 말을 못 따라가겠는 게 정상인지 아닌지를 알 수가 없었다. 섭회상은 상관 없다는 듯 내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나는 착실히 몸을 떨었고, 섭회상은 나직히 웃으며 그런 나에게 몸을 붙여왔다. 그가 침대 맡의 촛불을 불어 끄는 것을 나는 반쯤 감긴 눈으로 바라보았다.
안 질리나, 이 사람은...... 하기야 저번에 그 춘궁도도 그렇고, 평소 분위기도 그렇고, 원래 색에 관심 많은 사람 같긴 했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별로 그런 쪽으로 관심은 없지만 섭회상이라면 뭐든 좋았으니...... 안으로 끈적하게 파고드는 손가락 때문에, 나는 생각을 더 이어가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섭회상의 가쁜 웃음소리가 귓가에 닿자 그 자체로 또 소름이 돋았다.
-넌 정말 민감하다니까.
-그게 아니라 종주님이 좋은 거예요.
다른 인간이랑 이런다고 생각하자 민감이고 뭐고 그저 불쾌할 뿐이었다. 애초에 왜 다른 사람을 생각했는지 내 머리를 한 대 치기라도 하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신음을 참는데, 섭회상이 몸을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그의 새까만 눈동자는 황홀하다는 듯 반짝이고 있었다. 그게 내게 과분하다는 생각을 할 여지조차 주지 않고, 아래에서부터 끊임없이 자극과 이물감이 밀려와 나는 이를 악물어야 했다.
-나는 정말, 네가 너무 좋아......
그렇게 속삭이며 입맞춰오는 그를 밀어내는 대신 그의 얼굴을 감싸쥐고, 더 깊게 입을 맞췄다.
행위가 끝나고 포식한 고양이 마냥 내 품에 안긴 섭회상을 보며 이게 맞는 건가 싶긴 했지만, 생각해보면 내가 그에게 안기는 것보단 이 편이 더 어울리는 그림인 것도 같았다. 호흡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며 나는 끈적한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한기를 말없이 느꼈다.
-무슨 생각 해?
갑작스런 질문은 사실 섭회상이 매일같이 내게 하는 것이라 이제 더 이상 갑작스럽지도 않았다.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종주님이 귀엽다는 생각이요.
섭회상이 작게 키득거렸다. 나는 가슴께에 와닿는 그의 숨결을 느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종주.
-응?
-정말 원하지 않으세요? 아이요.
섭회상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두 뺨이 아직 약간 상기되어있긴 했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신중했다.
-왜? 너는 원하니?
-종주님이 원하시면 저도 가지고 싶은 거고, 아니면 아니고요.
하지만 섭회상은 아마 내가 아이 갖기를 원치 않는 거겠지. 내가 매일 같이 먹는 약에 어떤 약재가 들어있는지 잘 알았다. 비슷한 약재가 섭회상이 먹는 약에 들어있다는 것도.
그러니까, 아이를 가지냐 안 가지냐는 차치하고서라도,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질문하고 싶기는 했다.
-전부터 궁금해서...... 찾아봤었어. 찾아보니 여인들은 아이를 낳다가 정말 많이 죽는다지. 설사 출산을 무사히 마친다고 하더라도, 그 여파로 일찍 세상을 뜨는 경우가 부지기수래.
나는 부사가 들려주었던 섭회상의 모친 이야기를 떠올렸다. 섭회상이 내게 더 깊숙히 몸을 기대어왔다.
-나는 그런 위험을 감수하기 싫어. 어떻게 너를 만났는데...... 겨우 두 손바닥 만한 아이에게 너를 빼앗기고 싶진 않아.
표현이 좀.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럼 약은 그냥 저만 먹으면 되지, 왜 종주님도 드시고 그러세요.
나야 그렇다 쳐도 섭회상은 좀 여지를...... 남겨두어야 하지 않나? 그러나 섭회상이 내 입가에 지그시 자기 입술을 내리눌렀다. 그리곤 속삭였다.
-그래야 공평하잖아.
-공평이요?
나도 모르게 숨죽인 목소리로 되묻자, 섭회상이 여전히 내 입가에 입술을 댄 채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너만 있으면 돼. 계속 우리 둘만 있으면 좋겠어...... 안 될까?
안 되겠냐고. 나는 그의 입맞춤에 조용 조용 응했다.
잠시 뒤 잠에 빠진 섭회상의 얼굴을 나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의 고른 숨소리를 들었고, 그 외에 정적이 흐르는 부정세의 복도로 멀리 시선을 두었다가, 새까만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다시 섭회상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부정세에 다시 온 뒤로, 한 번도 잠을 제대로 자본 적 없다.
일단 잠이 안 오는 게 문제였고, 불면증에 좋다는 약을 먹어도 막상 잠을 자면 악몽을 안 꾸는 날이 없어서...... 이렇게 됐다.
악몽의 내용을 알면 거기 구체적인 이름이라도 붙여볼 수 있을 텐데, 그냥 악몽이라는 것 외에는 기억나는 게 없었다.
아마 금광요가 나왔는데 내가 기억 못 하는 게 아닐까. 아니면 내가 동영에서 죽인 그 사람. 그것도 아니면, 죽은 내 가족들이려나. 적어도 그 두 세 가지가 제일 가능성 높아보이긴 했다.
진짜 죽은 사람들이 산 사람에게 이렇게 영향을 끼칠 수 있나? 근데 그게 말이 되나? 그럼 금광선부터 악몽으로 죽었어야 했는데. 이거 혹시 잡귀들의 소행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생각이 죽은 이들을 위로해야겠다는 수진계의 일반적인 사고회로를 타는 게 아니라 악몽이고 뭐고 다 좆까라는 될 대로 되라 회로를 탔다. 이러니 내가 글러먹은 거다.
사실 악몽을 꾸든 어쩌든 무시하고 잠을 잘 수도 있었다. 하지만 괜히 내가 그랬다가 금광요 이름이라도 부른다거나...... 그러면.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
잠든 섭회상을 바라보는 게 즐겁기도 했다. 어차피 죽으면 못 볼 얼굴인데 지금이라도 많이 봐 놔야지. 근데 봐도 봐도 이렇게 계속 좋을 수가 있나? 그런 생각을 하며 섭회상의 얼굴을 요리조리 뜯어보기도 하고,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기도 하고...... 도령을 없앤다니 말이 쉽지 앞으로 이 사람이 얼마나 더 힘들까를 생각하기도 했다.
왜 하필이면 이 사람 어깨에 그렇게 거대한 짐이 놓인 걸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다 보면 벌써 새벽이었다. 새벽의 푸르스름한 빛이 스며든 섭회상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나는 그의 어깨 위로 이불을 끌어올려 덮어주었다. 그러곤 이제 그만 일어날 생각이었다. 그러나 내가 침상에서 일어나기 전에 섭회상이 눈을 떴다.
-벌써 깼어?
그렇게 하품하는 그에게 웃어주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머리가 핑 돌았다.
-밀아!
섭회상이 내 손목을 잡아당기지 않았다면 침대 모서리에 이마를 박았을지도 모른다. 아...... 죽겠네. 나는 섭회상의 품에 등을 대고 안긴 채 잠시동안 눈만 깜박거리고 있었다. 빠르게 뛰는 그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괜찮아?
고개를 돌리자, 잠이 깨다 못해 겁 먹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섭회상의 얼굴이 보였다.
-종주.
이거 진짜 어떻게 하지. 나는 어지러운 머리로 할 말을 골랐다. 그리고 말했다.
-종주. 저희 앞으로 따로 잘까요.
-뭐?
잘 살다가 갑자기 소박맞은 부인도 저런 얼굴은 안 할 것 같았다. 사실 그런 우스갯소리로 넘기기에는 심지어 새벽빛 때문인지 섭회상의 얼굴이 너무 새파랬다.
-왜...... 왜? 내가 뭐 잘못 했어? 잠꼬대라도 이상하게 했니?
-아뇨.
찔리는 거라도 있나? 뭐가 됐든 그 반대였으니 나는 차근차근 말했다.
-그 반대입니다. 제가 요즘 잠만 자면 악몽을 꿔서요. 괜히 종주님 깨시기라도 하면...... 그게 싫어서, 그냥 웬만해선 안 잤어요.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냥 다 말했다.
-악몽에 특별히 누가 나오는 건 아닌데요, 가위 눌리는 것 같다고 해야 할지 아무튼 자고 깨면 상태가 영 안 좋습니다.
그렇게 말을 마치고 다시 한 번 그를 돌아보자, 섭회상은 멍하니 내 얼굴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서서히 울 것 같아지는 그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조금 어색하지만 그의 품으로 더 파고들었다. 섭회상이 그런 나를 꽉 끌어안았다.
-계속 꿨다고? 악몽을? 괜찮아진 게 아니었어?
-그렇게 됐습니다.
나는 잠시 내 대답을 곱씹다가 말했다.
-그래도 종주님은 요즘 엄청 잘 주무시던데요. 다행입니다. 살면서 악몽 꿔본 적이 거의 없어서 잘 체감이 안 됐는데, 그동안 정말 힘드셨겠어요.
내 말의 어디가 섭회상을 울게 했는지 모르지만, 잠시 뒤 내 맨 어깨에 차가운 물방울이 떨어졌다. 동시에 내 심장도 멎었다. 잠이 깨다 못해 평생 안 자도 될 것 같았다. 말하지 말 걸 그랬나? 괜히 내가 말해서 앞으로 섭회상도 불편한 마음에 잘 못 자면 어떡하지? 하지만 다른 방법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정말 없었나. 묵언술 같은 걸 걸고 그냥 조용히 잘 걸 그랬나 하는 기상천외한 생각까지 떠올렸을 때였다.
-왜 항상 하나를 이루면 하나가 엇나갈까.
나는 생각하던 것을 모두 멈추고 다시 섭회상을 돌아보았다. 그는 반쯤 눈을 내리깔고 있었고, 눈가가 눈물로 반짝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닦았다.
-인생이라는 게 원래 그렇죠, 뭐.
침묵이 흐르는 동안 섭회상은 두 눈을 내리깐 채 계속 나를 바라보지 않았고, 나는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창 밖은 이제 슬슬 밝아지고 있었다.
-왜 진작에 말 안 했어?
이건...... 잘 생각해야 한다. 물론 내가 열심히 머리를 굴려도 섭회상 앞에선 생쥐 재롱이겠지만, 그래도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래서 내놓은 답이라는 게 이거였다.
-죄송합니다. 종주님 괜히 걱정시키기 싫어서 그랬는데, 오히려 일이 이렇게 됐네요. 죄송해요.
섭회상은 잠시 동안 말이 없다가 물었다.
-악몽을 사실 계속 꾸고 싶은 게 아니니?
-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한 달 동안 하루에 한 시진도 제대로 못 잔 사람한테 할 말 아니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어쩐지 섭회상이 그런 질문을 던진 의도를 알 것 같았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섭회상의 숨결이 머리 위로 느껴졌다.
-사랑해. 정말이야.
나도 그렇다고 속삭이려던 때였다.
-꿈을 나눠 꿀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건 좀? 나는 인상을 썼다.
-그럼 괜히 저 때문에 종주님도 악몽 꾸실 수 있는 거잖아요. 저는 싫습니다.
-나는 좋아.
섭회상이 고집스럽게 말했다. 그가 나를 더 세게 끌어안아서, 갈비뼈가 아주 조금 아팠다.
-있지, 밀아. 만약 내가 너보다 먼저 죽으면, 나는 밤마다 네 꿈에 찾아갈 거야.
-종주님 돌아가시면 저도 바로 죽을 건데요?
왜 깊은 밤도 아니고 해 다 뜬 새벽녘에 이런 낯간지러운 대화를 해야 하나 생각하면서도 나는 그렇게 대꾸했다. 섭회상이 내 귓가에 헛웃음을 흘렸다.
-그럼 만약, 네가 먼저 떠나면…… 내 꿈에 매일 나와줄래?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해보겠습니다.
-응.
섭회상이 나직하게 대꾸했다. 그의 손이 내 아랫배를 지나 더 아래로 느리게 내려가는 걸 느끼며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네가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을 때까지 내가 옆을 지키고 있을게. 그 정도는 나도 할 수 있는 거잖아.
나는 착실히 가빠지는 호흡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섭회상의 입술이 내 뒷목에 닿았다.
-그러니까 앞으로 평생, 나 혼자 재우지 마. 밀아.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섭회상이 내 어깨를 지그시 깨물었다. 그의 입맞춤이 날개뼈를 지나 등을 타고 내려가는 것을 느끼다 보면 어느새 나는 침상을 마주하고 있었다. 이런 자세로 한 적 있었던가......
-아밀.
나직한 목소리 때문인지, 섭회상의 얼굴이 조금도 보이지 않아서인지, 자꾸만 몸을 지탱한 팔이 떨렸다. 의미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두 눈을 감았다. 차가운 손이 간질이듯 허벅지를 타고 올라왔다.
-그런 거......
나는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거 그만 하고, 그냥......
-그냥?
되묻는 그의 목소리에는 기묘한 열기가 서려 있었다. 몸이 형편없이 떨리는 것을 느끼며, 나는 체념하듯 고개를 숙였다.
-그냥, 들어와 주세요......
곧 내 위로 그림자가 졌다. 아래를 빠듯하게 파고드는 부피감 때문에 몸이 잘게 떨렸다. 완전히 맞닿은 몸으로 그 진동이 전해지고 있을 것임이 분명했다. 그러니 내가 적응할 시간을 주지 않고 내 위에 더 무게를 싣는 섭회상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명백했다. 나는 내내 떨리고 있던 두 팔에 힘을 풀었다. 이불 위로 무너진 채 헐떡이는 사이, 서늘한 입술이 내 귓바퀴에 닿았다.
-사랑해.
나직한 속삭임이 귓가를 적실 때마다 아랫배가 지끈거리며 조여들었다. 눈을 뜨자 검은 이불이 눈 앞에서 점점 더 구겨지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몸이 흔들릴 때마다 시야가 흐려졌기에, 눈을 감든 뜨든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나는 굳이 잇새로 흐르는 앓는 소리를 참지 않았다. 섭회상이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밀.
등 뒤에서 나를 밀어붙이던 움직임이 멎자, 오히려 몸이 더 떨려왔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침상에 지탱하고 있던 섭회상의 손을 찾았다. 그가 내 손을 단단히 쥐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내 이름, 불러주면 안 돼?
나는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가, 섭회상과 맞잡은 내 손에 이마를 기댔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회상.
동시에, 섭회상의 차가운 손이 내 턱을 감싸쥐곤 자기 입술로 이끌었다.
*
언제 그 행위가 끝났는지는 모르겠다. 눈을 떴을 땐 이른 오전이었다. 두어 시진쯤 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기지개를 켜던 나는 침대 맡 의자에 앉아 졸고 있는 섭회상이 보여 순간 어리둥절해졌다. 왜 침대에 누워서 안 자고 저러고 자나...... 싶어 조심스럽게 섭회상의 어깨에 손을 댔더니, 섭회상이 퍼뜩 눈을 떠서 나를 바라보았다. 멍하니 나를 바라보던 그가 정신을 차린 듯 내 두 어깨를 붙잡았다.
-괜찮아?
-예? 뭐가요?
-너 꼬박 이틀 동안 잠들어 있었어.
내가? 나도 덩달아 섭회상처럼 멍한 얼굴이 되었다가, 무언가를 깨닫곤 두 눈을 크게 떴다. 웃음이 터졌다. 내가 소리내어 웃는 동안 섭회상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점점 울상이 되어갔다. 나는 그런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웃음이 더 이상 나오지 않을 때까지 웃었다. 그리곤 대체 무슨 일인 거냐며 울먹거리는 섭회상을 올려다보았다.
-저 이번에 정말 잘 잤어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나를 바라보던 섭회상의 얼굴에 점점 깨달음이 깃드는 것을 보자니 뒤늦게 겸연쩍어져서, 나는 괜시리 어색하게 웃었다.
-왜인지 모르겠네요......
대꾸 좀 해주지, 사람 무안하게 섭회상은 나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결국 나는 어색하다 못해 다 갈라진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러야 했다.
-회상.
잠시 뒤, 섭회상의 눈에서 눈물 방울이 하나 뚝 떨어졌다. 나에게 와락 안기는 그 때문에 나는 하마터면 또 침대 모서리에 머리를 박을 뻔 했다. 그러나 그러는 대신 나는 푹신한 침상 위로 풀썩 쓰러졌고, 환한 햇빛이 새어드는 창문이 내 눈에 거꾸로 비쳤다. 품 안의 섭회상은 분명 또 울고 있었지만, 굳이 그를 그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웃음이 터지는 것을 나는 막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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