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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08 22:54
진정령, 난백 ㅅ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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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광요가 나에게 모현우 이야기를 꺼낸 적은 거의 없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난 금광선이 그를 데려왔다는 이야기와 금광요가 그를 쫓아냈다는 이야기를 금린대 밖에서 항담으로 전해들었을 뿐이다. 그 이야기를 내가 금광요에게 꺼낼 이유가 없었다. 지금도, 내가 굳이 금광요에게 모현우 이야기를 하려고 급하게 편지를 쓸 필요는 없었다. 나는 꾸역꾸역 걸어나갔다. 그러고보니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를 잠시 생각하다가, 돈을 찾으러 가는 중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멈춰서서 잠시 웃었다. 사람들이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상관 없었다. 나도 내가 징그러웠으니까.
찾아가서 맡겨둔 돈을 다 찾아가겠다니 나라 잃은 얼굴을 하는 점원들 때문에 조금 미안하기는 했다. 하기야 그동안 그거 굴려먹는 재미가 쏠쏠했겠지. 하지만 점원들은 감히 나한테 항의하거나 나를 설득하려고 시도하지는 못 했다. 그들의 얼굴에 서린 건 명백한 두려움이었다. 피가 묻은 것도 아닐 테고 인상을 쓰고 있는 것도 아닌데 저런 눈으로 나를 보는 이유가 뭘까. 거울이라도 봐야하나.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그동안 내가 벌어둔 모든 돈이 내 눈 앞에 놓였다.
나는 금자로 가득 찬 상자 하나를 질린 눈으로 보다가, 내가 순서를 잘못 잡았다는 걸 깨닫고 마른 세수를 했다. 일단 그 중 조금만 찾아가겠다니까 대놓고 안도하는 점원들의 얼굴이 희극적이었다.
목적지가 정해져 있으니 나는 가기만 하면 되었다. 객잔을 잡자마자 낮술을 시키는 나를 점원은 찌푸린 얼굴로 바라보았지만, 내가 꺼낸 은자 크기를 보더니 곧 싱글벙글했다. 나는 왜 저러질 못 했지. 금광요가 돈 많이 줬으면 그냥 아이고 감사합니다 인사하고 내 볼일 보면서 잘 살았으면 됐잖아. 하지만 이십 년 전의 나는 그러지 못 했고,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다. 큼직한 술단지를 바라보다가, 나는 점원에게 물었다.
-어젯밤에 혹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 모가장에서 일어난 일 말씀이시군요. 벌써 소문이 쫙 퍼졌죠, 퍼졌어.
점원의 말을 듣자하니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모씨 집안은 적당히 부유한 세속의 가문들 중 하나이고 그 저택은 모가장이라 불리는데, 하필 그 둘째딸이 금광선 눈에 들어 사생아를 뱄댄다. 그게 모현우다.
모현우는 어머니와 함께 눈칫밥을 먹으며 모가장에서 자랐다. 그러다가 금광선이 자기 사생아라고 데려가서 좀 신세 펴는 듯 했으나, 얼마 안 가 금광선이 죽고 쫓겨난 뒤론 아예 가문의 수치가 되어 이모와 다른 친척들에게 본격적으로 학대를 당했다. 그래서 미친 건지 미쳐서 더 구박을 먹은 건지는 알 수 없으나, 단수라는 소문도 공공연히 퍼져 있었고 아무튼 처치 곤란이었다.
그러던 며칠 전, 모가장 근처에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는 핑계로 이모인 모 부인이 고소 남씨 수사들을 불렀다. 그 앞에서 모현우가 사촌 형인 모자연이 자기를 때렸다며 또 한바탕 소란을 피운 모양이었다. 그런데 하필 그 날 저녁 모가장에 괴뢰들이 나타나 모현우를 제외한 모씨 일가가 몰살 당하고 모현우는 행방이 묘연하다...... 그러니 참 이상한 일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
-이상한 일이긴 하군.
그렇게 혼잣말을 하자 점원은 붙임성 있게 맞장구를 쳤다.
-그럼요, 그럼요. 듣기로 고소 남씨 함광군이 직접 사태를 진압했다고 하더라고요.
그 정도의 거물이 나섰다고? 게다가 괴뢰? 아무리 생각해도 상황이 좋지는 않았다. 나는 대충 점원을 물린 뒤 술병을 땄다. 금광요는 이미 알고 있겠지? 그래도 전해주기는 해야 했다. 무슨 일인진 몰라도 혹시 음호부가 엮인 거라면 금광요가 평소처럼 쉽게 처리하긴 어려울 거다.
그러나 사실 내 머릿속에 어른거리는 건 금광요와 모현우보다도, 섭회상이었다. 길거리 사람들이 흘러가듯 말하던 이야기가 귀에 박혀 떠나질 않았다. 섭회상이 피를 본 게 벌써 소문이 다 났단 말이지. 나와 시시덕거리는 것까지 청하 밖에 소문이 나 있을 줄은 몰랐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 아닌데. 금광요도 알고 있었고, 섭씨 수사들도 다 알았고, 청하 길거리에서도 담주에서도 그러고 다녔으니 소문이야 진작에 났을 것이다. 참 좋다고 부정세에서 그러고 있었다. 미래를 다 생각해놨다고 했지만, 사실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뭐 하나 제대로 한 게 없는 거다. 이런 한심한 인생이라니.
자기연민에 취해 술독에라도 빠져버리고 싶었는데, 술 두 동이를 비우고도 정신이 끔찍할 정도로 또렷했다. 담배를 태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는데 담배도 없고, 그냥...... 나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렇게 생각하자.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섭회상은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우스갯거리로 삼는 일문삼부지인 것이고, 나는 살던 대로 사는 거고, 금광요도 마찬가지인 거지. 정말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그렇게 각자 살면 된다. 하지만 손바닥에 앉아있는 딱지가 소름끼치게 선명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겨우 해낸 거란 게 이거라면. 섭회상이 계속 가면을 쓴 채 외롭게 미쳐가는 게 내 최고의 성과라면. 술잔에 떨어지는 물방울을 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뭔가를 해야 해. 하지만 뭘 해야 할까.
대충 침대 밑에 쓰러졌다가 눈을 떴을 땐 밤이었다. 취하고 숙취가 오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취한 적도 없는데 머리가 깨질 것 같으니 이건 좀 우스웠다. 나는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속이 좀 진정된 뒤에는 금광요에게 금빛 나비를 날렸다. 모가장에서의 일, 그리고 동영으로 가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전하자 이틀 뒤에 답장이 왔다. 모가장의 일은 내가 신경 쓸 것 없고, 동영행에 필요한 물자와 인력은 포구로 보내주겠다는 말에 나는 그렇게 또 객잔을 떠났다.
객잔을 떠날 때 새로이 들은 소식은 모가장 사건에 대한 것만큼이나 이상하기 그지없었다. 몇 달 전부터 대범산에서 계속 괴이한 일이 일어난지라 이번에 각 가문 자제들이 참여하는 야렵대회가 열렸는데, 오래 전 봉인되었던 천녀상이 깨어나 사람이 죽고 다쳤다고 한다. 그래. 거기까지는 그렇다 치자. 그런데 그 자리에 16년 전 소멸되었어야 할 귀장군이 돌연 나타났다. 그리고 모현우도 거기 있었다. 남망기와 강만음이 모현우를 두고 서로 데려가겠다고 싸웠고, 결국 남망기가 모현우를 데리고 운심부지처로 갔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항상 현실이 상상을 이긴다는 생각을 했다. 별...... 진짜 별일이다. 차라리 남희신과 금광요가 자기들이 단수였다고 고백하는 게 더 현실성이 있었다.
아무튼 모현우야 그렇다 쳐도, 내가 걱정인 건 귀장군이었다. 귀장군은 분명 금린대에서 소멸한 걸로 되어있었다. 그런 그가 다시 나타났다는 게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금광선과 금광요가 귀장군을 죽였다고 해놓고선 죽이지 않았던 거지. 설양을 데리고 음호부로 이런 저런 실험 같은 걸 했던 걸까? 뭔진 몰라도, 금광요의 손은 이번에 한 번 미끄러졌고 이건 단순한 실수라고 하기엔 그 규모가 너무 컸다.
사건의 심각성은 금광요가 나보다 더 잘 알 거다. 그렇게 되뇌이며, 나는 남쪽으로 계속 갔다. 강을 두어 개 건너자 첫 눈이 내렸다. 강둑에 잠시 멈춰선 채로 흰 눈을 맞을 때, 나는 결코 잊고 싶지 않은 얼굴을 생각했다. 그는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나는 언제쯤 그의 얼굴을 잊을까? 나는 나를 잘 알았다. 나는 머리가 나쁘니, 시간이 흐르면 그의 얼굴을 지금처럼 세세히 기억하지는 못 할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죽어도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도착한 바닷가는 두꺼운 옷 입은 사람들과 비린내와 습한 공기로 북적였다. 물론 바닷바람이 습한 건 당연했다. 하지만 호수 같이 고인 물과는 달라서, 운몽의 끈적함을 못 견디겠는 것과 다르게 바다 근처는 오히려 좀 머무를 만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는 고소로부터 동쪽으로 얼마 떨어져있지 않은 곳이다. 그런데 고소와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사람들이 나긋한 말씨를 쓰지도 않았고, 나룻배를 타고 다니지도 않았다. 나는 금광요가 자주 그러듯 혹시 지금도 고소에 와 있을까 잠깐 생각했다.
그러나 금광요 대신, 포구에서 나는 그가 보낸 사람들과 만났다. 모인 인원이나 구하려는 배나 다 규모가 작지 않았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배를 구하고 항로를 정하고 하는 내내 나는 생각에 잠겨있었다.
쉬운 일이 하나 없었다. 제일 큰 문제는 날씨였다.
-다음달은 돼야 갈 수 있다니깐요, 동영. 이때쯤엔 바람이 너무 심해서 해동은 가도 동영은 못 가, 못 가.
말을 묻는 뱃사람들마다 그렇게 말하며 손사래를 치니,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하기야 내가 동영 갈 때는 초봄이었고 올 때는 초여름이었지. 한 달 늦어진다고 문제될 것은 없었다.
없어야 했다.
나는 금광요가 보내온 사람들과 거의 교류하지 않았다. 주로 내 방에 있다가 대화를 나눠야 할 때만 잠깐씩 만났고, 객잔을 나서는 일은 그보다 더욱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쯤 밖으로 나가 바다를 보는 게 다였다. 깊게 울렁거리는 물을 볼 때면 마음 속은 몰라도 머릿속은 좀 잠잠해졌다. 언젠간 건너편에서 이 파도를 보겠거니 생각하다 보면, 이른 아침에 나가 늦은 밤이 되어 돌아올 때까지 가만히 앉아만 있는 일이 전혀 어렵지 않았다.
그런 내가 불쌍했는지 몇몇이 자주 말을 걸어왔다. 미약한 동정과 동경 같은 것이 그들의 눈에 보여 당황스러웠다. 이야기를 듣다보니 대충 금광요가 그들에게 내 이야기를 한 모양이었다. 각자 자기가 금광요에게 어떤 은혜를 입었는지 이야기하는 것을 무감각하게 듣고 있으면, 그들은 어색하게 웃는 얼굴로 물러나곤 했다. 금광요가 보낸 사람들이라고 믿기 힘든 그들의 미소를 나는 아주 잠시동안만 곱씹었다. 그리곤 바다로 갔다.
포구는 배도 사람도 많아 북적북적했다. 그래서 나는 근처 절벽 위에 주로 앉아있곤 했다. 그 날도 그런 날이었다. 객잔을 나서 걸으려는데, 객잔 주인의 자식들로 보이는 애들이 속닥거리는 소리가 귀에 박혔다.
-누가 돌아와?
내가 우뚝 멈춰 선 채로 그렇게 물었을 때, 애들은 자기들끼리 시선을 주고받더니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겁에 질린 얼굴을 보며 내가 한 발짝 다가서자, 아이들은 아예 울음을 터뜨렸다. 객잔 주인이 나와 아이들을 달래는 동안 나는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주고받던 말을 곱씹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객잔 주인이 얼굴을 흐렸다. 나는 그녀에게 천천히 물었다.
-이릉노조가 돌아왔다는 게 무슨 소리입니까?
객잔 주인은 아이들을 방에 들여보내더니 침을 삼켰다.
나는 주인을 따라 다시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이른 아침이라 객잔에는 손님이라 할 만한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희미한 찻향을 맡으며 나는 주인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들었다.
-저희도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밖엔 모릅니다, 손님. 듣기로는 이 주 전쯤 수진계 사람들이 다 모인 곳에 이릉노조가 나타났고, 함광군을 납치했다고 해요.
수진계 사람들이 다 모인 곳이라면 하나였다. 금린대. 금린대에 나타났다는 거야? 위무선이? 그게 이 주 전인데 금광요한테서 아무 연락도 없었다고? 말이 안 됐다. 멍하니 서 있는데, 때마침 방에서 익숙한 얼굴이 나왔다. 금광요가 보낸 남자들 중 하나였다. 나는 그를 보면서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이릉노조가 돌아왔다는데, 무슨 일인지 설명해보지 그래요.
객잔 주인은 나와 남자의 눈치를 보더니 슬며시 사라졌고, 남자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방으로 데려가 방음 주술을 몇 겹이나 건 것치고 그가 하는 말은 간단했다.
-모현우가 헌사라는 주술을 통해 이릉노조를 되살렸습니다.
-헌사?
-자기 혼을 희생해 죽은 자를 되살리는 기술이라고만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중요한 건 아니니까요. 중요한 건 되살아난 이릉노조가 함광군과 함께 섭명결의 사인을 조사 중이라는 사실입니다. 종주님께 연락이 온 건 이 주 전입니다만, 당신에게 소식을 전하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하여……
남자가 말끝을 흐렸다. 나는 두 눈을 깜박였다. 머리를 세게 한 대 맞은 듯 어지러웠다. 눈 앞의 남자가 굳이 거짓말을 할 리는 없었다. 그러니 금광요가 나에게 소식을 전하지 말라고 한 게 사실이다. 대체 왜? 나를 믿을 수가 없어서? 내가 쓸모 없어서?
아니면, 알고 있어서?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주술을 나는 본 적이 있었다. 헌사. 섭명결. 위무선. 대범산. 그 단어들의 중심에 있을 법한 이름이 무엇인지도 나는 알았다. 넋이 나간 내 얼굴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남자가 아까보다 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준비가 되는 대로 저희끼리 떠나는 것이 계획이었잖습니까? 그런데 이젠 그래선 안 될 것 같습니다. 언제든 배가 뜰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 놓으라고 하셨거든요. 이 주 뒤면 항해가 가능하니, 그 때부터는 즉시 출발할 수 있을 정도로 모든 것이 갖춰져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중얼거렸다.
-그래서 나는 뭘 해야 하는데요.
남자는 잠시 동안 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지금처럼 계시면 됩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종주님의 연락을 기다리는 것뿐이니까요. 어쩌면 영영 배가 뜨지 않을 수도, 아니면 그 분 없이 뜨게 될 수도 있지요. 그 편을 더 바라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내가 바란 대답은 아니었다. 멍하니 눈만 깜박이는 나에게, 남자가 위로하듯 말했다.
-괜찮을 겁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남자가 다시 말을 붙여왔다.
-최근에 힘든 일을 겪으셨으니 최대한 배려해드리라는 말씀 염방존께 들었습니다. 염방존께서 항상 의지하시는 분이시라고요. 그 분께 그런 분이라면...... 제게도 은인입니다.
동경과 동정이 반씩 섞인 그 얼굴을 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날 나는 절벽 위에 앉아 검푸른 수평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파도가 칠 때마다 머릿속에선 기억의 편린들이 더 잘게 부서졌다. 언제 눈을 뜰 거냐고 묻던 섭회상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그러게. 마지막까지도 나는 섭회상을 바로 보고 싶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그가 정말 가련하고 힘없는 존재라고 굳게 믿었던 걸까. 그가 그런 존재여야 했나, 내가 그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는 몇 번이고 나에게 자기를 알아달라고 부탁했는데, 나는 끝까지 몰랐다.
마지막 순간 그의 미소를 떠올리는데, 문득 입 안에 미약하게 피맛이 돌았다. 속에서 새어나온 피였다. 나는 단전에 손을 짚었다가 금방 다시 뗐다. 모르겠다. 섭회상이 나를 포기했든, 용서했든, 어떻게 하든 다 좋았다. 문제는 하나였다. 섭회상을 해치지 말아달라고 금광요에게 애원한 내가 섭회상에게는 같은 부탁을 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만약 금광요가 진실을 알고 있다면, 나와의 약속을 지킬 리가 없다는 것. 결국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할 수가 없다는 것 말이다.
스무 해 전의 어린 나와 지금의 내가 무엇이 다를까. 내가 또 아무것도 몰라서 누군가를 죽이고 있었다.
멀리 오가는 배들이 보였다. 돛대는 아무 무늬 없이 다들 말끔했고, 그걸 보다 보면 나는 섭회상의 부채부터 생각이 났다. 또는 얼굴 없는 그의 그림. 그 속으로 숨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럴 수 없다. 그렇다고 내가 달리 할 수 있는 게 있나?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금광요에게 진실을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섭회상을 막을 자격이 내게 있는 것도 아니다. 사실 막을 수 있을 리도 없다. 이 정도로 거대하게 짜인 판에서 내가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섭회상은 그의 모든 걸 이 판에 걸었다. 그렇잖은가, 그는 금광요를 속이기 위해 섭명결마저 이용했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제일 혐오했다던 자기 형을. 입 안에 새롭게 피맛이 번졌다.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떻게 한 걸까. 직접 모현우를 헌사시킨 걸까? 뭐라고 어떻게 설득했기에 모현우가 자기 혼을 다 찢고 자살한 걸까. 모현우 외에 또 누가 죽었을까. 행로령에 있던 그 시체들도 섭회상이 유도한 것이었고...... 주화입마로 죽은 그 수사도 그렇다. 섭회상은 그를 진작에 죽이고 싶었던 걸까?
그것까지는 모른다. 섭회상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모든 계획을 나에게 내보인 건지도. 조금만 삐끗했어도 그는 곧장 죽은 목숨이었을 테고, 십 년을 공들인 복수도 다 날아갔을 것이다. 그가 나를 그 정도로 믿은 것일지, 아니면 그것도 다 계산한 것일지 내가 알 길은 없었다.
모른대도, 선택을 해야 했다. 할머니가 나와 남동생 중에서 하나를 고른 것처럼, 똑같이 나도 금광요인지 섭회상인지 하나를 골라야 했다. 결국 문제의 본질은 그거 아닌가.
하지만 답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섭회상의 방에서 보았던 헌사 주술에 대해, 음호부에 대해 금광요에게 말하지 않았다. 이게 그 결과다. 그리고 나는 몇 번을 되돌아가도 특별히 다른 선택을 할 수가 없다.
만약 금광요가 모든 것을 이미 다 알고 있다면...... 그러면 내가 또 어떻게 해야 할까. 어느새 하늘에는 노을이 지고 있었다. 나는 해가 바다에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천천히 걸어나가 절벽 끝에 서자, 바람이 사납게 나를 끌어당겼다. 그러나 이상하게, 정말 이상하게도. 나는 마지막 한 걸음을 뗄 수 없었다. 이번에는.
그래서 나는 뒤돌아 떠났다. 객잔에서 챙긴 짐이라곤 내가 난릉을 떠날 때 쌌던 봇짐 하나 뿐이었다. 왔던 길을 되짚어 북으로 향하며, 나는 사실 특별한 목적지도 없이 그저 계속 이동했다. 고소를 지나쳐 강 하나를 건넜을 때에야 비로소 실패로 돌아간 이릉노조 토벌에 대해 전해들었다. 사실 실패라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릉노조 위무선은 과연 대단한 인물이었다. 자기를 죽이려 몰려든 사람들을 몸소 구했다. 그의 행동은 당연히 존경받을 만하지만, 그건 금광요가 원한 결과는 아니었을 것이다. 선문의 쟁쟁한 명사들이 모두 모인 난장강에 눈에 띄는 빈 자리가 두 개 있었으니, 택무군과 염방존이라는 말을 듣고 나는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더 생각할 게 없었다. 나는 방향을 서쪽으로 틀었다. 난릉도, 청하도 아니다. 운몽으로 가야 했다.
모든 것엔 정말 끝이 있구나. 부귀영화 따위 다 헛되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개소리라고 생각하고 넘겼었는데, 이제 비로소 그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익숙한 길거리를 정처없이 걸었다. 오래 전 내가 나를 하동 부씨 대문 안으로 밀어넣던 할머니를 뿌리쳤다면, 지금보다 더 평화롭게 살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내 인생을 틀어쥔 두 사람을 만날 일은 없었을 테다.
어쩌면 금광요도 금광선의 아들이 되겠다는 다짐 같은 건 버리고, 어머니의 유지도 버리고 그냥 평범하게 살았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그간 그는 항상 지금 같은 결말을 염두에 둔 채 살아왔을 것이다. 그러니 동영행도 계속 준비해두었던 것 아닌가.
하지만 만약 지금 같은 날이 올 줄 알았다면, 대체 왜 그렇게 살아야 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크고 둥그런 관음묘의 정문 앞에 멈춰섰다. 문을 두드리지도 않았다. 그저 그 앞에 서 있다 보면, 문이 나를 밀어내듯 천천히 열렸다.
-왜 왔어.
그새 수척해진 금광요가 나를 보며 비틀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울긴 왜 우니. 이래서 너한테는 끝까지 소식 전하기 싫었는데. 게다가 몰골이 이게 뭐야? 죽은 사람인 줄 알았잖아.
나는 달리듯이 절 안으로 들어섰다. 금광요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고, 거의 그럴 뻔 했다. 코 앞에 놓인 흰 얼굴을 보며 나는 손뼈가 으스러져라 두 주먹을 말아쥐어야 했다. 어언 이 주 만에 처음으로 낸 목소리는 내가 듣기에도 끔찍했다.
-금광요 이 미친 놈아! 네가 정말 여기 있으면 어떡해!
-그럼 누가 여기 있어야 해.
-누구든! 나든, 아니면 네 사람 중 그 누구든 시켜서 가져오게 하면 되잖아!
관음묘가 관음묘라는 이름이 붙은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여기 어딘가 금광요의 어머니가 누워있으리라는 것을 나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금광요도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니 나를 시켰으면 되지 않냐고, 왜 도망칠 시간도 모자란 이 시점에 여기 와 있냐고. 그렇게 묻기에는 내 심장 한 구석이 다른 이름으로 묵직했다. 아. 정말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
-너를 믿지 못한 건 아니야. 헌아. 내가 너를 못 믿으면 누굴 믿겠니.
아니야.
-너도 알잖아, 내 성격. 그 누구에게도 맡길 수 없는 일이었어. 그뿐이야. 시간도 충분하니, 괜찮아.
금광요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심장을 찌르는 것만 같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진저리를 쳤다.
-제발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 그 누구에게도 못 맡긴다고? 그럼 네 목숨은 다른 사람한테 맡길 수 있어? 네가 이미 바다를 건넜어도 걱정해야 하는 게 네 목숨이야. 여기서 이렇게 시간을 지체하는 게 대체 누굴 위해선데?
-헌.
-한 번 생각해 봐! 너라면 네 자식이 이런 상황에 여기 있기를 바라겠어?
-그만.
금광요의 목소리는 날카로웠지만, 끝이 떨리고 있었다.
-이건 이미 결정된 일이니, 네가 더 토달 건 없어.
그러더니 그의 시선이 내 옆으로 옮겨갔다. 그의 시선을 따라간 나는 머리 끝까지 뜨겁게 솟아올랐던 피가 한 순간에 얼어붙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현기증이 나서 비틀거리는 사이, 금광요가 웃는 얼굴로 내 시선 끝에 있는 남자에게 말했다.
-둘째 형님을 이리 가까이서 뵙는 건 처음이지? 형님도 헌은 초면이실 겁니다. 이 자가, 한참 온씨네 개들이 형님을 쫓을 때 운심부지처의 고서를 모두 맡아 숨겨주었습니다.
권운 장식 말액을 맨 남색 옷의 남자가 누구인지는 하늘이 하늘인 것만큼 분명한 일이었다. 남희신의 갈색 눈동자가 떨리는 것을 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 목소리가 마치 멀리서 들리듯 아득했다.
-택무군이 왜 여기 있어?
금광요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침묵하는 그 몇 초 사이, 마치 혈관에 잔뜩 성에가 끼는 것만 같았다.
-너 정말 미쳤어?
나는 시선을 남희신에게 고정한 채로, 거의 속삭이듯이 물었다.
금광요에게 있어 남희신이 어떤 인물인지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 순간 다 나와 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금광요가, 남희신이라면 자기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듯 지극정성이던 그가 남희신을 납치했다. 남희신이 자의로 여기 와 있을 리는 없었다. 그럴 사람이 아니기도 하거니와, 금광요가 혼신의 힘을 다해 그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대도 저건 거기 동의한 사람이 지을 법한 얼굴 표정이 아니었다. 나는 내 시선을 피하는 남희신에게서 거의 동시에 고개를 돌려 금광요를 보았다. 그러나 눈물 고인 채 웃고 있는 저 얼굴 앞에선, 대체 왜 이러고 있느냐는 질문이 무용해졌다. 스무 해라는 긴 시간이 헛되지 않았는지, 그의 눈빛만 봐도 나는 그가 지금 어떤 심정인지를 알 수 있었다.
-그런 얼굴 하지 마.
-그런 얼굴이라니?
-차라리 저 사람 풀어주고, 빌어. 도망치게 해 달라고 빌기라도 하란 말이야.
분명 금광요는 남희신을 납치하는 극단적인 방법은 생각 하면서도 그의 자비심에 기댈 생각은 못 해봤을 것이다. 그러고선 그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자학하지.
애초에 이럴 필요가 없었다. 남희신에게 빌 필요도, 그를 납치할 필요도 없었다고. 끝까지 남희신에게 웃는 얼굴과 상냥한 목소리로 남고 싶었다면, 그랬으면 되잖은가. 남희신을 납치할 시간에 동남쪽으로 더 가기만 하면 되었다. 지금이라도 그렇게 하면 된다. 금광요를 막고 있는 건 다른 누가 아니라 그 자신이다.
그런 내 생각을 읽은 게 분명했다. 금광요는 잠시 동안 빤히 나를 보다가, 허하게 웃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둘째 형님? 정말 아직 늦지 않았나요?
남희신은 고개를 숙인 채로 고집스럽게 침묵을 지켰다. 금광요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노을빛이 붉게 물든 그의 얼굴은, 감정이 갈무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고 있자면 눈물이 날 정도로 처절했다.
-너는 세상 사람들이 다 너같을 거라고 생각하는 나쁜 버릇이 있어, 헌아. 묻지 않니? 내가 또 어떤 죄를 지었냐고.
-그게 뭐가 중요한데.
이제 와서. 그 순간만큼은, 나는 그가 내 부모를 죽였대도 변함없이 여기 서 있을 수 있었다. 나를 잠시 바라보던 금광요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이것 봐. 사람들은 대개 너처럼 어리석지 않다고. 네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진 모르겠지만, 걱정할 필요 없어. 나는 둘째 형님을 해칠 생각은 조금도 없거든. 지금도 영력만 봉인해뒀을 뿐이야. 그러니......
-아니야.
나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금광요의 옷소매를 겨우 붙들었다.
-제발...... 그게 아닌 거 너도 알잖아.
남희신을 걱정하는 건 아니었다. 내가 걱정하는 건 적어도 그 순간 그 장소에선 금광요뿐이었다.
금광요가 뭘 하든 이미 남희신과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다. 금광요가 남희신에게 아예 나쁜 놈이 될 수는 없다는 건 나도 잘 안다. 하지만 이제 와 어떻게든 덜 나쁜 놈이 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가 그 사실을 모른 척 할수록 그에게는 독이었다.
의미가 없다. 정말 동영으로 떠날 거라면 더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일 아닌가. 정말 동영으로 갈 거라면, 그래서 다시 얼굴 보지 않을 거라면. 그러면 그 얼굴의 주인공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섭회상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아요.
그렇게 금광요를 부를 때 나는 점점 더 차오르는 울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가자. 그냥 얼른 가자, 제발......
그게 내가 그 순간 그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부탁이었다. 눈물로 자꾸 눈 앞이 흐려지는 바람에 금광요의 얼굴도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눈을 깜박일 수조차 없었다. 금광요의 새하얀 얼굴을 보기가 너무 무서웠다. 무서워서 숨을 죽였다. 섭회상이 계획한 금광요의 마지막은 어떨까? 적어도 섭명결의 것보다 몇 배는 더 잔인하겠지. 금광요의 한숨소리를 들으며 나는 몸을 떨었다.
-민선. 잠시 감독을 부탁하오.
그러더니 금광요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나를 어디론가 이끌었다. 나는 그를 따라 힘없이 걸었다. 울음이 그치지는 않았으나, 눈을 깜박이자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또렷해진 시야에 보인 건 다른 게 아니라 금광요가 잡고 있는 내 손이었다. 이전까지 단 한 번도 나는 그의 손을 잡아본 적이 없었다. 그를 업거나, 부축하거나, 가끔 어깨를 두드리거나. 그게 다였다. 지금 내 손을 붙잡은 금광요의 손은 서늘했고 단단했으며 또 부드러웠다.
-그만 울어.
금광요가 나지막히 말하며 내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쥐었다. 그의 명령대로 울음소리야 어떻게 막을 수 있었지만 눈물이 흐르겠다는 걸 멈출 수는 없었다. 여러 번 깜박이며 고개를 들자 보이는 건 관음묘의 뒷마당이었다. 잎 없이 앙상한 나무들이 줄지어 있었고, 담장 너머로 웅성거리며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멈춰 선 금광요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저 작은 문.
-꼭 우리 첫만남 생각난다. 그렇지 않니?
그렇게 묻는 금광요를 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기묘한 평온이 일렁거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손에 매달렸다.
-그럼 그때처럼 나랑 가자. 제발......
-누가 안 간댔어? 갈 거야. 하지만 네가 먼저 가야 해, 헌아.
-왜......
말을 거의 잇지 못하는 나와 다르게 금광요는 침착했다.
-여기를 떠날 수는 있지만, 문제는 여길 나가서부터야. 퇴로를 지켜야 하지 않겠니.
그의 시선이 순간 먼 곳을 스쳤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산길이 하나 있어. 여길 벗어나면 거기서 정비를 마치고 다시 떠날 거야. 위치를 설명해줄 테니, 거기 가서 나를 기다려줘.
-싫어!
나는 곧장 대답했다. 나에게 으스러져라 쥐인 손이 아플 만 한대도, 금광요는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웃었다. 그가 아마 엉망인 내 얼굴을 옷소매로 닦아주는 동안 나는 속에서 다시 또 치미는 피를 삼켜냈다.
-왜 항상 기다리라고만 하는데?
-그야 네가 항상 가려고 하니까.
-난......
-널 원망하려는 게 아니야. 네가 다른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다는 게 나에게는 몇 안 되는 위안이었어. 물론 앞으로는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약속해 줘. 기다리고 있겠다고.
-아요.
-네가 그렇게 부르는 것도 참 오랜만이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인 것처럼, 다시는 못 볼 것처럼 금광요가 저런 얼굴을 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저런 얼굴을 봐야 한다면.
-그러면 나도 여기 있을래.
-내 말을 뭘로 들은 거야?
금광요가 부드럽게 나를 타박했다.
-너에게 맡겨야 내 마음이 편하다니까.
-너......
아무것도 모르면서. 다시 또 눈물을 흘리는 나를 보며 금광요는 작게 혀를 찼다. 그가 말했다.
-너는 여기서 달리 할 일이 없어. 네가 삽 하나 든다고 작업 속도가 빨라지겠니, 아니면 네가 여기서 감시를 서겠니? 만약을 대비해 민선을 곁에 뒀으니, 너는 내 뒤를 맡아주면 돼. 사람도 몇 붙여줄게.
-민선인지 뭔지를 보내. 내가 여기 있을래.
-내가 싫다니까 자꾸 그러네.
-싫......
-제발.
금광요가 내 말을 끊었다. 그리고 그때껏 내게 붙잡혀있던 자기 손을 빼냈다. 그 손이 내 어깨를 짚은 뒤에도 내 두 손은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마지막 부탁이라곤 하지 않을게. 앞으로도 나는 너에게 사사건건 부탁을 하겠지. 하지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부디 내가 하라는 대로 해줬으면 좋겠어.
그 말을 듣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뿐이었다.
-왜?
왜 나를 여기서 보내려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 명이라도 여기 더 있어야 금광요에게 도망갈 시간을 벌어줄 수 있을 것 아닌가. 내 생각을 읽은 듯 금광요가 턱을 굳혔다. 그러나 그의 웃음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내가 이 지경까지 왔다고는 하지만, 너를 밟고 올라서야 살 수 있을 정도로 모자란 놈은 아니야.
나는 왜 아니냐고 물을 수 없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나에게 금광요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내가 가 있어야 하는 산길을 말해주었다. 그러면서 스쳐지나가듯 말했다.
-어릴 적 자주 가던 곳이라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 거기 아주 큰 괴목이...... 있거든.
그건 전혀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이고, 그런 이야기들이 무수히 많이 있을 텐데. 마찬가지 내가 지금 그에게 하지 못 하는 이야기들이 무수히 많았다. 나는 떠밀리듯 입을 뗐다.
-동영으로 안 가면 안 돼?
-뭐?
-위무선을 헌사시킨 사람은 네 행적을 다 꿰고 있잖아. 네가 동영으로 간다는 것도 알지 않겠어?
모를 리가 없다. 그러나 금광요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와서 내가 달리 어디를 가겠니?
-차라리 북으로 가자. 아니면 아예 남쪽이든, 어디든. 나랑 지금 가자.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회의했다. 섭회상이 그 정도 변수도 생각을 안 해놓았을까? 내가 뭘 하든 그의 손바닥 안인 게 아닐까? 내가 그의 손바닥 안인 건 상관 없지만, 금광요는......
-자꾸 왜 이러니, 헌아.
-무서우니까!
내 대답에, 금광요가 웃었다.
-꼭 나를 이미 죽은 사람 취급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는 않다. 걱정 마, 무슨 수를 써서든 네가 기다리는 곳으로 갈게.
이럴 거면 그냥 나에게 오지 않는 게 좋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나도 모르게 생각했다. 그도 그럴게, 그와 나의 만남은 대체로 그의 내리막길에서 이루어졌다. 정말 그는 나를 만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꺼낼 힘이 없었다. 금광요가 사람을 부르는 동안 나는 비틀거리며 겨우 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탈진할 것만 같은데 정신만 또렷했다.
-그러게 그냥 거기 있지, 왜 여기까지 와서 이 고생이니.
명을 받고 달려오는 사람들을 보며 금광요가 속삭였다. 그의 눈에는 자기가 살 거라는 분명한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믿을 수는 없었다. 그가 자기 자신에게 속은 것은 아닌지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그가 내게서 천천히 멀어지는 것을 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붉은 빛을 받아 반짝이는 금성설랑포와, 적갈색 머리카락과, 그럼에도 홀로 새까만 오사모. 그가 그것을 고쳐썼다. 그리곤 웃었다. 그 웃음을 눈에 새기는 동안 그가 말했다.
-그래도, 헌아. 와줘서 고마워. 네가 여기 와줄 거라고 기대했었어.
말을 마친 그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곧 그가 부른 사람들이 그를 지나쳐 나에게로 다가왔다.
-아요!
나는 그를 불렀지만,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의 뒷모습을 끝까지 바라보았다.
*
그가 정말 올까. 나는 내가 먼저 발을 떼기만을 기다리는 여러 쌍의 시선을 느끼며 아주 느리게 움직였다. 길거리를 제각기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마치 나와는 다른 차원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계속 걸었다. 금광요가 말한 대로, 산에 접어들자 나온 샛길은 길이라고 하기 애매할 정도였지만 길이 아니지도 않았다. 어두운 숲을 헤치며 걷는 동안 다들 아무 말도 없었다. 비장함과 비참함이 묘하게 섞인 그 분위기 때문에 내내 속이 울렁거렸다. 그러나 나는 먼저 입을 열지는 않았다. 뒤따라오는 사람들의 말소리를 멍하니 들었을 뿐이다. 사실 들었다고 할 수도 없다. 목소리들은 바람소리만큼 아무 힘 들이지 않고 내 귓가를 스쳐지나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길이 살짝 넓어지면서 금광요가 말한 게 분명한 괴목이 보였다. 거대한 아름드리 나무였다. 앙상한 가지는 누군가 목 한 번 매달았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굵고 끝이 뾰족했다. 달빛 아래 새까만 나무 아래로 다가가, 나는 그 등걸에 기대어 천천히 주저앉았다. 나를 따라온 이들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나를 힐끗거리더니, 곧 나를 아예 배제한 채 자기들끼리 계속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그저 거기 앉은 채로 계속 기다렸다. 때때로 나뭇가지 사이 조각난 달을 올려다보았고, 때때로 두 눈을 감은 채 흙바닥으로부터 올라오는 냉기를 느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머리 위에서 울음소리처럼 나뭇가지 스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밤이 깊어가는 동안 숲과 함께 사람들도 술렁거렸다. 동이 터 올 때까지 아무도 오지 않자, 금세 나무 앞으로 모인 그들은 서로 언성을 높여가며 뭐라뭐라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상하지, 그들의 말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내 어깨를 짚은 채 일그러진 얼굴로 뭔가 말할 때도, 떠나면서 나를 돌아보고 또 뭐라고 말할 때도 나는 그냥 거기 계속 그렇게 앉아있었다. 그게 내가 제일 잘하는 것 아닌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잠이 들었던가, 아닌가 알 수가 없었다. 문득 눈을 뜨자 다시 밤이었다. 아직 죽지 않은 게 신기했다. 아니면 이미 죽은 걸까? 숨을 쉬고 있는 걸까?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었다. 하지만 어딘가 아프지도, 고통스럽지도 않았다. 그 때와 똑같았다. 그 때가 몇 달 전이었더라. 다른 게 있다면 여기는 동굴이 아니라 그새 또 해가 떠오르는 게 내 눈에 보인다는 것. 밤과 낮의 숲은 또 달라서, 이제는 사방이 조용했고 바람도 거의 불지 않았다. 마치 모든 게 환하게 얼어버린 것만 같았다. 이대로 며칠 더 있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까 내가 막연히 궁금해할 때였다.
-밀아.
그 이름.
눈꺼풀이 깜박였다. 두 눈에 초점이 잡힘과 동시에 온몸이 저릿하게 아파왔다. 마치 누군가 힘을 주어 내 겉과 속을 뒤집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고 몸에 힘을 주었다. 그래야 했다. 그래야 하는데...... 마치 물 밖에 나온 물고기처럼 심장이 퍼덕거렸다. 겨우 무릎을 반쯤 일으켜 섰을 때,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밀아......
나는 고개를 들었다. 해를 등진 흰 얼굴은 어두웠고, 동시에 너무 밝아서 금방이라도 두 눈이 멀 것만 같았다. 상관 없었다. 겁 먹은 섭회상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나는 흘러내리는 눈물 방울을 따라 시선을 내렸다. 눈물 방울은 내게 내밀어진 검은 것 위로 굴러떨어졌다.
나는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끝이 우그러지고 피와 흙이 묻은, 금광요의 오사모를.
-아밀......
금광요가 나에게 오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그게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깨달았다. 섭회상이 왜 우는지, 왜 나를 저런 목소리로 부르는지.
내가 섭회상의 복수를 완성한 것이다. 금광요가 알았다. 그가 다 알고 죽었다.
그 순간 속에서 무언가 부러졌다. 울컥거리며 단전에서부터 솟구쳐 오르는 기운을 나는 억누르지 않았다. 참지 않았다. 입 안에서 터져나오는 피도, 신음도, 눈물도, 그 무엇도. 가슴이, 목이, 입이, 코가, 두 눈이, 온몸의 혈관이 뜨겁다 못해 아팠다. 눈 앞이 붉었다.
섭회상이 나를 붙드는 게 느껴졌다. 그가 울면서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대신 몸을 숙였다. 그의 손에서 내팽개쳐진 오사모를 주워들었다. 그러자 그 위로 빠르게 새로운 핏자국이 새겨졌다. 그리고는 눈 앞이 완전히 붉어졌다.
마지막으로 들은 건 울음소리였다. 그러나 그게 누구의 울음인지까지는 알 길이 없었다.
*
왜? 간간이 의식의 끈이 잡힐 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왜 나는 아직까지 왜, 라는 질문을 하고 있을까. 그런 질문을 내 여러 이름을 부르는 울음 섞인 목소리를 들었다. 그럴 때면 나는 어떻게든 버티다가, 다시 눈 앞이 까매졌다. 온몸이 덜컹거리는 것을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와 있는 양 무감각하게 인식하기도 했고, 입 안에 고이는 피를 다시 삼키거나 뱉기도 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저항하지 않았다. 의미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차피 시간은 알아서 모든 일에 답을 내기 마련이다.
그러나 서서히, 이 지루한 시간의 끝이 어떻게 될지 판가름날 모양이었다. 정신이 또렷해지는 주기가 빨라졌다.
많은 이야기가 들렸다. 주로는 의원으로 추정되는 늙은 남자의 웅얼거림과 섭회상의 속삭임이었고, 때때로 다른 익숙한 목소리도 끼어들었다. 그러나 굳은 고막을 뚫고 머릿속까지 파고드는 목소리는 단 하나뿐이었다.
-차라리 나를 베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밀이도 형님도, 다 정말 미련해. 나를 지키겠다는 약속 따위 무시해도 될 걸, 그걸 지키겠다고, 이렇게......
공허한 웃음소리.
-닮았잖으냐? 이 애는 형님을 닮았고, 나는 이 애를 닮았지. 한 번도 내가 형님을 닮았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는데, 이 애 때문에...... 감히, 그런 생각도 해보았다. 그래서, 형님이 그 사람의 손을 빌어 나에게 밀을 보낸 거라고 처음에는 생각했어. 하지만 아니야.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나에게 이 애를 보낸 게 분명하다.
짧은 침묵.
-지난 십 년 간 부정세가 어땠는지 누군가 묻는다면, 백이면 백 내가 여기 있었다고 답하는 게 아니라 형님이 여기 계시지 않았다고 답하겠지. 나도 지난 십 년 간, 내가 형님의 빈 자리 그 이상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는걸. 사실 알려고 하지 않았다. 복수하려는 자의 마음가짐이 어때야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사람이 하필 밀을 나에게 보냈어. 그리고 이 애가 나를 볼 때면...... 이 애의 눈에 비치는 그 얼굴이 바로 나라는 생각이 들 때면...... 놓칠 수가 없었다.
내 몸을 감싸듯 쓰러지는 몸의 무게를, 나는 가까워진 그의 숨소리로 알았다.
숨을 쉬고 있었다. 일단은 살아있었으니까. 그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듣는 것뿐이었다. 한참 동안 주위가 조용해서 드디어 죽었나 싶을 때, 문득 나에게 말 거는 목소리를 듣곤 그가 계속 거기 있으며 나도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를 속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니?
가느다란 목소리.
-내가 먼저 속아야 해. 너는 내가 부른 거야, 밀아. 그 사람의 눈과 귀를 하나쯤은 내 옆에 묶어두고 싶었거든. 그런데 많고 많은 사람 중에 하필이면 네가 왔지. 정말 바보같은 네가 말이야. 간자가 되어서 자기 주인의 물건을 떡하니 손에 들고 오는 사람이 너 말고 누가 있겠니. 네 그 담뱃대...... 그 사람도 그것과 똑같이 생긴 담뱃대 가지고 있는 것 아니? 아마 몰랐겠지. 몰랐는데도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어떻게 그런 사람에게, 그렇게도 기쁘게 속을 수가 있니.
한참 뒤 다시 들려온 목소리는 웃는 듯 우는 듯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너무 쉬웠어. 너만 속이면 되는 거였으니까. 네가 이미 속아있었으니까. 재미있었어. 내가 뭘 했다고 네가 나를 그런 눈으로 보는지, 참 재미있으면서도...... 탐났어, 네가. 그 사람을 그렇게 애틋해할 사람이면 나도 이해해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어. 너만은 내 마음대로 속여도 될 것 같았어. 너와 있으면 무슨 일을 저질러도, 무슨 일이 있어도...... 다 괜찮을 것만 같았어. 그래서 과욕을 부렸어. 너를 그 사람에게서 뺏고 싶었어. 그래야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어. 그럴 수 있을 것 같았어. 하지만 아니야. 내가 속았어. 행복하지 않아. 행복하지 않단 말이야, 밀아......
숨죽여 흐느끼는 소리.
-내가 또 속았다는 걸 알았을 땐 이미 늦어있었어. 하지만 정말 늦었던 건지, 모르겠어. 속지도 속이지도 않는다는 게 어떤 건지,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던 때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게 어떤 건지도 모르겠어. 그래도 괜찮다고 말해줄 사람은 너뿐인데...... 내가 이미 알잖아. 괜찮지 않은 것을. 더 이상 속고 싶지 않아. 너를 속이고 싶지도 않아. 하지만 네가 나에게 속지 않으면 나는 네 눈에 비치는 나를 또 봐야 하는데. 그걸 생각하면 네가 눈 뜨는 게 무서워. 하지만 네가 눈을 못 뜰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나는 어떻게 해야 해? 몰라. 알고 싶지 않아...... 보내주고 싶지 않아. 네가 마지막이야. 너 말곤 정말 더 이상 없단 말이야. 차라리 이대로 잠들어 있어. 이대로 내 옆에서 떠나지 마, 밀아.
괴롭게 토해내는 기침 소리.
-아니야. 그것도 내가 원하는 건 아니야. 내가 원하는 건......
아주 한참 동안 이어진 침묵을 깰 수 없어서, 나는 그의 뒷말을 들을 수 없었다. 그는 아주 한참 뒤에야 속삭였다.
-우린 정말 닮았어. 그렇지 않니? 아무것도 몰랐고, 알아도 하지 못했지. 이제 어떡하지? 더 이상 어리석을 수 없는 걸까? 그래도 좋아. 네가 나를 더 닮아간대도, 속까지 다 까매진대도 나는 좋아. 사실 아주 조금은, 네가 나를 버려주길 바랐어. 그러니, 밀아......
처음으로 나는 듣지 않고, 느꼈다. 그의 숨결이 내 입술 위에 분명한 무게로 닿았다.
-살아만 주면 안 되겠니?
나는 눈을 깜박였다.
눈을 떴을 때, 부정세의 흑단목 지붕이 선명하게 눈 앞에 보였다. 멍하니 두 눈을 깜박이다 보면 다른 감각들이 하나씩 돌아왔다. 주변은 고요했고, 뭔지 모를 향 냄새가 났으며, 내 몸 안의 기운은...... 엉망이었다. 단장이라고 하던가. 비슷하게 내장이 뭉개졌다고 해도 되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것만으로도 거의 헛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온몸이 아팠다.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는 것을 느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텅 빈 방...... 내 기억도 그렇게 텅 비어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몰라도, 쓰러진 동안 어떻게 단 한 번도 꿈을 꾸지 않을 수 있었는지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섭회상 앞에서 그대로 죽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이제 와서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 끝났으니까. 침대 옆에 놓여있는 오사모를 나는 천천히 주워들었다. 여전히 흙투성이에 핏자국이 드문드문 남아있는 그것을 쓰다듬으며, 나는 섭회상이 그것을 남겨두었다는 사실을 곱씹었다. 그것과 함께 그 옆에 놓인 봇짐을, 그리고 침대 옆에 세워진 내 검을 집어들면 충분했다. 여전히 머리가 둔탁하게 아프고 숨을 쉴 때마다 누군가 배를 찌르는 것 같았지만, 그런 고통 따위 내 알 바가 아니었다. 주어진 고통을 나는 늘 그랬듯 그저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나에게 주어진 유언을, 그리고 당부를 생각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결론을 내렸다.
방을 나왔을 때, 복도는 방 안과 마찬가지로 조용했다. 순간 나는 생각했다. 혹시 내가 죽었는데 몰랐던 건가? 여기가 내 사후세계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복도를 돌아오는 시비와 눈이 마주쳤다. 몇 번 얼굴 본 적 있는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서로 반가운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대야가 떨어졌다. 어쩔 줄 모르고 입술만 달싹이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나는 다가가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대야를 집어들었다. 젖은 바닥을 내가 지금 어쩔 수는 없었다. 그녀에게 대야를 돌려주며 나는 몇 가지를 물었다.
-오늘이 며칠이죠?
-정월 이틀 전이요......
두 순 정도 누워 있었던 거면 내가 지은 죄 치고 양호했다. 솔직히 일 년이 지났대도 믿을 뻔 했다. 아니라니 다행이지 뭔가. 나는 겁먹은 듯한 눈 앞의 얼굴을 보며 힘없이 웃어보였다.
-오늘은 왜 이렇게 한산해요?
-다들 선산에 가셨습니다. 그, 적봉존......
-아.
나는 짧게 답했다. 이제 더 들을 말이 없었다.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도 조용했다.
나는 조용히 부정세의 뒷문으로 향했다. 간간히 마주치는 비복들과 하인들이 나를 힐끔거렸지만 막지는 않았다. 문을 나서자 내리쬐는 햇살이 눈부셨다.
길거리의 분위기는 뒤숭숭하기도 했고, 평소와 다를 게 없기도 했다. 그러나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었다. 나는 뒤를 돌아서, 마지막으로 부정세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이제야 그곳이 내게 민낯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험악하고 살벌한 수두문도, 높이 솟은 성벽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사람들이 하루 하루 살아나가는 공간 하나가 거기 있을 뿐이었다. 그 안에서 살아간 사람도, 그리고 살아갈 사람도 무수히 많았다.
이름 그대로 그곳은 하나의 세계였다. 그 세계에 남을 한 사람. 그 사람을 생각하며 나는 다시 뒤를 돌아 걸어나갔다.
———
이건 내 생각이지만 금광요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섭회상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음.
근데 둘 다 보통 인간이 아니라서 결국 둘이랑 엮이게 되면 아래 선택지 중에 하나 골라야 함.
천하의 나쁜 놈이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원수지만 내 아픈 손가락인 이십 년 지기 친구
vs 내 친구 손에 유일한 가족 잃고 복수하려고 나 이용했지만 그래도 좋을 만큼 내가 사랑하는 사람
한 명 선택하면 다른 한 명은 내가 고른 그 한 명 손에 죽고, 선택 안 해도 일단 둘 중 한 명은 무조건 죽음.
사실 이 상황 자체가 보고 싶었음.
아무튼 결과적으로 금광요 대신 선택받아서 더 잔인한 복수를 할 수 있게 됐지만 오히려 더 외롭고 불행해진 섭회상이 보고싶으면 이 편까지만 보면 되고 해피엔딩이 좋으면 이어서 보면 될 듯......
일단 나는 통수 거하게 맞고 인생 망했어도 결국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 필요하다면 그냥 그것 때문에 사는 미련한 사람을 섭회상에게 붙여주고 싶었기 때문에 여기서 안 끊고 쓰기는 계속 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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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광요가 나에게 모현우 이야기를 꺼낸 적은 거의 없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난 금광선이 그를 데려왔다는 이야기와 금광요가 그를 쫓아냈다는 이야기를 금린대 밖에서 항담으로 전해들었을 뿐이다. 그 이야기를 내가 금광요에게 꺼낼 이유가 없었다. 지금도, 내가 굳이 금광요에게 모현우 이야기를 하려고 급하게 편지를 쓸 필요는 없었다. 나는 꾸역꾸역 걸어나갔다. 그러고보니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를 잠시 생각하다가, 돈을 찾으러 가는 중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멈춰서서 잠시 웃었다. 사람들이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상관 없었다. 나도 내가 징그러웠으니까.
찾아가서 맡겨둔 돈을 다 찾아가겠다니 나라 잃은 얼굴을 하는 점원들 때문에 조금 미안하기는 했다. 하기야 그동안 그거 굴려먹는 재미가 쏠쏠했겠지. 하지만 점원들은 감히 나한테 항의하거나 나를 설득하려고 시도하지는 못 했다. 그들의 얼굴에 서린 건 명백한 두려움이었다. 피가 묻은 것도 아닐 테고 인상을 쓰고 있는 것도 아닌데 저런 눈으로 나를 보는 이유가 뭘까. 거울이라도 봐야하나.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그동안 내가 벌어둔 모든 돈이 내 눈 앞에 놓였다.
나는 금자로 가득 찬 상자 하나를 질린 눈으로 보다가, 내가 순서를 잘못 잡았다는 걸 깨닫고 마른 세수를 했다. 일단 그 중 조금만 찾아가겠다니까 대놓고 안도하는 점원들의 얼굴이 희극적이었다.
목적지가 정해져 있으니 나는 가기만 하면 되었다. 객잔을 잡자마자 낮술을 시키는 나를 점원은 찌푸린 얼굴로 바라보았지만, 내가 꺼낸 은자 크기를 보더니 곧 싱글벙글했다. 나는 왜 저러질 못 했지. 금광요가 돈 많이 줬으면 그냥 아이고 감사합니다 인사하고 내 볼일 보면서 잘 살았으면 됐잖아. 하지만 이십 년 전의 나는 그러지 못 했고,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다. 큼직한 술단지를 바라보다가, 나는 점원에게 물었다.
-어젯밤에 혹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 모가장에서 일어난 일 말씀이시군요. 벌써 소문이 쫙 퍼졌죠, 퍼졌어.
점원의 말을 듣자하니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모씨 집안은 적당히 부유한 세속의 가문들 중 하나이고 그 저택은 모가장이라 불리는데, 하필 그 둘째딸이 금광선 눈에 들어 사생아를 뱄댄다. 그게 모현우다.
모현우는 어머니와 함께 눈칫밥을 먹으며 모가장에서 자랐다. 그러다가 금광선이 자기 사생아라고 데려가서 좀 신세 펴는 듯 했으나, 얼마 안 가 금광선이 죽고 쫓겨난 뒤론 아예 가문의 수치가 되어 이모와 다른 친척들에게 본격적으로 학대를 당했다. 그래서 미친 건지 미쳐서 더 구박을 먹은 건지는 알 수 없으나, 단수라는 소문도 공공연히 퍼져 있었고 아무튼 처치 곤란이었다.
그러던 며칠 전, 모가장 근처에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는 핑계로 이모인 모 부인이 고소 남씨 수사들을 불렀다. 그 앞에서 모현우가 사촌 형인 모자연이 자기를 때렸다며 또 한바탕 소란을 피운 모양이었다. 그런데 하필 그 날 저녁 모가장에 괴뢰들이 나타나 모현우를 제외한 모씨 일가가 몰살 당하고 모현우는 행방이 묘연하다...... 그러니 참 이상한 일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
-이상한 일이긴 하군.
그렇게 혼잣말을 하자 점원은 붙임성 있게 맞장구를 쳤다.
-그럼요, 그럼요. 듣기로 고소 남씨 함광군이 직접 사태를 진압했다고 하더라고요.
그 정도의 거물이 나섰다고? 게다가 괴뢰? 아무리 생각해도 상황이 좋지는 않았다. 나는 대충 점원을 물린 뒤 술병을 땄다. 금광요는 이미 알고 있겠지? 그래도 전해주기는 해야 했다. 무슨 일인진 몰라도 혹시 음호부가 엮인 거라면 금광요가 평소처럼 쉽게 처리하긴 어려울 거다.
그러나 사실 내 머릿속에 어른거리는 건 금광요와 모현우보다도, 섭회상이었다. 길거리 사람들이 흘러가듯 말하던 이야기가 귀에 박혀 떠나질 않았다. 섭회상이 피를 본 게 벌써 소문이 다 났단 말이지. 나와 시시덕거리는 것까지 청하 밖에 소문이 나 있을 줄은 몰랐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 아닌데. 금광요도 알고 있었고, 섭씨 수사들도 다 알았고, 청하 길거리에서도 담주에서도 그러고 다녔으니 소문이야 진작에 났을 것이다. 참 좋다고 부정세에서 그러고 있었다. 미래를 다 생각해놨다고 했지만, 사실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뭐 하나 제대로 한 게 없는 거다. 이런 한심한 인생이라니.
자기연민에 취해 술독에라도 빠져버리고 싶었는데, 술 두 동이를 비우고도 정신이 끔찍할 정도로 또렷했다. 담배를 태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는데 담배도 없고, 그냥...... 나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렇게 생각하자.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섭회상은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우스갯거리로 삼는 일문삼부지인 것이고, 나는 살던 대로 사는 거고, 금광요도 마찬가지인 거지. 정말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그렇게 각자 살면 된다. 하지만 손바닥에 앉아있는 딱지가 소름끼치게 선명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겨우 해낸 거란 게 이거라면. 섭회상이 계속 가면을 쓴 채 외롭게 미쳐가는 게 내 최고의 성과라면. 술잔에 떨어지는 물방울을 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뭔가를 해야 해. 하지만 뭘 해야 할까.
대충 침대 밑에 쓰러졌다가 눈을 떴을 땐 밤이었다. 취하고 숙취가 오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취한 적도 없는데 머리가 깨질 것 같으니 이건 좀 우스웠다. 나는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속이 좀 진정된 뒤에는 금광요에게 금빛 나비를 날렸다. 모가장에서의 일, 그리고 동영으로 가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전하자 이틀 뒤에 답장이 왔다. 모가장의 일은 내가 신경 쓸 것 없고, 동영행에 필요한 물자와 인력은 포구로 보내주겠다는 말에 나는 그렇게 또 객잔을 떠났다.
객잔을 떠날 때 새로이 들은 소식은 모가장 사건에 대한 것만큼이나 이상하기 그지없었다. 몇 달 전부터 대범산에서 계속 괴이한 일이 일어난지라 이번에 각 가문 자제들이 참여하는 야렵대회가 열렸는데, 오래 전 봉인되었던 천녀상이 깨어나 사람이 죽고 다쳤다고 한다. 그래. 거기까지는 그렇다 치자. 그런데 그 자리에 16년 전 소멸되었어야 할 귀장군이 돌연 나타났다. 그리고 모현우도 거기 있었다. 남망기와 강만음이 모현우를 두고 서로 데려가겠다고 싸웠고, 결국 남망기가 모현우를 데리고 운심부지처로 갔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항상 현실이 상상을 이긴다는 생각을 했다. 별...... 진짜 별일이다. 차라리 남희신과 금광요가 자기들이 단수였다고 고백하는 게 더 현실성이 있었다.
아무튼 모현우야 그렇다 쳐도, 내가 걱정인 건 귀장군이었다. 귀장군은 분명 금린대에서 소멸한 걸로 되어있었다. 그런 그가 다시 나타났다는 게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금광선과 금광요가 귀장군을 죽였다고 해놓고선 죽이지 않았던 거지. 설양을 데리고 음호부로 이런 저런 실험 같은 걸 했던 걸까? 뭔진 몰라도, 금광요의 손은 이번에 한 번 미끄러졌고 이건 단순한 실수라고 하기엔 그 규모가 너무 컸다.
사건의 심각성은 금광요가 나보다 더 잘 알 거다. 그렇게 되뇌이며, 나는 남쪽으로 계속 갔다. 강을 두어 개 건너자 첫 눈이 내렸다. 강둑에 잠시 멈춰선 채로 흰 눈을 맞을 때, 나는 결코 잊고 싶지 않은 얼굴을 생각했다. 그는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나는 언제쯤 그의 얼굴을 잊을까? 나는 나를 잘 알았다. 나는 머리가 나쁘니, 시간이 흐르면 그의 얼굴을 지금처럼 세세히 기억하지는 못 할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죽어도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도착한 바닷가는 두꺼운 옷 입은 사람들과 비린내와 습한 공기로 북적였다. 물론 바닷바람이 습한 건 당연했다. 하지만 호수 같이 고인 물과는 달라서, 운몽의 끈적함을 못 견디겠는 것과 다르게 바다 근처는 오히려 좀 머무를 만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는 고소로부터 동쪽으로 얼마 떨어져있지 않은 곳이다. 그런데 고소와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사람들이 나긋한 말씨를 쓰지도 않았고, 나룻배를 타고 다니지도 않았다. 나는 금광요가 자주 그러듯 혹시 지금도 고소에 와 있을까 잠깐 생각했다.
그러나 금광요 대신, 포구에서 나는 그가 보낸 사람들과 만났다. 모인 인원이나 구하려는 배나 다 규모가 작지 않았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배를 구하고 항로를 정하고 하는 내내 나는 생각에 잠겨있었다.
쉬운 일이 하나 없었다. 제일 큰 문제는 날씨였다.
-다음달은 돼야 갈 수 있다니깐요, 동영. 이때쯤엔 바람이 너무 심해서 해동은 가도 동영은 못 가, 못 가.
말을 묻는 뱃사람들마다 그렇게 말하며 손사래를 치니,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하기야 내가 동영 갈 때는 초봄이었고 올 때는 초여름이었지. 한 달 늦어진다고 문제될 것은 없었다.
없어야 했다.
나는 금광요가 보내온 사람들과 거의 교류하지 않았다. 주로 내 방에 있다가 대화를 나눠야 할 때만 잠깐씩 만났고, 객잔을 나서는 일은 그보다 더욱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쯤 밖으로 나가 바다를 보는 게 다였다. 깊게 울렁거리는 물을 볼 때면 마음 속은 몰라도 머릿속은 좀 잠잠해졌다. 언젠간 건너편에서 이 파도를 보겠거니 생각하다 보면, 이른 아침에 나가 늦은 밤이 되어 돌아올 때까지 가만히 앉아만 있는 일이 전혀 어렵지 않았다.
그런 내가 불쌍했는지 몇몇이 자주 말을 걸어왔다. 미약한 동정과 동경 같은 것이 그들의 눈에 보여 당황스러웠다. 이야기를 듣다보니 대충 금광요가 그들에게 내 이야기를 한 모양이었다. 각자 자기가 금광요에게 어떤 은혜를 입었는지 이야기하는 것을 무감각하게 듣고 있으면, 그들은 어색하게 웃는 얼굴로 물러나곤 했다. 금광요가 보낸 사람들이라고 믿기 힘든 그들의 미소를 나는 아주 잠시동안만 곱씹었다. 그리곤 바다로 갔다.
포구는 배도 사람도 많아 북적북적했다. 그래서 나는 근처 절벽 위에 주로 앉아있곤 했다. 그 날도 그런 날이었다. 객잔을 나서 걸으려는데, 객잔 주인의 자식들로 보이는 애들이 속닥거리는 소리가 귀에 박혔다.
-누가 돌아와?
내가 우뚝 멈춰 선 채로 그렇게 물었을 때, 애들은 자기들끼리 시선을 주고받더니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겁에 질린 얼굴을 보며 내가 한 발짝 다가서자, 아이들은 아예 울음을 터뜨렸다. 객잔 주인이 나와 아이들을 달래는 동안 나는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주고받던 말을 곱씹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객잔 주인이 얼굴을 흐렸다. 나는 그녀에게 천천히 물었다.
-이릉노조가 돌아왔다는 게 무슨 소리입니까?
객잔 주인은 아이들을 방에 들여보내더니 침을 삼켰다.
나는 주인을 따라 다시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이른 아침이라 객잔에는 손님이라 할 만한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희미한 찻향을 맡으며 나는 주인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들었다.
-저희도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밖엔 모릅니다, 손님. 듣기로는 이 주 전쯤 수진계 사람들이 다 모인 곳에 이릉노조가 나타났고, 함광군을 납치했다고 해요.
수진계 사람들이 다 모인 곳이라면 하나였다. 금린대. 금린대에 나타났다는 거야? 위무선이? 그게 이 주 전인데 금광요한테서 아무 연락도 없었다고? 말이 안 됐다. 멍하니 서 있는데, 때마침 방에서 익숙한 얼굴이 나왔다. 금광요가 보낸 남자들 중 하나였다. 나는 그를 보면서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이릉노조가 돌아왔다는데, 무슨 일인지 설명해보지 그래요.
객잔 주인은 나와 남자의 눈치를 보더니 슬며시 사라졌고, 남자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방으로 데려가 방음 주술을 몇 겹이나 건 것치고 그가 하는 말은 간단했다.
-모현우가 헌사라는 주술을 통해 이릉노조를 되살렸습니다.
-헌사?
-자기 혼을 희생해 죽은 자를 되살리는 기술이라고만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중요한 건 아니니까요. 중요한 건 되살아난 이릉노조가 함광군과 함께 섭명결의 사인을 조사 중이라는 사실입니다. 종주님께 연락이 온 건 이 주 전입니다만, 당신에게 소식을 전하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하여……
남자가 말끝을 흐렸다. 나는 두 눈을 깜박였다. 머리를 세게 한 대 맞은 듯 어지러웠다. 눈 앞의 남자가 굳이 거짓말을 할 리는 없었다. 그러니 금광요가 나에게 소식을 전하지 말라고 한 게 사실이다. 대체 왜? 나를 믿을 수가 없어서? 내가 쓸모 없어서?
아니면, 알고 있어서?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주술을 나는 본 적이 있었다. 헌사. 섭명결. 위무선. 대범산. 그 단어들의 중심에 있을 법한 이름이 무엇인지도 나는 알았다. 넋이 나간 내 얼굴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남자가 아까보다 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준비가 되는 대로 저희끼리 떠나는 것이 계획이었잖습니까? 그런데 이젠 그래선 안 될 것 같습니다. 언제든 배가 뜰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 놓으라고 하셨거든요. 이 주 뒤면 항해가 가능하니, 그 때부터는 즉시 출발할 수 있을 정도로 모든 것이 갖춰져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중얼거렸다.
-그래서 나는 뭘 해야 하는데요.
남자는 잠시 동안 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지금처럼 계시면 됩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종주님의 연락을 기다리는 것뿐이니까요. 어쩌면 영영 배가 뜨지 않을 수도, 아니면 그 분 없이 뜨게 될 수도 있지요. 그 편을 더 바라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내가 바란 대답은 아니었다. 멍하니 눈만 깜박이는 나에게, 남자가 위로하듯 말했다.
-괜찮을 겁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남자가 다시 말을 붙여왔다.
-최근에 힘든 일을 겪으셨으니 최대한 배려해드리라는 말씀 염방존께 들었습니다. 염방존께서 항상 의지하시는 분이시라고요. 그 분께 그런 분이라면...... 제게도 은인입니다.
동경과 동정이 반씩 섞인 그 얼굴을 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날 나는 절벽 위에 앉아 검푸른 수평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파도가 칠 때마다 머릿속에선 기억의 편린들이 더 잘게 부서졌다. 언제 눈을 뜰 거냐고 묻던 섭회상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그러게. 마지막까지도 나는 섭회상을 바로 보고 싶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그가 정말 가련하고 힘없는 존재라고 굳게 믿었던 걸까. 그가 그런 존재여야 했나, 내가 그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는 몇 번이고 나에게 자기를 알아달라고 부탁했는데, 나는 끝까지 몰랐다.
마지막 순간 그의 미소를 떠올리는데, 문득 입 안에 미약하게 피맛이 돌았다. 속에서 새어나온 피였다. 나는 단전에 손을 짚었다가 금방 다시 뗐다. 모르겠다. 섭회상이 나를 포기했든, 용서했든, 어떻게 하든 다 좋았다. 문제는 하나였다. 섭회상을 해치지 말아달라고 금광요에게 애원한 내가 섭회상에게는 같은 부탁을 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만약 금광요가 진실을 알고 있다면, 나와의 약속을 지킬 리가 없다는 것. 결국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할 수가 없다는 것 말이다.
스무 해 전의 어린 나와 지금의 내가 무엇이 다를까. 내가 또 아무것도 몰라서 누군가를 죽이고 있었다.
멀리 오가는 배들이 보였다. 돛대는 아무 무늬 없이 다들 말끔했고, 그걸 보다 보면 나는 섭회상의 부채부터 생각이 났다. 또는 얼굴 없는 그의 그림. 그 속으로 숨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럴 수 없다. 그렇다고 내가 달리 할 수 있는 게 있나?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금광요에게 진실을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섭회상을 막을 자격이 내게 있는 것도 아니다. 사실 막을 수 있을 리도 없다. 이 정도로 거대하게 짜인 판에서 내가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섭회상은 그의 모든 걸 이 판에 걸었다. 그렇잖은가, 그는 금광요를 속이기 위해 섭명결마저 이용했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제일 혐오했다던 자기 형을. 입 안에 새롭게 피맛이 번졌다.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떻게 한 걸까. 직접 모현우를 헌사시킨 걸까? 뭐라고 어떻게 설득했기에 모현우가 자기 혼을 다 찢고 자살한 걸까. 모현우 외에 또 누가 죽었을까. 행로령에 있던 그 시체들도 섭회상이 유도한 것이었고...... 주화입마로 죽은 그 수사도 그렇다. 섭회상은 그를 진작에 죽이고 싶었던 걸까?
그것까지는 모른다. 섭회상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모든 계획을 나에게 내보인 건지도. 조금만 삐끗했어도 그는 곧장 죽은 목숨이었을 테고, 십 년을 공들인 복수도 다 날아갔을 것이다. 그가 나를 그 정도로 믿은 것일지, 아니면 그것도 다 계산한 것일지 내가 알 길은 없었다.
모른대도, 선택을 해야 했다. 할머니가 나와 남동생 중에서 하나를 고른 것처럼, 똑같이 나도 금광요인지 섭회상인지 하나를 골라야 했다. 결국 문제의 본질은 그거 아닌가.
하지만 답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섭회상의 방에서 보았던 헌사 주술에 대해, 음호부에 대해 금광요에게 말하지 않았다. 이게 그 결과다. 그리고 나는 몇 번을 되돌아가도 특별히 다른 선택을 할 수가 없다.
만약 금광요가 모든 것을 이미 다 알고 있다면...... 그러면 내가 또 어떻게 해야 할까. 어느새 하늘에는 노을이 지고 있었다. 나는 해가 바다에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천천히 걸어나가 절벽 끝에 서자, 바람이 사납게 나를 끌어당겼다. 그러나 이상하게, 정말 이상하게도. 나는 마지막 한 걸음을 뗄 수 없었다. 이번에는.
그래서 나는 뒤돌아 떠났다. 객잔에서 챙긴 짐이라곤 내가 난릉을 떠날 때 쌌던 봇짐 하나 뿐이었다. 왔던 길을 되짚어 북으로 향하며, 나는 사실 특별한 목적지도 없이 그저 계속 이동했다. 고소를 지나쳐 강 하나를 건넜을 때에야 비로소 실패로 돌아간 이릉노조 토벌에 대해 전해들었다. 사실 실패라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릉노조 위무선은 과연 대단한 인물이었다. 자기를 죽이려 몰려든 사람들을 몸소 구했다. 그의 행동은 당연히 존경받을 만하지만, 그건 금광요가 원한 결과는 아니었을 것이다. 선문의 쟁쟁한 명사들이 모두 모인 난장강에 눈에 띄는 빈 자리가 두 개 있었으니, 택무군과 염방존이라는 말을 듣고 나는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더 생각할 게 없었다. 나는 방향을 서쪽으로 틀었다. 난릉도, 청하도 아니다. 운몽으로 가야 했다.
모든 것엔 정말 끝이 있구나. 부귀영화 따위 다 헛되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개소리라고 생각하고 넘겼었는데, 이제 비로소 그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익숙한 길거리를 정처없이 걸었다. 오래 전 내가 나를 하동 부씨 대문 안으로 밀어넣던 할머니를 뿌리쳤다면, 지금보다 더 평화롭게 살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내 인생을 틀어쥔 두 사람을 만날 일은 없었을 테다.
어쩌면 금광요도 금광선의 아들이 되겠다는 다짐 같은 건 버리고, 어머니의 유지도 버리고 그냥 평범하게 살았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그간 그는 항상 지금 같은 결말을 염두에 둔 채 살아왔을 것이다. 그러니 동영행도 계속 준비해두었던 것 아닌가.
하지만 만약 지금 같은 날이 올 줄 알았다면, 대체 왜 그렇게 살아야 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크고 둥그런 관음묘의 정문 앞에 멈춰섰다. 문을 두드리지도 않았다. 그저 그 앞에 서 있다 보면, 문이 나를 밀어내듯 천천히 열렸다.
-왜 왔어.
그새 수척해진 금광요가 나를 보며 비틀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울긴 왜 우니. 이래서 너한테는 끝까지 소식 전하기 싫었는데. 게다가 몰골이 이게 뭐야? 죽은 사람인 줄 알았잖아.
나는 달리듯이 절 안으로 들어섰다. 금광요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고, 거의 그럴 뻔 했다. 코 앞에 놓인 흰 얼굴을 보며 나는 손뼈가 으스러져라 두 주먹을 말아쥐어야 했다. 어언 이 주 만에 처음으로 낸 목소리는 내가 듣기에도 끔찍했다.
-금광요 이 미친 놈아! 네가 정말 여기 있으면 어떡해!
-그럼 누가 여기 있어야 해.
-누구든! 나든, 아니면 네 사람 중 그 누구든 시켜서 가져오게 하면 되잖아!
관음묘가 관음묘라는 이름이 붙은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여기 어딘가 금광요의 어머니가 누워있으리라는 것을 나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금광요도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니 나를 시켰으면 되지 않냐고, 왜 도망칠 시간도 모자란 이 시점에 여기 와 있냐고. 그렇게 묻기에는 내 심장 한 구석이 다른 이름으로 묵직했다. 아. 정말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
-너를 믿지 못한 건 아니야. 헌아. 내가 너를 못 믿으면 누굴 믿겠니.
아니야.
-너도 알잖아, 내 성격. 그 누구에게도 맡길 수 없는 일이었어. 그뿐이야. 시간도 충분하니, 괜찮아.
금광요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심장을 찌르는 것만 같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진저리를 쳤다.
-제발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 그 누구에게도 못 맡긴다고? 그럼 네 목숨은 다른 사람한테 맡길 수 있어? 네가 이미 바다를 건넜어도 걱정해야 하는 게 네 목숨이야. 여기서 이렇게 시간을 지체하는 게 대체 누굴 위해선데?
-헌.
-한 번 생각해 봐! 너라면 네 자식이 이런 상황에 여기 있기를 바라겠어?
-그만.
금광요의 목소리는 날카로웠지만, 끝이 떨리고 있었다.
-이건 이미 결정된 일이니, 네가 더 토달 건 없어.
그러더니 그의 시선이 내 옆으로 옮겨갔다. 그의 시선을 따라간 나는 머리 끝까지 뜨겁게 솟아올랐던 피가 한 순간에 얼어붙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현기증이 나서 비틀거리는 사이, 금광요가 웃는 얼굴로 내 시선 끝에 있는 남자에게 말했다.
-둘째 형님을 이리 가까이서 뵙는 건 처음이지? 형님도 헌은 초면이실 겁니다. 이 자가, 한참 온씨네 개들이 형님을 쫓을 때 운심부지처의 고서를 모두 맡아 숨겨주었습니다.
권운 장식 말액을 맨 남색 옷의 남자가 누구인지는 하늘이 하늘인 것만큼 분명한 일이었다. 남희신의 갈색 눈동자가 떨리는 것을 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 목소리가 마치 멀리서 들리듯 아득했다.
-택무군이 왜 여기 있어?
금광요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침묵하는 그 몇 초 사이, 마치 혈관에 잔뜩 성에가 끼는 것만 같았다.
-너 정말 미쳤어?
나는 시선을 남희신에게 고정한 채로, 거의 속삭이듯이 물었다.
금광요에게 있어 남희신이 어떤 인물인지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 순간 다 나와 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금광요가, 남희신이라면 자기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듯 지극정성이던 그가 남희신을 납치했다. 남희신이 자의로 여기 와 있을 리는 없었다. 그럴 사람이 아니기도 하거니와, 금광요가 혼신의 힘을 다해 그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대도 저건 거기 동의한 사람이 지을 법한 얼굴 표정이 아니었다. 나는 내 시선을 피하는 남희신에게서 거의 동시에 고개를 돌려 금광요를 보았다. 그러나 눈물 고인 채 웃고 있는 저 얼굴 앞에선, 대체 왜 이러고 있느냐는 질문이 무용해졌다. 스무 해라는 긴 시간이 헛되지 않았는지, 그의 눈빛만 봐도 나는 그가 지금 어떤 심정인지를 알 수 있었다.
-그런 얼굴 하지 마.
-그런 얼굴이라니?
-차라리 저 사람 풀어주고, 빌어. 도망치게 해 달라고 빌기라도 하란 말이야.
분명 금광요는 남희신을 납치하는 극단적인 방법은 생각 하면서도 그의 자비심에 기댈 생각은 못 해봤을 것이다. 그러고선 그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자학하지.
애초에 이럴 필요가 없었다. 남희신에게 빌 필요도, 그를 납치할 필요도 없었다고. 끝까지 남희신에게 웃는 얼굴과 상냥한 목소리로 남고 싶었다면, 그랬으면 되잖은가. 남희신을 납치할 시간에 동남쪽으로 더 가기만 하면 되었다. 지금이라도 그렇게 하면 된다. 금광요를 막고 있는 건 다른 누가 아니라 그 자신이다.
그런 내 생각을 읽은 게 분명했다. 금광요는 잠시 동안 빤히 나를 보다가, 허하게 웃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둘째 형님? 정말 아직 늦지 않았나요?
남희신은 고개를 숙인 채로 고집스럽게 침묵을 지켰다. 금광요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노을빛이 붉게 물든 그의 얼굴은, 감정이 갈무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고 있자면 눈물이 날 정도로 처절했다.
-너는 세상 사람들이 다 너같을 거라고 생각하는 나쁜 버릇이 있어, 헌아. 묻지 않니? 내가 또 어떤 죄를 지었냐고.
-그게 뭐가 중요한데.
이제 와서. 그 순간만큼은, 나는 그가 내 부모를 죽였대도 변함없이 여기 서 있을 수 있었다. 나를 잠시 바라보던 금광요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이것 봐. 사람들은 대개 너처럼 어리석지 않다고. 네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진 모르겠지만, 걱정할 필요 없어. 나는 둘째 형님을 해칠 생각은 조금도 없거든. 지금도 영력만 봉인해뒀을 뿐이야. 그러니......
-아니야.
나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금광요의 옷소매를 겨우 붙들었다.
-제발...... 그게 아닌 거 너도 알잖아.
남희신을 걱정하는 건 아니었다. 내가 걱정하는 건 적어도 그 순간 그 장소에선 금광요뿐이었다.
금광요가 뭘 하든 이미 남희신과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다. 금광요가 남희신에게 아예 나쁜 놈이 될 수는 없다는 건 나도 잘 안다. 하지만 이제 와 어떻게든 덜 나쁜 놈이 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가 그 사실을 모른 척 할수록 그에게는 독이었다.
의미가 없다. 정말 동영으로 떠날 거라면 더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일 아닌가. 정말 동영으로 갈 거라면, 그래서 다시 얼굴 보지 않을 거라면. 그러면 그 얼굴의 주인공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섭회상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아요.
그렇게 금광요를 부를 때 나는 점점 더 차오르는 울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가자. 그냥 얼른 가자, 제발......
그게 내가 그 순간 그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부탁이었다. 눈물로 자꾸 눈 앞이 흐려지는 바람에 금광요의 얼굴도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눈을 깜박일 수조차 없었다. 금광요의 새하얀 얼굴을 보기가 너무 무서웠다. 무서워서 숨을 죽였다. 섭회상이 계획한 금광요의 마지막은 어떨까? 적어도 섭명결의 것보다 몇 배는 더 잔인하겠지. 금광요의 한숨소리를 들으며 나는 몸을 떨었다.
-민선. 잠시 감독을 부탁하오.
그러더니 금광요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나를 어디론가 이끌었다. 나는 그를 따라 힘없이 걸었다. 울음이 그치지는 않았으나, 눈을 깜박이자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또렷해진 시야에 보인 건 다른 게 아니라 금광요가 잡고 있는 내 손이었다. 이전까지 단 한 번도 나는 그의 손을 잡아본 적이 없었다. 그를 업거나, 부축하거나, 가끔 어깨를 두드리거나. 그게 다였다. 지금 내 손을 붙잡은 금광요의 손은 서늘했고 단단했으며 또 부드러웠다.
-그만 울어.
금광요가 나지막히 말하며 내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쥐었다. 그의 명령대로 울음소리야 어떻게 막을 수 있었지만 눈물이 흐르겠다는 걸 멈출 수는 없었다. 여러 번 깜박이며 고개를 들자 보이는 건 관음묘의 뒷마당이었다. 잎 없이 앙상한 나무들이 줄지어 있었고, 담장 너머로 웅성거리며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멈춰 선 금광요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저 작은 문.
-꼭 우리 첫만남 생각난다. 그렇지 않니?
그렇게 묻는 금광요를 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기묘한 평온이 일렁거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손에 매달렸다.
-그럼 그때처럼 나랑 가자. 제발......
-누가 안 간댔어? 갈 거야. 하지만 네가 먼저 가야 해, 헌아.
-왜......
말을 거의 잇지 못하는 나와 다르게 금광요는 침착했다.
-여기를 떠날 수는 있지만, 문제는 여길 나가서부터야. 퇴로를 지켜야 하지 않겠니.
그의 시선이 순간 먼 곳을 스쳤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산길이 하나 있어. 여길 벗어나면 거기서 정비를 마치고 다시 떠날 거야. 위치를 설명해줄 테니, 거기 가서 나를 기다려줘.
-싫어!
나는 곧장 대답했다. 나에게 으스러져라 쥐인 손이 아플 만 한대도, 금광요는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웃었다. 그가 아마 엉망인 내 얼굴을 옷소매로 닦아주는 동안 나는 속에서 다시 또 치미는 피를 삼켜냈다.
-왜 항상 기다리라고만 하는데?
-그야 네가 항상 가려고 하니까.
-난......
-널 원망하려는 게 아니야. 네가 다른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다는 게 나에게는 몇 안 되는 위안이었어. 물론 앞으로는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약속해 줘. 기다리고 있겠다고.
-아요.
-네가 그렇게 부르는 것도 참 오랜만이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인 것처럼, 다시는 못 볼 것처럼 금광요가 저런 얼굴을 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저런 얼굴을 봐야 한다면.
-그러면 나도 여기 있을래.
-내 말을 뭘로 들은 거야?
금광요가 부드럽게 나를 타박했다.
-너에게 맡겨야 내 마음이 편하다니까.
-너......
아무것도 모르면서. 다시 또 눈물을 흘리는 나를 보며 금광요는 작게 혀를 찼다. 그가 말했다.
-너는 여기서 달리 할 일이 없어. 네가 삽 하나 든다고 작업 속도가 빨라지겠니, 아니면 네가 여기서 감시를 서겠니? 만약을 대비해 민선을 곁에 뒀으니, 너는 내 뒤를 맡아주면 돼. 사람도 몇 붙여줄게.
-민선인지 뭔지를 보내. 내가 여기 있을래.
-내가 싫다니까 자꾸 그러네.
-싫......
-제발.
금광요가 내 말을 끊었다. 그리고 그때껏 내게 붙잡혀있던 자기 손을 빼냈다. 그 손이 내 어깨를 짚은 뒤에도 내 두 손은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마지막 부탁이라곤 하지 않을게. 앞으로도 나는 너에게 사사건건 부탁을 하겠지. 하지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부디 내가 하라는 대로 해줬으면 좋겠어.
그 말을 듣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뿐이었다.
-왜?
왜 나를 여기서 보내려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 명이라도 여기 더 있어야 금광요에게 도망갈 시간을 벌어줄 수 있을 것 아닌가. 내 생각을 읽은 듯 금광요가 턱을 굳혔다. 그러나 그의 웃음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내가 이 지경까지 왔다고는 하지만, 너를 밟고 올라서야 살 수 있을 정도로 모자란 놈은 아니야.
나는 왜 아니냐고 물을 수 없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나에게 금광요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내가 가 있어야 하는 산길을 말해주었다. 그러면서 스쳐지나가듯 말했다.
-어릴 적 자주 가던 곳이라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 거기 아주 큰 괴목이...... 있거든.
그건 전혀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이고, 그런 이야기들이 무수히 많이 있을 텐데. 마찬가지 내가 지금 그에게 하지 못 하는 이야기들이 무수히 많았다. 나는 떠밀리듯 입을 뗐다.
-동영으로 안 가면 안 돼?
-뭐?
-위무선을 헌사시킨 사람은 네 행적을 다 꿰고 있잖아. 네가 동영으로 간다는 것도 알지 않겠어?
모를 리가 없다. 그러나 금광요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와서 내가 달리 어디를 가겠니?
-차라리 북으로 가자. 아니면 아예 남쪽이든, 어디든. 나랑 지금 가자.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회의했다. 섭회상이 그 정도 변수도 생각을 안 해놓았을까? 내가 뭘 하든 그의 손바닥 안인 게 아닐까? 내가 그의 손바닥 안인 건 상관 없지만, 금광요는......
-자꾸 왜 이러니, 헌아.
-무서우니까!
내 대답에, 금광요가 웃었다.
-꼭 나를 이미 죽은 사람 취급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는 않다. 걱정 마, 무슨 수를 써서든 네가 기다리는 곳으로 갈게.
이럴 거면 그냥 나에게 오지 않는 게 좋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나도 모르게 생각했다. 그도 그럴게, 그와 나의 만남은 대체로 그의 내리막길에서 이루어졌다. 정말 그는 나를 만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꺼낼 힘이 없었다. 금광요가 사람을 부르는 동안 나는 비틀거리며 겨우 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탈진할 것만 같은데 정신만 또렷했다.
-그러게 그냥 거기 있지, 왜 여기까지 와서 이 고생이니.
명을 받고 달려오는 사람들을 보며 금광요가 속삭였다. 그의 눈에는 자기가 살 거라는 분명한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믿을 수는 없었다. 그가 자기 자신에게 속은 것은 아닌지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그가 내게서 천천히 멀어지는 것을 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붉은 빛을 받아 반짝이는 금성설랑포와, 적갈색 머리카락과, 그럼에도 홀로 새까만 오사모. 그가 그것을 고쳐썼다. 그리곤 웃었다. 그 웃음을 눈에 새기는 동안 그가 말했다.
-그래도, 헌아. 와줘서 고마워. 네가 여기 와줄 거라고 기대했었어.
말을 마친 그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곧 그가 부른 사람들이 그를 지나쳐 나에게로 다가왔다.
-아요!
나는 그를 불렀지만,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의 뒷모습을 끝까지 바라보았다.
*
그가 정말 올까. 나는 내가 먼저 발을 떼기만을 기다리는 여러 쌍의 시선을 느끼며 아주 느리게 움직였다. 길거리를 제각기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마치 나와는 다른 차원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계속 걸었다. 금광요가 말한 대로, 산에 접어들자 나온 샛길은 길이라고 하기 애매할 정도였지만 길이 아니지도 않았다. 어두운 숲을 헤치며 걷는 동안 다들 아무 말도 없었다. 비장함과 비참함이 묘하게 섞인 그 분위기 때문에 내내 속이 울렁거렸다. 그러나 나는 먼저 입을 열지는 않았다. 뒤따라오는 사람들의 말소리를 멍하니 들었을 뿐이다. 사실 들었다고 할 수도 없다. 목소리들은 바람소리만큼 아무 힘 들이지 않고 내 귓가를 스쳐지나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길이 살짝 넓어지면서 금광요가 말한 게 분명한 괴목이 보였다. 거대한 아름드리 나무였다. 앙상한 가지는 누군가 목 한 번 매달았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굵고 끝이 뾰족했다. 달빛 아래 새까만 나무 아래로 다가가, 나는 그 등걸에 기대어 천천히 주저앉았다. 나를 따라온 이들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나를 힐끗거리더니, 곧 나를 아예 배제한 채 자기들끼리 계속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그저 거기 앉은 채로 계속 기다렸다. 때때로 나뭇가지 사이 조각난 달을 올려다보았고, 때때로 두 눈을 감은 채 흙바닥으로부터 올라오는 냉기를 느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머리 위에서 울음소리처럼 나뭇가지 스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밤이 깊어가는 동안 숲과 함께 사람들도 술렁거렸다. 동이 터 올 때까지 아무도 오지 않자, 금세 나무 앞으로 모인 그들은 서로 언성을 높여가며 뭐라뭐라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상하지, 그들의 말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내 어깨를 짚은 채 일그러진 얼굴로 뭔가 말할 때도, 떠나면서 나를 돌아보고 또 뭐라고 말할 때도 나는 그냥 거기 계속 그렇게 앉아있었다. 그게 내가 제일 잘하는 것 아닌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잠이 들었던가, 아닌가 알 수가 없었다. 문득 눈을 뜨자 다시 밤이었다. 아직 죽지 않은 게 신기했다. 아니면 이미 죽은 걸까? 숨을 쉬고 있는 걸까?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었다. 하지만 어딘가 아프지도, 고통스럽지도 않았다. 그 때와 똑같았다. 그 때가 몇 달 전이었더라. 다른 게 있다면 여기는 동굴이 아니라 그새 또 해가 떠오르는 게 내 눈에 보인다는 것. 밤과 낮의 숲은 또 달라서, 이제는 사방이 조용했고 바람도 거의 불지 않았다. 마치 모든 게 환하게 얼어버린 것만 같았다. 이대로 며칠 더 있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까 내가 막연히 궁금해할 때였다.
-밀아.
그 이름.
눈꺼풀이 깜박였다. 두 눈에 초점이 잡힘과 동시에 온몸이 저릿하게 아파왔다. 마치 누군가 힘을 주어 내 겉과 속을 뒤집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고 몸에 힘을 주었다. 그래야 했다. 그래야 하는데...... 마치 물 밖에 나온 물고기처럼 심장이 퍼덕거렸다. 겨우 무릎을 반쯤 일으켜 섰을 때,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밀아......
나는 고개를 들었다. 해를 등진 흰 얼굴은 어두웠고, 동시에 너무 밝아서 금방이라도 두 눈이 멀 것만 같았다. 상관 없었다. 겁 먹은 섭회상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나는 흘러내리는 눈물 방울을 따라 시선을 내렸다. 눈물 방울은 내게 내밀어진 검은 것 위로 굴러떨어졌다.
나는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끝이 우그러지고 피와 흙이 묻은, 금광요의 오사모를.
-아밀......
금광요가 나에게 오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그게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깨달았다. 섭회상이 왜 우는지, 왜 나를 저런 목소리로 부르는지.
내가 섭회상의 복수를 완성한 것이다. 금광요가 알았다. 그가 다 알고 죽었다.
그 순간 속에서 무언가 부러졌다. 울컥거리며 단전에서부터 솟구쳐 오르는 기운을 나는 억누르지 않았다. 참지 않았다. 입 안에서 터져나오는 피도, 신음도, 눈물도, 그 무엇도. 가슴이, 목이, 입이, 코가, 두 눈이, 온몸의 혈관이 뜨겁다 못해 아팠다. 눈 앞이 붉었다.
섭회상이 나를 붙드는 게 느껴졌다. 그가 울면서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대신 몸을 숙였다. 그의 손에서 내팽개쳐진 오사모를 주워들었다. 그러자 그 위로 빠르게 새로운 핏자국이 새겨졌다. 그리고는 눈 앞이 완전히 붉어졌다.
마지막으로 들은 건 울음소리였다. 그러나 그게 누구의 울음인지까지는 알 길이 없었다.
*
왜? 간간이 의식의 끈이 잡힐 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왜 나는 아직까지 왜, 라는 질문을 하고 있을까. 그런 질문을 내 여러 이름을 부르는 울음 섞인 목소리를 들었다. 그럴 때면 나는 어떻게든 버티다가, 다시 눈 앞이 까매졌다. 온몸이 덜컹거리는 것을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와 있는 양 무감각하게 인식하기도 했고, 입 안에 고이는 피를 다시 삼키거나 뱉기도 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저항하지 않았다. 의미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차피 시간은 알아서 모든 일에 답을 내기 마련이다.
그러나 서서히, 이 지루한 시간의 끝이 어떻게 될지 판가름날 모양이었다. 정신이 또렷해지는 주기가 빨라졌다.
많은 이야기가 들렸다. 주로는 의원으로 추정되는 늙은 남자의 웅얼거림과 섭회상의 속삭임이었고, 때때로 다른 익숙한 목소리도 끼어들었다. 그러나 굳은 고막을 뚫고 머릿속까지 파고드는 목소리는 단 하나뿐이었다.
-차라리 나를 베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밀이도 형님도, 다 정말 미련해. 나를 지키겠다는 약속 따위 무시해도 될 걸, 그걸 지키겠다고, 이렇게......
공허한 웃음소리.
-닮았잖으냐? 이 애는 형님을 닮았고, 나는 이 애를 닮았지. 한 번도 내가 형님을 닮았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는데, 이 애 때문에...... 감히, 그런 생각도 해보았다. 그래서, 형님이 그 사람의 손을 빌어 나에게 밀을 보낸 거라고 처음에는 생각했어. 하지만 아니야.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나에게 이 애를 보낸 게 분명하다.
짧은 침묵.
-지난 십 년 간 부정세가 어땠는지 누군가 묻는다면, 백이면 백 내가 여기 있었다고 답하는 게 아니라 형님이 여기 계시지 않았다고 답하겠지. 나도 지난 십 년 간, 내가 형님의 빈 자리 그 이상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는걸. 사실 알려고 하지 않았다. 복수하려는 자의 마음가짐이 어때야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사람이 하필 밀을 나에게 보냈어. 그리고 이 애가 나를 볼 때면...... 이 애의 눈에 비치는 그 얼굴이 바로 나라는 생각이 들 때면...... 놓칠 수가 없었다.
내 몸을 감싸듯 쓰러지는 몸의 무게를, 나는 가까워진 그의 숨소리로 알았다.
숨을 쉬고 있었다. 일단은 살아있었으니까. 그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듣는 것뿐이었다. 한참 동안 주위가 조용해서 드디어 죽었나 싶을 때, 문득 나에게 말 거는 목소리를 듣곤 그가 계속 거기 있으며 나도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를 속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니?
가느다란 목소리.
-내가 먼저 속아야 해. 너는 내가 부른 거야, 밀아. 그 사람의 눈과 귀를 하나쯤은 내 옆에 묶어두고 싶었거든. 그런데 많고 많은 사람 중에 하필이면 네가 왔지. 정말 바보같은 네가 말이야. 간자가 되어서 자기 주인의 물건을 떡하니 손에 들고 오는 사람이 너 말고 누가 있겠니. 네 그 담뱃대...... 그 사람도 그것과 똑같이 생긴 담뱃대 가지고 있는 것 아니? 아마 몰랐겠지. 몰랐는데도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어떻게 그런 사람에게, 그렇게도 기쁘게 속을 수가 있니.
한참 뒤 다시 들려온 목소리는 웃는 듯 우는 듯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너무 쉬웠어. 너만 속이면 되는 거였으니까. 네가 이미 속아있었으니까. 재미있었어. 내가 뭘 했다고 네가 나를 그런 눈으로 보는지, 참 재미있으면서도...... 탐났어, 네가. 그 사람을 그렇게 애틋해할 사람이면 나도 이해해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어. 너만은 내 마음대로 속여도 될 것 같았어. 너와 있으면 무슨 일을 저질러도, 무슨 일이 있어도...... 다 괜찮을 것만 같았어. 그래서 과욕을 부렸어. 너를 그 사람에게서 뺏고 싶었어. 그래야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어. 그럴 수 있을 것 같았어. 하지만 아니야. 내가 속았어. 행복하지 않아. 행복하지 않단 말이야, 밀아......
숨죽여 흐느끼는 소리.
-내가 또 속았다는 걸 알았을 땐 이미 늦어있었어. 하지만 정말 늦었던 건지, 모르겠어. 속지도 속이지도 않는다는 게 어떤 건지,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던 때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게 어떤 건지도 모르겠어. 그래도 괜찮다고 말해줄 사람은 너뿐인데...... 내가 이미 알잖아. 괜찮지 않은 것을. 더 이상 속고 싶지 않아. 너를 속이고 싶지도 않아. 하지만 네가 나에게 속지 않으면 나는 네 눈에 비치는 나를 또 봐야 하는데. 그걸 생각하면 네가 눈 뜨는 게 무서워. 하지만 네가 눈을 못 뜰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나는 어떻게 해야 해? 몰라. 알고 싶지 않아...... 보내주고 싶지 않아. 네가 마지막이야. 너 말곤 정말 더 이상 없단 말이야. 차라리 이대로 잠들어 있어. 이대로 내 옆에서 떠나지 마, 밀아.
괴롭게 토해내는 기침 소리.
-아니야. 그것도 내가 원하는 건 아니야. 내가 원하는 건......
아주 한참 동안 이어진 침묵을 깰 수 없어서, 나는 그의 뒷말을 들을 수 없었다. 그는 아주 한참 뒤에야 속삭였다.
-우린 정말 닮았어. 그렇지 않니? 아무것도 몰랐고, 알아도 하지 못했지. 이제 어떡하지? 더 이상 어리석을 수 없는 걸까? 그래도 좋아. 네가 나를 더 닮아간대도, 속까지 다 까매진대도 나는 좋아. 사실 아주 조금은, 네가 나를 버려주길 바랐어. 그러니, 밀아......
처음으로 나는 듣지 않고, 느꼈다. 그의 숨결이 내 입술 위에 분명한 무게로 닿았다.
-살아만 주면 안 되겠니?
나는 눈을 깜박였다.
눈을 떴을 때, 부정세의 흑단목 지붕이 선명하게 눈 앞에 보였다. 멍하니 두 눈을 깜박이다 보면 다른 감각들이 하나씩 돌아왔다. 주변은 고요했고, 뭔지 모를 향 냄새가 났으며, 내 몸 안의 기운은...... 엉망이었다. 단장이라고 하던가. 비슷하게 내장이 뭉개졌다고 해도 되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것만으로도 거의 헛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온몸이 아팠다.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는 것을 느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텅 빈 방...... 내 기억도 그렇게 텅 비어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몰라도, 쓰러진 동안 어떻게 단 한 번도 꿈을 꾸지 않을 수 있었는지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섭회상 앞에서 그대로 죽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이제 와서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 끝났으니까. 침대 옆에 놓여있는 오사모를 나는 천천히 주워들었다. 여전히 흙투성이에 핏자국이 드문드문 남아있는 그것을 쓰다듬으며, 나는 섭회상이 그것을 남겨두었다는 사실을 곱씹었다. 그것과 함께 그 옆에 놓인 봇짐을, 그리고 침대 옆에 세워진 내 검을 집어들면 충분했다. 여전히 머리가 둔탁하게 아프고 숨을 쉴 때마다 누군가 배를 찌르는 것 같았지만, 그런 고통 따위 내 알 바가 아니었다. 주어진 고통을 나는 늘 그랬듯 그저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나에게 주어진 유언을, 그리고 당부를 생각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결론을 내렸다.
방을 나왔을 때, 복도는 방 안과 마찬가지로 조용했다. 순간 나는 생각했다. 혹시 내가 죽었는데 몰랐던 건가? 여기가 내 사후세계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복도를 돌아오는 시비와 눈이 마주쳤다. 몇 번 얼굴 본 적 있는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서로 반가운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대야가 떨어졌다. 어쩔 줄 모르고 입술만 달싹이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나는 다가가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대야를 집어들었다. 젖은 바닥을 내가 지금 어쩔 수는 없었다. 그녀에게 대야를 돌려주며 나는 몇 가지를 물었다.
-오늘이 며칠이죠?
-정월 이틀 전이요......
두 순 정도 누워 있었던 거면 내가 지은 죄 치고 양호했다. 솔직히 일 년이 지났대도 믿을 뻔 했다. 아니라니 다행이지 뭔가. 나는 겁먹은 듯한 눈 앞의 얼굴을 보며 힘없이 웃어보였다.
-오늘은 왜 이렇게 한산해요?
-다들 선산에 가셨습니다. 그, 적봉존......
-아.
나는 짧게 답했다. 이제 더 들을 말이 없었다.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도 조용했다.
나는 조용히 부정세의 뒷문으로 향했다. 간간히 마주치는 비복들과 하인들이 나를 힐끔거렸지만 막지는 않았다. 문을 나서자 내리쬐는 햇살이 눈부셨다.
길거리의 분위기는 뒤숭숭하기도 했고, 평소와 다를 게 없기도 했다. 그러나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었다. 나는 뒤를 돌아서, 마지막으로 부정세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이제야 그곳이 내게 민낯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험악하고 살벌한 수두문도, 높이 솟은 성벽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사람들이 하루 하루 살아나가는 공간 하나가 거기 있을 뿐이었다. 그 안에서 살아간 사람도, 그리고 살아갈 사람도 무수히 많았다.
이름 그대로 그곳은 하나의 세계였다. 그 세계에 남을 한 사람. 그 사람을 생각하며 나는 다시 뒤를 돌아 걸어나갔다.
———
이건 내 생각이지만 금광요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섭회상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음.
근데 둘 다 보통 인간이 아니라서 결국 둘이랑 엮이게 되면 아래 선택지 중에 하나 골라야 함.
천하의 나쁜 놈이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원수지만 내 아픈 손가락인 이십 년 지기 친구
vs 내 친구 손에 유일한 가족 잃고 복수하려고 나 이용했지만 그래도 좋을 만큼 내가 사랑하는 사람
한 명 선택하면 다른 한 명은 내가 고른 그 한 명 손에 죽고, 선택 안 해도 일단 둘 중 한 명은 무조건 죽음.
사실 이 상황 자체가 보고 싶었음.
아무튼 결과적으로 금광요 대신 선택받아서 더 잔인한 복수를 할 수 있게 됐지만 오히려 더 외롭고 불행해진 섭회상이 보고싶으면 이 편까지만 보면 되고 해피엔딩이 좋으면 이어서 보면 될 듯......
일단 나는 통수 거하게 맞고 인생 망했어도 결국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 필요하다면 그냥 그것 때문에 사는 미련한 사람을 섭회상에게 붙여주고 싶었기 때문에 여기서 안 끊고 쓰기는 계속 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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