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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07 21:58
진정령 ㅅㅍ
회상이 이름에서 왜 상이 뽕나무 상일까 항상 궁금했는데
부상목 생각하면 사일지정 주역이었던 섭명결/해들이 매달렸던 나무가 이름에 있는 섭회상 둘 관계에 더 과몰입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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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정말 간간히 태동을 보내는 것 외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얌전했다. 그리고 아무리 회임이라는 것이 여인들마다 그 경험이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곤 하나, 여자는 신기할 정도로 거의 불편하지 않았다. 물론 뱃속에 아이가 없을 때보다야 번거로운 것들도 많았고 자잘한 고통들이 추가되었지만, 괜찮았다.
-우리 아이 이름의 마지막 글자는 부상목에서 따오는 것이 어떨까.
여자는 산달이 가까워져 당기는 배를 쓰다듬으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왜요?
-늦게지만 태몽을 꾸었소.
남자의 목소리는 마치 꿈 속에서 들리듯 몽롱하게 들렸다.
-동쪽의 바다에서, 아주 거대한 부상이 솟아올라 세상에 순식간에 그늘이 지더군. 가지에 해는 하나도 걸려있지 않았소. 하지만 빛이 없이도 그 모습은 아주 선명하게 보였어.
여자는 잠시 그 광경을 상상하다가 툭 내뱉었다.
-우리 아이는 당신처럼 안 거대하면 좋겠는데.
남자는 헛웃음을 지으며 여자를 뒤에서 감싸안았다. 그의 큰 손이 그녀의 배를 쓰다듬는 동안, 여자는 졸린 눈을 깜박였다.
그날 밤 그녀는 꿈을 꿨다. 작고 날렵한 까마귀가 하나의 달을 물고 동해 끝 부상의 나뭇가지로 돌아와 앉는 꿈이었다.
여자가 몸을 푼 건 봄이 한창이던 때의 일이었다.
산고를 수식하고 일컫는 말이야 많지만, 직접 그 고통을 느껴보기까지는 아무도 그에 대해 얼토당토 할 수 없다. 그렇게 해야 한다고 법에 적혀 있어야 했다. 여자는 평생 울었던 꼭 그 만큼을 하루만에 울었다. 아이는 열 달 동안 속 썩이지 않더니, 세상에 나올 때만큼은 어깃장을 놓듯 여자의 뱃속을 휘집어놓았다. 그러나 아직 피와 양수로 범벅이 된 아이가 자기 품에 안길 때, 여자는 그 고통을 자기가 선택했다는 데 후회하지 않았다. 그녀는 평생 아무런 조건도 대가도 없이 아파왔다. 이 고통이야말로, 그녀가 느낀 고통 중 유일하게 결실 있는 것이었다.
여자는 흐린 눈을 깜빡이며 자기 품에서 버둥거리는 핏정이를 바라보았다. 아들이었다. 아직 누구를 닮았는지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목 놓아 우는 모습으로 보아 건강해 보였다.
그 뒤로 거의 실신하다시피 잠에 빠져들었기 때문에 여자는 남자가 산방 밖에서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그가 태어난 아이를 처음 보고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보였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시비에게 전해듣기론 그녀가 깨어나기까지 남자가 내내 아이와 함께 그녀의 곁을 지켰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여자가 남자에게 가장 먼저 한 말은 이것이었다.
-명결은요? 명결이 보고싶어요.
잠시 뒤 방에 들어온 명결은 곧 죽을 듯 파리한 얼굴로 침상에 누운 여자를 보며 입술을 떨었다. 여자는 그런 명결에게 웃으며 손짓 했다.
-이리 와. 동생 얼굴을 한 번 보렴.
아이를 내려다본 명결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갓 태어난 아이에게 조심스레 손을 뻗는 명결을 여자도, 남자도 제지하지 않았다. 아이가 명결의 새끼손가락을 붙잡아 자기 입으로 가져갔다. 그대로 굳어버린 명결에게, 여자는 힘겹게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언니도 누나도 되어본 적 없었고, 가진 것도 오빠 뿐이라, 형이 된다는 게 어떤 것인진 영영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동생에게 희미하게 웃어보이는 명결을 볼 때, 그녀는 아무것도 걱정되지 않았다.
아이의 이름은 회상으로 지었다. 명과 자를 같게 쓰는 청하 섭씨 관습상 나중에 늙어서 호를 가지게 되는 것 외에 회상이 다른 이름을 가지게 될 일은 없을 것이었다. 여자는 아이를 품에 안은 채 몇 번이고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내 아가.
그렇게 덧붙여 중얼거릴 때면, 가슴 속에 차오르는 뿌듯함 때문에 심장이 시큰거렸다.
출산 때 그녀를 그렇게 힘들게 한 게 무색할 정도로 회상은 뱃속에 있을 때처럼 잠이 많고 순했다. 특별히 아픈 데는 없었지만 어째 조금 비실비실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 정도는 여자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행복했다. 유모를 물리치고 굳이 굳이 아이에게 젖을 먹일 때면 여자는 자기가 지금 행복하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어느새 머리카락이 제법 자란 아이가 옹알이를 시작하고, 여자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잠들 때. 명결이 아이를 안은 채 웃는 얼굴로 여자를 바라보고, 남자가 마찬가지 웃고 있는 여자의 어깨에 손을 올릴 때. 그럴 때면 여자는 시간이 그대로 멈춰주기를 바라고 싶었다.
그렇게 바랄 수는 없었다. 회상은 더 자라야 했고, 그게 비록 자기 죽음이 가까워진다는 이야기여도 여자는 자기 아이에게서 시간을 뺏고 싶지는 않았다.
뺏을 수도 없었다. 회상은 그녀가 늘 바라왔듯 평범한 아이로 자라났다. 공부를 싫어하고 투정부리기를 좋아하고, 노는 게 좋고 여자를 닮아 옛이야기와 시서화를 좋아하는 어린 아이. 태어날 때 그 고생을 시켜놓고, 밤만 되면 그녀 뱃속으로 다시 들어가고야 말겠다는 듯 품에 꼭 안겨 잠드는 정말 어린 아이였다.
회상이 네 살쯤 되었을 때, 여자는 명결에게 들려주었던 예와 상아의 이야기를 그대로 들려주었다. 사탕을 우물거리는 회상에게 이야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을 때, 회상은 조금 새는 발음으로 대답했다.
-재미있어요.
-그래? 어떤 점이?
-그건 모르겠는데......
-이야기를 들으면서 궁금한 건 없었고?
회상은 사탕을 이리저리 굴려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네. 없어요.
-그래? 상아가 왜 불사약을 홀로 두 개나 먹었을까 궁금하지 않았니? 난 궁금했는데.
회상은 얌전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상아님이 그런 이유는요...... 알고 싶었을 거예요.
-뭘?
-그렇게 해도 예님이 자기를 미워하지 않을지.
여자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회상의 통통한 뺨을 꼬집었다.
-넌 어쩜 이렇게 나를 닮았니.
회상은 우는 소리를 내며 여자의 품으로 더 답싹 안겨들었다. 그런 회상에게 여자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어쩌면 예가 상아에게 두 개 다 먹였는지도 모르지.
회상이 두 눈을 굴리다가 물었다.
-사랑하니까?
여자는 작게 웃었다.
-그래. 사랑하니까.
그렇게 대답하자, 회상은 풀린 얼굴로 여자에게 폭 안겨왔다.
회상은 누구에게나 응석을 부리는 게 일상이었고, 이공자인 회상에게 별달리 큰 것을 기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여자는 회상의 응석을 허허 웃는 얼굴로 받아주기만 하는 명결이 마음에 걸렸다.
-회상이 저 녀석이 자꾸 널 귀찮게 하면 머리 한 대라도 쥐어박으렴.
-예?
열 살밖에 되지 않은 주제에 벌써 여자의 어깨를 훌쩍 넘는 명결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자는 우는 소리를 내고 있는 회상을 밉지 않게 흘겨보았다. 회상이 어머니가 너무하시다며 옷자락에 달라붙어오자, 명결은 그런 회상을 다독이며 웃었다.
-귀찮게 하다니요. 한 번도 그런 적 없습니다. 회상이 얼마나 귀여운데요.
여자는 회상을 다정히도 바라보는 명결의 모습에 그저 헛웃음을 지었다. 어쩜 저렇게들...... 닮았을까. 흥을 깬다고 해도 할 말은 해야 해서, 여자는 명결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진심이야. 샤오결.
명결은 멈칫하더니 미소를 지었고, 회상은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머니 미워요.
그날 밤 여자의 품에 안긴 주제에 그렇게 종알거리는 회상이 너무도 여자 자신을 닮아있어, 여자는 새하얀 이마에 말없이 입을 맞췄다.
회상은 그녀가 낳은 아이였다. 그러나 배 아파 낳은 자식이 먼저일 수밖에 없다는 사람들의 말을 여자는 이해해본 적 없었다. 회상이 이렇게 응석받이일 수 있는 이유는 명결 덕이었다. 그리고 명결에게 그 무거운 짐을 지우지 않을 방도를, 여자는 몰랐다. 그러니 그녀도 회상도 명결에게 언제까지나 책임이 있었다.
불현듯 여자는 남자를, 그리고 오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어머니가 나를 제일 좋아해주면 좋겠는데......
그러면서 훌쩍이는 회상의 등을 토닥일 때, 여자는 어린 회상이 알아듣든 알아듣지 못하든 속삭였다.
-그러면 너는 내 분의 사랑밖에 못 받지 않겠니. 나에게 조금, 네 형에게 조금, 네 아버지에게 조금...... 그렇게 가득 받는 게 더 행복하지 않겠어?
회상은 고집스럽게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회상을 품으로 더 당겨안으며 여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넌 나중에 꼭 너밖에 없다는 사람을 만나야겠구나.
얼마 뒤 회상과 여자의 침실이 분리되면서 회상은 또 한바탕 울었다. 맘 같아서 여자는 회상이 그리 울 필요 없게 평생 회상을 자기 품에 끌어안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거였다면 저 애를 낳은 의미가 없을 터였다.
-당신은 나쁜 부친이에요.
자기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남자에게 여자는 톡 쏘아붙였다.
-우리 아들은 어머니와 떨어져 자기 싫다고 부정세가 떠나가라 우는데, 당신은 이렇게 좋아하고 있으니까.
물론 오 년 간 회상을 품에 끼고 잔 여자나, 그 기간 동안 팔자에도 없는 독수공방을 한 남자나 다른 가문에서 찾기 힘든 경우이기는 했다. 여자는 꾸물거리며 돌아누웠다. 너른 가슴팍에서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자, 여전히 처음 만났을 때와 조금도 변함 없는 남자의 눈빛이 그녀를 비추고 있었다. 여자는 괜시리 입술을 삐죽거리며 그 시선을 피했다.
-내 어디가 그렇게 좋아요?
그렇게 묻는 목소리에 생각보다 힘이 실리지 않아 당황한 여자는, 남자의 대답에 그대로 굳었다.
-입 밖으로 내는 순간 틀린 답이 될 것 같아, 말할 수가 없소.
여자는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이 감상을 평생 내 안에 끌어안고 죽겠지.
잔뜩 당겨진 고무줄이 마침내 끊어지고 말듯, 여자의 건강은 그날부터 분명히 악화되었다. 그 즈음 그녀의 일상이란 마치 호수 위의 백조를 떠올리게 했다. 아이들은 잘 자랐고 여자는 그들 앞에서는 태연한 척 웃을 수 있었지만, 우아하고 아름다운 풍경 밑에는 끝없는 물갈퀴질이 있었다. 어느 순간 그녀의 몸 안 어딘가에 바늘 구멍이 하나 나 있었다. 그리로 자기 생명력이 아주 조금씩, 하지만 매 순간 새어나가는 것을 여자는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말씀드렸었잖습니까.
희미한 후회와 죄책감, 그리고 슬픔이 배어나는 목소리로 의원이 말했다.
-몸이 분명 약해지실 거라고요.
여자는 대답 대신 기침을 토해내야 했다.
적어도 아이들 앞에서만큼은 아픔과 피로를 참아내기 위해 뭐든 했지만, 인내에도 한계가 있었다. 아팠다. 정말 아파서, 아이들이 앞에 앉아 종알거리는 것을 보면서도 그 시간을 즐거워하는 대신 아이들이 언제 돌아갈까 시간을 세게 되었다. 아이들이 그런 그녀를 모를 리도 없었다.
-모친.
조심스레 자기를 부르는 목소리에, 여자는 두 눈을 깜박였다. 그제야 자기 눈에 한참 동안 초점이 없었다는 것을 알았다.
-괜찮으세요?
걱정스런 명결의 얼굴과 겁먹은 회상의 얼굴을 볼 때, 여자가 느낀 건 까마득한 비참함이었다. 그녀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여 그것을 받아들였다.
-미안하구나. 오늘은 영 몸이 좋지 않네. 이만 가서 일들 보렴.
-어머니......
-동생이 오늘치 글공부를 잘 했는지, 시간 나면 네가 검사해주거라. 샤오결.
명결이 비죽비죽 우는 회상을 데리고 방 밖을 나가자마자, 여자는 탁상 위에 엎어졌다.
눈을 떴을 땐 남자가 그녀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여자는 한참동안 밭은 기침만 흘리며 눈물을 흘렸다.
-힘들어요.
갈라진 목소리로 여자는 중얼거렸다.
-너무 아파요.
당신은 쓸데없이 번뇌할 시간에 인생을 살라고 말했죠. 하지만 인생이라는 걸 살고 싶어도 살 수 없는 나 같은 사람이 있는 거예요. 나 같은 사람은 계속 상상할 수밖에 없다구요. 내가 아프지 않았다면...... 조금이라도 덜 아팠다면. 그럼 정말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아이들을 더 많이 안아줄 수 있었을 거고 당신을 이렇게 귀찮게 할 일도 없었을 텐데. 하지만 그랬으면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았겠죠. 내가 아프지 않고, 당신이 죽어가지 않았다면.
그런 말을 여자는 입 밖에 내지 않고 삼켰다. 왜냐하면 그녀만큼이나, 남자도 아주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인식하지 못한 새 그늘이 지는 것과도 같았다. 남자의 부사에게 전해듣기로 섭씨 가문의 사람들이 걸린다는 주화입마는 단순한 병이 아니라, 한 사람의 성정을 완전히 바꿔버리는 저주에 가까웠다. 그는 최대한 고르고 고른 말을 외우고 또 외워 반복하듯 여자에게 부탁했다.
-훗날 그런 날이 온다고 하여도, 그건 종주의 본심이 아님을 부디 알아주십시오.
그게 혼인한 지 겨우 한 달쯤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그때 그에게 뭐라고 답했더라.
-당신이 말 안 해도 알아요.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남자가 여자의 고통을 알 수 없듯,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모두에게 추앙받던 남자의 성정에 서서히 금이 가는 것을 여자는 다른 사람들의 속닥거림을 통해 알았다.
얼마나 완벽한 사람이었으면, 다른 곳에선 충분히 호인 소리 들을 일을 해도 사람들이 다들 종주님도 이제 그 시기가 오시는 것 같다고 수군거릴까.
-전대 종주님은 불혹 조금 넘어 돌아가셨지.
-그럼 종주님은......
여자는 침상에 누워, 창 밖에서 속삭이는 그 목소리들을 들어야 했다.
모두가 그렇게 속삭이는데, 밤마다 자기에게만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눈으로 미소 짓는 남자가 여자는 정말 미웠다. 그가 계속 그래주기를 바라는 자기가 미웠다. 그가 자기를 조금이라도 귀찮다는 듯, 지겹다는 듯 바라보면 그대로 자기가 조각나 버릴 것 같은 게 억울해 견딜 수 없었다. 열이 올라서, 더 올라서 그냥 이대로 함께 활활 타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조여오는 가슴께를 거머쥐며 여자는 토해냈다.
-당신을 이해하고 싶지 않아요. 우리가 서로 끌릴 일 따위 없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적어도, 둘 중 하나라도 멀쩡했다면......
-부인.
-나보다 먼저 죽지 말아요. 절대 날 혼자 두지 말란 말이에요.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여자는 숨을 쉴 수 없었다.
-당신이 원하는대로 하겠소. 약속하오.
남자가 그렇게 약속한 뒤에야 여자는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전혀 홀가분하지도 기쁘지도 않았다. 그 뒤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단이 난 것은 그로부터 몇 개월 뒤의 일이었다. 여자의 몸상태가 급속도로 나빠진 뒤에도, 명결과 회상은 매일 적어도 반 시진 정도는 여자를 찾아와 안부를 묻곤 했다. 그러나 그날은 늘 오던 시간이 되어도 둘이 오지 않았고, 어쩐지 방 밖이 묘하게 소란했다. 여자는 시비를 시켜 아이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오게 했고, 얼마 뒤 돌아온 시비는 여자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여자는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아이들은?
그 시비가, 어리고 순진하지만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여자는 별일 아니라는 말을 들었을 것이고 어쩌면 그날을 무난히 보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을 수도 있다. 여자가 끝끝내 아이들을 내 앞에 데려오라고 뻗댔을지 어쨌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만약이라 가정하는 건 의미가 없었다. 그 순간의 여자는 눈 앞의 어린 시비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아이들은 어디 있느냐 물었다.
시비는 도련님들이 사라져 부정세의 모두가 백방으로 찾고 있다는 대답을 울먹거리며 내놓았다.
그날 여자가 혼절했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때, 하늘은 캄캄해져 있었고 보름달이 높아 솟아있었다. 그제껏 아이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여자는 남자의 옷소매를 붙잡은 채 몸을 떨었다.
-어디로...... 왜 갔을까? 무슨 일일까요?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올려다본 남자의 얼굴은 덤덤했으나, 그게 여자를 안심시키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그의 진심인지도 여자는 알 수 없었다.
-아이들은 괜찮을 거요. 놀러갔다가 길을 잃기라도 한 거겠지.
-하지만......
남자는 아주 느린 움직임으로 여자를 받치듯 끌어안았다. 그녀가 회상을 배에 품고 있을 적 그는 매일밤 그녀를 그렇게 안고 있곤 했다. 여자는 그에게 더 깊이 몸을 기댔다.
-당신은 걱정도 안 돼요? 아버지가 돼서......
-어찌 걱정이 되지 않겠소.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 끝이 갈라져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여자는 가슴이 지끈거리며 더 아파왔다. 남자의 입술이 귓가를 스칠 때 여자는 못 참고 작게 훌쩍였다.
-하지만 당신이 더 걱정돼. 그러니 당신 곁에 있게 해주시오.
여자는 고개를 돌려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밤의 어둠과 달빛에 물들어 푸르스름했다. 여자는 그 얼굴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입술을 달싹였다.
-말해봐요.
손을 뻗어 쓰다듬은 남자의 얼굴은 바위처럼 매끄럽고 단단했다.
-당신은 항상 무슨 생각을 해요?
남자는 침묵하다가 말했다.
-당신을 처음 보았던 날을 항상 잊지 않고 떠올리지.
그의 목소리는 아주 느렸다.
-십 년만에 당신을 다시 만났을 때, 당신이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기뻤소. 당신이 당신이라는 사실만으로 내게는 위안이 되오.
말을 마친 남자는 여자에게는 처음 보여주는, 겸연쩍은 얼굴을 했다. 마치 달의 뒷면을 보게 된 것만 같아 여자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마저도 남자가 점점 변해감을 의미하는 거라면. 여자는 충동적으로 말했다.
-사랑한다고 말해 봐요.
남자가 설핏 웃었다. 달빛이 배어난 듯한 미소였다. 그 미소가 숨기지 못 한 한 가닥 근심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자기가 조금만 더 어리석었다면 좋았으리라 여자는 생각했다.
-사랑하고 있소.
같은 말을 돌려주는 대신, 여자는 그렇게 속삭인 입술에 몇 번이고 입맞췄다.
다음날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눈을 뜬 여자는, 아이들이 산을 헤매다가 새벽이 다 되어서야 돌아왔으며 명결이 그 벌로 계편을 맞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때 그녀는 이미 남자에게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를 기력이 없었다. 멀리서 희미하게 들리는 울음소리로 미루어보아 회상이 울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무감각했다. 마치 차가운 진흙탕에 촛불을 비벼끄는 것만 같았다.
-분명히 회상이 꼬드겼을 텐데, 왜 죄도 없는 명결을 때려요? 그 애가 뭘 잘못했다고.
-소종주가 해선 안 될 행동이었소.
여자는 할 말을 잃었다. 마치 어젯밤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된 듯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어제와는 달리, 햇빛 아래 남자의 얼굴은 금 하나 가지 않은 듯 매끈했다.
-당신이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 하지만 나는 아버지일 뿐 아니라 종주이기도 하오. 그 애에게만은 엄할 수밖에 없어. 앞으로 더 그렇게 되겠지.
어쩔 수 없다는 그 말을 할 때, 남자도 자기가 하는 말이 얼마나 구차한지 느꼈을 것이다. 적어도 그럴 것이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한참 뒤에야 그녀는 입을 열 수 있었다.
-앞으로 더 그럴 거라고요? 왜요? 당신이 곧 죽을 거라서요? 당신이 죽는 거랑 명결이 억울하게 혼나는 게 무슨 상관인데요. 그 애한테 뭐 맡겨놨어요?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자는 계속해서 말했다.
-조상이 백정이라면서, 왜 당신은 도살장 끌려갈 거 다 아는 짐승마냥 그러고 살아요? 짐승도 자기 자식만큼은 우리에서 빼내려고 할 텐데 당신은...... 하기야, 당신만 그러겠나요. 내 오라버니도, 당신도...... 사내들이란 정말이지 지긋지긋하네요. 아들을 낳는 게 아니었어. 딸을 낳았어야 했는데...... 언젠가 우리 아이들도 당신처럼 될까요? 누굴 탓하겠어요. 우리가 이렇게 형편없는 부모인 걸.
겨우 그만큼 말했다고 숨 차는 자기가 여자는 싫었다. 그녀는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피곤해요. 혼자 있고 싶어요.
그러면서 시비들까지 다 물리기는 했으나,. 그날 저녁 여자는 직접 명결을 불러 등에 연고를 발라주었다.
-네 아버지가 잘못한 거야.
그녀는 꿋꿋이 말했다.
-너는 아직 어린 애고.
-모친.
변성기로 인해 거칠어진 명결의 목소리가 마치 여자의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았다. 다부지지만 순하고 고요한 얼굴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여자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깜박였다. 그러자 눈물이 툭 떨어졌다.
-미안해.
여자는 두서없이 말했다.
-너는...... 너는 아직 어린데.
그러니 아무리 자격없기로서니, 모친된 사람이 이 어린 애 앞에서 이렇게 눈물을 보이는 건 분명 정말 어리석은 일인데.
-아니에요. 부친의 말씀이 맞습니다. 회상은 제 동생이고, 제가 동생을 지키고 바른 길로 이끌 형이 되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인걸요.
-너......
-저는 모친이 제 모친이셔서, 회상이 제 동생이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자는 결국 이제 겨우 열네 살 된 아들 앞에서 울고 말았다.
-바보같은 녀석. 내가 모를 줄 아니? 회상이...... 회상이 너에게 놀자고 조르게 된 이유를? 네가 왜 단 한 번도 그런 적 없다가 회상을 데리고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했는지, 내가 모를 줄 아느냔 말이다.
여자가 아이들과 보내던 시간을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줄이지만 않았다면. 그랬다면 철없는 회상이 심심하니 형님이 좀 놀아달라며 명결을 잡아당겼을 리 없고, 명결이 여자를 생각해 회상이 떼쓰는 것을 들어주었을 리도 없었다.
-샤오결.
여자는 여전히 바른 자세로 앉아 자기를 마주보고 있는 아이를 불러보았다. 아이는 어색해하는 대신 미소지었다. 마치 처음 만났을 적의 남자 같았다.
명결이 돌아가고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여자는 방문 앞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다 보이니, 그만 이리 들어오렴.
회상이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훌쩍이면서.
침대까지 조심스레 걸어온 회상이 꼼지락거리며 자기 품에 안겨오는 것을, 여자는 말없이 끌어안고 그 조그만 머리에 입을 맞췄다. 그제야 안심이 된 듯 회상은 다시 또 소리내어 울었다. 여자는 중얼거렸다.
-이 울보 녀석. 넌 누굴 닮아 이렇게 울보니?
회상은 대답 대신 눈물 콧물을 짜내며 서럽게도 울었다.
-왜...... 왜......
-왜, 뭐. 말을 하렴.
-왜 어머니는 형님만 좋아하세요? 왜 저를 좋아해주지 않아요? 아버지도 무섭고, 스승님들도 형님만 좋아하고...... 나를 좋아해주는 건 형님 뿐이야. 형님만 나를 좋아해.
회상 앞에서만큼은, 일곱 살배기 자기 아들 앞에서만큼은 울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금방이라도 탈진할 것 같았지만 애써 웃었다.
-오늘 네 형님이 네 몫의 매까지 다 맞았는데, 뭐? 아버지가 무서워? 무서워해도 네 형이 무서워해야지 왜 네가 무서워하니.
-이잉......
회상은 비죽비죽 울기만 했다. 그동안 여자는 느리게 자기 품에 안긴 아이의 등을 토닥였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내 아가.
무슨 말을 해줘야 할까. 무슨 말을 해주든 늦은 게 아닐까. 여자가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저도 알아요. 모르는 거 아니에요.
-뭐?
-모친이 아픈 건 저 때문이잖아요. 사람들이 그랬어요. 그래서 절 안 좋아하시는 거죠?
그 순간 여자가 느낀 감정은 이 세상의 어떤 말로도 형언할 길이 없었다.
-섭회상.
여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아이의 뺨을 감쌌다. 눈물 젖은 갈색 눈이 어둠 속에서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겁먹은 그 눈을 보며 여자는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랬다.
-잘 들어. 이 어머니는 너 때문에 아픈 게 아니야. 그리고 너 때문에 아프다고 하더라도, 그건 내가 선택한 거야. 네 형이 오늘 너 대신 매를 맞은 것처럼, 내가 선택한 거란 말이다.
아이의 눈에 새로운 눈물이 고일 때, 여자의 눈에도 마찬가지 물기가 서린 건 불가항력이었다.
-넌 내가 낳은 내 아이야. 내가 너 말고 다른 누구를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겠니. 만약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면...... 그건 이 어머니가 줄 수 있는 사랑의 양 자체가 적어서 그런 거야. 그리고 그건 한낱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문제야.
섭회상은 대답 대신 서럽다는 듯이 울었고, 여자는 자기 아들을 품에 안은 채 침대맡에 일렁거리는 촛불을 바라보았다.
-사랑한단다. 정말로.
그 말을, 애초에 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날 밤 침실로 돌아온 남자는 눈가가 붉게 달아오른 채 여자 품에 안겨 잠든 회상을 보고 아주 잠시 동안 놀란 얼굴이 되었다가, 예의 그 다정한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이제는 그 얼굴에 어쩔 수 없는 서글픔이 서려있다는 점이 전과 달라진 점이었다. 아마 이전으로 돌아갈 방도는 없을 것이었다. 여자는 남자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이리 와요.
남자는 말없이 다가와 여자의 이마에 입맞췄다. 여자는 아이가 깨지 않도록 조용조용 말했다.
-당신과 혼인한 내가 바보죠. 얼마나 바보냐면, 아마 수백 년 뒤 당신과 내 유골을 본 후세 사람들도 다 알아볼 거예요. 바보들이라고.
여자는 잠시 멈췄다가 말했다.
-약속해요. 그럴 거라고.
-약속하리다.
남자가 속삭였다.
그 뒤로는 착실히 모든 것이 내리막길을 걸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것 같았지만, 여자는 회상의 열 살 생일이 얼마 지나지 않아 기어이 각혈을 시작했고 남자의 기혈도 흐트러지면 더 흐트러졌지 양순해지는 일은 없었다. 남자의 기가 망가지면 망가질수록 사람들은 그의 수련경지가 드높다며 그를 더 칭송했다. 그럴 때마다 여자는 세상에 불을 질러버리고 싶었다.
어느날, 정말 불이 붙기 전까지.
사람들은 왜 지키지 못할 약속들을 할까?
남자가 불야천에서 열린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수사들을 데리고 떠났을 때, 여자는 그것을 무수히 평범한 나날들 중 일부로 받아들였다. 명결은 늘 그렇듯 소종주 교육을 받느라 바빴으며, 회상은 얼마 전 생일 선물로 받은 붓으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그림을 그리겠다며 여념이 없었다. 여자는 따스한 봄 햇살을 받으며 창가에 기대어 앉아있었다.
보고싶다. 그런 생각을 하며 물 묻은 손끝으로 나무 창틀에 남자의 윤곽을 그리고 있을 때였다.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한참 그림을 그리던 회상이 붓을 내려놓더니, 무슨 일인지 보고 오겠다며 방을 나섰다.
그때 회상을 붙잡지 못한 것을 여자는 얼마 남지 않은 생 내내 후회했다. 방 밖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을 때는 방에 있던 시비가 여자를 붙잡았다.
그때 어떻게 그렇게 초인적인 힘이 난 걸까. 시비를 밀치고, 문을 열고 나간 여자는 소란스러운 복도를 빠르게 걸었다. 그리고 숨이 턱끝까지 치받혔을 때야 보았다.
수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남자는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를 부축한 수사들의 회색 옷에도, 그의 회색 옷에도 선명한 선혈이 묻어있었다. 여자는 그의 옆구리에서 허물어지듯 피가 점점 더 배어나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모친.
팔을 붙잡는 손길에 고개를 들자, 명결이 잔뜩 굳은 얼굴로 그녀를 붙잡고 있었다. 명결의 다른 팔에는 회상이 매달려 있었다. 늘 크게 소리내어 우는 아이가, 소리도 못 내고 헐떡이고 있었다. 여자는 다시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에게로 비틀비틀 다가갔다. 그러나 명결이 그녀를 붙잡았다. 왜? 왜 그런 얼굴을 하느냐고 물으려던 여자는, 명결의 두 눈에 서린 어쩔 수 없는 공포를 보고 깨달았다.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여자가 발견한 건 도를 쥔 채로 경련하는 남자의 팔이었다.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다시 발걸음을 떼었다. 명결이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모든 것이 다 아득했다. 눈 앞의 남자를 제외하면.
할 수 있는 것이 단 하나뿐이어서, 여자는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남자의 눈이 느리게 뜨였다. 초점 없는 그의 눈이 몇 번 깜박이다가 빛을 되찾았다. 동시에 그의 입에서 울컥 검은 피가 흘러나왔다. 여자는 핏발 선 그의 두 눈을 그저 바라보았다. 그가 피묻은 손을 뻗어 여자의 뺨을 스치듯 쓰다듬었다. 그의 눈에 서서히 핏물이 고였다.
-부군.
무력하게 중얼거릴 때 여자는 생각했다. 이건 악몽이었다. 이 꿈에서 깨면 남자가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남자가 자기를 부축하고 있던 부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상처입은 짐승처럼 그의 목소리는 그릉거렸다.
-나를 왜 이리로 데려왔지?
-종주......
-그곳으로, 가야 한다.
그러면서 남자는 고개를 돌려 다시 한 번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에서는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임을 여자는 알았다. 다시는 저 눈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남자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곤 입을 굳게 닫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여자는 남자의 의중을 알았다. 무슨 말을 해도 차라리 미련이 남으니, 아예 침묵하겠다는 것이다.
그를 알았다. 그래서, 이게 정말 마지막이라는 사실이 그녀를 덮치는 동안 여자는 속수무책이었다. 다시금 자기를 붙잡는 손길을 느끼며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남자와 명결의 목소리가 날아가듯 들려왔다.
-명결. 내가 말했던 것을 기억하느냐?
-부친.
-네 모친을, 그리고 회상을 부탁한다.
여자는 몇 번이나 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그러나 닿지 않았다. 검은 옷을 입은 수사들이 산처럼 남자를 에워쌌다. 그리곤 멀어졌다. 여자는 가슴께가 뻐근하게 막혀오는 것을 느끼며 외쳤다.
-데려가지 마. 데려가지 말란 말이야!
약속했잖아. 그 말을 하기 전에, 그녀는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떴을 때 여자가 본 것은 침상 맡에 개켜 있는 흰 옷이었다.
-모친.
시선을 돌리자, 흰 옷을 입은 명결이 그녀의 머리맡에 앉아있었다. 그 옆에는 울다가 잠들었는지 눈물이 말라붙은 얼굴로 명결에게 기대어있는 회상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흰 옷이었다.
기산 온씨 온약한. 명결의 입술 사이로 새어나오는 그 이름은 여자가 부정세에 오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그가 남자의 패도를 망가뜨린 채로 야렵대회에 내보냈다는 말을 여자는 무감각하게 들었다. 들었다기보다는, 기다렸다. 명결이 말을 마칠 때까지. 그리고 물었다.
-네 부친은 어디 있니?
명결의 입술이 떨렸다. 여자는 자기가 느끼기에도 기이할 정도로 덤덤하게 되물었다.
-이미 묻혔니?
명결의 눈에 눈물이 맺히는 것을 바라보며, 여자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 타버린 것 같았다.
자결 따위는 하지 않았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남자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가 죽었다. 더 이상 그를 볼 수도,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그의 온기를 느낄 수도 없었다.
죽어버리겠다고 난동을 부릴 이유도 없었다. 그녀의 그 협박이 통한 유일한 사람이 이 세상에 없었다.
여자는 자기 생의 마지막 불꽃이 사그라지는 것을 느끼며 침착하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한스럽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느닷없이 태어났고 느닷없이 만났으니, 헤어짐 또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터였다. 그녀는 더 이상 각혈과 기침을 이유로 아이들을 밀어내지 않았다. 남은 날이래봐야 한 해가 채 되지 않을 텐데, 숨겨서 무엇 하겠는가. 여자는 자기에게 내내 들러붙어있는 회상을 가만가만 끌어안았고, 이른 나이 급작스레 종주가 되어 처리할 일이 산더미일 텐데도 굳이 시간을 내어 자기를 찾는 명결에게도 말없이 웃어보였다. 죽음이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을 그녀는 새삼스레 깨달았다. 태어날 때부터 이미 여자는 죽어가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사랑한다고 더 많이 말했을 텐데. 그의 이름을 더 자주 불렀을 것이고, 그의 앞에서 울기보다는 더 웃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그의 말대로 정말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단순히 명을 부지하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
그러나 이미 모든 게 끝났다. 여자가 할 수 있는 건 그녀가 늘 그래왔듯 만약을 곱씹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그녀를 어디에도 못 가게 하겠다는 듯 꼭 붙잡고 있는 회상을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회상.
이름을 부른 것만으로 벌써 또 울먹거리는 아이에게 여자는 미소지어보였다.
-많이 사랑한다.
-아니야......
-이리 울릴 줄 알았다면 너를 낳지 않고 내 뱃속에 계속 품고 있을 걸 그랬다. 하지만 너를 낳은 게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하고 싶었던 일이고, 가장 잘한 일이야. 그래서 죽어도 후회는 없어.
회상은 여자의 가슴팍에 머리를 묻은 채 흐느꼈다. 여자는 그런 그를 다정히 끌어안았다.
-너는 나중에 커서 우리 같은 부모는 되지 말거라. 우리는 너를 너무 사랑했고 또 사랑하지만, 너에겐 부족했어. 그렇지?
-엄마.
그렇게 웅얼거리는 회상의 머리 위에 입술을 내리누르며, 여자는 속삭였다.
-그래. 말 나온 김에 이 어머니와 약속 하나만 하자.
-어떤......
-살아라. 무슨 수를 써서든. 세상이 뭐라고 하든, 네 조상님들이 뭐라든...... 그 누가 뭐라든. 살아만 주지 않겠니?
-싫어요.
회상이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약속하면...... 그러면 어머니는......
-엄마 부탁인데?
한참 말을 잇지 못하고 울던 회상이 마침내 약속한다고 고개를 끄덕였을 때, 여자는 살면서 느껴본 적 없는 평온을 얻었다. 그녀는 회상의 눈가를 닦아주며 미소지었다.
-이제 그만 자자, 아가.
-어디 안 가실 거죠?
-그럼.
불안하게 떨리는 몸이 서서히 늘어지다가 마침내 곤한 숨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여자는 아이의 따뜻한 몸을 안은 채 다독이고 있었다.
삼경이 지난 부정세는 칠흑처럼 컴컴했다. 여자는 느린 걸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너울거리는 흰 천들이 그녀의 손끝을 간간이 스쳤다.
다다른 정원에는 이미 그녀 외에 다른 한 사람이 더 있었다.
흰 옷을 입고 석탁 앞에 앉은 명결은 달빛 아래 그 어느 때보다도 거대해보였다. 그게 우스워 여자는 작게 웃었다. 겨우 열여덟 살의 소년이었다, 그녀의 아들은. 그러나 벌써 그의 어깨에는 청하 섭씨라는 거대한 이름이 매달려 있었다. 맘 같아선 다 되었으니 다 버리고 도망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자기 말을 들을 아이가 아님을 여자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다가가 명결의 맞은 편에 앉았다. 그리고 남자를 빼닮은 그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언제 이렇게 자랐니.
여자의 말에, 명결은 대답하는 대신 시선을 내리깔았다. 여자는 그런 그를 부드럽게 불렀다.
-샤오결.
시선을 들어 자기를 바라보는 명결에게, 여자는 미소지어보였다.
-넌 정말 신기한 아이였어. 겨우 네 살배기 주제에 의젓하긴 어쩜 그리 의젓한지, 놀리는 재미가 있었지.
명결은 여자를 따라 미소지었다가, 다시 얼굴을 굳혔다. 그런 그를 보며 여자는 깨달았다. 그가 이 대화의 의미를 알고 있음을.
서늘한 봄바람이 여자의 머리카락을 허공에 날렸다. 정말 내 생의 마지막에 와 있구나.
-네 아버지를 닮지 않으면 안 되겠니?
그녀는 말했다.
-너더러 다른 사람이 되라고 할 수는 없겠지. 그러고 싶지도 않아. 그저...... 조금 더 욕심을 내고, 조금 더 게을러지고, 건방져지렴. 그럴 수 있다면.
명결의 눈에 눈물이 맺히는 것을 여자는 잠시 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미안하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네.
그녀는 손을 뻗어 아이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더 이상 네 곁에 있어주지 못할 것 같아. 있어봐야 네게 도움이 되지도 못 하겠지, 늘 그랬듯.
명결이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모친.
-미안해. 아무래도 내 몸이 오늘 밤을 버티기 힘들 것 같다. 그런 느낌이 들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말뿐이구나.
말...... 어떤 말이 좋을까. 그런 상각을 하다가, 여자는 작게 웃었다. 남자가 한 마지막 말과 완전히 반대되는 말을 하기로 했다.
-회상은 약관이 될 때까지만 부디 보살펴 줄래? 그 뒤에는, 알아서 살게 내버려두렴. 네가 그 애 인생 책임질 필요 없다.
-아닙니다, 모친. 제가 원합니다.
여자는 입을 다물었다. 명결이 느리게 말했다.
-회상만큼은 제가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그러니......
이어질 말을 여자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느리게 자리에서 일어나 명결을 향해 다가갔다. 이제 와서 후회하는 것도 우습지만, 더 많이 쓰다듬어주고, 안아줄 것을 그랬노라고 생각했다. 이제 정말 영원히 자기에게 어릴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여자는 말했다.
-나중에 때가 오더라도 너무 무서워하진 마라. 네 아버지야 혼자 가버렸으니 지금쯤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알아서 하라지. 난 너를 계속 기다리고 있으마. 그렇다고 너무 일찍 오지는 말고.
말을 마치자 당연하게도 침묵이 찾아들었다. 마지막 미련으로, 여자는 속삭였다.
-많이 사랑한다.
그 말을 더 많이 해주었어야 한다는 후회를 여자는 붙잡는 대신 보내주었다. 끝까지 울음을 참는 아이를 바라보다가, 뒤를 돌았다.
-회상은 내 방에 있어. 나는 오늘 밤...... 네 아버지 방에서 자마.
걸어나갈 때, 등 뒤에서 참지 못하고 작게 샌 울음소리를 여자는 자기 고막에 새겼다.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그 대신, 고개를 들어 아마도 마지막으로 보게 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라지기 직전의 그믐달이 거기 떠 있다고 이제 와 서러워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지키지 못한 약속들에 대해서도 생각할 필요 없겠지. 여자는 자유로움을 느꼈다.
살라는 남자의 목소리가 항상 머릿속에 울려서, 죽음 뒤를 생각해본 적은 사실 거의 없었다. 정말 다시 남자를 만나지 못할 것인지, 자기가 저승의 길목에서 아이들을 기다릴 수 있을 것인지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를 다시 보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그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 가능성만으로도, 여자는 처음으로 죽음도 그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
명결은 동쪽 하늘이 밝아질 때까지 정원에 앉아있었다. 그는 말아쥔 자기 두 주먹을 내려다보며 눈을 깜박였다. 그치지 않은 눈물이 한 방울 떨어져 내렸다.
석탁에 진한 자국을 남기는 그 눈물방울을 보면서 명결은 생각했다. 그의 모친이 세상을 떠났다. 또 장례를 치러야 할 것이고, 제사를 올려야 할 것이고, 이번엔 외가에 알릴 행렬도 꾸려야 할 것이다. 소종주로 자라 종주가 된다는 것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이러한 생각들을 놓지 않아야 함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날만큼은, 명결은 그러한 것들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생각했다. 왜 그의 모친은, 부친과 함께 묻어달라는 부탁을 하지 않았을까.
알고 계신 걸까? 부친이 어디, 어떻게 묻혀 계신지. 명결은 행로령으로 향하는 스산한 길목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그곳에 모친을 모실 수는 없었다.
모실 수 없었다. 도무지, 아버지의 방에 들어갈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그 일은 그의 몫이었다. 그가 해야 했다.명결을 어린 아이라 부를 사람이 더 이상 이 세상엔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눈물을 그쳐야 했고, 자리에서 일어서야 했다. 아버지가 불리던 호칭으로 불려야 했고, 언젠가 아버지와 같은 방식으로 죽게 되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니 그는 절대 혼인은 하지 않을 것이다. 모친의 것과 같은 운명을 하나 더 자아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는 벌써 또렷이 그려지지 않는 모친의 얼굴을 어떻게든 자기 눈 앞에 되그려보기 위해 애썼다. 그러면서 또 결심했다. 언젠가, 온약한은 그의 손에서 그 명이 사그라져야 할 것이라고. 그의 손에 명결은 아버지를 잃었고, 어머니를 잃었다.
어머니. 한 번도 모친을 그리 불러본 적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명결은 그녀의 방 앞이었다. 느리게 방문을 열자, 곤히 잠든 어린 동생이 있었다. 명결은 자기도 모르게 속삭이듯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회상.
겨우 그 속삭임만으로 눈을 뜬 남동생이, 비어있는 침대를 둘러보다가 자기에게 시선을 고정했을 때 명결이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곤 다시 그 이름을 부르는 것뿐이었다.
-회상.
이미 부어있던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바라보며 명결은 턱을 굳혔다. 회상이 울먹였다.
-엄마...... 약속...... 약속했는데......
대답 대신 말없이 작은 몸을 품 안에 안자, 곧 서러운 울음소리가 방 안을 메웠다. 명결은 자기 몫까지 대신 토해내는 듯한 그 울음소리를 한동안 묵묵히 듣다가 입을 열었다.
-괜찮아, 회상. 형이 여기 있다.
이제 그들에게는 정말 그들뿐이었다. 그 자명한 현실이 척수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 명결은 동생의 몸을 더 단단히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이 형이 반드시 지켜주마.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다고 맹세했다.
회상이 이름에서 왜 상이 뽕나무 상일까 항상 궁금했는데
부상목 생각하면 사일지정 주역이었던 섭명결/해들이 매달렸던 나무가 이름에 있는 섭회상 둘 관계에 더 과몰입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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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정말 간간히 태동을 보내는 것 외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얌전했다. 그리고 아무리 회임이라는 것이 여인들마다 그 경험이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곤 하나, 여자는 신기할 정도로 거의 불편하지 않았다. 물론 뱃속에 아이가 없을 때보다야 번거로운 것들도 많았고 자잘한 고통들이 추가되었지만, 괜찮았다.
-우리 아이 이름의 마지막 글자는 부상목에서 따오는 것이 어떨까.
여자는 산달이 가까워져 당기는 배를 쓰다듬으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왜요?
-늦게지만 태몽을 꾸었소.
남자의 목소리는 마치 꿈 속에서 들리듯 몽롱하게 들렸다.
-동쪽의 바다에서, 아주 거대한 부상이 솟아올라 세상에 순식간에 그늘이 지더군. 가지에 해는 하나도 걸려있지 않았소. 하지만 빛이 없이도 그 모습은 아주 선명하게 보였어.
여자는 잠시 그 광경을 상상하다가 툭 내뱉었다.
-우리 아이는 당신처럼 안 거대하면 좋겠는데.
남자는 헛웃음을 지으며 여자를 뒤에서 감싸안았다. 그의 큰 손이 그녀의 배를 쓰다듬는 동안, 여자는 졸린 눈을 깜박였다.
그날 밤 그녀는 꿈을 꿨다. 작고 날렵한 까마귀가 하나의 달을 물고 동해 끝 부상의 나뭇가지로 돌아와 앉는 꿈이었다.
여자가 몸을 푼 건 봄이 한창이던 때의 일이었다.
산고를 수식하고 일컫는 말이야 많지만, 직접 그 고통을 느껴보기까지는 아무도 그에 대해 얼토당토 할 수 없다. 그렇게 해야 한다고 법에 적혀 있어야 했다. 여자는 평생 울었던 꼭 그 만큼을 하루만에 울었다. 아이는 열 달 동안 속 썩이지 않더니, 세상에 나올 때만큼은 어깃장을 놓듯 여자의 뱃속을 휘집어놓았다. 그러나 아직 피와 양수로 범벅이 된 아이가 자기 품에 안길 때, 여자는 그 고통을 자기가 선택했다는 데 후회하지 않았다. 그녀는 평생 아무런 조건도 대가도 없이 아파왔다. 이 고통이야말로, 그녀가 느낀 고통 중 유일하게 결실 있는 것이었다.
여자는 흐린 눈을 깜빡이며 자기 품에서 버둥거리는 핏정이를 바라보았다. 아들이었다. 아직 누구를 닮았는지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목 놓아 우는 모습으로 보아 건강해 보였다.
그 뒤로 거의 실신하다시피 잠에 빠져들었기 때문에 여자는 남자가 산방 밖에서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그가 태어난 아이를 처음 보고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보였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시비에게 전해듣기론 그녀가 깨어나기까지 남자가 내내 아이와 함께 그녀의 곁을 지켰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여자가 남자에게 가장 먼저 한 말은 이것이었다.
-명결은요? 명결이 보고싶어요.
잠시 뒤 방에 들어온 명결은 곧 죽을 듯 파리한 얼굴로 침상에 누운 여자를 보며 입술을 떨었다. 여자는 그런 명결에게 웃으며 손짓 했다.
-이리 와. 동생 얼굴을 한 번 보렴.
아이를 내려다본 명결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갓 태어난 아이에게 조심스레 손을 뻗는 명결을 여자도, 남자도 제지하지 않았다. 아이가 명결의 새끼손가락을 붙잡아 자기 입으로 가져갔다. 그대로 굳어버린 명결에게, 여자는 힘겹게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언니도 누나도 되어본 적 없었고, 가진 것도 오빠 뿐이라, 형이 된다는 게 어떤 것인진 영영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동생에게 희미하게 웃어보이는 명결을 볼 때, 그녀는 아무것도 걱정되지 않았다.
아이의 이름은 회상으로 지었다. 명과 자를 같게 쓰는 청하 섭씨 관습상 나중에 늙어서 호를 가지게 되는 것 외에 회상이 다른 이름을 가지게 될 일은 없을 것이었다. 여자는 아이를 품에 안은 채 몇 번이고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내 아가.
그렇게 덧붙여 중얼거릴 때면, 가슴 속에 차오르는 뿌듯함 때문에 심장이 시큰거렸다.
출산 때 그녀를 그렇게 힘들게 한 게 무색할 정도로 회상은 뱃속에 있을 때처럼 잠이 많고 순했다. 특별히 아픈 데는 없었지만 어째 조금 비실비실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 정도는 여자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행복했다. 유모를 물리치고 굳이 굳이 아이에게 젖을 먹일 때면 여자는 자기가 지금 행복하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어느새 머리카락이 제법 자란 아이가 옹알이를 시작하고, 여자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잠들 때. 명결이 아이를 안은 채 웃는 얼굴로 여자를 바라보고, 남자가 마찬가지 웃고 있는 여자의 어깨에 손을 올릴 때. 그럴 때면 여자는 시간이 그대로 멈춰주기를 바라고 싶었다.
그렇게 바랄 수는 없었다. 회상은 더 자라야 했고, 그게 비록 자기 죽음이 가까워진다는 이야기여도 여자는 자기 아이에게서 시간을 뺏고 싶지는 않았다.
뺏을 수도 없었다. 회상은 그녀가 늘 바라왔듯 평범한 아이로 자라났다. 공부를 싫어하고 투정부리기를 좋아하고, 노는 게 좋고 여자를 닮아 옛이야기와 시서화를 좋아하는 어린 아이. 태어날 때 그 고생을 시켜놓고, 밤만 되면 그녀 뱃속으로 다시 들어가고야 말겠다는 듯 품에 꼭 안겨 잠드는 정말 어린 아이였다.
회상이 네 살쯤 되었을 때, 여자는 명결에게 들려주었던 예와 상아의 이야기를 그대로 들려주었다. 사탕을 우물거리는 회상에게 이야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을 때, 회상은 조금 새는 발음으로 대답했다.
-재미있어요.
-그래? 어떤 점이?
-그건 모르겠는데......
-이야기를 들으면서 궁금한 건 없었고?
회상은 사탕을 이리저리 굴려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네. 없어요.
-그래? 상아가 왜 불사약을 홀로 두 개나 먹었을까 궁금하지 않았니? 난 궁금했는데.
회상은 얌전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상아님이 그런 이유는요...... 알고 싶었을 거예요.
-뭘?
-그렇게 해도 예님이 자기를 미워하지 않을지.
여자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회상의 통통한 뺨을 꼬집었다.
-넌 어쩜 이렇게 나를 닮았니.
회상은 우는 소리를 내며 여자의 품으로 더 답싹 안겨들었다. 그런 회상에게 여자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어쩌면 예가 상아에게 두 개 다 먹였는지도 모르지.
회상이 두 눈을 굴리다가 물었다.
-사랑하니까?
여자는 작게 웃었다.
-그래. 사랑하니까.
그렇게 대답하자, 회상은 풀린 얼굴로 여자에게 폭 안겨왔다.
회상은 누구에게나 응석을 부리는 게 일상이었고, 이공자인 회상에게 별달리 큰 것을 기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여자는 회상의 응석을 허허 웃는 얼굴로 받아주기만 하는 명결이 마음에 걸렸다.
-회상이 저 녀석이 자꾸 널 귀찮게 하면 머리 한 대라도 쥐어박으렴.
-예?
열 살밖에 되지 않은 주제에 벌써 여자의 어깨를 훌쩍 넘는 명결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자는 우는 소리를 내고 있는 회상을 밉지 않게 흘겨보았다. 회상이 어머니가 너무하시다며 옷자락에 달라붙어오자, 명결은 그런 회상을 다독이며 웃었다.
-귀찮게 하다니요. 한 번도 그런 적 없습니다. 회상이 얼마나 귀여운데요.
여자는 회상을 다정히도 바라보는 명결의 모습에 그저 헛웃음을 지었다. 어쩜 저렇게들...... 닮았을까. 흥을 깬다고 해도 할 말은 해야 해서, 여자는 명결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진심이야. 샤오결.
명결은 멈칫하더니 미소를 지었고, 회상은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머니 미워요.
그날 밤 여자의 품에 안긴 주제에 그렇게 종알거리는 회상이 너무도 여자 자신을 닮아있어, 여자는 새하얀 이마에 말없이 입을 맞췄다.
회상은 그녀가 낳은 아이였다. 그러나 배 아파 낳은 자식이 먼저일 수밖에 없다는 사람들의 말을 여자는 이해해본 적 없었다. 회상이 이렇게 응석받이일 수 있는 이유는 명결 덕이었다. 그리고 명결에게 그 무거운 짐을 지우지 않을 방도를, 여자는 몰랐다. 그러니 그녀도 회상도 명결에게 언제까지나 책임이 있었다.
불현듯 여자는 남자를, 그리고 오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어머니가 나를 제일 좋아해주면 좋겠는데......
그러면서 훌쩍이는 회상의 등을 토닥일 때, 여자는 어린 회상이 알아듣든 알아듣지 못하든 속삭였다.
-그러면 너는 내 분의 사랑밖에 못 받지 않겠니. 나에게 조금, 네 형에게 조금, 네 아버지에게 조금...... 그렇게 가득 받는 게 더 행복하지 않겠어?
회상은 고집스럽게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회상을 품으로 더 당겨안으며 여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넌 나중에 꼭 너밖에 없다는 사람을 만나야겠구나.
얼마 뒤 회상과 여자의 침실이 분리되면서 회상은 또 한바탕 울었다. 맘 같아서 여자는 회상이 그리 울 필요 없게 평생 회상을 자기 품에 끌어안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거였다면 저 애를 낳은 의미가 없을 터였다.
-당신은 나쁜 부친이에요.
자기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남자에게 여자는 톡 쏘아붙였다.
-우리 아들은 어머니와 떨어져 자기 싫다고 부정세가 떠나가라 우는데, 당신은 이렇게 좋아하고 있으니까.
물론 오 년 간 회상을 품에 끼고 잔 여자나, 그 기간 동안 팔자에도 없는 독수공방을 한 남자나 다른 가문에서 찾기 힘든 경우이기는 했다. 여자는 꾸물거리며 돌아누웠다. 너른 가슴팍에서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자, 여전히 처음 만났을 때와 조금도 변함 없는 남자의 눈빛이 그녀를 비추고 있었다. 여자는 괜시리 입술을 삐죽거리며 그 시선을 피했다.
-내 어디가 그렇게 좋아요?
그렇게 묻는 목소리에 생각보다 힘이 실리지 않아 당황한 여자는, 남자의 대답에 그대로 굳었다.
-입 밖으로 내는 순간 틀린 답이 될 것 같아, 말할 수가 없소.
여자는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이 감상을 평생 내 안에 끌어안고 죽겠지.
잔뜩 당겨진 고무줄이 마침내 끊어지고 말듯, 여자의 건강은 그날부터 분명히 악화되었다. 그 즈음 그녀의 일상이란 마치 호수 위의 백조를 떠올리게 했다. 아이들은 잘 자랐고 여자는 그들 앞에서는 태연한 척 웃을 수 있었지만, 우아하고 아름다운 풍경 밑에는 끝없는 물갈퀴질이 있었다. 어느 순간 그녀의 몸 안 어딘가에 바늘 구멍이 하나 나 있었다. 그리로 자기 생명력이 아주 조금씩, 하지만 매 순간 새어나가는 것을 여자는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말씀드렸었잖습니까.
희미한 후회와 죄책감, 그리고 슬픔이 배어나는 목소리로 의원이 말했다.
-몸이 분명 약해지실 거라고요.
여자는 대답 대신 기침을 토해내야 했다.
적어도 아이들 앞에서만큼은 아픔과 피로를 참아내기 위해 뭐든 했지만, 인내에도 한계가 있었다. 아팠다. 정말 아파서, 아이들이 앞에 앉아 종알거리는 것을 보면서도 그 시간을 즐거워하는 대신 아이들이 언제 돌아갈까 시간을 세게 되었다. 아이들이 그런 그녀를 모를 리도 없었다.
-모친.
조심스레 자기를 부르는 목소리에, 여자는 두 눈을 깜박였다. 그제야 자기 눈에 한참 동안 초점이 없었다는 것을 알았다.
-괜찮으세요?
걱정스런 명결의 얼굴과 겁먹은 회상의 얼굴을 볼 때, 여자가 느낀 건 까마득한 비참함이었다. 그녀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여 그것을 받아들였다.
-미안하구나. 오늘은 영 몸이 좋지 않네. 이만 가서 일들 보렴.
-어머니......
-동생이 오늘치 글공부를 잘 했는지, 시간 나면 네가 검사해주거라. 샤오결.
명결이 비죽비죽 우는 회상을 데리고 방 밖을 나가자마자, 여자는 탁상 위에 엎어졌다.
눈을 떴을 땐 남자가 그녀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여자는 한참동안 밭은 기침만 흘리며 눈물을 흘렸다.
-힘들어요.
갈라진 목소리로 여자는 중얼거렸다.
-너무 아파요.
당신은 쓸데없이 번뇌할 시간에 인생을 살라고 말했죠. 하지만 인생이라는 걸 살고 싶어도 살 수 없는 나 같은 사람이 있는 거예요. 나 같은 사람은 계속 상상할 수밖에 없다구요. 내가 아프지 않았다면...... 조금이라도 덜 아팠다면. 그럼 정말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아이들을 더 많이 안아줄 수 있었을 거고 당신을 이렇게 귀찮게 할 일도 없었을 텐데. 하지만 그랬으면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았겠죠. 내가 아프지 않고, 당신이 죽어가지 않았다면.
그런 말을 여자는 입 밖에 내지 않고 삼켰다. 왜냐하면 그녀만큼이나, 남자도 아주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인식하지 못한 새 그늘이 지는 것과도 같았다. 남자의 부사에게 전해듣기로 섭씨 가문의 사람들이 걸린다는 주화입마는 단순한 병이 아니라, 한 사람의 성정을 완전히 바꿔버리는 저주에 가까웠다. 그는 최대한 고르고 고른 말을 외우고 또 외워 반복하듯 여자에게 부탁했다.
-훗날 그런 날이 온다고 하여도, 그건 종주의 본심이 아님을 부디 알아주십시오.
그게 혼인한 지 겨우 한 달쯤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그때 그에게 뭐라고 답했더라.
-당신이 말 안 해도 알아요.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남자가 여자의 고통을 알 수 없듯,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모두에게 추앙받던 남자의 성정에 서서히 금이 가는 것을 여자는 다른 사람들의 속닥거림을 통해 알았다.
얼마나 완벽한 사람이었으면, 다른 곳에선 충분히 호인 소리 들을 일을 해도 사람들이 다들 종주님도 이제 그 시기가 오시는 것 같다고 수군거릴까.
-전대 종주님은 불혹 조금 넘어 돌아가셨지.
-그럼 종주님은......
여자는 침상에 누워, 창 밖에서 속삭이는 그 목소리들을 들어야 했다.
모두가 그렇게 속삭이는데, 밤마다 자기에게만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눈으로 미소 짓는 남자가 여자는 정말 미웠다. 그가 계속 그래주기를 바라는 자기가 미웠다. 그가 자기를 조금이라도 귀찮다는 듯, 지겹다는 듯 바라보면 그대로 자기가 조각나 버릴 것 같은 게 억울해 견딜 수 없었다. 열이 올라서, 더 올라서 그냥 이대로 함께 활활 타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조여오는 가슴께를 거머쥐며 여자는 토해냈다.
-당신을 이해하고 싶지 않아요. 우리가 서로 끌릴 일 따위 없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적어도, 둘 중 하나라도 멀쩡했다면......
-부인.
-나보다 먼저 죽지 말아요. 절대 날 혼자 두지 말란 말이에요.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여자는 숨을 쉴 수 없었다.
-당신이 원하는대로 하겠소. 약속하오.
남자가 그렇게 약속한 뒤에야 여자는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전혀 홀가분하지도 기쁘지도 않았다. 그 뒤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단이 난 것은 그로부터 몇 개월 뒤의 일이었다. 여자의 몸상태가 급속도로 나빠진 뒤에도, 명결과 회상은 매일 적어도 반 시진 정도는 여자를 찾아와 안부를 묻곤 했다. 그러나 그날은 늘 오던 시간이 되어도 둘이 오지 않았고, 어쩐지 방 밖이 묘하게 소란했다. 여자는 시비를 시켜 아이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오게 했고, 얼마 뒤 돌아온 시비는 여자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여자는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아이들은?
그 시비가, 어리고 순진하지만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여자는 별일 아니라는 말을 들었을 것이고 어쩌면 그날을 무난히 보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을 수도 있다. 여자가 끝끝내 아이들을 내 앞에 데려오라고 뻗댔을지 어쨌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만약이라 가정하는 건 의미가 없었다. 그 순간의 여자는 눈 앞의 어린 시비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아이들은 어디 있느냐 물었다.
시비는 도련님들이 사라져 부정세의 모두가 백방으로 찾고 있다는 대답을 울먹거리며 내놓았다.
그날 여자가 혼절했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때, 하늘은 캄캄해져 있었고 보름달이 높아 솟아있었다. 그제껏 아이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여자는 남자의 옷소매를 붙잡은 채 몸을 떨었다.
-어디로...... 왜 갔을까? 무슨 일일까요?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올려다본 남자의 얼굴은 덤덤했으나, 그게 여자를 안심시키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그의 진심인지도 여자는 알 수 없었다.
-아이들은 괜찮을 거요. 놀러갔다가 길을 잃기라도 한 거겠지.
-하지만......
남자는 아주 느린 움직임으로 여자를 받치듯 끌어안았다. 그녀가 회상을 배에 품고 있을 적 그는 매일밤 그녀를 그렇게 안고 있곤 했다. 여자는 그에게 더 깊이 몸을 기댔다.
-당신은 걱정도 안 돼요? 아버지가 돼서......
-어찌 걱정이 되지 않겠소.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 끝이 갈라져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여자는 가슴이 지끈거리며 더 아파왔다. 남자의 입술이 귓가를 스칠 때 여자는 못 참고 작게 훌쩍였다.
-하지만 당신이 더 걱정돼. 그러니 당신 곁에 있게 해주시오.
여자는 고개를 돌려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밤의 어둠과 달빛에 물들어 푸르스름했다. 여자는 그 얼굴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입술을 달싹였다.
-말해봐요.
손을 뻗어 쓰다듬은 남자의 얼굴은 바위처럼 매끄럽고 단단했다.
-당신은 항상 무슨 생각을 해요?
남자는 침묵하다가 말했다.
-당신을 처음 보았던 날을 항상 잊지 않고 떠올리지.
그의 목소리는 아주 느렸다.
-십 년만에 당신을 다시 만났을 때, 당신이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기뻤소. 당신이 당신이라는 사실만으로 내게는 위안이 되오.
말을 마친 남자는 여자에게는 처음 보여주는, 겸연쩍은 얼굴을 했다. 마치 달의 뒷면을 보게 된 것만 같아 여자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마저도 남자가 점점 변해감을 의미하는 거라면. 여자는 충동적으로 말했다.
-사랑한다고 말해 봐요.
남자가 설핏 웃었다. 달빛이 배어난 듯한 미소였다. 그 미소가 숨기지 못 한 한 가닥 근심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자기가 조금만 더 어리석었다면 좋았으리라 여자는 생각했다.
-사랑하고 있소.
같은 말을 돌려주는 대신, 여자는 그렇게 속삭인 입술에 몇 번이고 입맞췄다.
다음날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눈을 뜬 여자는, 아이들이 산을 헤매다가 새벽이 다 되어서야 돌아왔으며 명결이 그 벌로 계편을 맞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때 그녀는 이미 남자에게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를 기력이 없었다. 멀리서 희미하게 들리는 울음소리로 미루어보아 회상이 울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무감각했다. 마치 차가운 진흙탕에 촛불을 비벼끄는 것만 같았다.
-분명히 회상이 꼬드겼을 텐데, 왜 죄도 없는 명결을 때려요? 그 애가 뭘 잘못했다고.
-소종주가 해선 안 될 행동이었소.
여자는 할 말을 잃었다. 마치 어젯밤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된 듯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어제와는 달리, 햇빛 아래 남자의 얼굴은 금 하나 가지 않은 듯 매끈했다.
-당신이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 하지만 나는 아버지일 뿐 아니라 종주이기도 하오. 그 애에게만은 엄할 수밖에 없어. 앞으로 더 그렇게 되겠지.
어쩔 수 없다는 그 말을 할 때, 남자도 자기가 하는 말이 얼마나 구차한지 느꼈을 것이다. 적어도 그럴 것이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한참 뒤에야 그녀는 입을 열 수 있었다.
-앞으로 더 그럴 거라고요? 왜요? 당신이 곧 죽을 거라서요? 당신이 죽는 거랑 명결이 억울하게 혼나는 게 무슨 상관인데요. 그 애한테 뭐 맡겨놨어요?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자는 계속해서 말했다.
-조상이 백정이라면서, 왜 당신은 도살장 끌려갈 거 다 아는 짐승마냥 그러고 살아요? 짐승도 자기 자식만큼은 우리에서 빼내려고 할 텐데 당신은...... 하기야, 당신만 그러겠나요. 내 오라버니도, 당신도...... 사내들이란 정말이지 지긋지긋하네요. 아들을 낳는 게 아니었어. 딸을 낳았어야 했는데...... 언젠가 우리 아이들도 당신처럼 될까요? 누굴 탓하겠어요. 우리가 이렇게 형편없는 부모인 걸.
겨우 그만큼 말했다고 숨 차는 자기가 여자는 싫었다. 그녀는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피곤해요. 혼자 있고 싶어요.
그러면서 시비들까지 다 물리기는 했으나,. 그날 저녁 여자는 직접 명결을 불러 등에 연고를 발라주었다.
-네 아버지가 잘못한 거야.
그녀는 꿋꿋이 말했다.
-너는 아직 어린 애고.
-모친.
변성기로 인해 거칠어진 명결의 목소리가 마치 여자의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았다. 다부지지만 순하고 고요한 얼굴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여자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깜박였다. 그러자 눈물이 툭 떨어졌다.
-미안해.
여자는 두서없이 말했다.
-너는...... 너는 아직 어린데.
그러니 아무리 자격없기로서니, 모친된 사람이 이 어린 애 앞에서 이렇게 눈물을 보이는 건 분명 정말 어리석은 일인데.
-아니에요. 부친의 말씀이 맞습니다. 회상은 제 동생이고, 제가 동생을 지키고 바른 길로 이끌 형이 되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인걸요.
-너......
-저는 모친이 제 모친이셔서, 회상이 제 동생이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자는 결국 이제 겨우 열네 살 된 아들 앞에서 울고 말았다.
-바보같은 녀석. 내가 모를 줄 아니? 회상이...... 회상이 너에게 놀자고 조르게 된 이유를? 네가 왜 단 한 번도 그런 적 없다가 회상을 데리고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했는지, 내가 모를 줄 아느냔 말이다.
여자가 아이들과 보내던 시간을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줄이지만 않았다면. 그랬다면 철없는 회상이 심심하니 형님이 좀 놀아달라며 명결을 잡아당겼을 리 없고, 명결이 여자를 생각해 회상이 떼쓰는 것을 들어주었을 리도 없었다.
-샤오결.
여자는 여전히 바른 자세로 앉아 자기를 마주보고 있는 아이를 불러보았다. 아이는 어색해하는 대신 미소지었다. 마치 처음 만났을 적의 남자 같았다.
명결이 돌아가고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여자는 방문 앞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다 보이니, 그만 이리 들어오렴.
회상이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훌쩍이면서.
침대까지 조심스레 걸어온 회상이 꼼지락거리며 자기 품에 안겨오는 것을, 여자는 말없이 끌어안고 그 조그만 머리에 입을 맞췄다. 그제야 안심이 된 듯 회상은 다시 또 소리내어 울었다. 여자는 중얼거렸다.
-이 울보 녀석. 넌 누굴 닮아 이렇게 울보니?
회상은 대답 대신 눈물 콧물을 짜내며 서럽게도 울었다.
-왜...... 왜......
-왜, 뭐. 말을 하렴.
-왜 어머니는 형님만 좋아하세요? 왜 저를 좋아해주지 않아요? 아버지도 무섭고, 스승님들도 형님만 좋아하고...... 나를 좋아해주는 건 형님 뿐이야. 형님만 나를 좋아해.
회상 앞에서만큼은, 일곱 살배기 자기 아들 앞에서만큼은 울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금방이라도 탈진할 것 같았지만 애써 웃었다.
-오늘 네 형님이 네 몫의 매까지 다 맞았는데, 뭐? 아버지가 무서워? 무서워해도 네 형이 무서워해야지 왜 네가 무서워하니.
-이잉......
회상은 비죽비죽 울기만 했다. 그동안 여자는 느리게 자기 품에 안긴 아이의 등을 토닥였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내 아가.
무슨 말을 해줘야 할까. 무슨 말을 해주든 늦은 게 아닐까. 여자가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저도 알아요. 모르는 거 아니에요.
-뭐?
-모친이 아픈 건 저 때문이잖아요. 사람들이 그랬어요. 그래서 절 안 좋아하시는 거죠?
그 순간 여자가 느낀 감정은 이 세상의 어떤 말로도 형언할 길이 없었다.
-섭회상.
여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아이의 뺨을 감쌌다. 눈물 젖은 갈색 눈이 어둠 속에서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겁먹은 그 눈을 보며 여자는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랬다.
-잘 들어. 이 어머니는 너 때문에 아픈 게 아니야. 그리고 너 때문에 아프다고 하더라도, 그건 내가 선택한 거야. 네 형이 오늘 너 대신 매를 맞은 것처럼, 내가 선택한 거란 말이다.
아이의 눈에 새로운 눈물이 고일 때, 여자의 눈에도 마찬가지 물기가 서린 건 불가항력이었다.
-넌 내가 낳은 내 아이야. 내가 너 말고 다른 누구를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겠니. 만약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면...... 그건 이 어머니가 줄 수 있는 사랑의 양 자체가 적어서 그런 거야. 그리고 그건 한낱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문제야.
섭회상은 대답 대신 서럽다는 듯이 울었고, 여자는 자기 아들을 품에 안은 채 침대맡에 일렁거리는 촛불을 바라보았다.
-사랑한단다. 정말로.
그 말을, 애초에 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날 밤 침실로 돌아온 남자는 눈가가 붉게 달아오른 채 여자 품에 안겨 잠든 회상을 보고 아주 잠시 동안 놀란 얼굴이 되었다가, 예의 그 다정한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이제는 그 얼굴에 어쩔 수 없는 서글픔이 서려있다는 점이 전과 달라진 점이었다. 아마 이전으로 돌아갈 방도는 없을 것이었다. 여자는 남자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이리 와요.
남자는 말없이 다가와 여자의 이마에 입맞췄다. 여자는 아이가 깨지 않도록 조용조용 말했다.
-당신과 혼인한 내가 바보죠. 얼마나 바보냐면, 아마 수백 년 뒤 당신과 내 유골을 본 후세 사람들도 다 알아볼 거예요. 바보들이라고.
여자는 잠시 멈췄다가 말했다.
-약속해요. 그럴 거라고.
-약속하리다.
남자가 속삭였다.
그 뒤로는 착실히 모든 것이 내리막길을 걸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것 같았지만, 여자는 회상의 열 살 생일이 얼마 지나지 않아 기어이 각혈을 시작했고 남자의 기혈도 흐트러지면 더 흐트러졌지 양순해지는 일은 없었다. 남자의 기가 망가지면 망가질수록 사람들은 그의 수련경지가 드높다며 그를 더 칭송했다. 그럴 때마다 여자는 세상에 불을 질러버리고 싶었다.
어느날, 정말 불이 붙기 전까지.
사람들은 왜 지키지 못할 약속들을 할까?
남자가 불야천에서 열린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수사들을 데리고 떠났을 때, 여자는 그것을 무수히 평범한 나날들 중 일부로 받아들였다. 명결은 늘 그렇듯 소종주 교육을 받느라 바빴으며, 회상은 얼마 전 생일 선물로 받은 붓으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그림을 그리겠다며 여념이 없었다. 여자는 따스한 봄 햇살을 받으며 창가에 기대어 앉아있었다.
보고싶다. 그런 생각을 하며 물 묻은 손끝으로 나무 창틀에 남자의 윤곽을 그리고 있을 때였다.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한참 그림을 그리던 회상이 붓을 내려놓더니, 무슨 일인지 보고 오겠다며 방을 나섰다.
그때 회상을 붙잡지 못한 것을 여자는 얼마 남지 않은 생 내내 후회했다. 방 밖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을 때는 방에 있던 시비가 여자를 붙잡았다.
그때 어떻게 그렇게 초인적인 힘이 난 걸까. 시비를 밀치고, 문을 열고 나간 여자는 소란스러운 복도를 빠르게 걸었다. 그리고 숨이 턱끝까지 치받혔을 때야 보았다.
수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남자는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를 부축한 수사들의 회색 옷에도, 그의 회색 옷에도 선명한 선혈이 묻어있었다. 여자는 그의 옆구리에서 허물어지듯 피가 점점 더 배어나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모친.
팔을 붙잡는 손길에 고개를 들자, 명결이 잔뜩 굳은 얼굴로 그녀를 붙잡고 있었다. 명결의 다른 팔에는 회상이 매달려 있었다. 늘 크게 소리내어 우는 아이가, 소리도 못 내고 헐떡이고 있었다. 여자는 다시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에게로 비틀비틀 다가갔다. 그러나 명결이 그녀를 붙잡았다. 왜? 왜 그런 얼굴을 하느냐고 물으려던 여자는, 명결의 두 눈에 서린 어쩔 수 없는 공포를 보고 깨달았다.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여자가 발견한 건 도를 쥔 채로 경련하는 남자의 팔이었다.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다시 발걸음을 떼었다. 명결이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모든 것이 다 아득했다. 눈 앞의 남자를 제외하면.
할 수 있는 것이 단 하나뿐이어서, 여자는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남자의 눈이 느리게 뜨였다. 초점 없는 그의 눈이 몇 번 깜박이다가 빛을 되찾았다. 동시에 그의 입에서 울컥 검은 피가 흘러나왔다. 여자는 핏발 선 그의 두 눈을 그저 바라보았다. 그가 피묻은 손을 뻗어 여자의 뺨을 스치듯 쓰다듬었다. 그의 눈에 서서히 핏물이 고였다.
-부군.
무력하게 중얼거릴 때 여자는 생각했다. 이건 악몽이었다. 이 꿈에서 깨면 남자가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남자가 자기를 부축하고 있던 부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상처입은 짐승처럼 그의 목소리는 그릉거렸다.
-나를 왜 이리로 데려왔지?
-종주......
-그곳으로, 가야 한다.
그러면서 남자는 고개를 돌려 다시 한 번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에서는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임을 여자는 알았다. 다시는 저 눈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남자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곤 입을 굳게 닫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여자는 남자의 의중을 알았다. 무슨 말을 해도 차라리 미련이 남으니, 아예 침묵하겠다는 것이다.
그를 알았다. 그래서, 이게 정말 마지막이라는 사실이 그녀를 덮치는 동안 여자는 속수무책이었다. 다시금 자기를 붙잡는 손길을 느끼며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남자와 명결의 목소리가 날아가듯 들려왔다.
-명결. 내가 말했던 것을 기억하느냐?
-부친.
-네 모친을, 그리고 회상을 부탁한다.
여자는 몇 번이나 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그러나 닿지 않았다. 검은 옷을 입은 수사들이 산처럼 남자를 에워쌌다. 그리곤 멀어졌다. 여자는 가슴께가 뻐근하게 막혀오는 것을 느끼며 외쳤다.
-데려가지 마. 데려가지 말란 말이야!
약속했잖아. 그 말을 하기 전에, 그녀는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떴을 때 여자가 본 것은 침상 맡에 개켜 있는 흰 옷이었다.
-모친.
시선을 돌리자, 흰 옷을 입은 명결이 그녀의 머리맡에 앉아있었다. 그 옆에는 울다가 잠들었는지 눈물이 말라붙은 얼굴로 명결에게 기대어있는 회상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흰 옷이었다.
기산 온씨 온약한. 명결의 입술 사이로 새어나오는 그 이름은 여자가 부정세에 오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그가 남자의 패도를 망가뜨린 채로 야렵대회에 내보냈다는 말을 여자는 무감각하게 들었다. 들었다기보다는, 기다렸다. 명결이 말을 마칠 때까지. 그리고 물었다.
-네 부친은 어디 있니?
명결의 입술이 떨렸다. 여자는 자기가 느끼기에도 기이할 정도로 덤덤하게 되물었다.
-이미 묻혔니?
명결의 눈에 눈물이 맺히는 것을 바라보며, 여자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 타버린 것 같았다.
자결 따위는 하지 않았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남자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가 죽었다. 더 이상 그를 볼 수도,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그의 온기를 느낄 수도 없었다.
죽어버리겠다고 난동을 부릴 이유도 없었다. 그녀의 그 협박이 통한 유일한 사람이 이 세상에 없었다.
여자는 자기 생의 마지막 불꽃이 사그라지는 것을 느끼며 침착하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한스럽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느닷없이 태어났고 느닷없이 만났으니, 헤어짐 또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터였다. 그녀는 더 이상 각혈과 기침을 이유로 아이들을 밀어내지 않았다. 남은 날이래봐야 한 해가 채 되지 않을 텐데, 숨겨서 무엇 하겠는가. 여자는 자기에게 내내 들러붙어있는 회상을 가만가만 끌어안았고, 이른 나이 급작스레 종주가 되어 처리할 일이 산더미일 텐데도 굳이 시간을 내어 자기를 찾는 명결에게도 말없이 웃어보였다. 죽음이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을 그녀는 새삼스레 깨달았다. 태어날 때부터 이미 여자는 죽어가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사랑한다고 더 많이 말했을 텐데. 그의 이름을 더 자주 불렀을 것이고, 그의 앞에서 울기보다는 더 웃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그의 말대로 정말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단순히 명을 부지하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
그러나 이미 모든 게 끝났다. 여자가 할 수 있는 건 그녀가 늘 그래왔듯 만약을 곱씹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그녀를 어디에도 못 가게 하겠다는 듯 꼭 붙잡고 있는 회상을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회상.
이름을 부른 것만으로 벌써 또 울먹거리는 아이에게 여자는 미소지어보였다.
-많이 사랑한다.
-아니야......
-이리 울릴 줄 알았다면 너를 낳지 않고 내 뱃속에 계속 품고 있을 걸 그랬다. 하지만 너를 낳은 게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하고 싶었던 일이고, 가장 잘한 일이야. 그래서 죽어도 후회는 없어.
회상은 여자의 가슴팍에 머리를 묻은 채 흐느꼈다. 여자는 그런 그를 다정히 끌어안았다.
-너는 나중에 커서 우리 같은 부모는 되지 말거라. 우리는 너를 너무 사랑했고 또 사랑하지만, 너에겐 부족했어. 그렇지?
-엄마.
그렇게 웅얼거리는 회상의 머리 위에 입술을 내리누르며, 여자는 속삭였다.
-그래. 말 나온 김에 이 어머니와 약속 하나만 하자.
-어떤......
-살아라. 무슨 수를 써서든. 세상이 뭐라고 하든, 네 조상님들이 뭐라든...... 그 누가 뭐라든. 살아만 주지 않겠니?
-싫어요.
회상이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약속하면...... 그러면 어머니는......
-엄마 부탁인데?
한참 말을 잇지 못하고 울던 회상이 마침내 약속한다고 고개를 끄덕였을 때, 여자는 살면서 느껴본 적 없는 평온을 얻었다. 그녀는 회상의 눈가를 닦아주며 미소지었다.
-이제 그만 자자, 아가.
-어디 안 가실 거죠?
-그럼.
불안하게 떨리는 몸이 서서히 늘어지다가 마침내 곤한 숨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여자는 아이의 따뜻한 몸을 안은 채 다독이고 있었다.
삼경이 지난 부정세는 칠흑처럼 컴컴했다. 여자는 느린 걸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너울거리는 흰 천들이 그녀의 손끝을 간간이 스쳤다.
다다른 정원에는 이미 그녀 외에 다른 한 사람이 더 있었다.
흰 옷을 입고 석탁 앞에 앉은 명결은 달빛 아래 그 어느 때보다도 거대해보였다. 그게 우스워 여자는 작게 웃었다. 겨우 열여덟 살의 소년이었다, 그녀의 아들은. 그러나 벌써 그의 어깨에는 청하 섭씨라는 거대한 이름이 매달려 있었다. 맘 같아선 다 되었으니 다 버리고 도망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자기 말을 들을 아이가 아님을 여자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다가가 명결의 맞은 편에 앉았다. 그리고 남자를 빼닮은 그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언제 이렇게 자랐니.
여자의 말에, 명결은 대답하는 대신 시선을 내리깔았다. 여자는 그런 그를 부드럽게 불렀다.
-샤오결.
시선을 들어 자기를 바라보는 명결에게, 여자는 미소지어보였다.
-넌 정말 신기한 아이였어. 겨우 네 살배기 주제에 의젓하긴 어쩜 그리 의젓한지, 놀리는 재미가 있었지.
명결은 여자를 따라 미소지었다가, 다시 얼굴을 굳혔다. 그런 그를 보며 여자는 깨달았다. 그가 이 대화의 의미를 알고 있음을.
서늘한 봄바람이 여자의 머리카락을 허공에 날렸다. 정말 내 생의 마지막에 와 있구나.
-네 아버지를 닮지 않으면 안 되겠니?
그녀는 말했다.
-너더러 다른 사람이 되라고 할 수는 없겠지. 그러고 싶지도 않아. 그저...... 조금 더 욕심을 내고, 조금 더 게을러지고, 건방져지렴. 그럴 수 있다면.
명결의 눈에 눈물이 맺히는 것을 여자는 잠시 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미안하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네.
그녀는 손을 뻗어 아이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더 이상 네 곁에 있어주지 못할 것 같아. 있어봐야 네게 도움이 되지도 못 하겠지, 늘 그랬듯.
명결이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모친.
-미안해. 아무래도 내 몸이 오늘 밤을 버티기 힘들 것 같다. 그런 느낌이 들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말뿐이구나.
말...... 어떤 말이 좋을까. 그런 상각을 하다가, 여자는 작게 웃었다. 남자가 한 마지막 말과 완전히 반대되는 말을 하기로 했다.
-회상은 약관이 될 때까지만 부디 보살펴 줄래? 그 뒤에는, 알아서 살게 내버려두렴. 네가 그 애 인생 책임질 필요 없다.
-아닙니다, 모친. 제가 원합니다.
여자는 입을 다물었다. 명결이 느리게 말했다.
-회상만큼은 제가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그러니......
이어질 말을 여자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느리게 자리에서 일어나 명결을 향해 다가갔다. 이제 와서 후회하는 것도 우습지만, 더 많이 쓰다듬어주고, 안아줄 것을 그랬노라고 생각했다. 이제 정말 영원히 자기에게 어릴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여자는 말했다.
-나중에 때가 오더라도 너무 무서워하진 마라. 네 아버지야 혼자 가버렸으니 지금쯤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알아서 하라지. 난 너를 계속 기다리고 있으마. 그렇다고 너무 일찍 오지는 말고.
말을 마치자 당연하게도 침묵이 찾아들었다. 마지막 미련으로, 여자는 속삭였다.
-많이 사랑한다.
그 말을 더 많이 해주었어야 한다는 후회를 여자는 붙잡는 대신 보내주었다. 끝까지 울음을 참는 아이를 바라보다가, 뒤를 돌았다.
-회상은 내 방에 있어. 나는 오늘 밤...... 네 아버지 방에서 자마.
걸어나갈 때, 등 뒤에서 참지 못하고 작게 샌 울음소리를 여자는 자기 고막에 새겼다.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그 대신, 고개를 들어 아마도 마지막으로 보게 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라지기 직전의 그믐달이 거기 떠 있다고 이제 와 서러워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지키지 못한 약속들에 대해서도 생각할 필요 없겠지. 여자는 자유로움을 느꼈다.
살라는 남자의 목소리가 항상 머릿속에 울려서, 죽음 뒤를 생각해본 적은 사실 거의 없었다. 정말 다시 남자를 만나지 못할 것인지, 자기가 저승의 길목에서 아이들을 기다릴 수 있을 것인지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를 다시 보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그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 가능성만으로도, 여자는 처음으로 죽음도 그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
명결은 동쪽 하늘이 밝아질 때까지 정원에 앉아있었다. 그는 말아쥔 자기 두 주먹을 내려다보며 눈을 깜박였다. 그치지 않은 눈물이 한 방울 떨어져 내렸다.
석탁에 진한 자국을 남기는 그 눈물방울을 보면서 명결은 생각했다. 그의 모친이 세상을 떠났다. 또 장례를 치러야 할 것이고, 제사를 올려야 할 것이고, 이번엔 외가에 알릴 행렬도 꾸려야 할 것이다. 소종주로 자라 종주가 된다는 것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이러한 생각들을 놓지 않아야 함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날만큼은, 명결은 그러한 것들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생각했다. 왜 그의 모친은, 부친과 함께 묻어달라는 부탁을 하지 않았을까.
알고 계신 걸까? 부친이 어디, 어떻게 묻혀 계신지. 명결은 행로령으로 향하는 스산한 길목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그곳에 모친을 모실 수는 없었다.
모실 수 없었다. 도무지, 아버지의 방에 들어갈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그 일은 그의 몫이었다. 그가 해야 했다.명결을 어린 아이라 부를 사람이 더 이상 이 세상엔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눈물을 그쳐야 했고, 자리에서 일어서야 했다. 아버지가 불리던 호칭으로 불려야 했고, 언젠가 아버지와 같은 방식으로 죽게 되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니 그는 절대 혼인은 하지 않을 것이다. 모친의 것과 같은 운명을 하나 더 자아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는 벌써 또렷이 그려지지 않는 모친의 얼굴을 어떻게든 자기 눈 앞에 되그려보기 위해 애썼다. 그러면서 또 결심했다. 언젠가, 온약한은 그의 손에서 그 명이 사그라져야 할 것이라고. 그의 손에 명결은 아버지를 잃었고, 어머니를 잃었다.
어머니. 한 번도 모친을 그리 불러본 적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명결은 그녀의 방 앞이었다. 느리게 방문을 열자, 곤히 잠든 어린 동생이 있었다. 명결은 자기도 모르게 속삭이듯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회상.
겨우 그 속삭임만으로 눈을 뜬 남동생이, 비어있는 침대를 둘러보다가 자기에게 시선을 고정했을 때 명결이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곤 다시 그 이름을 부르는 것뿐이었다.
-회상.
이미 부어있던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바라보며 명결은 턱을 굳혔다. 회상이 울먹였다.
-엄마...... 약속...... 약속했는데......
대답 대신 말없이 작은 몸을 품 안에 안자, 곧 서러운 울음소리가 방 안을 메웠다. 명결은 자기 몫까지 대신 토해내는 듯한 그 울음소리를 한동안 묵묵히 듣다가 입을 열었다.
-괜찮아, 회상. 형이 여기 있다.
이제 그들에게는 정말 그들뿐이었다. 그 자명한 현실이 척수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 명결은 동생의 몸을 더 단단히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이 형이 반드시 지켜주마.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다고 맹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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