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hygall.com/511606508
view 3031
2022.12.04 22:05
진정령, 난백 ㅅㅍ


1-1: https://hygall.com/510097371
1-2: https://hygall.com/510098997
2-1: https://hygall.com/510265342
2-2: https://hygall.com/510266758
2-3: https://hygall.com/510576125
2-4: https://hygall.com/510578287
외전1: https://hygall.com/510708761
3-1: https://hygall.com/510709361
3-2: https://hygall.com/510884992
3-3: https://hygall.com/510886315
4-1: https://hygall.com/511095972
4-2: https://hygall.com/511097042
5-1: https://hygall.com/511336650
5-2: https://hygall.com/511339029




그날은 눈을 뜨자마자 날이 참 좋다는 생각을 했다. 대충 수련을 하고 아침식사를 한 것까지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마찬가지 늘 하던 대로 아침식사 후 단체 수련까지 마치고 찾아간 섭회상이 어쩐지 죽을상을 하고 있어,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밀아......

섭회상이 긴 한숨을 내쉬며 탁상 위로 무너졌다.

-요 종주님이 오시겠다네. 갑자기.

-예?

요 종주는 여러 모로 선문세가 사이에 악명이 높은 인간이었다. 듣기로는 하나뿐인 아들이 온씨 손에 죽은 뒤로 인간이 아예 막나가기 시작했다는데, 그 막나간다는 게 금광선처럼 아랫도리 놀리거나 온약한처럼 음철 가지고 장난치는 정도의 스케일이 아니라 말 그대로...... 야금야금 정치질을 하는 것이라, 적어도 내가 아는 종주들 중 그를 좋아하는 이는 없었지만 평양 요씨는 중소세가 중에서는 꽤 잘 나가고 있었다.

어찌 보면 똑똑한 거겠지. 수진계의 문법에 절대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사람을 열받게 하고, 자기 이익만 쏙 빼먹으니까. 금광요마저 요 종주 이야기가 나오면 깊이 빡친 표정을 짓는 것을 본 적 있었다.

그런데 그 요 종주가 부정세에 온다고? 왜?

-강 형이 얼마 전에 경고해주긴 했는데......

강만음? 뜬금 없는 이름이 들려와 고개를 갸우뚱하려던 나는, 곧 평양 요씨가 본래 운몽 강씨의 휘하 가문 격이었다는 것을 깨닫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도 강만음한테 가야지 왜 섭회상에게 온단 말인가.

-얼마 전에 강 형이 요 종주님의 부탁을 거절했다나 봐. 평양에서 운몽 다음으로 가까운 건 청하이기도 하고, 고소나 난릉은...... 그냥 가기 싫으셨나보지.

한 마디로 청하 섭씨가 만만하다는 것 아닌가. 섭명결 살아있을 때라면 아마 꿈도 못 꿨겠지. 내 생각이 맞는지, 섭회상의 한숨이 더 깊어졌다.

-수사들을 빌려드리는 거야 어렵지 않은데, 문제는 요 종주님을 뵈면 그 날 하루종일 기분이 안 좋다는 거야.

재수없다는 것을 굳이 굳이 돌려말하는 섭회상이 새삼 귀여웠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물었다.

-어차피 청하 섭씨가 굳이 저 멀리 평양 요씨를 도와줄 필요도 없잖습니까?

다른 가문이라면 몰라도, 평양 요씨가 뭐가 예쁘다고. 그 강만음이 포기한 가문을 섭회상이 왜 도와줘야 한단 말인가.

-그냥 바쁜 일 있다고 차만 한 잔 내주고 마세요.

-하지만......

-아프다고 하시면 되겠네요.

-그게, 이미 몇 번 그런 적 있거든......

나는 못 참고 작게 웃었다. 그러자 섭회상은 억울한 얼굴이 되었다. 나라도 그럴 것이라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야 그렇지만...... 나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보았다. 제법 쌀쌀하긴 했으나, 오히려 그래서 더 가을 정취가 짙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고 바람은 청명했다. 문득 낙엽 한 장이 날아가는 걸 보다가 나는 충동적으로 물었다.

-그럼 아예 튈까요?

섭회상을 돌아보자, 그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자 어쩐지 마음이 더 침착해졌다.

-종주님이 부정세에 안 계시다는데 요 종주가 뭐 어쩌겠습니까.

섭회상은 잠시동안 말없이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내가 혹시 또 뭔가 선을 넘은 것인가 싶어 조금 어색해지려던 찰나,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어떻게 그러겠어.

싫으면 말고. 내가 뭐 그를 강제로 부정세 밖으로 끌고갈 것인가 어쩔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계속 창가에 기대어 서 있는데, 섭회상이 말했다.

-옛날 생각 나네.

-옛날 생각이요?

-고소수학 때, 위 형이 자주 이렇게 나를 유혹하곤 했지.

그러면서 섭회상이 작게 웃었다.

-나는 거절한 적이 없었고.

-그래요?

수업 땡땡이 칠 생각에 흐물거리는 십대 섭회상을 나는 상상했다. 유심히 자기를 바라보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섭회상이 부채를 펴서 얼굴을 가렸다.

-왜 그렇게 봐?

나는 내가 생각하던 것과는 아예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전부터 궁금했습니다. 듣기로 혈세불야천 때 위무선이 섭씨 수사들을 수없이 죽였다고 알고 있는데, 종주님은 위무선에게 악감정이 전혀 없어 보이셔서요.

내 말에, 섭회상은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부채 너머로 보이는 섭회상의 얼굴 윤곽을 눈으로 더듬었다.

-원한은 원한이고, 우정은 우정이지. 왜? 이런 생각이 이해가 안 가니?

-아뇨. 이해합니다.

-정말? 다행이네.

다행일 것까지 있나. 그런 생각을 하며 뒷목을 긁는데, 섭회상이 느리게 부채질을 하며 말했다.

-위 형과 그렇게 놀 때가, 생각해보면 가장 행복했던 것 같아. 하지만 그때는 어려서 그랬던 거지. 이제 와서 그때랑 똑같이 행동할 수는 없지 않겠니? 무엇보다도 네가 곤란해지는 건 싫어.

-저요?

다소 생뚱맞은 그의 말에, 나는 의아해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왜 곤란해진단 말인가? 요종주가 나에게 와서 따질 것도 아니고. 섭회상이 나를 말 안 통하는 외국인처럼 애잔하게 바라보는데, 이쪽이야말로 당황스러웠다.

-네가 부정세 사람들한테 더 밉보일 것 아니니.

아. 난 또 뭐라고. 나는 길게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상관 없습니다.

-하지만......

-저야 해봤자 연무장 돌거나 잔소리 듣는 게 다일 텐데요, 뭐.

나는 중요한 사실을 짚어주기로 했다.

-종주님이야말로 아시죠? 저는 일개 수사라는 거. 요종주가 난리를 치든 부사님이 잔소리를 하시든 책임은 다 종주님이 지시는 겁니다. 저는 그냥 도망치실 생각 있으시면 같이 가드리겠다는 거지, 책임은 못 져드려요.

그냥 가지 말자는 말 한 마디가 더 깔끔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무슨 생각인진 몰라도, 섭회상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조금은 슬픈 듯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말했다.

-그럼 나 갈래. 나 데려가, 밀아.

그렇게 그 날의 일탈 내지 나들이가 이루어진 것이다. 일단 떠나는 건 정해졌으니 다음으로 정해야 할 건 행선지였다. 괜히 사람 많은 곳 갔다가 요종주가 또 귀찮은 소문을 퍼뜨리면 곤란하니, 사람이 없는 곳이 좋을 것이다. 사람 없는 곳 중 가장 만만한 건 역시......

-산이나 타죠.

-산?

섭회상이 멍하니 되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뒷산이 좀 높긴 하지만 수행자가 못 오를 정도는 아니잖습니까? 붓 같은 것 챙겨가셔서 산수를 그리셔도 되고요.

-하지만 너 몸......

-다 나았어요.

다리 붙었으면 다 나은 거지. 그러면서 고개를 끄덕이는데, 섭회상은 어쩐지 생각에 잠긴 듯 얼굴이 흐렸다.

-그럴까?

그렇게 되묻는 목소리도 어째 좀 힘이 없었다. 그러나 내가 왜 그러냐고 묻기 전에 그가 부채로 손바닥을 탁 소리나게 치며 말했다.

-그러자. 재미있겠다.

진짜? 그렇게 묻는 대신, 나는 섭회상이 붓과 종이를 챙기는 것을 도왔다. 화구를 대충 다 챙기고 나니, 이젠 진짜 가야 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더 챙겨야 할 것이 있지.

-잠시만 여기서 기다리세요.

종주실을 떠난 나는 곧장 주방으로 갔다. 그리고 대충 간식 상을 받아냈다. 내가 갑자기 다과들을 무더기로 가져와 당황했는지 부채를 팔랑이던 섭회상은, 그 다과들이 다 내 옷소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너 정말 본격적이구나, 밀아.

-할 거면 제대로 해야죠.

-그래, 그래.

어린애 대하듯 그렇게 말하면서도, 섭회상은 가복들과 수사들 몰래 부정세를 떠나는 데 꽤나 진심으로 임했다. 기둥 뒤에 숨은 그를 보면서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나는 여러 번 참아야 했다. 자기가 주인인 자기 집에서 간자처럼 은밀히 움직여야 한다는 상황 자체가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그가 즐거워 보이니 나도 즐거웠다.

중간에 여러 명에게 들킨 것 같긴 했지만, 어쨌든 우리는 부정세 뒷문을 지나 산의 초입에 들어서는 데 성공했다. 섭회상이 들뜬 듯 웃었다. 그런 그의 얼굴이 쨍쨍한 가을 햇살을 받아 하얗게 빛났다. 나는 그에게 미소로 답하며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러나 그 고즈넉한 분위기는 얼마 가지 않았다. 섭회상은 뭐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쉬었다가 가자며 나를 붙잡았다. 아니 정상까지 가서 쉬는 게 쉬는 거지, 벌써 쉬자는 게 말이 되나 이해가 안 갔다. 그러나 뭐 어쩌겠는가. 힘들다는데 쉬어야지. 미리 준비해놓은 천을 낙엽 위에 깔아주자, 섭회상은 쑥스러운 듯 웃었다.

-산을 오르는 게 쉬는 거라니...... 새삼 넌 형님과 참 닮은 것 같아.

섭회상이 깔고앉은 천을 빼버릴까 나는 아주 잠시동안 생각했다.

-어렸을 때부터 매번 산을 타서 그런가 봅니다.

-그래?

-예. 아버지 따라서 산을 타기도 했었고, 하동 부씨도 청하 섭씨처럼 선부가 산 바로 앞에 있어서, 혼자 수련하고 싶을 때면 자주 올랐죠.

-떡잎부터 달랐구나......

그렇게 중얼거리는 그가 우스워 나는 작게 웃었다. 듬성듬성 나뭇잎이 남은 나뭇가지를 올려다보다가, 떨어지는 낙엽을 허공에서 붙잡았다.

-그게 아니라, 그냥 그렇게 해야 했던 겁니다.

하동 부씨에 가서 생전 만난 적 없는 사람들을 만나 해본 적 없는 생활을 하면서, 나는 밤마다 혼자 생각했다. 만약 남동생이 아니라 내가 아팠다면 할머니는 나를 죽게 두고 남동생을 수사로 키웠겠지.

죽어라 수련했던 건, 그러면서도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은 없었던 건, 어쩌면 나에게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자격이 없기도 하고.

그런 이야기를 섭회상에게 하는 대신, 나는 손 안에서 낙엽을 잘게 부수며 그를 바라보았다.

-종주님은 그러고 보니 어릴 때 어떤 아이셨나요? 십대 시절은 몇 번 들었지만 어릴 땐 어떠셨는지 들은 바가 없네요.

-나야 뭐, 네가 상상하는 대로일 거야.

-제가 무슨 상상을 하는 줄 알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글쎄. 나 어렸을 땐 어땠을 것 같니?

그렇게 묻는 섭회상의 얼굴을 나는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그가 어떤 아이였을지를 상상했다.

-키우기 쉬우면서도 쉽지 않은 아이였을 것 같습니다.

-무슨 뜻이야?

-착하고 순하셔서 부모님 속 썩이진 않으셨을 것 같은데, 은근 잔머리 잘 굴려서 스승님 골치는 좀 썩이셨을 것 같아요.

-귀신이네.

섭회상이 작게 웃었다.

-살면서 모신 스승님들께 들은 잔소리를 종이에 다 적으면 아마 부정세를 스무 바퀴는 넘게 돌걸.

-그 정도입니까?

-남계인 선생님마저 나를 거의 포기하셨는걸. 위 형과는 다른 의미로.

쪽지 시험 때 위무선과 부정행위를 하다가 걸렸다는 이야기를 섭회상은 즐겁게도 늘어놓았다. 나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정말 즐거웠구나. 고소 수학이. 그런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고, 새삼 섭회상의 행복이 과거에 머물고 있다는 게 실감이 났다. 그럴 만도 하다. 사실상 섭회상의 성장기는 수진계가 급변하던 격동의 시기와 맞물려 있었고, 사일지정과 혈세불야천을 다 겪고 이제 좀 살만한가 했더니 형이 죽은 게 아닌가. 기구한 인생 하면 항상 금광요만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섭회상의 인생도 그에 버금갔다.

따지면 나도 섭회상과 연배가 비슷하고, 인생 암담했기로는 별로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섭회상과는 다르게 즐거웠던 어릴적의 추억이라는 게 별로 없었다. 부모님이 살아계실 적에는 그래도 좀 웃을 일이 있었을 거다. 그러나 그때는 너무 어릴 때라 잘 기억이 안 나고,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에는 뭐...... 계속 이 모양이었으니까.

나는 조잘조잘 이야기를 늘어놓는 섭회상의 입술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가 부럽다기보다는, 그에게 그렇듯 행복한 시절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무튼 위 형은 참 대단했어. 좋은 친구였고.

섭회상이 말을 마쳤다. 말을 마친 그가 정확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게 유쾌한 생각일 리 없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옷자락을 털자 섭회상이 멍하니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충분히 쉬신 것 같으니 이제 다시 올라가죠.

섭회상이 말없이 내 손을 잡고 일어섰다. 그러고서도 놓지 않았다. 나는 그가 붙잡은 내 손을 애매하게 내려다보았으나, 굳이 그의 손을 떨치지는 않았다.

낙엽 밟히는 소리가 간간이 울리는 산 속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가을은 가을이다. 신선하다 못해 날카로운 공기를 나는 깊게 들이마셨다. 산만큼 낮과 밤이 다른 곳은 없을 것이다. 앵무를 찾아 밤에 이 산을 누빌 때는 이런 고즈넉함을 전혀 느끼지 못했었다.

-조용해서 좋네요. 농촌은 한참 바쁠 때인데.

-그러니?

-예. 이제 한참 보리 파종할 때죠. 추수할 때보다 씨뿌릴 때 더 마을 분위기 좋은 것 아세요? 다른 덴 어떤지 모르지만 저희 마을은 그랬습니다.

추수야 풍년이냐 흉년이냐에 따라 반응이 갈리지만, 씨를 뿌릴 때는 언제나 희망이 있고 때론 또 절박하기도 해서, 항상 묘하게 마을 전체가 들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구나. 난 가을이라고 하면 가을걷이밖에 생각 못 했는데.

중얼거리는 섭회상이 진심으로 신기한 듯한 목소리라 나는 나도 모르게 작게 웃었다. 그리고 섭회상의 손을 놓았다. 서운한 듯 주먹을 쥐는 그의 손을 못 본 척하며, 나는 소매에서 대충 잡히는 것을 꺼냈다. 사과였다.

-드실래요?

섭회상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받아들었다.

-너는?

나는 대충 소매에서 또 잡혀나온 사탕을 입 안에 넣고 굴렸다. 혀 끝에서부터 퍼지는 단맛이 어쩐지 어색했다. 내가 사과 먹고 이건 섭회상 줄걸.

-종주님은 단맛을 좋아하시죠.

-단맛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니?

-전 별로 좋아하진 않는데요. 어렸을 적부터 안 먹어버릇해서 그런가.

-그럴리가. 단 걸 좋아하는 건 사람의 본능이라구.

-아닌 것 같은데......

-맞다니까? 사람이 본능적으로 쓴 맛을 피하는 것과 같은 거야!

한참 그런 실없는 이야기를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산 중턱이었다. 토론이라고 감히 칭해도 좋을 대화의 흐름 때문인지, 아니면 운동 때문인지, 섭회상의 얼굴에 보기 좋게 혈색이 올라 있었다. 그가 한 손에는 부채를, 다른 한 손에는 아직 한 입도 베어물지 않은 사과를 든 채 헐떡이는 것을 나는 즐거이 바라보았다. 어느새 입 안의 사탕은 절반 정도 크기로 줄어들어있었다.

-잠깐만.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쉬었다가 가자.

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다시 천을 깔아주었다.

이게 종주인지 도련님인지, 아니면 공주님인지. 나는 정오를 한참 지난 게 분명한 샛노란 태양을 올려다보다가 섭회상에게 물었다.

-요 종주는 돌아갔을까요?

섭회상이 사과를 베어물며 새침하게 코웃음을 쳤다.

-그럴 리가. 지금쯤 잔뜩 골을 내면서 차를 대접받고 있으실걸. 아마 내일까지도 안 돌아가실 거야.

-그래요? 그럼 왜......

섭회상과 내가 여기 와 있단 말인가? 어차피 섭회상이 요 종주를 만나야 한다면?

-그냥.

섭회상이 사과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그냥, 너와 이렇게 있고 싶어서 온 거야. 요 종주님은 반쯤 핑계였고.

나는 이걸 좋아해야 할지 어째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섭회상이 말했다.

-좋다.

그리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나는 섭회상이 아직 뚱뚱한 사과를 낙엽더미 위에 내려놓는 것을 바라보았고, 섭회상이 사과즙이 묻은 손을 내려다보며 울상 짓는 것을 보다가 물병을 건넸다. 섭회상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이건 언제 챙겼어?

-종주님 먹 가실 용으로 챙긴 건데요.

섭회상이 맹하니 눈을 깜박였다. 그럴 줄 알았다. 먹과 벼루, 텅빈 연적만 챙기고 물은 안 챙긴 거지. 그가 부끄럽다는 듯 웃었다.

-정말 너 없으면 어떡하지, 밀아?

어떡하긴.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처럼 잘 살 거면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막상 내가 섭회상을 떠날 것을 생각하자 가슴 한 구석이 뻥 뚫린 것처럼 스산했다.

-다람쥐다!

때마침 나타난 다람쥐 덕에 그 스산함은 아주 잠시였지만.

지금쯤 겨울잠에 들었어도 이상하지 않은데 이상하게 나와있는 다람쥐는 낙엽 사이에 파묻혀 발견하기조차 쉽지 않았다. 섭회상이 다른 건 몰라도 눈은 정말 좋은 모양이었다. 다람쥐가 재빠르게 사라지는 대신 자기가 묻었던 도토리를 찾는 것인지 똑같은 나무를 오르락내리락 하기만 해서 섭회상과 나는 제법 느긋하게 그 조그만 생명체를 구경할 수 있었다.

-쟤 왜 저러는 걸까요?

나도 모르게 숨죽인 목소리로 묻자, 섭회상이 마찬가지 속닥거리며 대답했어.

-모르겠어.

우리는 그렇게 잠시동안 다람쥐를 구경했다. 몇 번 더 나무를 오르내리던 다람쥐는 곧 나무 구멍 중 하나로 쏙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섭회상과 나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쉽다. 아까 그 다람쥐를 그리는 건데.

-잡아올까요?

그러면서 입 안에 작게 남은 사탕을 씹자, 섭회상이 겁먹은 듯 나를 힐끔거렸다.

-아니.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겨울잠 자러 간 걸텐데, 자게 놔 둬.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은 뭘 그리시게요?

-글쎄. 아직 잘 모르겠어.

그러면서 옷소매를 팔랑거리는 섭회상에게 나는 사탕을 건넸다. 섭회상은 그것을 곧장 입 안에 까넣는 대신 품에 넣었다. 그 모습을 보다가 나는 물었다.

-종주님도 어릴 적에 사탕 좋아하셨나요?

내 질문을 방금 전 토론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했는지, 섭회상이 도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단 걸 싫어하는 어린애는 없다니까?

-그렇겠죠?

갑자기 든 생각인데, 금단이라는 건 꼭 사탕을 닮았다. 동그란 것도 그렇고, 귀한 것도 그렇고. 스무 해 전 금단은 몰라도 사탕 하나쯤은 남동생의 무덤에 묻어줄 수 있지 않았을까. 남동생의 기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불현듯 떠올리며, 나는 최대한 태연하게 말했다.

-애들 좀 사다줘야겠습니다.

-애들?

보통은 사제라고 말할 텐데, 섭회상이 부정세 그 누구의 스승도 아닌 이상 이걸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문하생들 중에 아직 어린 애들 많잖아요.

섭회상이 알아들었다는 듯 작게 탄성을 흘렸다.

-그래. 다들 열심히 수련하는데 가끔은 선물도 줘야지. 내가 사람 시켜서 나눠주도록 할게. 그래도 내가 명색이 종주니까.

명색이 종주인 게 아니라 그냥 종주 아니야? 나는 섭회상의 발밑에 밟히는 낙엽들을 보다가,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하늘이 정말 너무도 파랬다. 나는 생각나는 대로 내뱉었다.

-하늘 정말 파랗네요.

-그러게.

-보통 벌목도 이때쯤 한참 물올리는데.

섭회상이 나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펼쳐져 있는 그의 부채가 느리게 팔랑거렸다.

-그러고보니 네 부친이......

-벌목꾼이요.

대답하고 나서 나는 나도 모르게 작게 웃었다.

-말이 벌목꾼이고 나무꾼이지, 평소엔 농사짓다가 이쯤 돼서 나무 베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 얼굴 뵐 일이 자주 없었네요. 봄 여름 가을에는 농사 짓느라 바쁘고, 겨울엔 나무 베러 이 산 저 산 돌아다니시니 뵐 일 없고요.

-아버지들이 바쁜 건 어디나 다 똑같나보구나.

그러면서 섭회상이 빙그레 웃었다. 그가 위로 손을 뻗자 입구 넓은 소매가 흘러내리며 흰 손목이 드러났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는 듯했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근처의 나뭇가지를 꺾어들었다. 나는 그가 손 끝으로 그 나뭇가지를 돌리다가 떨어뜨리는 것을 보며 말했다.

-어쩌면 저희 아버지가 벤 나무가 지금 부정세 탁자나 가구로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아버지가 흑단목 같이 귀한 나무를 베지는 않았고, 부정세의 뼈대는 엄청 오래되어 보이니 아마 거기 아버지의 손길이 닿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기해.

-뭐가요?

떨어지고 밟힌 나뭇가지에서 시선을 올리자, 섭회상이 멈춰선 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가 하마터면 평생 못 만났을 수도 있는 거잖아.

-그렇죠.

-그 반응은 뭐야.

실망한 듯 입술을 삐죽이는 섭회상을 보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말했다.

-잘 사셨을 겁니다. 저와 만나지 않으셨어도.

오히려 그 편이 더......

-뭐?

눈을 깜박이면서, 본능적으로 나는 내가 잘못된 대답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 멍하니 서 있는 사이,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먼저 걸어나가는 섭회상이 누가 봐도 마음이 상한 게 분명했다.

어떡하지. 나는 섭회상을 따라 걸으며 아무것도 없는 주위만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선선하고 시원하던 공기는 온데 간데 없이 숨이 턱턱 막혔다. 그걸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일단 사과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나는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섭회상은 대답이 없었다. 나는 거리를 둔 채 그를 따라가며 이어서 말했다.

-저는...... 제가 더 일찍 부정세에 왔다면 좋았을 거란 생각을 매일 해요.

섭회상이 멈춰섰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자니, 내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하지만 종주님은 그게 아니어도 괜찮다는 말이었습니다. 종주님 기분을 상하게 하려던 게 아니었어요. 정말이에요.

심장이 무겁게 쿵쿵 뛰었다. 섭회상이 나를 돌아보는 그 찰나의 순간 동안에는 내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오는 것 같았다. 섭회상은 눈을 깜박이더니......

웃었다.

청량한 웃음소리가 가을 산에 울려퍼지는 게 너무 현실성이 없어서, 나는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그가 나에게 다가와 내 팔을 붙들 때까지.

-왜 그렇게 진지해, 밀아. 정말 너는 미워할 수가 없다. 그래서 조금 슬프네.

엉겁결에 그를 따라 걷기 시작하면서, 나는 눈 앞에 날리는 그의 검은 머리카락을 그저 바라보았다.

-나도 매일 생각해. 너를 아주 일찍 만났다면 어땠을까 하고. 하지만 만약을 계속 생각하는 건 네가 말했던 것처럼 무의미한 일일테지.

-제가 그런 말을 한 적 있습니까?

섭회상은 대답 대신 다시 웃었다. 웃음소리가 잦아들자, 곧 주변에는 바람 소리와 새소리, 낙엽밟는 소리가 다였다. 침묵 속에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나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깨닫곤 잠시 멈춰섰다.

-종주.

-응?

-길 아시나요?

물론 길을 잃어버린다고 해도 어검을 해서 부정세로 돌아가면 되니 문제는 없지만, 괜히 또 이상한 곳에 들어서게 되는 건 사절이었다. 또 어디 폐광산을 지나게 된다거나 하면......

-밀아.

-예?

-여기 우리 선산인 건 알고 있지?

그렇긴 한데.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을 못 하자 섭회상은 부채 끝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큰 나무는 자체로 운치가 있기도 하지만, 이정표가 되어주어서 참 좋아.

자세히 보자 산 반대편의 절벽 쯤에 잎 없이도 아주 거대한 고목이 하나 있었다. 지난 밤엔 밤이라 못 보았나 보다.

-저쪽 반대편이 네가 있던 그 광산이야.

그런가보다 하며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나는 새삼 궁금했던 것을 하나 물을 수밖에 없었다.

-보통 선산에서 광산 채굴을 합니까?

-광산이 먼저였고, 대부분 폐광산이 되었을 때부터 이곳이 선산으로 쓰이게 된 거라 그래. 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충분히 이상할 만하지.

이젠 아주 자연스럽게 쉴 자리를 찾아 앉는 섭회상을 바라보다가, 나도 그의 곁에 앉았다. 사실 폐광산이 된 뒤에 선산이 된 것도 충분히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섭회상이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사실 우리 가문에서 안 이상한 게 뭐가 있겠니. 시조가 백성인 것부터 우리 가문이 참 특이하긴 하지?시조가 황족인 난릉 금씨와는 완전 정반대인데, 같은 사대세가 반열에 있는 것도 나는 어릴 적부터 정말 신기했어.

나는 별다른 대꾸를 할 수 없었다. 문득 발치에 핀 천남성이 보여 그 붉은빛 열매를 바라보았다.

-고소 남씨는 자기 선조의 일생을 누벽에 크게 새겨놓은 것 아니? 우리 가문은 그런 게 없어. 워낙 그 분에 대한 정보가 전해지는 게 없어서.

잠시 말을 멈췄던 섭회상이 다시 말을 이었다.

-굉장히 의지가 강한 분이셨다는 것만 알아. 당연하게도, 청하 섭씨가 세가로 인정받기까지의 과정이 순탄치 않았거든. 우리 가문이 다른 가문들에 비해 역사가 긴 게 그 반증이지. 어쩌면 외부인에게 친절하지 않은 분위기도 그것 때문인지 몰라.

정말 그것 때문만일까. 윤기나는 붉은 열매를 보다 보니 문득 섭회상 방에서 본 붉은 책이 떠올랐다.

바람이 불고 가득 가슴 속 한 군데가 서늘해졌다. 그러고보니 그것에 대해 한 번도 제대로 묻지 못했다. 그야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까? 내가 정정당당히 그 책을, 그 안의 주술본을 발견한 것도 아닌데.

섭회상은...... 그는 정말 섭명결을 되살리는 주술을 쓸 생각일까? 왜 이제 와서 그럴까 하는 의문과 애초에 그가 그 주술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들며 내 관자놀이를 둔탁하게 찔러댔다.

어쩌면 그가 아주 오래 전에 그 주술을 알았다가 포기한 것인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게 나에게 그리 반가운 선택지도 아니었다. 그 심정을 생각하면.

그때 갑자기 섭회상이 탄성을 흘렸다.

-어? 천남성이네.

나는 섭회상이 열매를 향해 손을 뻗을까봐 순간적으로 긴장했다. 피부로 쉽게 스며드는 독은 아니라고 해도, 혹시 천남성 열매가 섭회상 손에서 터지기라도 하면 그가 안 다칠 거란 보장이 없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섭회상은 무작정 손부터 뻗는 대신 이야기했다.

-천남성으로 만든 독이 굉장히 효과가 좋다지? 알고 있니?

-종주......

-너 정말 너무하다. 어떻게 아느냐는 얼굴이네. 내가 이걸 아는 게 그렇게 신기해?

그러면서 섭회상은 또 웃었다. 그러고보니 그는 아까부터 조금 이상할 정도로 기분이 좋아보였다. 그러나 묘하게 분위기는 가라앉아있어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옷소매에서 또 대충 잡히는 것을 꺼내들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신기할 일은 아니죠. 종주님은 박학다식하시잖습니까.

-아부할 필요 없어.

섭회상이 고개를 저었다.

-다 잡지식일 뿐인걸. 형님은 늘......

말을 이으려던 그가 멈칫하는 이유를 나는 알 수 없었다. 그가 작게 웃으며 부채를 펼칠 때까지.

-하기야, 계명구도라고 하니 뭐든 다 익혀두면 나중엔 쓸 일이 있는 법이지. 내가 간간이 형님을 도와드린 적도 있었어. 말 그대로 간간이일 뿐이지만.

나는 시선을 내려 내 손에 들린 과자를 바라보았다.

-적봉존께선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저도 아부한 게 아니고요. 자, 드세요.

섭회상은 내가 자꾸 자기를 먹이려는 게 우습다고 종알거리면서도 내가 건넨 과자를 우물거리며 씹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보다 보면, 좋아하는 사람에게 뭔가를 먹이고 싶은 건 인간의 본능인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섭명결도 섭회상에게 맛있는 것들을 많이 사 먹였을까. 나는 내 동생에게 그러지 못 했는데.

섭회상과 함께 있다 보면 평소에 묻어두었던 기억들을 떠올리게 된다.

-너는 왜 안 먹어?

그 말에 눈을 깜박이며 나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이제 슬슬 정점을 향해 가는 노란 태양을 잠시 바라보다가, 섭회상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림도 그릴 생각이시면 걸음을 좀 서둘러야 하겠는데요.

나는 그가 느긋하게 걷는 게 묘미라며 나에게 일장연설을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게 또 한참을 걷는데, 침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섭회상이 또 말문을 뗐다.

-나 항상 궁금했던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

-네.

섭회상이 부디 내가 대답해줄 수 있는 걸 질문해줬으면 하던 나는 그의 질문에 못 참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네 할머니는 어떤 분이셨어?

-저도 대답해드릴 수 있으면 좋겠네요.

무의식적으로 담배를 찾으려던 나는 혹시 또 섭회상이 산불 나면 어떡하냐고 울상을 지을까봐 주먹을 말아쥐었다.

-좀...... 이상한 사람이었어요. 미쳤달까요. 미친 사람을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패륜이라면 할 말이 없지만, 미쳤다는 말로밖엔 표현이 불가능한 것도 사실이다. 미친 게 아니라면 내가 할머니의 선택을 어떻게든 이해할 수는 있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으니까. 말 그대로 불가사의했다.

-저도 그 피가 흐르긴 하지만, 아무래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즐거웠던 기억들이 있을 것 아니니.

-그렇긴 하죠. 어렸을 때 제가 좀...... 정신이 없었어서, 맨날 혼났거든요.

-혼난 게 좋은 기억이야?

-그냥, 그때는 뭐든 다 우습고 재미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집에 들어가 봐야 무서운 할머니와 아픈 남동생밖에 없어서, 별로 들어가고 싶지가 않았어요. 물론 그런 생각이 든 순간 다시 집으로 갔지만요...... 미안해서. 생각해보니 어렸을 때는 말을 좀 잘 했던 것도 같습니다. 남동생한테 밖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주면 좋아하면서 웃었거든요.

말을 마치자 정적이 흘렀다. 분위기가 가라앉을 것을 알면서 왜 굳이 내가 이 이야기를 꺼냈을까. 그런 생각을 하려던 찰나, 섭회상이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아왔다.

-그래서?

그렇게 묻는 그를 바라보다가, 나는 고개를 돌려 내 발 밑을 바라보았다. 걸음을 뗄 때마다 잘게 부서지는 낙엽들을.

-그냥, 그것뿐입니다. 할머니가 간간이 옆에서 말을 거들어주면 그게 또 내심 좋았던 것 같아요. 어쩌면 저는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 좋은 것 같기도......

방금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지. 나는 잠시 멈춰 서서 섭회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섭회상은 내 생각을 읽은 듯 했다.

-나도 속을 알 수가 없어?

-네.

아니라고 대답할 수는 없지. 어떨 때는 정말 저 머리에 뭐가 들었나 싶고, 어떨 때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싶으니까. 지금도 나는 섭회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너는 역시 참 이상해.

-그래서 싫으십니까?

입술이 움직이는 순간 잘못 말했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이미 나가버린 말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망했다고 속으로 중얼거릴 뿐.

마비된 이성이 이대로 도망칠까 생각하는 동안, 섭회상이 내게 몸을 붙여와서 난 아예 굳어버렸다.

-그럴 리가 있겠니.

그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둘만 있으니까 정말 좋구나.

-예?

그동안 계속 둘만 있었잖아.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굳어버린 뇌를 깨우기 위해 애썼다.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걸어나가려는데, 이미 발걸음이 삐걱거리는 게 느껴졌다. 정말 망한 것이다.

-평생 너와 단둘이 이렇게 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정한 그 말씨 때문인지, 아니면 말의 내용 때문인지 갑자기 심장이 좀 심하게 아파와서 나는 나도 모르게 가슴께를 부여잡았다. 걱정스런 얼굴로 더 가까이 얼굴을 가져다대는 섭회상 때문에 정말이지 죽을 것 같았다.

-갑자기 어디 아픈 거야?

-아뇨. 아닙니다.

너무 좋으면 심장이 이렇게 아픈가 봐요. 그 말은 못 하고 최대한 멀쩡한 척을 하려는데, 섭회상이 이미 다 안다는 듯이 웃음을 흘리는 것이 아닌가. 그리곤 내 귓가에 불쑥 속삭였다.

-얼굴 빨개졌다.

아무말도 못 하는 나에게, 그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입을 맞춰왔다.

입맞춤이라는 행위 자체가 나에게 도무지 익숙하지 않은 것과 별개로, 참 이상한 일이었다. 보통은 이런 식으로 입을 맞추거나 하면 더 몽롱해지고 가슴이 뛰고 하지 않나? 나는 왜 더 차분해지는 걸까.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나고 섭회상이 내게서 입술을 뗐을 때, 나는 입술에 스치는 차가운 바람을 느끼며 긴 숨을 내쉬었다. 섭회상은 잠시 동안 그런 나를 바라보다가, 나를 잡아끌었다. 나는 그의 얼굴도 붉어져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뛰어가자!

-예?

뭐지. 나는 섭회상을 따라 달리며 내가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를 생각했다. 섭회상과 달리기는 고양이와 수영만큼 어울리지 않는 두 개념이었는데, 지금 우리는 낙엽진 산을 달려 올라가고 있었다. 물론 얼마 뛰지 않아 섭회상이 헐떡거리며 멈춰서긴 했지만. 나는 아까보다 더 붉게 상기된 그의 얼굴을 살피다가, 나무에 기대어 숨을 고르는 그의 등을 조심스럽게 토닥이다가 했다. 아무리 금단이 있다곤 하지만, 슬슬 나이도 생각해야지. 몸 안 좋은 사람이 갑자기 웬 달리기는 달리기란 말인가.

-그냥 뛰고 싶었어.

가끔씩 섭회상은 이런 식으로 내 생각을 정확히 읽곤 했다. 진짜 독심술 할 줄 아나? 이 생각까지 읽었는지는 모르지만, 섭회상이 밭은 숨을 내쉬며 웃었다.

-이렇게 뛰어본 적은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아. 있지, 밀아. 요 종주님은 지금쯤 부정세에서 뭘 하고 계실까?

그제야 나는 섭회상과 내가 요 종주를 피해 이 산을 오른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글쎄요. 아직 궁둥이 붙...... 아니, 제 말은.

섭회상은 또 웃음을 터뜨렸다.

거의 노을이 질 때쯤 해서 섭회상과 나는 고목 앞에 도착했다. 참나무였다. 특별한 나무는 아니지만 넉넉잡아 성인 남자 다섯 명 정도의 몸집을 가진 데다 키도 까마득한 나무는 새까맣게 죽은 표면 때문인지 어째 더 위압감을 주었다.

-사실 여기 와본 적 있어. 어릴 적에 형님과 함께 말이야.

나는 시선을 돌려 섭회상을 보았다. 그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나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이야기 했었니? 형님과 함께 놀러갔다가 형님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매를 맞으신 적 있다고. 그때 여길 왔었어. 그래서 네가 산에 가자고 했을 때 조금 기분이 이상했어. 특별했다고 해야 할까...... 응. 맞아. 그거야. 너는 특별해. 처음부터 그랬어.

그가 몸을 돌려 절벽 쪽으로 다가가는 모습을 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은은한 주황빛 하늘 아래 홀로 서 있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섭회상의 시선이 닿아있을 법한 절벽 너머를 바라보는데, 섭회상이 말했다.

-형님은 여기서 말씀하셨어. 자기가 나를 지켜주겠다고. 지금 든 생각인데, 난 지켜주겠다는 말은 살면서 많이 들었지만 그 말을 해본 기억은 한 번도 없다? 나 주제에 누군가를 지킬 형편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렇잖아. 하지만 너에게만은 꼭 말해주고 싶어. 너를 지키겠다고까지는 아직 말 못 하지만, 내가 너를 지키고 싶다고는...... 지금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 해.

말을 마친 섭회상이 나를 뒤돌아보았다. 나는 한 폭의 그림 같은 눈 앞의 사람을 그저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항상 이랬다. 항상 그는 나에게 너무 과분한 것들을 주었다. 그가 이럴수록 나는 더 뼈아프게 내가 누구인지를 깨달을 뿐인데. 그가 부르는 건 내 진짜 이름도 아니고,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부정세가 아니다. 내가 종주라 불러야 할 이도 사실은 그가 아니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행복했다.

행복했다. 차가운 산바람이 내 머리를 아무렇게 헝클고 지나갔지만 나는 가슴께에서 퍼지는 뜨거운 무언가에 더 정신이 팔려있었다. 이 감정만이라도 눈 앞의 사람에게 전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러면 그 순간만큼은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그 보잘것없는 인사 이면에 담긴 감정을 부디 섭회상이 알아주기를 바랐다. 그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욕심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섭회상이 말없이 미소지어 보였을 때, 나는 내 소원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

섭회상의 예상대로 요 종주는 다음날까지도 남아있었고, 섭회상은 수사를 서른 명이나 뜯겼다. 평양 요씨 측에서 보수를 제공하겠다곤 했지만, 택도 없는 계약이었다. 서류를 처리하던 내가 참다 못해 가슴을 치는 동안 섭회상은 예의 실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쁜 일 때문에 오신 것도 아니고, 다음 일정 때문에 얼마 안 있다가 돌아가셨으니 나는 만족해. 그나저나 너는 안 혼났니? 밀아?

세상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곳이다. 저렇게 착하고 약한 사람이 이용당하는 곳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사님도 요 종주는 싫으셨나 봅니다. 차라리 하루 더 있다가 왔으면 좋았을 거라는 눈치셨는걸요.

-그래?

어쩐지 묘한 얼굴로 부채를 펄럭이는 섭회상을 보다가, 나는 문득 떠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어제 그림은 안 그리셨네요?

화구 은근 무거웠는데, 안 그릴 거면 왜 들고 가게 했담. 속으로 중얼거리던 나는 돌아온 섭회상의 대답에 그대로 모든 생각을 중지해야 했다.

-그 시간에 네 얼굴을 보는 게 더 현명한 선택 같아서.

그러면서 턱을 괸 채 나를 올려다보는 그는 아무래도 나를 죽이려고 작정을 한 것 같았다. 그가 아닌 다른 이유로 내가 죽는 게 상상이 가지 않아서, 나는 또 심장을 부여잡아야만 했다. 분명 다 알면서 저러는 거지.

섭회상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입을 모으는 사람들이야말로, 그들이 손가락질하는 일문삼부지가 어떤 사람인지 정말 조금도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을 그들에게 알릴 자신이 없었다. 왜냐하면 나도 몰랐으니까. 저 예쁜 얼굴에 담긴 감정을, 저 미소의 이유를.

하지만 몰라도 좋았다. 얼굴이 뜨겁다 못해 익은 게 느껴졌지만, 나는 섭회상의 시선을 최대한 당당히 마주했다.

그는 알까? 나 또한 누군가로부터 지켜주고 싶다는 말을 들은 건 어제가 처음이라는 사실을. 그 사실을 그가 몰라도 좋았다. 그냥, 그가 좋아서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가 그 사실을 안다는 것만은 정확히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