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hygall.com/511095972
view 2460
2022.12.02 23:24
진정령, 난백 ㅅㅍ


1-1: https://hygall.com/510097371
1-2: https://hygall.com/510098997
2-1: https://hygall.com/510265342
2-2: https://hygall.com/510266758
2-3: https://hygall.com/510576125
2-4: https://hygall.com/510578287
외전1: https://hygall.com/510708761
3-1: https://hygall.com/510709361
3-2: https://hygall.com/510884992
3-3: https://hygall.com/510886315



처음에 나는 휴가를 한 달 달라고 했지만, 섭회상이 네 고향이 무슨 서역이라도 되냐면서 멋대로 보름치 휴가를 주었다. 청하에서 하동으로 이동해 거기서 배 타고 운몽까지 다녀오기에는 조금 빠듯한 시간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으로 운용해볼 밖에.

-가지 말란 말은 못 하지만...... 금방 와야 돼?

-당연하죠.

누가 보면 내가 식 갓 치른 아내 두고 전쟁터 나가는 줄 알겠다 싶었다. 여느 때처럼 내 방에 멋대로 들어온 섭회상에게 나는 여상히 웃어보였다. 나중에 내가 영영 떠나면 그때는 어떡하려고 저럴까 싶으면서도, 어차피 없으면 없는대로 그리우면 그리운 대로 살아지는 게 사람이라는 걸 알아서 굳이 걱정을 사서 하지는 않기로 했다. 사실 예전 다른 가문에서처럼 좋게 끝날 수 있을 것인가를 걱정해야 하기는 한데. 그런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뒤에서 안아오는 섭회상 때문에 그대로 굳었다. 그는 별것 하지 않았다. 내 뒷목에 지그시 자기 입술을 눌렀을 뿐이다. 그리곤 나를 놓아주었다. 그러나 훅 끼쳐온 그의 향기는 내 코끝에서 그렇게 빨리 떠나지 않았다.

-잘 다녀와.

그렇게 말하는 그의 시선이 평소와 다르게 무척 진중해서, 나는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이대로 돌지 않으려면 섭회상 곁을 떠나 바람을 좀 쐬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하동으로 갔다. 하동은 정말 특색이랄 것이 없는 그저 평범한 농촌이다. 당연히 죽은 내 가족들의 무덤에는 비석 따위 없었다. 동네에서 암묵적으로 무덤으로 쓰자고 정해놓은 곳에 가면 어림잡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어머니와 아버지가 묻힌 곳인지, 남동생이 묻힌 곳인지, 할머니가 묻힌 곳인지 알 수 있을 뿐이었다. 거기서 제를 올린다는 것도 사실 그래서 큰 의미가 없었다. 별것도 아닌 여기 음식 먹느니 저승에서 사 먹으라고 지전이나 태우는 게 낫지. 나는 술이나 한 병 가져와 거기 뿌렸다.

모르는 사람들이 본다면 나를 조상 제사도 안 올리는 천하의 패륜아라고 욕할지 모르지만, 할머니가 살아있을 때도 딱히 제사상을 차리거나 위패를 모시는 일은 없었고 나도 만약 자식을 가지게 된다면 굳이 내 제사를 성대하게 차리라 당부할 생각 없었다. 윤회의 반열에 들면 드는 대로 음식 따위 필요 없을 것이고, 귀신이 된다면 되는 대로 필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뭐 후손이 공덕을 열심히 쌓고 조상을 잘 모시면 조상의 혼이 덕을 본다고 하지만, 그렇게 얻을 덕이면 그냥 안 얻고 마는 게 낫지 않겠는가. 적어도 할머니는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물론 그게 할머니의 진심이었는지 알 길은 없다. 할머니는 부모님이 살아계실 적부터 별로 말도 없고 표정 변화도 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하동 부씨에 들어간 뒤로는 얼굴 몇 번 보지도 않았고, 죽기 전 사 년간 함께 지내긴 했지만 잠만 함께 잤다 수준이었다.

할머니를 향한 내 마음은 평생 정리되지 못할 것이어서, 나는 그 채로 묻었다.

과거로 돌아가도 나는 아무말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무표정한 얼굴에 대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마 평생 알 수 없겠지. 그 얼굴만 생각하면 여기, 속이 들끓었다. 가슴을 조이는 그 감각을 설명할 수가 없는 건 내가 말재주가 없어서일까.

같은 일환으로, 남동생의 가는 목을 멍하니 바라보던 어린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문제는 생각을 하면 할수록 속에서 곪아만 가니 그냥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상책이다. 난 남은 술을 내 입에 털어넣었다.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풀이 듬성듬성 자라있는 묘지는 머리 빠진 늙은이처럼 어쩐지 처량한 느낌만을 주었다. 죽음은 어떤 식으로든 미화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그 풍경에서 새삼스레 깨달았다. 무덤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고. 그런 건 산 사람을 위한 것이다. 죽은 자는 이미 가고 없기 때문에.

미련 없이 나는 하동을 떠났다. 즉 내가 하동에서 운몽행 배를 탄 것은 부정세를 떠난지 이틀이 채 되지 않아서의 일이었다. 사실 나는 척박한 청하를 욕하면서도 막상 물가는 좋아하지 않았다. 물이 있다는 건 습하다는 이야기이고, 습하면 벌레도 많이 꼬이는데다 사람도 축축 쳐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운몽의 연화오 거기는 돈 준대도 가서 일하기 싫었다. 호수 위의 저택이라니, 까딱하다간 빠져서 물귀신 되기 십상이지.

운몽은 이름에 걸맞게 어쩐지 외지인을 좀 멍하게 만드는 곳이라, 내가 그 지역에 관해 유일하게 좋아하는 건 그곳 음식뿐이다. 간이 슴슴하기 그지없는 청하쪽 음식은 아무래도 내 취향은 아니었다. 음식은 짜고 맵고 뜨거워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뱃사공 없이 나아가는 배 위에 앉아 먼 곳을 바라보았다. 수진계와 그 바깥이 엄격히 구별된다고는 하지만, 영력만 있으면 뱃사공도 필요 없다. 금단이라는 게 생각해보면 거의 뭐 만능 열쇠나 다름 없는 것이다.

그러니 아버지가 어렸을 적 수사가 되고 싶어했다는 거겠지. 그러니 할머니도 동생을 죽여가며 기어이 나를 하동 부씨 문하생으로 들여보낸 것일 터였다. 대가가 인륜을 저버리는 것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그건 나름 괜찮은 투자였고 실제로 성공을 거뒀다. 내가 정식 수사가 된 뒤, 적어도 돈 때문에 더 비참해지지는 일은 없었으니까.

그러나 애초에 할머니는 그 돈에 손조차 대지 않았는걸. 그렇게 끝까지 나를 비참하게 했다.

그럼에도 내가 감사해야 할까? 수련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확실히 아버지 어머니와 비슷하게 살다가 죽었을 것이다. 운몽까지 가는 길에 나는 내가 살 수도 있었을 보통의 삶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그러다보면 시간만큼 빠르게 배가 흘렀다. 배를 타고 운몽으로 가는 가장 정석적인 행로는 연화오 앞의 부두에 닿는 것이라, 나는 내가 속으로 욕하던 선부 앞에 도착해 기지개 한 번 켜는 것으로 멋쩍음을 털어냈다. 연화오에서 일해본 적은 없지만, 그 근처에서 일하며 듣기로는 세속에서의 평가가 어떻든 강씨 수사들은 자기 종주에 대한 충성도가 장난 아니라는 것 같았다. 그리고 들어보니 금광요가 조카 양육과 관련해서 강종주와 항상 은은하게 반목하는 것 같던데, 강종주 성격 더러운 것이야 다 아는 일이지만 금광요 성격도 장난 아닌 것을 아는 나로선 그 둘을 양육자로 둔 금씨 꼬마에게 심심한 애도의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들어보니 걔도 한 성깔 한다던 것 같기도.

금광요가 만약 금린대로 곧장 오지 않았다면, 그냥 자기가 태어난 운몽에서 활동을 시작했다면 이야기가 얼마나 많이 달라졌을까? 연화오 담벽을 따라 걸으며 나는 이미 수차례 해봤지만 결론은 단 한 번도 내지 못한 생각에 골몰했다. 운몽 강씨와 난릉 금씨는 선대 종부들 때문에 서로 나름 각별한 사이였으니, 금광요가 그걸 못 견뎠을 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하늘에는 벌써 노을이 지고 있었다. 절이 방문자들을 돌려보낼 때가 다 되었다는 말이니, 객잔부터 잡아야겠군.

나는 며칠 전부터 입에 당기던 운몽 음식을 주문해 양껏 먹고 아무 생각 없이 잠을 잤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곧장 관음묘로 향했다. 선선하지만 어딘가 습한 아침공기를 마시며 이제 막 물건을 푸는 운몽 번화가를 걷자니, 내가 정말 완벽한 이방인이 된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운몽은 명실상부 상업 도시이고 돈이 잘 풀린다는 것은 유흥이 발달했다는 말이라, 지금 관음묘가 들어선 자리에 기루가 있는 것을 어렵잖게 상상할 수 있었다. 대부분 산 좋고 물 좋은 데 있는 절과 다르게 번화가 한복판에 있는 관음묘는 어쩐지 금광요라는 인간을 너무도 닮아있어 나는 올 때마다 처절함마저 느꼈다. 그러니까, 이 절은 맹요라는 이름을 뒤로 한 금광요를 닮았다. 이곳이 금광요가 창기의 자식이라 구박받으며 유년시절을 보내온 곳이란 사실을 아무도 모를 것이다. 다들 성대하고 아름다운 절의 정경만을 기억할 것이다. 관음묘라는 이름조차 그들에겐 아무 의미가 없겠지.

이런 효자가 있을까? 나는 거대한 관음보살상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누구는 어머니한테 술 한잔 뿌려드리는 게 제사 전부인데 누구는 어머니 얼굴을 본뜬 관음상을 조각해 세상 사람들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세워두었다. 효자로 어디 문헌에 이름을 올려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관음상의 정체를 아무도 몰라야 한다는 게 문제다. 자기만 그 정체를 아는 기념비가 과연 의미가 있을까? 금광요는 심지어 사람들 이목 때문인지 여기 오지도 않는다. 마치 세상 사람들뿐 아니라 금광요 자신마저도 자기가 자기 과거를 덮었다는 사실을 잊은 것처럼.

절은 뻥 뚫려있는데도 향 냄새가 진동했고, 중추절을 맞이하려는 것인지 색색깔의 연등이 많이 달려있었다. 공양을 하러 온 것인지 기도를 부탁하러 온 것인지 모를 귀부인들도 여럿이었고 나처럼 평범한 옷차림을 한 사람들도 꽤 많아 절은 무척 북적거렸다. 나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 끼어 절을 올린 뒤 향을 피웠다. 사실 금광요의 어머니는 나와 일면식도 없다. 그러나 나는 내가 여덟 살 때 비명횡사한 내 어머니보다 차라리 눈 앞에 있는 관음보살이 더...... 와 닿았다. 적어도 후자는 실체가 있잖은가. 솔직히 이 점에선 금광요를 존경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 어머니 얼굴을 기억해 조각으로까지 남기다니. 나는 내 어머니와 아버지의 얼굴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데.

문득 나는 불경 외는 소리 너머로, 그림의 미학에 대해 설명하던 섭회상의 목소리를 환청처럼 들었다. 그림은 사람의 가장 아름다운 때를 포착해 간직할 수 있게 해준댔지. 그러나 그 이론도 여기 적용하긴 어렵다. 그 아름다운 때랄 게 없는 삶도 있는 것이다. 여느 촌부들과 마찬가지로 내 어머니에게는 자식을 양육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아버지의 벌이가 늘 부족한 건 아니었지만 풍족하지도 않았고, 아픈 자식이 있으니 어머니도 항상 뭔가를 해야 했다.

기억 속 어머니는 아침저녁 노동으로 시달리며 늘 피곤한 얼굴이었다. 가끔 나를 안아주거나 웃어주거나...... 그게 다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자기가 세상에 내놓은 생명을 책임지기 급급해서 정작 그들 자신이랄 게 없었다. 그래서 내가 그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대부분이 이런 집들이기에 이건 비극이라 할 수 없었다.

진짜 뭐 이런 인생이 한둘이겠나. 나는 굳이 사서 나를 동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관음묘를 나서며 나는 문득 처음 이곳에 발을 들이던 때를 생각 했다. 금광요는 늘 그렇듯 나에게 별다른 설명 없이 관음묘에 가서 자기 대신 향을 피워주겠냐고 달빛을 맞으며 씁쓸한 미소를 띤 채 말했고, 그게 아마 몇 년 전 중추절이었을 거다. 나는 자기 대신이라는 표현과 관음보살의 묘하게 익숙한 이목구비, 관음묘가 본래 사창가가 있던 지역을 밀어버리고 세워진 것이라는 정보를 통해 이곳의 의미를 유추해냈다. 그 뒤로 나는 금광요가 부탁하지 않아도 이곳에 자주 왔었다.

섭회상도 지금쯤 제사를 지내고 있으려나. 나는 사람이 한참 북적거리는 정오의 번화가를 누비며 새삼스레 궁금해했다. 섭명결과 섭회상이 이복형제라는 것은 아는데, 그리고 섭회상의 아버지가 온약한 때문에 주화입마로 죽었다는 건 아는데, 섭회상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어떤 사람이었을까. 섭회상이 어머니를 닮았다는 걸 보면 여리여리하고 맘 약한 사람이었을 확률이 높겠지. 아무리 수진계에 환갑까지 사는 인사가 드물다곤 해도, 어쩌다 그리 일찍 세상을 떴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장죽 끝을 입에 물었다. 벌써 섭회상이 보고 싶었다.

운몽의 공기는 청하와 정반대였다. 그나마 여름이 아닌 게 어디겠냐만, 가을이라도 딱히 덜 습한 건 아니라 나는 바람을 쐬기 위해 노점에 앉아 평범한 차를 한 잔 주문했다. 앉아서 차를 마시기보다는 그저 길거리만 멍하니 바라보는데, 아이들 모여서 노는 꼴이 꽤 재미있는 거라.

-네 이 녀석!

-형님, 고정하십시오.

수염 단 남자애가 두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이마에 흰 띠 두른 남자애가 착한 목소리로 달래고, 이마에 단사 찍은 남자애가 꽁지 빠져라 튀는 것을 보며 나는 하마터면 차를 뿜을 뻔 했다. 이제 겨우 일고여덟쯤 되어보이는 어린 아이들이 저런다는 건 섭명결이 금광요를 얼마나 빡세게 잡았는지를 증명하는 꼴이라 나는 소리내어 웃으면서도 어쩐지 서글퍼졌다. 사실 섭명결에 대한 내 감정은 잘 죽었다 절반 왜 죽었냐 절반이었는데, 각각 금광요 때문에 그리고 섭회상 때문에 느끼게 된 것이었다.

하여튼 애들이 노는 것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는데, 자세히 보니 삼존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손목에 보라색 손수건 두른 남자애도 있고 흰 띠 두른 애가 하나 더 있는 거 보면 삼독성수도 고소쌍벽도 다 재현된 것 같은데 보니까 일문삼부지는 없네. 뭐 비교군이 쟁쟁한 선문 명사들이니 당연하다 싶으면서도 어쩐지 입맛이 썼다. 사실 연기하기는 섭회상이 제일 쉬울 텐데. 부채로 얼굴 가리고 모른다는 말만 하면 되니까. 나는 한참동안 애들이 자기들끼리 누가 더 세니 티격태격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애들이 하나둘씩 내 시선을 의식하고 내 쪽을 힐끔거릴 때까지.

-이리 와 봐라.

나는 담뱃대를 내리며 애들에게 손짓을 했다. 애들은 서로 눈치를 보면서도 우물쭈물 나에게 다가왔다. 지나가는 탕후루 장수를 불러 하나씩 꼬치를 쥐어주니 다들 감사하다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 시간에 나름 소품까지 적당히 갖춰 놀고 있는 걸 보면 아주 못 사는 집 아이들은 아닌 것이라, 아이들이 제법 간단히 내 호의를 받아들이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나는 애들이 입술을 빨갛게 칠하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물었다.

-너희 중에 금자헌 없는 것도 없는 거지만, 지금 청하 섭씨 종주도 안 보이네? 적봉존. 대답해 봐. 네 동생은 왜 없어?

내 질문에 아이들은 붉어진 입으로 크게 소리내어 웃어댔다.

-일문삼부지요?

-그 사람은 안 멋있잖아요!

예상했던 대답이긴 하지만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나는 탁상 위에 앉아있던 차를 들이켰다.

-너희가 아직 뭘 몰라서 그래. 그 사람은 수진계 제일 가는 풍류공자라니까? 너희 풍류가 뭔지 알아? 모르지?

사실 나도 모른다. 일렁거리는 찻잔 안을 보면서, 나는 문득 섭회상이 먹 갈던 것을 떠올렸다. 벼루에 물 붓고 먹 가는 게 그리 아름다워야 하는 일이었을까. 검은 먹을 쥔 손가락은 희고 가지런하고 늘 그렇듯 고왔다. 내가 사준 붓에 먹물을 고루 묻혀 방금 떠오른 것이라며 시를 내려적는데 그 필치마저도 고왔지. 그림이야 뭐 말할 것도 없고. 정말로, 그가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나는 나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아이들에게 손을 내저었다.

-너희가 뭘 알겠냐.

-그럼 누님은 그 사람이 제일 좋은 거예요?

나는 내 눈 앞의 어리고 엉성한 사대세가 종주들을 둘러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사람이 제일 좋다.

-에. 이 누나 미쳤나 봐!

보라돌이가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외쳤다.

-머리가 어떻게 된 것 아니에요?

-뭐 인마?

-제일 멋있는 건 이릉노조를 죽인 삼독성수라고요!

그걸 시작으로 아이들은 서로 자기가 제일 멋있네 옥신각신대기 시작했다. 듣다 보니 웃겨서, 나는 소란이 조금 잠잠해진 뒤 하나씩 짚어주기로 했다.

-거기 적봉존. 넌 이미 죽었지. 고소쌍벽 너희는 상복만 입고 다니고 재미 없기로 수진계에 유명하다고. 삼독성수 네 성격 더러운 것도 유명하긴 마찬가지야. 그러니 너희 중에선 염방존이 제일 낫다. 하지만 제일은 역시......

-하지만 염방존은 사생아잖아요!

순간 누군가 머리통을 후려갈긴 것처럼 얼얼해져서, 나는 말 꺼낸 적봉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린 애들이야 뭣도 모르고 어른들이 하는 말을 따라하는 것이겠지만, 애초에 그것 자체가 수진계의 수준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한편 길거리 어린애들에게마저 이런 자잘한 모욕을 당해야 하는 금광요를 생각하면 기분이 완전 바닥을 찍었다. 나는 멀리 보이는 관음묘의 지붕을 한 번 보고는, 입 걸걸한 적봉존에게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너는 인마, 의형님이 돼서 그런 말을 하냐?

-누나야말로 일문삼부지가 제일 좋다면서요! 염방존 말고 일문삼부지 형인 제 편을 들어줘야죠!

-야, 나도 일문삼부지 의형이야!

-어쩌라고! 내가 너한테 물어봤어?

아이들은 또 다시 네가 맞네 내가 맞네 옥신각신하다가 멀리서 들려오는 점심 먹으라는 소리에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그렇게...... 탕후루 다섯개 값만큼 줄어든 돈주머니를 가진 사람이 되어 식어버린 찻잔 앞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때, 누군가 내 앞에 와서 앉았다.

-요즘 아이들 참 재미있지 않소?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붉은 색 질 좋은 비단 옷을 입은, 웬 나이든 여자였다. 옷차림을 보아하니 상인인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담배통에 새 담뱃잎을 욱여넣었다.

-그렇네요. 근데 그래서 어르신 취향은 누구입니까?

-내 눈에야 우리 운몽의 종주이신 삼독성수님이 제일이지.

재미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여자의 질문에 담배 연기를 뱉다 말고 잠시 멈칫했다.

-자네는 부정세 사람이지? 아까 아이들과 나누던 대화나 땋은 머리를 보면 알 수 있네.

생각해보니 내 머리는 여전히 섭회상이 땋아준 그대로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청하는 요즘 어떤가? 운몽에 자리잡은 뒤로 여길 떠나본 지가 워낙 오래 되어 말이지.

-청하야 늘 똑같죠. 흙먼지 날리고, 맨 광산 캐는 소리 들리고. 뭐 그럽니다.

-듣자 하니 요즘 거기 자리 잡은 상인들이 많다던데.

-그래요?

-섭씨의 모르쇠 종주가 외지 상인들에게 세금을 잘 걷지 않다보니, 거기 가서 물건 팔다가 아예 점포 차려버린 친구들 이야기를 간간이 들었네.

그러더니 여자는 강만음이 일반 사람들 사이에선 몰라도 상인들 사이에선 평판이 좋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대충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러다가 여자가 말을 마친 뒤, 물었다.

-그런데 삼독성수는 확실히 제정신 아니지 않습니까? 몇 년 전에 운몽 왔다가 누구 자전으로 묶어서 끌고 가던 걸 봤었어서......

그때 진심 먹던 차도 줄줄 흘리면서 쳐다봤었는데. 이미 머리 깨져서 피 나는 검은 옷 입은 남자를 개처럼 끌고 가는 자색 옷 남자와 표정 없이 그를 따르는 수사들...... 더 무서운 건 다들 수군거리긴 해도 놀라진 않은 듯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거다. 금광요에게 물어봤더니 강만음 미친 거 유명하다고 말해줘서, 그렇게 나는 자초지종을 알게 되었었다. 나는 답을 알면서도 물었다.

-아직도 위무선이 살아있다고 믿는대요?

-운몽에선 그 이름을 꺼내지 않는 게 좋네.

그러면서 여자는 진지하게 걱정하는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가 나에게로 조금 더 몸을 숙였다.

-사실, 십대 때만 해도 둘은 친형제마냥 운몽 길거리를 돌아다녔어.

-사형 사제 관계였더랬나요?

-친형제에 더 가까웠다니까. 그 전엔 운몽 강씨 평판도 그리 나쁘지 않았네. 자네가 아는지 모르겠지만, 기산 온씨가 연화오에 있던 사람들 전부를 몰살한 적이 있거든. 전대 강 종주님은 사람들 사이에서 무척 평이 좋았어서, 아무리 높으신 분들끼리의 전쟁이라지만 운몽 강씨가 멸문까지 갔다는 사실에 다들 맘 편해하지는 않았지. 하지만...... 냉정한 이야기이기는 해도, 삼독성수가 자기 가문을 일으킨 게 연화오 밖에서 하루 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별 의미가 없는 일이잖은가. 전대 종주처럼 사람들을 돕지 않는 지금의 강 종주를 다들 그리 좋아하지만은 않아. 사실 나도 상인이 아니었다면 강 종주를 욕하고 있었을지 어쨌을지 누가 알겠나. 하지만 가끔 위 공자와 함께 운몽 거리를 누비던 그 어린 공자가 떠오르곤 한다네.

여자가 씁쓸한 얼굴로 말하는 동안, 나는 고개만 가만히 끄덕였다. 여기나 청하나 비슷하구나. 전대 종주의 그림자를 못 벗어난 것도 그렇고, 이쪽이나 그쪽이나 동생들이 형을 못 잊고 배회하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금광요를 봐라. 금자헌 죽어도 멀쩡히 아주 잘 살잖아. 선독을 하려면 그 정도의 기백이 필요한 거겠지. 아무튼 대화는 곧 평범한 침묵으로 이어졌고, 여자는 이만 가 보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도 차 한 잔 시켜놓고 오래 앉아있기가 눈치 보여 곧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충 일주일 정도 운몽에 머물기로 했다. 그러고 청하로 돌아가면 여유로우리라. 사실 당장 청하로 돌아간대도 문제는 없었으나, 나는 그냥 그러지 않기로 했다. 섭회상을 보고 싶은 만큼 부정세로 다시 돌아가기는 싫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