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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30 19:36
각국의 귀빈이 머무는 숙소 밑에는 벙커가 자리했다. 이것의 내구력은 해군 대장급쯤 돼야 파괴할 수 있었다. 그러니 예정대로라면 도피는 여유롭게 일을 마치고 악어와 벙커에서 편히 쉬고 있을 터였다. 바꿔 말해 염병할 왕세자비만 아니었다면 오늘의 개고생은 없었다는 뜻이다.

“드디어 찾았군. 염병할 왕세자비를.”

조로를 향한 음성에 배배꼬인 감정이 실렸다. 이어 이층 건물에서 땅 위로 착지한 그가 두 발로 땅을 딛고 서니 블루노는 존재감만으로 간담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바지춤에 손을 꽂아넣고 적당히 서있던 자태는 느슨해보이지만 조금의 빈틈도 없다. 숨만 잘못 쉬어도 바로 공격당할 걸 확신한 블루노가 못 박힌 듯 서있을 때였다.

“새대가리!!!”

블루노를 대놓고 무시하며 조로와 거리를 좁히던 도피에게 달려든 건 루피였다. 조로보다 뒤에 있던 그가 튀어나오더니 정직하게 주먹을 내질렀다. 똑같이 팔을 뻗어 받아친 도피에 두 주먹이 만난 순간 묵직한 파동이 삽시간에 번져나갔다. 잔잔한 수면 위로 떨어진 물방울에 파장이 일듯 조로와 블루노는 공기중에 번지는 힘의 파동을 고스란히 뒤집어썼다. 가벼운 마음으로 받아쳤던 도피는 해루석까지 찬 녀석의 기개에 표정이 사뭇 달라졌다.

“루피, 그만둬!”

그동안 몰라보게 강해졌구나. 조로는 방금의 일합으로 어리게만 봤던 루피의 성장을 실감했지만 말리는 게 먼저였다.

“이자식이 원흉이야! 그렇지?”
“지금 그런 걸 따질 때냐?!”

조로가 나름 설득해보지만 루피는 꿈쩍 않았다. 뿐이랴, 도리어 그가 루피에게 허를 찔린 얼굴이 됐지 않은가. 생각지 못한 데서 감이 좋은 녀석은 자초지종을 제대로 아는 것도 아니면서 어긋난 인연의 원흉을 바로 짚었다. 루피에게 있어 눈앞의 상대는 알라바스타의 십년 내란이 끝을 맺고 이제 좀 편해지려나 싶던 조로를 다시 저희들 전쟁에 끌어들인 장본인이었다.

“절대 용서 못해!!”
“듣다보니 섭섭한걸. 네놈은 저따위 오메가 하나로 알라바스타가 얻은 득이 얼마나 많은지 알고 하는 소리냐?”
“입 다물어! 새대가리!!”

합을 나누는 와중에 터져나온 둘의 모습이 대조적이었다. 여유 있게 공격을 피하며 이죽이던 도피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그에 반해 루피는 더없이 진지했으며 분노했다. 해루석을 달고서도 재빠르게 움직이던 녀석의 체술은 아마 직접 싸우면서 체득한 것일 테다. 비율 좋은 팔다리와 원숭이처럼 가뿐한 몸놀림을 이용한 공격은 거친 움직임만큼이나 다음 공격을 예상키 어렵게 했다. 해루석만 아니었다면 도피도 놈을 여유 있게 받아주지는 못했으리라. 때문에 그는 이번이 다시 없을 기회라는 것도 알았다. 왕세자비에게는 로우만 있으면 충분한 것 아니겠나. 밀짚모자를 봤을 때 바로 마음을 정한 도피가 여태 쓰지 않던 능력을 펼쳤다. 루피가 내지른 발차기를 건물에 실을 걸어 피한 도피가 다른 손으로 실을 쏘았다. 그러나 쏜살같이 날아간 실 한줄기기가 발목을 꿰뚫기 전에 루피는 허공에서 반동을 줘 뒤로 돌아 착지했다. 아슬아슬하게 꿰이는 걸 피한 루피가 이어 건물 벽을 도움닫기 하며 튀어오르니 금새 이층 높이의 도피를 따라잡았다. 해루석으로 인해 능력을 쓰지 못해서 그렇지 루피의 육신이 가진 고무 인간의 특성은 여전했다. 이를 이용해 고무공 같은 탄성으로 튀어오른 루피는 기어코 도피의 얼굴에 한방 먹였다. 비록 여기까지였는지 추락하듯 떨어졌지만.

“……!!”

녀석이 이층 높이까지 뛰어오를 줄 몰랐던 도피도 방심하던 차에 당한 일이었다. 또한 전투라면 이쪽도 만만찮은 물건이었으니 그는 건물 벽에 날아가 부딪히면서도 손을 뻗는 걸 잊지 않았다. 추락하는 루피를 향해 쏜살같이 날아온 실이 이번에는 정확히 머리를 꿰뚫기 직전이었다.

“루피!!”

한달음에 달려온 조로가 루피를 두 팔로 받았다. 이어 몸을 돌리니 도피가 벽에 박히며 굉음이 났다. 그사이 코앞까지 다가온 실은 건물도 가뿐한 강도였으니 조로의 몸이 꿰뚫리는 건 당연했다. 도피가 실을 회수하려 들지만 때는 늦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벌어진 순간 뒤에야 비로소 도피가 벽에 부딪혀 나온 돌부스러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쾅! 콰광!

“키에엑!!”

때맞춰 포탄 터지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옴에 불길이 치솟는 게 보일 정도다. 진한 열기와 함께 마물들이 내지르는 괴성이 사방에 가득했다. 와중에도 유일하게 정적이 맴돌던 곳에서는 철괴로 몸을 두른 블루노가 조로의 앞을 막고 선 모습이 보였다. 벽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온 도피는 웃는 낯이 여전했으나 내심은 안도했다. 하마터면 제 손으로 염병할 왕세자비를 죽일 뻔했다.

“롤로노아, 밀짚모자를 데리고 피해라.”

루피는 의식이 없었다. 감옥에서 고문 당한 몸으로 해루석을 달고 이만큼 선전한 것이 이미 무리의 연속이었으니. 그리고 앞을 가로막고 선 넓은 등을 타고 넘어오는 덤덤한 음성에 조로는 루피를 등에 둘러업고 달아났다.

“고마워, 납치법.”
“…인사는 필요 없어. 그래봐야 밀짚모자는 독 안에 든 쥐니까.”

자리를 뜨기 전 조로가 남긴 한마디에 블루노는 젊은 왕을 주시하며 화답했다. 바로 자리를 뜬 조로는 뒤늦은 말을 듣지 못했지만 상관없었다. 거대 싱크홀 위에 떠있는 사법 섬은 배의 접근 방법도 매우 제한적인데 여기 더해 스팬담은 모든 외부인들의 접근을 바다열차로 통일하기까지 했다. 때문에 조로가 루피를 데리고 섬을 빠져나갈 유일한 방법이란 해군 함을 탈취하는 것뿐인데 이 거대 함선은 고작 몇명이 몰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니 밀짚모자를 데리고 있는 한 조로는 결국 이 섬 안에서 잡히게 될 터다. 블루노가 이를 감안해 두 사람을 대피시킨 데는 방금 일격으로 젊은 왕의 의도를 간파했기 때문이었고.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죄인은 엄연히 법의 심판 아래 적법한 절차를 따져 형의 집행을 받아야 합니다, 돈키호테 국왕.”
“그래봐야 네 말대로 밀짚모자는 독 안에 든 쥐다. 내가 널 죽이고 가도 놈들을 잡기는 충분할 텐데?”

젊은 왕의 미소가 소름끼쳤다. 천야차에 대한 건 블루노도 익히 알고 있다. 왕족에 방계까지 전부 처형대로 올려보내며 이들 목이 떨어지는 걸 보며 즐겼다던 폭군의 행보는. 그리고 블루노는 오늘이 제 생의 마지막인 것도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 쉽지는 않을 겁니다.”

이끼 낀 골목길과 칠이 벗겨진 낡은 건물들 사이에서 블루노는 결연한 얼굴을 했다.




‘젠장… 어떡하지?’

사고를 친 스팬담의 머리가 맹렬하게 돌아갔다. 제일 먼저 칼리파를 살피니 안경을 쓴 금발 여인은 잠시 멀어져 사법의 탑을 보는 중이었다. 거품이 줄어들며 모습을 드러낸 사법의 탑은 외벽의 그을음이 심했다. 탑 머리에 드높게 펄럭이던 세계정부 깃발이 타버린 걸 보면서는 스팬담도 속이 꽤 쓰렸지만 제일 중요한 건 당장 제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다. 다행히 스팬담이 제어장치의 버튼을 누른 걸 본 건 부관과 펑크프리드 뿐이지 싶었다.

“이 살인범자식! 네놈은 내가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루피이!! 흐흑! 으아아아!!”

가면남도 추가해서. 코끼리 발에 가슴이 짓눌린 채 발작하듯 몸부림치던 긴 코 녀석의 눈빛이 섬짓했다. 본능적으로 기세에 눌렸던 스팬담은 재빨리 한 다리를 꿇어앉아 뭐 뀐 놈이 성내듯 언성 높였다.

“아앗! 이자식! 어느틈에!”
“이 손 놓지 못해, 미친놈아?!”
“훔치려면 제대로나 할 것이지 이 멍청한 놈이 버튼을 누르다니! 너 때문에 밀짚모자는 고사하고 주변에 있던 사람 전부 휩쓸렸겠다!”
“네가 눌렀잖아, 살인범아!! 누구한테 누명을 씌우는 거야?!”

스팬담이 구둣발로 자근자근 밟아댄 우솝의 손은 살이 짓이겨지고 뼈에 금이 간 상태였다. 혼자서는 힘도 안 들어가는 손에 억지로 제어장치를 쥐어주니 우솝은 괴로워하면서도 소리치길 멈추지 않았다. 강압적으로 주먹을 쥐게 한 손이 고통 때문에 벌벌 떨리는 걸 알면서도 스팬담은 후련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칼리파! 이자식을 연행해! 오늘 벌어진 사건의 주모자이며 밀짚모자의 탈옥을 도움은 물론 녀석을 실수로 죽게 만든 흉악범이다! 필시 동료가 있을 터, 내 친히 심문해 본거지를 알아내겠다! ……칼리파?!”
“성희롱입니다.”
“뭐? 내가 뭘 어쨌다고!”
“성희롱입니다.”
“…됐으니까 연행이나 해!”
“성희롱입니다.”

칼리파는 추한 것을 경멸했다. 이런 이유로 스팬담은 상대가 툭하면 제 말을 못 들은 척한다거나 마지 못해 대답해도 대놓고 불쾌감을 표현한다거나 할 때면 찝찝함을 느꼈다. 그도 나름 190이 넘는 장신에 호리호리한 외양이 봐줄 만한데 말이다. 하지만 칼리파는 지금도 곁을 지나치며 같은 말을 반복했을 뿐이었다. 눈길도 한번 제대로 주지 않은 채. 그렇게 칼리파가 가까워질수록 우솝의 발버둥이 심해졌다. 그때였다.

“키에엑!!”

거품거품 열매 능력자의 몸에서 나오는 거품은 닿은 부위의 힘이 빠지게 만든다. 이에 칼리파가 우솝의 힘을 빼두려 앞에 섰을 때 이들 쪽으로 이미터 남짓의 마물 두 마리가 날아왔다. 건물이 즐비한 사선 방향에서 총알처럼 날아온 녀석들에 스팬담은 마젤란보다 가까이 있던 칼리파의 뒤로 숨었다. 도망칠 때만큼은 참으로 빠른 인사였다. 그리고 마젤란과 칼리파가 각기 하나씩 상대하려 들 때였다.

“빠우ㅡ웅!”

눈 깜짝할 새 날아온 녹색 덩치가 펑크프리드를 들이받았다. 종잇장처럼 날아간 코끼리는 일직선상에 있던 마물과 함께 도개교 중간까지 밀려났다. 이때 파생된 풍압에 칼리파가 휘청하려니 허리를 감아 받쳐주는 손이 있었다. 뒤로 기우뚱한 몸을 지탱해준 이는 밤하늘의 별처럼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괜찮소?”

곱디고운 입술이 덧그리는 미소에 여유가 넘쳤다. 칼리파가 홀린 듯 그 입술을 바라볼 때 옆에서는 욘디가 요란하게 마물을 쥐어패고 있었다.

“성… 성함이…?”

뒤로 반쯤 넘어간 저를 한 팔에 가뿐히 안고서 다정하게 내려다보는 시선에 칼리파는 겨우 목이 메인 소리를 내고 말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핑크빛으로 가득찬 세상이었다.




루피 구출 작전이란 죄인을 탈옥시키는 행위, 즉 범죄였다. 때문에 나미는 레이주에게도 직접적인 행위 가담은 하지 말 것을 당부했었다. 이를 조건으로 레이주의 호의를 받아들인 것 아닌가. 또한 나미는 행여 저희 정체가 들통난다면 그땐 레이주도 속은 것이라 주장하기를 희망했다. 물론 그녀는 탐탁찮아 했지만 숙녀분의 부탁이니 거절할 수 없었다. 그리고 무너진 저택에서 움직이기 전, 나미는 같은 약속을 재차 당부하는 걸 잊지 않았다. 이후 도개교가 보이는 골목에 근접해서 우솝을 발견한 뒤에는 지금이 약속한 그때라는 양 레이주를 바라봤고. 두 손에 우솝이 만들어준 크리마 택트, 삼단 분리 봉을 합체해 쥐었던 나미는 그녀에게 고맙다는 미소를 보인 뒤 로빈과 눈을 맞추고 튀어나가려 했었다. 그런데 머리 위로 하나둘 근접하던 마물 그림자에 레이주가 나미를 부른 거였다.

‘잠깐. 내가 범죄에 가담하지만 않으면 되는 거잖아. 그렇지?’

어찌 연약한 레이디들만 사지로 내몰 수 있겠는가. 다정한 음성에 나미는 곤란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누이의 성격을 익히 알던 욘디는 레이주의 눈짓에 지체 없이 움직였다. 잠시 뒤 어린 개체 두마리를 잡아 도개교 쪽으로 날렸으니 욘디와 레이주가 소란을 만든 틈에 로빈이 능력으로 우솝을 빼돌렸다. 그는 꽃꽃 열매 능력자로 어디에든 신체 일부를 제한 없이 꽃피울 수 있었다. 이로써 수십의 손이 땅에서 솟아나와 우솝을 물흐르듯 실어가니 스팬담이 뒤늦게 빈 자리를 발견해본들 소용없었다.

“놈을 찾아라! 어서!”
“네! 장관님!”

와중에도 제 안위를 제일 걱정한 스팬담은 부관을 비롯한 병사들만 움직이게 했다. 가장 큰 전력인 마젤란과 칼리파를 남겨두고서. 그사이 우솝을 숨어있던 골목까지 데려온 로빈에 나미는 아주 잠시 레이주와 눈을 맞춰 감사를 전했다. 그리고는 여전히 울분에 차 몸을 부들거리던 가면 쓴 우솝을 눈으로 살피며 다급하게 말하는 거였다.

“우솝, 괜찮아? 움직일 수 있겠어?”
“크흡! 미안해, 나미… 내가 약해서 루피를……. 루피이!!”
“뭔진 모르겠지만 일단 일어나자. 여기 계속 있다가는 금방 잡힌다고.”

부상이 심했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 판단한 나미가 도움의 손길을 건낼 때 일어나 앉은 우솝은 이를 뿌리쳤다.

“우솝?! 너 왜 이래?! 이러다 정말 들키겠어!”
“너희끼리 가! 난 루피의 원수를 갚겠어! 이건 다 내 책임이니까 너희까지 나설 필요는 없어.”
“기절시킬까?”
“뭐?! 아니. 괜찮아, 로빈. 알았지?”

가만 지켜보던 로빈이 태연하게 능력을 펼칠 자세를 잡는다. 당장에라도 우솝의 양 어깨에 손을 피워 목을 꺾어버릴 듯하던 그에 놀란 나미가 진정시키기 바빴다. 우솝은 이를 아랑곳 않은 채 가면을 벗어던졌고 말이다. 그리고는 눈물범벅인 얼굴로 짓밟힌 손을 간신히 펴니 스팬담이 억지로 쥐어준 제어장치가 보였다. 그순간 다시 눈물이 가득 차오름에 우솝은 팔뚝으로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두 사람 잘 들어. 루피의 목에 폭탄이 장착된 능력자용 구속구가 있었어. 그리고… 그리고 스팬담이란 놈이 그걸 폭발 시켰어!”

포탄과 마물의 괴성이 몰아치는 가운데 이들을 찾는 병사들의 소리도 가까워졌다. 그러나 우솝이 내뱉은 충격적인 말에 나미와 로빈 또한 굳어버렸다. 우솝은 주륵주륵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치며 크로스로 맨 가방을 뒤적였다. 로빈은 투구도 함께 챙겨줬지만 다친 손으로 그런 큰 무기는 다루지 못했다. 이에 우솝은 전에 쓰던 평범한 새총을 꺼내려 했는데 그 앞으로 조용히 다가온 나미가 무릎을 대고 앉았다.

“추적기 내놔.”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인데?”
“됐으니까 어서 추적기 내놔, 우솝! 내건 상디한테 줬으니까!”

다그치는 음성에 우솝이 멜빵바지 주머니에서 추적기를 꺼냈다. 그러다 보인 화면에서는 사이키 조명처럼 반짝이는 온점이 이동 중이었다. 우솝의 눈이 크게 뜨일 때 함께 이를 본 나미가 그제야 땅이 꺼질 듯한 숨을 뱉으며 몸에서 힘을 뺐다. 정말 우솝의 말대로 폭탄이 터졌다면 루피에게 부착된 추적기의 온점도 사라져야 했다.

“이게 어떻게……? 그자식이 버튼 누르는 걸 내가 똑똑히 봤는데??”
“아무튼 살아있으니 됐잖아. 아니면 스팬담이 널 속였다고?”
“아니. 버튼을 누른 다음의 반응은 거짓이 아니었어. 이건 진짜야.”
“그럼 됐네, 우솝. 뭘 망설여?”

어느새 눈물이 쏙 들어간 우솝에 대꾸하는 나미의 음성이 가뿐했다. 이어 로빈이 능력을 이용해 가면을 우솝 앞에 대령했다.
손재주 좋고 이공계열에 능한 우솝은 무기개발부서에서도 탐내는 인재였다. 그런 이가 굳이 변방의 라프텔에서 해저 탐사에 자원한 건 개인적인 이유가 있음이었다. 그래서도 나미와 로빈은 우솝의 확신이 더 믿음직했고 말이다. 우솝 역시 가면을 다시 얼굴에 덮어쓰고는 씩씩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부터는 이 저격왕을 믿으시라! 이 몸이 멋지게 루피를 해방시켜줄테니까! 기다려라, 루피! 저격왕이 간다!”
“찾았다!”
“트레스 플루르.”
“어어, 이거 뭐ㅡ 컥!”
“클러치!”

마침 나타난 병사 하나에 손을 쓴 건 로빈이었다. 두 팔을 가슴 앞에 크로스시킨 그녀의 손짓에 순식간에 돋아난 세 개의 손 중 하나는 병사의 눈을 가렸고 나머지 둘은 턱을 뒤로 넘겨버렸다. 병사는 뒤로 고꾸라지며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으아… 아프겠다…….”
“로빈…….”
“왜? 눈을 가렸으니 됐잖아?”

거두절미한 처사에 우솝과 나미가 앓는 소리를 낼 때도 로빈은 뭐가 잘못돼느냐는 얼굴이었다.




조로는 가능한 멀리 피하자는 생각에 루피를 업은 채 달리고 있었다. 얼마를 뛰었을까, 내심은 방금 지나친 골목이 눈에 익어뵌다는 것에 찜찜했지만 조로는 애써 무시했다. 그렇게 숨이 턱까지 차도록 쉬지 않고 달릴 때였다.

“……이 길이 아니야.”
“하아… 하… 뭐?”
“조로 너 아까부터 계속 같은 데만 돌고 있잖아.”
“너야말로 언제부터 깨 있었는데?”

멈춰선 조로의 음성이 뻘쭘함에 퉁명스러웠다. 루피는 대답 대신 얼굴을 깊숙이 묻더니 두 팔로 조로의 목을 끌어안았다. 땀에 흠뻑 젖은 젖은 조로에게서는 낮선 이의 향이 짙었다. 루피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하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사방에 포탄 소리와 마물의 괴성이 난무하지만 그럼에도 루피는 평화로웠다. 그는 여전히 조로의 모든 것이 좋았다.

“나랑 같이 가, 조로.”

그순간 머리 위로 지는 그림자에 조로의 눈이 힐끗 위를 향했다.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반쯤 무너진 건물을 발견했다. 본래 이층이었을 건물은 무너진 잔해가 한쪽으로 완전히 쏠려 있어서 일층 일부는 남아있었다. 잠시라면 저곳에 피신해도 되겠지 싶던 조로가 걸음을 옮겼다.

“거절해도 나는 너 데려갈거야. 그리고 내가 지킬 거야. 너도, 네 나라도.”
“루피, 나는 다시 네가 위험해지면 오늘처럼 구하러올 거야. 그걸로는 안 되냐?”

건물 안으로 들어서고 조로는 루피를 벽에 기대앉아 쉬도록 했다. 앞이 훤히 열린 드레스 셔츠 사이로 보이는 붕대가 그새 붉게 물들었다. 이를 지켜보는 조로의 시선에 고통이 묻어났다. 그는 루피의 말이 진심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 녀석은 평생 샹크스를 구하지 못했다는 부채를 안고 살 것이다. 그 옆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은 조로는 손끝으로 루피의 밀짚모자를 덧그렸다.

“루피, 비비도 너도 나한테는 가족이야.”

이 말에 루피의 입술이 삐죽 나왔다. 조금 전 도피와 싸울 때는 그리 어엿해보이던 녀석이 지금은 영락없는 열아홉 소년이다. 밀짚모자를 툭 건드린 조로가 활짝 웃었다. 그는 여전히 제가 알던 루피여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녀석이라면 천애고아나 다름없는 조로의 ‘가족’이라는 말이 얼마나 애틋한 것인지 알 터였다. 그래서 루피는 조로의 말에 싫다는 등의 반박을 할 수 없었다. 그 아픔을 잘 알기에.

“조로 너 약았어.”
“시끄러워. 너야말로 예정대로 네 아저씨 구하는 일이나 잘해, 인마. 그사람도 좋다고 마물 팔 달고 다니고 싶겠냐? 다 너 생각해서 참는 것 같던데.”

샹크스는 핵이 갈라진 덕에 놈의 힘이 약해졌다고 했었다. 이 상태로는 전처럼 놈이 직접 분열해 만들어내는 마물은 없을 거라고. 때문에 녀석이 마물을 부리는 데 제한이 걸릴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다는 아니지만 샹크스 역시 핵의 반절이 심장을 움켜쥐듯 감싸고 있기에 자연스레 머리로 흘러든 정보가 있다고 했었다. 왼팔에 해루석 수갑을 차고 자는 것도 그가 잠에 든 순간 반쪽 핵이 주도권을 빼앗으려 하기 때문이라고 했으니까. 여기서 로우는 늙은 왕이 어둠어둠 열매 능력자와 결합시켜 핵, 씨앗에 해루석이라는 취약점을 만들었을 것이라 추측키도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놈을 통제할 방법이 없었을 테니까. 이 또한 의무실에서 이미 한 얘기였고 말이다. 그에 루피에게 대꾸하면서 조로는 로우가 떠오름에 목구멍 가득 씁쓸함을 삼켰다. 녀석이 잘 있는지 걱정이었다.

“그나저나 우… 저격왕을 계속 여기서 기다려야 하나? 에이스랑 사보가 분명 오긴 왔을 텐데.”
“뭐? 에이스랑 사보가?!”
“뭘 놀래고 그래. 네 일에 둘이 빠진다는 게 말이 되냐? 난 오히려 그 둘이 왜 네가 이지경이 되도록 놔뒀는지 모르겠다. 진작 사고를 치고 남을 놈들인데.”
“아니야. 에이스는 내가 잡혀올 때 쫓아왔었어. 몸이 만신창이가 됐는데도 날 구한다고 버티길래 그러다 정말 죽을 것 같아서 내가 억지로 쫓아보낸 거야.”

루피는 제 목숨을 담보로 위협하지 않았더라면 에이스는 그곳에서 정말 죽었으리라고 생각했다. 형제들 일에 가장 앞뒤 없이 달려드는 건 에이스였으니까. 이글이글 열매 능력자인 그는 자신보다 가족, 친구 일에 더 감정적이었고 주의가 매몰되면 주변을 보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에이스는 루피의 걱정을 살 정도였다. 한번 불꽃이 튀면 재가 될 때까지 태우는 성미 때문에. 어린 루피는 그래서 에이스가 저희 형제를 두고 멀리 가버릴 것 같다며 걱정하고는 했다. 과거에 루피가 몰래 숨어서 알라바스타까지 따라온 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음이다. 물론 이 얘기를 들은 뒤 사보는 동생 걱정이나 시킨다며 나무랐다지만 에이스는 무척 감동한 얼굴이었다. 실로 군대 내에서 에이스가 어지간한 일에는 그러려니 하며 넘어가는 성격으로 바뀌게 된 것도 이 일이 있고 난 다음이었다. 그리고 조로 역시 이 셋의 형제애를 익히 알기에 믿고 있었다. 사보와 에이스가 있는 한 루피는 괜찮다는 걸. 그에 반해 로우를 생각하면 누가 있을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로우의 침대 맡에 대문짝만 하게 걸린 로시난테의 초상화였지만 그는 죽은 사람이었다. 다음으로는 그 형이 떠올랐고.

“…….”

조로는 바로 머리를 털어냈다. 젊은 왕 하니 로우가 질색팔색하는 것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 또한 젊은 왕은 로우를 함부로 다룬다는 게 걸렸다. 튼튼한 몸이 자산인 자신이라면 몰라도 젊은 왕은 그 여린 놈을 너무 막대했다. 이런 이유로 조로는 머리 속에서 젊은 왕을 지우고 크로커다일을 떠올렸다.

‘그래, 크로커다일 경은 어른스럽지. 로우가 힘들 때 의지할 만 하고 이성적인 사람…….’

조로가 여기까지 생각할 때였다. 순식간에 벽을 뚫고 나온 검은 그림자가 루피를 날려버렸다.

“으악!!”
“루피!!!”

루피의 비명이 무너진 건물 잔해에 파묻히고 그를 향해 달려가려던 조로를 막듯이 쌓인 모래가 사람의 형상을 이뤘다. 금빛 갈고리의 남자는 곳곳에 붉은 피가 튀었을 뿐 깔끔한 정장 차림이었다. 조금 흐트러진 머리를 나른하게 쓸어넘기며 돌아보던 동공은 세로로 날카롭게 찢어진 파충류의 것이었다. 무감정한 얼굴과 어우러진 눈빛은 냉혹하기 짝이 없었다. 조로는 조금 전 머리 위를 선회하던 검은 그림자가 크로커다일이었음을 깨달았다.

“서두를 것 없다, 롤로노아. 너희 둘 다 사이좋게 저세상으로 보내줄 테니.”

낮게 깔린 음성의 그윽함이 이토록 소름끼칠 수 있을까. 크로커다일은 사라진 조로를 두고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음이었다.









한조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