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순정을 옆에서 지켜본 이후에야 심장 뛰는거 잘 어울려...



대충 우성이 1학년, 명헌이형 2학년 봄-여름 시점으로. 어느날인가부터 부활동할 때 스탠드석에 매일 서 있는 사람이 생김.
가쿠란 목깃에 달린 뱃지는 3학년, 키는 180남짓 될까.
제법 훤칠한 키에 비해 마른 체격에 뿔테 안경을 쓰고 며칠간 연습을 지켜보면서 스탠드 끝에서 끝까지 뭔가를 재는 것처럼 이리저리 걸어다니던 남학생은 그 다음주부터 카메라를 들고 와.

"누구예요?"
"아, 사진부. 이명헌 사진 찍는대."
"명헌이형 사진을 왜요?"
"운동부 사진 모아서 무슨 뭐에 쓴다던데."
"근데 왜 하필 명헌이형이예요?"

명헌이형이 찍을 게 있나? 슛도 거의 안 하는데. 아니, 물론 할 땐 하지만. 우성은 고개를 갸웃거림. 기왕 농구하는 사진을 찍을 거라면-

"찍기엔 차라리 제가 낫지 않아요?"
"얼씨구 또 까분다, 정우성."

최동오가 웃으면서 우성의 뒤통수를 툭 치고 지나감. 우성은 아야, 아프지 않은 손길에 짐짓 엄살을 부리면서 스탠드 쪽을 바라봄.
사진기를 든 3학년이 웃으면서 갑자기 손을 흔들어. 그 방향을 바라보니 말없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곤 다시 반대 방향으로 열심히 달려가는 이명헌 있음.
필름 카메라 셔터 터지는 소리가 몇 번인가 찰칵, 반복되는 걸 들으면서 우성은 어깨를 으쓱하곤 털어버림. 뭐, 예술 어쩌고 하는 감성엔 또 내가 모르는 뭐가 있나보지.

그렇게 연습이나 가끔 찍으러 오려나 싶었던 사진부 3학년은 여름 내내 체육관으로, 수돗가로, 운동장으로, 원정경기장으로, 쉬지 않고 찾아와 우성의 눈에 밟힘.
인터벌이 끝나는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자마자 일제히 주저앉아 아이고 아이고 곡소리를 내는 동안 이명헌이 손으로 무릎을 짚고, 허리를 굽히고 선 자세로 혼자 조용히 숨을 고를 때.
벅벅 민 덕분에 두피까지 벌개진 게 보이는 머리통을 앞다투어 바쁘게 수도꼭지 아래 들이미는 동안 이명헌이 젖은 손을 가만히 열오른 눈 위에 가져다 댈 때.
아직 어둑한 운동장 트랙 위에서 1학년이 먼저 달리는 동안 이명헌이 조금 뒤로 빠져 느리지만 확실하게 근육을 풀고 있을 때.
골이 터지는 순간, 림이 흔들리고 관중의 환호성이 터지는 순간이 아니라 이명헌이 빠르게 코트를 둘러보고 경기의 템포를 한 박자 늦출 때.
이걸 대체 왜 찍지? 하는 동적인 순간에 항상 셔터가 터지는 게 우성은 영 신경이 쓰이는데 명헌은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평소와 같이 움직임.
남들보다 조금 느리고, 조금 더 조용하고, 조금 더 확실한 효율성을 띈 동작으로 이명헌이 우성의 앞을, 그리고 곁을 스쳐 지나감. 저 멀리에서 누군가 그걸 낱낱이 기록하는 동안.

그 여름 인터하이 전국대회 결승에서 산왕공고 농구부가 우승한 순간, 카메라 셔터 소리는 들리지 않았음, 적어도 우성의 귀에는.
어쩌면 분명히 울리고 있었을 셔터 소리가 환호와 울먹임과 마주 안은 이명헌의 답지 않게 거세게 뛰는 심장 소리에 묻혔는지도 모르겠다고 우성은 생각함.
결승에서 우성은 그 해 최고 득점을 기록했고, 이명헌은 최고 어시스트 숫자를 기록했음. 흰 유니폼을 입고 얻은 첫 인터하이 우승이었고- 그러니까 우성이 이 순간 환희를 느낄 이유는 많았음.
굳이 단단히 끌어안은 2학년 9번 선배의 심장 박동이 저와 같은 박자로 미친듯이 뛰고 있는 게 아니라도.
지금 이 높이에서 저보다 조금 작은 명헌의 목덜미에 송글송글 맺힌 땀이 고스란히 시야에 들어오는 것 따위가 아니라도.
지금의 이 피부가 직접 맞닿은 거리가 코트와 관중석의 그것과 비할 데 없는 그것이어서 괴상한 우월감을 느끼지 않는대도. 심장이 뛸 이유는 많았음. 황홀할 이유도, 눈 앞이 연신 하얗게 터지는 이유도.
경기장 밖으로 나오는 순간 마주한 여름이 더할 나위없이 아름답게 느껴져서 왠지 모르게 울컥이는 감정에 눈물이 고인 이유도.

뒷풀이 자리에서 도진우 감독이 어느새 돌아간 그 사진부 3학년 얘기를 꺼냄.

"그 친구, 멀리까지 응원하러 와줬는데 괜히 그냥 보낸 거 아닌가 모르겠네. 밥이라도 같이 먹었으면 좋았을텐데."

여름 내내 열심히 보러 와줬잖아, 하는 말에 우성이 왠지 모르게 신경이 곤두서는 동안 명헌은 묵묵히 앞접시에 덜어놓았던 자기 몫의 고깃조각을 다 씹어 삼키고서야 입을 열어.

"신경쓰지 말아달라고 하시더라고용. 오히려 불편하다고."
"하긴, 농구부원들 사이에 혼자 끼는 것도 어색할 수 있겠군."
"그러신 것 같아용."

잠깐 사이를 두고 눈을 깜박인 명헌이 짧게 덧붙임. -아마도.
우성은 둘 사이에 어느 정도의 친분이 있을까를 가늠할 어떠한 단서가 있을까 해서 명헌의 입술을 한참 쳐다 봄. 하지만 명헌은 다시 입을 열지 않았음.
마디마다 굳은 살이 박히고 손톱 끝이 깨진 투박한 손이 테이블 위의 티슈를 뽑아들더니 도톰한 입술을 꾹꾹 눌러 닦았음. 무심한 손 끝에 입술이 말캉하게 짓눌렸다 다시 돌아오는 모습.
우성은 그 순간 왠지 모르게 확신함. 여기 그 카메라맨이 있었더라면 바로 지금, 셔터 소리가 들렸을 거라고. -적어도 자기라면 그랬을 거라고.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오자 농구부는 다시 또 바쁘게 전국체전을 준비하기 시작하지만 사진부 3학년이 스탠드에 나타나는 빈도는 현저히 줄어들어.
하루가 멀다 하고 들리던 셔터소리가 일주일에 두 번, 한 번...그러다 이주에 한 번...그러다 아주 사라지고.
얼굴 잊어버리겠다 싶을 무렵 다시 스탠드에 나타난 사진부 3학년의 손엔 이번에는 카메라가 들려있지 않음.
예전처럼 분주히 원하는 앵글을 찾아 스탠드 끝부터 끝까지 돌아다니는 대신 혼자 위에서 두 번째 줄, 가운데보다 조금 왼편인 자리에 앉아 훈련을 말없이 지켜봄.
잠깐의 5분 휴식이 주어지자 명헌이 앉아서 쉬는 대신 스탠드를 천천히 올라가. 둘이서 짧은 대화를 하는 걸 우성은 역으로 제가 관중이 된 것처럼 코트 위에서 지켜 봄.
명헌이 허리를 굽혀 꾸벅 인사를 하는가 싶더니 다시 코트 위로 내려올 때 쯔음엔 사진부 3학년도 스탠드 맨 윗층과 이어진 통로를 통해 그대로 체육관을 떠남.

"되게 오랜만에 왔네요. 사진부. 요즘은 사진 안 찍는대요?"
"응."

우성이 떠본 말에 명헌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함. 우성은 끊기있게 한 번 더 물어봐. ​

"왜요?"
"이제 찍을만큼 찍었으니까용."

대답을 돌려주는 명헌의 표정은 평소처럼 여상했음.

전국 체전 일정 때문에 농구부는 축제 첫날을 놓침.
하지만 저녁 늦게 기숙사에 돌아왔을 때 이미 축제 첫날을 즐기고 온 애들한테 축제 얘기를 안 듣게 되지는 않는거지.

"야 대박이더라. 얘기 들었어?"
"뭐가."
"너네 선배, 9번말야. 사진으로 아주 프로포즈를 받으셨던데? 엉덩이 조심하시라고 전해드려."

아니면 둘이 벌써 사귀나? 낄낄거리는 소리에 우성은 베개를 집어던짐.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이튿날 우성은 일부러 학생들이 없는 틈을 노리고 아침 일찍 사진부 전시 부스를 찾아가 봄. 하지만 오픈 시간을 노리고 갔는데도 부스엔 이미 사람이 많았음.
그 여름 터진 셔터는 수없이 많았는데 전시된 사진은 다섯장 뿐이었고 제목은 전부 "九" 한 글자 뿐.
짓궂은 남학생들이 사진 앞에서 수군거리다 키득거리며 나가는 것을 우성은 반복해서 봄.
하지만 우성이 보기에 웃을 만한 사진은 하나도 없었음. 정말이지 하나도 없었음.
다만 매 사진마다 이명헌은 조용히 멈춰서서 어딘가 먼 곳을 보고 있었고 그건 일반적으로 농구선수를 찍는 방식과 분명 거리가 있었음.
어스름한 새벽, 태양이 작열하는 낮, 그리고 해가 내려앉기 시작한 불그스름한 저녁 나절. 한여름의 채도 높은 빛이 정지한 이명헌을 지나가고 있었음.

거기서 읽기 싫어도 읽히고야 마는, 피사체에 대한 조용한 열정을 읽은 순간 우성은 견디기 어려워져 부스를 떠났음.

가을이 지나가자 한동안 시끄러웠던 이명헌의 사진에 대한 소리들은 알아서 사그러 들었음.
우성은 명헌이 부스에 들렀었단 얘기를 들었음. 문제의 카메라맨에게 꽃다발을 전해줬다는 얘기도, 킬킬거리는 웃음과 함께 들었음.
하지만 그 이상의 어떠한 일도 없었기 때문인지, 다들 가을 축제에 있었던 작은 사진 전시회와 농구부 새 주장이 얽혔던 조금 웃긴 이야기 정도는 금방 잊어버렸어.
윈터컵을 앞두고 주장으로서 새 등번호를 받은 명헌은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제가 달았던 9번을 우성에게 넘겨줘.

우성은 사진부 3학년을 겨울의 끝자락까지 다시 만나지 못함.
다시 윈터컵을 우승하고, 그의 4번을 품 안에 안았을 때 이번엔 관중석에 카메라도 셔터 소리도 없었지만 여전히 우성의 심장은 이명헌과 맞닿은 채 미친듯이 뛰어.
여름보다 조금 더 키가 자란 우성의 시야에서 내려다 보는 그의 주장은 전혀 자라지 않아서, 각도가 바뀐 탓에 젖은 목덜미 아래로 유니폼 사이 살갗이 보이는 면적이 조금 더 늘어남.
귀가 뜨겁고 심장이 고막 바깥으로 터져 나올 것 같아서 우성은 그만 그 자리에서 주저 앉아 울고 싶어짐.

그리고 마침내 우성이 마지막으로 사진부 3학년을 만난 것은 졸업식날이었겠지.
농구부도 졸업하는 3학년들이 있는지라 식순이 끝나자마자 체육관에 모여 선후배간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는데, 스탠드석에 거짓말처럼 어느 순간 그 3학년이 서 있는 거야.
아무도 말을 꺼내진 않지만 존재를 느낀 순간 거기 모인 모두가 명헌을 바라보는 게 느껴지는데, 이명헌은 언제나처럼 심드렁한 표정으로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음.
거기 정지한 채, 멍한 눈으로 어딘가 먼 곳을 보는 이명헌의 뒤로 차가운 겨울 오전의 빛이 체육관 창문을 통과해 비치고 작은 먼지들이 공기 중을 떠다니는 게 보임.
마주보고 일렬로 섰던 졸업생들과 1,2학년들이 꾸벅 인사한 후 흩어지는 사이 명헌이 체육관 스탠드를 다시 올라가고 우성은 그걸 코트에서 지켜 봄.
사진부 3학년과 명헌은 길지 않은 대화를 나눔. 명헌이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하자 사진부 3학년이 처음으로 마주 허리를 숙여 인사함. 그동안 신세졌다는 듯이.
그리곤 뭔가를 건네받아 코트로 돌아온 명헌이 대뜸 그걸 우성에게 내밀어.

"너 가지라는데용."
"네?"
"9번 후배. 용."

제법 두툼한 두께의 황색 종이봉투를 받아 든 우성은 스탠드에 선 사진부 3학년을 바라 봄. 우성과 눈이 마주친 사진부 3학년은 말없이 우성을 보다가 보일듯 말듯하게 웃고는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사라져.
우성은 봉투를 든 손이 조금 떨리는 걸 느낌. 무언가를 들킨 기분. 그것도 아주 낱낱이. 갑자기 울고 싶어 목구멍이 홧홧해져 와.

"...이거, 전부 다 형 사진일텐데."
"응, 그렇대용."
"제가 가져도...형은 괜찮겠어요?"
"응."

명헌이 또 그 여상한 얼굴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함.

"전부 九였으니까. 나도 내 9번에게 주고싶다고 했어용."





그런 첫사랑 우성명헌 슬램덩크 슬덩


해피우명절!
우명이 여전히 너무 좋다 처음 느낌 그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