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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06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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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겨울 동안 가지만 앙상하게 남았던 나무들은 봄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고 병실 창을 통해 보이는 하늘은 시리게 푸른빛을 띄었다. 벌써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코앞으로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2주 정도 더 입원 치료를 받기로 했다. 구단과의 상의 끝에 결국 이번 시즌은 중도에 하차를 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임신 이후로 컨디션이 계속 떨어지기도 했고 그 상태로 리그 개막을 하면서 도통 회복되지 않던 몸은 기어이 병이 났다. 경기장 한복판에서 쓰러진 통에 언론은 난리가 났고 그 관심이 너무 커서 집에서 통원 치료를 하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구단 관계자는 차라리 병원에서 조용히 쉬면서 회복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했다.
부모님은 경기 생중계를 보다가 아들이 쓰러져 실려 나가는 장면을 보고 손을 떨며 병원으로 달려 오셨다고 했다. 며칠이 지났지만 엄마는 내 모습에 계속 눈물이 나는지 종종 등을 돌리고 눈물을 훔치신다. 그게 계속 마음에 걸려 아빠께 친구들이랑 구단 사람들이 계속 보러 오니 걱정 말고 엄마랑 집에 다녀 오시라고 했다. 나의 며칠에 걸친 설득 끝에 부모님은 오늘 아침 집에 들어가셨다.




좀 전엔 감독님이 병실에 다녀갔다. 구단 관계자를 동행하고 말이다. 내가 쓰러져 병원에 실려 왔던 일이 하필이면 경기장의 수많은 카메라 앞이라 그런 것이겠지.
입원하고 거의 일주일이 다 되어가지만 하루가 멀다고 나에 대한 기사가 올라왔고 수많은 추측성 기사들부터, 대체 내 주위의 누가 정보를 주는 건지 내가 실려 올 당시의 상태들을 상세히 기술한 기사들도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갑자기 병실에 방문한 건 이런 흔한 기사들 때문이 아니었다.

오늘 아침, 파파라치가 찍었던 사진이 몇 장 공개됐다. 내가 어떤 남자와 함께 있는 사진들이었고 그 남자는 나의 진료를 봐주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였다. 사람들 시선을 피한다고 프라이빗한 카페에서 만나거나 병원 직원들이 다 퇴근한 뒤에 진료를 봤던 거였는데...그게 화를 불러올 줄은 몰랐다.
사람들은 사진에 찍힌 병원 건물을 통해 상대방의 이름과 직업을 알아냈고 그가 명헌이와 친한 사이로 잘 알려진 의사와 의대 동기라는 것까지 언급되고 있었다.
그에 따른 새로운 루머들이 만들어졌다.

내가 정우성을 정리한 뒤 이명헌의 소개로 새 의사 남자친구를 만난 것이 아니냐는 말이 돌기도 했고, 정우성이 먼저 나를 찼으며 내가 그로 인한 우울증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은 것 같다는 추측도 돌았다. 이 외에도 각종 혼란스러운 루머들이 사실 여부를 알 수 없이 마구잡이로 확산되고 있었다.
사진이 공개된 지 반나절 만에 인터넷은 나에 관한 글들로 도배가 되었고 하다 하다 내가 20대 시절에 만난 전 애인들의 신상까지도 연이어 올라오고 있었다.




감독님은 침대에 누워 있는 나를 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고 표정엔 미안함이 역력했다. 하지만 이렇게 병실까지 직접 찾아와 얘기를 나눠야 할 만큼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는 중인가보다.
국가대표를 뛰던 시기부터 대학리그와 프로 데뷔까지, 자잘한 부상이나 컨디션 난조에도 불구하고 중도에 하차한 적 없던 내가 처음으로 시즌아웃이 된 것을 두곤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후유증이다, 우울증이다 말이 많았고 심지어 입원을 한 것이 사진이 뜰 걸 미리 알고 언론의 취재를 피하려 꼼수를 쓴 거라는 등...정말 수많은 억측들이 난무했다.

구단 직원은 내게 그 의사와의 관계를 물었다. 나는 너무 난처했다. 나의 공식적인 의료기록은 시스템상으로 남은 것이 없었고 왜 그 의사를 사적으로 만났냐를 답하려면 그간 내게 일어났던 일들을 얘기해야 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엔 우성이가 언급될 수밖에 없었으니까.
내가 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니까 감독님은 '네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기 때문에 그 소문들이 거짓이란 걸 믿는다, 하지만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빨리 막으려면 정확한 사실로 구성된 보도자료가 필요하다' 며 나를 설득했다.




"...최 선수. 요즘 많이 힘들지? 사람들이 참 못됐어. 그렇게 응원한다 팬이다 할 땐 언제고...농구선수가 농구만 잘하면 됐지 참 선수 사생활에 관심도 많아 우리나라 사람들. 근데, 어쩌겠어...이 나라에서 유명인인 게 죄지..입 다물고 있어 봐야 괜히 루머에 살만 붙여져. 겪어봐서 알잖아?"




그렇지만...아무리 그래도 내 불찰로 사진이 찍힌 거고 애초에 내가 치료받기 위해 만났던 의사다. 죄 없는 우성이를 또 다시 누군가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감독님은 입을 다문 채 묵묵부답인 나를 더 책망하지 못했다. 오랜 시간 선수와 감독으로 신뢰를 쌓은 관계였고 지금도 그가 나를 믿고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테지. 모든 비난은 내가 받게 되겠지.

반드시 가져가야 할 답을 얻지 못한 직원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는 자신이 맡은 이 고집쟁이 농구선수 때문에 돌아버릴 지경이겠지만...뭐 어쩌겠나. 나는 지금으로선 입을 다무는 것 외에 다른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이곳에 온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돌아갔고 일단 구단에 얘기해서 적절한 반박문을 작성하라 할 테니 좀 더 쉬고 몸이 회복되면 다시 얘기하잔 말을 남기곤 떠났다.

나는 이 모든 것들이 두려웠다. 사실 나를 둘러싼 악질 소문들엔 이미 익숙해져 버린 것 같다. '또 그런 소문이 도는구나, 그렇구나..' 하며 무표정으로 기사를 찾아볼 수 있을 만큼 무던해졌다. 하지만 죄 없는 다른 사람들이 나 때문에 피해를 받게 되는 것이 여전히 너무 괴로웠다.
얼마 전 내 이혼으로 인해 아무런 관계가 없던 우성이도, 내 가족들도, 구단 사람들까지도...모두가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이번엔 나 때문에 나를 도와줬던 의사와, 덩달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명헌이, 루머 가운데에서도 나를 믿어주는 감독님, 뒷수습을 해주는 구단의 직원들, 그리고 우성이 까지도. 모두가 아무런 잘못이 없는 사람들인데...또 죄 없는 이들이 피해를 받고 있다.




하루아침에 과한 관심에 시달리고 있을 의사에게 미안하다는 내용의 문자를 전송하고 나니 겨우 반 그릇 먹었던 점심이 속에서 뒤틀리는 듯했다. 스트레스에 취약해진 내 몸은 너무 약해져 있었고 주위의 상황들이 도저히 나를 쉬지 못하게 했다.
결국 울렁거리는 속을 변기에 전부 게워내고 말았다. 먹은걸 다 토해냈는데도 속이 안 좋아서 계속 헛구역질이 올라왔고 밖으로 나오는 건 노란 위액 뿐이었다. 그러다 한순간, 포근한 나무 향이 공기 중에 감돌았다. 코 속을 파고드는 그 냄새에 쓴맛이 올라오던 속이 점점 진정이 되어간다. 내 등을 쓸어주는 손길...정우성이었다.

우성이는 아무 말 없이 내 등을 계속 쓸어줬고 내가 몸을 일으키자 입을 헹굴 물을 떠줬다. 변기 커버를 내리고 앉아 잠시 쉬니 뒤집어졌던 속이 좀 가라앉는 것 같았다.




"이제 좀 괜찮아요 형?"




나는 숨을 고르며 고개를 끄덕였고 우성이는 땀과 함께 엉켜 이마에 엉망으로 달라붙었을 내 머리를 조심스러운 손길로 정리해 줬다. 눈물이 자꾸만 밀려 나온다. 탈수 증세 때문에 울면 안 된다고 했는데...서럽고 속상한 마음에 자꾸만 눈물이 비집고 올라온다.
우성이에게 너무 미안했다. 사실 아직도 그날 새벽 받은 고백이 믿기질 않는다. 내가 정우성에게 그런 사과와 고백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우성이가 책임감과 연민, 혹은 우리 둘 사이의 오래된 우정을 사랑으로 착각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내가 이런 생각들에 의기소침해질 때마다 우성이는 아무 걱정 말라는 듯이 든든하게 버티고 서 내 손을 꽉 잡아주었다. 그럴 때면 모든 것이 다 사실이고 전부 잘 될 거라는 생각에 안심이 된다.

지난 며칠간 우성이는 내 병실에만 붙어 있었다. 분명 우성이도 시즌이 진행되고 있는 중임에도 불구하고 내 곁을 비우지 않았다. 식사를 열심히 하고 절대 토하면 안 된다는 말을 자꾸만 어기는 내가 나 스스로 보기에도 한심한데...내가 이런 모습을 보일 때마다 우성이는 얼굴 한 번을 찌푸리지 않고 함께 있어 준다.




"이건 뭐야?"




먹은 걸 다 토한 탓에 힘이 쭉 빠진 나는 우성이의 부축을 받아 화장실에서 나왔고 침대 옆에 웬 박스가 몇 개 놓여 있어 시선이 갔다. 우성이가 따뜻한 물을 떠서 내게 주며 말했다.




"아. 그거 복숭아요."
"이 겨울에 복숭아가 어디서 났어?"
"그냥 있길래 샀어요. 형 자꾸 뭘 못 먹는 거 같아서~"
"..."
"형 복숭아 좋아하잖아요!"




그래, 맞아.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탈이 나거나 몸이 아프면 아무것도 먹기 싫어했었다. 하지만 복숭아를 워낙 좋아해서 엄마가 사 오시면 아파도 꼭 몇 쪽 집어먹곤 했다. 식사를 하고 약을 먹어야 복숭아를 주겠다는 단호한 엄마의 말에 먹기 싫어하던 죽도 좀 먹고 약도 먹고 하다 보면 어느새 몸이 낫곤 했던 기억이 있다.
다 커서도 복숭아만큼은 철마다 잔뜩 사두고 식사 후에 하나씩 까 먹었다. 근데 우성이는 옛날 합숙하던 시절에나 본 거일텐데...아직도 기억하고 있었구나.

우성이가 호출한 건지 간호사가 들어와서 내 손에 뭔가를 잔뜩 연결하더니 이것저것 수치를 측정하곤 수액을 달아준다. 자꾸 토하면 안 된다고 또 꾸중을 들었다. 할 말이 없어서 얌전히 침대에 기대 링거 바늘을 고정해주는 간호사를 바라볼 뿐이었다.




"어머 웬 복숭아에요?"
"아...얘가 사 왔네요."
"이 근처에 지금 복숭아 파는 데가 있어요? 어디에요?"
"..엇, 그게..근처는 아니고..."




이 추운 날의 복숭아가 시선을 끄는 건 당연했고 친근한 그녀의 물음에 우성인 살짝 당황한 듯했다. 결국 머쓱하게 웃으며 얼버무리다가 간호사들이랑 먹으라며 복숭아 한 박스를 들려 보내며 마무리가 됐다. 수액을 맞으며 침대에 누워 있는데 우성이가 복숭아 박스를 병실 한쪽에 차곡차곡 정리를 하는 게 보였다.




"복숭아 진짜 어디에서 사 온 거야?"
"어디서 사 온 거면 뭐 어때요. 그냥 복숭안데.."
"이거 사려고 멀리 나갔다 왔어?"
"아뇨. 그냥 근처에서 산 거에요. 그거 다 맞으면 이따가 깎아줄게요. 죽 다 먹으면 그다음에요."
"뭘 깎아줘..내가 먹을게."
"...싫어요. 내가 깎아줄 거예요."




우성이가 복숭아 상자의 포장을 뜯고 박스를 열자 순식간에 상큼하고 달큰한 냄새가 병실을 가득 채웠다. 아직 전부 믿기진 않지만 우성이한테 큰 사랑을 받고 있다는 생각에 괜히 행복하다는 느낌이 든다. 이렇게 작은 거 하나에 기분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나 자신이 참 한심한데 그래도 어쩌겠나. 나는 지금 너무 아팠고 이 모든 게 사실이라고 믿어버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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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액을 맞으며 잠깐 쉰다는 게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어느새 내 손에 있던 링거 바늘은 다 제거되어 있었고 어둑한 병실엔 스탠드 조명만 하나 켜져 있었다. 살짝 열린 화장실 문틈에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고 통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팀에 피해 안 가게 할게요.
다음 시합 전까지 문제 없이 들어갈게요.
감독님이랑 코치님한테는 오기 전에 다 말씀 드렸어요.
네..내일 출국이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제가 그쪽 구단으로 전화하지 말아 달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소문이 뭐가 중요해요. 전부 증거도 없는 헛소문인데.
네, 네.
그쪽에서 연락 오면 알아서 보도자료 내라고 전 무조건 다 맞추겠다고 말 전해주세요.




우성이가 많이 난처할 것이다. 우성이 에이전시 직원들도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할까...아직 시즌 중일 미국 팀도 그렇고...
또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자꾸 울어서 수분을 빼내는 것도 나를 열심히 간호해 주는 우성이와 의료진들에게 못 할 짓이다.
화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다시 눈을 감았다.
아직 잠들어있는 척 했다.

가까이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고 포근한 우성이의 향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침대에 걸터앉는 움직임이 일었고 곧 내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손의 감촉이 느껴진다. 그리고 따뜻한 숨결이 이마에 닿아왔다. 조심스러운 우성이의 입맞춤에 놀라서 하마터면 눈을 떠버릴 뻔했다. 우성이는 한참 동안이나 내 이마에 입을 맞췄고 입술이 떨어진 뒤로도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최동오..이제 그만 아파..."




낮게 깔리는 중저음의 목소리에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것 같다. 정우성의 목소리가, 그 숨결이...가슴 벅차게 설렜다. 천천히 눈을 뜨니 내 얼굴 앞에 바짝 다가온 잘생긴 얼굴이 보인다. 얇고 진한 눈썹과 잘 뻗은 콧대, 조각해 놓은 듯한 입술과 잘생긴 눈매, 깊은 두 눈동자.
그 눈 속에 내가 비친다는 게 믿기지 않았고 또 그만큼 벅차올랐다. 그대로 팔을 뻗어 정우성을 끌어안았다.


"우성아...다 진짜지...?
"...응. 진짜에요."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한참을 끌어안고 있었다.







***




푹 자서 그런 건지, 동오 형은 아까보다 훨씬 속이 진정된 듯했다. 핏기 없이 창백했던 얼굴에 조금이나마 혈색이 돌아왔고 저녁도 먹고 약도 먹었다. 간호사가 또 한 번 들어와 형의 열과 혈압을 체크하고 나갔고 나는 복숭아 하나를 씻어 왔다.




"형, 저 내일 아침 비행기에요."
"그래, 이제 시즌 마무리 될 때까지 얌전히 있어."
"넵."
"...너 욕 많이 먹었지?"
"글쎄요."
"어떻게 욕을 안 먹냐.."




형의 표정만 봐도 알 것 같다. 분명 내게 미안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상황들의 원인은 나인데도 최동오는 남을 탓할 위인이 못 됐다. 여전히 모든 것들을 자신의 책임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제 와 내가 그런 동오 형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옆에 있어 주는 것 뿐이었다.

낮에 내 에이전시에서 형의 소속 구단으로 전화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안 그래도 자꾸만 이상한 기사들이 올라오고 병원 앞에서 진을 치는 기자들 때문에 형이 신경을 쓰는 것 같았는데...
동오 형은 겉보기에 성격이 시원시원해 보이는 것과 다르게 은근히 생각이 많고 예민한 편이었다. 그런 형이 스트레스로 인한 소화불량을 종종 겪는다는 것은 산왕 시절에도 몰랐다가 여러 해 국대를 함께 뛰며 알게 됐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 약해진 몸이 자꾸 탈이 나는 건 당연했다.

도통 식사를 제대로 하질 못하는 형이 걱정 됐고 좋아하는 복숭아라도 가져오면 입맛이 좀 돌까 싶어 이틀을 내리 검색해서 한겨울에도 하우스 복숭아를 재배한다는 농장을 찾았다. 새벽같이 차를 몰고 나가 서울 근교의 작은 농장에서 복숭아 몇 박스를 샀다. 좋아할 동오 형의 모습을 상상하며 병원으로 향하고 있을 때 에이전시 매니저에게 전화가 왔다.

이 진절머리 나는 파파라치들은 이때다 싶어 모았던 사진들을 공개했고, 스포츠 스타의 자극적인 사생활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그 몇 장의 사진들을 가지고 살을 붙여나가 하루아침에 온갖 루머들을 만들어 냈다.
바로 병원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았지만 급하게 보자고 하는 매니저 때문에 잠깐 차를 돌려 사무실에 들렀다. 미국 구단 쪽과도 이야기한 후에 담당자한테서 연락이 갈 거니 일단 기자들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말라는 충고였다. 그리고 출국 전까지 집에 가 있으면 안 되겠냐는...부탁을 가장한 은근한 압박도 있었다.
나는 절대로 그렇게 할 생각이 없었다. 내 단호한 태도에 매니저도 결국 그럴 줄 알았다며 한숨을 쉴 뿐이었다.




오후가 되어서야 병원에 도착했고 병실 출입 카드를 스캔하고 안으로 들어갔지만 침상은 비어 있었다. 조금 열려 있는 화장실 문틈으로 괴롭게 속을 게워내는 소리가 들렸다. 얼른 복숭아 박스를 바닥에 내려놓고 들어가 동오 형의 등을 쓸어 주었다. 언제부터 이러고 있던 건지...나오는 게 더 없는 거 같은데 헛구역질만 하고 있는 형의 등이 안쓰러웠다. 며칠 동안 병실에 붙어 있으며 밤만 되면 열이 오르고 토하는 걸 반복하는 형의 모습을 지켜보는 게 너무 힘들었다. 몇 달 만에 만난 최동오는 항상 보기 좋게 잡혀있던 근육이 다 빠져 있었고 원래도 납작하던 볼은 더 푹 패여 수척한 모습이었다. 동오 형이 쓰러졌던 경기 당시의 모습보다도 며칠 새 더 안 좋아 보였다. 형이 그만큼 마음도 몸도 병이 들었다는 것이겠지...

오늘도 형이 홀로 병실에서 쏟아지는 기사들을 보지 않게, 내가 옆에 있었다면 달랐을까...
돌이켜 생각해 보면 모든 게 후회의 연속이었지만 이전처럼 후회와 절망에 사로잡혀 도망치는 일은 이제 없어야 한다. 그건 이미 너무 아픈 결과를 불러왔으니 말이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는 최동오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형이 홀로 아프게 하지 않을 것이다.







잠시 통화를 하고 나와 잠든 동오 형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참 여러 감정이 머리 속을 채운다.
내가 안고 가야 할 내 지난 행동의 무게를 잘 알고 있다. 나의 이 죄스러운 후회는 평생을 형에게 갚아도 부족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동오 형과 함께 있을 때면 자꾸만 그 모든 것을 잊어버리곤 한다.

잠이 든 최동오의 숨결, 그 숨에 호흡을 맞추고 들이마실 때면 느껴지는 은은한 페로몬 향, 많이 말랐지만 여전히 보드라운 피부, 꼭 감은 두 눈, 고운 곡선을 그리는 속눈썹...그리고 저 눈이 떠지면 마주할 다정한 눈동자.
지금 이 순간이 행복했다. 어쩌면 나는 양심 따위 없는 미친놈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쓰레기라 불려도 좋을 만큼 동오 형과 함께 있는 이 시간이 좋았다.

내 손이 부드러운 형의 머리카락에 닿았고 따뜻한 이마의 열기가 손끝으로 전해져 온다.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 하얗고 반질반질한 이마에 입을 맞췄다. 가까이 다가가니 조금 더 배어 나오는 형의 향에 머리가 아찔했다. 마음 같아선 형의 미끈한 목에 코를 박고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싶었지만,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좋다.
이 은은한 향기가 내 옆의 최동오의 존재를 느끼게 한다. 더도 덜도 말고 딱 지금 그대로 넘치게 행복했고 넘치게 감사했다. 이 미약하게 느껴지는 페로몬 향을 언제까지나 내가 감싸주고 싶다.
아무도 최동오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상처 입히지 못하도록, 이 향이 흔들리지 않도록...







***




오늘은 온종일 병실에서 책을 읽기도 하고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었다. 계속 누워만 있으니 몸도 머리도 멍청해지는 것 같았고 2주로 예정됐던 입원 기간 중 벌써 열흘이나 지났기 때문이다.
이미 시즌아웃이긴 했지만 이후에 있을 스케줄에 언제든 투입이 될 수 있도록 퇴원 후부터 복귀를 준비하기로 했다. 내년은 지금 구단과의 계약이 끝나는 해고 이번 시즌이 이렇게 되며 내 거처는 불투명하다. 감독님은 걱정 말라고 했지만...그게 감독님 한 사람의 결정으로 될 일은 아니니까.

나를 둘러싼 각종 루머와 억측들은 여전했다. 여전히 머리가 아팠고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주위 사람들에게 갈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려면 내가 어떠한 해명 없이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이 가장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성이를 다시 소문의 중심으로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모든 루머들은 증거 없이 공중에 떠다니는 가십이었고 그냥 내가 억울함에 대한 미련만 버린다면 될 일이었다. 누군가는 그 소문들을 믿고 나를 손가락질 하겠지만 정우성의 이름이 특정되어 큰 뉴스거리를 만드는 것보다는 나았다.

바쁜 와중에도 이틀에 한 번은 꼭 병실에 들르는 명헌이를 통해 나를 도와줬던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의 상황도 들었다. 그는 일반인인 자신의 얼굴을 마음대로 찍고 신상을 까발린 기자들을 고소할 준비 중이라고 한다.
이제 다 끝나간다. 나만 참고 버티면 잘 지나갈 것이다.




읽던 책을 덮고 침대에서 나왔다. 약간 출출해져서 우성이가 사다 둔 복숭아 상자를 열었고 연분홍빛 복숭아 한 개를 꺼내 TV를 켰고 앞에 앉았다.
탈진해서 병원으로 실려 온 뒤 일주일 동안은 아무런 식욕이 들지도 않았고 밤만 되면 열이 오르는 통에 먹은 것도 다 게워 냈다. 그런데 참 웃기게도 우성이가 사다 준 복숭아는 입에서 당겼다. 내가 생각해도 내 입맛이 유치하기 짝이 없었지만 사실이었다.
오늘만 해도 식사를 하고 나서 끼니마다 복숭아를 한 개씩 깎아 먹었고 벌써 이게 세개째다. 오늘 새벽에는 구토도 하지 않았다. 이 추운 날씨에 어디서 복숭아를 구해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최고의 처방인 것 같다.




채널을 돌리다가 NBA리그 현장을 생중계하고 있는 스포츠 뉴스가 나왔다. 우성이가 속한 팀이 이겼다는 소식은 조금 전 인터넷 기사로 이미 봤다. 시즌 도중에 한국을 왔다가 돌아간 정우성은 걱정이 무색하게도 좋은 경기력을 보여줬다.

크게 의미가 있는 경기는 아닌데도 국내 취재진이 미국 리그까지 간 걸 보면 우성이를 인터뷰하기 위함일 것이다. 승리의 기쁨과 경기 운영에 대한 인터뷰를 해도 모자랄 판에 함께 뛰는 다른 선수들 앞에서 고국의 가십에 대한 질문이나 받을 우성이의 모습을 상상하니 또 머리가 지끈거렸다. 정우성의 커리어에 내가 재를 뿌린 것 같아 우울해진다.

채널을 돌리려고 했는데 화면 속에 정우성이 등장했다. 경기 내용에 대한 답변을 능숙하게 대답하는 우성이의 모습에 웃음이 나온다. 마냥 귀엽고 애 같았는데...언제 저렇게 능구렁이 같아진 걸까. 그래도 문득문득 내가 잘 아는 귀여운 모습이 여전히 보여서 또 좋다.
우성이의 경기 영상이 리플레이됐고 피지컬이 남다른 외국 선수들 사이에서도 전혀 밀리지 않고 코트를 지키는 정우성의 모습이 참 멋졌다.
어쩐지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가 더욱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대로 믿고 싶기만 한 정우성의 고백이 나를 향한 연민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채운다. 계속 보고 있다가는 너무 우울해질 것 같아서 이번엔 정말로 채널을 돌리려고 했다.

그때, 인터뷰어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왔다.




[국내 리그에서 활동중인 최동오 선수가 현재 입원치료 중인데요. 지난 경기 직후에 최동오 선수의 소식을 듣고 귀국하신걸로 알려졌는데 사실입니까?]

[네 맞습니다.]

[바쁜 일정 중에도 최선수가 입원한 병원에 머물렀던 게 꽤 화제였습니다. 최동오 선수의 현재 상태는 어떤가요?]

[보도된 대로 회복을 위해 입원 중입니다. 좋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두 분을 둘러싼 여러 의혹들이 있어 왔는데요, 괜찮으시다면 그 부분에 대해 입장을 듣고 싶습니다.]

[아...이건 조만간 정식으로 의사 표명을 할 예정이었습니다.]







결국 내가 재를 뿌린 게 맞나보다. 잔뜩 우울해지는 기분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근데...그냥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는 것도 괜찮을 것 같네요. 최동오 선수는 제 고등학교 선배이자 국기를 달고 대표팀을 함께 뛰었던 동료입니다. 저희 형질 때문에 예전부터 많은 이야기가 나왔다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저희는 과거엔 분명 친한 동료 사이였고 지금은 연인사이입니다.]

[지금 두 분이 교제중이라는 것을 밝히시는 건가요?]

[네. 맞습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는 것처럼 저희의 관계가 변한 것과 최동오 선수의 이혼은 아무런 관련이 없고, 지금 떠도는 소문들도 전부 사실이 아닙니다.
최동오 선수는 뛰어난 농구 선수이자 제가 존경하는 선배입니다. 절대 소문처럼 알코올 중독에 빠지거나 여러 사람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 최동오 선수가 악성 루머들로 인한 우울증으로 정신과 진료를 받은 것이 사실인가요?]

[그 부분은 제가 당사자가 아니라서 말씀드리기 곤란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지금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억측들과는 전혀 다르다고까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누구나 아프고 힘이 들 땐 도움을 청하고 조언을 구하겠죠. 형도 남들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근거 없는 추측성 기사들을 자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말씀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하고싶은 말씀 있으시다면 한 마디 더 부탁드리겠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형을 좋아했습니다. 형은 한 번도 저를 동료 이상으로 대한 적이 없었고, 불과 얼마 전까지도 저희는 평범한 형동생 사이였습니다. 제가 매달렸어요 저 좀 사랑해달라고. 형한테 고백하고 붙잡고 싶어서 시즌 중인데도 한국에 갔습니다.
나 받아줘서 고마워요 동오 형. 이런 저를 이해해주고 응원해주신 감독님과 코치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시즌 마무리까지 팀원들과 함께 더 좋은 플레이 보여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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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고 대체 내가 지금 뭘 들은 건지 뇌가 멈춘 것 같았다. 정우성에게 집중된 카메라와 경기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채 혼란마저 덮어씌워진 저 공간 속에서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웃는 표정으로 유유히 나가는 정우성의 뒷모습이 멍하게 시선에 들어올 뿐이었다.

눈물이 터져 나왔다.




테이블에 놓아 둔 휴대폰이 불이 난 것처럼 계속 울려댔고 특종이 붙은 헤드라인이 스포츠 뉴스의 메인으로 걸리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그냥 우성이가 너무 보고 싶었다.
어서 그 품에 안기고 싶었다.




창밖의 바람은 어느새 찬 기운이 가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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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하루만 더 있으면 퇴원이다. 2주 간의 입원 생활은 끝이 났고 많은 이들의 도움 덕에 난 건강을 많이 회복됐다. 수액을 맞지 않고 물을 마시는 것만으로도 빈혈기가 사라졌고 더 이상 밤에 열이 오르지 않았으며 식사도 꼬박꼬박 잘 하고 있었다.




"좋은 아침."
"응, 굿모닝."
"오..완전 복숭아 농장이 따로 없네."




우성이가 출국한 이후에도 한 차레 병실로 복숭아 택배가 왔었다. 그렇게 병실엔 우성이가 사다 두고 간 복숭아 박스가 한가득이었고 vip병동 간호사들에게 하도 복숭아를 돌린 통에 최동오 병실에 가면 복숭아를 준다는 소문이 병원에 파다했다.
처음 보는 간호사들까지도 나만 보면 복숭아 잘 먹었다고 말하는 통에 너무 창피하긴 했지만 기분이 좋은 건 어쩔 수 없었다. 어디에서 사 온 건진 죽어도 말을 안 하지만 분명 겨울 끝자락에 저렇게 많은 복숭아를 사 왔다면 그 농장을 통째로 정우성이 털어온 게 분명하다.




"그렇게 먹으면 안 질리냐?"
"그러게...근데 계속 먹어도 맛있네."
"정우성이 개 염병을 떤다고 생각했는데 이유가 있었네."
"...너 나 놀리는 거지?"
"그럼 뭐겠냐."
"아이씨..."
"살아났네 최동오."
"그래...그렇네."
"다 내 덕인 줄 알아라."
"그래~고오맙다."
"나중에 나 고소하면 너 죽여버린다."
"응?"
"그런 게 있어. 근데 걘 이제 안 와?"
"아직 시즌 남았잖아. 다 끝나야지."
"아."
"너는 뭐 모르는 사람처럼 묻냐."
"오랜만에 보는데 낯짝 잘생겼더라."
"뭐...그렇지."
"왜 시큰둥해?"
"그럼 뭐, 무슨 반응을 해."
"네 남친 낯짝 잘났다고."
"어으...야 그거 이상하다."
"뭐가, 남친이잖아."
"그래에 근데 이상하다고!"
"남친 남친 남친"
"야 이명헌!"
"니남친 정우성 니남친 정우성 니남친 정우성"
"어우 이 또라이."




아무래도 저 말로 나를 놀리는 게 한동안은 명헌이의 새로운 흥밋거리가 되려나 보다. 그게 싫지는 않다. 명헌이는 나를 졸졸 따라다니며 귓가에 계속 '니남친 정우성'을 중얼댔고 나는 거울을 보지 않아도 내 얼굴이 지금 무슨 색을 하고 있을지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야 이명헌! 너 쫓아낸다!"
"안 그래도 갈 거다. 이따 경기 있음. 니남친 정우성."




마지막까지도 말끝에 니남친 정우성을 중얼대며 병실을 나서는 이명헌에게 베개를 던졌지만 닫힌 문에 맞고 떨어지고 말았다. 명헌이가 가고 나서야 내 얼굴이 겨우 제 색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우성이는 누가 봐도 멋진 남자이자 잘 나가는 농구선수였고 근사한 알파였다. 내가 그런 정우성과 연애를 시작했다는 건 믿기지 않았지만 현실이었다.

우성이가 인터뷰에서 폭탄 발언을 한 그날, 나를 둘러싸고 있던 루머들은 국내 최고의 인기 스포츠 스타인 정우성인 직접 밝힌 열애 기사에 밀려났고 정신과 의사의 고소 사실과 더불어 우리 구단에서 배포한 보도자료까지 순서대로 풀리며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온 인터넷은 정우성의 그 인터뷰 영상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했고 우성이의 에이전시에서 추가로 공개한 입장문에 적힌 공식적으로 두 사람의 교제 사실을 인정하는 내용과 나를 두둔하는 것을 두고 내가 정우성을 가지고 놀았다는 헛소문까지도 쏙 들어갔다.

나는 그날에서야 내 마음을 짓눌러오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모든 건 우성이가 내 옆에 있어 줬기 때문이다.
나는 우성이에 비해 너무 부족한 사람이라서...언제든 그 불안에 사로잡혀 나 자신을 갉아먹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우성이가 함께 있어 줄 거란 것을 안다. 정우성이 내 손을 단단히 붙잡아주는 이상 분명 나는 다시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창밖은 어느새 찬 기운이 가셔 봄바람이 살랑대고 있었고 병들고 다친 낙엽을 모두 떨구고 다시 깨끗한 가지만 남은 내 마음도 겨울 동안 단단해진 나무에 봄이 왔다.
초록빛 새싹이 움트고 있었다.







느리고 느렸던 겨울을 지나, 드디어 봄이었다.











슬램덩크
우성동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