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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30 03:43
 

 
 

이거 꼭 해야해요?”

 

 

정우성은 당돌하기가 이를데 없는 후배였다. 그저 건방지기만 하다면 차라리 다행이었겠지만 누구에게도 비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재능이 문제였다. 그의 재능은 그의 말과 행동에 조명을 비춘다. 정우성이 취하는 태도는 모두의 주목을 받았고 꽤나 건방져 보이기까지 했다. 이제 3학년이 된 선배들의 눈치를 힐끔 보며 신현철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겨우 똥군기 좀 없애보려 하는데 애물단지가 들어왔네...

 

 

정우성이 교복도 갈아입지 않고 체육관에 와 심심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볼 때 신현철은 바로 눈치 챘다. 쟤가 그 정우성이구나. 고등학교 1학년이라기엔 권태와 무료가 뒤덮혀있다. 오만하고 그 오만함을 뒷받침 해줄 재능도 가지고 있는 후배.

 

국내 최고의 명문대라 불리는 산왕도 그 아이의 갈증을 달래주지 못하는지 정우성은 건조하게 그들을 내려다 보았다. 그 건방진 눈에 이채가 도는 것은 이명헌의 플레이를 볼 때 뿐이었다. 신현철 또한 재능있는 선수였지만 아직 포지션에 익숙해지지 않은 그였기에 정우성은 그닥 관심을 두진 않았다.

 

1학년들은 차마 똑바로 보지 못하고, 2학년 조차 가끔 불편해하는 이명헌에게 정우성은 끈질기게 달라 붙었다. 저랑 원온원 해주세요! 하루라도 그 말을 안하면 가시가 돋는 것처럼.

 

당연히 군기가 강하게 잡힌 농구부원들은 그를 고깝게 보았으나 이명헌은 그런 정우성을 기합을 주지도 않았고 딱히 신경쓰지도 않았다. 이명헌의 행동이 그러니 자연스레 다른 2학년들 또한 기강을 잡으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명헌아. 너 요즘 1학년 꼬라지 어떤지 봤지.”

 

“...”

 

 

대답 안해?”

 

네 봤습니다.”

 

내가 3학년인데 그런거 일일히 신경써야하냐?”

 

죄송합니다.”

 

1학년 때처럼 하라고. 1학년 때처럼.”

 

 

어깨를 툭툭 밀치며 말하는 3학년들은 그 전 세대에서 본 게 있어 가오는 잡았지만 위상은 이미 한참 전에 무너진 채였다. 그들의 전 세대에선 주전은 3학년인 것이 당연했고 이례적으로 다른 학년이 끼어들곤 했다. 그러나 이명헌을 시작으로 그 두터운 관념은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이명헌, 신현철, 최동오을 필두로 주전을 거의 차지하지 못한 3학년은 이미 권력 관계에서 밀려났다. 이전처럼 폭력을 휘두르는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 감독은 이명헌의 의견에 전적으로 신뢰하고 귀를 기울였으니 기합이니 군기니 하는건 이미 물건너 간지 오래였다.

 

 

 

 

 

정우성은 그래서 어떻게 할거냐?”

 

아직 결정 못했어용.”

 

이젠 용이냐...”

 

역시 뿅이 낫나용?”

 

마음대로 해. 어차피 이상한 놈이라고 소문 다 났으니까.”

 

 

이명헌은 슬쩍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운동장 뺑뺑이를 돌고 있는 1학년 아이들을 바라봤다. 정우성은 1학년들 중에서도 키가 컸다. 기술이 좋으면 체력이 없는 경우도 허다한데 맨 앞에서 크게 구호를 외쳐가며 뛰고 있었다. 신현철은 정우성에게서 눈을 떼고 이명헌을 바라봤다.

 

 

 

싫지는 않은가보네.”

 

똥강아지 같긴해용.”

 

너한텐 꼬리 흔들고 난리지만 다른 애들한텐 건방지다고.”

 

나한테도 건방져.

 

너한테도?”

 

“...!”

 

아무도 신경 안쓴다니까...”

 

정우성은 어린애예용. 재능넘치고 이기적이고 불안하죵.”

 

그 어린애를 어떻게 키워줘야 하는데?”

 

넌 당근, 난 채찍

 

내가 당근?”

 

저런 애들은 좀 막 대해주고 친하게 지내주는거 좋아하는 타입이니까용.”

 

그거야 내 특기니까 할 수 있지만... ?”

 

때리지는 않을테니까 지켜봐용.”

 

 

. 알겠어. 신현철은 시원하게 웃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 마신 음료수 캔을 버리러 가려다 뒤를 돌아 이명헌의 손에 있는 빈 캔까지 가져가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명헌이 뻗은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워줬다. 은근 손이 많이 간다니까. 이명헌은 조금 구부정한 어깨로 1학년이 돌고 있는 운동장을 바라보다 체육관으로 돌아갔다.

 

 

 

 

 

 

 

 

지금부터 00고등학교 연습 시합 후발 멤버로 나올 사람 호명을 할게용.”

 

 

명헌의 목소리가 풋풋한 기대감이 가득한 체육관을 울렸다. 산왕은 실전 경험을 쌓아주기 위해 1학년을 타학교와 연습 시합에서 후발 멤버로 넣는 관례가 있다. 선배들과 합을 맞추고 실전 경험을 시켜주기 위해서였다. 시합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인다면 1학년부터 주전이 될 수도 있다는 희망도 심어주었다.

 

뛰어난 기량을 가진 인재들의 이름이 주장의 입에서 한명씩 호명되었다.

 

그러나 모두가 당연히 예상했던 이름만은 불리지 않았다. 기대로 가득 차 있던 아이들의 표정이 의문으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선배.”

 

 

선배!”

 

 

웅성거리는 소리가 체육관을 메웠다. 2학년들은 소란스러워졌고 3학년들 중 소수가 서로를 보며 질나쁜 웃음을 흘렸다. 신현철이 급히 1학년과 2학년을 각자 연습 장소로 흩어지게 하는 동안 정우성은 머리 끝까지 열이 받은 표정으로 이명헌에게 다가갔다.

 

 

선발 기준이 뭡니까?”

 

실력이용.”

 

우성은 바람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텃세 부리시는거예요? 제가 또 건방지게 굴었나요?”

 

건방지게 군 건 맞아용.”

 

 

시발... 열이 뻗치다 못해 얼굴을 일그러트린 정우성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화난 어린애의 얼굴이다. 역시 건방져용. 선배를 앞에 두고 욕이라니.

 

 

사실 건방지게 구는 건 선발 기준에 영향을 주지 않았어용. 우성은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아용.”

 

 

누가 봐도 제가 여기서 제일 뛰어난 건 알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개인으로 보면 그렇겠지만. 농구는 팀 스포츠잖아.”

 

그 말투는 집어치우시기로 한거예요?”

 

따라와용.”

 

 

 

이명헌이 간 곳은 체육관 뒤편의 쓰레기장이었다. 버려진 박스나 책 몇권이 뒹구는, 사람들이 오지 않는 곳. 정우성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비웃음을 지었다. 고등학교에 와서도 변한 것이 없다. 텃세와 가오로 똘똘 뭉친, 고작 1-2년 먼저 태어났다는 걸로 유세를 잡는...

 

 

우성군은 실력이 뛰어나용. 나도 그 점은 확실히 알고 있어용.”

 

 

날아올 욕지거리와 주먹을 기대했지만 귀에 꽂힌 건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그럼 왜...!”

 

산왕은 팀으로 이기는 학교니까. 개인이 모든 짐을 안게 하지 않아용. 그게 산왕이 최고라 불리는 이유예용

 

제가 패스를 안하는건 득점을 위해서예요. 어차피 뺏길 거 뭐하러...”

 

그러니까 이번 시합을 앉아서 보라고. 뺏길지 어쩔지.”

 

 

우스운 말투 때문에 조금 얕잡아 봤던 특이한 선배는 새까만 눈으로 그렇게 말했다. 목소리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지만 그 눈 속에서 끓어오르는 호승심에 정우성은 입을 다물었다.

 

 

 

 

 

 

 

 

 

 

백문불여일견이라고 했던가. 정우성은 그제서야 자신이 산왕에 들어왔다는 걸 실감했다. 반복되는 힘든 연습과 수많은 인원, 좋은 시설은 제쳐두고 그 사람이 패스하는 모습을 보며 온몸에 피가 돌기 시작했다. 농구복 위에 입은 티셔츠가 갑갑해질만큼.

 

농구는 팀 스포츠다개인의 기량이 중요한 농구에서 그 한마디를 그렇게 뚜렷하게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적재적소에 공이 날아가고 누구도 그걸 놓치지 않는다. 길을 만들고 수 없이 림의 그물 소리가 울렸다. 관중석을 울리는 응원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을만큼 심장이 뛰었다. 중학교 때와 비교도 되지 않는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정우성은 처음으로 이 커다란 흐름에 몸을 집어넣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정우성이 납득 할 줄 몰랐는데.”

 

즐거워보이던데용.”

 

그러니까. 요즘엔 원온원 하자고 얼마나 들러붙던지 귀찮아 죽겠다.”

 

현철이도 빨리 센터에 익숙해져야 하니까 좋은거죵.”

 

넌 정우성 너무 받아주는거 아니냐? 너만 바라보는 애들이 수십명인데 매일 정우성이랑 원온원 해주잖아.”

 

그런가용? 내가 그렇게 인기가 많은 줄은 몰랐네용

 

, 남고에서 인기 많아서 좋겠다-.”

 

 

신현철은 실없이 웃었다. 이명헌이 조용히 따라웃자 현철은 웃음기를 머금은 채로 그를 보며 말했다.

 

 

요즘 잘 웃네. 보기 좋다.”

 

 

이명헌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전 원래 잘 웃어용. 그렇게 말하고는 훌쩍 자리를 비켜버리자 남은 신현철은 볼을 긁적이며 다시 태평하게 벤치에 누웠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니까.”

 

선배도요?”

 

 

신현철은 펄쩍 뛰듯이 놀랐다.

 

 

뭘 그렇게 놀라요? 누구 험담이라도 했어요?”

 

이자식이 선배가 니 친구냐?”

 

 

신현철은 벌떡 일어나서 정우성에게 암바를 걸었다. 어린 후배가 눈물을 찔찔 흘리며 연신 잘못했다고 외치고 나서야 밤톨 머리를 슥슥 문질러주곤 다시 벤치에 기댔다.

 

 

선배도 명헌이형이 무슨 생각 하는지 잘 몰라요?”

 

모르지. 걔가 말을 해주는 타입도 아니고, 표정에 드러나는 타입도 아니고.”

 

원래 그랬어요? 1학년때부터?”

 

? 어 그렇지.”

 

 

말투도? 이것저것 물어보는 정우성을 뒤로하고 신현철은 이명헌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새까만 머리통과 교복은 누구나 똑같았으나 명헌은 유독 어둡고 새까만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편히 다가가는 현철마저도 멈칫할만큼...

 

 

현철선배! 제 말 듣고 있어요?”

 

확실히 지금이 더 잘 웃지.”

 

? 명헌이 형이요? 웃어요? 왜 난 한번도 못봤지?”

 

니가 맨날 똥강아지마냥 들러붙는데 웃을 틈이 있냐? 걔 좀 귀찮게 하지마.”

 

제가 뭘 들러붙어요... 아니 그럼 1학년때는 어떤 사람이었던거야? 선배 취향 이상하네요. 어떻게 명헌이형이랑 친해졌지?”

 

이게 선배한테... 친해진게 뭐 계기가 있겠냐. 그냥 친해졌지. 걔는 좀 유한편이니까.”

 

? 선배가 무슨 소리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너만 해도 이명헌이 얼마나 봐주고 있는지 알아? 원온원해줘, 훈련 보강해줘, 기어올라도 안때려...”

 

저 때리는거 형밖에 없거든요.”

 

니가! 맞을짓을! 하잖아!”

 

정우성은 결국 머리에 꿀밤을 세대쯤 얻어맞고 나서야 질문하기를 멈췄다. 현철 선배 진짜 짜증나. 괜히 때리기만 하고. 질문을 좀 더 던져봐도 맞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더 얻을건 없어보였다. 머리를 슥슥 문지르던 정우성이 일어나자 신현철은 눈썹을 들어올렸다.

 

 

현철 선배. 저랑 원온원 해줘요.”

 

 

어휴. 신현철은 질린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면서도 같이 몸을 일으켰다. 싹싹한 놈은 아니지만 열정으로 가득 차 있는 후배를 싫어하긴 어려운 일이었다. 누가 똥강아지 아니랄까봐 먼저 체육관으로 뛰어가는 정우성의 뒷모습을 보며 신현철은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이명헌이 이상한 놈이긴한데...”

 

 

신현철은 생각을 멈췄다. 아무리 정우성이 파헤치고싶어 하더라도 깊이 얘기해줄 필요는 없다. 신현철은 예민해진 성질을 내리 누르고 뛰어갔다.

 

 

차라리 그 때 쓸데없는 질문에 대답을 해줄 것을 그랬다. 신현철은 어린아이의 질문에 대답을 해주지 않은것을 두고두고 후회해야했다.

 

 



우성명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