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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9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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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요?
태섭이는 애써 태연하게 되물었음. 목소리가 떨리진 않았겠지. 대만이는 대답 대신 머리를 긁적였음.
둘이 자는 거...많이 불편해요?
아니 그게, 불편하진 않은데...
대만이는 먼 곳에 있는 걸 더 자세히 보려는 사람처럼 눈을 찌푸렸음. 그건 정대만이 불편한 이야기를 할때의 오랜 버릇이었고, 태섭이는 그래서 순간적으로 기억을 잃기 전의 정대만과 대화를 하는 기분이 들었음.
불편...하진 않은데, 그게...좀 그렇잖아?
태섭이는 그 다음 말을 듣고싶지 않았음. 차라리 팔다리를 쭉 펼 수 없어서 불편하다던가, 잠버릇이 고약해서 힘들다는 편이 나을 것 같았음.
시커먼 남자 둘이 한 침대에서 자는 거...좀 그렇지 않냐? 아니, 너도 뭐 좋아서 그런 건 아니니까...
태섭이는 또다시 서로의 마음이 엇갈리던 고등학교때로 돌아간 기분이었음. 이게 사실은 이 사람의 진심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음. 어영부영 휩쓸려서 결혼까지 했지만, 사실 마음 깊은 곳에서 후회하고 있는 건 아닐까? 미국에서 가져온 혼인증명서는 지금 이 나라에서는 효력 하나 없는 종이쪼가리에 불과했음.
제가...혼자선 정말 잠을 잘 못자서요. 어떻게 안 될까요? 침대를 더 큰거로 바꿔도 괜찮으니까...
태섭이는 절박했음. 무슨 행위를 하는 것도 아니지만, 같이 잠드는 것마저 없다면 이대로 정말 하우스메이트가 되어 버릴 것 같았음.
대만이는 태섭이의 눈을 피했음.
너도, 혼자 자는 연습이라도...어떻게 해봐야 하지 않겠냐...?
대만이는 어색하게 웃었음.
평생 나랑 같이 잘 수도 없잖아.

대만이는 태섭이의 얼굴을 바라보았음.
태섭이는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음. 아니, 이게 그럴 정도의 일인가? 물론 잠을 못 자는 건 큰일이지만... 대만이는 마음이 약해졌음. 하지만 이쪽도 물러설 수는 없었음. 태섭이를 위해서이기도 했음. 이대로는 며칠 내로 태섭이를 덮쳐버릴지도 몰랐음. 내 머릿속에서 너한테 무슨 일을 했는지 알면 너도 나랑 같이 잔다는 말은 안 나올텐데...대만이는 생각했음.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음. 기억을 잃은 첫날, 드레스룸에서 보았던, 태섭이의 몸에 있던 이빨자국과 키스마크들.
야, 정 그러면...나 말고, 여자친구랑 같이 자면 되지 않을까...?
태섭이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음.
...여자친구요?
그, 나 봤거든. 나 기억 잃고 깨어난 첫날에. 음...
대만이는 최대한 덜 변태적으로 말하기 위해 고민했음.
그...몸에. 뜨거운 밤을 보낸...흔적이라고 할까...
아, 뜨거운 밤이라니, 너무 아저씨같잖아. 대만이는 후회하며 말을 이었음.
난 뭐, 여자친구분 오셔도 괜찮으니까...네가 불편하면 내가 잠깐 본가 가서 자면 되고...
말을 이어가던 대만이는 깜짝 놀랐음. 태섭이의 가라앉은 눈 속에서 끔찍할 정도로 아무 감정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었음.
태섭이는 한참동안이나 가만히 있다 입을 열었음.
...없어요. 여자친구 같은 건.
태섭이는 식탁 의자에서 일어났음.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음.
제가 손님방 쓸게요. 그대로 그 방 침대 쓰시면 돼요.
태섭이는 침실로 사라졌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는 게 본인 물건을 챙기는 것 같았음. 대만이는 뭔가 큰 잘못을 저지른 느낌이었지만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어서 한동안 미간을 찌푸린 채 의자에 그대로 앉아있었음.

그런데 그건 무슨 말이었을까.
태섭이와 거실에 있기가 어색해서 침실에 들어온 대만이는 침대에 누워 생각했음. '여자친구 같은 건' 없다니... 그럼...그것만 하는 사이라는 건가? 아니면 정해진 상대는 없고 그냥 하룻밤 상대들만 있는건가? 하여튼 송태섭 까져가지고... 여자들을 꼬셔서 침대에 눕히는 송태섭을 생각하던 대만이는 어쩐지 기분이 나빠졌음. 왜이렇게 기분이 나쁘지. 내가 상대가 없어서 그런가? 음? 아닌가? 왜 없다고 생각했지?
대만이는 거실로 나가 티비를 보고있던 태섭이에게 물었음.
야. 혹시...나는...없었냐?
네?
그...여자친구라던지, 아니면 뭐 잘돼가고 있던 여자라던지...
아...
태섭이는 바로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시간을 끌었음.
...모르겠어요. 그런 얘길 잘 안했어서요.
대만이에 관한 건 모든 걸 아는 것 같았던 송태섭이 모르는 것도 있었음. 하긴. 이런 건 워낙에 개인적인 거니까 그럴수도 있을 것 같았음.
그러냐.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
아, 네...
태섭이는 침대를 따로 쓰자는 대화 이후로 눈에 띄게 축 처져 보였음. 안그래도 태섭이를 대하는 게 어색해진 참이었는데, 태섭이 쪽에서도 딱히 먼저 말을 걸어오지 않게 되자 둘 사이에는 대화가 거의 없어졌음. 대만이는 뭔가 조바심이 났음. 여전히 대하는 건 어색한데 이렇게 데면데면하게 지내는 건 또 싫었음. 본인도 어쩌고 싶은지 알 수가 없었음.
어, 우리 장이라도 보러 갈까?
아...제가 어제 인터넷으로 주문 했어요. 오늘쯤 올거에요.
그렇구나...
게임이라도 할래...?
아...지금은 별로 할 기분이 아니어서요. 죄송해요.
아니, 죄송할 건 아니지...응.
얼마 전까지만 해도 둘이서 이것저것 하고 하루종일 이야기하면서 지냈던 게 거짓말같았음. 그때 태섭이의 폰이 진동했음. 소파 위에 던져둔 폰은 대만이에게 더 가까이 있어서 화면에 뜬 글씨가 잘 보였음.

정우성

태섭이는 폰을 집어들었음. 대만이는 어쩐지 폰을 뺏어서 전화를 끊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음.
여보세요? 어? 진짜? 아ㅡ...응. 어어...아니, 안되는 건 아닌데...
태섭이는 힐끗 대만이쪽을 쳐다보았음.
응. 그럼 잠깐만 기다려.
통화를 끊은 태섭이는 드레스룸으로 향하며 이야기했음.
아, 정우성인데요. 얘가 지금 집 앞에 차 대고 있다고...잠깐이라도 얼굴 보자 그래서요.
드레스룸까지 태섭이 뒤를 졸졸 따라온 정대만은 얼굴이 찌푸려졌음. 그리고 생각했음. 그게 뭐야, 애인도 아니고.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려보내기도 그렇고...요 앞에서 잠깐 얘기만 하고 올게요. 얘가 은근 외로움 타는 애라...
정대만은 드레스룸 입구에 기대서 바닥을 보고 있었음. 외로움? 뭐야 그게, 그 녀석도 나이 먹을만큼 먹었을텐데 나잇값도 못하고. 물론 생각을 입밖으로 꺼내진 않았음.
한 삼십분, 아니, 좀 더 걸릴수도 있겠다. 그래도 너무 오래 걸리진 않을거에요.
어느새 단장을 마친 태섭이가 대만이 앞을 지나갔음. 머리를 세팅하진 않고 캡모자를 눌러썼지만 옷은 나름 깔끔하게 신경쓴 느낌이었음. 그리고 무엇보다 대만이 앞을 스칠때 은은하게 향수냄새가 났음. 아니, 사내새끼들이 만나서 삼십분씩이나 할 얘기가 있다고? 향수냄새 풍기면서? 그게 뭐야. 대만이는 이 상황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음.
태섭이는 현관에서 신발을 신었음.
금방 다녀올게요. 놀고 있어요.
강아지라도 대하는 말투였음. 대만이는 입이 댓발 나온채 배웅했음.
...다녀와라.
태섭이가 떠난 뒤 대만이는 소파에 몸을 파묻었음. 그래도 정우성 덕분에 요 근래들어 제일 길게 대화했으니 고마워해야하나. 아니 내가 왜 그새끼한테 고마워해야돼?
대만이는 벌떡 일어났음. 집 앞이라고 했지. 그럼 베란다에서 분명 보일거였음. 본인의 행동도 충분히 이상하다는걸 인식하지 못한채 대만이는 베란다쪽으로 다가갔음. 유리 너머로 정우성의 차가 작게 보였음. 정우성의 차라는걸 한번에 알 수 있었음. 너무나 삐까뻔쩍한 스포츠카였기 때문이었음. 그래, NBA라 이거지...대만이는 혀를 작게 찼음. 곧 건물 입구에서 나오는 태섭이가 보였음. 정우성도 태섭이를 발견했는지 차 밖으로 나왔음. 그리고, 주인을 만난 강아지처럼 뛰어가서...
태섭이를 껴안았음.
어?
대만이는 머리를 감쌌음. 머리가 아팠는데 그건 문제가 아니었음. 뭔가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었음. 저 장면, 본 적 있어. 기억이라기보단 어떤 공감각에 가까웠음. 아주 추웠고... 어딘가 낯선 곳에 서 있었는데...내 눈앞에서 정우성이 송태섭을 껴안았고...난 그게 무척 충격적이었어. 사과...사과가 떨어졌었는데...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뭐지? 이 느낌은?
정우성은 태섭이를 데리고 자기 차 안으로 들어갔음.
그때 또다시 떠오르는 게 있었음. 없어요. 여자친구 같은 건. 불과 몇시간 전 들었던 태섭이의 말이었음.

대만태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