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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11 23:51

 

이명헌의 살림열전








 

 

정우성이 파업했다.

 

부부 싸움이 칼로 물 베기라면, 동거하는 연인 간의 싸움은 무엇에 비유해야 할까. 적어도 두부 정도는 되는 것 같다고, 이명헌은 생각했다. 한 번 잘리니 다시 붙이기가 쉽지 않았다. 정우성과 싸운지 3주째 되는 아침이었다.

 

집안 꼴이 말이 아니었다. 평소 가사를 도맡아 하던 사람이 모든 책임을 내려놓았고, 이명헌은 살림과는 거리가 먼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가 살림을 못하게 된 데는 정우성의 공이 컸다. 명헌도 동거 초반에는 거드는 시늉은 했으나, 우성은 더 잘 하는 사람이 하면 된다며 매번 뜯어말렸다. 그렇게 함께 사는 날이 2년, 3년에 접어들면서는 시늉도 않은지 오래였다. 가사 중에서 설거지나 빨래, 청소기 돌리기 정도는 이명헌도 십여 년 간의 기숙사 및 숙소 생활 경력 덕분에 거뜬했다. 그러나 주부가 책임지는 부분이 그뿐이랴. 그 외의 것들이 문제였다. 대표적으로 일주일에 한 번 있는 분리수거나 욕실 청소, 요리 등등.

 

그래도 집안일이야 최후의 수단으로 청소업체를 부르면 될 일이었다. 더 큰 문제는 둘의 관계에 있었다. 평소 같으면 다툰지 사흘쯤 되는 아침에 정우성이 먼저 이명헌에게 화 풀라고, 또는 제가 잘못했다고 치대오며 화해의 키스나 그보다 더한 것을 하고 쫑이 나곤 했는데. 마침 닥쳐온 플레이오프 준비로 둘 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서로 다른 구단 소속인 탓에 매일 꼭두새벽 집을 나서서 각자의 훈련과 회의와 회식을 소화하고 밤늦게야 집에 돌아오는 날이 반복되었다. 덕분에 얼굴도 보기 힘들어졌고, 대화는커녕 그 어떤 교류도 쉽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나흘, 닷새, 엿새... 시간이 훌훌 지나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삼 주가 흘러 있었다. 한 침대에서 정우성과 말 한 마디 없이 잠들고 깨어나는 게 익숙하게 느껴진 어느 날. 이명헌은 퍼뜩 경각심을 느꼈다. 이래서야 룸메이트보다도 못한 관계가 아닌가.

 

그리하여 팔을 걷어붙이고 가사노동에 나서게 된 것이다. 정우성의 눈치를 보며.

 

사실 이명헌이 먼저 사과의 제스처를 건넨다면, 그러니까 팔짱을 낀다거나 아양을 떤다거나, 혹은 최소한 슬쩍 다가서는 행동 한 번만 한다면 정우성은 즉시 흐물흐물 젖은 휴지마냥 풀릴 터였다. 그리고 밀린 집안일도 휘리릭 해치우고 해피해피 동거생활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이명헌은 본래가 그랬다. 간지러운 말 한마디보다 몸으로 고생하고 환심을 사는 게 더 적성에 맞았다.

 

그래서 수행한 첫 번째 고생은 분리수거였다. 베란다에 쌓인 삼 주치 재활용품의 양에, 이명헌은 남자 단둘이 사는 집에서 쓰레기가 이렇게나 많이 나올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구단이 속한 모기업에서 내건 ESG 어쩌구 하는 슬로건이 누군가에게는 설득력 있는 상술이겠구나 싶었다.

 

"우성, 왔어? 분리수거 하고 올게."

 

그 날은 명헌이 우성보다 먼저 퇴근한 날이었다. 세 번에 걸쳐 처리하던 마지막 분량을 현관에 옮기던 중, 이명헌은 마침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우성에게 태연한 척, 분리수거의 달인인 척 인사를 건넸다. 정우성은 그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걸 보고 조금 놀라는 눈치더니 베란다를 잠깐 기웃댔다. 이명헌은 아닌 체 그의 모든 기척을 주시하다, 가사 전문가가 말없이 욕실에 들어가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왜 이렇게 긴장되냐.

 

두 번째는 욕실 청소였다. 사실 욕실 거 맨날 물 닿고 샴푸 닿는 장소이고, 심지어 둘 다 머리도 짧은 스포츠컷인데 청소할 게 뭐가 있겠냐 싶었건만. 몇 주간 아무도 청소하지 않은 욕실은 확실히 지저분했다. 두 사람 다 집에 있는 시간이 적어 자주 이용하지 않았는데도 어딘지 냄새가 났고, 짧은 머리카락과 이제는 익숙한 두 명분의 꼬부랑 체모가 콜라보를 벌여 수챗구멍을 막고 있었다. 명헌은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어깨 너머로 우성의 청소를 구경했던 기억을 살려 욕실 구석의 청소용 솔을 집어 여기저기 벅벅 문댔다. 뭐 어디까지 문지르고 닦아야 되는지 잘 몰랐지만, 어쨌든 바닥이며 벽을 다 물로 한 번은 적시고 나니 만족스러웠다.

 

청소 다 했다, 후련하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때였다. 이명헌은 어느 새 문 앞에서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는 2미터 짜리 기척에 놀라 펄쩍 뛰었다.

 

"아, 깜짝이야."

"아니... 그 정도면 됐어요, 형. 그 얘기 해 주려고."

"아, 알아. 막 끝낸 참이었다."

 

딱딱한 이명헌의 말에 정우성이 '알기는,' 이라고 중얼거리며 피식 웃었지만 이명헌은 역시나 긴장해서 듣지 못했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은 요리였다. 주말 아침이었다. 그래, 요리. 이쯤에서 짚고 넘어갈 것이 있는데, 동거를 시작하면서 정우성이 각서 형태로 내건 약속이 세 가지 있었다.

 

화목한 동거생활을 위한 각서

1항, 싸워도 잠은 무조건 한 침대에서 자기

2항, 싸워도 귀가가 늦으면 미리 연락하기

3항, 싸워도 밥은 무조건 같이 먹기

 

이럴 거면 안 싸우는 게 낫겠다는 이명헌의 말에, 정우성도 이명헌도 달게 웃었더랬다.

 

"......그 때는 절대 안 싸울 줄 알았지."

 

10년을 연애해도 결혼하고 동거하면 다 싸우게 된다는 지인들의 말에 코웃음을 쳤었다. 그런데 벌써 몇 주째 냉전이라니. 등신 천치. 멍하니 생각하던 이명헌은 냄비가 파르륵 끓자 후다닥 인덕션을 껐다. 

 

"어디 보자, 소금 아까 넣었고... 계란 잘 풀렸고."

 

완성된 음식은 계란국이었다. 자취생 1분 요리, 그런 키워드로 유튜브를 검색해서 찾은 레시피였다. 인덕션 버튼 조작도 능숙치 못해 정우성이 동거 첫날부터 냉장고에 붙여 놓은 조작법을 참고했지만 비주얼은 그럴듯해서, 내심 으쓱한 기분이 들었다. 나, 요리에 소질이 있을지도.

 

이명헌은 오늘을 기회로 여겼다. 동거 각서 2항에 의거해 어제 우성이 회식을 하고 들어온 것을 알았고, 3항에 의거해 아침을 같이 먹는 날이었다. 해장 메뉴를 차려줄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게다가, 전통적으로 협상도 소개팅도 밥상 앞에서 하라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인간은 뱃속에 밥이 들어가면 기분이 좋아지고 관대해지는 법이니. 이명헌은 직접 끓인 국으로 정우성을 감동시키고, 화기애애한 식사 분위기에서 슬쩍 사과의 한 마디를 꺼낼 계획이었다.

 

집 안에 평소와 달리 훈기가 돌았다. 몇 주만에 주방에서 화기를 쓴 덕이었다. 사람 사는 냄새라는 게 이런 건가 싶어 이명헌은 그것조차 만족스러웠다. 새벽 러닝을 가기도 전에 기상해서 준비한 보람이 있었다. 달그락, 냄비 뚜껑을 닫자 때마침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우성이 러닝을 준비하는 듯했다. 명헌도 운동복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동거 서약에는 없는 사항이었지만, 두 사람은 어쨌든 지난 두 번의 주말 운동도 이전과 다름없이 함께했다. 현관을 나서자마자 서로 180도 정반대로 등을 돌려 다른 코스로 뛰고 오긴 했지만, 어쨌든.

 

이제는 그런 행동도 참 유치하고 어색하게 느껴졌으니 오늘이야말로 종지부를 찍어야 했다. 현관에서 러닝화를 챙겨 신던 이명헌은 우성이 주방을 지나며 킁킁 냄새 맡는 소리를 들었다. 입가에 남몰래 회심의 미소가 걸렸다. 두고 봐라, 정우성. 이 남자친구가 뜨겁게 감동시켜 주마.

 

 

 

*

 

 

 

이명헌이 러닝 후 집에 돌아왔을 때, 정우성은 먼저 운동을 마치고 샤워 중이었다. 식탁 위에는 두 개의 프로틴 쉐이크 보틀이 놓여 있었다. 하나는 우성이 비운 것, 다른 하나는 그가 명헌의 몫으로 타 놓은 것이었다. 명헌은 우성의 빈 통을 싱크대에 넣으며, 그에게 간만에 받아보는 프로틴에 감동하며 통을 꿀꺽꿀꺽 비웠다. 이거, 우성이도 화해할 생각이 있는 거겠지. 명헌은 홀로 그린라이트를 느끼며 후다닥 아침을 차렸다. 양가 부모님이 보내주신 반찬을 꺼내고, 반쯤 식은 계란국을 한 번 더 데웠다. 밥은, 아 밥을 안 했네. 재빨리 햇반 두 개를 전자레인지에 돌려 그릇에 예쁘게 담았다. 나 살림 많이 늘었다. 우쭐한 명헌은 우성이 욕실에서 나오다 멈칫 발걸음을 세웠을 때, 내심 득의양양해졌다.

 

"우성, 아침."

"......형 씻고 먹지."

"아냐, 식어."

"괜찮아. 씻고 와요."

 

미묘한 데자뷰가 일었다. 아마 이러다 싸웠던 것 같은데, 3주 전에. 이명헌은 코로 한숨을 삼키다 우성이 저벅저벅 가져다 주는 속옷을 받아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또 싸우면 안 된다. 끊임없이 속을 다스리며 씻고 나오니 식탁 위가 한결 정갈했다. 같은 식기와 음식들인데도 어딘지 익숙한, 우성의 살림 솜씨가 느껴지는 상차림이었다. 그 광경을 보자 코끝이 찡해졌다. 나도 나이 들었나... 왜 이렇게 감상적이어졌지. 코를 한 번 킁, 하고 들이마시자 태블릿PC로 무언가를 들여다보며 식탁에서 기다리던 우성이 고개를 들었다. 명헌은 반사적으로 웃어주려다 황급히 입술을 굳혔다. 우성이 웃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매끈하고 냉한 얼굴을 마주보다 다른 의미로 코끝이 시큰해졌다. 그래, 저 얼굴이 웃는 걸 못 본지가... 어언 한 달이 다 되어 갔다.

 

"잘 먹을게요."

 

자리에 앉자 우성이 상냥하게 인사했다. 이명헌은 힘겹게 울대를 삼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식탁 위에 처박을 것처럼 고개를 떨구자 국그릇과 밥그릇, 그리고 가지런한 수저 한 쌍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우성이 그릇에 예쁘게도 담아 놓은 계란국과 밥에서 김이 포슬포슬 올라왔다. 그걸 보고 있자니, 새삼 지난 삼 주간 이 집에서 느낀 삭막함이 이명헌의 감성을 때렸다. 우성이 손길이 닿으면 이렇게 다정했구나. 선배, 완전 배가 불렀구나? 밥 차려주는 사람한테 절대 그러는 거 아니에요. 싸운지 일주일 차에 구단 회식에서 하소연을 했다가 들은 건방진 잔소리가 귓가에 되살아났다. 다시금 깨달았다. 우성이가 날 이렇게 사랑하는구나. 오늘 진짜,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해 줘야지.

 

소용돌이치는 먹먹한 마음에, 명헌이 숟가락을 쥐고도 차마 한 술 뜨지도 못하고 있을 때였다. 맞은편에서 우성이 후룩, 국을 뜨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푸흡! 컥- 콜록콜록."

 

3주만에 처음으로, 집 안에 큰 소리가 났다. 명헌이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우성이 숟가락을 놓고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왜, 왜 그래, 맛이 이상해?"

"형, 간 안 봤어요?"

"어? 어, 그러고 보니까......"

 

간을 안 봤다. 아니 우성이 넌 간 안 보잖아, 생각하면서 이명헌은 허둥지둥 계란국에 숟가락을 담갔다가, 그 즉시 정우성의 전 NBA 리거다운 반사신경에 저지당했다.

 

"아니, 형- 안 먹어도 돼요. 내가 다 먹을게."

 

뒤늦게 깨닫는다. 아, 맛이 존X 없구나.

 

"......그냥 해장국 배달시킬 걸 그랬나."

 

이명헌이 작아졌다. 코트 위에서는 자기보다 키가 이십 센티는 더 큰 선수들도 탱크처럼 들이받아 날리곤 하는 어깨가, 바싹 움츠러들었다. 계획 다 망했다. 그래도 지난 냉전 기간 아침인사와 잠자기 전 인사만 하던 것을 다 합쳐도 방금 섞은 대화가 더 길었으니 소득은 있었다. 그럼 이제, 어쨌든 사과를 해야겠다. 명헌이 빠르게 머리통을 굴려 합리화를 하고, 다음 스텝을 계산하는 찰나였다.

 

탁, 숟가락을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이어서 의자가 드르륵 밀렸다. 내내 조용하던 우성이 일어나더니 주방을 벗어나 침실로 들어갔다.

 

라벤더색 커플 파자마를 입은 너른 등판이 멀어지는 꼴을 멍하니 보던 이명헌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꼭두새벽같이 일어나 내내 우성과의 화해만을 생각하며 고생한 기억이 홀라당 잊혀졌다.

 

저거 지금 밥이 맛 없다고 혼자 밥상머리를 뜬 거야? 저 싸가지는 대체 어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지?

 

내가 널 그렇게 가르쳤더냐. 급기야는 흡사 아버지의 마음이 되어 분기탱천한 명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을 때였다. 우성이 침실에서 나와 다시 식탁 앞에 앉았다. 명헌은 엉거주춤 도로 의자를 끌어당겼다. ......득, 드르륵.

 

"미안해요, 형."

 

적막을 가르고 우성이 입을 뗐다. 명헌은 아직 식지 않은 머리로 입안에 맴돌던 화를 내뱉었다.

 

"말 잘했다. 너, 그게 무슨 버릇이야?"

 

그래, 내가 다 잘못했다. 솔직히 우리 왜 싸웠는지도 이젠 기억도 안 나는데, 일단 내가 먼저 사과할게. 근데 아무리 그래도 맛이 없다고 밥상머리에서 그렇게 일어나는 게 도리는 아니지 않니. 억울과 잔소리가 섞인 멘트가 줄줄 쏟아졌다. 쓸데없이 혀가 길었으니, 아마 삼 주치 설움이었을 거다. 어쨌든 할 말을 다 내뱉은 이명헌은 아직도 밥상에 차려진 계란국만 들여다보는 연인을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았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눈에서 힘을 뺐다.

 

언제부터였을까. 싸우면 네가 먼저 할 말을 늘어놓고, 나는 그걸 들어주고 받아줬는데. 기나긴 연애 도중에 그 관계가 역전된 순간이 있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너는 화를 내지 않는다. 이제사 되짚어 보니, 삼 주 전에, 다툴 때도 그랬다. 지금 명헌은, 그게 마치 사랑은 식고 배려만 남은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 끝이 다가온 걸까.

 

그 어떤 상황에서도 떠올리고 싶지 않던 최악이었다. 이명헌의 감정이 바닥을 쳤다. 지난 십오 년 간의 연애가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태평양을 끼고 연애를 하면서, 어쩔 수 없이 수많은 고비가 있었다. 육 년 전이었던가,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적도 한 번 있었다. 물론 단 하루짜리 이별이었지만.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그건 이명헌과 정우성 모두에게 단단한 양분이 되어 줬다.

 

육 년 전과 다른 점이라면, 그 땐 이명헌이 이별을 먼저 건넸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우성에게 공이 있었다. 환청처럼 휘슬이 울렸다. 팀 정우성, 오펜스! 예고 없이 휘몰아치는 감정의 속공에, 커다란 공포가 이명헌을 엄습했다. 괜히 숟가락을 움켜쥔 명헌의 손이 새하얗게 질렸다.

 

헤어지자고 하면 어떡하지? 정말, 끝내자고 하면 어떡하지? 처음 겪는 두려움이었다. 불과 두어 시간 전까지만 해도 다정했던 이 집의 공기가 시리게 피부를 감싸왔다. 상 위의 밥이며 국도 차게 식은지 오래였다. 우성은 식탁 위에 가지런히 주먹을 올린 채 제 손만 만지작댔다. 명헌은 다짐했다. 만약 헤어지자고 하면, 난 절대 싫다고 해야지. 저 손을 먼저 붙잡아야지. 오기에 가까운 생각으로 울컥 눈시울이 뜨거워질 무렵이었다. 우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결혼해요."

"난 절대 싫--, 어?"

 

헉. 나오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그제야 제대로 바라본 우성의 눈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잘생긴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되물었다. 싫어요?

 

"아니, 잠깐, 뭐라고?"

"결혼하자, 명헌이 형."
 

뭐라고? 멍청하게 같은 말만 반복하는 명헌에, 급기야 웃음소리가 흘렀다. 아하하. 달콤한 소리와 함께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우성의 주먹이 천천히 벌어지고, 작은 함이 드러났다.

 

"우리 같이 살자. 앞으로도 쭉."

 

설마. 설마. 설마, 저거. 고장난 뻐꾸기 시계처럼 같은 말만 속으로 되풀이하는 명헌을 앞에 두고, 우성이 수줍게 뚜껑을 열었다. 반짝이는 반지 한 쌍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삐익--! 이명헌의 귓가에 또 한 번 휘슬이 울렸다. 산왕 9번, 인텐셔널 파울! 파울의 당사자, 정우성이 더없이 환하게 웃었다. 파울이 지나쳤다. 그 언젠가의 흰색 4번 유니폼을 입은 이명헌은 멍하니 그 얼굴을 바라보다 심판에게 달려들었다. 이건 X발, 퇴장 감이지!

 

드륵- 쿵. 격앙된 명헌이 떠미는 힘에 식탁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명헌이 형! 괜찮아요?"

 

우성이 다급히 일어나 다가오는 명헌의 어깨를 붙잡았다. 항상 침착한 사람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눈물이 그렁그렁해서는 무딘 눈썹까지 팔자로 축 처져 있었다. 명헌은 몸에 힘이 풀려 그대로 우성에게 반쯤 안겼다. 두 눈은 여지껏 우성이 내민 반지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우성은 내심 쿡쿡 웃었다. 이 형은 맨날 나보고 비 맞은 강아지 같다더니,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싶었다. 귀엽고, 사랑스럽다. 우성은 시원하게 웃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지난 삼 년간 한 집에서 제 남자친구를 지켜본 바, 여기서 더 웃었다간 그가 토라질 것을 알았다. 대신 움츠렸던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대답 안 해줄 거예요?"

"타이밍이 이게 뭐니......"

"솔직히 나도 이렇게 하려고 한 건 아닌데...... 형이 너무 귀엽잖아요."

 

참을 수가 없었어요.

 

역시 낯간지러운 말은 정우성 전문이다. 이명헌은 몸을 배배 꼬며 연인, 이제는 피앙세가 된 우성을 꽉 껴안았다. 그보다 키가 한 뼘은 더 큰 정우성이 익숙하게 그 품에 파고들어 안겼다.

 

"미안해, 싸운 거 미안하고...... 그동안 너만 고생시켜서 미안하다. ......나 그래도 열심히 했어."

 

이명헌이 제가 가진 능력의 최대치로 간지러운 말을 입에 올렸다. 그걸 아는 정우성은 그저 오냐오냐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은근슬쩍 몸을 침실로 떠밀었는데, 이명헌은 침대에 벌러덩 눕혀질 때까지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니까 형, 대답."

"응, 결혼 해, 하자고."

 

겨우 대꾸한 명헌이 한 번 더 용기를 냈다.

 

"......고맙다."

 

수줍은 목소리에, 우성이 마침내 큰 소리로 웃었다.

 

"나도 사랑해요, 형."

 

 

 

 

 

 

 

 

 

*

 

 

 

삼 주간 밀린 몸의 대화를 나눈 뒤, 이명헌은 (계란국 전까지는) 완벽했던 살림 프로젝트의 전말을 알게 되었다.

 

"너, 내가 끓인 계란국 먹고 반지 가져왔잖아."

"응."

"무슨 생각이었어?"

"형 정말 나 아니면 안 되겠다, 싶어서요."

"......난 어째 점점 더 너를 모르겠다..."


이제 마저 알아가면 되지, 평생. 
능글맞은 소리와 함께 다시 정상위 자세를 취하는 우성을, 명헌이 버둥거리며 막아냈다. 잠깐, 잠깐만.

 

"만약 계란국이 맛있었으면?"

 

명헌의 허벅지를 놓은 우성이 아쉽게 입맛을 다시며, 손으로 옆머리를 괴고 모로 누웠다.

 

"뭐... 소금 대신에 달콤한 사랑 같은 설탕이 가득 들어간 계란국을 먹은 게, 물론 결정적인 계기이긴 했는데요."

"미안하다......"

"아니이, 원래 프로포즈 하려고 사 놓은 거니까, 언제든 청혼은 했을 거예요. 당연히."

 

열흘 뒤 날짜로 근사한 호텔 레스토랑을 통으로 빌려 놓았다는 사실은 꿀꺽 삼킨 우성이, 명헌을 바라보며 익살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형, 그 때 혼자 분리수거 했잖아요."

"응. 열심히 했지."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형 CCTV 사진 나붙었던 거 알아요?"

"......뭐?"

"분리수거장에 그냥 버리면 안 되는 게 있거든요. 근데 형이 버렸나 봐. 다시 가져가라고 공지 붙었더라고요. 아, 걱정 마요. 제가 바로 치웠어요."

"......"

"그리고 형이 욕실 청소했잖아요. 그 때 바디워시로 바닥 닦았거든요."

"......"

"덕분에 한동안 엄청 매끄럽고 향기로웠죠."

 

모든 비하인드를 전해들은 이명헌의 무표정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죽고 싶다...... 중얼거리며 몸부림치는 그를 우성이 온몸으로 결박했다. 뜨겁게 열이 오른 뺨에, 불어터진 입술에 마구 입을 맞췄다.

 

"그 때마다 진짜 이렇게, 뽀뽀해주고 싶었는데. 싸운 게 있어서 폼 잡느라 얼마나 고생했다구요."

"너한테나 그렇지, 자식아."

"나한테만 귀여우면 됐지, 또 누구한테 잘 보이게?"

"그...... 그렇긴 하지."

 

다시 그의 오금을 잡아 올리며, 우성이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그런 말도 할 줄 아느냐고, 다소 당돌하게 되물은 말에 이명헌은 순순히 긍정했다. 그는 이제 가슴팍까지 붉었다. 

 

"생각해보니까 그렇더라고...... 나 정말 너 아니면 안 될 것 같다, 우성."

 

덜컥. 예상치 못한 말에, 우성이 붙잡고 있던 오금을 세게 움켜쥐었다가 명헌의 앓는 소리를 듣고 얼른 힘을 풀었다. 왜 그래, 명헌이 어르듯 묻자 한숨과 함께 몸을 숙여 껴안는다.

 

"형한테서 그간 들은 것중에 가장 달콤한 말이에요."

"누구한테 배웠게."

"으응, 진짜. 누가 가르쳤는지 일취월장이네. 얼마나 더 늘지 무서워요."

 

명헌이 우성의 목을 마주 껴안으며 웃었다. 그 선생님한테 살림도 좀 배워야겠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건넨 말은 단호하게 우성의 입술에 먹혔다.

 

두 사람의 나이 올해로 서른 여섯, 서른 일곱. 앞으로 함께할 기나긴 여생이 얼마나 더 즐겁고, 사랑스러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기대를 담아, 우성과 명헌은 제 피앙세에게 뜨겁게 입술을 겹쳤다.

 

 

 

 

 

 

 

 

 

*

 

 

 

이후 성대하게 열린 결혼식에서 두 사람은 혼인 서약을 함께 낭독했다. 그 내용은 큰 틀에 있어서는 동거 각서와 같았는데, 대신 한 가지 조항이 추가되었다.

 

아무리 싸워도, 요리는 정우성이 하기.

 

이 부분을 읽을 때, 이명헌의 요리 실력을 아는 산왕공고 동기들이 장내에서 가장 큰 소리로 폭소했다. 명헌은 함께 시원하게 웃었다. 부끄럽지 않았다. 맛있는 집밥의 대가로 그만큼 정우성을 사랑해야 할 의무가 뒤따랐으니, 그건 이명헌이 가장 자신 있는 일이었다.

 

참, 추가 조항 외에도 기본 전제 조건이 붙었다.

 

서로가 아니면 안 된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으니, 그 마음 평생 잊지 않기.

 

 

 

 

 




 

 

 



슬램덩크 우명